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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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은 1348년 메클렌부르크 공국에서 분리되어 1701년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나뉘었다.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대공국으로 승격되었으며,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마지막 대공이 퇴위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가 되었다. 1934년 나치에 의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통합되어 메클렌부르크주가 되었고, 현재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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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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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지위 | 독일 연방의 국가 (1815–48, 1850–66) 북독일 연방의 국가 (1867–71) 독일 제국의 연방 국가 (1871–1918) |
수도 | 슈베린 |
공용어 | 독일어, 저지 독일어 |
종교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복음주의 루터교 주 교회 |
면적 | 13,161 km2 |
현재 국가 | 독일 |
정치 | |
정치 체제 | 입헌 군주제 |
군주 칭호 | 대공 |
초대 대공 |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 |
마지막 대공 |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
통화 | |
통화 (1857년까지) | 메클렌부르크 탈러 |
통화 (1857–73) | 페어아인스탈러 |
통화 (1873–1918) | 독일 금 마르크 |
역사 | |
시작 | 빈 회의 (1815년 6월 14일) |
종료 | 독일 혁명 (1918년 11월 14일) |
이전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 |
이후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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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및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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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348년 메클렌부르크 공국이 되었다가, 1701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분할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대공국으로 승격하였고,[1] 1871년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여파로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퇴위하여 자유주가 되었다.
초기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는 중립을 유지했으며, 1803년에는 스웨덴으로부터 저당 잡혔던 비스마르를 되찾았다.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최종 해체 이후, 그는 1808년 라인 동맹에 가입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이 동맹을 무시하고,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인 카를 14세 요한에게 지원을 대가로 공작령을 제안했다. 프리드리히 프란츠 대공은 나폴레옹의 군대에 병력을 보낸 동맹의 첫 번째 구성원이었으며,[1] 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제1 프랑스 제국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독일 연방에 가입했으며, 슈트렐리츠의 사촌인 카를 2세처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 1819년 그의 영토에서 농노제가 마침내 폐지되었다.
1848년 독일 혁명 동안, 대공국에서는 자유주의 헌법을 지지하는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 1849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대공은 새로운 기본법을 승인했다. 그러나 메클렌부르크 귀족들의 반발로,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양보는 철회되었고, 1851년과 1852년에는 추가적인 제한 조치가 도입되었다.[1]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프로이센 왕국을 지지했다. 그의 대공국은 점점 더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놓이기 시작했다. 1867년 그는 북독일 연방과 관세 동맹에 가입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독일 통일을 열렬히 옹호하고 군대에서 높은 지휘권을 가졌다. 1871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는 독일 제국의 주가 되었다.
1897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는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의 뒤를 이어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지막 대공이 되었다. 1918년 2월 23일, 그의 사촌인 아돌푸스 프리드리히 6세 대공이 자살하자,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섭정을 맡았다. 그 직후인 11월 14일, 1918-1919년 독일 혁명 과정에서 메클렌부르크 왕위를 포기해야 했다. 대공국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로 바뀌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방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오보트리테 (폴라브 슬라브족) 메클렌부르크 왕조의 8세기 가까운 연속 통치가 끝났다.
1934년 나치에 의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통합, 메클렌부르크주가 되었다. 현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일부이다.
2. 1. 중세 시대
1167년 오보트리트족의 족장 니클로트의 아들 프르지슬라프가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항복하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독일 왕국의 봉토 메클렌부르크 후령의 형태로 상속받았다.메클렌부르크는 프르지슬라프의 자손들 사이에서 여러 개로 분할 상속되었지만, 하인리히 2세 (1266년 - 1329년)는 1312년까지 슈타르가르트와 로스토크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슈베린과 베를레 일대를 제외한 메클렌부르크 후령을 재통합하고, 그 영토를 두 아들인 알브레히트 2세와 요한 1세에게 물려주었다. 알브레히트와 요한 형제가 공작위를 획득한 후 1352년에 요한은 슈타르가르트의 지배권을 분여받아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공국을 재창설했다. 한편 알브레히트 2세는 메클렌부르크의 광대한 서부 지역을 보유하고 1358년에 슈베린 일대를 획득한 후 슈베린을 공작의 거소로 삼았다.
1363년,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이자 스웨덴 국왕 마그누스 4세를 외숙부로 둔 알브레히트 3세는 스웨덴으로 원정하여 다음 해 1364년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5년 후인 1389년, 알브레히트 3세는 덴마크 섭정 마르그레테에게 패배하여 폐위되었고, 외증손인 덴마크 국왕 에리크 7세에게 왕위가 넘어가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스웨덴 지배는 한 세대로 끝났다.
1436년, 마지막 베를레 영주였던 빌헬름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또한, 빌헬름의 사위로서 그 유령을 상속한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공작 울리히 2세도 아들을 낳지 못한 채 1471년에 사망했다. 이로 인해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메클렌부르크 전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2. 2. 스웨덴 왕위 계승과 분열
1363년,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이자 스웨덴 국왕 마그누스 4세를 외숙부로 둔 알브레히트 3세는 스웨덴으로 원정하여 다음 해 1364년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2] 그러나 25년 후인 1389년, 알브레히트 3세는 덴마크 섭정 마르그레테에게 패배하여 폐위되었고, 외증손인 덴마크 국왕 에리크 7세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스웨덴 지배는 한 세대로 끝났다.[2]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여러 차례 분할 상속을 겪었다.[2] 1436년, 마지막 베를레 영주였던 빌헬름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1471년에는 빌헬름의 사위이자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공작 울리히 2세도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메클렌부르크 전역을 통합했다.[2]
1520년, 하인리히 4세의 손자인 하인리히 5세와 알브레히트 7세 형제는 다시 공국을 분할하여 알브레히트 7세가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국을 창설했다.[2] 이 공국은 1610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돌아갔으나, 1621년 아돌프 프리드리히 1세는 동생인 요한 알브레히트 2세에게 다시 귀스트로 공작령을 주었다.[2] 30년 전쟁 중이던 1628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를 지지하던 공작 형제는 황제군 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1631년 스웨덴 제국 군대의 도움으로 복위했다.[2] 1695년 요한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구스타프 아돌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메클렌부르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아래 재통합되었다.[2]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숙부인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가 조카에게 귀스트로 상속권을 주장하며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2] 1701년, 양측은 니더작센 크라이스에 속하는 제국 영방들의 압력을 받아 분쟁을 종식시키고, 중세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공국 영역에 해당하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을 창설하여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주었다.[2] 이러한 상속 분쟁과 영토 분할은 공작가의 지배권을 약화시켜 메클렌부르크는 제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2]
2. 3. 30년 전쟁과 재통합 시도
1520년, 하인리히 4세의 손자인 하인리히 5세와 알브레히트 7세 형제는 공국을 분할 상속하여 동생인 알브레히트 7세가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국을 창설했다. 이 공국은 1610년 본가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1세의 영토가 되었다. 1621년, 아돌프 프리드리히 1세는 동생인 요한 알브레히트 2세에게 다시 귀스트로 공작령을 분여했다. 공작 형제는 30년 전쟁에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1628년에 황제군 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1631년, 스웨덴 제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 형제는 복위할 수 있었다. 요한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구스타프 아돌프는 1695년에 아들 상속인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메클렌부르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아래로 재통합되었다.2. 4.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분열 (1701년)
1348년 메클렌부르크 공국이 되었다가, 1701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로 분할되었다.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숙부인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는 조카에게 귀스트로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격렬한 영토 계승 다툼을 벌였다. 1701년, 양측은 같은 니더작센 크라이스에 속하는 제국 영방의 압력을 받아 상속 분쟁을 종결했다. 대략 중세의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공국의 영역에 해당하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이 창설되어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에게 분여되었다. 계속된 상속 분쟁과 영토 분할은 공작가의 지배권을 약화시켜 메클렌부르크는 제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2. 5. 대공국 시대 (1815년 ~ 1918년)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는 독일 연방에 가입했으며, 슈트렐리츠의 사촌인 카를 2세처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 1819년에는 그의 영토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메클렌부르크의 통치는 1755년 상속 협정(Landesgrundgesetzlicher Erbvergleich)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협정은 두 대공국 모두의 사회 및 경제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신분의 중세적 위계를 유지했다.[1]1848년 독일 혁명 동안, 대공국에서는 자유주의 헌법을 지지하는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 1849년 10월 10일,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대공(1823–1883)은 초대 총리 루트비히 폰 뤼초가 작성한 새로운 기본법을 승인했다. 그러나 메클렌부르크 귀족들의 반발과 슈트렐리츠 대공 게오르크의 지원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양보는 철회되었고, 1851년과 1852년에는 추가적인 제한 조치가 도입되었다.[1]
인접한 홀슈타인 공국을 둘러싼 분쟁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절정에 달했고,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병사들을 지원하며 프로이센 왕국을 지지했다. 그의 대공국은 점점 더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1867년 그는 북독일 연방과 관세 동맹에 가입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에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열렬히 옹호했고,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군대에서 높은 지휘권을 가지며 귀중한 지원을 했다. 1871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는 독일 제국의 주가 되었다. 이후 더욱 민주적인 헌법을 요구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고, 독일 제국 의회는 이 운동에 어느 정도 지지를 보냈다.[1]
1897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1882년생)는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1851–1897)의 뒤를 이어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지막 대공이 되었다. 1907년 대공은 신민에게 헌법을 약속했다. 대공국은 항상 봉건적 정부 체제하에 있었으며, 대공은 (장관을 통해 활동했지만) 행정권을 전적으로 쥐고 있었다. 대공국은 매년 짧은 회기를 갖는 의회(Landtag)를 공유했다. 그 외에는, 기사 영지 (Rittergüter)의 소유자들로 구성된 위원회(Ritterschaft)와 특정 도시의 시장(Landschaft)에 의해 대표되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은 제국 의회에 6명의 의원을 보냈다.[1] 1918년 2월 23일, 사촌인 아돌푸스 프리드리히 6세 대공이 자살하자,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섭정을 맡았다. 그 직후인 11월 14일, 1918-1919년 독일 혁명 과정에서 메클렌부르크 왕위를 포기해야 했다. 대공국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로 바뀌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방 국가가 되었다.
2. 6. 자유주 시대와 나치 시대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가 되었다. 1934년 나치에 의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통합되어 메클렌부르크 주가 되었고, 현재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일부이다.2. 7. 현대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는 독일 연방에 가입하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칭호를 받았다.[1] 1819년에는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1755년 상속 협정으로 인한 중세적 신분 제도는 여전히 유지되어 사회,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1]1848년 혁명 당시 자유주의 헌법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1849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새 기본법을 승인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민주적 조치들은 철회되고, 1851년과 1852년에 추가적인 제한 조치가 도입되었다.[1]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프로이센 왕국을 지지했고, 이후 대공국은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1] 1867년 북독일 연방과 관세 동맹에 가입했다.[1]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지원하여 독일 통일에 기여했다.[1]
1871년 독일 제국의 주가 되었으나, 민주적 헌법 요구는 계속되었다.[1] 1897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마지막 대공이 되었고, 1907년 헌법을 약속했다. 당시 대공국은 봉건적 정부 체제를 유지했으며, 대공은 행정권을 쥐고 의회는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은 제국 의회에 6명의 의원을 보냈다.[1]
1918년 독일 혁명으로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퇴위하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가 되면서 대공국은 막을 내렸다. 이로써 오보트리테 (폴라브 슬라브족) 메클렌부르크 왕조의 8세기 가까이 이어진 통치가 끝났다.
3. 지리
1701년 멸망한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국이 합병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영토는 역사적인 메클렌부르크 지역의 더 넓은 중부와 서부를 포함하게 되었다. 대공 가문의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 분가는 더 작은 남동부 지역과 북서쪽에 있는 옛 라체부르크 주교령의 영토를 소유했다.
대공국은 북쪽으로는 발트해 해안과 접하고, 북동쪽으로는 프로이센 왕국의 포메라니아주와 접했다. 서포메라니아 (구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지역과의 경계는 레크니츠 강, 페네 강, 쿠머로 호를 따라 이어졌다. 남쪽으로는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주와 접했으며 (비트슈토크 근처 로소와 쇤베르크의 월경지 및 비월경지), 남서쪽으로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프로이센 하노버주에 합병된 하노버 왕국의 암트 노이하우스 지역과 접했다. 서쪽에서는 홀슈타인 공국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 합병된 후 메클렌부르크는 거의 완전히 프로이센 영토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슈베린 외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은 1803년까지 스웨덴 왕실이 소유했던 로스토크와 비스마르의 해안 도시와 파르심, 귀스트로의 내륙 도시를 포함했다.
4. 역대 군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은 서슬라브족 혈통을 가진, 게르만화(化)된 오보트리테 대공가의 대공국이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는 독일 연방에 가입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대공 목록은 다음과 같다.
- 1815년 - 1837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1]
- 1837년 - 1842년: 파울 프리드리히[1]
- 1842년 - 1883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1]
- 1883년 - 1897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1]
- 1897년 - 1918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1]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대공국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가 되었다. 2001년,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장남 프리드리히 프란츠 (5세)가 사망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가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4. 1.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 (1701년 ~ 1815년)
1701년 함부르크 조약으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이 분리 신설된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재위 1692년 - 1713년), 카를 레오폴트 (재위 1713년 - 1728년),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2세 (재위 1728년 - 1756년), 프리드리히 2세 (재위 1756년 - 1785년)를 거쳐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가 1785년부터 1815년까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을 지배했다.[1]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는 초기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중립을 유지했으며, 1803년에는 스웨덴으로부터 저당 잡혔던 비스마르를 되찾았다.[1] 1806년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리와 신성 로마 제국의 최종 해체 이후, 1808년 3월 22일 조약을 통해 라인 동맹에 가입했다.[1]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나폴레옹은 이 동맹을 무시하고,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인 카를 14세 요한에게 지원을 대가로 공작령을 제안했다.[1] 프리드리히 프란츠 대공은 나폴레옹의 군대에 병력을 보낸 동맹의 첫 번째 구성원이었으며,[1] 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제1 프랑스 제국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1] 그 결과, 그의 새로운 동맹국인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은 그의 공작령을 덴마크 왕국에 제공하려 했으나, 덴마크가 1814년 킬 조약에 의해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인접 지역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통치는 침해받지 않았다.[1]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새로 설립된 독일 연방에 가입했으며, 슈트렐리츠의 사촌인 카를 2세처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4. 2.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1815년 ~ 1918년)
5. 역대 재상
wikitext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역대 재상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재임 기간 | 구분 | 비고 |
---|---|---|
1850년 ~ 1918년 | 대공국 재상 | |
1918년 ~ 1933년 | 자유주 주총리 |
5. 1.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재상 (1850년 ~ 1918년)
재임 기간 | 이름 |
---|---|
1850년 ~ 1858년 | 한스 폰 뷔로 |
1858년 ~ 1869년 | 야스퍼 폰 옐체 |
1869년 ~ 1885년 | 헤닝 폰 바세비츠 |
1886년 ~ 1901년 | 알렉산더 폰 뷔로 |
1901년 ~ 1914년 | 카를 폰 바세비츠-뢰베초 |
1914년 ~ 1918년 | 아돌프 랑크펠트 |
5. 2.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 주총리 (1918년 ~ 1933년)
- Hugo Wendorff (독일 민주당, 1918년 ~ 1920년)
- Hermann Reincke-Bloch (독일 인민당, 1920년 ~ 1921년)
- Johannes Stelling (독일 사회민주당, 1921년 ~ 1924년)
- Joachim von Brandenstein (Jurist) (독일 국가 인민당, 1924년 ~ 1926년)
- Paul Schröder (Politiker, 1875) (독일 사회민주당, 1926년 ~ 1929년)
- Karl Eschenburg (Politiker) (독일 국가 인민당, 1929년 ~ 1932년)
- Walter Granzow (나치당, 1932년 ~ 1933년)
- Hans Egon Engell (나치당, 1933년)
참조
[1]
서적
Mecklenburg
EB1911
[2]
문서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있던 국가
[3]
문서
1863년 이후 안할트에 합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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