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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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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안대군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고려 말 고공좌랑을 거쳐 조선 개국 후 무안군에 봉해졌으며, 세자 책봉을 추진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권유를 거절했으나 결국 살해되었고, 사후 광평대군이 제사를 받들었다. 1680년 대군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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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방번
한글이방번
한자李芳蕃
히라가나리 호반
가타카나이・방봉
왕족 정보
이름무안대군
원래 이름撫安大君
출생일1381년
출생지고려 개경
사망일1398년 10월 14일 (양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이방번(李芳蕃)
작위조선 태조의 왕자
작호추성공(楸城公)
시호장혜(章惠)
군호무안군(撫安君) · 공순군(恭順君)
배우자삼한국대부인 개성 왕씨
자녀풍안군 이효손 (양자)
아버지조선 태조
어머니신덕왕후 강씨

2. 생애

이방번은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왕자로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태어났다. 1387년 귀의군(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고,[2] 1390년 처숙부 고려 공양왕 치세에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으로 고려 왕조로부터 고공좌랑 직위를 받았다. 1392년(조선 태조 1) 7월 조선 개국 후 무안군에 책봉되고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태조 2년(1393) 13세에 좌군절제사가 되었고,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중전 강씨의 추천으로 세자에 내정되었으나,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중신들은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반대하여 동복 아우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태조 7년(1398) 이복 형 이방원이 주동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방번에게 동참을 권유했으나 거절했고, 아버지 등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결국 방번은 성문 밖으로 쫓겨났고, 중도에 살해되었다. 당시 18세였다.

사후 태종 즉위 후 억울한 죽음에 휼전(恤典, 구제지원금)이 추거(追擧)되고 공순군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세종 19년(1437) 광평대군이 후사로 정해졌다. 1680년(숙종 6) 대군 작위를 추증받았다.[3]

2. 1. 초기 생애

이방번은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왕자로, 계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태어났다. 1387년 어린 나이에 귀의군(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고,[2] 1390년에는 처숙부 고려 공양왕 치세 하에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으로 고려 왕조로부터 고공좌랑 직위를 받았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무안군에 책봉되어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3년 13세의 나이로 좌군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한때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중전 강씨의 추천으로 세자에 내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준, 정도전 등 중신들은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반대하여, 동복 아우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이후 무안군에 봉작되었다.

2. 2. 조선 개국 이후

이방번은 태조 이성계의 일곱째 왕자로,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이다. 1387년 귀의군(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고,[2] 1390년 처숙부 고려 공양왕 치세에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으로 고려 왕조로부터 고공좌랑 직위를 받았다. 1392년(조선 태조 1) 7월 조선 개국 후 무안군에 책봉되고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태조 2년(1393) 13세에 좌군절제사가 되었고,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중전 강씨의 추천으로 세자 내정되었으나,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중신들은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반대하여 동복 아우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이후 무안군에 봉작되었다.

태조 7년(1398) 이복 형 이방원이 주동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방번에게 동참을 권유했으나 거절했고, 아버지 등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난이 끝난 후 성문 밖으로 쫓겨났고, 중도에 살해되었다. 당시 18세였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에 안장되었고, 추성공(楸城公)에 추증되었다. 태종 즉위 후 억울한 죽음에 휼전(恤典, 구제지원금)이 추거(追擧)되고 공순군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세종 19년(1437) 광평대군이 후사로 정해졌다. 1680년(숙종 6) 대군 작위를 추증받았다.[3]

2. 3. 제1차 왕자의 난과 죽음

1398년 이복 형 이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은 방번에게도 난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나 방번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등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난이 끝난 뒤, 방번은 성문 밖으로 쫓겨났고, 중도에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8세였다.[3]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에 안장되었고, 바로 추성공(楸城公)으로 추증되었다. 태종 즉위 후, 그의 억울한 죽음에 휼전(恤典, 구제지원금)이 추거(追擧)되고 공순군의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훗날 세종 19년 세종의 5왕자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다. 1680년 (숙종 6년) 대군의 작위가 추증되었다.[3]

2. 4. 사후

태종 즉위 후 그의 억울한 죽음에 휼전(恤典, 구제지원금)이 추거(追擧)되고 공순군의 시호를 추증하였으며,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에 안장되었고, 바로 추성공(楸城公)의 작위에 추증되었다. 훗날 세종 19년 세종의 5왕자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다. 1680년(숙종 6) 대군의 작위를 추증받았다.[3]

3. 가족 관계

아버지태조 (1335 ~ 1408)
어머니신덕왕후 강씨 (1356 ~ 1396)
누나경순공주 (1371 ~ 1407)
매형흥안군 이제 (1365 ~ 1398)
동생의안대군 방석 (1382 ~ 1398)
배우자삼한국대부인 개성 왕씨(경녕옹주)[4] - 귀의군 왕우의 딸
봉사손(奉祀孫)광평대군 - 세종의 5왕자
측실원주 변씨 - 변안렬의 딸[5]
장인귀의군 왕우
양자풍안군 이효손 (1403 ~ 1463, 종형 영천군 이담(태조의 이복 동생 의안대군 이화의 아들)의 아들)
양손광평대군 이여 (세종의 아들)


4. 무안대군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문서 의안대군 이화
[1] 문서 영천군 이담
[2] 문서 변안렬
[3] 문서 왕우
[4] 문서 경녕옹주 1449-08-07
[4] 문서 귀의군 왕우
[5] 문서 생애 편의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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