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도시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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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다 도시하루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선수 시절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포수로 활동했으며, 간사이 대학 야구부에서 무라야마 미노루와 배터리를 이루며 활약했다. 은퇴 후 히로시마 코치, 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브레이브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에는 일본 시리즈 3연패를 포함하여 리그 4연패를 달성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2003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7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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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도시하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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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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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우에다 도시하루 |
출생일 | 1937년 1월 18일 |
사망일 | 2017년 7월 1일 (향년 80세) |
출생지 | 도쿠시마현 가이후군 시시쿠이 정(현: 가이요 정) |
사망 장소 | 가와사키시, 가나가와현 |
신장 | 177 |
체중 | 71 |
포지션 | 포수 / 감독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년도 | 1959년 |
첫 출장 | 1959년 4월 22일 |
마지막 출장 | 1961년 10월 17일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 | 2003년 |
헌액 자격 | 경기자 표창 |
선수 경력 | |
선수 | 히로시마 카프 (1959–1961) |
감독 및 코치 경력 | |
코치 | 히로시마 카프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2–1969) 한큐 브레이브스 (1971–1973) |
감독 |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 (1974–1978, 1981–1990) 닛폰햄 파이터스 (1995–1999) |
통계 (NPB) | |
시즌 | 1961년 |
리그 | NPB |
타율 | .218 |
홈런 | 2 |
안타 | 56 |
2. 선수 경력
도요 공업의 파견 사원으로 3, 4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한 뒤 도요 공업에서 일하라는 조건으로 히로시마 카프의 입단 제의를 받아들여, 1959년 대학 졸업 후 히로시마에 입단했다.[3][4] 변호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니치난 캠프에 육법전서를 가져와 연습 틈틈이 법률 공부를 하기도 했다. 개막 후에는 다나카 타카시, 가와하라 마사카즈와 함께 기용되었고, 53경기에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주전 포수였던 다나카를 위협하는 존재로 평가받았고, 하세가와 료헤이 등 주력 투수들의 평가도 좋았지만, 오른 어깨를 다쳤다.[5] 1960년에는 가와하라, 신인 니시야마 코지 등의 포수 등장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고,[5] 196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연도 | 소속 | 경기 수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9년 | 히로시마 | 66 | 184 | 165 | 13 | 38 | 5 | 1 | 0 | 45 | 12 | 4 | 6 | 3 | 0 | 14 | 0 | 2 | 17 | 4 | .230 | .298 | .273 | .571 |
1960년 | 32 | 54 | 53 | 7 | 11 | 2 | 0 | 1 | 16 | 2 | 1 | 0 | 0 | 0 | 1 | 0 | 0 | 4 | 3 | .208 | .222 | .302 | .524 | |
1961년 | 23 | 45 | 39 | 2 | 7 | 0 | 1 | 1 | 12 | 3 | 0 | 0 | 3 | 0 | 3 | 0 | 0 | 2 | 1 | .179 | .238 | .308 | .546 | |
통산 : 3년 | 121 | 283 | 257 | 22 | 56 | 7 | 2 | 2 | 73 | 17 | 5 | 6 | 6 | 0 | 18 | 0 | 2 | 23 | 8 | .218 | .274 | .284 | .558 |
- 첫 출장: 1959년 4월 22일, 한신 타이거스 3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2. 1.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가이난 고등학교 시절부터 포수였으며, 3학년이던 1954년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 8강에 진출했지만, 무야 고등학교에 아깝게 패했다.[2] 학업 성적도 우수하여, 고등학교 시절 야구 연습과 학생회 활동을 동시에 하면서 매일 아침 꾸준히 공부했기 때문에, 수면 시간은 4시간 정도였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은 "야구 따위 하지 말고, 도쿄대에 가서 변호사가 되라"고 권유했고, 우에다도 고등학교 졸업 후 1955년 간사이 대학2부 법학부에 진학했다. 간사이 대학에는 학교 추천으로 무시험 진학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필기 시험에 응시하여 400점 만점에 298점을 받았고, 야구 추천으로 +100점 보너스를 받아 398점으로 수험생 전체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야구부에서는 무라야마 미노루와 배터리를 이루며 활약했고, 간사이 6대학 야구 리그에서 4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2학년이던 1956년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1년 선배인 3루수 난바 쇼지로 등의 활약으로 결승에서 시마즈 시로·히토미 타케오 등이 있던 니혼 대학을 꺾고 서일본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3학년이던 1957년과 4학년이던 1958년 같은 대회에서는 전성기의 릿쿄대에 준결승에서 패했다. 리그 통산 68경기에 출전하여 258타수 66안타, 타율 .256, 1홈런을 기록했다. 학생 시절부터 대단한 공부벌레였으며, 독서량도 풍부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저서를 모두 읽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가이난 고등학교 시절부터 포지션은 포수였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간사이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고교 시절 경력을 인정받아 야구부에 입부하여 무라야마 미노루와 배터리로 활약했다. 프로 입문에 대한 자신감은 없었지만, "마쓰다에서 파견 사원으로 3, 4년 뛰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오라"는 히로시마 측의 권유에 따라 1959년에 입단했다.[3][4] 프로에 입단했음에도 변호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1년차인 같은 해에는 니치난 캠프에 육법전서를 가져와 야구 연습 틈틈이 법률 공부도 했다. 개막 후에는 다나카 타카시·가와하라 마사카즈와 함께 기용되었고, 53경기에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주전 포수인 다나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하세가와 료헤이 등 주력 투수들의 평가도 높았지만, 오른 어깨를 다쳤다.[5] 1961년 어깨 부상으로 은퇴하고 마쓰다로 복귀하려 했으나, 사장인 마쓰다 쓰네지의 요청으로 1962년 전임 코치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인 25세에 히로시마 코치로 취임했다.- 히로시마 카프(1959년 ~ 1961년)
연도 | 소속 | 경기 수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9년 | 히로시마 | 66 | 184 | 165 | 13 | 38 | 5 | 1 | 0 | 45 | 12 | 4 | 6 | 3 | 0 | 14 | 0 | 2 | 17 | 4 | .230 | .298 | .273 | .571 |
1960년 | 32 | 54 | 53 | 7 | 11 | 2 | 0 | 1 | 16 | 2 | 1 | 0 | 0 | 0 | 1 | 0 | 0 | 4 | 3 | .208 | .222 | .302 | .524 | |
1961년 | 23 | 45 | 39 | 2 | 7 | 0 | 1 | 1 | 12 | 3 | 0 | 0 | 3 | 0 | 3 | 0 | 0 | 2 | 1 | .179 | .238 | .308 | .546 | |
통산 : 3년 | 121 | 283 | 257 | 22 | 56 | 7 | 2 | 2 | 73 | 17 | 5 | 6 | 6 | 0 | 18 | 0 | 2 | 23 | 8 | .218 | .274 | .284 | .558 |
- 첫 출장: 1959년 4월 22일, 한신 타이거스 3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 지도자 경력
우에다 도시하루는 지도자로서 여러 팀을 거쳤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히로시마 카프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고, 1970년에는 주고쿠 방송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한큐 브레이브스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1974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1978년까지 팀을 이끌었고, 1981년부터 1990년까지 다시 감독직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한큐는 일본 시리즈 3연패를 포함한 리그 4연패를 달성하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는 NHK 야구 해설위원을 맡기도 했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는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을 맡아 팀 재건에 힘썼다. 선수 시절 큰 활약은 없었지만, 뛰어난 지도력으로 여러 팀에서 성과를 내며 "올라운드형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에다는 팀 활성화를 위해 대형 트레이드에도 적극적이었다. 한큐 시절에는 미야모토 고신·와타나베 히로키와 히로시마 시라이시 시즈오·오이시 야타로의 투수 간 교환 트레이드(1974년), 도다 요시키·모리모토 기요시와 주니치 시마야 긴지·이나바 미쓰오의 레귤러 선수 간 트레이드(1976년) 등을 성사시켰다. 닛폰햄 시절에도 에이스 니시자키 야키히로와 세이부 이시이 다케히로·나라하라 히로시의 트레이드 등을 단행했다.
감독 퇴임 후에는 선 텔레비전 해설자·데일리 스포츠 평론가로 복귀했으며, 2003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17년 7월 1일, 폐렴으로 가와사키시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25]
3. 1. 히로시마 코치 시절
上田 利治|우에다 도시하루일본어는 1962년에 전임 코치로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인 25세로 히로시마의 2군 코치로 취임했다.[3][4][6] 1963년부터는 1군 배터리 코치가 되었고, 그 후에는 1군 타격 코치로서 야마모토 가즈요시, 기누가사 사치오, 미즈타니 사토오, 미무라 토시유키, 야마모토 코지를 육성했다.[7] 몬젠 마사토, 시라이시 가쓰미, 하세가와 료헤이, 네모토 리쿠오와 네 명의 감독 아래에서 "열혈 코치"로서 수완을 발휘하며, 신념과 열정을 가진 지도 방식으로 선수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2]니치난 캠프에서는 반드시 핸드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지도에 임했다. 그날의 훈련 스케줄은 시간 단위로 정했고, 스케줄표는 인쇄하여 보도 관계자에게도 배포했다. 그 이후, 낭비 없는 훈련은 무리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각 구단도 "우에다 방식"을 배웠다.[2]
우에다는 포수 출신인 네모토 리쿠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5] 1969년 시즌 후, 네모토와 투수진 기용[5] 및 팀 강화 방침을 두고 의견이 대립했다. 노련한 구단 간부와도 충돌했고, 프런트나 선수가 만류하는 것도 듣지 않고, 재빨리 사표를 제출하고 퇴단했다.
3. 2. 한큐 코치 및 감독 시절
1969년 시즌 후 네모토 리쿠오와의 팀 강화 정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히로시마를 퇴단했다. 1970년에 주고쿠 방송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가 1971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수석 코치로 취임, 당시 한큐의 감독이었던 니시모토 유키오를 만났다.[10][11][12] 1974년 불과 37세의 나이로 한큐 감독에 취임하여 2년차인 1975년에 팀의 숙원이던 일본 시리즈를 제패했다. 스타 군단이었던 한큐를 지휘해 일본 시리즈 3연패 포함 리그 4연패를 이끌며 한큐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 3연패는 미하라 오사무의 니시테쓰 라이온스, 미즈하라 시게루가 이끌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이끌었던 "V9"시대의 요미우리,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이끌었던 세이부 라이온스(1986년 ~ 1988년, 1990년 ~ 1992년 2회)만이 달성하고 있다.197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일본 시리즈 7차전(3승 3패)에서 야쿠르트 오스기 가쓰오의 좌측 플라이 볼 판정을 놓고 장시간 항의했다. 당시 커미셔너였던 가네코 도시가 현장에 달려가 수습에 나설 때까지 사태가 크게 번졌다. 우에다의 항의는 이 플라이 볼을 홈런으로 판단한 판정 취소와 홈런으로 판정한 선심 도미자와 히로야의 퇴장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지만, 심판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항의로 인한 중단은 시리즈 사상 최대인 1시간 19분에 이르렀다.[15] 경기가 중단된 동안 대기하고 있던 아다치 미쓰히로는 무릎에 물이 고여 도저히 던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여서 강판, 그 결과 7차전을 0대 4로 내주며 일본 시리즈를 야쿠르트에 내주게 되었다. 이후 일본 시리즈에서 벌였던 혼란의 책임을 지기 위하여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제2기 한큐 감독 시대에는 이마이 유타로, 후쿠모토 유타카, 야마다 히사시 등 니시모토에게 단련된 베테랑 세력과 마쓰나가 히로미, 이시미네 가즈히코, 후지이 야스오, 후쿠라 준이치, 사토 요시노리, 야마오키 유키히코, 호시노 노부유키, 후루미조 가쓰유키 등의 신인들을 육성했으며, 1983년 가세한 용병 부머 웰스가 이듬해인 1984년 삼관왕을 차지하며 같은 해 리그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안정된 전력으로 매년 우승 경쟁을 했다.
1988년 한큐가 해체되어 오리엔탈리스(이듬해부터 오릭스)에 매각된 후에도 계속 지휘를 맡아 '''"블루 썬더 타선"'''을 이끌며 2년 연속 2위를 기록한 후 퇴임했다. 이후 편성 부장에 취임했으나 프런트와 이견 차를 보이며 1년 만에 사퇴했다.
-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 감독(1974년 ~ 1978년, 1981년 ~ 1990년)
3. 3. 닛폰햄 감독 시절
1995년부터 닛폰햄 파이터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2군에 있던 6년차 이와모토 쓰토무를 에이스 투수로, 1993년과 1994년에 외야수였던 다나카 유키오를 유격수로 복귀시켜 리그 정상급 선수로 만들었다. 특히 다나카 유키오는 매우 드문 4번 타자·유격수로 발탁되었고, 하쓰시바 기요시·이치로와 함께 타점왕을 획득하고, 골든 글러브·베스트 나인도 수상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킵 그로스는 16승으로 다승 1위, 7월에 합류한 버나드 브리토는 21홈런을 기록했다.[19]1996년에는 친정팀 오릭스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그해 9월 9일 "가정의 사정"을 이유로[47] 돌연 휴양에 들어가면서 팀은 우승을 놓쳤다. 9월 11일 기자회견에서 우에다는 장녀와 차녀가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입신하여 탈퇴시키려다 실패했고, 딸들을 탈퇴시킬 것을 맹세하고 닛폰햄 감독을 맡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는 "자신의 딸도 막지 못하는 인간이 팀을 이끌어갈 수 없다"며 감독 사임 의사를 표명했으나, 모치다 사부로 사장은 "구단의 이미지 실추는 없을 것"이라며 복귀를 요청했다.[20] 결국 오릭스에게 우승을 내주고 2위로 마감했지만, 오프 시즌에 사임을 철회했다. 그러나 선수들과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21] 한편, 이 해 가네코 마코토가 신인왕을 차지하며 이후 주전으로 활약했고, 니시자키 야키히로, 이마세키 마사루는 안정적인 선발 투수로, 시마자키 쓰요시와 마무리 가네시 아키히토는 승리 계투조로 활약했다. 그로스는 2년 연속 다승왕, 시마자키는 신설된 최다 홀드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19]
1997년에는 영입한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였다. 1998년에는 "빅뱅 타선"으로 불리는 강력한 타선을 앞세워 8월까지 선두를 독주했으나, 후반기 들어 타선이 부진에 빠지면서 세이부 라이온스에 추격당해 또다시 2위에 머물렀다.[22]
1999년 5월 23일 도쿄 돔에서 열린 긴테츠전에서 셔먼 오반도의 2루 땅볼 병살타에 대한 1루 판정을 놓고 루심 야마모토 류조에게 항의했다. 우에다는 야마모토에게 "병신!"이라고 폭언을 퍼부어 야구 인생 유일의 퇴장 처분을 받았고, 퇴장 직후 야마모토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려 2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야마모토는 형사 고소까지 고려했으나, 우에다의 사과로 화해하고 고소는 보류되었다. 결국 이 시즌 5위로 부진하며 닛폰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닛폰햄 감독 부임 이야기는 1992년 오프 시즌에도 있었지만, 당시 프런트 일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18] 2년 만에 취임이 성사되었다. 코치진은 오이시 기요시, 스미토모 히라, 가토, 나카자와 신지, 야마모리 마사후미 등 한큐 출신이 많았고, 후루야 히데오, 시바타 야스미쓰 등 닛폰햄 출신 코치도 있었다. 전년도 부상자 속출로 최하위 후보로 꼽혔던 팀을 맡아 취임 첫 해 4위로 선전했다. 재임 중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가 적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두 시즌이나 우승을 놓쳤지만, 관객 감소와 침체에 빠져있던 당시 닛폰햄에서 우에다의 공적은 컸다. 5년 동안 B클래스 3번을 기록했지만, 골든 글러브 수상자 4명, 베스트 나인 수상자 5명을 배출했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이데 다쓰야, 니시우라 가쓰타쿠, 노구치 도시히로, 우에다 요시노리 등 주전으로 정착하지 못하던 젊은 선수들을 중심 선수로 키웠고, 특히 오가사와라는 포수에서 1루수로 전향시켜 타격 재능을 꽃피웠으며, 부상으로 부진했던 가타오카 아쓰시를 중심 타선에 기용하여 부활시켰다.
한편, 닛폰햄 감독 시절에도 1995년 후쿠도메 고스케(긴테츠·입단 거부), 1998년 마쓰자카 다이스케(세이부)를 1차 지명에서 놓쳤고, 1997년 2차 지명에서는 사회자의 실수로 순서가 먼저였음에도 니이누마 신지(요코하마)를 놓치는 등 드래프트에서 불운을 겪었다.
4. 은퇴 이후
上田 利治일본어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NHK 전속 해설자를 맡았지만, 후임 감독인 가지모토 다카오의 성적 부진으로 1981년에 한큐 감독으로 복귀했다.[48] 2000년부터 긴키 지방에서 야구 해설 및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2003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이후 닛폰햄에서 프런트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48]
2017년 7월 1일 오전 2시 55분, 폐렴으로 가와사키시 내 병원에서 향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25] 오릭스 구단은 上田 利治일본어의 서거에 선수들에게 근조 리본을 달게 했으며, 추도식도 거행했다.
5. 평가 및 영향
上田 利治일본어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를 이끌며 감독과 선수 간의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요다 야스미쓰는 우에다에 대해 "스스로 발하는 '지력'이 매우 강한 인물로, 이 '지력'이 잘 발휘되면 상대방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라고 평가했다.[26]
1978년 일본 시리즈 7차전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한 사건은 유명하다. 당시 좌익수였던 미노다 코지는 "선수들은 모두 감독과 같은 마음이었다. 우에다 감독에게 모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라고 회고했다.[28]
감독 퇴임 후 선 텔레비전일본어 해설가와 데일리 스포츠일본어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2003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8]
한큐 감독 시절에는 후쿠모토 유타카, 미노다 코지 등 발 빠른 선수들을 활용한 도루 작전과 오쿠마 타다요시, 후쿠라 준이치 등의 번트 전술을 활용한 1점 짜내기 야구를 구사했다. 오릭스 감독 시절에는 '블루 선더 타선'을 구축하는 등 공격력 중심의 팀을 만드는 데에도 능했다.
우에다는 1970년대 후반 "갬블 스타트"라는 주루 전술을 고안했다. 이는 무사 또는 1사 3루 상황에서 타구가 땅볼임을 확인하고 뛰는 "땅볼 고(go)", 배트에 맞는 동시에 뛰는 "히트 고(go)", 배트에 맞기 전부터 달리게 하는 "히트 앤드 런"의 세 가지 사인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전술이었다.[39][40][41][42] 오쿠마 타다요시는 "1점을 따내는 우에다 씨의 야구"라고 평가했으며,[43] 오하시 미노루는 우에다를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깨끗이 인정하는, 믿음직한 지휘관이었다"라고 회고했다.[44]
2003년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을 받았다.
6. 상세 정보
가이난 고등학교 시절부터 포지션은 포수였다. 변호사가 될 생각으로 간사이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고교 시절의 경력을 인정받아 야구부에 입부, 무라야마 미노루와 배터리로 활약했다. 프로 입문에 대한 자신감은 없었지만 "마쓰다에서 파견 사원으로 3, 4년 뛰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오라"는 히로시마 측의 권유에 따라 1959년에 입단했다. 하지만 1961년 어깨 부상으로 은퇴하고 마쓰다로 복귀하려 했으나 사장인 마쓰다 쓰네지의 요청으로 1962년 전임 코치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인 25세에 히로시마 코치로 취임했다.[48]
2000년부터 긴키 지방에서 야구 해설 및 평론가 활동을 했으며 2003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이후 닛폰햄에서 프런트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48]
2017년 7월 1일 오전 2시 55분, 폐렴 증세로 가와사키 시내의 병원에서 향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48]
- 도쿠시마 현립 가이난 고등학교
- 간사이 대학
- 히로시마 카프(1959년 ~ 1961년)
-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3년)
- 첫 출장: 1959년 4월 22일, 한신 타이거스 3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9년 | 히로시마 | 66 | 184 | 165 | 13 | 38 | 5 | 1 | 0 | 45 | 12 | 4 | 6 | 3 | 0 | 14 | 0 | 2 | 17 | 4 | .230 | .298 | .273 | .571 |
1960년 | 32 | 54 | 53 | 7 | 11 | 2 | 0 | 1 | 16 | 2 | 1 | 0 | 0 | 0 | 1 | 0 | 0 | 4 | 3 | .208 | .222 | .302 | .524 | |
1961년 | 23 | 45 | 39 | 2 | 7 | 0 | 1 | 1 | 12 | 3 | 0 | 0 | 3 | 0 | 3 | 0 | 0 | 2 | 1 | .179 | .238 | .308 | .546 | |
통산 : 3년 | 121 | 283 | 257 | 22 | 56 | 7 | 2 | 2 | 73 | 17 | 5 | 6 | 6 | 0 | 18 | 0 | 2 | 23 | 8 | .218 | .274 | .284 | .558 |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홈런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
1974년 | 한큐·오릭스 | 2위 | 130 | 69 | 51 | 10 | .575 | 125 | .258 | 3.52 | 37세 | |
1975년 | 1위 | 130 | 64 | 59 | 7 | .520 | 143 | .257 | 3.49 | 38세 | ||
1976년 | 1위 | 130 | 79 | 45 | 6 | .637 | 139 | .256 | 3.30 | 39세 | ||
1977년 | 1위 | 130 | 69 | 51 | 10 | .575 | 147 | .269 | 3.23 | 40세 | ||
1978년 | 1위 | 130 | 82 | 39 | 9 | .678 | 176 | .283 | 3.13 | 41세 | ||
1981년 | 2위 | 130 | 68 | 58 | 4 | .540 | 140 | .267 | 4.01 | 44세 | ||
1982년 | 4위 | 130 | 62 | 60 | 8 | .508 | 150 | .256 | 3.73 | 45세 | ||
1983년 | 2위 | 130 | 67 | 55 | 8 | .549 | 157 | .272 | 4.16 | 46세 | ||
1984년 | 1위 | 130 | 75 | 45 | 10 | .625 | 166 | .272 | 3.72 | 47세 | ||
1985년 | 4위 | 130 | 64 | 61 | 5 | .512 | 197 | .274 | 4.98 | 48세 | ||
1986년 | 3위 | 130 | 63 | 57 | 10 | .525 | 180 | .277 | 4.11 | 49세 | ||
1987년 | 2위 | 130 | 64 | 56 | 10 | .533 | 152 | .272 | 3.89 | 50세 | ||
1988년 | 4위 | 130 | 60 | 68 | 2 | .469 | 117 | .264 | 4.08 | 51세 | ||
1989년 | 2위 | 130 | 72 | 55 | 3 | .567 | 170 | .278 | 4.26 | 52세 | ||
1990년 | 2위 | 130 | 69 | 57 | 4 | .548 | 186 | .271 | 4.30 | 53세 | ||
1995년 | 닛폰햄 | 4위 | 130 | 59 | 68 | 3 | .465 | 105 | .237 | 3.56 | 58세 | |
1996년 | 2위 | 130 | 68 | 58 | 4 | .540 | 130 | .249 | 3.49 | 59세 | ||
1997년 | 4위 | 135 | 63 | 71 | 1 | .470 | 128 | .265 | 4.18 | 60세 | ||
1998년 | 2위 | 135 | 67 | 65 | 3 | .508 | 150 | .255 | 3.83 | 61세 | ||
1999년 | 5위 | 135 | 60 | 73 | 2 | .451 | 148 | .260 | 4.34 | 62세 | ||
통산: 20년 | 2574 | 1322 | 1136 | 116 | .538 | A클래스 14회, B클래스 6회 |
- 한큐(한큐 브레이브스)는 1989년에 오릭스(오릭스 브레이브스)로 구단명을 변경
:: ※1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2 1974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3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
:: ※4 1978년, 병 때문에 7월 17일부터 8월 24일까지 휴양. 감독 대행은 7월 17일~20일 나카타 마사히로(3승 1패), 7월 29일~8월 24일 니시무라 마사오(12승 6패 2무)
:: ※5 1996년, "가정 사정"으로 9월 10일부터 휴양. 감독 대행은 스미토모 타이라(6승 8패 1무)
:: ※6 1999년, 출장 정지 처분으로 2경기 결장. 감독 대행은 스미토모 타이라(1승 1패)
:: ※7 통산 성적은 결장한 41경기(22승 16패 3무)는 포함되지 않음
- '''등번호'''
- * '''13''' (1959년 - 1961년)
- * '''64''' (1962년, 1965년 - 1967년)
- * '''62''' (1963년)
- * '''63''' (1964년)
- * '''61''' (1968년 - 1969년)
- * '''60''' (1971년 - 1973년)
- * '''30''' (1974년 - 1978년, 1981년 - 1990년)
- * '''88''' (1995년 - 1999년)
7. 감독 시절 팀 성적
오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