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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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의태자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로, 신라 멸망 후 고려에 항복하지 않고 개골산에 은거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관련 기록이 있으나, 그의 이름과 후손에 대한 기록은 논란이 있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마의태자와 관련된 민간 전승이 존재하며, 신라 부흥 운동을 준비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광수와 유치진의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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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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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목록 | 신라의 태자 |
휘 | 김일 (金鎰) 또는 김일 (溢) |
별호 | 마의태자 (麻衣太子) |
가계 | |
왕조 | 신라 |
부왕 | 신라 경순왕 |
어머니 | 죽방부인 |
형제자매 | 김덕지, 헌숙왕후 |
생애 | |
활동 시기 | 10세기 |
2. 역사적 기록과 논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왕자로 알려진 마의태자는 935년 부왕이 고려에 항복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고 금강산(개골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5] 이러한 행적은 주로 《삼국사기》를 통해 알려져 있으나, 사서에는 그의 이름이나 '태자'라는 지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널리 알려진 '마의태자'라는 호칭과 그에 얽힌 이야기 상당수는 후대에 형성되거나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 기록의 부족함과 모호함으로 인해 마의태자의 정확한 신분(왕자인지 태자인지), 실명, 그리고 후손의 존재 여부 등을 둘러싸고 여러 해석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그의 동생 덕지 왕자 역시 형을 따라 입산 후 승려(범공)가 되었다는 기록[6]과, 《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이름 미상의 또 다른 왕자 역시 항복을 반대하고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 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왕후 죽방부인 사이의 첫째 왕자이다.[5] 사서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단지 '왕자'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장자나 태자라는 언급은 없다. 후대에 그를 태자로 부르거나, 마의를 입고 살았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의태자'라고 칭하게 되었다. 현재 전하는 마의태자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은 후대의 소설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삼국사기》에 따르면, 935년(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 세력에 압박을 받아 국세가 약화되고 고립되어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경순왕은 여러 신하와 함께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넘겨줄 것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마의태자는 동생 덕지 왕자, 이순유 등과 함께 항복을 강하게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5]
>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5]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 而後已 豈冝以 一千年社㮨 一旦輕以與人 - 《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항복 의사를 굳혔다.[5]
>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5]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 《삼국사기》)
결국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고려 태조에게 보내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5] 이에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개골산(지금의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5]
마의태자의 동생 덕지 왕자 역시 처자식을 버리고 마의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고, 법명은 범공(梵空)이라 하였다. 그는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며 도를 닦고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6]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왕자 역시 경순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처자식을 버리고 마의태자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2. 2. 마의태자의 이름과 후손 논란
사서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단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왕자라고만 기록되어 있다.[5] 그가 장자였는지, 혹은 태자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 역시 없다. '태자' 또는 마의를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살았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마의태자'라는 호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마의태자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은 후대의 소설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일부 신라계 김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이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족보에 마의태자를 시조로 기록한다. 이들 족보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며, 자(字)는 겸용(謙用)이라고 적혀 있다. 또한, 슬하에 김선웅(金善雄)과 김순웅(金順雄)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서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고려사》에는 931년(고려 태조 14년) 경순왕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보내 고려 태조와의 만남을 청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동국사략》에도 '태수(太守) 겸용(謙用)'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를 '태자(太子) 겸용(謙用)'으로 혼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마의태자에게 후손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사서에는 신라가 망할 당시 마의태자의 나이나 부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만약 그에게 부인과 어린 자식이 있었다면, 함께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고, 그 후손들은 고려 중기 본관 제도가 등장하면서 어느 김씨의 시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력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해당 문중들의 족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마의태자가 처자식을 죽이고 금강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어[9], 후손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후사가 끊겼을(절손)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기록한 족보도 존재한다. 하지만 만약 김부식이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었다면, 자신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마의태자의 이름, 행적, 부인과 아들들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해당 족보는 위조된 보첩(위보)일 가능성이 높다.[9] 따라서 자신들을 마의태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부안 김씨나 경주 김씨 태자파 등은 족보 위조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3. 마의태자와 신라부흥운동설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 후 단순히 금강산에 은거한 것이 아니라, 고려에 맞서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설이 민간 전승을 통해 전해진다. 이러한 주장은 마의태자가 혼자가 아닌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이동했으며[7], 그가 거쳐간 여러 지역에 군사적 준비나 국권 회복과 관련된 의미를 가진 지명이 남아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는 정식 역사 기록이 아닌 구전되는 설화와 지명 유래에 기반한 해석이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3. 1. 금강산과 인제 지역의 전승
신라가 멸망한 뒤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 외에는, '마의 태자'에 대한 명확한 공식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다만 '마의 태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한 민간 전승이 다수 전해진다.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으며, 옆에는 그가 타던 용마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의 용마석도 있다. 이 무덤은 둘레 약 10m, 높이 1.5m로 일반적인 무덤보다 조금 큰 규모이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이 여럿 남아 있다. 상남면의 옥새바위는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해지는 바위이며, 김부리 어귀의 수거너머는 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이다. 김부리라는 지명 자체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신라 김부대왕(경순왕)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김부대왕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는 건립 연대가 불분명한 비각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김부대왕각」이라 부르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대왕각 안에는 경순왕의 태자라고 전해지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져 있다.
대왕각 위패에는 본래 「신라경순왕제일자지신위(新羅敬順王第一子之神位)」, 즉 '신라 경순왕 첫째 아들의 신위'라고 새겨져 있었으나, 1940년대 이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 즉 '신라 경순대왕 태자 김일 공의 신위'로 변경되었다. 현재 위패에 새겨진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이후 후손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새로 새겨 넣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의 태자가 단순히 은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제로는 경순왕이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었으며[7], 그중 맹장군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딴 맹개골이라는 마을 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했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도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의미의 '다물'이라는 용례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운동을 준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 태자 관련 전설이 많이 남은 곳은 충주시이다. 이곳에는 마의 태자와 그의 동생 덕지 왕자(또는 덕주 공주)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절에 들러 짚고 있던 지팡이를 꽂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러한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2000년 답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 경로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2000년 4월 15일 방영된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 편에서, 마의 태자 전승 지역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동해안 길이 아닌 내륙에 집중된 점에 주목했다. 제작팀은 경주에서 계립령을 넘어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경로를 상정했다. 그리고 해당 지역들이 신라 시대 제2의 수도로 불렸거나(충주), 외부와 차단된 요새(미륵대원 터, 덕주사)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중 천혜의 요새를 택해 이동하며 뜻을 같이할 세력을 규합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 짓는 강원도 전승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고려 항복 후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은 신하들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그를 정승으로 삼고 신란궁(神鸞宮)을 저택으로 하사했으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사심관 제도는 해당 지역 연고자에게 행정을 맡겨 지방 세력을 우대하고 중앙 통치를 원활히 하려는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지방에 계속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또한 개경행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고려해도, 그 경로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8]을 볼 때, 경순왕이 직접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등 관련 지명은 경순왕 본인보다는 그와 관련된 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물론 '경순왕' 시호는 사후에 붙여졌고 생전에는 본명 '김부'로 불렸을 수 있으므로, 실제 경순왕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 호장 김부(金富)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보살폈다는 전승이 있다. 대왕각 인근에서 발견된 갑둔리 5층 석탑은 마의 태자 유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 탑에는 김부(金富)의 제자 구(仇)가 "김부의 장수와 구(仇) 집안의 번영을 바라며 세웠다"는 내용과 함께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명문의 김부(金富)가 신라의 김부(경순왕) 혹은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갑둔리 5층 석탑에서는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 16년 병자(1036년)」 명문이 확인되었고, 이는 탑의 조성 시기로 여겨진다. 태평 16년은 고려 정종 2년으로, 마의태자 시대보다 약 100년 뒤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지명이나 유적은 마의 태자보다는 거란이나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마의 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는 주장은 1784년(정조 8년) 개성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 근거한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경순왕은 고려 항복 후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 왕씨 등을 부인으로 맞아 8명의 아들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을 두었다고 한다. 또한 둘째 굉(鍠)과 넷째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에서 평장사를 지냈고 공이 커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편찬하며 이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하고 아들들의 이름을 바꾸거나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을 심하게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과정을 거쳐 경주 김씨 족보류에 경순왕 아들들의 이름과 서열이 기록되기 시작했고, 마의 태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아들은 《고려사》 등 정식 역사 기록은 물론, 다른 어떤 금석문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의 생애나 배우자 등에 대한 기록이 없고 형제 순서만 기술되어 있어 완전한 묘지명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이 《묘지명》은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며, 후대에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현재 마의 태자의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 위패의 「김일(金鎰)」이 정말 그의 본명인지를 명확히 증명할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마의태자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는 명확한 사료 부족으로 인해 여전히 전설과 추측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3. 2. 충주, 양평, 홍천 지역의 전승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 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이다. 충주 월악산 자락에는 마의 태자와 그의 동생 김덕지(또는 덕주공주)가 각각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가 있다.[7] 충주 미륵대원지 전설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그의 동생(덕주공주 설)이 월악산에 덕주사를 짓고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마의태자는 북쪽을 향하는 석굴(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세워 덕주사를 마주보게 했다고 한다.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라났다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전설이 있다. 강원도 홍천군에서 인제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마의 태자 전승과 관련된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2000년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답사하고 그의 북행 경로를 추적했다. 제작팀은 마의 태자의 이동 경로가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동해안 길이 아니라, 계립령을 넘어 충주, 양평,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내륙 경로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를 근거로, 마의 태자가 단순히 은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주요 거점 도시(당시 제2의 수도로 불리던 충주 등)와 외부와 차단된 천혜의 요새(미륵대원 터, 덕주사 등)를 거치며 신라 부흥을 위한 세력을 규합하려 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3. 3. 전승의 해석과 한계
신라가 멸망한 뒤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 외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다만 '마의태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한 민간 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신라마의태자릉〉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옆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을 가진 용마석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m, 높이 1.5m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큰 편이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의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해지는 바위), 김부리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신라 김부대왕(경순왕)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김부대왕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는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비각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김부대왕각」이라 부르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대왕각 안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져 있다.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원래 「신라경순왕제일자지신위(新羅敬順王第一子之神位)」라고 새겨져 있었으나, 1940년대 이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로 변경되었다. 즉, 현재 위패에 새겨진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이후에 새로 새겨진 것이다.
또한 마의태자가 단지 은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제로는 스스로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도 흥미롭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으며[7], 그중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맹개골이라는 마을 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했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시이다. 이곳에는 마의태자와 그의 동생 덕지 왕자(또는 덕주 공주)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러한 '마의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2000년에 답사하고 마의태자의 북행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2000년 4월 15일에 방영된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 편에서, 마의태자 전승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길이 아닌 내륙에 집중된 점에 주목했다. 제작팀은 경주에서 계립령을 넘어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북행 루트를 상정했다. 그리고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 제2의 수도로 불렸거나(충주의 경우),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중에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이동하며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강원도 각지의 전승을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직접 연관 짓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고려에 항복한 뒤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그를 정승으로 삼고 신란궁(神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었으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사심관 제도는 해당 지역 연고자에게 행정을 맡겨 지방 출신 관리를 우대하고 중앙 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고지에 계속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 경로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8]을 볼 때,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등의 지명은 경순왕 본인보다는 그와 관련된 주변 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다만 '경순왕'이라는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이름인 '김부'로 불렸을 수 있으므로, 실제 경순왕을 가리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한편,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방 민심을 보살폈다는 전승이 있다. 대왕각 근처에서 발견된 갑둔리 5층 석탑은 마의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 탑에는 김부(金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仇)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과 함께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이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여기서 말하는 김부(金富)가 실제로는 신라의 김부(즉, 경순왕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 위패에 새겨진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인지를 증명할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갑둔리 5층 석탑 역시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대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탑의 조성 시기로 여겨진다. 태평 16년, 즉 정종 2년(1036년)은 마의태자가 활동했던 시기보다 약 100년 뒤의 일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지명이나 유적들은 마의태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거란이나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마의태자 관련 전승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확증하기에는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다.
4. 후세의 평가와 문화적 영향
신라가 멸망할 때 대부분의 귀족들은 고려에 항복하여 왕건이 주는 벼슬과 녹봉을 받으며 안락한 삶을 택했지만,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이 왕자(마의태자)는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키려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나라를 고려에 넘기려는 아버지 경순왕에게 반대하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후대에 높이 평가받았는데, 특히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유교적 대의명분에 비추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인과 학자들이 그의 의로운 선택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마의태자'라는 이름과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일제 강점기 이광수의 소설과 유치진의 희곡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들은 마의태자를 망국의 한을 품은 비운의 왕자 이미지로 형상화하며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4. 1.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재조명
신라가 멸망할 때 다른 귀족들은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이 주는 벼슬과 녹봉을 받으며 호사를 누렸지만,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이 왕자(마의태자)는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태자의 신분으로,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아버지 경순왕과 고려에 맞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선 시대에 들어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높이 평가받으며 재조명되었다.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자수는 《상촌집》에서, 조선 중기의 문인들인 신흠과 윤증 등은 자신들의 한시 작품에서 그의 행적을 '초의' 또는 '신라 왕자'로 칭하며 칭찬했지만, '마의태자'라는 명칭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조선 중기 문신 오운은 그의 저서 《동사찬요》에서 왕자가 신라를 고려에 넘기는 것에 반대하며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왕자의 의로운 기개는 중국 촉한이 멸망할 때의 북지왕 유심과 더불어 해와 달의 빛을 다툴 만한데, 동방의 문헌에 이름조차 전하지 않고 묻힌 것이 안타깝다"고 기록하며 매우 높게 평가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 역시 자신의 저서 《동사강목》에서 "태자가 없었더라면 천년 사직의 군자 나라(신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충절을 기렸다.
4. 2. 이광수와 유치진의 작품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일제 강점기 이광수가 쓴 소설 '마의태자' 덕분이다. 이 소설은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1928년 1월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내용은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금강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마의태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4]이후 1937년 극작가 유치진 역시 『동아일보』를 통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희곡을 발표했다. 이 두 작품은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에게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4. 3. 대중문화 속 마의태자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했던 역사 소설 《마의태자》를 통해서였다. 이 소설은 1928년 1월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망국의 한을 달랜 마의태자의 삶을 그렸다.[4]1937년에는 극작가 유치진이 《동아일보》를 통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희곡을 발표하면서,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릿속에 더욱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마의태자는 여러 드라마에서도 다루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마의태자(麻衣太子)
http://encykorea.aks[...]
2018-04-18
[2]
뉴스
마의태자
http://terms.naver.c[...]
2018-04-18
[3]
웹사이트
마의태자는 어느 집안 조상인가?
http://weekly.chosun[...]
2023-04-21
[4]
웹사이트
마의태자(麻衣太子)
http://encykorea.aks[...]
2018-05-06
[5]
문서
[6]
문서
[7]
뉴스
'[박성수교수의 역사 뒷이야기]'
http://www.donga.com[...]
[8]
문서
[9]
웹사이트
《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
http://pub.chosun.co[...]
김정현(金丁鉉. 역사저술가)
201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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