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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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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야마 미노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야구 해설가이다. 1936년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난 그는 간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한신 전기 철도에 입사 후 오사카 타이거스(1961년부터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1972년까지 선수로 활약했다. 1959년 신인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뛰어난 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1970년에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 평균 자책점 0.98을 기록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유일하게 0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다. 1973년부터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했다. 이후 1990년부터 아사히 방송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8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마가사키 시립 아마가사키 산업고등학교에 그의 투구 폼을 본뜬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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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미노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9년 무라야마 미노루
1959년
본명무라야마 미노루
출생일1936년 12월 10일
출생지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사망일1998년 8월 22일 (향년 61세)
신장175cm
체중83kg
포지션투수 / 감독
투타우투우타
프로 입단 연도1959년
데뷔1959년 4월 14일
마지막 경기1972년 10월 7일 (공식전 마지막), 1973년 3월 21일 (은퇴 경기)
고등학교스미토모 공업 고등학교
대학교간사이 대학
선수 경력
구단오사카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1959–1972)
감독/코치 경력
구단한신 타이거스 (1970–1972, 1988–1989)
수상
사와무라 에이지 상3회 (1959년, 1965년, 1966년)
센트럴 리그 MVP1962년
영구 결번한신 타이거스 #11
명예의 전당
종류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1993년
헌액 방법경기자 표창
NPB 통산 성적
승패222승 147패
평균 자책점2.09
완봉55
투구 이닝3,050.1
탈삼진2,271
타율0.176
안타165
홈런1
타점51

2. 프로 입단 전

무라야마 미노루는 1936년 10월 12일 효고현 고베시 기타구에서 태어났다. 스미토모 기술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간사이 대학 상학부에 입학했다. 간사이 대학 2학년 때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대학 졸업 후 1959년 오사카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으며, 투지를 드러내는 투구폼은 자토페크 투법'으로 불렸다.[4][5]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무라야마 미노루의 손도장. 1982년에 아마가사키 중앙・산와・데야시키 상점가의 교차로 노면에 묻혔다.


1936년 10월 12일 효고현 고베시 기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곧 아마가사키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7]。 초등학생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투수를 지망했지만, 키가 작아서 내야수가 되었다.[8]。 스미토모 학원 중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 입부했지만, 2루수였다.

스미토모 공업 고등학교[9] 야구부에 입부했을 당시 감독이 없었고 OB가 가끔 지도하러 오는 정도였지만, 국어 교사의 친구인 자동차 관련 회사원 후지타 유라가 3년 기한으로 감독에 취임한다.[7]。 후지타는 무라야마의 어깨 힘과 끈기를 높이 평가하여 투수로 전향시켰다.[10]。 2학년 연습 경기에서 난타당한 후, 후지타로부터 "네 손바닥은 크다. 즉 손가락이 길다. 그러니, 공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던지는 연습을 해봐"[11]라는 지시를 받고 포크볼을 익혔다. 같은 해부터 에이스가 되어, 가을 근기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시마다 유키오를 보유한 효고 공업에 패했다. 3학년 춘계 근기 대회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가타오카 히로오・사카자키 가즈히코 등을 보유한 낭화 상업에, 같은 해 여름에도 준준결승에서 아카시 고등학교에 패하여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

무라야마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희망했고, 야구부 동료가 릿쿄 대학 셀렉션에 응시하게 되어, 무라야마도 도쿄 육대학에서 뛰고 싶어 릿쿄 진학을 희망했다. 동료와 함께 오사카 우메다의 다이 빌딩에서 릿쿄 OB의 면접을 보았지만, 키가 작고 몸이 가냘프다는 이유로 셀렉션 추천을 받지 못했다.[12]

어머니의 "가능한 한, 가까이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간청과, 간사이 대학 학생이자 응원단장이었던 둘째 형 히로시의 권유로 간사이 대학 상학부 상학과에 진학했다. 동급생 가이난 고등학교 출신 포수 우에다 도시하루배터리를 이루게 된다. 1학년 때는 운동장 풀을 베고 물을 뿌리는 등 밑바닥 생활을 했지만, 2학년 때 좌우 에이스였던 호모토 히데아키와 나카니시 가쓰미가 퇴부하고 프로에 진출하면서 무라야마가 에이스로 발탁된다.[13]。 간사이 육대학 야구 리그 춘계 리그에서 우승했고, 진구에서 열린 제5회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무라야마는 전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여 완투했고, 준결승에서 기무라 타모쓰, 모리 토루를 보유한 와세다 대학을 6-1로 꺾고, 니혼 대학과의 결승전에서도 시마즈 시로에게 2-1로 승리하며 서일본 대학 최초로 우승을 달성했다. 매 투구마다 전력을 다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완투하는 모습에 신문에서는 "자토페크 투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14]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프로 야구계의 주목을 받았고, 거의 모든 12개 구단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지만, 3학년 때 오른쪽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투구는 물론, 젓가락질이나 양치질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15]。 무라야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트레이너 진찰을 요청했지만, 프로 아마 규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간사이 대학 OB이자 당시 오사카 타이거스 구단 사장이었던 다나카 요이치로부터 후생 연금 병원을 소개받아 치료를 받게 된다.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프로 스카우트들이 무라야마에게서 손을 떼지만, 타이거스의 다나카는 "자네가 타이거스에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쩨쩨한 근성은 가지고 있지 않네. 안심하게. 자네를 걱정하는 선배일 뿐이야"[16]라며 친절하게 대했다. 무라야마는 감격하여 오른쪽 어깨 통증이 나으면 타이거스에 입단하겠다고 결심한다. 4학년 때 오른쪽 어깨 통증의 원인이 오른쪽 겨드랑이에 생긴 연골 때문인 것으로 밝혀져 제거 수술로 완치되었다. 이 해 간사이 육대학 야구 리그에서 춘계・추계 연패를 달성한다.[17]。 그러나 같은 해 제7회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나가시마 시게오・모토야시키 긴고・스기우라 다다시 등 "릿쿄 3인방"이 최고 학년이었던 릿쿄대에 3-5로 패했고, 이듬해에도 준결승에서 릿쿄대에 4-9로 패했다.

2. 2. 간사이 대학 시절

릿쿄 대학에 후보 선수로 지명을 받았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키가 작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그 후 간사이 대학 상학부 상학과로 진학하였고, 나중에 한큐 브레이브스 → 오릭스 브레이브스닛폰햄 파이터스의 감독을 역임한 포수 우에다 도시하루와 배터리를 짰다. 간사이 6개 대학 리그에서 통산 42경기에 등판하여 20승 10패, 평균자책점 0.91을 기록하고, 222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101] 2학년 때에는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완투하였고 간사이 대학은 우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서일본 지역 대학이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대회에서는 갑작스런 간염으로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면서 간사이 대학은 무라야마 자신을 떨어뜨렸던 릿쿄 대학에게 패했다.[101]

1958년 한신 전기 철도에 입사하여 업무 이관의 형태로 오사카 타이거스(1961년부터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이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한신이 제시한 계약금의 4배에 달하는 2000만의 계약금을 제시했지만, 대학 시절에 어깨를 다친 부분의 문제가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전력 투구를 하기 힘들다는 것을 고려한 무라야마는 결국 한신을 택한다.[101] 이듬해인 1959년 3월에는 간사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간사이 대학 동급생에 가이난 고등학교 출신 포수우에다 도시하루가 있었고, 우에다와 배터리를 이루게 된다. 1학년 당시에는 운동장의 풀을 베고 물을 뿌리는 등 밑바닥 생활에 매달렸지만, 2학년 때 좌우 에이스였던 호모토 히데아키와 나카니시 가쓰미가 퇴부하여 프로에 진출했기 때문에 무라야마는 에이스로 발탁된다.[13] 간사이 육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같은 해 춘계 리그에서 우승했고, 직후 진구에서의 제5회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무라야마는 전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여 완투했고, 준결승에서 기무라 타모쓰 투수, 모리 토루를 보유한 와세다 대학을 6-1로 꺾고, 니혼 대학과의 결승전에서도 시마즈 시로에게 2-1로 승리하여, 서일본의 대학으로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한 구마다 전력 투구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완투하는 투구 모습에서, 신문에서는 "자토페크 투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14]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프로 야구계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거의 모든 12개 구단으로부터 졸업 후 입단을 권유받았지만, 3학년 때 오른쪽 어깨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투구는 물론이고, 젓가락을 잡거나 이를 닦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증세였다.[15] 무라야마는 열성적으로 권유받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아는 사람을 통해 트레이너에게 진찰을 받을 수 없는지 타진했지만, 프로 아마 규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여기서 간사이 대학 OB로 당시 오사카 타이거스의 구단 사장이었던 다나카 요이치로부터 후생 연금 병원을 소개받아 치료를 받게 된다.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인해 프로 스카우트는 무라야마로부터 손을 떼지만, 타이거스의 다나카만은 "자네가 타이거스에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쩨쩨한 근성은 가지고 있지 않네. 안심하게. 자네를 걱정하는 선배일 뿐이야"[16]라고 무라야마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무라야마는 감격하여, 만약 오른쪽 어깨 통증이 나으면 타이거스에 입단하겠다고 결심한다.

4학년 때 오른쪽 어깨 통증의 원인은 오른쪽 겨드랑이에 생긴 연골 때문인 것으로 밝혀져 제거 수술로 완치되었다. 이 해의 간사이 육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춘계・추계 연패를 달성한다.[17] 그러나 같은 해 제7회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는 전년 제6회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나가시마 시게오·모토야시키 긴고·스기우라 다다시 등 "릿쿄 3인방"이 최고 학년이었던 릿쿄대에 준결승에서 3-5로 패배한 데 이어, 또다시 준결승에서 인연의 상대 릿쿄대에 4-9로 패퇴했다.

졸업에 즈음하여 프로 구단 사이에서 다시 쟁탈전이 벌어졌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계약금 2000만을 제시했지만, 무라야마는 그 4분의 1인 500만을 제시한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재활 치료 중에 친절하게 대해준 다나카에 대한 은혜와, 오른쪽 어깨 통증을 겪었던 경험에서 프로에서 오랫동안 플레이할 자신감이 없었고, 조건 제시 중에 "한신 전기 철도에서 타이거스에 파견 사원으로 한다"는 지령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18]

3. 프로 선수 시절

무라야마 미노루는 1959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에서 프로 야구 선수로 첫 등판했다. 이 경기는 초대 ‘미스터 타이거스’로 불리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은퇴 경기이기도 했다. 무라야마는 이 경기에서 2이닝 동안 7명의 타자를 상대로 1개의 안타만을 허용하며 좋은 투구를 보였다. 같은 해 4월 14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정규 경기에 첫 선발 등판하여 가네다 마사이치와 맞대결을 펼쳤다. 무라야마는 6이닝 동안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2개의 안타만을 맞은 채 완봉승을 거두었다.

1959년 시즌에 무라야마는 18승 10패, 평균 자책점 1.19를 기록하며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과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나 신인왕은 31개의 홈런을 기록한 구와타 다케시에게 돌아갔다. 무라야마는 신인이면서 사와무라상을 받았지만 신인왕을 받지 못한 유일한 투수로 기록되었다.

무라야마는 대학 시절부터 나가시마 시게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102] 1959년 6월 25일 천황 참관 시합에서 나가시마에게 결승 홈런을 허용했는데, 이 홈런은 파울 라인에 가깝게 넘어가 논란이 있었다. 무라야마는 이후에도 나가시마에게 통산 1,500번째와 2,000번째 삼진을 빼앗는 등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1962년에는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지만,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5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196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8회 2아웃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완봉승을 거두었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에게 계약 제안을 받기도 했다.[105]

1967년부터 오른팔 혈행 장애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69년부터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며 1970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개인 통산 200승과 0점대 평균 자책점(0.98)을 기록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유일한 0점대 평균 자책점 기록이다.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그의 등번호 11번은 한신 타이거스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통산 222승(177선발승)과 통산 평균 자책점 2.09는 각각 대졸 출신 투수 최다승 기록과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무라야마는 "'자토페크 투법'"으로 알려진 투구폼과 뛰어난 실력으로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3번 수상하며 '2대 미스터 타이거스'로 불렸다.

3. 1. 오사카·한신 타이거스 (1959-1972)

프로 야구 데뷔는 1959년 3월 2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였는데, 이 날은 초대 ‘미스터 타이거스’ 후지무라 후미오의 은퇴 경기이기도 했다. 무라야마는 2이닝 동안 1개의 안타만을 허용했다. 정규 경기 첫 등판은 4월 14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와의 경기로, 가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6이닝 동안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완봉승을 거두었다.

1960년을 부진한 성적으로 마감한 무라야마는 포크볼을 더욱 연마하여 1961년에 부활, 24승을 거두며 처음으로 20승 투수가 되었다. 1962년에는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의 로테이션에 따라 25승, 평균 자책점 1.20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최우수 선수(MVP)를 수상했다. 도에이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8회 1사까지 퍼펙트 게임에 가까운 호투를 펼쳤으나,[31] 7차전에서 패했다.

같은 해 미일 야구에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8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32] 경기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에게 계약 제안을 받기도 했다.[105]

1963년에는 건초염 악화와 내장 이상으로 휴양하며 등록명을 "무라야마 마사시"로 개명했다.[34] 8월에는 심판 판정에 격렬하게 항의하다 퇴장당하기도 했다.[36][37] 1964년에는 진 바키의 활약으로 부담이 줄어든 무라야마는 22승을 거두며 팀의 두 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난카이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연패를 당했다.

1965년에는 복잡 골절 부상에서 복귀하여 "삼단 투구법"을 구사하며 25승과 최다 탈삼진을 기록하고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66년에도 2년 연속 사와무라상·베스트 나인·최다승을 획득했다.

1967년에는 오른팔 혈행 장애로 포크볼을 금지당하며 부진했고,[39] 1968년에는 수근관 증후군을 겪었지만 11연승을 기록하며 15승을 거두었다.[40]

1969년에는 고토 쓰기오 감독 아래서 투수 코치를 겸임하며 12승 14패, 방어율 2.01(리그 2위)을 기록했다. 시즌 후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1970년에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서 팀 개혁에 나섰고, 14승과 최우수 방어율(0.9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일한 0점대)을 기록하며 팀을 2위로 이끌었다.[49][50] 1971년에는 결핵 발병 사실을 숨기고 등판을 자제하며 5위로 추락했다.[45]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감독 자리도 가네다 마사야스에게 넘겼다. 은퇴 경기에서 오 사다하루다카다 시게루포크볼로 삼진 처리했고, 그의 등번호 11번은 한신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통산 222승(177선발승)은 대졸 출신 투수 최다승 기록이며(한신의 투수 승리수 2위), 통산 평균자책점 2.09는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1959년 신인 시절에는 54경기에 등판하여 26번의 선발 등판에서 19번의 완투를 기록했다. 18승 10패, 1.19의 방어율로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다. 선수 경력 동안 카네다 마사이치와 동일한 3번의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다.

선수 시절 동안 1962년과 1964년 두 차례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감독을 맡았고,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등번호 11번은 영구 결번되었다. 1988년과 1989년 다시 감독을 맡았다. 은퇴 후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불렸다.

199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5년 후 61세의 나이로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로서 2번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NPB에서 총 15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다.[1][2][3]

투지를 드러내며 온몸을 사용한 "'자토페크 투법'"으로 알려져 있다.[4][5] 역대 9번째이자 전후 유일의 시즌 평균 자책점 0점대(0.98)를 달성했고, 통산 WHIPNPB 기록(0.95), 통산 평균 자책점의 센트럴 리그 기록(2.09)을 가지고 있다.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3번 수상했으며, "'2대 미스터 타이거스'"라고도 불린다.

3. 1. 1. 1959년: 신인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사와무라 에이지 상 동시 수상

무라야마는 1959년 시즌에 18승(15선발승) 10패, 평균 자책점 1.19를 기록하여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했고,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도 받았다.[102] 그러나 신인왕은 신인 신기록인 31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홈런왕 타이틀을 따냈던 구와타 다케시가 차지했다. 신인이면서 사와무라 상을 받았지만 신인왕을 받지 못한 투수는 무라야마가 유일하다.

한편, 대학 야구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102] 1959년 6월 25일 천황 참관 시합에서 무라야마는 고야마 마사아키를 대신해 구원 등판하였는데, 여기서 나가시마가 무라야마를 상대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결승 홈런을 쳐내게 된다. 그러나 파울 라인과 가깝게 넘어가 판정으로 홈런이 인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무라야마는 죽을 때까지 “그 홈런은 원래 파울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103][104]

3. 1. 2.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라이벌 관계

대학 야구 시절 릿쿄 대학에서 타자로 활약하던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102] 1959년 6월 25일 천황 참관 시합에서 무라야마는 고야마 마사아키를 대신해 구원 등판하였는데, 여기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입단한 나가시마가 무라야마를 상대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결승 홈런을 쳐냈다. 그러나 파울 라인과 가깝게 넘어가 판정으로 홈런이 인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무라야마는 죽을 때까지 “그 홈런은 원래 파울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103][104] 이후 무라야마는 1966년 6월 8일 개인 통산 1,500개, 1969년 8월 1일 개인 통산 2,000개의 삼진을 모두 나가시마에게서 따냈으며, 현역 기간 동안 무라야마와 나가시마는 302타수 85안타 21홈런(타율 2할 8푼 1리), 39삼진을 기록했다. 야구와 관련 없는 사생활에서도 무라야마는 나가시마를 의식했는데, 처음 산 집의 전화번호 ‘3279’가 일본어로 “3(나가시마의 등번호) 때문에 운다”( 3(長嶋)に泣く|산니 나쿠일본어)와 읽는 방법이 같다며 전화번호를 바꾸어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은퇴한 이후에는 서로 화해하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3. 1. 3. 1960-1972: 꾸준한 활약과 두 번의 리그 우승

1961년에는 부활하여 24승(13패) 방어율 2.26(리그 6위)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20승 투수가 되었다.

1962년에는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이 무라야마와 고야마 마사아키에게 일정 간격을 두고 등판시키는 로테이션을 짰다. 무라야마는 25승(14패) 방어율 1.20으로 활약하며 한신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최우수 선수(MVP)를 수상했다. 도에이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8회 1사까지 퍼펙트 게임에 가까운 호투를 펼쳤으나,[31] 7차전에서 니시조노 아키오에게 결승 홈런을 맞고 패했다.

같은 해 미일 야구에서는 11월 17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8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쾌투를 선보였다.[32] 경기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은 무라야마에게 계약을 제안했지만, 무라야마는 영어를 몰라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105]

1963년에는 건초염 악화와 내장 이상으로 휴양하며 등록명을 "무라야마 마사시"로 개명했다.[34] 8월 10일 요미우리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다음 날, 이케자와 요시유키[35]에게 던진 공이 볼로 판정되자 격렬하게 항의하다 퇴장당했다.[36][37] 결국, 시즌에서는 11승(10패)으로 부진했다.

1964년에는 진 바키의 활약으로 부담이 줄어든 무라야마는 22승을 거두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난카이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연패를 당했다.

1965년에는 복잡 골절 부상에서 복귀하여 오버스로우, 스리쿼터, 사이드스로의 "삼단 투구법"을 구사하며 25승(13패) 방어율 1.96(리그 2위)으로 최다 탈삼진과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66년에도 24승(9패) 방어율 1.55(리그 2위)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사와무라상·베스트 나인·최다승을 획득했다.

1967년에는 오른팔 혈행 장애로 포크볼을 던지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13승(9패) 방어율 2.80(리그 14위)로 부진했다.[39]

1968년에는 수근관 증후군으로 부진했지만, 6월 말 복귀 후 11연승을 기록하며 15승(8패) 방어율 2.73(리그 7위)을 기록했다.[40]

1969년에는 고토 쓰기오 감독 아래서 투수 코치를 겸임하며 12승 14패, 방어율 2.01(리그 2위)을 기록했다. 시즌 후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1970년에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서 "무라야마의 5개 조의 맹세"를 발표하고, "간부 선수 제도"를 도입하는 등 팀 개혁에 나섰다.[44][46] 무라야마 자신은 14승(3패), 최고 승률 (.824), 최우수 방어율(0.98)을 기록하며 팀을 2위로 이끌었다. 0.98의 방어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일한 0점대 평균 자책점 기록이다.[49][50]

1971년에는 결핵 발병 사실을 숨기고 등판을 자제하며 5위로 추락했다.[45]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고, 감독 자리도 가네다 마사야스에게 넘겼다. 은퇴 경기에서 오 사다하루다카다 시게루포크볼로 삼진 처리했고, 그의 등번호 11번은 한신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4. 은퇴 이후

무라야마는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닛폰 TV 방송망 계열 방송국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 한신 감독으로 복귀하여 1989년까지 역임했다. 그 후 1990년부터 다시 아사히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부터 사업가적 자질을 보였으며, 아시야시의 맨션을 구입해 회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보기도 했으나, 199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8년 8월 22일 직장암으로 사망했다.[76]

2004년 8월, 그의 출신 학교인 아마가사키 산업고등학교(구 스미토모 공업고등학교)에 무라야마의 투구 폼을 본뜬 동상(모뉴먼트)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졸업생들이 약 1000만의 기부금을 모아 건립한 것으로, 높이는 받침대를 포함해 2.65m였다. 동상의 모습은 1959년 천람 시합에서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로 던지는 순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학교 이전과 효고현립 아마가사키 종합 의료 센터 건설로 인해 동상 이전이 결정되었고,[77] 2015년 7월 1일 개원한 동 의료 센터 정문 앞 산책로에 재설치되었다.[78]

4. 1. 야구 해설가 및 사업가 (1973-1987, 1990-1998)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닛폰 TV, 요미우리 TV, 히로시마 TV 등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1978년 7월 24일에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만든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에 가입했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선수로 200승 이상을 거둔 명구회 회원은 무라야마(통산 222승) 뿐이었다.[106]

1988년부터 1989년까지 다시 한신의 감독을 맡았고, 등번호는 자신의 영구 결번 11번을 사용했다. 오노 히사시, 와다 유타카, 나카노 사토루 등 젊은 선수들을 ‘소년대’라고 부르며 집중적으로 기용하여 주목받았지만, 각각 6위, 5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물러났다. 감독 재임 중, 신인 선수 지명 회의에서 리쓰메이칸 대학 출신 포수 후루타 아쓰야(훗날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를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런트는 후루타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또한 주력 선수였던 마유미 아키노부는 고향 후쿠오카현을 연고로 하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트레이드될 예정이었지만, 무라야마는 이를 적극적으로 막아냈다.

1990년부터 아사히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되어 다시 해설자로 활동했고, 1993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현역 시절부터 사업가적 자질이 뛰어났던 무라야마는 아시야시에 있는 맨션을 구입해 자신의 회사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그 자택 맨션은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어, 한동안 자가용에서 숙박하는 생활을 했다. 이후 직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8년 8월 22일에 향년 61세로 사망했다.[76]

4. 2. 한신 타이거스 감독 복귀 (1988-1989)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닛폰 TV 방송망 계열 방송국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한 후, 1988년 한신 감독으로 복귀했다. 등번호는 자신의 영구 결번인 11번을 그대로 사용했다.[106] 오노 히사시, 와다 유타카, 나카노 사토루 등 젊은 선수들을 '소년대'라는 이름으로 집중 기용하여 주목을 받았으나, 2년 연속 최하위권(6위, 5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물러났다.

감독 재임 중 리쓰메이칸 대학 출신 포수 후루타 아쓰야(후에 야쿠르트 스왈로스 소속)를 신인 선수 지명 회의에서 지명하려 했으나, 프런트가 후루타의 안경 착용을 이유로 거부했다. 또한 주력 선수였던 마유미 아키노부후쿠오카현을 연고로 하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트레이드하려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막아냈다.

4. 3. 명예의 전당 헌액과 사망

1993년에 野球殿堂|야구 명예의 전당일본어에 헌액되었고, 5년 후인 1998년 8월 22일에 직장암으로 인해 향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6] 고베 시내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후, 무라야마의 관을 실은 영구차는 참석한 많은 팬들의 롯코 오로시 대합창을 받으며 장례식장을 떠났다.

5. 플레이 스타일

한신 타이거스 투수로서 2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NPB에서 총 15개의 타이틀(8개)[1]·주요 표창(7개)[2]을 획득했다.[3]

온몸을 사용하여 투지를 드러내는 투구폼은 '자토페크 투법'으로 알려져 있다.[4][5] 시즌 평균 자책점 0점대(0.98)를 달성(역대 9번째, 전후 유일)했으며, 통산 WHIPNPB 기록(0.95), 통산 평균 자책점의 센트럴 리그 기록(2.09)도 보유하고 있다.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3회 수상(역대 최다 타이 기록)하여, '2대 미스터 타이거스'라고도 불린다.

1959년에 기록한 시즌 WHIP 0.7483은 오랫동안 센트럴 리그(2리그제 이후의 NPB) 기록이었으나, 2023년에 무라야마와 마찬가지로 효고현 출신의 타이거스 투수인 무라카미 쇼키(0.741을 기록)에 의해 깨졌다.[6]

5. 1. 투구 스타일

온몸을 사용하여 투지를 드러내며 던지는 모습은 '인간 기관차'라고 불린 에밀 자토페크의 주법에 비유되어 '''자토페크 투법'''이라고 불렸다.[4][5] 고야마 마사아키와는 대조적으로, 무라야마는 '10-0'으로 9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도 전력 투구하는 스타일을 고수했다.[79]

요시다 요시오에 따르면, 무라야마는 포수 야마모토 테츠야의 사인과 반대되는 투구를 가끔 했다. 사인을 보고 타구의 방향을 예측하던 요시다가 이유를 묻자 '타자가 예측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81]

오버핸드, 스리쿼터, 사이드 스로우의 세 종류 투구 폼으로 구분했으며[82], 그 세 종류의 투구 폼에서 나오는 승부구 포크볼 '3단 포크'는 오랫동안 상대 타자를 농락했다. 오버핸드에서의 포크는 거의 눈을 감고도 생각한 곳에 떨어뜨릴 수 있었고, 사이드 스로우에서의 그것은 흔들리면서 떨어졌다고 한다.[29] 무라야마는 손이 컸으며,[83] 손목에서부터 중지 끝까지가 약 22cm였다고 한다. 포크볼을 많이 던지는 투수는 폭투가 되기 쉽지만, 무라야마는 30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폭투가 16개밖에 되지 않았고, 시즌 전체로 봐도 1961년에 4개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2개 이하였다. 1959년1965년에는 각각 295⅓이닝, 307⅔이닝을 던져 폭투가 없었다.

스기우라 타다시는 오타 코지가 무라야마의 폼을 흉내 내려 하자, '무라야마의 폼은 상반신을 사용하는 방식이 강압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邪道)다. 그래도 멋지게 강속구를 던졌다. 겉모습만 흉내 내면 망가질 뿐이다'라고 타이르고 중단시켰다.[84]

무라야마는 포크볼을 한 경기에서 30~40개는 던졌다고 한다. 에가와 스스무는 무라야마의 포크에 대해 "최전성기에는 훅하고 떠올라 멈춘 듯한 느낌으로 거기서부터 뚝 떨어진다. 그게 2~3년 지나니까 떠오르는 느낌이 없어졌기에, 슈트 회전과 슬라이더 회전의 포크를 던지게 되었다"고 말했다.[86]

일본 최초의 포크볼러로 꼽히는 스기시타 시게루도 무라야마의 포크볼을 인정하며, "진짜 포크볼을 던진 것은 나와 무라야마, 무라타, 노모, 사사키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후년에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SFF)이 새로운 마구로 붐이 일었을 때, 무라야마는 "뭐야, 이 공... 내가 20년 전에 쓰던 녀석이잖아"라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29]

5. 2. 타격 스타일

통산 940타수 165안타, 1홈런, 51타점, 타율 .176을 기록했다.[91]

6. 상세 정보

무라야마 미노루의 선수 및 감독 시절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연도구단순위경기 수승리패전무승부승률게임차홈런타율방어율연령
1970한신2위13077494.6112.0111.2452.3634세
19715위13057649.47112.5101.2202.7635세
19722위13071563.5593.5125.2393.0036세
19886위13051772.39829.582.2483.8252세
19895위13054751.41930.5135.2574.1553세
통산: 5년52824127116.471A클래스: 2회, B클래스: 3회


  • 1970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 체제였다.[49]
  • 1972년 4월 21일, 선수(투수) 전념을 위해 감독 지휘권을 반납했다. (8경기 2승 6패, 승률 .250) 당시 감독 대행은 가네다 마사야스였다.[49]
  • 통산 성적은 실제로 지휘한 경기 기준이다.[49]

선수 시절 주요 기록

항목기록
사와무라 에이지 상3회 (1959년, 1965년, 1966년) ※ 3회 수상은 역대 최다 타이기록 (다른 수상자는 스기시타 시게루, 가네다 마사이치,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요시노부)
최고 훈장 선수 (MVP)1회 (1962년)
베스트 나인3회 (1962년, 1965년, 1966년)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1993년


첫 기록

항목내용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1959년 4월 14일, 대 국철 스왈로스 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첫 탈삼진위와 같음, 1회 초에 하코다 준으로부터


기념비적인 기록

항목내용
1000 투구 이닝1962년 8월 1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5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95번째
1000 탈삼진1963년 8월 28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1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 초에 짐 마샬로부터 ※역대 26번째
100승1964년 6월 13일, 대 국철 스왈로스 12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2회 초 1사에서 6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3이닝 무실점 ※역대 37번째
1500 투구 이닝1964년 8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4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54번째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 초에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역대 15번째
2000 투구 이닝1966년 7월 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3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31번째
150승1966년 7월 17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21번째
2500 투구 이닝1968년 10월 6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2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20번째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회 초에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역대 7번째
200승1970년 7월 7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 무실점 완봉 승리 ※역대 14번째
3000 투구 이닝1972년 5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13번째
500경기 등판1972년 6월 24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2차전 (가와사키 구장), 선발 등판으로 4회 1/3을 5실점 ※역대 27번째


기타 기록

항목내용
통산 WHIP0.95 (통산 2000 투구 이닝 이상, 일본 기록)
통산 평균자책점2.09 (통산 2000 투구 이닝 이상, 센트럴 리그 기록)
시즌 평균자책점0.98 (규정 투구 이닝 이상, 1970년, 센트럴 리그 기록)
시즌 WHIP0.748 (규정 투구 이닝 이상, 1959년, 센트럴 리그 및 2 리그제 이후의 NPB 신인 기록)
통산 스왈로스(국철, 산케이, 아톰즈, 야쿠르트)전 최다 승수54승(21패)
올스타전 출장8회 (팬 투표 선출: 1962년, 1964년, 1966년 / 감독 추천: 1959년, 1960년, 1961년, 1965년, 1967년, 1969년)


통산 투수 성적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59오사카
한신
542619721810----.6431079295.11651556252940145391.190.75
19603618710815----.348665167.21161248731532062472.520.98
1961483118312413----.6491148293.02381662972214181742.271.02
1962573823672514----.6411386366.12611755852651062491.200.86
1963281610201110----.524640158.11261648111211159492.791.10
1964463317522218----.5501043255.022727807515920102943.321.20
19653937261142513----.6581165307.22211752542050072671.960.89
196638322489249----.7271102290.11941652342071058501.550.85
19673025932139----.591709180.11412042311262062562.791.01
196832241410158----.652784198.01691339371522066602.731.05
1969352611121214----.462842214.21801938271600058482.011.02
19702519751143----824573156.085734631180018170.980.76
1971191042175----.58332583.07061513450026252.711.02
1972221330146----.40034084.27881832451036343.611.13
통산: 14년5093481925532222147----.602118013050.12271209639605722711638077092.090.95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붉은 굵은 글씨'''는 NPB 기록
  • 오사카(오사카 타이거스)는 1961년에 한신(한신 타이거스)으로 구단명을 변경

타격 기록940타수 165안타, 1홈런, 51타점, 타율 .176[91]
수상 및 타이틀 경력타이틀

타이틀횟수연도
다승왕2회1965년, 1966년
최우수 평균 자책점3회1959년, 1962년, 1970년
최다 탈삼진2회1965년, 1966년[92]
최고 승률1회1970년


수상

횟수연도
다승왕21965년, 1966년
최우수 평균 자책점31959년, 1962년, 1970년
최다 탈삼진21965년, 1966년
최고 승률11970년
MVP11962년
사와무라 에이지상31959년, 1965년, 1966년
베스트 나인31962년, 1965년, 196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1993년

[1][2][3]
등번호

6. 1. 출신 학교

6. 2. 선수 경력

무라야마 미노루는 1959년부터 1972년까지 오사카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59년 신인 시절, 무라야마는 54경기에 등판하여 26번의 선발 등판에서 19번의 완투를 기록했다. 그 시즌에 18승 10패, 1.1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리그를 이끌었고, 처음으로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다. 이는 카네다 마사이치의 3년 연속 사와무라 상 수상을 저지한 것이었다. 무라야마는 선수 경력 동안 3번의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는데, 1965년에 단독 수상, 1966년에는 호리우치 츠네오와 공동 수상하며, 이 상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 수상자가 나왔다. 2003년 한신의 이가와 케이와 다이에의 사이토 카즈미가 공동 수상하기 전까지 사와무라 상은 공동 수상자를 배출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 동안 그의 팀인 오사카 한신 타이거스는 1962년과 1964년 두 차례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팀의 선수였지만,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오사카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다.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으며, 그의 등번호 11번은 오사카 한신 타이거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

1960년 부진한 성적을 거둔 무라야마는 스트레이트와 포크볼의 세로 변화 외에 가로 변화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자신의 무기를 되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포크볼 연마에 더욱 힘썼다. 손때로 새까맣게 될 때까지 하루 종일 공을 쥐고 있었고, 더욱 깊게 공을 잡기 위해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 물갈퀴 부분에 칼로 베는 시도를 하려다 그만두기도 했다.[28] 이러한 노력으로 포크볼도 "생각하는 대로 던질 수 있게" 되는 등 정확도가 향상되었다.[29] 1961년에는 24승(13패) 평균자책점 2.26(리그 6위)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20승 투수가 되었다.

1962년에는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이 무라야마와 코야마에게 일정 간격을 두고 등판시키는 로테이션을 짰다. 그 해 무라야마는 25승(14패) 평균자책점 1.20으로 활약하며 한신의 두 리그 분립 후 첫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획득한 외에도 베스트 나인, 자신 유일의 최고 훈장 선수(MVP)도 수상했다. 도에이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에 등판하여 2승(2패)을 거두는 등 맹활약을 펼쳤지만, 7차전에서 니시조노 아키오에게 결승 홈런을 맞고 패배했다.

같은 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일본을 방문한 미일 야구에서도 활약하여, 11월 17일 제16차전(고라쿠엔)에서 노무라 가쓰야(난카이)와 배터리를 이루어, 8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쾌투를 선보였다. 무사사구 9탈삼진 완봉승을 거두었는데, 미일 야구에서 일본인 투수가 완봉승을 거둔 것은 사상 최초였다. 신문에는 "사와무라 2세"라고 쓰였다.[32] 경기 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이었던 밥 셰핑이 무라야마와 악수하며 "내년에 우리 팀으로 오지 않겠나? 당신과 계약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1963년에는 건초염이 악화되어 악력이 상실되었고, 개막부터 2연패를 했다. 4월 22일 검사 결과 내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오사카 후생 연금 병원에 입원했다.[33][34] 5월 13일 의사로부터 무기한 휴양을 통보받아 휴양했다. 이 시기 재난이 계속되자 등록명을 "'''무라야마 마사시'''"로 개명했다(이 해에만).[34] 6월 9일 다이요 웨일스전부터 복귀하여, 6월 16일 국철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8월 초까지 2승 6패로 부진에 시달렸다. 8월 11일 요미우리전에서는 7회에 구원 등판했을 때, 첫 타자인 이케자와 요시유키[35]에게 자신 있게 던진 공을 주심이 "볼"로 판정하자 격노하여,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나는 한 공 한 공 목숨 걸고 던지고 있다!"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36] 결국, 시즌에서는 11승(10패)으로 끝났고, 규정 투구 이닝에도 미치지 못했다.

1964년에는 코야마 마사아키가 도쿄 오리온스로 이적했기 때문에 무라야마의 부담이 늘어날 것으로 보였지만, 진 바키가 29승을 거두는 활약을 펼치며 코야마의 공백을 메웠고, 무라야마도 부활하여 22승을 거두며 두 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난카이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무라야마는 3연패를 당했고, 팀도 3승 4패로 일본 제일을 놓쳤다.

1965년 개막 전 오픈전 후반에 손목에 쓰지 요시노리의 타구가 직격하면서 수근골을 복잡 골절하여, 5월까지 등판할 수 없었다. 부상이 나아 2군에서 연습하던 중, 오버스로우, 스리쿼터, 사이드스로의 "삼단 투구법"을 개발했다. 5월 17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고시엔)에서 복귀하여, 시즌에서는 25승(13패) 평균자책점 1.96(리그 2위)으로 최다승과 최다 탈삼진을 기록한 외에도 베스트 나인과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1966년에도 24승(9패) 평균자책점 1.55(리그 2위)를 기록하여 2년 연속 사와무라상·베스트 나인·최다승을 획득했다.

1967년은 5월에 오른손의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이 차갑게 저린 듯 감각이 없어지는 증상을 겪었다. 5월 31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 선발 등판하여 3회를 1안타로 막아내지만, 3회 종료 시점에 악력이 전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긴급 강판. 다음날, 오사카 후생 연금 병원에 가니 오른팔 혈행 장애로 진단받아, 손가락에 부담이 가는 포크볼을 던지는 것을 금지당했다. 시즌에서는 13승(9패) 평균자책점 2.80(리그 14위)로 끝난다[39]。 이 혈행 장애 발병 이후 20승을 거두지 못하고, 에가와 스스무에게 에이스 자리를 넘겨주었다.

1968년은 수근관 증후군으로 오른손목 뿌리의 격통에 시달려, 6월 초순까지 0승 5패, 평균자책점 4.91로 부진했다. 6월 말에 복귀하여, 7월 10일의 다이요전에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자, 약 2개월 사이에 11연승을 기록. 최종적으로 15승(8패)을 거두었고, 평균자책점 2.73은 리그 7위에 올랐다[40]

1969년에 감독이 고토 쓰기오로 교체되자, 무라야마가 투수 코치 겸임이 된다. 이 해는 12승 14패이면서 평균자책점 2.01로 3번째 평균자책점 2위가 된다(1위는 에가와로 1.81). 시즌 오프에 무라야마는 선수 겸임 감독에 취임했다.

1970년 무라야마는 선수 준수 사항 "무라야마의 5개 조의 맹세"를 알린다[44][45]

# 금지 유흥・・・볼링당구

# 유흥(마작 등)은 합숙·캠프를 통해 시간·장소를 정해 실시

# 아키 캠프에서의 아침 체조는 8시 15분 해안. 아침 식사는 9시

# 휴일 전의 통금은 없음. 단, 매니저·코치에게 연락

: 주의: 연습 시간 시작 엄수. 5분 전에 그라운드에 나온다

: 주의: 연습 시간, 원정 시 집합 시간, 통금의 엄수. 사정이 있어, 결장·지각하는 경우는 매니저에게 연락

: 주의: 만일,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벌금 5000엔

동시에, 중심 선수들에게 자각을 갖게 할 목적으로 "간부 선수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프로 야구계는 검은 안개 사건이 표면화되고 있었지만, 특히 유혹이 많은 젊은 선수를 엄격하게 율하기 위해 구단과 상담. 3월 하순에는 합숙·호풍장에 구단 직원을 상주시키는 것과 함께, "호풍장 통달"을 냈다[47]

# 선수 간의 금전 차용 금지

# 청소·기타 담당제 실시

# 자료실·오락실 사용에 대해

# 외부와의 전화 사용에 대해

# 통금 엄수·연락의 철저

이러한 일련의 규제에 대해, 세간에서는 "무라야마 계엄령"이라고 불렸다. 무라야마 자신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회전의 포크볼을 다투는 기교파 투수로서 활약하며, 같은 해 7월 7일의 다이요전에서 완봉 승리를 거두어 통산 200승을 달성한다. 투수로는 14승(3패)을 거두었고, 최우수 평균자책점(0.98)과 최고 승률(.824)을 획득, 감독으로서 "다이나믹 타이거스"의 슬로건을 내걸고[48], 종반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쳐, 승률 .611로 선두·요미우리 자이언츠와 2게임 차 2위에 들어,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에게 "아파레"라고 말하게 했다. 이 해에 기록한 평균자책점 0.98은 규정 투구 이닝 이상에서의 '''전후 유일의 방어율 0점대'''이다[49][50]

1971년은 기동성 있는 공격력의 육성을 테마로 시즌에 임한다. 그러나, 개막 전에 무라야마는 지병인 혈행 장애의 정기 검사를 받은 고베의 다도코로 병원에서 결핵이 발병했다[45]。 신문 발표는 "담낭증"으로 얼버무리고 등판을 자제하고, 5월 9일에 다이요를 상대로 시즌 첫 등판에서 완봉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에도 팀이 부진에 시달리는 가운데, 충분히 던질 수 없어, 결국 시즌에서는 5위로 추락한다. 무라야마의 등판은 19경기(선발 10경기)로 줄어, 이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45], 구단 오너인 노다 세이조도, 더 많이 등판하도록 지시하는 형편이었다[51]

1987년 한신은 구단 역사상 최저 승률 .331로 9년 만에 최하위에 머물렀고, 10월 12일 요시다 요시오가 감독에서 해임되었으며, 10월 14일 무라야마에게 감독 취임 요청이 들어왔다[62]。오카자키 요시토 구단 사장은 같은 날,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타미야 켄지로에게 전화하여 헤드코치직을 요청했다[63]。결국 이를 수락하여 감독에 취임했고, 무라야마는 10월 16일 감독 취임 기자 회견을 열었다.

같은 해 11월에 열린 팬 감사 데이에서, 취임 직후의 무라야마는 "지금, 팀은 과도기이므로…"라며 젊은 선수들을 중점적으로 기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와다 유타카・오노 히사시・나카노 사토시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64]。이 3명은 키가 170cm 전후였기 때문에 "소년대"라고 명명했고, 무라야마 자신이 타격 투수로 등판했지만, 이 무리가 심해 고관절을 다쳐, 인공 관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용 방침은 다른 선수들에게 받아들여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타오 야스시는 "와다는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오노와 나카노에게는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미완의 선수를 중용했기 때문에, 오픈전 성적은 엉망이었다"고 회고했다.[64]。오카다는 "당시, 한신은 전년도에 대참패를 했기 때문에, 무라야마 감독은 팀을 완전히 바꾸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를 나눴을 때는 그렇게까지 격변시킬 줄은 몰랐다. 가장 심한 것이 오노, 와다, 나카노의 '소년대'다. 이 3명을 레귤러로 발탁했는데, 포지션을 준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없으면 전력으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65]

감독 취임 1년째인 1988년에는 전술한 "소년대"를 개막부터 1, 2, 7번으로 기용했다[63]。개막 4연패 후 요미우리전(고시엔)에서 나카노가 프로 첫 타점의 결승타를 포함한 3안타를 기록하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63]5월 3일부터 5월 5일에 요미우리전 (도쿄 D)에서 3연승을 거두며 2위로 부상했지만, 이 때가 정점이었다[63]。랜디 버스도 수두증을 앓고 있는 장남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구단과 대립하여, 시즌 도중인 6월 27일에 해고되었다[63]。멤버인 와다가 레귤러로 정착했지만, 주포인 오카다가 타율 .267・23홈런・72타점으로 평범한 성적을 거두었고, 카케후도 33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우승팀인 주니치에 29.5 게임 차가 났으며[63], 전년에 이어 2년 연속 승률 3할대로 최하위에 머물렀다[68]。1989년에는 개막전 히로시마전을 쾌승으로 시작했지만, 4월 12일 요미우리전(한신 고시엔 구장)부터 4월 19일 다이요전(요코하마)까지 6연패를 당하는 등 9경기에서 2승 7패로 크게 패하며, 최하위에 머물렀다. 매트 키오・세실 필더 등 외국인 선수 의존적인 투타에서 키오, 나카다 코지가 부상으로 이탈, 이케다 치카・이노마타 타카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5위로 시즌을 마쳤다[69][70][71]

1969년 6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오카다가 빌 가릭슨으로부터 좌익수 폴 옆으로 극적인 역전 만루 홈런을 날려 한신이 승리했지만, 이 날은 앞서 언급한 천람 경기로부터 정확히 30주년이었고[72], 같은 좌익수 폴 옆으로의 홈런으로 스코어도 5-4로 뒤집혔으며, 게다가 당시 요미우리 감독은 천람 경기에서 완투 승리한 후지타 모토시였기 때문에, 오카다가 무라야마의 복수를 해낸 형태가 되었다. 무라야마는 경기 후, "오늘은 오카다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지만, 젊은이들(이 날 출전한 젊은 선수인 야기 유타카・카메야마 츠토무・와다 유타카)이 잘 연결했다. 천람 경기와 같은 날? 정말 기쁘다. 기분이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73]。같은 해 시즌 종료 후 감독에서 퇴임했다.

선수로서의 특징은 온몸을 사용하며 헐떡이면서 투지를 드러내며 던지는 모습은 '인간 기관차'라고 불린 육상장거리 선수 에밀 자토페크의 주법에 비유되어 ''''자토페크 투법'''''이라고 불렸다[4][5]

투구 폼도 오버핸드스리쿼터・사이드 스로우의 세 종류 투법으로 구분했으며[82], 그 세 종류의 투구 폼에서 나오는 승부구 포크볼 '3단 포크'는 오랫동안 상대 타자를 농락했다. 오버핸드에서의 포크는 거의 눈을 감고도 생각한 곳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고 하며, 사이드 스로우에서의 그것은 흔들리면서 떨어진다고 했다[29]

다음은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이다.

항목기록
사와무라 에이지 상3회 (1959년, 1965년, 1966년) ※ 3회 수상은 역대 최다 타이기록 (다른 수상자는 스기시타 시게루, 카네다 마사이치,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요시노부)
최고 훈장 선수 (MVP)1회 (1962년)
베스트 나인3회 (1962년, 1965년, 1966년)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1993년



다음은 첫 기록들이다.

항목내용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1959년 4월 14일, 대 국철 스왈로스 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첫 탈삼진위와 같음, 1회 초에 하코다 준으로부터



다음은 기념비적인 기록들이다.

항목내용
1000 투구 이닝1962년 8월 1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5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95번째
1000 탈삼진1963년 8월 28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1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 초에 짐 마샬로부터 ※역대 26번째
100승1964년 6월 13일, 대 국철 스왈로스 12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2회 초 1사에서 6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3이닝 무실점 ※역대 37번째
1500 투구 이닝1964년 8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4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54번째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 초에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역대 15번째
2000 투구 이닝1966년 7월 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3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31번째
150승1966년 7월 17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21번째
2500 투구 이닝1968년 10월 6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2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20번째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회 초에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역대 7번째
200승1970년 7월 7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 무실점 완봉 승리 ※역대 14번째
3000 투구 이닝1972년 5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13번째
500경기 등판1972년 6월 24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2차전 (가와사키 구장), 선발 등판으로 4회 1/3을 5실점 ※역대 27번째



기타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항목내용
통산 WHIP0.95 (통산 2000 투구 이닝 이상, 일본 기록)
통산 평균자책점2.09 (통산 2000 투구 이닝 이상, 센트럴 리그 기록)
시즌 평균자책점0.98 (규정 투구 이닝 이상, 1970년, 센트럴 리그 기록)
시즌 WHIP0.748 (규정 투구 이닝 이상, 1959년, 센트럴 리그 및 2 리그제 이후의 NPB 신인 기록)
통산 스왈로스(국철, 산케이, 아톰즈, 야쿠르트)전 최다 승수54승(21패)
올스타전 출장8회 (팬 투표 선출: 1962년, 1964년, 1966년 / 감독 추천: 1959년, 1960년, 1961년, 1965년, 1967년, 1969년)


6. 3. 지도자 경력

무라야마 미노루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오사카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맡았다.[28]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28] 이후 1988년과 1989년에 다시 오사카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다.[28]

연도구단순위경기 수승리패전무승부승률게임차홈런타율방어율연령
1970한신2위13077494.6112.0111.2452.3634세
19715위13057649.47112.5101.2202.7635세
19722위13071563.5593.5125.2393.0036세
19886위13051772.39829.582.2483.8252세
19895위13054751.41930.5135.2574.1553세
통산: 5년52824127116.471A클래스: 2회, B클래스: 3회


  • 1970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 체제였다.
  • 선수(투수) 전념을 위해 1972년 4월 21일부터 지휘권 반납(8경기 2승 6패, 승률 .250). 감독 대행은 가네다 마사야스였다.
  • 통산 성적은 실제로 지휘한 경기이다.

6. 4. 해설자 경력

무라야마는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후, 1973년부터 1987년까지 닛폰 TV, 요미우리 TV, 히로시마 TV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96] 닛폰 TV 계열 프로 야구 중계에서 해설을 맡았다.[97]

1990년부터 1998년까지는 아사히 방송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98] 라디오의 ABC 프레시 업 나이터, TV의 골든 나이터 / 파워 업 나이터 / ABC 프로 야구 중계에서 해설을 맡았다. 또한 선 TV의 선 TV 박스석에서도 해설을 했다.[99]

6.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무라야마 미노루는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3회(1959년, 1965년, 1966년) 수상했다.[1] 1959년에는 1.19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를 이끌며 이 상을 처음 받았고, 카네다 마사이치의 3년 연속 수상을 저지했다. 1966년에는 호리우치 츠네오와 공동 수상하여 이 상 역사상 최초의 공동 수상자가 되었다. 1962년에는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1]

6. 5. 1. 타이틀

타이틀횟수연도
다승왕2회1965년, 1966년
최우수 평균 자책점3회1959년, 1962년, 1970년
최다 탈삼진2회1965년, 1966년[92]
최고 승률1회1970년



무라야마 미노루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2번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NPB에서 총 15개(타이틀 8개[1], 주요 표창 7개[2])의 획득했다.[3]

6. 5. 2. 수상

횟수연도
다승왕21965년, 1966년
최우수 평균 자책점31959년, 1962년, 1970년
최다 탈삼진21965년, 1966년
최고 승률11970년
MVP11962년
사와무라 에이지상31959년, 1965년, 1966년
베스트 나인31962년, 1965년, 196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1993년

[1][2][3]

6. 6. 개인 기록

무라야마 미노루는 선수 시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여러 기록을 남겼다.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시즌 최우수 평균 자책점: 0.98 (1970년, 센트럴 리그 기록)[107]
  • 올스타전 출장: 8회 (1959년 ~ 1961년, 1964년 ~ 1967년, 1969년)
  • 통산 WHIP: 0.95 (통산 2000 투구 이닝 이상, 일본 기록)
  • 통산 평균자책점: 2.09 (통산 2000 투구 이닝 이상,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WHIP: 0.748 (규정 투구 이닝 이상, 1959년, 센트럴 리그 및 2 리그제 이후의 NPB 신인 기록)


1959년에는 54경기에 등판하여 18승 10패, 평균자책점 1.19를 기록하며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다.[1] 이후에도 1965년, 1966년(공동 수상)에 사와무라 상을 추가로 수상하며 통산 3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1] 1959년에 기록한 시즌 WHIP 0.7483은 오랫동안 센트럴 리그 기록이었으나, 2023년에 무라카미 쇼키 (0.741)에 의해 깨졌다.[6]

1970년에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 활동하면서도 평균자책점 0.98을 기록하며, 규정 투구 이닝 이상에서의 전후 유일의 방어율 0점대를 달성했다.[49][50]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동하며 2번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개인적으로는 NPB에서 총 15개의 타이틀(8개)과 주요 표창(7개)을 획득했다.[1][2][3]
주요 기록

기록 종류내용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1959년 4월 14일, 대 국철 스왈로스 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첫 탈삼진위와 같음, 1회 초에 하코다 준으로부터
1000 투구 이닝1962년 8월 1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5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95번째
1000 탈삼진1963년 8월 28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1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 초에 짐 마샬로부터 ※역대 26번째
100승1964년 6월 13일, 대 국철 스왈로스 12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2회 초 1사에서 6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3이닝 무실점 ※역대 37번째
1500 투구 이닝1964년 8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4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54번째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 초에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역대 15번째
2000 투구 이닝1966년 7월 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3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31번째
150승1966년 7월 17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21번째
2500 투구 이닝1968년 10월 6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2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20번째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1회 초에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역대 7번째
200승1970년 7월 7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 무실점 완봉 승리 ※역대 14번째
3000 투구 이닝1972년 5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13번째
500경기 등판1972년 6월 24일, 대 다이요 호에일스 12차전 (가와사키 구장), 선발 등판으로 4회 1/3을 5실점 ※역대 27번째


통산 투수 성적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59오사카
한신
542619721810----.6431079295.11651556252940145391.190.75
19603618710815----.348665167.21161248731532062472.520.98
1961483118312413----.6491148293.02381662972214181742.271.02
1962573823672514----.6411386366.12611755852651062491.200.86
1963281610201110----.524640158.11261648111211159492.791.10
1964463317522218----.5501043255.022727807515920102943.321.20
19653937261142513----.6581165307.22211752542050072671.960.89
196638322489249----.7271102290.11941652342071058501.550.85
19673025932139----.591709180.11412042311262062562.791.01
196832241410158----.652784198.01691339371522066602.731.05
1969352611121214----.462842214.21801938271600058482.011.02
19702519751143----824573156.085734631180018170.980.76
1971191042175----.58332583.07061513450026252.711.02
1972221330146----.40034084.27881832451036343.611.13
통산: 14년5093481925532222147----.602118013050.12271209639605722711638077092.090.95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붉은 굵은 글씨'''는 NPB 기록
  • 오사카(오사카 타이거스)는 1961년에 한신(한신 타이거스)으로 구단명을 변경


타격 기록은 940타수 165안타, 1홈런, 51타점, 타율 .176을 기록했다.[91]

6. 7. 등번호

참조

[1] 문서 수상 내역 (최다승, 최고 평균자책점, 최다 탈삼진, 최고 승률)
[2] 문서 수상 내역 (사와무라 에이지 상, 최우수 선수, 베스트 나인)
[3] 웹사이트 村山 実 野球殿堂博物館 https://baseball-mus[...]
[4] 뉴스 【11月11日】1958年(昭33) 昭和11年生まれの背番号11、村山実が阪神と契約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신문사 2007-11-11
[5] 웹사이트 村山さんが背負った「悲運」の歴史再び… 天国で悔し涙!?「命かけて判定してくれッ」 http://www.sankei.co[...] 2016-05-12
[6] 뉴스 【阪神】村上頌樹に超一流データ レジェンド“村山超え”WHIP0.741は過去最高記録 https://www.nikkansp[...] 일간 스포츠 2023-09-26
[7] 문서 村山[1993: 34]
[8] 문서 村山[1993: 36]
[9] 문서 학교 통합 및 이전
[10] 문서 村山[1993: 40]
[11] 문서 村山[1993: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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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村山[1993: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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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村山[1993: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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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村山[1993: 75]
[20] 문서 첫 등판 완봉승
[21] 서적 프로야구 최강의 에이스는 누구인가? 사이즈샤 2014-10-07
[22] 서적 21세기의 전설사 나가시마 시게오 DVD 제1권 등번호 3의 시대 미디어 팩토리 2001-10-26
[23] 서적 거인군 5000승의 기억 영구불멸판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7
[24] 서적 천황과 등번호 3 쇼덴샤 1983
[25] 뉴스 Going! Sports&News 일본텔레비전방송망 2011-05
[26] 웹사이트 あれはファウルや、絶対ファウルや - ニッカン名言集(^。^) https://www.nikkansp[...]
[27] 뉴스 퀴즈 더비 TBS텔레비전
[28] 문서 村山[1993: 186-188]
[29] 문서 마구 전설-프로야구 불멸의 히어로들
[30] 문서 村山[1993: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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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서 村山[1993: 209]
[34] 간행물 1958-69년 프로야구를 되살리다 주간 베이스볼 별책 베이스볼 Part6 1963년 편 베이스볼 매거진사 2023-11
[35] 문서 전날 동일 카드 경기
[36] 뉴스 【昭和39年物語】(9)村山実という男…「泣きの村山」怒りの猛抗議 https://www.sankei.c[...] 산케이 신문
[37] 서적 (서적 제목 없음)
[38] 서적 (서적 제목 없음)
[39]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0]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1]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2]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1973年春季号 プロ野球トラブルの歴史 (출판사 미상)
[43]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4]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5] 뉴스 【内田雅也の猛虎監督列伝(16)~第16代・村山実】苦悩の「指揮権返上」が招いた悲劇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 아넥스
[46]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7]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8] 서적 (서적 제목 없음)
[49] 웹사이트 阪神・青柳 「防御率0点台」なら村山実以来52年ぶり 17日からリーグ戦再開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22-06-16
[50] 문서 세리그에서 마지막으로 1.50 미만의 방어율을 기록한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1970년 야쿠르트 아톰스(현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는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무실점으로 마쳤지만, 야쿠르트는 드래프트 제도 도입 이후 승률 2할을 기록한 몇 안 되는 팀이다(다른 팀은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있다).
[51]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2]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3] 서적 (서적 제목 없음)
[54] 뉴스 村山、最後のフォーク 朝日新聞 1973-03-22
[55] 문서 아사히 신문 기사에서는 오우가 "앞의 두 사람(고다, 스에쓰기)의 삼진을 보고, 역시 이런 형태(삼진)로 보내주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라는 코멘트가 소개되고 "연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무라야마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기사에서 "(자이언츠의) 여러분이 협력해 주셨을 것입니다"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56] 웹사이트 阪神・村山実、引退試合での涙の騎馬/週べ回顧1973年編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オンライン 2021-07-08
[57] 서적 프로야구 대사전 신초사
[58] 서적 君は山口高志を見たか-伝説の剛速球投手 講談社
[59] 문서 히로시마 텔레비전에 관해서는, 자이언츠전 이외의 로컬 방송은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출연, 1979년 10월 6일의 우승 결정전(히로시마 대 한신전)의 해설도 농인 섭과 함께 맡았다(실황: 가토 신, 벤치 리포트: 와키다 요시노부).
[60] 간행물 コロコロ創刊伝説 小学館
[61] 문서 또한 와카바야시 타다시(237승), 스기시타 시게루(215승), 후지모토 히데오(200승) 3명도 대학 졸업이지만, 메이지·다이쇼 태생이기 때문에 입회 자격이 없다.
[62] 간행물 【세·파 탄생 70주년 기념 특별 기획】 되살아나는 1980년대 프로야구 Part.3 [1987년 편] 베이스볼 매거진사
[63] 뉴스 【내다 마사야의 맹호 감독 열전(24)~제24대 무라야마 미쓰루】격정가의 "11"을 습격한 잇따른 사건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 아넥스
[64] 웹사이트 구장이 부르고 있다(타오 야스시) 수뇌부·프런트가 억누르고 싶은 대물 신인의 트라이셉츠 https://www.nikkei.c[...] 일본경제신문 2019-02-24
[65] 뉴스 오카다 아키후미, 일간 겐다이, 내 머리는 왜 큰가<제22회>무라야마 감독이 팀을 갈아엎고 암흑 시대에 돌입 2015년 10월 3일 일간 겐다이
[66] 간행물 월간 타이거스 2016년 12월호, 시마오 야스후미의 시마·시마 일기, 제84회 와카이 타다오씨(타이거스 OB) (출판사 미상)
[67] 뉴스 【나의 실패(5)】우에다 지로, 마이크 나카타에게 등을 돌리고 기분을 상하게 해 버렸다 https://www.sanspo.c[...] 산케이 스포츠 2015-11-21
[68] 간행물 【세·파 탄생 70주년 기념 특별 기획】 되살아나는 1980년대 프로야구 Part.4 [1988년 편] 베이스볼 매거진사
[69] 웹사이트 1989년 센트럴 리그 https://npb.jp/bis/y[...] NPB 2020-08-24
[70] 뉴스 【타이거스 혈풍록 맹호 수호전】마이너스의 연쇄…6연패로 정위치에 무라야마 감독이 고장 나카타&키오에게 짜증을 내다 https://www.sankei.c[...] 산케이 신문 2014-04-01
[71] 간행물 【セ・パ誕生70記念特別企画】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5 [1989年編]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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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서 解説者
[76] 웹사이트 史上初の大調査 著名人100人が最後に頼った病院 あなたの病院選びは間違っていませんか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1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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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문서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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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11-11
[85] 뉴스 【私の失敗(4)】上田二朗、球宴でライバル球団の捕手に研究され… https://www.sanspo.c[...] 201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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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간행물 プロ野球記録大鑑
[88] 문서 스포츠 애니메이션의 원점 거인의 별
[89] 뉴스 「巨人の星」ライバルの阪神・花形満のモデルは村山実だった…漫画家・川崎のぼるさん明かす https://hochi.news/a[...]
[90] 서적 君は山口高志を見たか-伝説の剛速球投手 講談社 2014
[91] 웹사이트 https://npb.jp/bis/p[...]
[92] 문서 일본야구기구 공식 사이트
[93] 웹사이트 일본 프로야구 기록 Japanese Baseball Records http://2689.web.fc2.[...]
[94] 문서 1943년의 藤本英雄
[95] 문서 1962년 팬 투표
[96] 문서 1973년 - 1975년 방송
[97] 문서 1991년까지 나이트 게임 방송
[98] 문서 골든 나이터, 파워업 나이터
[99] 문서 일요일 아사히 방송 제작
[100] 뉴스 1999-08-03, 1999-08-09
[101] 서적 불꽃의 에이스: 자토페크식 투구의 영광 베이스볼 매거진 2001
[102] 서적 교진군 5000승의 기억 요미우리 신문,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7
[103] Youtube 무라야마, 당시 포수 야마모토, 나가시마가 사회자 도쿠미쓰 가즈오와 함께 한 방송 https://www.youtube.[...]
[104] 뉴스 Going! Sports & News 2011-05
[105] 간행물 마구 전설 분슈비주얼 문고
[106] 문서 쇼와 시대 이후 출생 기준 미달 프로 선수 명구회 가입 불가 사례
[107] 문서 1950년 이후 양대 리그제 최고 기록 및 단일 리그 시대 최고 기록
[108] 문서 8경기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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