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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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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 유대인은 루마니아 영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며, 로마 제국 시대부터 존재가 확인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헝가리, 폴란드 등지에서 유대인들이 피난처로 삼았고,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차별과 박해를 겪었다. 19세기에는 유대인 인구가 증가했지만, 1821년 왈라키아 봉기, 1848년 혁명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며 포그롬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베를린 조약 이후 시민권 획득에 어려움을 겪고 이민이 시작되었으며, 20세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대 루마니아 건설, 홀로코스트 등 격동의 시대를 거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안토네스쿠 정권 하에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전후에는 이스라엘로의 이민이 증가하며 공동체가 쇠퇴했다. 현재는 소수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으며, 유대교 문화와 종교 생활이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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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유대인
일반 정보
루마니아 갈라치의 유대인 가족 (전간기)
루마니아 갈라치의 유대인 가족 (전간기)
총 인구약 280,000명 ~ 460,000명 (전 세계)
관련 민족유대인
아슈케나즈 유대인
스파라드 유대인
몰도바 유대인
우크라이나 유대인
폴란드 유대인
헝가리 유대인
튀르키예 유대인
벨라루스 유대인
리투아니아 유대인
불가리아 유대인
사용 언어루마니아어
히브리어
이디시어
독일어
러시아어
헝가리어
폴란드어
영어
종교유대교
거주 지역
루마니아3,271명 (2011년 인구 조사) / 9,700명 (핵심 인구, 2002년 추정) / 8,000명 (2018년 추정)
이스라엘276,588명 (1948년~2010년 이스라엘 이민자) / 450,000명 (2005년 추정)
관련 명칭
루마니아어Evrei români
히브리어יהודים רומנים

2. 초기 역사

로마 제국이 다키아를 지배했던 기원전 2세기경, 현재 루마니아 영토가 된 지역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15][16][17][5][18][19] 사르미제게투사와 오르쇼바(오르쇼바/Orşova영어)에서 비문과 동전이 발견되었다.

크림 카라이트인은 쿠만족에서 발생했다고도 하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현재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현재 루마니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흑해 연안에 유대인이 존재했음이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도나우강 하구에서 드네스트르강에 걸쳐 무역항 쿠마니아(Cumania)가 있었고, 16세기 중반 또는 그 이전부터 몰다비아(Moldavia)의 정기 시장 여러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오래된 유대인(거의 세파르딤)의 존재는 1330년에 기록된 몰다비아의 체타테아 알바(체타테아 알바/Cetatea Albăro, 현재 우크라이나의 빌호로드-드니스트로프스키)의 문헌에 남아 있다. 왈라키아에서는 부쿠레슈티에서 생활하는 유대인에 대해 1550년대에 처음 언급되었다. 14세기 중반, 미래 루마니아 영토가 될 지역은 헝가리러요시 1세(헝가리)에 의해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의 중요한 피난처가 되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는 유대계 헝가리인들이 1492년경,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요새에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몰다비아 공 로만 1세(몰다비아 공, 재위: 1391년-1394년?)는 유대인 1인당 3탈러(화폐)의 세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몰다비아에서의 군역을 면제했다. 몰다비아에서는 슈테판 3세(몰도바 공, 1457년-1504년)도 유대인을 우대했다. 이아시(루마니아)의 이사크 벤 베냐민 쇼르(Isaac ben Benjamin Shor, 백양조의 술탄인 우준 하산에게 원래 고용되었다. 통칭 이삭 베그)는 스톨니크(원래 보야르(보야르/Boyar영어)의 요직, 궁정 집사)에 임명되었고, 곧 로고퍼트(logofăt, 국무장관)로 승진했다. 그는 보그단 3세 맹인 공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테판 두 대에 걸쳐 섬겼다.[111]

이 시대, 도나우 공국(왈라키아 및 몰다비아 양 공국의 총칭)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으며, 이스탄불에서 세파르딤 몇몇이 왈라키아로 이주했다. 폴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에 정착했다. 유대인은 2개 공국의 호스포다르(hospodar, 실력자)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하고 고통받았다. 몰다비아 공 스테파니차(Ştefăniţă, 1522년)는 전임 2명의 공들이 부여한 유대인 상인의 거의 모든 특권을 철회했다. 페트루 라레슈(Petru Rareş) 공은 1541년에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알렉산드루 라푸슈네아누(Alexandru Lăpuşneanu) 공은 그의 첫 번째 시대(1552년-1561년)에 다른 범주의 계층과 함께 유대인 박해를 가했다. 그것은 그리스인의 루터교 신자이며, 용병 출신의 이오안 야코브 헤라클리드(Ioan Iacob Heraclid)가 라푸슈네아누를 추방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헤라클리데스는 반유대인 문제에 관대했다. 1564년에 라푸슈네아누가 공위에 복귀하자 그는 박해를 재개했다.

1550년 이후, 터키와 왈라키아 및 몰다비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종주국 터키에 대한 조공 요구가 증가하면서 관직을 얻었다(1570년대에는 유대계의 강력한 낙소스 공작 (Duchy of the Archipelago) 요세프 나시가 알려져 있다. 그는 헤라클리데스와 라푸슈네아누가 공위에 오른 배후였다). 이 시기를 통해, 여러 건의 피비린내 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건이 채무를 갚을 수 없게 된 공들에 의해 선동되었다.

페트루 슈키오풀 공(Petru Şchiopul)의 첫 번째 짧은 치세 동안(1574년-1579년), 몰다비아 거주 유대인들은 현지 몰다비아인들과 경쟁했고, 중과세를 당하고 결국 추방되었다. 1582년, 슈키오풀 공은 유대인 의사 벤베니스테의 도움을 받아 몰다비아 지배권을 되찾았다.

왈라키아에서는 왈라키아 공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Alexandru II Mircea, 재위: 1567년-1577년)가 유대인 이사야 벤 요세프를 고용했다. 1573년, 이사야는 해고되었지만, 곧 그는 왈라키아를 떠나 모스크바 대공 이반 4세를 섬겼다. 아론 폭군 공(Aron Tiranul)은 몰다비아 공위에 올랐지만, 이아시에 거주하는 19명의 유대인 채권자를 재판 없이 참수형에 처했다. 같은 시기에 왈라키아에서는 미하이 용감공(Mihai Viteazul)의 치하에서 유대인 채권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 정점에 달했다. 미하이 공은 1594년 부쿠레슈티에서 터키인 채권자들을 살해한 후, 자신이 루멜리아 원정을 실시하자 도나우 남안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에게 폭력을 가했다(한편,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유대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 1. 로마 제국 시대

로마 제국이 다키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했던 기원전 2세기경, 현재 루마니아 영토가 된 지역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15][16][17][5][18][19] 사르미제게투사와 오르소바 등에서 비문과 동전이 발견되었다.

크림 카라이트인의 존재는 흑해 주변, 오늘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다뉴브 강과 드네스트르 강 하구의 무역 항구(''쿠마니아 참조'')를 중심으로 꾸준한 유대인들의 존재를 시사한다.[15] 그들은 16세기 또는 그 이전에 몰다비아의 일부 박람회에 있었을 수 있다.[15] 몰다비아가 된 지역에서 최초로 기록된 유대인(대부분 스페인계로 추정)의 존재는 체타테아 알바 (1330년)에서 기록되었으며, 왈라키아에서는 1550년대에 부쿠레슈티에 거주하는 것으로 처음 확인되었다.[16] 14세기 후반, 루마니아의 미래 영토는 헝가리 왕국폴란드에서 헝가리 왕 루이 1세에 의해 추방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피난처가 되었다.[17] 트란실바니아에서는 약 1492년경 트란실바니아 작센족 요새에서 헝가리 유대인이 기록되었다.[17]

몰다비아 공 로만 1세 (1391-1394?)는 유대인들에게 1인당 3 뢰벤탈러의 세금을 부과하는 대가로 군 복무를 면제했다.[5] 몰다비아에서는 슈테판 대왕 (1457–1504)이 유대인들을 배려했다.[5] 이아시 출신의 이삭 벤 베냐민 쇼르 (''이사크 베이'', 원래 우준 하산이 고용)는 ''스톨니크''로 임명되었고, 이후 ''로고페트''의 직위까지 승진했다.[5] 그는 슈테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보그단 3세 (1504–1517) 밑에서도 이 직위를 계속 유지했다.

이 시기에 두 다뉴브 공국은 오스만 제국종주권 아래 놓였고, 이스탄불에 거주하던 많은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왈라키아로 이주한 반면, 폴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유대인들은 몰다비아에 정착했다.[5] 그들은 오스만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외국 채권자 및 상인 공동체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지만,[5] 유대인들은 두 공국의 ''호스포다르''에게 박해를 받았다.[5] 몰다비아의 공 슈테판 4세 (1522)는 유대인 상인들에게 그의 두 전임자가 부여한 거의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5] 페트루 라레쉬는 1541년에 유대인들이 가축 거래에서 탈세를 했다는 혐의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5] 알렉산드루 러푸샤누 (첫 통치: 1552–61)는 다른 사회 계층과 함께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했지만, 요안 야콥 헤라클리데스에 의해 폐위되었다.[5] 그는 그리스인 루터교 신자로, 그의 유대인 신하들에게 관대했다. 러푸샤누는 1564년 다시 왕위에 오른 후 박해를 재개하지 않았다.[5] 1550년 이후 오스만 경제적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공국의 자금 조달에 있어 오스만 및 현지 유대인들의 역할이 증가했다.[18] (1570년대에는 영향력 있는 유대인 아르키펠라고 공작 요셉 나시가 헤라클리데스와 러푸샤누를 왕위로 지지했다).[18] 이 기간 동안 발생한 몇몇 폭력 사건은 부채를 갚을 수 없는 공작들에 의해 조장되었다.[18]

페테르 절름발이 (1574–1579)의 첫 번째 단기 통치 기간 동안, 몰다비아의 유대인들은 주로 현지인들과 경쟁하던 폴란드 출신 상인들이었고, 과세와 결국 추방당했다.[5] 1582년, 그는 영향력 있는 솔로몬 아슈케나지의 친구였던 유대인 의사 벤베니스트의 도움으로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5] 후자는 그 후 공에게 그의 동족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왈라키아에서는 공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 (1567–1577)가 개인 비서이자 고문으로 유대인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한 이사야 벤 요셉을 고용했다.[19] 1573년 이사야는 궁정 음모로 인해 해고되었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후 모스크바대공 이반 4세의 측근이 되기 위해 몰다비아로 떠났다.[19] 솔로몬 아슈케나지의 노력으로 아론 티라눌이 몰다비아 왕위에 올랐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통치자는 이아시에서 19명의 유대인 채권자들을 박해하고 처형했는데, 이들은 참수형을 받았다.[5] 거의 같은 시기에 왈라키아에서는 채권자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이 미하일 용감공 아래에서 최고조에 달했는데, 그는 부쿠레슈티에서 터키 채권자들을 살해한 후 (1594), 루멜리아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다뉴브 강 남쪽에 정착한 유대인들에 대해 폭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트란실바니아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19]

2. 2. 중세 시대

로마 제국이 속주 다키아를 지배했던 2세기경, 루마니아가 되기 전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사르미제게투사와 오르쇼바()에서 비문과 동전이 발견되었다.[111]

크림 카라이파는 쿠만족에서 발생했다고도 하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현재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현재 루마니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흑해 연안에 유대인이 존재했음이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도나우강 하구에서 드네스트르강에 걸쳐 무역항 쿠마니아(Cumania)가 있었고, 16세기 중반 또는 그 이전부터 몰다비아(Moldavia)의 정기 시장 여러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오래된 유대인(거의 세파르딤)의 존재는 1330년에 기록된 몰다비아의 체타테아 알바(Cetatea Albăro, 현재 우크라이나의 빌호로드-드니스트로프스키)의 문헌에 남아 있다. 왈라키아에서는 부쿠레슈티에서 생활하는 유대인에 대해 1550년대에 처음 언급되었다. 14세기 중반, 미래 루마니아 영토가 될 지역은 헝가리러요시 1세(헝가리)에 의해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의 중요한 피난처가 되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는 유대계 헝가리인들이 1492년경,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요새에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몰다비아 공 로만 1세(몰다비아 공, 재위: 1391년-1394년?)는 유대인 1인당 3탈러(화폐)의 세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몰다비아에서의 군역을 면제했다. 몰다비아에서는 슈테판 3세(몰도바 공, 1457년-1504년)도 유대인을 우대했다. 이아시(루마니아)의 이사크 벤 베냐민 쇼르(Isaac ben Benjamin Shor, 백양조의 술탄인 우준 하산에게 원래 고용되었다. 통칭 이삭 베그)는 스톨니크(원래 보야르()의 요직, 궁정 집사)에 임명되었고, 곧 로고퍼트(logofăt, 국무장관)로 승진했다. 그는 보그단 3세 맹인 공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테판 두 대에 걸쳐 섬겼다.[111]

이 시대, 도나우 공국(왈라키아 및 몰다비아 양 공국의 총칭)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으며, 이스탄불에서 세파르딤 몇몇이 왈라키아로 이주했다. 폴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에 정착했다. 유대인은 2개 공국의 호스포다르(hospodar, 실력자)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하고 고통받았다. 몰다비아 공 스테파니차(Ştefăniţă, 1522년)는 전임 2명의 공들이 부여한 유대인 상인의 거의 모든 특권을 철회했다. 페트루 라레슈(Petru Rareş) 공은 1541년에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알렉산드루 라푸슈네아누(Alexandru Lăpuşneanu) 공은 그의 첫 번째 시대(1552년-1561년)에 다른 범주의 계층과 함께 유대인 박해를 가했다. 그것은 그리스인의 루터교 신자이며, 용병 출신의 이오안 야코브 헤라클리드(Ioan Iacob Heraclid)가 라푸슈네아누를 추방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헤라클리데스는 반유대인 문제에 관대했다. 1564년에 라푸슈네아누가 공위에 복귀하자 그는 박해를 재개했다.

1550년 이후, 터키와 왈라키아 및 몰다비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종주국 터키에 대한 조공 요구가 증가하면서 관직을 얻었다(1570년대에는 유대계의 강력한 낙소스 공작 (Duchy of the Archipelago) 요세프 나시가 알려져 있다. 그는 헤라클리데스와 라푸슈네아누가 공위에 오른 배후였다). 이 시기를 통해, 여러 건의 피비린내 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건이 채무를 갚을 수 없게 된 공들에 의해 선동되었다.

페트루 슈키오풀 공(Petru Şchiopul)의 첫 번째 짧은 치세 동안(1574년-1579년), 몰다비아 거주 유대인들은 현지 몰다비아인들과 경쟁했고, 중과세를 당하고 결국 추방되었다. 1582년, 슈키오풀 공은 유대인 의사 벤베니스테의 도움을 받아 몰다비아 지배권을 되찾았다.

왈라키아에서는 왈라키아 공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Alexandru II Mircea, 재위: 1567년-1577년)가 유대인 이사야 벤 요세프를 고용했다. 1573년, 이사야는 해고되었지만, 곧 그는 왈라키아를 떠나 모스크바 대공 이반 4세를 섬겼다. 아론 폭군 공(Aron Tiranul)은 몰다비아 공위에 올랐지만, 이아시에 거주하는 19명의 유대인 채권자를 재판 없이 참수형에 처했다. 같은 시기에 왈라키아에서는 미하이 용감공(Mihai Viteazul)의 치하에서 유대인 채권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 정점에 달했다. 미하이 공은 1594년 부쿠레슈티에서 터키인 채권자들을 살해한 후, 자신이 루멜리아 원정을 실시하자 도나우 남안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에게 폭력을 가했다(한편,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유대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3. 근대

1623년, 트란실바니아의 유대인들은 가브리엘 베슬렌 공작으로부터 특정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기업가들을 자신의 나라로 유치하려는 목적이었다.[20] 이 특권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축소되어 유대인들은 알바율리아에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20] 부여된 특권 중에는 유대인들이 전통 의상을 입는 것이 허용되는 것도 있었다. 결국 알바율리아 당국은 1650년과 1741년에 유대인들이 지위와 민족성을 나타내는 옷만 입도록 결정했다.[6]

종교 개종을 한 유대인들의 지위는 왈라키아에서는 마테이 바사라브의 ''고보라의 프라빌라''에 의해, 몰다비아에서는 바실레 루푸의 ''카르테 로마네아스크 데 인바타투라''에 의해 확립되었다.[21] 바실레 루푸(1634-1653)는 코사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을 고려하며 대우했다.[22]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상대로 진격하면서 이 지역을 지나가는 동안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이 폭력 사태로 인해 폴란드 출신의 많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피신하여 작지만 안정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22] 코사크에 의한 대량 학살과 강제 개종은 1652년에 발생했다. 당시 코사크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아들인 티모피 흐멜니츠키와 바실레 루푸의 딸의 결혼을 계기로 이아시에 왔었고, 게오르게 슈테판의 통치 기간에도 발생했다.[23]

1710년에서 1716년까지 왈라키아 공작의 비서였던 안톤 마리아 델 키아로에 따르면, 왈라키아의 유대인들에게 특정 의복의 사회적 측면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검은색이나 보라색 외의 옷을 입거나 노란색 또는 빨간색 부츠를 신는 것이 금지되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학자 안드레이 오이스테아누는 이러한 민족적 및 종교적 사회적 낙인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그리고 유럽의 동방 정교회 지역 전반에서 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5]

몰다비아에서 최초의 혈통 모독은 1710년 4월 5일에 발생했는데, 터구 네암츠의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의 의식적 목적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7] 다음 날 유대인 5명이 살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구로 만들었으며,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하는 한편, 공동체 대표들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공작은 조사 명령을 내려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했다. 이것은 정교회 성직자들이 유대인 공격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7] 1714년에는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대인 가족의 기독교인 여자 하인을 로마에서 로마 가톨릭교도 그룹이 살해한 사건에 대해 유대인에게 비슷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했고, 진짜 범인이 당국에 의해 발견되기 전에 유대인 2명이 처형되었다.

이아시 대시나고그, c. 1670
에 건설됨]]

콘스탄틴 브란코베아누 치하에서,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부쿠레슈티에서 ''스타로스트''가 이끄는 특별 길드로 인정받았다.[26]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아시의 ''하캄 바시''의 관할을 받았지만, 곧 부쿠레슈티의 ''스타로스트''가 여러 종교적 의무를 맡게 되었다.[27] 스테판 칸타쿠지노 (1714-1716) 치하에서 과세와 박해를 받았던[28]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1716-1730)의 통치 기간 동안 귀중한 특권을 얻었다 (공작은 특히 유대인 학자 다니엘 드 폰세카를 자신의 궁정에 고용했다).[29] 1760년대 부쿠레슈티에서 또 다른 반유대교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예루살렘의 에프람 2세 예루살렘 정교회 총대주교의 방문에 의해 조장되었다.[8]

1726년, 몰다비아의 자치 도시인 오니츠카니에서, 4명의 유대인들이 5살짜리 아이를 납치하여 부활절에 살해하고 그의 피를 통에 모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몰다비아 공작 미하이 라코비처의 감독 하에 이아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외교적 항의에 따라 무죄로 석방되었다. 프랑스의 오스만 제국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밥티스트 루이 피콩은 그러한 혐의는 "문명 국가"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언급했다.[30] 존 마브로코르다토스 (1744-1747)의 통치 기간 동안, 수체아바 근처의 유대인 농부는 공작이 자신의 집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납치된 유대인 여성을 강간했다고 오스만 포르테에 보고했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고발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 행위는 마흐무드 1세의 몰다비아 ''카푸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공작은 그의 왕좌를 잃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8]

3. 1. 오스만 제국 시대의 차별과 박해

1623년, 트란실바니아의 유대인들은 가브리엘 베슬렌 공작으로부터 특정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기업가들을 자신의 나라로 유치하려는 목적이었다.[20] 이 특권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축소되어 유대인들은 알바율리아에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20] 부여된 특권 중에는 유대인들이 전통 의상을 입는 것이 허용되는 것도 있었다. 결국 알바율리아 당국은 1650년과 1741년에 유대인들이 지위와 민족성을 나타내는 옷만 입도록 결정했다.[6]

종교 개종을 한 유대인들의 지위는 왈라키아에서는 마테이 바사라브의 ''고보라의 프라빌라''에 의해, 몰다비아에서는 바실레 루푸의 ''카르테 로마네아스크 데 인바타투라''에 의해 확립되었다.[21] 바실레 루푸(1634-1653)는 코사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을 고려하며 대우했다.[22]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상대로 진격하면서 이 지역을 지나가는 동안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이 폭력 사태로 인해 폴란드 출신의 많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피신하여 작지만 안정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22] 코사크에 의한 대량 학살과 강제 개종은 1652년에 발생했다. 당시 코사크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아들인 티모피 흐멜니츠키와 바실레 루푸의 딸의 결혼을 계기로 이아시에 왔었고, 게오르게 슈테판의 통치 기간에도 발생했다.[23]

1710년에서 1716년까지 왈라키아 공작의 비서였던 안톤 마리아 델 키아로에 따르면, 왈라키아의 유대인들에게 특정 의복의 사회적 측면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검은색이나 보라색 외의 옷을 입거나 노란색 또는 빨간색 부츠를 신는 것이 금지되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학자 안드레이 오이스테아누는 이러한 민족적 및 종교적 사회적 낙인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그리고 유럽의 동방 정교회 지역 전반에서 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5]

몰다비아에서 최초의 혈통 모독은 1710년 4월 5일에 발생했는데, 터구 네암츠의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의 의식적 목적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7] 다음 날 유대인 5명이 살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구로 만들었으며,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하는 한편, 공동체 대표들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공작은 조사 명령을 내려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했다. 이것은 정교회 성직자들이 유대인 공격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7] 1714년에는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대인 가족의 기독교인 여자 하인을 로마에서 로마 가톨릭교도 그룹이 살해한 사건에 대해 유대인에게 비슷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했고, 진짜 범인이 당국에 의해 발견되기 전에 유대인 2명이 처형되었다.

에 건설됨]]

콘스탄틴 브란코베아누 치하에서,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부쿠레슈티에서 ''스타로스트''가 이끄는 특별 길드로 인정받았다.[26]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아시의 ''하캄 바시''의 관할을 받았지만, 곧 부쿠레슈티의 ''스타로스트''가 여러 종교적 의무를 맡게 되었다.[27] 스테판 칸타쿠지노 (1714-1716) 치하에서 과세와 박해를 받았던[28]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1716-1730)의 통치 기간 동안 귀중한 특권을 얻었다 (공작은 특히 유대인 학자 다니엘 드 폰세카를 자신의 궁정에 고용했다).[29] 1760년대 부쿠레슈티에서 또 다른 반유대교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예루살렘의 에프람 2세 예루살렘 정교회 총대주교의 방문에 의해 조장되었다.[8]

1726년, 몰다비아의 자치 도시인 오니츠카니에서, 4명의 유대인들이 5살짜리 아이를 납치하여 부활절에 살해하고 그의 피를 통에 모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몰다비아 공작 미하이 라코비처의 감독 하에 이아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외교적 항의에 따라 무죄로 석방되었다. 프랑스의 오스만 제국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밥티스트 루이 피콩은 그러한 혐의는 "문명 국가"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언급했다.[30] 존 마브로코르다토스 (1744-1747)의 통치 기간 동안, 수체아바 근처의 유대인 농부는 공작이 자신의 집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납치된 유대인 여성을 강간했다고 오스만 포르테에 보고했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고발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 행위는 마흐무드 1세의 몰다비아 ''카푸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공작은 그의 왕좌를 잃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8]

3. 2.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유대인

1623년, 트란실바니아의 유대인들은 가브리엘 베슬렌 공작으로부터 특정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기업가들을 자신의 나라로 유치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특권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축소되어 유대인들은 귈라페헤르바르 (알바율리아)에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20] 부여된 특권 중에는 유대인들이 전통 의상을 입는 것이 허용되는 것도 있었다. 결국 귈라페헤르바르의 당국은 (1650년과 1741년에) 유대인들이 지위와 민족성을 나타내는 옷만 입도록 결정했다.[6]

종교 개종을 한 유대인들의 지위는 왈라키아에서는 마테이 바사라브의 ''고보라의 프라빌라''에 의해, 몰다비아에서는 바실레 루푸의 ''카르테 로마네아스크 데 인바타투라''에 의해 확립되었다.[21] 바실레 루푸(1634-1653)는 코사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을 고려하며 대우했다.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상대로 진격하면서 이 지역을 지나가는 동안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이 폭력 사태로 인해 폴란드 출신의 많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피신하여 작지만 안정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22] 코사크에 의한 대량 학살과 강제 개종은 1652년에 발생했다. 당시 코사크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아들인 티모피 흐멜니츠키와 바실레 루푸의 딸의 결혼을 계기로 이아시에 왔었고, 게오르게 슈테판의 통치 기간에도 발생했다.[23]

안톤 마리아 델 키아로에 따르면, 1710년에서 1716년까지 왈라키아 공작의 비서였던 그는 왈라키아의 유대인들에게 특정 의복의 사회적 측면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따라서 그들은 검은색이나 보라색 외의 옷을 입거나 노란색 또는 빨간색 부츠를 신는 것이 금지되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학자 안드레이 오이스테아누는 이러한 민족적 및 종교적 사회적 낙인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그리고 유럽의 동방 정교회 지역 전반에서 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5]

몰다비아 (그리고 루마니아에서) 최초의 혈통 모독은 1710년 4월 5일에 발생했는데, 터구 네암츠의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의 의식적 목적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7] 다음 날 유대인 5명이 살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구로 만들었으며,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하는 한편, 공동체 대표들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한편, 몇몇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은 이아시의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공작 (최초의 파나리오트 통치자)에게 호소했고, 그는 조사 명령을 내려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했다. 이것은 정교회 성직자들이 유대인 공격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1714년에는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대인 가족의 기독교인 여자 하인을 로마에서 로마 가톨릭교도 그룹이 살해한 사건에 대해 유대인에게 비슷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했고, 진짜 범인이 당국에 의해 발견되기 전에 유대인 2명이 처형되었다.

에 건설됨

콘스탄틴 브란코베아누 치하에서,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부쿠레슈티에서 ''스타로스트''가 이끄는 특별 길드로 인정받았다.[26]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아시의 ''하캄 바시''의 관할을 받았지만, 곧 부쿠레슈티의 ''스타로스트''가 여러 종교적 의무를 맡게 되었다.[27] 스테판 칸타쿠지노 (1714-1716) 치하에서 과세와 박해를 받았던[28]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1716-1730)의 통치 기간 동안 귀중한 특권을 얻었다 (공작은 특히 유대인 학자 다니엘 드 폰세카를 자신의 궁정에 고용했다).[29] 1760년대 부쿠레슈티에서 또 다른 반유대교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예루살렘의 에프람 2세 예루살렘 정교회 총대주교의 방문에 의해 조장되었다.[8]

1726년, 몰다비아의 자치 도시인 오니츠카니에서, 4명의 유대인들이 5살짜리 아이를 납치하여 부활절에 살해하고 그의 피를 통에 모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몰다비아 공작 미하이 라코비처의 감독 하에 이아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외교적 항의에 따라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몇몇 동시대 연대기 및 문서에서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오스만 제국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밥티스트 루이 피콩은 그러한 혐의는 "문명 국가"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언급했다.[30] 몰다비아 유대인들의 상황에 가장 명백한 영향을 미친 것은 존 마브로코르다토스 (1744-1747)의 통치 기간 동안 목격되었다. 수체아바 근처의 유대인 농부는 공작이 자신의 집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납치된 유대인 여성을 강간했다고 오스만 포르테에 보고했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고발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 행위는 마흐무드 1세의 몰다비아 ''카푸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공작은 그의 왕좌를 잃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8]

3. 3. 종교적 박해와 혈액 중상 모략

트란실바니아의 유대인들은 1623년 가브리엘 베슬렌 공작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으나, 이후 수십 년 동안 축소되어 알바율리아에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20] 1650년과 1741년에는 유대인들이 지위와 민족성을 나타내는 옷만 입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6]

왈라키아몰다비아에서는 종교 개종을 한 유대인들의 지위가 확립되었다.[21] 바실레 루푸 통치 시기(1634-1653) 몰다비아의 유대인들은 코사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고려하며 대우를 받았다.[22] 그러나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상대로 진격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고, 이로 인해 폴란드 출신의 많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피신했다.[22] 코사크에 의한 대량 학살과 강제 개종은 1652년에 발생했다.[23]

1710년에서 1716년까지 왈라키아 공작의 비서였던 안톤 마리아 델 키아로는 왈라키아의 유대인들이 특정 의복의 사회적 측면을 준수하도록 요구받았다고 기록했다. 유대인들은 검은색이나 보라색 외의 옷을 입거나 노란색 또는 빨간색 부츠를 신는 것이 금지되었다.[24] 그러나 루마니아 학자 안드레이 오이스테아누는 이러한 민족적 및 종교적 사회적 낙인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그리고 유럽의 동방 정교회 지역 전반에서 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25]

몰다비아에서 최초의 혈통 모독은 1710년 4월 5일에 발생했는데, 터구 네암츠의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를 의식적 목적으로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7] 이 사건의 배후는 기독교인들이 살해한 어린이의 시신을 시나고그 안뜰로 옮기는 것을 도운, 세례를 받은 유대인이었다. 다음 날 유대인 5명이 살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구로 만들었으며, 모든 유대인 가옥이 약탈당하는 한편, 공동체 대표들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공작의 조사 명령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석방되었으며, 이는 정교회 성직자들이 유대인 공격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1714년에는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대인에게 비슷한 혐의가 제기되어, 유대인 2명이 처형되었다.[7]

에 건설됨]]

콘스탄틴 브란코베아누 치하에서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부쿠레슈티에서 ''스타로스트''가 이끄는 특별 길드로 인정받았다.[26]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아시의 ''하캄 바시''의 관할을 받았지만, 곧 부쿠레슈티의 ''스타로스트''가 여러 종교적 의무를 맡게 되었다.[27] 스테판 칸타쿠지노 치하에서 과세와 박해를 받았던[28] 왈라키아 유대인들은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토스 통치 기간 동안 귀중한 특권을 얻었다.[29] 1760년대 부쿠레슈티에서 또 다른 반유대교 폭동이 일어났다.[8]

1726년, 몰다비아의 오니츠카니에서 4명의 유대인들이 5살짜리 아이를 납치하여 부활절에 살해하고 그의 피를 통에 모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미하이 라코비처의 감독 하에 이아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30] 존 마브로코르다토스 통치 기간(1744-1747) 동안, 수체아바 근처의 유대인 농부는 공작이 자신의 집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납치된 유대인 여성을 강간했다고 오스만 포르테에 보고했고, 마브로코르다토스는 고발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 행위는 마흐무드 1세의 몰다비아 ''카푸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공작은 그의 왕좌를 잃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8]

3. 4.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유대인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다뉴브 공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큰 고난을 겪었다. 1768–17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었다.[31] 평화가 회복된 후 몰다비아의 알렉산더 마브로코르다토스와 왈라키아의 니콜라에 마브로게니는 유대인에게 특별한 보호를 약속했으며, 1787년까지 유대인의 상황은 호전되었다.[31] 그러나 예니체리러시아 제국 군대가 포그롬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31]

유대인 공동체는 지역 주민들의 박해도 받았다. 유대인 아이들이 납치되어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31] 의례적 살인 혐의가 널리 퍼졌고, 1797년 갈라치에서 발생한 사건은 유대인들이 대규모 폭도에게 공격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고, 강도를 당하고, 길에서 습격을 당하고,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고, 일부는 다뉴브 강에 빠져 익사하고, 회당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건물 안에서 불타 죽는 등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31] 다행히도 한 사제가 보호하고 피난처를 제공하여 몇몇이 탈출할 수 있었다.[31]

1803년, 왈라키아의 대주교 이아코브 스타마티는 사망 직전에 자신의 저서 ''Înfruntarea jidovilor'' ("유대인에 맞서")를 출판하여 부쿠레슈티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공격을 선동했다.[31] 이 책은 전 랍비의 고백인 것처럼 위장했지만, 스타마티의 후임인 베니아민 코스타키는 유대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31] 1804년에는 통치자 콘스탄틴 입실란티가 의례적 살인 혐의를 "무지한 사람들의 근거 없는 의견"으로 일축하고, 그 비난을 왈라키아 전역의 교회에서 읽도록 명령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32] 이후 이 혐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32]

1806–1812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러시아의 침공은 다시 유대인 학살을 동반했다. 오스만 제국의 용병으로 활동한 칼미크족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끝날 무렵 부쿠레슈티에 나타나 도시의 유대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27] 거의 같은 시기에, 외국 보호를 받는 유대인 (''수디치'')과 지역 유대인 (''흐리소볼리치'')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는데, 후자가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단일 행정부를 강요하려 했기 때문이다.[27] 이 문제는 장 조르주 카라자 공에 의해 ''흐리소볼리치''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1813년).[27]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지배하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요제프 2세가 시행한 개혁으로 유대인들은 헝가리 왕관령에 직접 속한 도시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공동체에 가해지는 압박은 수십 년 동안 여전히 심했다.

4. 19세기

야시 시의 풍경을 그린 석판화 (1845년경). 오른쪽에는 두 명의 정통 유대인이 보인다


부쿠레슈티 시나고그 (2차 세계 대전 이후 복원), 원래는 1864–1866년에 건축되었다


1825년경, 왈라키아의 유대인 인구(거의 전적으로 세파르딤)은 5,000명에서 10,000명 사이로 추정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부쿠레슈티에 거주했으며(1839년에는 7,000명 이상), 같은 시기에 몰다비아에는 약 12,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133] 부코비나의 유대인 인구는 1774년 526명에서 1848년 11,600명으로 증가했다.[134] 19세기 초, 오스만 파즈반토글루의 발칸 반도 원정에서 피난 온 유대인들은 왈라키아 지배하의 올테니아에 공동체를 건설했다.[128] 몰다비아에서는 스칼라트 칼리마치의 법전(1817)이 유대인들의 도시 재산 구매는 허용했지만, 시골 정착은 금지했다.[128]

그리스 독립 전쟁은 1821년 왈라키아 봉기와 필리키 에테리아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군대에 의한 다뉴브 공국 점령을 알리는 신호였다. 유대인들은 파르티체니, 헤르차, 피아트라 네암츠, 세쿠 수도원, 터르고비슈테, 터르구 프로모스 등지에서 포그롬과 박해의 희생자가 되었다. 갈라치의 유대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 외교관의 도움을 받아 프루트 강을 건너 도망쳤다.[132] 입실란티스와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충돌로 약화된 에테리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고, 이 사건 동안 유대인 공동체는 세쿠와 슬라티나에서 보복 행위를 했다.[132]

1829년 아드리아노플 조약 이후, 몰다비아는 러시아 제국과 갈리치아에서 박해받는 아슈케나짐의 이주 대상이 되었다. 1838년까지 그 수는 80,000명,[135] 1859년에는 195,000명이 넘거나, 국가 인구의 거의 12%를 차지했다(50,000명이 왈라키아로 이동).[136]

1829년 러시아 점령 하의 초기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로운 이민자들이 보야르의 수입과 수요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토지에서 일하거나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압박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37] 유대인을 술집 운영자로 비난하여 알코올 중독을 조장한다는 일반적인 편견이 있었다. 동시에, 여러 유대인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었으며, 1850년대 몰다비아 은행과 관련된 대부분의 가족이 유대인 출신이었다.[138] 1832년 이후, 유기 규정의 채택에 따라, 유대인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을 경우에만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몰다비아에서 미하일 스투르자 공의 1847년 칙령은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인 복장 규정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140]

1848년 혁명 이전, 유대인에 대한 많은 제한적인 법률이 제정되었다. 유대인들은 1848년 왈라키아 혁명에 참여했으며, 화가 콘스탄틴 다니엘 로젠탈은 혁명 대의에 헌신하여 명성을 얻었고, 그의 활동으로 생명을 잃었다. 1848년 왈라키아 혁명가들이 제정한 ''이스라즈 선언''은 "다양한 신앙을 가진 모든 동포를 위한 이스라엘인의 해방과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141]

크림 전쟁이 끝난 후, 두 공국의 통합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연합주의자와 반연합주의자 모두 유대인의 지지를 구했으며, 각자는 완전한 평등을 약속했다. 1857년, 공동체는 루마니아 급진주의 이율리 바라스크가 편집한 최초의 잡지인 ''이스라엘리툴 로만''을 발행했다. 이러한 통합 과정은 비공식적인 유대인 루마니아 정체성을 창출했으며, 개종은 예외적인 경우에 국한되었다.[128][132]

4. 1. 유대인 인구 증가와 차별



1825년경, 왈라키아의 유대인 인구(거의 전적으로 세파르딤)은 5,000명에서 10,000명 사이로 추정되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부쿠레슈티에 거주했으며(1839년에는 7,000명 이상), 같은 시기에 몰다비아에는 약 12,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133] 부코비나의 유대인 인구는 1774년 526명에서 1848년 11,600명으로 증가했다.[134] 19세기 초, 오스만 파즈반토글루의 발칸 반도 원정에서 피난 온 유대인들은 왈라키아 지배하의 올테니아에 공동체를 건설했다.[128] 몰다비아에서는 스칼라트 칼리마치의 법전(1817)이 유대인들의 도시 재산 구매는 허용했지만, 시골 정착은 금지했다.[128]

그리스 독립 전쟁은 1821년 왈라키아 봉기와 필리키 에테리아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군대에 의한 다뉴브 공국 점령을 알리는 신호였다. 유대인들은 파르티체니, 헤르차, 피아트라 네암츠, 세쿠 수도원, 터르고비슈테, 터르구 프로모스 등지에서 포그롬과 박해의 희생자가 되었다. 갈라치의 유대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 외교관의 도움을 받아 프루트 강을 건너 도망쳤다.[132] 입실란티스와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충돌로 약화된 에테리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고, 이 사건 동안 유대인 공동체는 세쿠와 슬라티나에서 보복 행위를 했다.[132]

1829년 아드리아노플 조약 이후, 몰다비아는 러시아 제국과 갈리치아에서 박해받는 아슈케나짐의 이주 대상이 되었다. 1838년까지 그 수는 80,000명,[135] 1859년에는 195,000명이 넘거나, 국가 인구의 거의 12%를 차지했다(50,000명이 왈라키아로 이동).[136]

1829년 러시아 점령 하의 초기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로운 이민자들이 보야르의 수입과 수요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토지에서 일하거나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압박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37] 유대인을 술집 운영자로 비난하여 알코올 중독을 조장한다는 일반적인 편견이 있었다. 동시에, 여러 유대인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었으며, 1850년대 몰다비아 은행과 관련된 대부분의 가족이 유대인 출신이었다.[138] 1832년 이후, 유기 규정의 채택에 따라, 유대인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을 경우에만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몰다비아에서 미하일 스투르자 공의 1847년 칙령은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인 복장 규정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140]

1848년 혁명 이전, 유대인에 대한 많은 제한적인 법률이 제정되었다. 유대인들은 1848년 왈라키아 혁명에 참여했으며, 화가 콘스탄틴 다니엘 로젠탈은 혁명 대의에 헌신하여 명성을 얻었고, 그의 활동으로 생명을 잃었다. 1848년 왈라키아 혁명가들이 제정한 ''이스라즈 선언''은 "다양한 신앙을 가진 모든 동포를 위한 이스라엘인의 해방과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141]

크림 전쟁이 끝난 후, 두 공국의 통합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연합주의자와 반연합주의자 모두 유대인의 지지를 구했으며, 각자는 완전한 평등을 약속했다. 1857년, 공동체는 루마니아 급진주의 이율리 바라스크가 편집한 최초의 잡지인 ''이스라엘리툴 로만''을 발행했다. 이러한 통합 과정은 비공식적인 유대인 루마니아 정체성을 창출했으며, 개종은 예외적인 경우에 국한되었다.[128][132]

4. 2. 1848년 혁명과 유대인

1821년 왈라키아 봉기(Revoluţia de la 1821, :en:Wallachian uprising of 1821)를 촉발한 그리스 독립 전쟁 동안, 도나우 공국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이끄는 비밀 결사 필리키 에타리아 군에 점령되었고, 유대인들은 포그롬과 박해의 희생양이 되었다.[132] 갈라치에 있던 유대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 외교관의 지원을 받아 프루트강을 넘어 피난했다.[132] 입실란티스와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간의 충돌로 약화된 필리키 에타리아의 구성원은 오스만 제국 군대에 의해 학살되었고, 이 사건 동안 유대인 공동체는 세크와 슬라티나에서 에타리아에 대한 보복에 연루되었다.[132]

1848년 왈라키아 혁명(:en:1848 Wallachian revolution)과 병행하여 일어난 1848년 혁명 이전, 많은 유대인에 대한 제한법이 제정되었다.[141] 다양한 방식으로 유대인들은 왈라키아 반란에서 역할을 했다. 화가 콘스탄틴 다니엘 로젠탈(Constantin Daniel Rosenthal)은 자발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여 이름을 떨쳤고 자신의 행동에 목숨을 걸었다.[141] 주요 기록 문서로 여겨지는 1848년 왈라키아 혁명의 혁명가들이 편찬한 '이스라즈 선언'(Islaz Proclamation)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지파의 해방과 다른 신념을 가진 모든 동포의 권리를 노래하고 있다.[141]

크림 전쟁 이후, 두 공국의 통합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완전한 평등을 약속하는 두 파, 즉 합동파 (왈라키아-몰다비아의 합동 공국 성립을 목표)와 반합동파 (두 공국이 별개의 독립 국가로 유지되는 현상 유지) 모두로부터 지지와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유도되었다.[128] 1857년, 유대인 공동체는 처음으로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스라리툴 로문'(Israelitul Român)지는 루마니아 급진주의자 율리우 바라슈(Iuliu Barasch)가 편집했다.[128]

4. 3.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시대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1859–1866)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연합 공국의 첫 번째 통치자 (''돔니토르'') 유대인들은 국가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9] 그러나 이 시기는 1859년 부활절 동안 갈라치에서 시작된 혈액 중상 비방으로 촉발된 또 다른 폭동으로 시작되었다.[9]

의류 규정은 내무부 장관인 미하일 코갈니체아누의 두 차례의 명령(각각 1859년과 1860년에 발표)에 의해 몰다비아 내부에서 확인되었다.[39] 1859년 규정이 채택된 후, 군인과 민간인은 이아시와 다른 몰다비아 마을의 거리를 걸으며 유대인을 공격하고 가위로 옷을 찢었을 뿐만 아니라 수염이나 옆머리(Payot)도 잘랐다.[39] 군 본부에서 취한 과감한 조치로 그러한 혼란이 중단되었다.[39]

1864년, 쿠자 공은 정부와 일반 의회 간의 어려움으로 인해 후자를 해산하고 보편적 선거권을 부여하는 헌법 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양원제를 창설(각각 상원 및 하원)하고,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며, 강제 노동에서 농민을 해방할 것을 제안했다(이로써 토지 개혁 이후 더 이상 보야르가 아닌 토지 소유주의 남은 영향력을 무효화하려 함). 그 과정에서 쿠자는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 모두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기대했는데, 후자에 대한 요구는 줄여서 두 그룹으로부터 40,000 오스트리아 플로린 (표준 금화; 당시 환율로 약 US$ 90,000)만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만족스러운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

쿠자가 그의 요구를 밀어붙이는 동안, 유대인 공동체는 평가 방법을 논의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불분명한 이유로 돈을 먼저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고, 중산층은 그 금액이 충분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교 유대인들은 그러한 권리가 그들의 종교 행사를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몫을 지불하는 것을 망설인다는 것을 알게 된 쿠자는 헌법 초안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선거권에서 제외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4. 4.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반유대주의

니콜라에 그리고레스쿠: ''거위를 든 유대인'' (1880년경)청원서와 거위를 뇌물로 들고 있는 루마니아 유대인.


1864년 12월 4일, 루마니아의 유대인들은 법률 실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41] 1866년 카롤 1세가 즉위했을 때, 수도에서 그를 맞이한 첫 번째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폭동이었다. 이후 정부는 헌법 초안을 제출했는데, 헌법 제6조는 "종교는 시민권 취득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관해서는, 귀화 및 시민 권리를 허용하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41] 1866년 6월 30일, 부쿠레슈티 회당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같은 해에 재건되었으며, 1932년과 1945년에 복원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구타당하고, 불구되었으며, 강도질을 당했다. 그 결과, 제6조는 철회되었고 1866년 루마니아 헌법에 제7조가 추가되었는데, "오직 기독교 신앙을 가진 외국인만이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143]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대인 권리 문제는 레가트의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았다.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주니메아[42] 관련 인사[144] - 페트레 P. 카르프, 게오르게 파누, I.L. 카라지알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루마니아 지식인들은 반유대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형태는 자유주의 옹호자들(1848년의 정치적 기원과는 대조적으로)에게서 나타났으며, 특히 유대인 이민이 민족 루마니아 중산층의 성장을 막았다고 주장한 몰다비아인들이었다. 현대적 편견의 최초 사례는 몰다비아 ''프락치우네아 리베러 시 인디펜덴터''(이후 국민자유당으로 통합됨)와 체자르 볼리아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부쿠레슈티 그룹이었다.[43] 그들의 담론은 유대인들을 문화 동화되지 않은 영원한 외국인으로 간주했다이 주장은 일부 동시대 자료에 의해 반박되었지만,[44]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민자들을 결국 받아들임으로써 확인되었다.[145][146]

반유대주의는 국민자유당의 주류로 유입되었고, 이온 브라티아누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브라티아누는 재임 초기에 낡은 차별법을 강화하고 적용하여 유대인의 시골 정착을 금지(그리고 정착한 유대인들을 이주시킴)하는 한편, 많은 유대인 도시 거주자들을 부랑자로 선언하고 추방했다. 1905년의 ''유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자신의 루마니아 출생을 증명한 많은 유대인들이 도나우 강 너머로 강제 이송되었고, 오스만 제국이 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강에 던져져 익사했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이러한 야만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았다. 루마니아 정부는 열강으로부터 경고를 받았고, 브라티아누는 이후 해임되었다"라고 한다. ''주니메아''의 지도자들을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이 구성한 내각은 유대인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주로 국민자유당의 반대에 기인했다.[147]

이 시기에 루마니아는 이디시어 연극의 요람이었다. 아브라함 골드파덴은 1876년 이아시에 최초의 전문 이디시어 극단을 설립했고, 수년 동안, 특히 1877-1878년 러시아-터키 전쟁 동안 루마니아는 이디시어 연극의 본고장이었다. 그 중심은 처음에는 러시아, 그 다음에는 런던, 그 다음에는 뉴욕으로 옮겨졌지만, 부쿠레슈티이아시는 다음 세기 동안 그 역사에서 계속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45]

4. 5. 베를린 조약과 그 이후

브러티아누가 다시 지도력을 잡았을 때 루마니아는 발칸 반도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직면했고, 1877~1878년의 러-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군대를 파견하여 오스만 종주권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기회를 보았다.[46] 전쟁은 베를린 조약 (1878)으로 종결되었으며, 이 조약은 루마니아의 비 기독교인(새롭게 획득한 북 도브루자 지역의 유대인과 무슬림 포함)이 완전한 시민권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제44조).[46] 국내에서 오랜 논쟁과 해외 외교 협상 끝에 루마니아 정부는 결국 (1879년) 헌법 제7조를 폐지하기로 동의했다.[46] 그러나 이 조항은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는 외국인의 귀화는 모든 개별 사례에서 루마니아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라는 조항과, 지원자가 평가를 받기 전 10년의 기간을 포함하는 등 절차를 매우 어렵게 만들도록 재구성되었다.[46] 이러한 제스처는 복종의 시위로 이어졌다.[46] 전쟁에 참여한 883명의 유대인은 양원 투표를 통해 일괄적으로 귀화되었다.[46]

1880년에 57명이 개별적으로 투표를 거쳐 귀화했고, 1881년에 6명, 1882년에 2명, 1883년에 2명, 1886년부터 1900년까지 18명이 귀화했다.[47] 총 21년 동안 85명의 유대인이 귀화했고, 그중 27명은 그동안 사망했다.[47] 1912년까지 약 4,000명이 시민권을 얻었다.[47] 사실상 모든 직업을 갖는 것이 루마니아인만이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소지하는 것에 달려 있도록 다양한 법률이 통과되었다.[48] 수작업 노동자를 포함하여 유대인 노동자의 40% 이상이 그러한 법률에 의해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48] 자유 직업을 행사하는 유대인에 관해서도 유사한 법률이 통과되었다.[48]

1893년에는 유대인 자녀들이 공립학교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49] 시민의 자녀가 제공된 경우에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부모는 우선적인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49] 1898년에는 유대인이 중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제되도록 법으로 통과되었다.[49]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조치는 모제스 가스터와 엘리아스 슈바르츠펠트를 포함하여 "반대하는 외국인"으로 유대인 활동가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1881년 법률 조항에 따라).[49]

법원은 가장 불쾌한 형태로 모레 주다이코(more judaico) 서약을 강요했는데, 이는 프랑스 언론의 비판에 따라 1904년에야 폐지되었다.[49] 1892년,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베를린 조약 서명국에 각서를 보냈을 때, 루마니아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49] 그러나 라스카르 카타르지우 정부는 우려했고, 이 문제가 장관들 사이에서 논의되었으며, 그 결과 루마니아 정부는 프랑스어팸플릿을 발행했다.[49] 팸플릿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비난을 반복하고 박해가 커뮤니티가 농촌 인구를 착취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마땅하다고 주장했다.[49]

5. 20세기

5. 1.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루마니아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는 1878년 직후에 시작되었다.[180] 그 수는 증가와 감소를 반복했으며, 러시아 제국에서 일어난 키시뇨프 포그롬 (1905년) 이후에는 베사라비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이주 붐이 일었다.[10] 1905년 포그롬 직전에 집필된 『유대인 백과사전』에는 "여행 경비를 충당할 수 있다면 적어도 70%의 유대인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확실하다"라고 적혀 있다.[10] 이주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1898년부터 1904년까지 다른 나라로 이주한 유대인은 7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것이 타당하다. 1900년에는 루마니아 유대인이 25만 명이었으며, 이는 전체 인구의 3.3%, 도시 거주자의 14.6%, 몰도바 도시 인구의 32%, 이아시의 42%에 해당한다.[10]

토지 문제와 토지 임대 관리인에 유대인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던 1907년의 루마니아 농민 폭동 (1907년)의 발단이 되었다.[50] 같은 시기, 반유대주의의 풍조가 처음으로 국민자유당의 지지 기반을 넘어 확대되었고 (당 자체에는 이 주장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51], 알렉산드루 C. 쿠자가 창설한 몰다비아를 기반으로 한 보다 급진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다. 즉, 루마니아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정당인 민주 민족주의당이다.[52] 반유대주의는 1920년대에는 국민자유당의 이념이 아니게 되었고, 좌익 진영이나 루마니아 민중 중심주의 (Poporanism)에서 유래하는 사조 (농민이 유대인에 의해 구조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에서도 높아졌다.[53]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882명의 유대인 군인이 루마니아를 방어하다 사망했고 (825명이 훈장을 받았다),[47]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와 그 이후의 조약에 의해 대 루마니아가 창설되었다. 확장된 국가는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트란실바니아의 공동체가 추가되면서 유대인 인구가 증가했다. 조약에 서명하면서 루마니아는 유대인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기로 합의하여 시민권과 소수 민족 권리를 모두 부여하고, 유대인의 효과적인 유대인 해방을 약속했다.[47] 1923년 루마니아 헌법은 이러한 요구 사항을 승인했으며, 쿠자의 국가 기독교 방위 동맹의 반대와 이아시에서 극우 학생들의 폭동에 직면했다.[54] 루마니아 토지 개혁은 이온 I. C. 브라티아누 내각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토지 임대와 관련된 문제도 해결했다. 전쟁 사이 기간 동안, 소련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 난민이 루마니아로 이주했다.[55][56][57]

전쟁 사이 기간 동안 유대인 공동체의 정치적 대표는 유대인당과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 연합[58]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개혁 유대교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통 유대교는 나머지 국가에서 의례적으로 분열되는 것이 분명해졌다[59] (반면 베사라비아는 시온주의, 특히 사회주의 노동 시온주의에 가장 열려 있었다).

대 루마니아의 현별 유대인 인구, 비젤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민족별로 728,115명의 유대인, 종교별로 756,93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1924년, A. L. 지수가 제작한 루마니아 시온주의 대학생 잡지 ''Hasmonaea'' 표지


반유대주의 메시지의 인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승하고 있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파시즘의 매력과 합쳐져서,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의 철위대의 창설과 성공,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반유대주의 담론 (''트러이리즘''과 ''겐디리즘'')의 출현에 기여했다. 고등 교육에서 ''유대인 할당량''에 대한 아이디어는 루마니아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60] 안드레이 오이스테아누의 분석에 따르면, 상당수의 우익 정치 지식인들은 A. C. 쿠자의 폭력적인 담론과 연관되어 평판이 좋지 않은 노골적인 반유대주의를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후 이러한 주의 사항은 버려지고, 반유대주의는 "영적 건강"으로 표시되었다.[61]

전문가 협회에서 유대인을 배제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은 1937년 5월 16일에 있었으며, 전문가 지식인 협회 연맹(''Confederația Asociațiilor de Profesioniști Intelectuali din România'')은 소속 단체에서 모든 유대인 회원을 배제하기로 투표했으며, 국가에 면허를 철회하고 시민권을 재평가할 것을 요구했다.[62] 불법이었지만, 이 조치는 인기가 있었고, 이 경우 합법성이 "영웅적 결정"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언급이 있었다.[62] 오이스테아누에 따르면, 이 이니셔티브는 다음 해에 통과된 반유대주의 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62]

1938년 1월 21일, 국왕 카롤 2세의 행정부 (쿠자와 옥타비안 고가가 이끌었음)는 시민권 기준을 검토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전 내각이 우크라이나 유대인이 불법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허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후),[47] 1918-1919년에 시민권을 받은 모든 유대인에게 이를 재신청하도록 요구했다 (20일의 매우 짧은 기간을 제공하면서);[64] 1940년 이온 기구르투 내각은 뉘른베르크 법에 상응하는 루마니아 법을 채택하여 유대교-기독교 종교 간 결혼을 금지하고, 인종적 기준에 따라 유대인을 정의했다 (한쪽 가족에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사람은 유대인으로 간주되었다).[66]

5. 2. 홀로코스트

루마니아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이온 안토네스쿠의 독재 아래 루마니아 통제하의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같은 곳에서 38만~4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살해됐다.[181][67]

=== 철위대 ===

1940년 10월 말부터 철위대는 대규모 반유대주의 캠페인을 시작하여,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구타했으며, 상점을 약탈했다. 이는 부쿠레슈티에서 쿠데타 실패와 포그롬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과정에서 12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165] 이온 안토네스쿠는 결국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철위대가 일으킨 폭력과 혼란을 멈췄지만, 유대인과 소규모의 로마족에 대한 압제와 학살 정책은 지속되었다.

=== 안토네스쿠 정권 ===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루마니아가 전쟁에 참전한 후, 유대인에 대한 잔혹 행위가 흔해졌는데, 이는 야시 포그롬에서 시작되었다. 1941년 6월 27일, 루마니아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야시 수비대의 지휘관인 콘스탄틴 루푸 대령에게 전화하여 공식적으로 "야시를 유대인으로부터 정화하라"고 지시했다. 루마니아 당국에 따르면 1941년 7월에 13,266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야시 거리에서 살해된 유대인, 어른과 아이들


야시 포그롬 희생자 기념비


1941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여러 도시(야시, 버커우, 체르나우치)에서 현지 차원의 주도로 노란색 배지가 부과되었다. 국가 정부가 부과한 유사한 조치는 안토네스쿠의 명령에 따라 폐지되기 전인 5일(1941년 9월 3일~9월 8일) 동안만 지속되었다.[166] 그러나 현지 주도로 배지는 특히 몰다비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버커우, 야시, 킴풀루엥 몰도비네스크, 보토샤니, 체르나우치 등)의 도시에서 여전히 착용되었다.[167]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동안 진격하는 루마니아군의 뒤를 따라, 안토네스쿠는 베사라비아와 부코비아의 모든 유대인들을 트랜스니스트리아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추방"은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이 과정의 일부는 "죽음의 열차"(실제로는 오랜 도보 행진)로 동쪽으로 보내기 전에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포함했다. 1941년 7월에서 9월까지 루마니아군과 루마니아 헌병대는 독일 국방군 및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여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에서만 45,000명에서 60,000명 사이의 유대인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13] 1941년~1942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도르호이, 레가트에서 추방된 총 인원은 154,449명에서 170,737명에 달했다.[13]

안토네스쿠의 처형 부대는 독일 아인자츠코만도, 현지 우크라이나 독일인의 SS 부대(존더코만도 러시아 및 젤브스트슈츠), 그리고 루마니아군이 트랜스니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체포한 현지 유대인들을 표적으로 삼은 우크라이나 민병대와 협력하여 추가 살해를 저질렀다. 이들 중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1941년과 1942년에 오데사 (1941년 오데사 학살 참조), 보그다노프카, 아크메체트카, 페초라와 같은 장소에서 대량 학살당했다.

안토네스쿠 정부는 또한 292,149명에 달하는 나머지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를 트랜스니스트리아 지역으로, 또는 독일 정부와 협력하여 벨제크 절멸 수용소로 대량 추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13]

유대인에 대한 정책 변화는 1942년 10월에 시작되었으며, 1943년 3월~4월까지 안토네스쿠는 독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영구적으로 모든 추방을 중단했다.[70] 그는 연합국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남은 유대인 공동체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또한, 안토네스쿠 정권의 격려로 13척의 배가 전쟁 동안 루마니아를 떠나 13,000명의 유대인을 태우고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이 배들 중 두 척은 소련에 의해 침몰되었고(스트루마 재해 참조), 독일의 압력이 가해진 후 이 시도는 중단되었다).

1943년 1월, 빌헬름 필더만은 트랜스니스트리아로 추방된 루마니아 유대인들의 송환을 시작하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와 회담을 시작했다. 1943년 11월 15일, 루마니아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49,927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트랜스니스트리아에 생존해 있었고, 이 중 6,425명은 원래 레가트 출신이었다. 1943년 12월, 부분적인 송환이 시작되었고, 1944년 3월, 안토네스쿠 정부는 트랜스니스트리아에서 추방된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송환을 명령했다. 1943년 12월 20일부터 1944년 3월 30일까지 약 11,000명(고아 포함)이 트랜스니스트리아의 여러 수용소와 게토에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마지막 대규모 추방자들의 송환을 조직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트랜스니스트리아에 남아있는 수만 명의 추방자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13]

=== 홀로코스트의 결과 ===

역사적, 정치적 상황은 루마니아 유대인의 운명을 지역에 따라 다르게 결정했으며, 전선과의 근접성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13] 사망자 총수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장 낮은 추정치도 약 250,000명의 유대인(플러스 약 11,000명이 살해된 25,000명의 로마니족)에 이른다.[13]

2004년 루마니아 정부가 발표한 비젤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80,000명에서 380,000명의 유대인이 루마니아 영토, 즉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루마니아의 통제하에 있던 점령된 소련 영토(트란스니스트리아 주)에서 살해되거나 다양한 형태로 사망했다.[12][13]

적어도 15,000명의 레가트 출신 유대인이 야시 포그롬과 기타 반유대주의 조치로 살해되었다.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및 루마니아의 이전 도로호이 현에 살던 270,000명에서 320,000명의 유대인 중 절반이 1941년 6월과 1943년 11월 사이에 살해되거나 사망했다. 1941년에는 루마니아와 독일 군대에 의해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서 45,000명에서 60,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104,522명에서 120,810명의 추방된 루마니아 유대인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추방으로 인해 사망했다. 무작위적인 초기 살해가 있은 후, 몰도바의 유대인들은 포그롬의 대상이 되었고,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도로호이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집중되어 루마니아인들이 건설하고 운영한 수용소를 포함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 주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루마니아 군인과 헌병은 또한 독일 아인자츠코만도, 우크라이나 민병대, 그리고 1940년 루마니아 국경 동쪽의 정복된 영토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현지 우크라이나계 독일인의 SS 분대와 협력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는 115,000명에서 180,000명의 토착 우크라이나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특히 오데사와 골타 및 베레조프카 지역에서 살해되었다.[13]

동시에 헝가리의 통제 하에 있던 135,000명의 유대인이 북트란실바니아에서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했다. 또한, 5,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다른 국가에서 홀로코스트로 살해되었다.[13]

1940년 국경 내에 살던 대부분의 루마니아 유대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강제 노동, 금전적 처벌, 차별적인 법률 등 광범위한 가혹한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해외에 살던 수천 명의 루마니아 유대인들은 루마니아의 외교적 보호를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의 총 숫자는 루마니아를 비젤 위원회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모든 동맹국 중에서 독일 자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유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13]

전후 기간 동안, 홀로코스트의 역사는 동유럽 공산 정권에 의해 왜곡되거나 단순히 무시되었다. 전범 재판은 1945년에 시작되어 195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만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13] 탈공산주의 루마니아에서 홀로코스트 부정은 만연한 현상이었고, 연구자들이 수많은 문서를 공개하기 전인 2004년까지 루마니아의 많은 사람들은 자국이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했다.[71] 루마니아 정부는 자국 영토에서 홀로코스트가 발생했음을 인정하고 2004년에 첫 번째 홀로코스트의 날을 개최했다.[72]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고 특히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 역할을 되돌아보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10월 9일을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5. 2. 1. 철위대

1940년 10월 말부터 철위대는 대규모 반유대주의 캠페인을 시작하여,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구타했으며, 상점을 약탈했다. 이는 부쿠레슈티에서 쿠데타 실패와 포그롬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과정에서 12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11] 이온 안토네스쿠는 결국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철위대가 일으킨 폭력과 혼란을 멈췄지만, 유대인과 소규모의 로마족에 대한 압제와 학살 정책은 지속되었다.

5. 2. 2. 안토네스쿠 정권

루마니아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이온 안토네스쿠의 독재 아래 루마니아 통제하의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같은 곳에서 38만~4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살해됐다.[181]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루마니아가 전쟁에 참전한 후, 유대인에 대한 잔혹 행위가 흔해졌는데, 이는 야시 포그롬에서 시작되었다. 1941년 6월 27일, 루마니아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야시 수비대의 지휘관인 콘스탄틴 루푸 대령에게 전화하여 공식적으로 "야시를 유대인으로부터 정화하라"고 지시했다. 루마니아 당국에 따르면 1941년 7월에 13,266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1941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여러 도시(야시, 버커우, 체르나우치)에서 현지 차원의 주도로 노란색 배지가 부과되었다. 국가 정부가 부과한 유사한 조치는 안토네스쿠의 명령에 따라 폐지되기 전인 5일(1941년 9월 3일~9월 8일) 동안만 지속되었다.[68] 그러나 현지 주도로 배지는 특히 몰다비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버커우, 야시, 킴풀루엥 몰도비네스크, 보토샤니, 체르나우치 등)의 도시에서 여전히 착용되었다.[69]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동안 진격하는 루마니아군의 뒤를 따라, 안토네스쿠는 베사라비아와 부코비아의 모든 유대인들을 트랜스니스트리아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추방"은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이 과정의 일부는 "죽음의 열차"(실제로는 오랜 도보 행진)로 동쪽으로 보내기 전에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포함했다. 1941년 7월에서 9월까지 루마니아군과 루마니아 헌병대는 독일 국방군 및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여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에서만 45,000명에서 60,000명 사이의 유대인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13] 1941년~1942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도르호이, 레가트에서 추방된 총 인원은 154,449명에서 170,737명에 달했다.[13]

안토네스쿠의 처형 부대는 독일 아인자츠코만도, 현지 우크라이나 독일인의 SS 부대(존더코만도 러시아 및 젤브스트슈츠), 그리고 루마니아군이 트랜스니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체포한 현지 유대인들을 표적으로 삼은 우크라이나 민병대와 협력하여 추가 살해를 저질렀다. 이들 중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1941년과 1942년에 오데사 (1941년 오데사 학살 참조), 보그다노프카, 아크메체트카, 페초라와 같은 장소에서 대량 학살당했다.

안토네스쿠 정부는 또한 292,149명에 달하는 나머지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를 트랜스니스트리아 지역으로, 또는 독일 정부와 협력하여 벨제크 절멸 수용소로 대량 추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13]

유대인에 대한 정책 변화는 1942년 10월에 시작되었으며, 1943년 3월~4월까지 안토네스쿠는 독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영구적으로 모든 추방을 중단했다.[70] 그는 연합국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남은 유대인 공동체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또한, 안토네스쿠 정권의 격려로 13척의 배가 전쟁 동안 루마니아를 떠나 13,000명의 유대인을 태우고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이 배들 중 두 척은 소련에 의해 침몰되었고(스트루마 재해 참조), 독일의 압력이 가해진 후 이 시도는 중단되었다).

1943년 1월, 빌헬름 필더만은 트랜스니스트리아로 추방된 루마니아 유대인들의 송환을 시작하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와 회담을 시작했다. 1943년 11월 15일, 루마니아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49,927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트랜스니스트리아에 생존해 있었고, 이 중 6,425명은 원래 레가트 출신이었다. 1943년 12월, 부분적인 송환이 시작되었고, 1944년 3월, 안토네스쿠 정부는 트랜스니스트리아에서 추방된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송환을 명령했다. 1943년 12월 20일부터 1944년 3월 30일까지 약 11,000명(고아 포함)이 트랜스니스트리아의 여러 수용소와 게토에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마지막 대규모 추방자들의 송환을 조직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트랜스니스트리아에 남아있는 수만 명의 추방자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13]

철위대와 민족주의 연립 정권이 1942년에 수립된 이후 80개에 달하는 반유대주의 규정이 의회를 통과했다. 1940년 10월 말에 시작된 철위대의 강력한 반유대주의 운동은 유대인에게 고문을 가하고 상점을 약탈했으며, 부쿠레슈티에서 일어난 민족 봉기와 포그롬으로 정점에 달해 12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165]이온 안토네스쿠는 즉시 폭력을 중단시키고 철위대가 초래한 혼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철위대가 숙청되자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안토네스쿠 정권은 압제와 유대인 학살, 그리고 소수의 로마인 학살을 계속했다.

1941년 7월부터 8월까지 이아시, 바커우, 체르나우치 등의 도시에서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여 유대인에게 노란색 배지를 강제했다. 이와 유사한 조례가 정권에 의해 불과 5일(1941년 9월 3일부터 8일까지)간 시행되었지만 안토네스쿠의 명령으로 무효가 되었다[166]。그러나 지역의 발의에 따라 특히 몰다비아와 베사라비아, 부코비나의 여러 도시(바커우, 이아시, 컴플루룽, 보토샤니, 체르나우치 등)에서 이 배지가 계속 부착되었다[167]

2004년 루마니아 정부가 발행한 국제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루마니아 국내, 전장이었던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28만 명에서 38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살해되었다[168][169]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진군하는 루마니아군은 유대인 유격대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안토네스쿠 장군은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유대인 추방을 명령했다. 그 결과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 있던 8만 명에서 15만 명 사이의 유대인이 국가적 선전으로 공산주의자의 하수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추방"은 완곡한 표현이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죽음의 열차"에 유대인이 추방되기 전에 이 추방 과정의 일부가 많은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에서 최초의 '민족 청소'에서 살아남은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열차에 탑승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또한 안토네스쿠의 살해 담당반에 의한 유대인 표적 살해가 이루어졌다. 루마니아군은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을 때 유대인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수한 유대인들이 오데사, 보그다노브카, 악메체트카 강제 수용소 등지에서 1941년과 1942년에 학살되었다. 오데사에서 1941년 가을부터 1942년에 걸쳐 발생한 오데사 학살에서는 루마니아군에 의해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총살되었다.

안토네스쿠는 1943년 나치 독일로부터 압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추방을 중단했다. 그는 연합국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남아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 중과세를 부과하고 강제 노동을 강요했다. 안토네스쿠 정권의 장려로 인해 전시 중 13척의 난민선이 루마니아를 떠나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이 보트에는 13,000명의 유대인이 탑승했다. 독일의 압력이 가해진 후 국외 탈출 노력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옛 루마니아, 드로호이 현에 살던 32만 명의 유대인 중 절반이 루마니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1941년 몇 달 동안 살해되었다. 최초의 학살 이후에도 몰다비아, 부코비나, 베사라비아의 유대인은 추가적인 포그롬에 시달렸고 게토에 모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러한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운영한 것은 루마니아인이었다. 이 지역의 사망자 수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최소 추산으로 약 25만 명의 유대인(그리고 2만 5천 명의 로마인)이 동부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한편, 트란실바니아에 있던 15만 명의 유대인 중 12만 명이 전시 중 헝가리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루마니아군은 점령한 지역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독일의 아인자츠코만도와 함께 행동했다. 안토네스쿠 정부는 루마니아 구 왕국에서 벨제크 강제 수용소로 많은 유대인을 추방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엘리 비젤 위원회에 따르면 루마니아는 "추축국 전체 중에서 독일 본국 외 다른 국가들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간주된다[169]

5. 2. 3. 홀로코스트의 결과

루마니아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이온 안토네스쿠의 독재 아래 루마니아 통제하의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같은 곳에서 38만~40만 명의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살해됐다.[181] 역사적, 정치적 상황은 루마니아 유대인의 운명을 지역에 따라 다르게 결정했으며, 전선과의 근접성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13] 사망자 총수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장 낮은 추정치도 약 250,000명의 유대인(플러스 약 11,000명이 살해된 25,000명의 로마니족)에 이른다.[13]

2004년 루마니아 정부가 발표한 비젤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80,000명에서 380,000명의 유대인이 루마니아 영토, 즉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루마니아의 통제하에 있던 점령된 소련 영토(트란스니스트리아 주)에서 살해되거나 다양한 형태로 사망했다.[12][13]

적어도 15,000명의 레가트 출신 유대인이 야시 포그롬과 기타 반유대주의 조치로 살해되었다.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및 루마니아의 이전 도로호이 현에 살던 270,000명에서 320,000명의 유대인 중 절반이 1941년 6월과 1943년 11월 사이에 살해되거나 사망했다. 1941년에는 루마니아와 독일 군대에 의해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서 45,000명에서 60,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104,522명에서 120,810명의 추방된 루마니아 유대인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추방으로 인해 사망했다. 무작위적인 초기 살해가 있은 후, 몰도바의 유대인들은 포그롬의 대상이 되었고,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도로호이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집중되어 루마니아인들이 건설하고 운영한 수용소를 포함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 주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루마니아 군인과 헌병은 또한 독일 아인자츠코만도, 우크라이나 민병대, 그리고 1940년 루마니아 국경 동쪽의 정복된 영토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현지 우크라이나계 독일인의 SS 분대와 협력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는 115,000명에서 180,000명의 토착 우크라이나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특히 오데사와 골타 및 베레조프카 지역에서 살해되었다.[13]

동시에 헝가리의 통제 하에 있던 135,000명의 유대인이 북트란실바니아에서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추방되어 사망했다. 또한, 5,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다른 국가에서 홀로코스트로 살해되었다.[13]

1940년 국경 내에 살던 대부분의 루마니아 유대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강제 노동, 금전적 처벌, 차별적인 법률 등 광범위한 가혹한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해외에 살던 수천 명의 루마니아 유대인들은 루마니아의 외교적 보호를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의 총 숫자는 루마니아를 비젤 위원회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모든 동맹국 중에서 독일 자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유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13]

전후 기간 동안, 홀로코스트의 역사는 동유럽 공산 정권에 의해 왜곡되거나 단순히 무시되었다. 전범 재판은 1945년에 시작되어 195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만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13] 탈공산주의 루마니아에서 홀로코스트 부정은 만연한 현상이었고, 연구자들이 수많은 문서를 공개하기 전인 2004년까지 루마니아의 많은 사람들은 자국이 홀로코스트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했다.[71] 루마니아 정부는 자국 영토에서 홀로코스트가 발생했음을 인정하고 2004년에 첫 번째 홀로코스트의 날을 개최했다.[72]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고 특히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 역할을 되돌아보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10월 9일을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7월부터 8월까지 이아시, 바커우, 체르나우치 등의 도시에서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여 유대인에게 노란색 배지 (유대인을 나타내는 다윗의 별 모양)를 강제했다. 이와 유사한 조례가 정권에 의해 불과 5일(1941년 9월 3일부터 8일까지)간 시행되었지만 안토네스쿠의 명령으로 무효가 되었다.[166]。그러나 지역의 발의에 따라 특히 몰다비아와 베사라비아, 부코비나의 여러 도시(바커우, 이아시, 컴플루룽, 보토샤니, 체르나우치 등)에서 이 배지가 계속 부착되었다.[167]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진군하는 루마니아군은 유대인 유격대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안토네스쿠 장군은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유대인 추방을 명령했다. 그 결과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 있던 8만 명에서 15만 명 사이의 유대인이 국가적 선전으로 공산주의자의 하수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추방"은 완곡한 표현이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죽음의 열차"에 유대인이 추방되기 전에 이 추방 과정의 일부가 많은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에서 최초의 '민족 청소'에서 살아남은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열차에 탑승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또한 안토네스쿠의 살해 담당반에 의한 유대인 표적 살해가 이루어졌다(공문서가 그의 직접적인 명령과 연루를 증명했다). 루마니아군은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을 때 유대인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수한 유대인들이 오데사, 보그다노브카, 악메체트카 강제 수용소 등지에서 1941년과 1942년에 학살되었다. 오데사에서 1941년 가을부터 1942년에 걸쳐 발생한 오데사 학살 ()에서는 루마니아군에 의해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총살되었다.

안토네스쿠는 1943년 나치 독일로부터 압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추방을 중단했다. 그는 연합국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남아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 중과세를 부과하고 강제 노동을 강요했다. 안토네스쿠 정권의 장려로 인해 전시 중 13척의 난민선이 루마니아를 떠나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이 보트에는 13,000명의 유대인이 탑승했다(13척 중 2척이 침몰했다. 독일의 압력이 가해진 후 국외 탈출 노력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옛 루마니아, 드로호이 현에 살던 32만 명의 유대인 중 절반이 루마니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1941년 몇 달 동안 살해되었다. 최초의 학살 이후에도 몰다비아, 부코비나, 베사라비아의 유대인은 추가적인 포그롬에 시달렸고 게토에 모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러한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운영한 것은 루마니아인이었다. 이 지역의 사망자 수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최소 추산으로 약 25만 명의 유대인(그리고 2만 5천 명의 로마인)이 동부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한편, 트란실바니아에 있던 15만 명의 유대인 중 12만 명이 전시 중 헝가리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루마니아군은 점령한 지역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독일의 아인자츠코만도(친위대가 운영한 준군사 조직, 아인자츠그루펜의 한 부서)와 함께 행동했다. 안토네스쿠 정부는 루마니아 구 왕국(19세기 중반 2개 공국이 합병하여 루마니아 공국이 된 당시 영토)에서 벨제크 강제 수용소로 많은 유대인을 추방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동유럽 및 중유럽의 많은 국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다수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넓은 연령대에서 강제 노동, 재정적 형벌, 차별적인 법률과 같은 가혹한 상황에서 생존했다. 그러나 희생자의 수는, 엘리 비젤 위원회에 따르면 루마니아는 "추축국 전체 중에서 독일 본국 외 다른 국가들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간주된다[169]

5. 3. 홀로코스트 부정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특히 루마니아 공산정권 시절,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과 학습은 금기시됐다. 교과서들이 유대인과 루마니아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과정에서 루마니아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지는 못했다. 루마니아 사회에는 아직도 홀로코스트 부정이 만연해 있다.[182][73]

1945년부터 1989년까지 동구권 시대에는 정부가 역사 교육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183][74] 제2차 세계 대전이 거론됐을 때 교과서들은 루마니아가 히틀러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했고, 교과서들이 루마니아가 나치에 협력했다고 언급했을 때 루마니아가 실제로 민족의 독립을 잃고 독일에 점령당했다고 서술했지만 나치를 돕고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183] 홀로코스트에 대한 언급은 무시되고 누락돼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유대인 학살을 교과서들이 언급했을 때는 광택이 나거나 축소되거나 왜곡됐다.[183][74] 홀로코스트가 언급됐을 때는 짧은 시간에 또 한 번의 전쟁 희생자로 그려졌고, 유럽에서 루마니아의 탁월한 위상을 언급하면서 국가의 책임을 숨겼다. 교과서들은 대신 공산주의자들을 나치의 주요 피해자로 그렸다.[183][74]

홀로코스트 교육은 공산주의 이후의 루마니아에서 시행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루마니아의 민주화는 1989년 12월에 시작되었지만 홀로코스트 교육이 이슈로 제기되고 법이 통과되기까지 1999년까지 10년이 걸렸다. 홀로코스트 교육은 1999년에 수용되었지만, 정부가 홀로코스트의 잔혹함과 그것에서 그들의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 교육 과정을 공고히 하는 데는 몇 달이 걸렸다.[184][75]

2021년 현재, 루마니아는 홀로코스트 부정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2004년 국제 홀로코스트 기억 동맹에 가입했으며 2016년 의장직을 이어받았으며, 홀로코스트 교육을 둘러싼 행사를 지속적으로 조직하고 후원했다.[185][76] 2021년, 홀로코스트 부정에 대한 첫 번째 선고가 이 나라에서 내려졌다. 피고인은 전 루마니아 정보국(SRI) 회원으로 홀로코스트의 진실성에 반대하는 글과 책을 여러 권 출판했다.[186] 특히, 피고인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성에 반하는 여러 기사와 책을 출판한 전 루마니아 정보국(SRI) 요원 바실 자르네스쿠(Vasile Zărnescu)였다.[77]

5. 4. 전후 유대인 사회

참고 항목: 이스라엘의 루마니아 유대인

Wiesel 위원회에 따르면 최소 290,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 하워드 M. 사차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360,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생존해 있었다고 추정했다. 전쟁 말 통계에 따르면 355,972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루마니아 영토에 거주했다.

전후 루마니아 유대인들은 브리차와 알리야를 통해 팔레스타인 및 이스라엘로 대규모 이민을 떠났다. 사차르에 따르면, 전후 2년 동안 수만 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 루마니아 정부는 역사적으로 의심받고 가난해진 유대인 소수 민족을 줄이려는 열망 때문에 그들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 시오니즘은 다시 의심을 받게 되었고, 루마니아 정부는 시오니스트 기금과 훈련 농장에 대한 제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민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루마니아 외무 장관 아나 파우커는 이스라엘 대사 르우벤 루빈과 협상하여 매달 4,000명의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 결정은 유대인 기구의 뇌물에 영향을 받았으며, 몰락한 사업가와 경제적으로 "불필요한" 유대인들에게 주로 적용되었다. 이스라엘은 루마니아 정부와 또 다른 협정을 체결하여 100,000개의 출국 비자를 발급받고, 루마니아 석유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석유 시추 장비와 파이프를 공급했다. 1951년 12월까지 약 115,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이후 공산주의 루마니아로 전환되는 동안, 유대인 사회와 문화는 당국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공동체 지도자 빌헬름 필더만은 1945년에 체포되었고 1948년에 국외로 도피해야 했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전쟁 범죄로 사형되었다. 1946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는 유대인 단체 회의에 참석하여 루마니아 공산당의 부서인 '유대인 민주 위원회' 창설을 요구했다.

1947년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선포 후, 루마니아 공산당은 1948년 모든 유대인 단체를 불법화하고 반동적인 민족주의 유대인 경향(시오니즘)에 강력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선언했다. 1952년과 1953년 사이, 스탈린주의 반유대주의 혐의로 당 지도부가 숙청되었고, 이는 이오시프 키시네프스키가 조작한 재판을 시작으로 유대인 공동체에 가해졌다. 시오니스트로 인식된 유대인들은 피테슈티 감옥에서 고문세뇌 실험을 받았다. 다뉴브-흑해 운하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1952년 재판에는 시오니즘 혐의도 포함되었다.

냉전 시대에 루마니아는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은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였다. 루마니아는 이스라엘의 경제 지원을 대가로 제한적인 수의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했다. 1965년까지 이스라엘은 루마니아 전역에서 농업 및 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고, 루마니아는 유대인의 이민을 허용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집권 이후, 그는 동구권의 아랍 동맹국을 위해 이 거래를 중단하려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은 유일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였으며, 1969년까지 차우셰스쿠는 유대인을 이스라엘로부터 현금으로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원했지만, 현금이 필요했다. 그 결과, 1989년까지 매년 약 1,500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의 출국 비자를 받았으며, 이스라엘은 이민자 1인당 최소 2,000달러를 지불했고, 의사나 과학자의 경우 25,000달러까지 지불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루마니아에 대출을 확보하고 이자를 지불했으며, 루마니아 군대에 군사 장비를 공급했다.

알리야의 결과,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고갈되었다. 1987년까지 루마니아에는 23,000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있었고, 그 중 절반이 65세 이상이었다. 1980년대에 루마니아 유대인은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로 큰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에는 여전히 활동적인 시나고가가 있는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디시어 극장이 운영되고 있다.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유대교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이 부활하고 있다. 묘비 파괴와 같은 반유대주의 행위가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매우 드물다. 2016년, 루마니아 유대인 인구는 9,300명에서 17,000명 사이로 추정되었다. 루마니아에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3,0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소수의 유대인 이민자도 있다. 매년 수십 명의 이스라엘의 루마니아 유대인 가족이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레디 유대교와 하시디즘도 루마니아에 존재한다. 하바드는 부쿠레슈티에 예슈아 토바 시나고가, 코셔 레스토랑, 유대인 유치원, 유대인 학교 및 청소년 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볼룬타리와 클루지에 2개의 커뮤니티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사트마르는 루마니아에 공동체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21년, 시게투 마르마티에이에 시나고가가 개관되었고, 호텔, 코셔 레스토랑 및 유대인 학교가 건설 중이다.

2021년 현재, 오라데아에 랍비 신학교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 연맹 정당은 루마니아 의회 하원인 하원에서 한 석을 차지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40명의 유대인 고아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루마니아와 몰도바 공화국으로 피신했다.

2024년 1월 29일, 이슬람으로 개종한 두 여성은 시게투 마르마티에이의 사트마르 시나고가 울타리에 낙서를 하여 "자유 팔레스타인"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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