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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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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열황후는 오(吳)나라의 손견의 부인으로, 손책과 손권의 어머니이다. 어려서 전당현으로 이주하여 동생과 함께 살았으며, 손견의 청혼에 친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여, 손책, 손권 등을 낳았다. 손견 사후 손책과 손권을 보필했으며, 특히 손권이 즉위한 후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7년에 사망하여 손견과 합장되었으며, 손권이 황제가 된 후 무열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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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황후
기본 정보
배우자손견
사망 년도202년
매장지고릉
자녀
아들손책
손권
손이
손광
1명 (미상)
존호
시호무열황후

2. 생애

어려서 전당현으로 이주했고, 부모를 잃어 아우 오경(吳景)과 함께 살았다. 손견은 젊은 시절 고향인 오군에서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무열황후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손견이 혼담을 넣자 무열황후의 친척들이 손견의 사람됨이 경박하고 사납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손견이 몹시 불쾌해 오씨 가문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러자 무열황후는 자신을 아껴 집안에 화를 불러들일 수 없다며 스스로 손견에게 시집가겠다고 선언한 후 오씨 집안에 허락을 받아 손견과 결혼했다.[18]

장남 손책이 죽고 아직 어린 차남 손권이 그 세력을 잇자, 군정·민정 양면에서 잘 보좌했다.[19] 손책이 자신의 공조 위등(魏騰)을 죽이려 하고 아무도 말리지 못할 때 홀로 손책에게 말해 위등을 풀어주게 한 일이 있었는데, 무열황후의 지략과 권모술수는 이와 같았다.[20]

건안 12년(207년)에 사망했고, 손견과 함께 고릉(高陵)에 합장됐다.[21]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를 일컬으면서 남편과 함께 추증을 받았다.[22] 《삼국지》에는 건안 7년(202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희(虞喜)는 《지림》(志林)에서 회계군의 공거부(貢舉簿)에 태수가 상을 당하여 건안 12년·13년(208년)에 공거를 배출하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또 건안 8년·9년 모두 공거를 배출한 것이 확인됨에 따라, 오씨가 건안 12년에 죽었음을 고증하였다.

오씨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전당으로 이주하여 동생과 함께 살았다. 손견은 그녀가 재색을 겸비했다는 소문을 듣고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나 오씨의 친족들은 손견이 경박하고 뻔뻔하다고 여겨 이를 싫어하여 반대했다. 이를 들은 손견은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원한을 품었다. 그러나 오씨가 "어찌 여자 한 명 때문에 일부러 재앙을 불러들이는 짓을 하십니까. 만약 제가 시집가서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운명입니다"라고 말했으므로 친족들은 손견의 청을 받아들여 혼인을 허락했다. 오부인은 희평 4년(175년)에 손책을, 광화 5년(182년)에는 손권을, 광화 7년(184년)에는 손익을 낳았다. 그 외에도 손광과 딸 하나를 낳았다.

광화 7년(184년), 손견은 후한의 중랑장이었던 주준의 휘하에 들어가 오부인과 아이들은 수춘에서 살았다. 중평 6년(189년), 손견이 병사를 일으키자 가족은 노강군서현으로 이주했다. 초평 2년(191년), 손견이 양양 전투에서 전사하자 손씨에게 옥새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원술은 오부인을 감금하고 강제로 옥새를 빼앗았다(『후한서』). 그 후 강도로 이주하여 오부인은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가정 교육 면에서는 아이들에게 엄격했다(『건강실록』).

손견의 군세를 되찾기 위해 장남 손책은 원술의 휘하에 들어가 여범을 보내 오부인을 동생 오경에게 보냈다. 흥평 원년(194년), 주치는 사람을 곡아로 보내 오씨 및 자녀들을 맞이하게 하여 보호했다. 손책이 양주에서 세력을 쌓기 시작하자 그녀는 역양과 부릉을 거쳐 곡아로 돌아왔다. 원술이 황제를 칭할 때 손견의 유물이었던 전국옥새를 빼앗기는 일도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고향 오현에 살았다.

전임 합포태수 왕성이 손책에게 대항하자 손책은 직접 토벌에 나서 즉시 격파했다. 오부인은 손책에게 "왕성은 일찍이 네 아버지와 가족끼리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의 자제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그만이 남아 있다. 아버지의 옛 친구의 정의로서 그 한 명이라도 모른 척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손책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왕성을 모른 척하고, 그 외 추타·전동 등 그 일족을 모두 몰살하는 형에 처했다.

어느 날, 손책의 공조였던 위등은 손책의 노여움을 사 처형당할 뻔했다. 사대부들은 그 일을 슬퍼하고, 위등을 구할 방법이 없음을 걱정했다. 오부인은 이를 듣고 "너는 강남에 세력을 넓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패업은 아직 반도 못 미쳤다. 지금이야말로 현명한 자와 비범한 재주를 가진 자를 예우하고, 결점은 눈감아주고 공적을 높이 평가해야 할 때이다. 위등은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네가 위등을 죽이면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릴 것이다. 나는 재앙이 닥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전에 이 우물에 몸을 던지겠다"라고, 큰 우물 곁에 기대어 손책을 향해 말했다. 이 때문에 손책은 생각을 멈추고 위등을 석방했다고 한다. 오부인의 지략과 기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손책이 살해되자 손권이 그 뒤를 이었다. 손권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한 오씨는 장소와 동습을 불러 장래에 대해 의논했다(『동습전』). 또한 정치·군사의 양면에 걸쳐 손권에게 조언하여 크게 기여했다.

건안 7년(202년), 관도 전투에서 원소를 꺾어 기세가 오른 조조가 손권에게 사자를 보내 인질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손권은 군신들에게 의논하게 했지만, 장소나 진송과 같은 참모들도 뚜렷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손권은 마음속으로는 인질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부인을 데리고 주유 한 명을 데려가 그 자리에서 의논을 하려 했다. 주유는 인질을 보내지 말고 이대로 힘을 길러 천하의 정세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고, 오부인도 이에 동조했다. 또한 손권에게 주유를 형으로 섬기라고 명령했다. 손권은 이에 따랐다(『강표전』).

같은 해, 오부인은 사망했다. 죽기 전에 장소 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고릉(손견의 묘릉)에 합장되었다. 그러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당시 회계군의 공거부 기록을 통해 건안 12년(207년)에 사망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후에 손권이 를 건국하자 오부인은 무열황후로 시호되었다.

전당의 오자목은 오부인·손씨(서간의 어머니로, 손견의 여동생)·서씨(손익의 아내)·정부인 손씨(우충의 아내로, 손권의 종손녀)·우씨(손규의 아내로, 우찰의 아들 우예의 딸)의 인물을 비교하여 오나라 여성들을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와 손견과의 결혼

오부인은 오군 오현(현재의 장쑤성 쑤저우)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동생 오경(吳景)과 함께 전당현(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2] 손견은 오부인의 미모와 재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청혼하였으나, 오부인의 친척들은 손견의 경박함을 이유로 반대하였다.[18] 손견은 이 결정에 분노하였으나, 오부인은 집안에 화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며 "나 때문에 스스로 재앙을 불러일으키지 마세요. 만약 이 결혼이 좋지 않게 된다면, 저는 제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손견과의 결혼을 결심하였고, 결국 손견과 혼인하게 되었다.[3]

《수신기》에 따르면, 오 부인은 손책을 낳기 전에 달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4] 이후 손권을 낳기 전에는 해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비슷한 꿈을 꾸었다.[4] 그녀가 남편에게 이상한 꿈에 대해 묻자, 그는 "해와 달은 음양의 진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매우 상서로운 상징입니다. 내 후손들은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

2. 2. 손책의 강동 정벌과 오부인의 역할

손견은 191년 양양 전투에서 유표의 군대에 의해 전사했다.[6] 그의 뒤를 장남 손책이 이었다. 그 무렵, 오부인의 남동생 오경은 군벌 원술에 의해 단양 (丹楊郡; 현재의 안후이성 쉬안청시 주변)의 태수(太守중국어)로 임명되었지만[6]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오경은 당시 장쑤성 단양시의 줴현(曲阿縣)에 있었기 때문에, 손책은 가족들을 데리고 줴현으로 가서 삼촌과 합류했다.

194년부터 199년 사이에 손책은 강동 (또는 오) 지역에서 일련의 정벌을 시작했다.[7] 그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줴현에 남겨두었지만, 나중에는 그들을 차례로 안후이성 허현의 리양현(歷陽縣)과, 안후이성 취안자오현 주변의 푸링현(阜陵縣)으로 옮겼다.[7] 손책이 오(현재의 쑤저우시 주변)와 회계 (현재의 저장성 사오싱시 주변)을 정복한 후, 그는 가족을 오현(吳縣)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오부인의 고향이었다.

오부인은 손책의 강동 정벌 과정에서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손책이 강동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우기라는 도교 사제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고 그의 치유 능력으로 상당한 추종자들을 모았다. 손책은 우기를 이단이라고 비난하고 그를 체포했다. 많은 여성들이 오부인을 찾아와 우기를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오부인은 아들에게 우기를 풀어주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우기는 군대에 행운을 가져다주고 병사들을 치료합니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8] 그러나 손책은 우기가 이단이며 그의 "가르침"을 통해 대중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처형했다.[8]

오부인은 지혜와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했다. ''회계전록'' (會稽典錄zh-Hant)에는 손책이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공조(功曹)인 위등을 죽이려 했을 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른 관리들은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부인이 나타나 우물 옆에 서서 아들에게 말했다. "당신은 최근 강남에 발판을 마련했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당신은 재능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작은 실수에 대해 용서하며, 그들의 공헌에 대해 칭찬해야 합니다. 위 관리(위등)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오늘 그를 죽인다면, 내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반역할 것입니다. 나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 이 우물에 몸을 던지겠습니다." 손책은 충격을 받고 즉시 위등을 풀어주었다.[9]

어느 날, 손책의 공조였던 위등은 손책의 노여움을 사 처형당할 뻔했다. 사대부들은 그 일을 슬퍼하고, 위등을 구할 방법이 없음을 걱정했다. 오부인은 이를 듣고 "너는 강남에 세력을 넓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패업은 아직 반도 못 미쳤다. 지금이야말로 현명한 자와 비범한 재주를 가진 자를 예우하고, 결점은 눈감아주고 공적을 높이 평가해야 할 때이다. 위등은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네가 위등을 죽이면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릴 것이다. 나는 재앙이 닥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전에 이 우물에 몸을 던지겠다"라고, 큰 우물 곁에 기대어 손책을 향해 말했다. 이 때문에 손책은 생각을 멈추고 위등을 석방했다고 한다. 오부인의 지략과 기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전임 합포태수 왕성이 손책에게 대항하자 손책은 직접 토벌에 나서 즉시 격파했다. 오부인은 손책에게 "왕성은 일찍이 네 아버지와 가족끼리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그의 자제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그만이 남아 있다. 아버지의 옛 친구의 정의로서 그 한 명이라도 모른 척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손책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왕성을 모른 척하고, 그 외 추타·전동 등 그 일족을 모두 몰살하는 형에 처했다.

2. 3. 손권의 초기 통치와 오부인의 조력

200년, 손책이 암살당하고 어린 손권이 뒤를 잇자, 오부인은 군정과 민정 양면에서 손권을 보좌하며 그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10] 오부인은 손권이 강동의 위태로운 상황을 처리하기에는 너무 어릴까 봐 걱정했다. 그녀는 동희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상담했고, 동희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용기를 주었다. "양쯔강 동쪽 땅은 산과 강의 자연 방벽을 누리고 있으며, 손책의 훌륭한 통치와 덕은 이미 백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손권은 이러한 기반을 다질 수 있으므로 크고 작은 사람이 그의 명령을 따를 수 있습니다."

202년경, 한나라 중앙 정부를 통제하는 군벌 조조가 손권에게 그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인질로 황도 허(許; 현재의 쉬창, 허난성)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11] 손권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신하들을 소집했을 때, 그들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11] 손권은 개인적으로 조조의 요구에 따르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주유와 단독 회동을 가졌다. 주유는 손권에게 인질을 보내지 말라고 조언했고,[12] 오부인은 주유의 제안을 지지하며 아들에게 주유를 형처럼 대하라고 부탁했다. 손권은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13]

같은 해, 오부인은 사망했다. 죽기 전에 장소, 동희[14] 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고릉(손견의 묘릉)에 합장되었다.[1] 그러나,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당시 회계군의 공거부 기록을 통해 건안 12년(207년)에 사망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2. 4. 사망과 추존

무열황후 오씨는 207년(건안 12년)에 사망하여 남편 손견과 함께 고릉(高陵)에 합장되었다.[21] 229년(황룡 원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무열황후로 추존되었다.[22][15]

《삼국지》에는 202년(건안 7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1] 배송지는 우희(虞喜)의 《지림》(志林)을 인용하여 회계군의 공거부(貢舉簿) 기록을 근거로 건안 12년(207년) 사망설을 주장했다. 공거부에 따르면 태수가 상을 당하여 건안 12년과 13년(208년)에 공거를 배출하지 않았고, 건안 8년과 9년에는 공거를 배출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20]

3. 평가

4. 가계

무열황후의 아버지는 오휘로, 후한의 봉거도위·자사를 역임했다는 설이 있다. 고관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강음 오통종원류고』의 기술에 따르면, 오부인의 아버지의 이름은 오퇴이며, 춘추 시대의 초대 왕 수몽의 넷째 아들 계찰의 후손이다. 본래 성은 희였으나, 오나라가 멸망한 후 자손들은 국호를 자신의 성씨로 삼았다.

무열황후의 남편은 무열황제 손견이며, 동생은 오경이다.

자녀로는 장사환왕 손책, 대제 손권, 손익, 손광, 손부인(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아내)이 있다.

5. 대중문화 속 오부인

5. 1. 삼국지연의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무열황후는 손견과 결혼한 가상의 여동생 오국태/吳國太중국어가 있었다.[16] 오국태는 손견의 둘째 부인으로, 언니 무열황후보다 오래 살아 209년 딸 손부인유비의 결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정사에서는 오부인이 4남 1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연의에서는 4남만 낳은 것으로 묘사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0
[2] 서적 Sanguozhi vol. 50
[3] 서적 Sanguozhi vol. 50
[4] 서적 Sou Shen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0
[5] 서적 Sanguozhi vol. 54
[6] 서적 Sanguozhi vol. 50
[7] 서적 Sanguozhi vol. 46
[8]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6
[9] 서적 Kuaiji Dian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0
[10] 서적 Sanguozhi vol. 50
[11]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12]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13]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14] 서적 Sanguozhi vol. 55
[15] 서적 Sanguozhi vol. 47
[16] 서적 Sanguo Yanyi ch. 54-55
[17] 문서 諸葛瑾伝」「法正伝」「潘濬伝」によると、孫堅には全部で3人の娘がいるが、いずれが呉夫人の娘かは判断できない。
[18] 서적 삼국지 진수
[19] 서적 삼국지 진수
[20] 서적 회계전록 우예
[21] 서적 삼국지 진수
[22] 서적 삼국지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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