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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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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종은 고려의 제8대 왕으로, 휘는 순, 자는 안세이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으며, 거란의 두 차례 침입을 겪었으나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이를 막아냈다. 이후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끌었으며,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초조 대장경을 간행했다. 1031년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능은 선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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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현종 (顯宗)
왕순 (王詢)
작호대량원군 (大良院君)
출생일992년 8월 6일 (양력)
출생지고려 개성부 헌정왕후 사저
사망일1031년 6월 23일 (양력)
사망지고려 개경 정궁 중광전
재위1009년 3월 8일 ~ 1031년 6월 23일 (양력)
능호선릉 (宣陵)
법명선재 (禪齋)
묘호현종 (顯宗)
시호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 (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왕조고려
왕가왕씨
즉위
즉위년도1009년
즉위 장소연경전, 개성, 고려
가족 관계
부친안종
모친헌정왕후 황보씨
형제자매1남 1녀 중 장남
배우자원정왕후 김씨 (1009년 결혼, 1018년 사망)
원화왕후 최씨
원성왕후 김씨 (1011년 결혼, 1028년 사망)
원혜왕후 김씨 (1022년 사망)
원용왕후 유씨 (1013년 결혼)
원목왕후 서씨 (1022년 결혼)
원평왕후 김씨 (1022년 결혼)
원순숙비 김씨 (1024년)
귀비 왕씨
귀비 유씨
자녀왕자:
왕흠
왕수
왕형
왕휘
왕기
왕충
공주:
효정공주
천수공주
인평왕후
경숙공주
효사왕후
효경공주
경성왕후
아지
재위 정보
이전 국왕목종
다음 국왕덕종
사후 이름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
시호현종 (顯宗)

2. 주요 이력

연도사건
992년태조의 손자이자 안종 왕욱헌정왕후 황보씨의 사생아로 출생. 출생 직후 어머니 사망, 아버지 안종 왕욱은 유배.[1]
어린 시절성종이 궁궐에서 양육, 안종 왕욱에게 돌아갔으나 4세 때 아버지 사망.[1]
1003년목종에 의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책봉.[1]
1006년천추태후의 강요로 승려가 되어 절에 유폐, 여러 차례 암살 위협을 받음.[1]
1009년강조의 정변으로 목종 폐위,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당시 18세).[1]
1010년거란의 2차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 강감찬의 활약으로 위기 극복.[2]
1011년개경 황성 증축, 태조의 뜻을 받들어 장락궁에 새 황성 축조.
1019년거란의 3차 침입, 귀주대첩에서 강감찬 등이 거란군 격파.[3]
여요전쟁 이후국가 제도 정비, 왕권 강화, 중앙집권화 추진, 연등회팔관회 부활.
-고려실록 재편찬, 초조 대장경 간행, 현화사 건립 지시.
-유교 진흥: 설총, 최치원 작위 추증 및 문묘 종사.
1029년조성도감 설치, 개경나성 축조.


3. 생애

992년 왕욱과 그의 조카이자 경종의 미망인인 헌정왕후 사이에서 왕순(훗날 현종)이 태어났다. 이로 인해 아버지 왕욱은 유배되었고, 어머니는 출산 중 사망하였다.[1] 현종은 자식이 없던 목종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천추태후는 자신의 정부(情夫)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천추태후는 현종을 강제로 승려가 되게 하고, 여러 차례 암살자를 보냈으나 실패하였다.[1]

1009년, 서북면 병마사 강조강조의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옹립하였다.[1] 1010년, 거란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현종은 개경을 떠나 나주까지 피난하였다.[2] 이 과정에서 현종은 공주에서 김은부를 만나 그의 딸(원성왕후)과 혼인하였다.[1] 고려는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을 물리쳤다.

1014년, 군비 증가로 관리들의 녹봉이 부족해지자, 조정에서는 경군(京軍) 무신들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충당하려 하였다. 이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 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장연우, 황보유의를 붙잡아 대궐로 난입, 현종 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 무신도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1]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서경에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러 술에 취하게 한 뒤 주살했다. 이 사건으로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문치(文治)가 확고해졌다.[1]

1019년, 고려가 계속해서 거란에 굴복하지 않자 거란은 다시 침입하였다. 강감찬을 포함한 고려 장군들은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3] 거란은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고 철수하였으며, 이후 요나라와 고려는 평화를 누렸다.

1022년, 현종은 향리의 장(長)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통일하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다. 또한 폐지되었던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다.

현종은 『팔만대장경』의 편찬을 명령하였는데, 그 분량은 6,000권에 달했다. 이는 부처의 도움을 청하여 국난을 극복하려는 의도였다.

현종은 농업 생산을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균등하게 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그는 세력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발탁하여 요직에 앉혔다.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다.

1031년, 현종은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3. 1. 즉위 전

992년(성종 11년) 음력 7월 1일, 훗날 현종이 되는 왕순은 안종 왕욱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과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는 삼촌과 조카 관계였다. 헌정왕후는 경종의 왕비였으나, 경종 사후 안종과 사통하여 현종을 낳고 바로 사망하였다. 현종은 성종의 명으로 보모에게 맡겨졌다가 사수현에 귀양 가 있던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졌다. 996년 왕욱이 사망하자 이듬해인 997년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후 현종은 자식이 없던 목종의 후계자로 여겨졌지만, 천추태후는 자신의 정부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3. 1. 1. 출가와 탄압

목종 6년(1003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일환으로 대량원군 왕순을 숭교사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1] 왕순은 이모인 천추태후에 의해 강제로 승려가 되었으나,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1006년 신혈사(현재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겼다.[1]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왕순의 목숨을 위협했으나,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땅굴을 파서 왕순을 대피시키고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1]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였다.(강조의 정변)[1]

3. 2. 즉위

1009년, 서북면 병마사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고려의 다음 왕으로 옹립하였다. 왕순은 자식이 없는 목종의 후계자였으나, 대왕대비인 천추태후는 자신의 정부(情夫)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다음 왕으로 삼고자 하여 왕순을 강제로 승려가 되게 하였다. 천추태후는 왕순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냈으나, 그가 머물던 절의 주지 스님이 이를 막았다.[1]

3. 2. 1. 거란의 재침입

1010년, 거란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여 개경이 점령당하자,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나주로 피난갔다가 환도하였다. 이때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에게 활을 쏘이는 등 굴욕적인 경험을 했다.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은 일시적으로 수도를 피해 강감찬의 도움을 받아 조정을 남쪽 항구 도시인 나주로 옮겼다.[2] 공주에서는 김은부를 만나 그의 딸(원성왕후)과 관계를 맺었고, 훗날 그녀는 왕후가 되었다.[1]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고려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되었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 거란을 물리치게 되었다.[1]

3. 2. 2. 무인 세력과의 갈등

1014년 11월, 제2차 고려-거란 전쟁으로 군비(軍費)가 크게 증가하여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지자, 이를 충당하기 위해 경군(京軍) 무신들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 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장연우, 황보유의를 붙잡아 대궐로 난입하여 현종 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는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1]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서경에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1]

3. 2. 3. 거란의 제3차 침입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여 위기를 모면했다.[1]

거란은 1018년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이는 고려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고, 송과 결탁하여 거란에 입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병력을 동원하여 강감찬을 중심으로 거란군과 싸웠다. 1019년 2월,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쳤으나, 거란군 일부가 개경으로 진격하자 거란군 후방을 포위하고 있던 소배압은 후퇴를 결정했다. 거란군이 귀주에 도착했을 때, 고려군은 총공격을 감행했고, 강감찬은 거란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는 '귀주대첩'으로 불린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다.

3. 3. 생애 후반

현종은 농업 생산을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균등하게 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그는 세력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발탁하여 요직에 앉혔다.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다.

1031년, 현종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4. 가족 관계

아버지안종 (추존)
어머니효숙왕태후 황보씨



왕후비고
원정왕후 김씨성종과 문화왕후의 딸. 자녀 없음.
원화왕후 최씨성종과 연창궁부인의 딸.
원성왕후 김씨김은부의 딸.
원혜왕후 김씨김은부의 딸.
원용왕후 유씨경장태자[17]의 딸. 자녀 없음.
원목왕후 서씨서눌의 딸. 자녀 없음.
원평왕후 김씨김은부의 딸.



후궁비고
원순숙비 김씨김인위의 딸.
원질귀비 김씨왕가도의 딸. 자녀 없음.
귀비 유씨자녀 없음.
궁인 한씨한인경의 딸.
궁인 이씨이언술의 딸.
궁인 박씨박온기의 딸.



왕자생모비고
덕종원성왕후제9대 국왕
향춘전군[18]원화왕후
정종원성왕후제10대 국왕
문종원혜왕후제11대 국왕
정간왕원혜왕후추존 제후왕
검교태사궁인 한씨



왕녀생모비고
효정공주원화왕후
천수전주원화왕후
인평왕후원성왕후
경숙공주원성왕후
효사왕후원혜왕후
효경공주원평왕후
경성왕후원순숙비


5. 대중 문화 속 현종


  • 2009년 KBS2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김지훈이 현종 역을 맡았다.
  • 2023년 KBS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김동준이 현종 역을 맡았다.

5. 1. 드라마

5. 2. 다큐멘터리

JTBC의 《평화전쟁 1019》(2019년, 배우: 권영민)

참조

[1] 논문 Royal Ancestor Worship and Buddhist Politics: The Hyŏnhwa-sa Stele and the Origins of the First Koryŏ Tripitaka https://muse.jhu.edu[...] 2023-11-12
[2] 뉴스 Gang Gam-chan, the Great Goryeo General https://world.kbs.co[...] 2012-12-06
[3] 뉴스 Goryeo-Khitan War and Qing invasion of Joseon https://www.donga.co[...] 2023-11-21
[4] 웹사이트 천수전주 http://db.history.go[...]
[5] 서적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1, 현종 7년(1016년) 6월 8일 (경진) – 왕자가 항춘전(恒春殿)에서 태어나자, 왕수(王秀)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6] 웹사이트 경숙공주 http://db.history.go[...]
[7] 웹사이트 효경공주 http://db.history.go[...]
[8] 웹사이트 왕충 http://db.history.go[...]
[9] 서적 현화사비
[10] 서적 고려사
[11] 서적 현화사비
[12] 서적 고려 태조
[13] 서적 고려 태조
[14] 서적 아버지가 국왕 혹은 왕족인 경우, 어머니 혹은 조모의 성씨를 사용
[15] 서적 이허겸
[16] 서적 이허겸
[17] 서적 고려 대종
[18] 서적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1, 현종 7년(1016년) 6월 8일 (경진)----왕자가 항춘전(恒春殿)에서 태어나자, 왕수(王秀)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19] 서적 고려사 열전 권제4 공주 기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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