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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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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은 1968년 6월 5일, 캘리포니아 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한 로버트 F. 케네디가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연설을 마친 후 암살된 사건이다. 암살범은 시르한 시르한으로, 그는 케네디의 이스라엘 지지 입장에 반감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사건 이후 시르한은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암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어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야기했다. 이 사건은 1960년대 미국의 주요 암살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다양한 음모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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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사건 개요
위치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
날짜1968년 6월 5일
시간오전 12시 15분
시간대UTC-7
유형정치적 암살, 대량 살상
목표로버트 F. 케네디
사망자1명 (케네디, 1968년 6월 6일 부상으로 사망)
부상자5명 (폴 슈레이드, 윌리엄 와이젤, 엘리자베스 에반스, 아이라 골드스타인, 어윈 스트롤)
범인서한 바샤라 서한
무기아이버 존슨 .22 LR 리볼버
평결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유죄 판결1급 살인, 살인 의도를 가진 치명적인 무기 공격 (5건)
형벌사형 (1969년); 1972년 감형되어 가석방 가능성이 있는 종신형으로 변경됨
관련 이미지
총격 직후 바닥에 쓰러진 로버트 F. 케네디. 그의 옆에는 총격 당시 케네디와 악수하고 있던 17세 버스보이 후안 로메로가 무릎을 꿇고 있다.
총격 직후 바닥에 쓰러진 로버트 F. 케네디. 그의 옆에는 총격 당시 케네디와 악수하고 있던 17세 버스보이 후안 로메로가 무릎을 꿇고 있다.

2. 사건의 배경

로버트 F. 케네디는 형인 존 F. 케네디 대통령 행정부에서 미국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시민권 운동을 지지하고 베트ナム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7][8]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과 인종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극심했던 시기에 치러졌다.[10][11]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은 민주당 내에서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의 도전을 받았고, 뉴햄프셔주 예비 선거에서 매카시가 예상 밖의 선전을 보이자[12][13] 케네디는 1968년 3월 16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14] 이후 존슨 대통령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15]

케네디의 출마 선언 이후, 4월 4일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되어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11], 이는 킹 암살 폭동으로 이어졌다. 케네디는 인디애나폴리스 유세에서 분열과 증오 대신 통합과 연민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해 국민적 단합을 강조했다. 이후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경선에 뛰어들면서[16] 민주당 경선은 케네디, 매카시, 험프리 간의 치열한 경쟁 구도로 전개되었다. 케네디는 여러 예비 선거에서 승리하며 지지세를 확장해 나갔으나, 암살 직전에는 대의원 확보 경쟁에서 험프리에게 다소 뒤처진 상황이었다.[17]

2. 1. 정치 경력

로버트 F. 케네디는 1925년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7] 1948년, 22세의 나이로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보스턴 포스트''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여섯 편의 기사를 썼다.[7] 그는 이 방문을 통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공감을 느꼈으며,[7] 유대 국가가 공산주의화될 가능성을 "터무니없이 불합리하다"고 일축하고, 이를 "근동 및 중동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안정 요인"으로 평가했다.

1960년 형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로버트 케네디는 1961년 1월 미국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9] 그는 형의 최측근으로서 케네디 행정부의 주요 결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사실상의 비서실장, 대통령 특사,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위기 해결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1963년 11월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로버트 케네디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은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주요 케네디 행정부 인사들을 유임시켰다.

1964년, 일부 민주당원들은 케네디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슨의 러닝메이트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는 대신 1964년 9월 3일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 출마를 선택했다.[9] 그는 현직 공화당 상원의원 케네스 키팅에게 도전하여 승리했고, 1965년 1월 3일부터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9] 선거 유세 중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으며,[8] 상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시민권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국면은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과 도시 폭동 등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던 시기였다.[10][11] 민주당 내에서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재선 도전에 반대하는 존슨 퇴출 운동이 일어났고, 앨라드 K. 로웬스타인은 케네디에게 출마를 권유했으나 그는 당 분열을 우려해 처음에는 거절했다. 이후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반전 운동의 기수로 부상하여 예비 선거에 참여했다. 1968년 1월 구정 공세는 전쟁 승리에 대한 기대를 꺾고 민주당 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3월 12일, 뉴햄프셔 주 예비 선거에서 매카시가 예상 밖의 선전을 펼치자(존슨 49%, 매카시 42%),[12][13] 케네디는 4일 뒤인 3월 16일, 존슨으로는 본선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14]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15]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는 케네디의 흑백 사진
196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유세하는 케네디


4월 4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당하며 미국 전역에서 폭동이 확산되었다. 같은 날 케네디는 인디애나폴리스 유세 현장에서 연설을 통해 분열과 증오 대신 사랑과 지혜, 연민, 정의를 호소하며 사회 통합을 강조했다.

"우리가 미국에서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필요한 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필요한 것은 폭력과 무법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지혜, 연민이며, 우리 나라 안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 백인이든 흑인이든 간에 그들에 대한 정의의 감정입니다. ... 그리스인들이 아주 오래 전에 쓴 것처럼,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부드럽게 만들도록 합시다. 그것에 헌신하고 우리 나라와 우리 국민을 위해 기도합시다."

4월에는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16] 험프리는 예비 선거보다는 당 대의원 확보에 주력했으며, 케네디와 달리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확한 반대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케네디 암살 직전 캘리포니아 주 예비 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험프리는 561명의 대의원을 확보하여 393명의 케네디보다 앞서 있었다.[17]

2. 2.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은 미국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10]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었고, 주요 도시에서는 폭동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불안이 심화되고 있었다.[11]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주당 내에서는 현직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재선 도전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주당 정치인 앨라드 K. 로웬스타인은 존슨의 재지명을 막기 위해 "존슨 퇴출 운동"을 조직하고, 로버트 F.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대신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민주당 분열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미네소타주 출신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반전 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존슨에게 도전하며 여러 주의 예비 선거에 참여했다.[12] 1968년 1월 말,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는 미국 내 전쟁 종결에 대한 희망을 꺾고 민주당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2일 뉴햄프셔주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매카시는 존슨 대통령(49%)에 근접하는 4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예상 밖의 선전을 펼쳤다.[12][13] 이 결과는 존슨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었고, 케네디는 나흘 뒤인 3월 16일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14] 결국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재선 도전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했다.[15]

그러나 선거 운동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존슨의 불출마 선언 4일 후인 4월 4일, 시민권 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더 큰 규모의 킹 암살 폭동을 촉발했다. 같은 날, 케네디는 인디애나폴리스 유세 현장에서 암살 소식을 접하고 연설을 통해 국민적 통합과 비폭력을 호소했다.

> 우리가 미국에서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필요한 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필요한 것은 폭력과 무법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지혜, 연민이며, 우리나라 안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 백인이든 흑인이든 간에 그들에 대한 정의의 감정입니다. ... 그리스인들이 아주 오래 전에 쓴 것처럼,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부드럽게 만들도록 합시다. 그것에 헌신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위해 기도합시다.

한편, 4월 27일에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험프리는 존슨 행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 입장을 유지했고, 예비 선거보다는 당 간부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코커스 전략에 집중했다.[16] 케네디 암살 직전인 캘리포니아 예비 선거 종료 시점에서 험프리는 561명의 대의원을 확보하여 393명을 확보한 케네디보다 앞서 있었다.[17]

3. 암살

1968년 6월 4일 캘리포니아주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승리한 로버트 F. 케네디는 다음 날인 6월 5일 새벽 0시 10분경(태평양 표준시), 로스앤젤레스의 앰배서더 호텔 엠버시 룸에서 지지자들에게 승리 연설을 했다.[20] 연설을 마치고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호텔 주방 복도를 지나던 중,[24] 24세의 팔레스타인계 남성 시르한 시르한이 쏜 .22구경 리볼버에 총격을 당했다.[27][61] 케네디는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총격 과정에서 케네디 외 5명이 부상을 입었다.[28] 시르한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61] 케네디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수술을 받았으나, 총격 사건 발생 약 26시간 후인 6월 6일 새벽 1시 44분에 사망했다.[39]

3. 1. 캘리포니아 예비 선거



1968년 6월 4일 화요일, 캘리포니아주 대통령 예비 선거가 실시되었다.[18]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가장 많은 대의원 수를 가진 주였기에, 이 예비 선거 결과는 이후 경선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선거였다.[18] CBS의 출구 조사 결과 케네디가 유진 매카시를 7%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 개표 결과, 케네디는 46%, 매카시는 42%를 득표하여 케네디가 승리했다. 같은 날 치러진 사우스다코타주 예비 선거에서도 케네디는 약 50%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작가 조셉 팔레르모는 이 승리를 케네디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 승리로 케네디는 총 393.5명의 대의원을 확보하며, 561.5명의 대의원을 확보한 휴버트 험프리에 이어 2위 자리를 굳혔다.

앰배서더 호텔 엠버시 룸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케네디


다음 날인 6월 5일 새벽 0시 10분경(태평양 표준시), 케네디는 로스앤젤레스 미드윌셔 지역에 위치한 앰배서더 호텔의 엠버시 룸(Embassy Room)에서 지지자들에게 승리 연설을 했다.[20] 당시 정부는 대통령 후보에게 비밀 경호국의 경호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21] 케네디의 경호는 전 FBI 요원 윌리엄 배리(William Barry)와 비공식 경호원인 올림픽 10종 경기 금메달리스트 레이퍼 존슨(Rafer Johnson), 전 미식축구 선수 로지 그리어(Rosey Grier)가 전부였다.[21] 케네디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대중과의 접촉을 반겼고, 흥분한 지지자들이 그에게 다가가 만지려 하는 경우가 잦았다.[22]

연설 말미에 케네디는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이제 시카고로 가서 그곳에서 승리합시다."라고 말했다. 케네디는 연설 후 볼룸을 통해 다른 지지자 모임 장소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23] 기자들의 기자 회견 요청이 있었다. 선거 운동 보좌관 프레드 더튼(Fred Dutton)은 두 번째 모임을 취소하고, 대신 볼룸 뒤 호텔 주방과 식료품 저장실을 통해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케네디가 연설을 마치고 볼룸을 통해 나가려 하자, 배리가 "안 됩니다, 경로가 변경되었습니다.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라며 막아섰다.[24] 배리와 더튼은 케네디가 스윙 도어를 통해 왼쪽 주방 복도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려 했으나, 몰려든 인파에 막혔다. 결국 케네디는 호텔 지배인 칼 유커(Karl Uecker)를 따라 뒷문으로 향했다.[24] 유커는 케네디의 오른손목을 잡고 주방으로 안내했지만, 케네디가 마주치는 사람들과 악수하느라 자주 손을 놓아야 했다.[26] 유커와 케네디는 제빙기와 스팀 테이블이 놓여 좁아진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26]

3. 2. 총격 사건

1968년 6월 4일 캘리포니아주 미국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승리한 로버트 F. 케네디는 다음 날인 6월 5일 새벽 0시 10분경(PDT), 로스앤젤레스 미드윌셔 지구의 앰배서더 호텔 엠버시 룸에서 지지자들에게 승리 연설을 했다.[20]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는 비밀 경호국의 경호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21], 케네디의 경호는 전 FBI 요원 윌리엄 배리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이퍼 존슨, 전직 미식축구 선수 로지 그리어 등 소수의 인원이 담당했다.[21]

연설을 마친 케네디는 호텔 내 다른 지지자 모임으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기자들의 요청으로 기자회견장으로 경로를 변경하게 되었다.[24] 선거 운동 보좌관 프레드 더튼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엠버시 룸 뒤편의 호텔 주방과 식료품 저장실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했다.[24] 케네디는 호텔 지배인 칼 오이커의 안내를 받으며 주방 복도로 들어섰다.[24][25] 복도는 얼음 제조기와 스팀 테이블 등으로 좁았으며, 케네디는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이동했다.[26]

케네디가 호텔 직원인 17세 버스 보이 후안 로메로와 악수하기 위해 잠시 멈춰 왼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18][26], 시르한 시르한이 근처의 트레이 쌓는 곳에서 뛰쳐나와 케네디를 향해 .22 롱 라이플 구경 아이버 존슨 카데트 55-A 리볼버를 8발 발사했다.[27][61] 케네디는 바닥에 쓰러졌고, 현장은 즉시 혼란에 휩싸였다.

주변에 있던 레이퍼 존슨, 로지 그리어, 작가 조지 플림턴 등 여러 사람이 시르한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려 했다.[28][61] 시르한은 저항하며 총을 계속 난사했고, 이 과정에서 ABC 뉴스의 윌리엄 와이젤, 전미 자동차 노동조합의 폴 슈레이드, 민주당 활동가 엘리자베스 에반스, 콘티넨탈 뉴스 서비스의 아이라 골드스타인, 케네디 선거 운동 자원봉사자 어윈 스트롤 등 5명이 추가로 총에 맞았다.[28] 약 1분간의 격렬한 몸싸움 끝에 시르한은 완전히 제압되었고, 레이퍼 존슨이 그의 리볼버를 빼앗았다.[61][29]

체포된 후의 시르한 시르한


윌리엄 배리는 쓰러진 케네디에게 다가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머리 밑에 받쳤다.[29] 후안 로메로는 케네디의 머리를 받치고 그의 손에 묵주를 쥐여주었다.[30] 케네디는 로메로에게 "모두 괜찮아?"라고 물었고, 로메로가 "네, 모두 괜찮습니다"라고 답하자 케네디는 고개를 돌리며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했다.[31] 이 장면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사진기자 보리스 야로 등에 의해 촬영되어 사건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32][33][34]

임신 3개월째였던 케네디의 부인 에델 케네디는 총격 현장에는 없었으나[31], 곧바로 남편에게 달려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케네디는 아내를 알아본 듯 고개를 돌렸다.[35] 몇 분 후 의료진이 도착하여 케네디를 들것에 실으려 하자, 그는 Don't lift me|나를 들지 마세요영어라고 속삭였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36][37] 케네디는 곧 의식을 잃었다.[38]

케네디는 즉시 인근의 센트럴 리시빙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상태가 위중했다. 심장 박동이 잠시 회복되자 의사들은 에델에게 청진기를 주어 남편의 심장 소리를 듣게 했다.[31] 약 30분 후, 케네디는 보다 큰 병원인 굿 사마리탄 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6월 5일 오전 3시 12분에 시작되어 3시간 40분 동안 이어졌다.[40]

총격 사건 당시 ABC 뉴스는 선거 방송을 막 종료하려던 참이었고, CBS는 이미 방송을 마친 상태였다.[65] CBS는 사건 발생 21분 만에 방송을 재개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총격이 발생한 주방으로 몰려들어 음성과 영상을 기록했다.[28] ABC는 주방 내부의 모습을 흑백으로 생중계했으며[66], CBS와 NBC는 컬러 영상을 촬영했으나 사건 발생 약 2시간 후에야 방송할 수 있었다.[65] 로스앤젤레스의 라디오 방송국 KRKD는 총격 직후의 혼란스러운 현장 상황과 시르한이 제압되는 과정의 소리를 녹음하여 방송했다.[67]

케네디는 총 3발의 총상을 입었다. 치명상은 오른쪽 귀 뒤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발사된 총알로, 두개골을 관통해 뇌 속에서 파편화되었다.[42][43] 다른 두 발은 오른쪽 겨드랑이 뒤쪽으로 들어가 각각 등과 목 부분에 박혔다.[44]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케네디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총격 사건 발생 약 26시간 후인 6월 6일 오전 1시 44분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39] 케네디 캠프의 대변인 프랭크 맨키위츠는 오전 2시경, 병원 근처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기자회견장에서 케네디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45]

3. 3. 사망

로버트 F. 케네디는 총격 직후 의식을 잃었다. 들것에 실려가면서 "나를 들지 마세요"라고 속삭인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28] 그는 즉시 인근의 중앙 응급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의사들은 심장 박동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심장 박동이 확인된 후, 에델 케네디는 청진기를 통해 남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약 30분 후, 케네디는 더 나은 수술 시설을 갖춘 굿 사마리탄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근처 체육관에는 임시 언론 센터가 마련되었다. 수술은 6월 5일 오전 3시 12분에 시작되어 약 3시간 40분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같은 날 오후 5시 30분 대변인 프랭크 맨키위츠는 케네디가 여전히 위독한 상태이며 의사들이 그의 상태 호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케네디는 여러 발의 총상을 입었다. 치명상은 오른쪽 귀 뒤에서 약 약 2.54cm 거리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한 것이었다. 다른 두 발의 총알은 오른쪽 겨드랑이 뒤쪽에 맞았는데, 한 발은 가슴으로 관통했고 다른 한 발은 목 뒤쪽에 박혔다. 뇌에서 총알과 뼛조각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신경외과 수술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총격 후 약 26시간 만인 6월 6일 오전 1시 44분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프랭크 맨키위츠는 병원을 나와 임시 언론 센터가 마련된 체육관으로 이동하여, 6월 6일 오전 2시에 케네디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 일주일 동안 NBC는 55시간, ABC는 43시간, CBS는 42시간 동안 총격 사건과 그 여파를 보도했으며, 세 방송사 모두 정규 방송과 광고를 중단하고 관련 소식을 전했다.[65]

4. 암살범: 시르한 시르한



시르한 시르한은 1944년 3월 19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요르단 국적의 아랍 기독교인이다.[46][47] 그는 네 살 때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 중 폭탄 폭발에서 아버지와 함께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작가 멜 에이튼에 따르면 이 사건은 어린 시르한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신체적 학대, 형의 사망 등 폭력적인 사건들을 겪었다. 1956년 말, 시르한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지만, 미국 생활에 불만을 품고 "미국은 아랍에 반대하고 이스라엘과 친하며, 나의 적의 친구는 나의 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그는 평균 이상의 성적을 받았고 장교후보생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십대 후반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누나가 사망했으며, 두 형제가 체포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파사데나 시립 칼리지에서 퇴학당했다. 시르한은 강력한 반 시온주의와 친 팔레스타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46][47] 1966년 기수 경력을 쌓던 중 말에서 떨어져 경미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의 친구는 이 사건 이후 시르한이 "성급하고, 신경질적이며, 감정적이고 항상 서둘렀다"고 말했다.

시르한의 범행 동기는 케네디의 이스라엘 지지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여겨진다. 경찰은 체포 당시 그의 주머니에서 케네디의 이스라엘 지지에 관한 신문 기사를 발견했으며, 시르한은 재판에서 이를 알게 된 후 케네디를 증오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52][53] 1989년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는 "로버트 케네디와 나의 연결은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 50대의 폭격기를 보내 팔레스타인인을 괴롭히려 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다.[54] 그의 집에서 발견된 일기에는 "RFK(로버트 F. 케네디)를 살해할 결심이 날마다 굳건해지고 있다. RFK는 죽어야 한다. RFK는 살해당해야 한다. 로버트 F. 케네디는 68년 6월 5일까지 암살되어야 한다"[48]고 적혀 있었다. 암살 날짜인 6월 5일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6일 전쟁(제3차 중동 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로, 정치적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49][50][51]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중동 분쟁에서 비롯된 미국 내 정치적 폭력의 첫 중대 사건으로 간주하지만,[55] 그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간과한 단순한 해석이라는 비판도 있다.[56]

윌리엄 F. 페퍼의 사진 초상화
시르한의 변호사 윌리엄 F. 페퍼


재판 과정에서 시르한의 변호인단은 제한 책임 능력을 주장하려 했으나,[46][57] 시르한 자신은 범행을 자백하고 유죄를 인정하려 했다. 그는 '20년간 품어온 살의(en)'를 가지고 케네디를 살해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으나, 재판부는 이 자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증언은 후에 철회되었다.[57][58] 시르한은 1969년 4월 17일 1급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59] 그러나 1972년 캘리포니아 대법원이 ''캘리포니아 대 앤더슨'' 판결을 통해 사형 제도를 위헌으로 결정하면서, 그의 형량은 가석방 가능성이 있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60][61][62] 1975년 가석방이 결정되어 1984년에 석방될 예정이었으나, 1982년 교도소 내에서 살해 위협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가석방 날짜가 취소되었다. 그는 2023년까지 총 17번의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으며,[63] 현재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리처드 J. 도노반 교정 시설에 수감되어 있다.[64] 그의 변호사 윌리엄 F. 페퍼 등은 시르한이 누명을 썼으며 범행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2021년 8월, 캘리포니아 주 가석방 위원회는 시르한의 가석방을 권고했다. 이에 대해 케네디의 아들인 로버트 주니어더글러스는 지지 의사를 밝혔으나, 다른 6명의 자녀는 반대했다. 2022년 1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시르한이 지역 사회로 안전하게 석방되기 위해 필요한 책임감과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다"며 가석방을 최종 거부했다.

케네디 암살 사건에는 두 번째 총격범이 있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케네디의 상처 위치(오른쪽 귀 뒤, 근접 발사)는 총격범이 뒤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일부 목격자들은 시르한이 케네디의 앞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52][53]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수석 검시관이었던 토마스 노구치는 치명상이 약 약 2.54cm에서 약 7.62cm 거리에서 발사되었다고 밝히며 두 번째 총격범의 가능성을 지지했다.[52][53] 반면 다른 목격자들은 케네디가 동쪽에서 접근하는 시르한과 악수하기 위해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1975년 사건 재검토 당시 전문가들은 두 번째 총격범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가 거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2004년, 폴란드 저널리스트 스타니스와프 프로쉬진스키가 녹음한 당시 현장 오디오 테이프가 발견되면서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음향 전문가 필립 반 프라그는 이 테이프를 분석하여 시르한의 총(8발)보다 많은 13발의 총성을 확인했으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총성 간 간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음향 전문가 웨스 둘리와 폴 페가스 역시 최소 10발의 총성과 중첩된 총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8발 이상의 총성을 찾을 수 없었으며, 녹음된 소음 충격을 총성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암살 당시 총에 맞았던 폴 슈레이드는 2016년 시르한의 가석방 심리에서 두 번째 총격범이 치명상을 입혔으며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이 관련 증거를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2023년에는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인터뷰에서 당시 경비원이었던 유진 테인 세자르[1]를 아버지 뒤에서 4발의 총을 쏜 사람으로 지목했는데, 그 중 한 발이 케네디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시르한은 주의를 돌리는 사람이고, 진짜 총격범은 아버지 뒤에 있었다."[2] 케네디 주니어는 또한 노구치의 부검 결과(뒤에서 발사된 4발의 접촉 상처)를 인용하며, 세자르가 아버지와 함께 주방으로 걸어갈 때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있었다고 덧붙였다.[3]

한편, 영화 제작자 셰인 오설리반은 2006년 BBC 뉴스나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암살 현장에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현장 사진과 영상 속 인물들이 전직 CIA 고위 요원인 데이비드 모랄레스, 고든 캠벨, 조지 조아니데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랄레스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그가 오설리반이 주장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며, 이후 암살 연구가들에 의해 캠벨이 케네디 암살 6년 전인 1962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오설리반은 영상 속 남자가 캠벨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을 수 있다고 해명했다.

5. 재판 및 수감



시르한 시르한은 1969년 4월 로버트 F. 케네디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72년, 캘리포니아 대법원이 ''캘리포니아 대 앤더슨'' 판결을 통해 1972년 이전에 내려진 모든 사형 선고를 위헌으로 결정하면서, 그의 형량은 가석방 가능성이 있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975년에는 시르한이 1984년에 가석방될 것으로 결정되었으나, 1982년 캘리포니아 교도소 위원회는 시르한이 감옥에서 살해 위협을 한 것을 이유로 가석방 날짜를 취소했다. 1989년, 시르한은 감옥에서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케네디를 살해한 동기가 "[케네디의] 이스라엘 지지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50대의 폭격기를 이스라엘로 보내려 한 시도"였다고 밝혔다.

재판 과정에서 시르한의 변호인들은 심신 미약을 주장하려 했으나, 시르한 자신은 범행을 자백하고 여러 차례 유죄를 인정하려 했다. 그는 케네디를 "20년의 악의를 가지고" 살해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시르한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의 변호사들은 그가 누명을 썼다고 주장해왔다.

2012년 2월, 시르한의 변호사 윌리엄 F. 페퍼와 로리 두섹은 로스앤젤레스 지방 법원에 케네디를 살해한 총알은 다른 사람이 쏜 것이라고 주장하는 법정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는 2010년 10월부터 인신 보호 영장 청구를 통해 제기된 네 번째 주장이었다. 하지만 2015년, 베벌리 리드 오코넬 판사는 이 청원을 기각했다. 2016년 가석방 심리에서는 암살 당시 총에 맞았던 폴 슈레이드가 증인으로 나서 케네디에게 치명상을 입힌 총알은 다른 총격범이 쏜 것이며,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이 증거를 파괴하고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2021년 8월, 캘리포니아주 가석방 위원회는 시르한의 가석방을 권고했다. 이 결정에 대해 케네디의 아들인 로버트 주니어더글러스는 지지 의사를 밝혔으나, 다른 6명의 자녀들은 반대했다. 결국 2022년 1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시르한이 지역 사회로의 안전한 석방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책임감과 통찰력을 개발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가석방을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2023년 기준으로 시르한은 총 17번의 가석방 신청이 거부된 상태이다.

6. 음모론

형인 존 F. 케네디의 암살과 마찬가지로,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둘러싸고도 다양한 음모론이 존재한다. 여러 인물들이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70] 대표적인 음모론으로는 중앙정보국(CIA)의 개입 가능성을 다루는 주장과, 시르한 시르한 외에 제2의 총격범이 있었다는 가설 등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역시 시르한의 단독 범행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그는 2017년 12월, 시르한과의 면회 및 서한을 통해 "당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71]

6. 1. CIA 개입설

2006년 11월, BBC의 ''뉴스나이트'' 프로그램은 영화 제작자 셰인 오설리반의 연구를 발표했는데, 암살 당일 밤 여러 명의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암살 당일 밤의 영화와 사진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전직 동료와 동료들에 의해 1963년 마이애미에 위치한 CIA의 반 카스트로 기지인 JMWAVE에서 함께 일했던 전직 CIA 고위 요원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JMWAVE 작전 책임자 데이비드 모랄레스, 해상 작전 책임자 고든 캠벨, 심리전 작전 책임자 조지 조아니데스였다. 오설리번은 CIA가 미국 내 활동을 관할하지 않으므로, 이들 요원이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모랄레스의 전 변호사 로버트 월튼은 모랄레스가 생전에 "그 젠장할 놈(존 F. 케네디)을 해치울 때 나는 댈러스에 있었고, 그 망할 놈(로버트 F. 케네디)을 해치울 때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I was in Dallas when we got the son of a bitch and I was in Los Angeles when we got the little bastard.eng)"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모랄레스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오설리반이 사진 속 인물로 지목한 사람이 모랄레스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또한 오설리반의 책 출판 이후, 암살 연구가 제퍼슨 몰리와 데이비드 탤벗은 사진 속 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된 고든 캠벨이 실제로는 케네디 암살 6년 전인 1962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대해 오설리반은 사진 속 남자가 캠벨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오설리반은 이후 추가 조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RFK Must Die''를 제작했다.

6. 2. 제2의 총격범 가설

케네디의 총상 위치는 범인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지만, 일부 목격자들은 시르한이 케네디의 정면에 있었다고 증언했다.[75] 이러한 증언과 실제 총상 위치의 불일치는 제2의 총격범이 치명상을 입혔을 수 있다는 가설로 이어졌다. 이 가능성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수석 검시관이었던 토마스 노구치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76] 노구치는 부검 결과, 치명적인 총알이 케네디의 오른쪽 귀 뒤에서 약 약 2.54cm에서 약 7.62cm 거리에서 발사되었다고 밝혔다.[76] 하지만 다른 목격자들은 시르한이 동쪽에서 접근하자 케네디가 악수를 하기 위해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77]

1975년, 사건 재검토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제2의 총격범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이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결론지었다.[77]

그러나 이후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제기되었다. 2004년, CNN의 브래드 존슨은 폴란드 저널리스트 스타니스와프 프로쉬진스키(Stanisław Pruszyński)가 녹음한 테이프를 발견했다. 음향 전문가 필립 반 프라그(Philip van Praag)는 이 테이프를 분석하여, 시르한의 총기(.22구경 아이버-존슨 권총)가 8발만 장전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총 13발의 총성이 녹음되었다고 주장했다.[75] 또한, 반 프라그는 녹음된 총성 간 간격 중 최소 두 번은 시르한의 총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짧았다고 덧붙였다.[75] 법의학 음향 전문가 웨스 둘리(Wes Dooley)와 폴 페가스(Paul Pegas) 역시 해당 테이프에서 최소 10발의 총성과 중첩된 총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79] 반면, 다른 음향 전문가들은 테이프에서 8발 이상의 총성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반박했으며[80], 비평가들은 반 프라그가 녹음된 소음 충격을 총성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75]

2008년, 암살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존 필저는 제2의 총격범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자신의 믿음을 밝혔다.[78] 또한, 2016년 시르한의 가석방 심리에서는 암살 당시 총격을 받고 부상당했던 폴 슈레이드(Paul Schrade)가 케네디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다른 총격범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이 증거를 파괴하고 시르한의 무죄를 입증할 탄도 증거 및 제2의 총격범 존재 증거를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2023년,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팟캐스트 ''클럽 랜덤(Club Random)''에 출연하여 시르한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경호원이었던 유진 테인 세자르(Eugene Thane Cesar)[1]가 아버지 뒤에서 총을 쏘았으며, 그중 한 발이 치명상이었다고 지목했다. 그는 "시르한은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인물이었고, 진짜 총격범은 아버지 뒤에 있었다"고 말했다.[2] 케네디 주니어는 노구치의 부검 결과를 인용하며 아버지가 등 뒤에서 발사된 4발의 총상을 입었다고 언급하고, 세자르가 경호 경로에 없던 주방으로 아버지를 안내하며 팔을 잡고 있었다고 덧붙였다.[3]

7. 사건의 여파 및 영향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주요 언론들은 즉각적으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 총격 사건 발생 당시 ABC와 CBS 등 주요 방송사들은 긴급히 보도를 재개했으며,[65]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ABC 기자가 들것에 실린 채 현장을 전하기도 했다.[65] 케네디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호텔 주방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잠시 생중계되었고,[66] 이후 각 방송사들은 사건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65] 케네디가 사망한 후 일주일 동안 주요 방송사들은 정규 방송과 광고를 중단하고 관련 소식을 집중적으로 전했다.[65]

케네디의 사망은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민주당 내 유력 주자였으나,[93] 그의 부재 속에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격렬한 반전 시위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하며 당내 분열상이 드러났다. 본선거에서 험프리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에게 패배했다.[97]

케네디 암살 사건 이후, 미국 의회비밀경호국의 임무를 변경하여 주요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에 대한 경호를 의무화하는 조치를 취했다.[90] 이 사건은 형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암살에 이어 또다시 발생한 정치 지도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당시 베트남 전쟁과 인종 갈등 등으로 혼란을 겪던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다.

7. 1. 장례식

로버트 F. 케네디의 묘. 십자가와 몇 송이의 꽃이 보인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케네디의 묘


케네디 상원의원의 시신은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United States of America"가 새겨진 제트기로 뉴욕으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성 패트릭 대성당에 안치되었고, 장례 미사가 거행된 6월 8일까지 약 15만 명의 조문객이 방문하여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82][83]

6월 8일 아침에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케네디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추도사를 낭독했다.[84]

> "나의 형은 죽음으로써 생전보다 이상화되거나 확대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주십시오. 잘못된 것을 보고 바로잡으려 했고, 고통을 보고 치유하려 했으며, 전쟁을 보고 멈추려 했습니다. 그를 사랑했고 오늘 그를 안식으로 인도하는 우리들은, 그가 우리에게 그랬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랐던 것이 언젠가 온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이 나라의 많은 곳에서 그와 접촉했고 그에게 접촉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여러 번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왜?'라고 말합니다. 나는 아직 없는 것을 꿈꾸며 '왜 안 돼?'라고 말합니다.'"[85]

미사 후 케네디의 시신은 기차로 워싱턴 D.C.로 운송되었으며, 수많은 조문객이 철로변과 역에 모여들어 경의를 표했다.[86] 장례 행렬은 묘지로 가는 길에 빈민 행진의 일환으로 건설된 슬럼가인 부활 도시(Resurrection City)를 통과했다.[87] 행렬이 링컨 기념관 앞에서 잠시 멈추자, 부활 도시의 주민들이 합류하여 "공화국 찬가"를 불렀다.[88][89]

케네디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형 의 묘 근처에 안장되었다.[82][86]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야간에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암살 이후, 미국 의회비밀경호국의 임무를 변경하여 주요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에 대한 보호를 포함하도록 했다.[90]

7. 2. 정치적 영향

케네디가 암살될 당시, 그는 민주당 전당대회 대의원 확보 경쟁에서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에게 뒤처져 있었다.[92] 하지만 캘리포니아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최종적으로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했을 것이라고 믿는 시각도 많다.[93] 당시에는 예비선거가 13개 주에서만 치러졌기 때문에, 후보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전당대회 표심이 지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 등은 케네디가 살아 있었다면 그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지명을 획득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94]

그러나 현직 대통령에게 도전했던 케네디의 행보를 문제 삼는 당내 유력자들이 그의 지명을 막으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당시 정치 구조상 유력자들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케네디가 지명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95] 역사가 마이클 베슈로스 역시 케네디가 지명을 얻지 못했을 것으로 보았다.[96]

결과적으로 휴버트 험프리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격렬한 반전 시위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본선거에서 험프리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군 완전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리처드 닉슨에게 일반 투표에서 0.7%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97]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닉슨이 301표, 험프리가 191표를 얻어 닉슨의 승리가 더욱 명확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중요한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의회시크릿 서비스의 임무를 변경하여 주요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에 대한 경호를 의무화했다.

7. 3. 사회적 영향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은 형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암살에 이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는 당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인종 갈등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 사회의 불안을 더욱 증폭시켰다.

암살범 서한 비샤라 서한은 팔레스타인인 이민자로[6], 그의 범행은 중동 문제가 미국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경호 시스템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암살 이후 미국 의회는 시크릿 서비스의 임무를 변경하여 주요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에 대한 경호를 포함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케네디의 죽음은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구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케네디는 캘리포니아주 예비 선거 승리로 민주당 후보 지명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으나, 그의 부재 속에 휴버트 H. 험프리 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험프리는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격렬한 반전 시위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하며 민주당 내 분열상을 드러냈다. 본선거에서 험프리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형 존의 암살과 마찬가지로 로버트의 죽음을 둘러싸고도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미국 역사상 현직 미국 상원 의원이 암살된 사례는 케네디와 휴이 롱 두 명뿐이다.

사건 발생 직후 언론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주요 방송사들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암살 사건과 그 여파를 집중 보도했다. NBC는 55시간, ABC는 43시간, CBS는 42시간 동안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65]。 특히 총격 직후의 혼란스러운 현장 상황과 케네디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고 보도되었다[28][66][67]

7. 4. 관련 자료

케네디 암살 사건의 수사 관련 자료는 캘리포니아 주립 기록 보관소나[105] 매사추세츠 대학교 다트머스교 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106]

사건 현장이었던 앰배서더 호텔은 2001년 로스앤젤레스 통합 교육구(LAUSD)가 학교 건설 부지로 권리를 취득했다.[98] 20년 이상 호텔 철거에 반대하는 보존 운동이 있었지만,[99] 2005년부터 철거가 시작되어 2006년 1월에는 나이트클럽 "코코넛 그로브"만 남게 되었다.[100] 이 부지에는 로버트 F. 케네디 커뮤니티 스쿨이 세워졌고, 코코넛 그로브는 학교의 홀로 사용되고 있다.[101] 당초 케네디 암살 현장인 식료품 저장실을 학교나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으나, 케네디가는 철거를 원했다. LAUSD 위원장이자 전 주 최고 재판소 판사였던 크루즈 레이노소는 "우리는 죽음을 기념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 특히 그의 이상을 기념하고 싶었다(We didn't want to celebrate the death. We wanted to celebrate his life, particularly his ideals영어)"라고 말하며 철거 결정을 지지했다.[102] 식료품 저장실은 철거되었지만, 이후 일부 비품 등은 보존되었다.[103][104]

2010년에는 암살 당시 케네디의 피가 묻은 의류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공개되어 논란이 일었으며, 아들 맥스웰 테일러 케네디가 이에 항의했다.[107] 서한 체포 시 사용된 수갑은 2012년 미국 국립 법 집행 박물관(National Law Enforcement Museum영어)에 기증되었다.[108]

참조

[1] 뉴스 Thane Eugene Cesar: 5 Fast Facts You Need to Know https://heavy.com/ne[...] 2023-10-01
[2] 뉴스 Robert F. Kennedy Jr. on Civil {{as written|Disobediance}}, Strange Camping Trips, and Why He's Running for President https://www.mensjour[...]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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