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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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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에 복무한 핀란드 자원병 부대이다.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에 맞서 독일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1941년 3월 핀란드 정부의 동의를 얻어 자원병 모집을 시작했다. 1941년 5월까지 1,408명의 핀란드인이 모집되었으며, 이들은 훈련을 거쳐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대는 SS 사단 비킹에 배속되어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1943년 7월 해산되었다. 종전 후, 이들의 나치 협력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일부는 핀란드 사회에서 나치 협력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이들의 유산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핀란드 독립 기념일에 이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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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핀란드 의용대대 깃발
핀란드 의용대대 깃발
명칭 (독일어)Finnisches Freiwilligen-Bataillon der Waffen-SS
명칭 (핀란드어)Suomalainen Waffen-SS-vapaaehtoispataljoona
복무 기간1941년 – 1943년 7월
국가핀란드
소속나치 독일
군종무장친위대
종류대대
역할차량화보병
규모1,408명
군가Suomalaisten SS-miesten marssi (베이코 안테로 코스켄니에미 작사)
지휘관
주요 지휘관상급돌격대지도자 한스 콜라니
관련 정보
소속 부대제5SS기갑사단 비킹

2. 배경

나치 독일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1941년 6월까지, 핀란드는 소련을 자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존재로, 독일을 소련에 맞서는 유일하고 최선의 동맹국으로 간주했다. 1918년 핀란드 내전 당시 독일 제국과 소련이 각각 백위대와 적위대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한 이후, 반공주의와 러시아인에 대한 민족적 증오가 핀란드에서 대중적인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39~40년 소련은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를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핀란드는 2만 5천 명의 사상자와 영토의 10%를 잃었다. 겨울 전쟁 당시 독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고, 1940년 중반 독일의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및 점령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외교적으로 독일과 더욱 가까워졌다.

1940년 12월, 친위대(SS)는 SS의 군사 조직인 무장친위대 산하의 SS 기갑사단 비킹을 창설했다. 이 사단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출신의 자원병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SS 본부의 책임자인 고틀로프 베르거는 핀란드에서 노르트란트(Nordland)를 위한 모집 확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예거 운동의 자원병으로 독일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던 레오나르트 그란델과 파보 탈벨라와 같은 핀란드 장교들은, 국방군 내에서 핀란드 자원병 부대를 찾기 시작했다.

1941년 1월, 하인리히 힘멜러는 핀란드에서의 모집 확대를 승인했고, 아돌프 히틀러도 2월 20일 승인했다. 3월 1일, 베르거는 핀란드 주재 독일 대사인 토이보 미카엘 키비매키에게 무장친위대를 위한 핀란드인 모집 요청을 제시했고, 독일 외무부는 비페르트 폰 블뤼허를 보내 3월 9일 핀란드 정부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협상은 3월 11일에 시작되어 다음 날 핀란드 민간 정부 수장과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핀란드 군대의 국방 최고사령관의 만장일치 승인으로 마무리되었다.

1943년 핀란드 SS 자원병

2. 1. 핀란드 내전과 독일, 소련의 개입

2. 2. 겨울 전쟁과 핀란드의 손실

2. 3. 독일과의 외교적 관계 강화

2. 4. 핀란드의 독소전쟁 참전 예상

3. 모집 및 구성

무장친위대에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은 핀란드의 중립성을 위반하는 것이었기에, 징집은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며 핀란드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핀란드에서 모집을 관리할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핀란드의 SS 모집 담당자였던 파울 담/Paul Dahmde중령 라그나르 노르드스트룀/Ragnar Nordströmfi에게 접근했지만 거절당했다. 노르드스트룀 대신 국가 경찰의 전직 국장이었던 에스코 리에키/Esko Riekkifi가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정되었다. 리에키 위원회는 1941년 3월 25일에 모집을 시작하여 4월 7일에 헬싱키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 사무실은 겉으로는 Reichswerke Hermann Göring 산업 컨소시엄을 위해 일꾼을 모집하기 위한 것으로, 엔지니어링 에이전시 라타스(Oy Insinööritoimisto Ratas)로 불렸다.

1941년 8월, 핀란드군의 TK 중대 대원들과 대화하는 SS 대표


추가 협상으로 인해 핀란드 정부가 SS와 해결해야 할 특정 문제로 인해 모집 시작이 4월 중순으로 연기되었다. 헬싱키는 처음에는 핀란드 자원병들이 독일 육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무장친위대에 핀란드군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는 데 동의했다. 헬싱키는 또한 핀란드 자원병들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거나 소련 이외의 다른 국가에 배치되지 않기를 바랐고, 핀란드가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독일이 자원병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원했다. 독일은 4월 28일에 이러한 요청을 수락했으며, 특히 핀란드 징집병들이 히틀러를 언급하지 않도록 맹세를 변경했다. 징집병들은 1943년 6월까지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하고 훈련을 위해 독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1941년 3월부터 독일은 핀란드 의용 대대가 연대 규모의 2,000~2,400명으로 확장되기를 원했지만, 핀란드 정부는 1941년 5월에 이를 거부했다. 핀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후 핀란드 자원병을 독일 육군으로, 핀란드로, 또는 핀란드군과 함께 SS 사단 노르트로 전출시키기를 원했다. 독일은 이러한 요청을 거부했다.

두 번째 모집은 1942년 7월 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친독 성향의 수학자 롤프 네반린나의 지휘 하에 핀란드군 2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네반린나는 리에키를 대체했다. 239명의 군인이 모집되었고, 첫 번째 자원병 그룹과 동일한 계약에 서명했으며, 같은 시기에 핀란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미코 코르피야코는 SS 기갑사단 비킹의 베스트란트 연대 10중대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까지 총 1,408명의 핀란드인이 ''무장친위대''에 징집되었고, 처음에는 핀란드의 스웨덴어 사용 인구에 초점을 맞춰 징집이 이루어졌지만, 지원자의 약 12%만이 스웨덴어를 사용했다. 평균적으로 징집병의 나이는 21세였으며, 그들은 집단적으로 핀란드 민족주의, 복수주의, 그리고 핀란드 형태의 루터교 부흥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2] 징집병들의 동기에는 독일 훈련에 대한 열망, 즉 SS를 통한 즉각적인 경제적 발전과 핀란드 군대를 통한 미래의 경제적 발전, 그리고 친독일, 반러시아 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핀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핀란드 역사학자 라르스 베스터룬드는 반유대주의가 핀란드 의용병들의 주요 동기 중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핀란드 정부가 의용 부대에 대해 가진 목표는 핀란드의 독일과의 동맹을 확인하고 독일식 훈련을 받은 핀란드 군인 집단을 만드는 것이지, 핀란드의 독일이나 나치즘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핀란드 정부는 징집을 감독했다. 헬싱키와 리에키는 부대 내 및 핀란드 정치에서 핀란드의 극우 정치 단체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핀란드의 모든 지역에서 징집을 실시하고 모든 지원자에 대한 신원 조사를 실시했다. 공산주의자와 극우 단체 구성원들은 제외되었으며, 리에키는 민족사회주의자 조직 및 전선 군인 연맹과 같은 핀란드의 극우 단체들이 징집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집병의 약 3분의 2가 이러한 단체 출신이었으며, 핀란드 역사학자 안드레 스반스트룀/André Swanströmfi에 따르면, 징집병의 최소 45.1%가 파시스트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2][3] 신뢰할 수 있는 핀란드 장교들도 의용 부대에 투입되어 핀란드 고위 사령부에 부대 내 활동을 보고하도록 했다.

3. 1. 모집 위원회 구성

무장친위대에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은 핀란드의 중립성을 위반하는 것이었기에, 징집은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며 핀란드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핀란드에서 모집을 관리할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핀란드의 SS 모집 담당자였던 파울 담/Paul Dahmde중령 라그나르 노르드스트룀/Ragnar Nordströmfi에게 접근했지만 거절당했다. 노르드스트룀 대신 국가 경찰의 전직 국장이었던 에스코 리에키/Esko Riekkifi가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정되었다. 리에키 위원회는 1941년 3월 25일에 모집을 시작하여 4월 7일에 헬싱키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 사무실은 겉으로는 Reichswerke Hermann Göring 산업 컨소시엄을 위해 일꾼을 모집하기 위한 것으로, 엔지니어링 에이전시 라타스(Oy Insinööritoimisto Ratas)로 불렸다.

추가 협상으로 인해 핀란드 정부가 SS와 해결해야 할 특정 문제로 인해 모집 시작이 4월 중순으로 연기되었다. 헬싱키는 처음에는 핀란드 자원병들이 독일 육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무장친위대에 핀란드군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는 데 동의했다. 헬싱키는 또한 핀란드 자원병들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거나 소련 이외의 다른 국가에 배치되지 않기를 바랐고, 핀란드가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독일이 자원병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원했다. 독일은 4월 28일에 이러한 요청을 수락했으며, 특히 핀란드 징집병들이 히틀러를 언급하지 않도록 맹세를 변경했다. 징집병들은 1943년 6월까지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하고 훈련을 위해 독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1941년 3월부터 독일은 핀란드 의용 대대가 연대 규모의 2,000~2,400명으로 확장되기를 원했지만, 핀란드 정부는 1941년 5월에 이를 거부했다. 핀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후 핀란드 자원병을 독일 육군으로, 핀란드로, 또는 핀란드군과 함께 SS 사단 노르트로 전출시키기를 원했다. 독일은 이러한 요청을 거부했다.

두 번째 모집은 1942년 7월 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친독 성향의 수학자 롤프 네반린나의 지휘 하에 핀란드군 2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네반린나는 리에키를 대체했다. 239명의 군인이 모집되었고, 첫 번째 자원병 그룹과 동일한 계약에 서명했으며, 같은 시기에 핀란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3. 2. 핀란드 정부의 요구 조건

무장친위대에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은 핀란드의 중립성을 위반하는 것이었기에, 징집은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며 핀란드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핀란드에서 모집을 관리할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핀란드의 SS 모집 담당자였던 파울 담/Paul Dahmde중령 Ragnar Nordströmfi에게 접근했지만 거절당했다. 노르드스트룀 대신 국가 경찰의 전직 국장이었던 에스코 리에키/Esko Riekkifi가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정되었다.

추가 협상으로 인해 핀란드 정부가 SS와 해결해야 할 특정 문제로 인해 모집 시작이 4월 중순으로 연기되었다. 헬싱키는 처음에는 핀란드 자원병들이 독일 육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무장친위대에 핀란드군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는 데 동의했다. 헬싱키는 또한 핀란드 자원병들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거나 소련 이외의 다른 국가에 배치되지 않기를 바랐고, 핀란드가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독일이 자원병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원했다. 독일은 4월 28일에 이러한 요청을 수락했으며, 특히 핀란드 징집병들이 히틀러를 언급하지 않도록 맹세를 변경했다.

1941년 3월부터 독일은 핀란드 의용 대대가 연대 규모의 2,000~2,400명으로 확장되기를 원했지만, 핀란드 정부는 1941년 5월에 이를 거부했다.

3. 3. 모집 결과

무장친위대에 자원병을 모집하는 것은 핀란드의 중립성을 위반하는 것이었기에 징집은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며 핀란드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핀란드에서 모집을 관리할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핀란드의 SS 모집 담당자였던 파울 담/Paul Dahmde중령 라그나르 노르드스트룀/Ragnar Nordströmfi에게 접근했지만 거절당했다. 노르드스트룀 대신 국가 경찰의 전직 국장이었던 에스코 리에키/Esko Riekkifi가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정되었다. 리에키 위원회는 3월 25일에 모집을 시작하여 1941년 4월 7일에 헬싱키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 사무실은 겉으로는 Reichswerke Hermann Göring 산업 컨소시엄을 위해 일꾼을 모집하기 위한 것으로, 엔지니어링 에이전시 라타스(Oy Insinööritoimisto Ratas)로 불렸다.

추가 협상으로 인해 핀란드 정부가 SS와 해결해야 할 특정 문제로 인해 모집 시작이 4월 중순으로 연기되었다. 헬싱키는 처음에는 핀란드 자원병들이 독일 육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무장친위대에 핀란드군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는 데 동의했다. 헬싱키는 또한 핀란드 자원병들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거나 소련 이외의 다른 국가에 배치되지 않기를 바랐고, 핀란드가 소련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독일이 자원병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원했다. 독일은 4월 28일에 이러한 요청을 수락했으며, 특히 핀란드 징집병들이 히틀러를 언급하지 않도록 맹세를 변경했다. 징집병들은 1943년 6월까지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하고 훈련을 위해 독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1941년 3월부터 독일은 핀란드 의용 대대가 연대 규모의 2,000~2,400명으로 확장되기를 원했지만, 핀란드 정부는 1941년 5월에 이를 거부했다. 핀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후 핀란드 자원병을 독일 육군으로, 핀란드로, 또는 핀란드군과 함께 SS 사단 노르트로 전출시키기를 원했다. 독일은 이러한 요청을 거부했다.

두 번째 모집은 1942년 7월 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친독 성향의 수학자 롤프 네반린나의 지휘 하에 핀란드군 2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네반린나는 리에키를 대체했다. 239명의 군인이 모집되었고, 첫 번째 자원병 그룹과 동일한 계약에 서명했으며, 같은 시기에 핀란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1941년 5월까지 총 1,408명의 핀란드인이 ''무장친위대''에 징집되었고, 처음에는 핀란드의 스웨덴어 사용 인구에 초점을 맞춰 징집이 이루어졌지만, 지원자의 약 12%만이 스웨덴어를 사용했다. 평균적으로 징집병의 나이는 21세였으며, 그들은 집단적으로 핀란드 민족주의, 복수주의, 그리고 핀란드 형태의 루터교 부흥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2] 징집병들의 동기에는 독일 훈련에 대한 열망, 즉 SS를 통한 즉각적인 경제적 발전과 핀란드 군대를 통한 미래의 경제적 발전, 그리고 친독일, 반러시아 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핀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핀란드 역사학자 라르스 베스터룬드는 반유대주의가 핀란드 의용병들의 주요 동기 중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핀란드 정부가 의용 부대에 대해 가진 목표는 핀란드의 독일과의 동맹을 확인하고 독일식 훈련을 받은 핀란드 군인 집단을 만드는 것이지, 핀란드의 독일이나 나치즘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핀란드 정부는 징집을 감독했다. 헬싱키와 리에키는 부대 내 및 핀란드 정치에서 핀란드의 극우 정치 단체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핀란드의 모든 지역에서 징집을 실시하고 모든 지원자에 대한 신원 조사를 실시했다. 공산주의자와 극우 단체 구성원들은 제외되었으며, 리에키는 민족사회주의자 조직 및 전선 군인 연맹과 같은 핀란드의 극우 단체들이 징집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집병의 약 3분의 2가 이러한 단체 출신이었으며, 핀란드 역사학자 안드레 스반스트룀/André Swanströmfi에 따르면, 징집병의 최소 45.1%가 파시스트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2][3] 신뢰할 수 있는 핀란드 장교들도 의용 부대에 투입되어 핀란드 고위 사령부에 부대 내 활동을 보고하도록 했다.

4. 편성 및 훈련

1941년 5월 6일부터 6월 5일까지 핀란드 신병 1,197명이 다섯 척의 배를 타고 독일로 이동했다. 이들은 투르쿠에서 단치히(현재 그단스크)로 가는 네 척의 배와 바사에서 슈체틴(현재 슈체친)으로 가는 한 척의 배를 이용했으며, 여권은 소지하지 않았다. 독일에 도착한 각 지원병 그룹은 슈트랄준트 시의 SS 주둔지에서 며칠을 보냈다. 전후 핀란드 역사에서 "사단 병력"으로 알려진 처음 세 척의 배에 탑승한 429명은, 그 뒤를 이은 "대대 소년"과 대조적으로, 호이베르크 훈련소와 빈-쇤브룬 훈련소로 보내져 짧은 훈련 기간을 거쳤다. 그 후 이들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실레지아에서 SS 사단 비킹의 다양한 부대에 합류했다. 독일 전술과 무기에 대한 무지, 언어 장벽은 사단 병력과 SS 사단 비킹의 나머지 병력 간의 결속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편, 768명의 "대대 소년"은 모두 쇤브룬 훈련소로 보내졌으며, 6월 15일에 독일 무장친위대 장교 한스 콜라니의 지휘 하에 SS-자원 대대 노르도스트(자동차화)(SS-Freiwilligen-Battalion Nordost (mot.)de)로 편성되었다. 이 대대는 7월에 슈트랄준트로 돌아왔고, 8월에는 그로스 본(현재 보르네 술리노보)의 훈련장으로 이동했으며, 9월 13일에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 대대(Finnisches Freiwilligen-Bataillon der Waffen-SSde)로 개칭되었다. 핀란드 훈련관의 부족과 8월에 대대의 훈련 기간이 10월 10일까지로 단축되면서 부대의 훈련이 복잡해졌다. 대대 구성원은 10월 15일에 선서를 했지만, 2주 더 훈련을 받고 11월이 되어서야 동부 전선으로의 이동 준비가 완료되었다.

4. 1. 사단 병력과 대대 소년

1941년 5월 6일부터 6월 5일까지 핀란드 신병 1,197명이 다섯 척의 배를 타고 독일로 이동했다. 이들은 투르쿠에서 단치히(현재 그단스크)로 가는 네 척의 배와 바사에서 슈체틴(현재 슈체친)으로 가는 한 척의 배를 이용했으며, 여권은 소지하지 않았다. 독일에 도착한 각 지원병 그룹은 슈트랄준트 시의 SS 주둔지에서 며칠을 보냈다. 전후 핀란드 역사에서 "사단 병력"으로 알려진 처음 세 척의 배에 탑승한 429명은 호이베르크 훈련소와 빈-쇤브룬 훈련소로 보내져 짧은 훈련 기간을 거쳤다. 그 후 이들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실레지아에서 SS 사단 비킹의 다양한 부대에 합류했다. 독일 전술과 무기에 대한 무지, 언어 장벽은 사단 병력과 SS 사단 비킹의 나머지 병력 간의 결속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편, 768명의 "대대 소년"은 모두 쇤브룬 훈련소로 보내졌으며, 6월 15일에 독일 무장친위대 장교 한스 콜라니의 지휘 하에 SS-자원 대대 노르도스트(자동차화)(SS-Freiwilligen-Battalion Nordost (mot.)de)로 편성되었다. 이 대대는 7월에 슈트랄준트로 돌아왔고, 8월에는 그로스 본(현재 보르네 술리노보)의 훈련장으로 이동했으며, 9월 13일에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 대대(Finnisches Freiwilligen-Bataillon der Waffen-SSde)로 개칭되었다. 핀란드 훈련관의 부족과 8월에 대대의 훈련 기간이 10월 10일까지로 단축되면서 부대의 훈련이 복잡해졌다. 대대 구성원은 10월 15일에 선서를 했지만, 2주 더 훈련을 받고 11월이 되어서야 동부 전선으로의 이동 준비가 완료되었다.

4. 2. 핀란드 의용 대대 편성

1941년 5월 6일부터 6월 5일까지 핀란드 신병 1,197명이 다섯 척의 배를 타고 독일로 이동했다. 이들은 투르쿠에서 그단스크로 가는 네 척의 배와 바사에서 슈체친으로 가는 한 척의 배를 이용했으며, 여권은 소지하지 않았다. 독일에 도착한 각 지원병 그룹은 슈트랄준트 시의 SS 주둔지에서 며칠을 보냈다. 전후 핀란드 역사에서 "사단 병력"으로 알려진 처음 세 척의 배에 탑승한 429명은 호이베르크 훈련소와 빈-쇤브룬 훈련소로 보내져 짧은 훈련 기간을 거쳤고,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실레지아에서 SS 사단 바이킹의 다양한 부대에 합류했다. 독일 전술과 무기에 대한 무지, 언어 장벽은 사단 병력과 SS 사단 바이킹의 나머지 병력 간의 결속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편, 768명의 "대대 소년"은 모두 쇤브룬 훈련소로 보내졌으며, 6월 15일에 독일 무장친위대 장교 한스 콜라니의 지휘 하에 SS-자원 대대 노르도스트(자동차화)(SS-Freiwilligen-Battalion Nordost (mot.)de)로 편성되었다. 이 대대는 7월에 슈트랄준트로 돌아왔고, 8월에는 보르네 술리노보의 훈련장으로 이동했으며, 1941년 9월 13일에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 대대(Finnisches Freiwilligen-Bataillon der Waffen-SSde)로 개칭되었다. 핀란드 훈련관의 부족과 8월에 대대의 훈련 기간이 10월 10일까지로 단축되면서 부대의 훈련이 복잡해졌다. 대대 구성원은 10월 15일에 선서를 했지만, 2주 더 훈련을 받고 11월이 되어서야 동부 전선으로의 이동 준비가 완료되었다.

5. 동부 전선

1943년 6월 1일 핀란드 한코에서 귀향 퍼레이드를 하는 제5SS 기갑사단 비킹의 핀란드 무장친위대 의용병들


군목 SS-Obersturmbannführer 칼레르보 쿠르키알라가 1943년 히에타니에미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위한 추모 연설을 하고 있다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는 SS 사단 비킹의 일원으로 남부 집단군에 소속되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초기에는 경험 부족으로 후위 부대에 배속되었으나, 7월 테르노필 근처에서 붉은 군대와 교전했고, 이후 드네프르강을 따라 전투를 벌였다. 10월에는 로스토프온돈 북쪽 전투에 참여했다. 11월 초, 미우스 전선의 미우스강을 따라 참호를 파고 방어에 임했다. 소련과 영국의 선전은 핀란드 병력을 포함한 사단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베를린 주재 핀란드 무관 발터 호른은 이러한 우려를 잠재웠다.

1942년 1월, 핀란드 의용대대는 SS 사단 비킹에 합류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8월에는 마이코프에서 SS 사단 비킹과 재회했고, 9월과 10월에는 말고베크 공격에 참여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1942년 9월,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의용병 중대가 보충되었고, 12월에는 코카서스 전투에서 분리되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1943년 1월, 대대는 육군 집단 도네에 배속되어 독일 제6군 구출 작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1943년 2월부터 4월까지 돈강을 건너 후퇴하며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핀란드 의용 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무장친위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256명이 전투 중 사망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했고, 686명이 부상당했으며, 14명이 실종되었다. 특히 1942년 9월과 10월에 말고베크에 대한 공격에서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핀란드 국가 경찰 청장에 따르면, 핀란드 장교와 부사관은 경험이 부족한 독일인 지휘관들로부터 "신병 취급"을 받았고, 독일인 지휘관에 대한 불만이 요한 빌헬름 랑겔 핀란드 총리의 공식 메모로 이어지기도 했다.

5. 1. 초기 전투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는 SS 사단 비킹의 일원으로 남부 집단군에 배속되어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경험 부족으로 작전 개시 일주일 동안 대기하다 후위 부대로 배속되었다. 1941년 7월, 테르노필 근처에서 붉은 군대와 첫 교전을 벌였고, 이후 드네프르강을 따라 전투를 이어갔으며, 10월에는 로스토프온돈 북쪽 전투에 참여했다. 이러한 작전으로 대대의 인력은 보병 부대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11월 초, 미우스 전선의 미우스강을 따라 참호를 파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소련과 영국의 선전은 핀란드 병력을 포함한 사단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으나, 베를린 주재 핀란드 무관 발터 호른은 핀란드 측의 우려를 잠재웠다.

1942년 1월 8일, 철도 교통 체증으로 지연되었던 의용 대대는 SS 사단 비킹에 합류하여 미우스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5. 2. 미우스 강 방어

1941년 11월,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는 미우스 전선의 미우스강을 따라 참호를 파고 방어전을 펼쳤다. 소련과 영국의 선전은 핀란드 병력을 포함한 사단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베를린 주재 핀란드 무관 발터 호른은 이러한 우려를 잠재웠다.

5. 3. 코카서스 전투 참여

1942년 8월, 대대는 마이코프에서 SS 사단 비킹과 재회했고, 그 후 9월과 10월에 그로즈니 유전으로의 독일의 실패한 진격의 일부인 말고베크에 대한 공격으로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5. 4. 스탈린그라드 전투 지원

1942년 9월, 보충 핀란드 의용병 중대가 독일에서 짧은 훈련을 받고 11월 23일 SS 사단 비킹에 합류했다. 이 중대는 12월 8일 대대에 배속되었지만, 12월 20일 사단은 코카서스 전투에서 분리되어 진행 중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대대는 육군 집단 도네에 배속되어 갇힌 독일 제6군을 구출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 2월 5일부터 2월 7일까지 대대는 돈강을 건너 후퇴했고 핀란드의 입대가 끝나면서 4월 10일 전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싸웠다.

5. 5. 우크라이나에서의 전투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대대는 SS 사단 비킹의 일원으로 남부 집단군에 소속되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는 임무를 맡았다. 초기에는 경험 부족으로 후위 부대에 배속되었으나, 7월 테르노필 근처에서 붉은 군대와 교전했고, 이후 드네프르강을 따라 전투를 벌였다. 10월에는 로스토프온돈 북쪽 전투에 참여했다. 11월 초, 미우스 전선의 미우스강을 따라 참호를 파고 방어에 임했다.

1942년 1월, 핀란드 의용대대는 SS 사단 비킹에 합류하여 전투에 투입되었다. 8월에는 마이코프에서 SS 사단 비킹과 재회했고, 9월과 10월에는 말고베크 공격에 참여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1942년 9월,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의용병 중대가 보충되었고, 12월에는 코카서스 전투에서 분리되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1943년 1월, 대대는 육군 집단 도네에 배속되어 독일 제6군 구출 작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1943년 2월부터 4월까지 돈강을 건너 후퇴하며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5. 6. 핀란드 의용 대대의 피해

핀란드 의용 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무장친위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256명이 전투 중 사망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했고, 686명이 부상당했으며, 14명이 실종되었다. 핀란드 의용병들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붉은 군대와의 전투, 미우스 전선 방어, 코카서스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1942년 9월과 10월에 말고베크에 대한 공격에서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핀란드 국가 경찰 청장에 따르면, 핀란드 장교와 부사관은 경험이 부족한 독일인 지휘관들로부터 "신병 취급"을 받았고, 독일인 지휘관에 대한 불만이 요한 빌헬름 랑겔 핀란드 총리의 공식 메모로 이어지기도 했다.

6. 해산

루폴딩에서 휴가를 보낸 핀란드 의용대대는 1943년 6월 1일 한코로 돌아와 열병식을 가졌다. 6월 2일, 대원들은 탐페레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한 달 간의 휴가를 받았다. 독일은 핀란드인들이 복무 계약을 갱신하여 친위대(SS)에서 계속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6월 27일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지도자들에게 친위대 대대를 해산할 것을 제안했다. 핀란드 지도자들은 독일의 여론 변화를 인지하여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히틀러는 7월 4일에 이를 승인했고, 1943년 7월 11일 대대는 한코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핀란드 방위군에 합류했다.

전쟁 후, 많은 핀란드 무장친위대(Waffen-SS) 지원병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태도 변화와 나치 무장 세력에 참여한 것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특히, 이들은 핀란드 사회에서 나치 협력자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에이노 페칼라와 헤르타 쿠시넨은 핀란드 의회에서 친위대 지원병 문제를 제기하며, 이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핀란드 국가 경찰인 발포는 지원병의 절반 이상을 체포하고 석방했다. 많은 전 친위대 지원병들은 군대와 경찰에서 사임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핀란드 사회에서 친위대 지원병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6. 1. 독일의 핀란드 의용 대대 재편 시도

독일은 원래 핀란드인들이 복무 계약을 갱신하여 무장친위대에서 계속 복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43년 6월 27일,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지도자들에게 친위대 대대를 해산할 것을 제안했고, 그들은 독일의 여론 변화로 인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7월 4일에 이를 승인했다.

6. 2. 만네르헤임의 해산 제안

1943년 6월 1일, 핀란드 의용대대는 루폴딩에서 휴가를 보낸 후 한코로 돌아와 열병식을 가졌다. 6월 2일, 대원들은 탐페레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한 달 간의 휴가를 받았다. 독일의 원래 계획은 핀란드인들이 복무 계약을 갱신하여 친위대(SS)에서 계속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3년 6월 27일,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지도자들에게 친위대 대대를 해산할 것을 제안했고, 핀란드 지도자들은 독일의 여론 변화를 인지하여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히틀러는 7월 4일에 이를 승인했다. 1943년 7월 11일, 대대는 한코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핀란드 방위군에 합류했다.

전쟁 후, 많은 핀란드 무장친위대(Waffen-SS) 지원병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태도 변화와 나치 무장 세력에 참여한 것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1945년, 공산주의자 에이노 페칼라와 헤르타 쿠시넨은 핀란드 의회에서 친위대 지원병 문제를 제기하며, 이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핀란드 국가 경찰인 발포는 지원병의 절반 이상을 체포하고 석방했다. 많은 전 친위대 지원병들은 군대와 경찰에서 사임해야 했다.

6. 3. 핀란드 방위군으로의 복귀

루폴딩에서 휴가를 보낸 핀란드 의용대대는 1943년 6월 1일 한코로 돌아와 열병식을 가졌다. 6월 2일, 대원들은 탐페레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한 달 간의 휴가를 받았다. 독일은 핀란드인들이 복무 계약을 갱신하여 친위대에서 계속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6월 27일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지도자들에게 친위대 대대를 해산할 것을 제안했다. 핀란드 지도자들은 독일의 여론 변화를 이유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히틀러는 7월 4일에 이를 승인했고, 1943년 7월 11일 대대는 한코에서 축하 행사를 열고 핀란드 방위군에 합류했다.

전쟁 후, 많은 핀란드 무장친위대 지원병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태도 변화와 나치 무장 세력에 참여한 것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1945년, 공산주의자 에이노 페칼라와 헤르타 쿠시넨은 핀란드 의회에서 친위대 지원병 문제를 제기하며 이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핀란드 국가 경찰인 발포는 지원병의 절반 이상을 체포하고 석방했으며, 많은 전 친위대 지원병들은 군대와 경찰에서 사임해야 했다.

7. 핀란드 SS-중대

하인리히 힘러는 핀란드군 징집병을 위해 41 무장 SS 사단을 칼레발라 척탄병 사단으로 지정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소수의 핀란드인들이 투항하여 중대로 지정될 수 있었다.[4][5] 모스크바 휴전 협정 이후 핀란드와 독일 사이에 공개적인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무장친위대 베테랑들이 독일로 투항했다. SS에서 복무한 사람들 외에도 SS 경력이 없는 일부 핀란드 장교들도 새로 형성된 핀란드 대대에 합류했다. 최고위 투항자는 펜티 라이리오 대위로, SS-하우프트슈름퓌러로 임명되었다. 투항한 사람들 대부분은 전선을 넘어 다른 편으로 건너가거나 핀란드를 떠난 마지막 독일 선박에 몰래 탔다. SS 장교 라우리 퇴르니와 얄로 코르펠라 중위는 독일 잠수함에 의해 독일로 이송되었다. 무장 SS는 독일 또는 독일 점령 하의 노르웨이로 투항한 핀란드인들을 위해 바트 톨츠의 SS-융커 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실시했다. 존더코만도 노르트는 포메라니아 해안의 헤링스도르프 등지에서 첩보 훈련을 조직했다.

핀란드 SS 대원 분견대는 오토 스코르체니 소령의 연대인 야크트레기멘트에서 노이슈트렐리츠에 편성되었다. SS 오버슈름퓌러 안티 알토넨과 게오르크 H. 하옌을 비롯한 그의 조수들의 도움으로, SS-하우프트슈름퓌러 요우코 이탈라는 충분한 수의 투항자, 전쟁 포로, 억류된 선원들을 모집하여 핀란드 중대를 구성했다. 라르스 웨스터룬트 강사에 따르면, 많은 핀란드인들은 핀란드가 멸망 직전에 있다는 믿음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면, 끝까지 싸우는 것이 최선이다." 이 중대는 1945년 5월에 해산되었다.[6][7][8]

헬머 칼라스, 클라에스 푸르요, 미코 라악소넨은 핀란드 SS-중대의 유명한 구성원들이었다.[9][10]

7. 1. 핀란드 SS-중대의 편성

하인리히 힘러는 핀란드군 징집병을 위해 41 무장 SS 사단을 칼레발라 척탄병 사단으로 지정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소수의 핀란드인들이 투항하여 중대로 지정될 수 있었다.[4][5] 모스크바 휴전 협정 이후 핀란드와 독일 사이에 공개적인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무장 SS 베테랑들이 독일로 투항했다. SS에서 복무한 사람들 외에도 SS 경력이 없는 일부 핀란드 장교들도 새로 형성된 핀란드 대대에 합류했다. 최고위 투항자는 펜티 라이리오 대위로, SS-하우프트슈름퓌러로 임명되었다. 투항한 사람들 대부분은 전선을 넘어 다른 편으로 건너가거나 핀란드를 떠난 마지막 독일 선박에 몰래 탔다. SS 장교 라우리 퇴르니와 얄로 코르펠라 중위는 독일 잠수함에 의해 독일로 이송되었다.[6][7][8]

핀란드 SS 대원 분견대는 오토 스코르체니 소령의 연대인 야크트레기멘트에서 노이슈트렐리츠에 편성되었다. SS 오버슈름퓌러 안티 알토넨과 게오르크 H. 하옌을 비롯한 그의 조수들의 도움으로, SS-하우프트슈름퓌러 요우코 이탈라는 충분한 수의 투항자, 전쟁 포로, 억류된 선원들을 모집하여 핀란드 중대를 구성했다. 라르스 웨스터룬트 강사에 따르면, 많은 핀란드인들은 핀란드가 멸망 직전에 있다는 믿음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6][7][8] 이 중대는 1945년 5월에 해산되었다.[6][7][8]

헬머 칼라스, 클라에스 푸르요, 미코 라악소넨은 핀란드 SS-중대의 유명한 구성원들이었다.[9][10]

7. 2. 핀란드 SS-중대의 해산

하인리히 힘러는 핀란드군 징집병을 위해 41 무장 SS 사단을 칼레발라 척탄병 사단으로 지정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소수의 핀란드인들이 투항하여 중대로 지정될 수 있었다.[4][5] 모스크바 휴전 협정 이후 핀란드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무장 SS 베테랑들은 독일로 투항했다. SS에서 복무한 사람들 외에도 SS 경력이 없는 일부 핀란드 장교들도 새로 형성된 핀란드 대대에 합류했다. 투항한 사람들 대부분은 전선을 넘어 다른 편으로 건너가거나 핀란드를 떠난 마지막 독일 선박에 몰래 탔다. SS 장교 라우리 퇴르니와 얄로 코르펠라 중위는 독일 잠수함에 의해 독일로 이송되었다. 무장 SS는 독일 또는 독일 점령 하의 노르웨이로 투항한 핀란드인들을 위해 바트 톨츠의 SS-융커 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실시했다. 존더코만도 노르트는 포메라니아 해안의 헤링스도르프 등지에서 첩보 훈련을 조직했다. SS 오버슈름퓌러 안티 알토넨과 게오르크 H. 하옌을 비롯한 그의 조수들의 도움으로, SS-하우프트슈름퓌러 요우코 이탈라는 충분한 수의 투항자, 전쟁 포로, 억류된 선원들을 모집하여 핀란드 중대를 구성했다. 라르스 웨스터룬트 강사에 따르면, 많은 핀란드인들은 핀란드가 멸망 직전에 있다는 믿음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 이 중대는 1945년 5월에 해산되었다.[6][7][8] 헬머 칼라스, 클라에스 푸르요, 미코 라악소넨은 핀란드 SS-중대의 유명한 구성원들이었다.[9][10]

8. 역사 기술

1945년 사카리 라피-세팔라의 회고록은 비킹 사단을 비판하고 독일군의 잔학 행위를 보고했다. 1958년 운토 파르빌라티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핀란드 의용병들이 "나치가 아니라 단순히 조국을 방어한 영웅적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

마우노 요키피이는 1968년 핀란드 의용병에 관한 연구인 『Panttipataljoona: Suomalaisen SS-pataljoonan historia』에서 그들의 역사에 학문적 방법을 적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작업은 전직 무장친위대 의용병들의 재향군인 단체에서 의뢰한 것이었다.[12] 학자 안테로 홀밀라에 따르면, 『Panttipataljoona』는 "실증주의적 역사 전통의 구현"이다.[12] 요키피이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관성과 전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서술 순서를 사용한다. 홀밀라 안테로는 요키피이가 "혼돈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거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12] 홀밀라는 요키피이가 『Westland』 연대 지휘관 힐마 벡커레의 사망 이후 벌어진 만행(근처 마을 방화, 벡커레를 살해한 저격수와 협력했다는 혐의로 재판 없이 처형된 러시아인과 유대인)을 묘사하면서 핀란드는 "그곳에 없었다"라고 말한 것을 예로 들며, 이는 라피-세폘레의 서술과 상반된다고 지적한다.[12] 홀밀라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자신의 무죄를 가정했다"고 비판한다.[12] 홀밀라는 요키피이가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을 홀로코스트로부터 "보호"한다고 말한다.[12]

『Panttipataljoona』에서 요키피이는 핀란드 SS 대원의 최대 5분의 1만이 우익 급진주의자였을 것이며, 모집관들이 극단주의적 지원자를 걸러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핀란드는 독일을 위해 싸우기 위해 떠난 징집병의 3분의 2가 "우익 재료"가 되어야 한다는 독일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2010년대에 드러난 기록 보관 자료를 바탕으로, 울라 실벤노이넨과 마르코 티카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요키피이가 우익 급진주의자의 수를 미화했다고 밝혀냈다. SS 의용병과 그들을 모집한 위원회는 요키피이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 급진주의자, 파시스트, 국가 사회주의자의 손아귀에 있었다. 실벤노이넨과 티카에 따르면, 자원병의 약 46%, 즉 요키피이가 계산한 수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 파시스트 정치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표명했을 것이다.[12]

핀란드 무장친위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핀란드 무장친위대를 예거 운동에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의 출판물은 이 이야기를 전쟁 시기에, 이 이야기가 시작된 우익 서클뿐만 아니라 "예거 유산"의 관점에서 흔히 구성했다. 1960년, 유카 티르쾨의 회고록이 "예거의 발자취를 따르는 SS 의용병"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었다.

무장친위대는 정예 부대로 알려졌으며, 이는 조직에 관한 대부분의 핀란드 문헌에서 언급된다. 이는 핀란드 무장친위대 의용병이 "정예 부대"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이야기는 펠릭스 슈타이너 장군, SS 비킹 사단의 초대 사령관의 특징을 중심으로 한다. 그는 "핀란드 병사들의 전투 기술을 인정하고 승인했다." 병사들이 얼마나 정예였는지에 대한 초점은 의용병 내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조사를 방해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이야기는 무장친위대 병사들이 "비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친(親) 정부 저자들은 이 이야기에 집중한다.

2010년대 후반까지 핀란드에서는 핀란드 의용군의 잔혹 행위 연루 가능성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핀란드 역사학 내에서 잔혹 행위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암시된 전쟁의 현실과 같은 "여기서는 쓸 수 없는 것들"이 부재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핀란드인들이 잔혹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 핀란드 대중은 핀란드 의용군이 잔혹 행위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대체로 외면했다.

2017년, 앙드레 스반스트룀의 핀란드 SS 의용군 목사들에 관한 기사가 출판된 후 이 주제는 대중의 관심을 다시 받았다. 이 기사는 핀란드 SS 목사들의 일기에서 여러 발췌문을 인용하며 핀란드인들이 적어도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를 인지하고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스반스트룀은 이 기사에 이어 2018년 저서 ''Hakaristin Ritarit''(갈고리 십자가 기사단)를 발표했고, 신문 ''Helsingin Sanomat''는 이 책을 "SS 부대의 '평범한 핀란드 소년'의 흠 없는 이미지가 올해 가장 중요한 군사 역사적 작품에서 산산조각났다"는 제목으로 묘사했다.

스반스트룀의 2017년 기사는 사이먼 비젠탈 센터가 핀란드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퇴에게 무장친위대 의용군의 홀로코스트 참여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요청하게 했다. 이 요청에 따라 핀란드 당국은 대대의 활동에 대한 조사 위원회를 발표했다. 이 위원회의 작업에는 핀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 연구원들의 작업이 포함되었으며, 2018년 말에 결론이 내려졌다. 그 결과 2019년에 출판된 보고서는 상당한 언론 보도를 받았으며, SS 의용군 친척들의 "수정" 요구가 있었지만 핀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는 이를 거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 군인들은 저질러지고 있는 잔혹 행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때로는 이에 대한 외상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과음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보고서의 저자 라르스 베스터룬드는 "최소한 일부 사례에서 핀란드 의용군이 유대인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수행하는 데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었으며, 특히 올라비 카르팔로와 파르빌라흐티를 지목했다. 스반스트룀에 따르면 그의 출판물과 베스터룬드의 출판물은 "핀란드 SS 병사들의 역사를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더 많은 관점에서 검토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 이후의 연구 상황"을 초래했다.

SS 유산 협회 회장과 같은 논평가들은 핀란드인들이 직접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진술에 대해 이 보고서가 절대적으로 확정적이지 않다고 언급했다. 역사학자 안테로 홀밀라는 이러한 유형의 견해가 대중의 "전쟁을 흑백 논리로 보려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며, 여기서 "결정적 증거"의 부재는 역사학자의 실패로 간주되며, 이 주제는 핀란드 역사 문화에서 "고통스러운 지점"으로 남아 있다.

많은 국제적인 시각은 핀란드 의용병들이 잔혹 행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역사가 베른트 볼/Bernd Bollde에 따르면, 즈워추프로 진격하는 동안,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은 "유대인 사냥"을 벌였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다. 역사가 Peter Longerich는 다음과 같이 썼다. "7월 초 즈워추프에서, 특별작전반 4b의 바로 눈앞에서, 도시 사령관의 묵인 아래 우크라이나 활동가들이 유대인 학살을 조직했고, 이 학살에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 구성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사카리 라피-세팔라는 "국가 사회주의자"인 파르빌라티가 즈워추프에서 예배당을 파괴한 방법을 묘사한다. 그러나 핀란드 군인들의 잔혹 행위 연루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며, 파르빌라티의 일반적인 서술에 따르면, 병사들은 독일군의 "불쾌한 과잉 행위"를 보았지만, 전쟁은 매우 통상적인 것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추정된다.

8. 1. 초기 작품

1945년 사카리 라피-세팔라의 회고록은 비킹 사단을 비판하고 독일군의 잔학 행위를 보고했다. 1958년 운토 파르빌라티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핀란드 의용병들이 "나치가 아니라 단순히 조국을 방어한 영웅적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

8. 2. 『Panttipataljoona』

마우노 요키피이는 1968년 핀란드 의용병에 관한 연구인 『Panttipataljoona: Suomalaisen SS-pataljoonan historia』에서 그들의 역사에 학문적 방법을 적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작업은 전직 무장친위대 의용병들의 재향군인 단체에서 의뢰한 것이었다.[12] 학자 안테로 홀밀라에 따르면, 『Panttipataljoona』는 "실증주의적 역사 전통의 구현"이다.[12] 요키피이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관성과 전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서술 순서를 사용한다. 홀밀라 안테로는 요키피이가 "혼돈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거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12] 홀밀라는 요키피이가 『Westland』 연대 지휘관 힐마 벡커레의 사망 이후 벌어진 만행(근처 마을 방화, 벡커레를 살해한 저격수와 협력했다는 혐의로 재판 없이 처형된 러시아인과 유대인)을 묘사하면서 핀란드는 "그곳에 없었다"라고 말한 것을 예로 들며, 이는 라피-세폘레의 서술과 상반된다고 지적한다.[12] 홀밀라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자신의 무죄를 가정했다"고 비판한다.[12] 홀밀라는 요키피이가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을 홀로코스트로부터 "보호"한다고 말한다.[12]

『Panttipataljoona』에서 요키피이는 핀란드 SS 대원의 최대 5분의 1만이 우익 급진주의자였을 것이며, 모집관들이 극단주의적 지원자를 걸러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핀란드는 독일을 위해 싸우기 위해 떠난 징집병의 3분의 2가 "우익 재료"가 되어야 한다는 독일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2010년대에 드러난 기록 보관 자료를 바탕으로, 울라 실벤노이넨과 마르코 티카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요키피이가 우익 급진주의자의 수를 미화했다고 밝혀냈다. SS 의용병과 그들을 모집한 위원회는 요키피이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 급진주의자, 파시스트, 국가 사회주의자의 손아귀에 있었다. 실벤노이넨과 티카에 따르면, 자원병의 약 46%, 즉 요키피이가 계산한 수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 파시스트 정치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표명했을 것이다.[12]

8. 3. 예거 운동과 "정예 부대" 주장

핀란드 무장친위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핀란드 무장친위대를 예거 운동에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의 출판물은 이 이야기를 전쟁 시기에, 이 이야기가 시작된 우익 서클뿐만 아니라 "예거 유산"의 관점에서 흔히 구성했다. 1960년, 유카 티르쾨의 회고록이 "예거의 발자취를 따르는 SS 의용병"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었다.

무장친위대는 정예 부대로 알려졌으며, 이는 조직에 관한 대부분의 핀란드 문헌에서 언급된다. 이는 핀란드 무장친위대 의용병이 "정예 부대"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이야기는 펠릭스 슈타이너 장군, SS 비킹 사단의 초대 사령관의 특징을 중심으로 한다. 그는 "핀란드 병사들의 전투 기술을 인정하고 승인했다." 병사들이 얼마나 정예였는지에 대한 초점은 의용병 내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조사를 방해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이야기는 무장친위대 병사들이 "비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친(親) 정부 저자들은 이 이야기에 집중한다.

8. 4. 잔혹 행위 참여

2010년대 후반까지 핀란드에서는 핀란드 의용군의 잔혹 행위 연루 가능성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핀란드 역사학 내에서 잔혹 행위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암시된 전쟁의 현실과 같은 "여기서는 쓸 수 없는 것들"이 부재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핀란드인들이 잔혹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 핀란드 대중은 핀란드 의용군이 잔혹 행위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대체로 외면했다.

2017년, 앙드레 스반스트룀의 핀란드 SS 의용군 목사들에 관한 기사가 출판된 후 이 주제는 대중의 관심을 다시 받았다. 이 기사는 핀란드 SS 목사들의 일기에서 여러 발췌문을 인용하며 핀란드인들이 적어도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를 인지하고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스반스트룀은 이 기사에 이어 2018년 저서 ''Hakaristin Ritarit''(갈고리 십자가 기사단)를 발표했고, 신문 ''Helsingin Sanomat''는 이 책을 "SS 부대의 '평범한 핀란드 소년'의 흠 없는 이미지가 올해 가장 중요한 군사 역사적 작품에서 산산조각났다"는 제목으로 묘사했다.

스반스트룀의 2017년 기사는 사이먼 비젠탈 센터가 핀란드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퇴에게 무장친위대 의용군의 홀로코스트 참여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요청하게 했다. 이 요청에 따라 핀란드 당국은 대대의 활동에 대한 조사 위원회를 발표했다. 이 위원회의 작업에는 핀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 연구원들의 작업이 포함되었으며, 2018년 말에 결론이 내려졌다. 그 결과 2019년에 출판된 보고서는 상당한 언론 보도를 받았으며, SS 의용군 친척들의 "수정" 요구가 있었지만 핀란드 국립 문서 보관소는 이를 거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 군인들은 저질러지고 있는 잔혹 행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때로는 이에 대한 외상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과음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보고서의 저자 라르스 베스터룬드는 "최소한 일부 사례에서 핀란드 의용군이 유대인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수행하는 데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었으며, 특히 올라비 카르팔로와 파르빌라흐티를 지목했다. 스반스트룀에 따르면 그의 출판물과 베스터룬드의 출판물은 "핀란드 SS 병사들의 역사를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더 많은 관점에서 검토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 이후의 연구 상황"을 초래했다.

SS 유산 협회 회장과 같은 논평가들은 핀란드인들이 직접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진술에 대해 이 보고서가 절대적으로 확정적이지 않다고 언급했다. 역사학자 안테로 홀밀라는 이러한 유형의 견해가 대중의 "전쟁을 흑백 논리로 보려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며, 여기서 "결정적 증거"의 부재는 역사학자의 실패로 간주되며, 이 주제는 핀란드 역사 문화에서 "고통스러운 지점"으로 남아 있다.

8. 5. 국제적 관점

많은 국제적인 시각은 핀란드 의용병들이 잔혹 행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역사가 베른트 볼/Bernd Bollde에 따르면, 즈워추프로 진격하는 동안,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은 "유대인 사냥"을 벌였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다. 역사가 Peter Longerich는 다음과 같이 썼다. "7월 초 즈워추프에서, 특별작전반 4b의 바로 눈앞에서, 도시 사령관의 묵인 아래 우크라이나 활동가들이 유대인 학살을 조직했고, 이 학살에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 구성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사카리 라피-세팔라는 "국가 사회주의자"인 파르빌라티가 즈워추프에서 예배당을 파괴한 방법을 묘사한다. 그러나 핀란드 군인들의 잔혹 행위 연루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며, 파르빌라티의 일반적인 서술에 따르면, 병사들은 독일군의 "불쾌한 과잉 행위"를 보았지만, 전쟁은 매우 통상적인 것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추정된다.

9. 유산

북유럽 저항 운동을 비롯한 여러 민족주의 단체들은 매년 핀란드 독립 기념일에 핀란드 SS 대대를 기리는 횃불 행진 시위를 헬싱키에서 조직한다.[13][14] 이 행사는 히에타니에미 묘지에서 끝나며, 참가자들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묘와 핀란드 SS 대대 기념비를 방문한다.[13][14] 이 행사는 반파시스트들의 항의를 받았으며, 보안을 담당하는 북유럽 저항 운동 회원들이 반대 시위자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15][16][17] 경찰 추산에 따르면 시위에는 3,000명 가까이 참여하며, 수백 명의 경찰관이 폭력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헬싱키를 순찰한다.[15][16][17] 핀란드인당은 이 행진에 참석하고 홍보했으며, 녹색 연맹과 같은 좌파 정당들은 이를 "명백한 네오 나치"라고 비난하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것에 실망감을 표했다.[14]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핀란드인당 국회의원이자 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빌헬름 유닐라는 무장친위대 핀란드 의용병들의 유산을 기리는 핀란드 단체인 벨리에사푸-페린네이흐디스티스(Veljesapu-Perinneyhdistys)를 지원하기 위해 네 차례의 예산안을 제출했다. 유닐라는 자신의 동의안에서 이 지원이 "균형 잡힌 역사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18] 핀란드의 마지막 생존 무장친위대 참전 용사인 사카리 라흐티넨은 2022년 10월 12일 하아파매키의 요양원에서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9]

9.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비판적 고찰 (별도 항목)

참조

[1] 서적 Hakaristin ritarit: Suomalaiset SS-miehet, politiikka, uskonto ja sotarikokset Jyväskylä : Atena 2018
[2] 웹사이트 Suomalaiset SS-miehet, politiikka ja uskonto – SKHS http://www.skhs.fi/s[...] 2017-09-28
[3] 웹사이트 Tutkija: Lähes puolet suomalaisista SS-miehistä fasisteja https://yle.fi/uutis[...] Yle 2017-10-06
[4] 서적 Vaarallisilla teillä : viimeiset suomalaiset SS-miehet Werner Söderström osakeyhtiö 1998
[5] 서적 Hitler's Samurai: The Waffen-SS in Action Patrick Stephens Limited 1984
[6] 간행물 Sotatapahtumia, internointeja ja siirto sodanjälkeisiin oloihin. Kansallisarkiston artikkelikirja https://www.arkisto.[...] Kansallisarkisto, Helsinki 2010
[7] 서적 Aselevon jälkeen WSOY 1997
[8] 서적 Hitlerin Saksa ja sen vapaaehtoisliikkeet: Waffen-SS:n suomalaispataljoona vertailtavana Suomalaisen Kirjallisuuden Seura 2002
[9] 웹사이트 Kysy kirjastonhoitajalta http://www.kirjastot[...]
[10] 웹사이트 Eduskunta - kansanedustajat https://www.eduskunt[...] Eduskunta.fi 2023-09-29
[11] 웹사이트 SS-sotilas Rainer Sormunen https://www.finna.fi[...] 2020-01-11
[12] 뉴스 Suomi ryhtyi selvittämään SS-miesten osallisuutta juutalaisten surmaamiseen – "Katsotaan, onko tarvetta jatkotoimiin" https://www.aamuleht[...] 2018-06-01
[13] 웹사이트 Neo-Nazis marching on the streets in European cities despite EU bans https://www.brussels[...] 2023-03-28
[14] 웹사이트 On Europe's Streets:Annual Marches Glorifying Nazism https://www.bnaibrit[...] 2023-03-25
[15] 웹사이트 Äärioikeistolaisten hihamerkit ja anarkistiliput vilahtelivat Helsingissä, kun tuhannet marssivat itsenäisyyspäivän mielenosoituksissa – Poliisi otti kiinni 13 ihmistä https://www.hs.fi/ka[...] Helsingin Sanomat 2020-10-07
[16] 웹사이트 Pohjoismainen vastarintaliike joukkonujakassa itsenäisyyspäivänä - uusnatsit naureskelivat väkivallalle: "Hauskaa!" https://www.iltaleht[...] Iltasanomat 2020-10-07
[17] 웹사이트 Kirjailija Timo Hännikäinen järjesti marssin uusnatsien kanssa https://www.kansanuu[...] Kansan Uutiset 2020-10-07
[18] 웹사이트 Vilhelm Junnila on useita kertoja esittänyt määrärahaa SS-perinnettä vaalivalle yhdistykselle https://www.hs.fi/po[...] 2023-06-30
[19] 웹사이트 Kuolleet {{!}} Viimeinen suomalainen SS-mies on kuollut https://www.hs.fi/ko[...]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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