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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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속 전쟁은 1941년 6월 25일 핀란드가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 전투이다. 1939년의 겨울 전쟁 이후 핀란드는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에 대항하려 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소련의 보복 공격을 받자 전쟁에 돌입했다. 핀란드는 초기에 영토를 회복했으나 1944년 소련의 공세로 인해 패배하고, 모스크바 휴전 협정을 통해 영토를 할양하고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전쟁은 핀란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했지만,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냉전 시대 핀란드의 중립 외교 정책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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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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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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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계속 전쟁 |
표기 | , , |
러시아 역사학 | 핀란드 전선, 1941년-1944년 소련-핀란드 전쟁 |
기본 정보 | |
시기 | 1941년 6월 25일 ~ 1944년 9월 19일 |
장소 | 핀란드, 카렐리야, 무르만스크 지역 |
원인 | 불명 |
영토 변화 | 페쳉가 지역을 소련에 할양 포르칼라 반도를 소련에 50년간 조차 한코를 핀란드가 탈환 |
결과 | 소련의 승리 모스크바 휴전 협정 체결 라플란드 전쟁 발발 |
관련 전쟁 | 독소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핀란드 나치 독일 |
교전국 1 지원 | 이탈리아 왕국 (해군 지원) |
교전국 2 | 소비에트 연방 |
교전국 2 지원 | 영국 (공군 지원) |
지휘관 | |
핀란드 |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리스토 뤼티 악셀 아이로 에리크 하인리히스 렌나르트 오에슈 |
독일 |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1941년 11월 7일) 에두아르트 디틀 (1941년 11월 7일 ~ 1944년 6월 23일) 로타르 렌둘릭 (1944년 6월 28일 ~ ) |
소련 | 이오시프 스탈린 마르키안 포포프 미하일 호진 발레리안 프롤로프 키릴 메레츠코프 레오니트 고보로프 |
병력 규모 | |
핀란드군 | 평균: 450,000명 최대: 700,000명 |
독일군 (1941년) | 67,000명 |
독일군 (1944년) | 214,000명 |
소련군 (1941년 6월) | 450,390명 |
소련군 (1944년 6월) | 650,000명 |
피해 규모 | |
핀란드군 | 사망/실종: 63,204명 부상: 158,000명 민간인 사망 (공습): 939명 민간인 사망 (소련 파르티잔): 190명 포로: 2,377~3,500명 |
독일군 | 사망/실종: 14,000~23,200명 부상: 37,000~60,400명 |
소련군 | 사망/실종: 250,000~305,000명 부상: 385,000명 질병으로 인한 입원: 190,000명 민간인 사망: 4,000~7,000명 포로: 64,000명 |
2. 배경
1939년 11월 30일에 시작된 겨울 전쟁은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강화 조약으로 3개월 만에 끝났다. 핀란드군은 국가의 독립을 지켜냈지만, 카렐리아 지방 등을 소련에 넘겨주고 한코 반도를 조차지로 내주어야 했다.
겨울 전쟁 이후 핀란드는 중립을 지키고자 노르웨이, 스웨덴과 군사 블록을 결성하려 했으나, 독일과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0년 4월, 독일이 베저 연습 작전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면서 핀란드는 서방 국가와의 연결이 끊겼다. 같은 해 여름 발트 3국이 소련에 병합되면서 핀란드는 소련의 위협을 더욱 크게 느꼈다.
핀란드는 무역에서 독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소련에 맞설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나라도 독일뿐이었다. 1940년 8월, 핀란드는 독일과 비밀 협정을 맺고 군사, 경제적 지원을 받는 대신 독일군의 영내 주둔과 통과를 허용했다. 이는 소련에 알려져 독소 불가침 조약 위반으로 외교 문제가 되었다.
1940년 12월, 아돌프 히틀러가 1941년 봄 소련 침공을 결심하면서, 1941년 1월부터 핀란드와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공동 작전 계획을 세웠다. 6월 중순까지 독일군이 핀란드 영내에 배치되었다. 양국 협정에 따라 오울루-벨로모르스크 선 북쪽은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 남쪽은 만네르헤임 원수의 핀란드군 작전 지역으로 정해졌다.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는 기습을 당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군사력을 강화했다. 1940년 독일군의 노르웨이, 덴마크, 저지대 국가, 프랑스 점령과 1940년 말부터 핀란드 내 독일군 주둔으로 핀란드 국민들은 다음 전쟁에서 독일이 함께 싸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계속 전쟁 개전 당시 핀란드군은 47만 5천 명으로, 붉은 군대 11만 400명에 비해 우세했지만, 인구 400만 명의 핀란드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였기에 단기 결전을 예상했다.[55]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지만, 핀란드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핀란드 영내에서 소련을 공격한 독일 공군기에 대해 소련이 핀란드 영내에 보복 공습을 가하자, 6월 25일 핀란드는 소련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핀란드는 이 전쟁이 겨울 전쟁의 연장이라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이 전쟁은 계속 전쟁이라고 불린다.
2. 1. 겨울 전쟁과 그 이후
1939년 11월,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하여 겨울 전쟁을 일으켰다.[55] 핀란드는 붉은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카렐리야 지협 등 영토의 9%와 경제력의 13%를 소련에 할양해야 했다.[55] 또한, 헬싱키 인근 한코 반도를 소련에 조차해야 했다. 약 42만 명의 핀란드인들이 할양된 지역에서 핀란드로 재정착했다.[55]겨울 전쟁 이후 핀란드는 소련의 추가 침공 위협에 직면했다. 핀란드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비를 공공 지출의 거의 절반으로 늘렸고, 겨울 전쟁 중과 직후에 받은 기부금으로 군수 물자를 구매했다.[55] 또한, 겨울 전쟁의 정신을 보존하고자 핀란드 내전의 5월 16일 승리 기념일 축하 행사의 분열적인 백위대 전통은 중단되었다.[55]
핀란드령 카렐리야 재정복을 원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소련은 한코 해군 기지에 3만 명 이상의 소련 군인을 배치하여 핀란드를 압박했다.[55] 핀란드는 노르웨이, 스웨덴과 상호 방위 조약을 제안했지만, 모스크바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5]
2. 2. 독일과 소련의 세력 확장
1940년 4월, 독일이 베저 연습 작전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양국을 침공하여 점령하자 핀란드에서 서방 국가로 가는 문은 실질적으로 닫히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발트 3국이 소련에 병합되자, 핀란드 국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위협감이 더욱 높아졌다. 핀란드는 주변국 중 소련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40년 8월 핀란드는 독일과 비밀 협정을 맺고, 군사 및 경제적 원조를 받는 대신 영토 내 독일군의 주둔 및 영내 통과를 인정했다. 핀란드 국내에는 소련의 스파이도 잠복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은 소련에 알려졌고, 독소 불가침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위반되는 것이 명백했기에, 독소 간의 외교 문제가 되었다.[55]11월부터 12월 사이에 독소 간에 핀란드 문제와 소련의 삼국 동맹 가입 등이 협의되었지만, 양국은 결국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2. 3. 핀란드, 독일, 소련 간의 관계
1940년 11월, 독일과 소련은 베를린에서 핀란드 문제 등을 협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55] 1940년 12월,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바르바로사 작전)을 승인했고,[55] 1941년 1월부터 핀란드와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 시 공동 작전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다.[55] 6월 중순까지 독일군의 핀란드 영내 전개가 이루어졌다.[55] 양국 간 협정으로, 오울루-벨로모르스크를 잇는 선의 북쪽은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상급 대장)의 작전 지역으로, 남쪽은 카를 만네르헤임 원수의 핀란드군의 작전 지역으로 정해졌다.[55]3. 전쟁의 전개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자, 핀란드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소련이 핀란드를 공격하자, 6월 25일 소련에 전쟁을 선포했다.[8]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야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겨울 전쟁 때 잃었던 땅을 되찾고 동카렐리야 지역까지 점령했다. 1941년 말,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레닌그라드 포위전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42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항복한 후, 핀란드 정부와 군 지휘부는 독일의 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핀란드 의회 역시 비밀 회의를 통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3] 핀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도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커지고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3]
1944년 1월,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독일군의 포위를 뚫었다. 핀란드는 2월에 소련에 평화 조약을 제안했지만, 소련이 제시한 조건은 너무 가혹했다. 그 조건 중에는 핀란드가 스스로 독일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핀란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탈리아나 헝가리처럼 평화 조약 후 추축국에서 빠져나오면 마르가레테 작전으로 인해 독일군에게 점령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핀란드는 평화 협상을 중단하고 소련과의 전투를 계속 준비했다.
1944년 6월 9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시작함과 동시에, 소련은 핀란드를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목표는 핀란드를 추축국에서 떼어내고, 비보르크를 포함한 예전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레닌그라드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 부대가 공격에 참여했고, 핀란드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맞섰다.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의 주 방어선과 VT 방어선의 쿠텔셀카가 뚫리면서, 6월 21일에는 세 번째 방어선인 VKT선까지 물러났다.
핀란드는 독일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독일은 핀란드가 전쟁에서 빠져나가려 했기 때문에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6월 22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핀란드가 독일과 계속 함께 싸울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 대통령 뤼티는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약속하며 지원을 받아냈다. 쿨마이 전투단과 제303돌격포 여단 등 독일 지원군과 물자가 도착했고, 부족했던 대전차 무기도 독일로부터 지원받았다.
6월 21일, 소련군은 VKT선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핀란드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탈리-이한탈라에서는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조금씩 후퇴했지만, 7월 1일 지원군과 대전차 무기가 도착하면서 7월 3일에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소련군에 반격을 가했다.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고 진격이 멈추게 되었다.
이후에도 소련군은 부오살미 전투와 비푸리 만 상륙 작전에서 핀란드의 방어선을 뚫으려 시도했지만, 핀란드군은 이를 막아냈다. 동카렐리야에서도 소련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핀란드군은 지연전을 펼치며 방어선 근처까지 후퇴했고, 일로만치 전투에서는 모티 전술을 활용하여 소련군 일부를 섬멸하기도 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병력과 물자 부족으로 인해 전쟁이 길어지면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핀란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위해 독일 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7월 9일 이후, 소련군은 핀란드에 대한 주력 공격 부대를 나르바 전투 등으로 이동시켰다.
7월 12일, 소련군은 공격 중지 명령을 받고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전선이 고착되자 핀란드는 다시 소련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소련도 핀란드가 항복한다면 평화 협상에 응할 의사를 밝혔다.
3. 1. 1941년 핀란드의 공세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핀란드는 초기에는 중립을 표명했으나, 소련의 핀란드 영내 공습을 계기로 6월 25일 소련에 선전포고를 했다.[8]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야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겨울 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회복하고 동카렐리야를 점령해 나갔다. 핀란드군은 1941년 말까지 레닌그라드 근교에 도달했지만, 레닌그라드 포위전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3. 2. 참호전 (1942년 ~ 1944년)
1942년 2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항복한 후 핀란드 정부와 군 수뇌부는 회의를 열어 독일의 승리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했다. 핀란드 의회도 비밀 회의를 통해 빠른 종전을 결론 내렸다.[3] 핀란드 내에서는 전쟁 장기화에 대한 피로감과 평화 협상 요구가 높아졌다.[3]1942년 3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는 스칸디나비아 전략을 재검토했지만, 핀란드가 단독 강화 회담을 방해하는 것은 소련의 가혹한 조건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제20산악군의 철수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동부 전선의 병력 부족으로 인해 부대 전용은 결정되지 않았다.[4]
소련군은 핀란드 전선에 투입된 병력의 일부를 다른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전선의 소련군 병력은 60만 명이 넘어 핀란드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핀란드는 공세 작전을 펼치지 않았다.[5]
3. 3. 1944년 소련의 반격과 종전
1944년 1월,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독일의 포위를 뚫었다. 핀란드는 2월에 소련에 강화 조약을 제안했지만, 소련이 제시한 강화 조건은 가혹했다. 그 조건에는 핀란드가 독자적으로 핀란드에 주둔한 독일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핀란드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나 헝가리처럼 강화 조약 후 추축국에서 탈락하면 마르가레테 작전으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핀란드는 강화 협상을 중단하고 소련과의 전투에 대비했다.6월 9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함께 소련의 핀란드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핀란드의 추축국 탈락과 비보르크 등 옛 영토 회복이었다. 레닌그라드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이 공격에 참여했고, 핀란드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대응했다.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의 주 방어선이 뚫리고, VT 방어선의 쿠텔셀카에서 저항했지만, 소련군의 강력한 화력에 밀려 후퇴했다. 결국 핀란드군은 6월 21일 카렐리야 지협의 세 번째 방어선인 VKT선까지 후퇴했다.
핀란드는 독일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독일은 핀란드가 전쟁에서 탈퇴하려 했기 때문에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6월 22일,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는 핀란드가 독일과 계속 싸울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 대통령 류티는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선언하여 지원을 확보했다. 쿨마이 전투단과 제303돌격포 여단 등 독일의 지원군과 물자가 도착했고, 부족했던 대전차 무기도 독일로부터 받았다.
6월 21일, 소련군은 VKT선에 공격을 시작했다. 핀란드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탈리-이한탈라에서는 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에 피해를 주면서 조금씩 후퇴했지만, 7월 1일까지 지원군과 대전차 무기가 도착했고, 7월 3일에는 모든 화력으로 소련군에 반격했다.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고 진격이 멈췄다.
이후에도 소련군은 부오살미 전투와 비푸리 만 상륙 작전에서 핀란드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핀란드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동카렐리야에서도 소련군의 공세가 있었지만, 핀란드군은 지연 방어를 통해 방어선 근처까지 후퇴했고, 일로만치 전투에서는 모티 전술로 소련군 일부를 괴멸시키기도 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침공을 막았지만, 병력과 물량 차이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핀란드 공격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위해 독일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7월 9일 이후, 소련군은 핀란드에 대한 공세 주력을 나르바 전투 등으로 이동시켰다.
7월 12일, 소련군은 공세 중지 명령을 받고 방어 체제에 들어갔다. 전선이 교착되자 핀란드는 다시 소련과 강화 협상을 재개했고, 소련도 핀란드가 항복한다면 평화에 응할 의사를 보였다.
4. 전쟁의 결과
핀란드는 카렐리야와 Salla영어의 옛 영토를 회복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고 북극해에 면한 페차모 주도 잃었다.[57] 겨울 전쟁보다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지만, 핀란드군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소련군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이는 강화 교섭의 토대가 되었다.
뤼티 대통령이 독일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독일과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뤼티 정권에서는 소련과 강화 협상을 할 수 없었다. 1944년 8월 4일 뤼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만네르헤임 장군이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다. 핀란드는 정권 교체를 통해 친독 정권이 아님을 강조하며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1944년 9월 4일 정전이 이루어졌다.
소련은 강화 교섭에서 독일군과의 결별, 핀란드 영내 독일군 배제 등을 요구했지만, 협상을 통해 핀란드는 이행 유예를 얻었다. 그 외에도 소련은 3억달러 상당의 배상금, 국경선 변경, 페차모 할양, 포르칼라 조차, 군비 제한, 전범 처벌, 전체주의 단체 해산, 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비행장 및 항만 사용 허가 등을 요구했고, 핀란드는 이를 수용했다. 1944년 9월 19일 모스크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24시간 후 전투가 완전히 중지되었다.
4. 1. 핀란드의 입장
핀란드는 겨울 전쟁에서 잃었던 카렐리야와 Салла|살라ru 지역 대부분을 되찾았지만, 소련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고 북극해에 면한 페차모 주마저 잃게 되었다.[57] 또한, 겨울 전쟁 때보다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소련군에게 핀란드군의 3배가 넘는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핀란드군의 저항은 훗날 강화 협상의 밑거름이 되었다.독일의 지원을 받기 위해 뤼티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독일과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뤼티 정권은 소련과 강화 협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44년 8월 4일, 뤼티 대통령은 사임하고, 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만네르헤임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겼다. 핀란드는 정권 교체를 통해 친독 정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즉, 친독적인 태도는 전 대통령 뤼티 개인의 입장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협상에 나선 것이다. 결국 9월 4일에 정전이 이루어졌다.
소련은 강화 협상에서 지난 2월에 제시했던 조건과 마찬가지로, 핀란드 내 독일군과의 관계를 끊고 핀란드 영토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협상을 통해 핀란드는 이 조건을 이행할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소련은 3억달러 상당의 배상금 지불, 국경선을 겨울 전쟁 이전으로 되돌릴 것, 페차모 할양, 핀란드 만의 요충지인 포르칼라를 소련에 조차, 군비 제한, 전범 처벌, 전체주의 단체 해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비행장 및 항만 사용 허가 등을 요구했고, 핀란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944년 9월 19일, 핀란드와 소련은 모스크바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24시간 후 전투를 완전히 중단했다.
4. 2. 소련의 입장
소련은 레닌그라드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핀란드를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등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 비록 핀란드 점령이라는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핀란드를 통해 더 이상 서방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57]핀란드는 한때 카렐리아와 Salla영어의 옛 영토를 회복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으로 탈환당하고, 북극해에 면한 페차모 주도 잃었다. 그러나 핀란드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가진 소련군에 맞서 핀란드군의 3배 이상이라는 큰 손해를 입혔다.
1944년 9월 19일에 체결된 모스크바 휴전 협정에서 소련은 배상금 3억달러 지불, 국경선을 겨울 전쟁 후로 되돌릴 것, 페차모 할양, 포르칼라 조차, 군비 제한, 전쟁 범죄자 처벌, 전체주의 단체 해체,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까지 비행장 및 항만 사용 허가 등을 요구했고, 핀란드는 이 조건으로 강화에 응했다.
4. 3. 전후 핀란드의 외교 정책
1944년 모스크바 휴전 협정 이후, 핀란드는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서방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중립 외교 정책, 이른바 '핀란드화' 노선을 추구했다. 파시키비 노선이라고 불리는 소련과의 우호적인 외교를 펼쳤으며, 언론은 자율 규제를 실시하여 소련의 침략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다.[57] 서방 국가는 이러한 핀란드의 대소 유화 자세를 "핀란드화"라고 불렀으며, 이는 속국화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다.1947년 파리 평화 조약 체결 이후, 핀란드는 1948년 핀란드-소련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소련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전시의 철저 항전과 종전 후의 종속 외교를 적절히 사용하여, 1956년에는 소련으로부터 포르칼라 조차지를 반환받았고, 소련의 붕괴까지 독립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5. 전쟁의 유산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소련 영토 깊숙이 빠르게 진격하자, 핀란드 정부는 독일이 소련을 빠르게 격파할 것이라고 믿었다.[54] 류티 대통령은 핀란드인과 다른 핀족들이 콜라 반도, 동카렐리야, 어쩌면 북부 잉그리아까지 포함하는 "대(大) 핀란드"를 구상했다. 공개적으로 제안된 국경은 "짧은 국경, 긴 평화"라는 슬로건으로 소개되었다.[55] 사회민주당과 스웨덴 인민당 등 핀란드 의회 일부 의원들은 1939년 국경 유지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다.[55] 만네르헤임은 종종 이 전쟁을 "볼셰비즘을 영원히" 격파하려는 반공주의 십자군이라고 불렀다.[54] 7월 10일, 만네르헤임은 검집 선언이라는 일일 명령을 작성하여 카렐리야 해방을 맹세했다. 1941년 12월 개인 서신에서 그는 이전 국경을 넘어갈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56] 핀란드 정부는 미국에 이 명령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확신했다.[33]
대부분의 핀란드인들은 새로운 공세의 범위가 겨울 전쟁에서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전쟁'이라는 용어는 핀란드 정부에 의해 분쟁 초기에 만들어져, 침략을 방어적인 겨울 전쟁의 연장선으로 국민들에게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정부는 또한 독일의 공식적인 동맹국이 아니라 공동의 적과 싸우고 순전히 핀란드적인 목표를 가진 '공동 교전국'임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핀란드군이 1939년의 옛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를 병합하기 시작했을 때 정부의 주장의 진실성이 바뀌었다.[58] 영국 작가 조나단 클레멘츠는 1941년 12월까지 핀란드 군인들이 국가 방어 전쟁인지 외세 정복 전쟁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59]
1941년 가을, 핀란드 군 수뇌부는 독일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핀란드 국방군은 진격 과정에서 비교적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독일군은 모스크바 전투 근처에서 멈춰 서면서 독일의 승리는 불확실해졌다. 북부 핀란드의 독일군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전선이 안정되자 핀란드는 소련과의 평화 협상을 시작하려고 시도했다.[60] 만네르헤임은 핀란드를 독일에 묶어버릴 레닌그라드 공격을 거부했다. 그는 전쟁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간주했고, 이는 독일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59]
전쟁 노력으로 핀란드 경제는 노동력 부족, 식량 부족, 가격 상승으로 고통받았다. 핀란드 정부는 산업 및 농업 생산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군대의 일부를 동원 해제했다.[61] 1941년 10월, 핀란드는 독일에게 다음 해 수확까지 버티기 위해 159000ton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독일 당국은 거부하려 했지만, 히틀러 자신이 동의했다. 연간 180000ton의 곡물 공급은 핀란드 국내 작물 생산량의 거의 절반에 해당했다. 1941년 11월 25일, 핀란드는 독일 지도부가 "충성심의 시금석"으로 여긴 덜 공식적인 동맹인 반코민테른 조약에 서명했다.[62]
5. 1. 핀란드 사회에 미친 영향

계속 전쟁은 핀란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1년 당시 전쟁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부대가 항복한 1943년 2월 3일, 핀란드 정부와 군 수뇌부는 독일이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11] 핀란드 의회는 2월 9일 비밀 회의를 통해 정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고,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2]
핀란드 내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전쟁 지지 열기는 사라지고 전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졌다.[13]
5. 2.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핀란드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영국, 미국과의 관계는 바로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압력과 영국 해군의 페차모 공습으로 인해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57]미국은 핀란드에 1939년 당시 국경을 넘어선 공세를 중단하고, 무기대여법에 따른 소련 지원을 방해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핀란드는 이를 거부했다. 영국은 핀란드에 소련에 대한 적대 행위 중지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핀란드가 응하지 않자 12월 6일 선전포고했다.[57]
1944년 9월 19일 모스크바 휴전 협정 체결 이후, 핀란드는 추축국으로 간주되어 국제 연합의 적국 조항에 포함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겨울 전쟁으로 국제 연맹에서 추방된 소련은 연합국 진영의 승리로 국제 연합의 상임 이사국이 되었고, 핀란드로부터 배상금을 받게 되었다.
핀란드는 1947년 파리 평화 조약 조인 이후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종전 후, 핀란드는 파시키비 노선으로 불리는 소련과의 우호 외교를 펼쳤고, 언론은 소련 비판을 자제했다. 이는 서방 국가로부터 "핀란드화"라고 불리며, 소련에 대한 유화적 태도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핀란드는 이러한 외교를 통해 1956년 포르칼라 조차지를 반환받고, 소련의 붕괴까지 독립과 평화를 유지했다.
소련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레닌그라드 주변 안전 확보와 핀란드를 세력권에 편입하는 등 영토적·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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