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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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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희도(1934년)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1934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60년대 하나회에 가입하여 전두환, 노태우와 친분을 쌓았다. 1975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당시 북한 검문소 파괴 작전을 지휘했다.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하여 소장으로 진급, 이후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했다. 1988년 예편 후에는 효암연구소 소장,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지냈으며, 우익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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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 (193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희도
한자 표기朴熙道
로마자 표기Bak Hui-do
효암(曉岩)
개인 정보
출생일1934년 7월 22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녕
종교불교
본관밀양(密陽)
군 복무 정보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56년 ~ 1988년
최종 계급[[파일:SouthKorea-Army-OF-9.svg|30px]] 대장
서훈 내역미국 리전오브메리트훈장
근무육군본부
지휘육군참모총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베트남 전쟁
소속대한민국 국군
군 종류육군
임관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2기)
경력
주요 보직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육군참모총장
육군참모총장 임기 시작1985년 12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임기 종료1988년 6월 11일
대통령전두환, 노태우
이전황영시
다음이종구
기타 이력
기타 이력한국토지공사 이사장, 자유민주연합 행정특임고문, 효암연구소 소장,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상임회장

2. 생애

박희도는 1934년 7월 22일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 중 형 두 명이 실종되자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1]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5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60년대 중반, 전두환, 노태우와의 친분으로 하나회에 가입했다. 1975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전두환의 요청으로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에 의해 제1공수특전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발생 후, 박정희는 박희도에게 조선인민군의 불법 검문소 4곳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박희도는 64명의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검문소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주한 미군과의 협의 없이 이루어져 압박을 받았지만, 동료 장군들의 도움으로 이를 견뎌냈다.[2] 1978년, 북한 간첩들이 대한민국에 침투했을 때, 박희도 여단의 일부 대원들이 임진강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세호 육군 참모총장은 박희도를 해임하려 했지만, 정병주는 이세호의 해임 시도를 막았다.[2]

그러나 1년 후 박희도는 12·12 군사 반란 당시 정병주를 배신했다. 박희도는 전두환의 명령에 따라 서울로 이동하여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냈다. 이는 정병주의 체포에 도움이 되었다. 쿠데타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기계화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1년 후 중장으로 진급하여 특수전사령관이 되었다.[2] 1985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3]

1987년 7월, 그는 "그 해 있을 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당선될 경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4] 1988년 6월 육군에서 예편했다. 같은 달 그는 6월 민주 항쟁을 빌미로 정치인들이 군대를 분열시켰다고 비난했다.[5] 그는 "민주화와 개방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선거 유세장에서 군모와 군화가 조롱받고 있다. 군에 대한 이러한 굴욕에 대해 나는 크게 분노하고 고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6]

1992년, 김영삼이 당선될 것으로 예상되자 아내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도피하려 했다.[7] 김영삼의 당선 이후, 재판을 통해 옥살이를 했지만, 몇 년 후 석방되었다.

2019년까지 전두환과 연락을 유지했다.[2]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녀를 지지했다.[1] 현재, 대한민국의 극우 정치 활동가이다.[2]

2. 1. 군 생활

박희도는 육군사관학교 12기로, 소위로 임관했다. 1960년대 중반 하나회에 가입하여 전두환과 친분을 쌓았고, 1975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1976년 전두환의 후임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다.[8]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발생 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동참모본부는 제1공수특전여단에 보복 작전을 맡겼다. 박희도 여단장은 64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판문점 내 북한 초소 파괴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미연합사령부와 마찰이 있었으나, 박희도는 부하들의 무장을 강행하며 작전을 완수했다.[8]

1978년 북한 간첩이 제1공수특전여단 위수지역을 통과해 임진강을 건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박희도는 보직 해임 위기에 처했으나,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의 도움으로 여단장 자리를 지켰다.

2. 1. 1. 장교 임관 초기

육군사관학교 12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하나회에 가입하여 전두환과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2. 1. 2. 장군 진급

1975년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76년 제1공수특전여단장이던 전두환이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령을 받게 되자, 후임 지휘관을 물색하던 중에 자신의 하나회 후배였던 박희도를 떠올렸다.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정병주 소장(육사9기)에게 간청하여 박희도가 자신의 후임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 1. 3.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보복 작전

1976년 박희도가 제1공수특전여단장에 부임한 그해 8월 18일,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응징을 결심한다. 박정희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부대로 제1공수특전여단을 떠올렸다. 이후 당시 합동참모의장이던 노재현 대장과 합동참모본부의 작전본부장인 류병현 중장에게 작전 지시를 내리고, 이들은 은밀히 제1공수특전여단을 방문하여 박희도 여단장에게 박정희의 지시를 실행하라고 명령한다.[8]

두 사람은 위장을 하고 찾아가 여단장 방에서 거사자금 500000KRW을 내놓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이니 은밀하게 수행하라고 한다. 주요 핵심은 판문점 윗쪽에 설치된 북한의 불법초소 4개를 모두 파괴하라는 것이었고, 이에 박희도 여단장은 64명의 정예요원[8]을 선발하여 김종헌 소령을 특공대장에 임명하여 이들에게 모두 소총으로 무장할 것을 지시하고 판문점으로 보낸다. 특공대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는데, 당시 한미합동 작전으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자르는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나, 애당초 미군 측이 비무장으로 올 것을 요구한 제1공수특전여단이 무장으로 판문점에 도착하여 단독으로 작전을 감행하자 당시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인 스틸웰 미 육군 대장이 이에 분노하여 박희도를 몰아세웠다.[8]

한미연합사령부에서는 특공병력 64명이 모두 권총을 휴대하되 보관은 미군 측이 맡는다고 주장하였으나, 박희도 장군은 "부하들을 사지에 보내는데 그럼 적을 만나면 태권도 약속대련이나 하라는 이야기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모든 책임을 질 각오로 부하들에게 권총과는 별도로 개인화기(소총)으로 무장하게 했다.[8]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미군 측의 압력에 견뎌낸 박희도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8]

2. 1. 4. 보직해임 위기

1978년 충청남도 서산 앞바다에서 지대지 미사일 발사 실험에 성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북한이 무장 간첩을 파견하여 서산 앞바다 일대의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육군본부에서 이를 탐지하고 무장간첩을 쫓았으나, 간첩은 제1공수특전여단 위수지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임진강을 건너 북한으로 귀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세호 대장은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의 보직 해임을 검토했으나, 박희도를 아끼던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이 이세호 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 여단장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2. 2. 12·12 군사 반란 가담

12·12 군사 반란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었던 박희도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근무지를 이탈하여 서울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실로 찾아가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였다.[1]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미루자, 박희도는 전두환과 함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백운택 등과 무장하고 청와대를 찾아가 재가를 강력히 요청하였다.[1]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방부 장관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박희도는 전두환에게서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제1, 3, 5공수특전여단의 이동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박희도는 불응하고 제1공수특전여단을 출동시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1] 최세창은 전두환의 명령에 따라 제3공수특전여단을 동원, 특전사령부를 장악하고 정병주 장군을 체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병주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사살되었다.[1]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명령으로 제9공수특전여단은 회군했고, 반란군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으로 연행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 재가를 강요했다.[1]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재가했고, 12.12 군사 반란은 반란군 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1]

2. 3. 12·12 군사 반란 이후

박희도는 12·12 군사 반란에서 공을 세워 육군 제26보병사단장을 거쳐 특전사령관에 부임하였다. 그 후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대장으로 진급, 1985년 12월에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그러나 1988년 6월, 임기를 6개월 남기고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경질되었으며 이후 현역 부적합 전역했다.

육군참모총장 시절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박희도는 '''노태우를 찍으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군인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군인 정신이 매우 부족한 행동이었다. 또한 부하인 정연관 상병이 김대중을 찍었다는 이유로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1]

2. 4. 6공화국 이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92년 효암연구소 소장으로 초빙되었고,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지냈다.[1] 1994년 문민정부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법처리가 진행된 뒤 12·12 재평가 과정에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고 석방되었다.[1]

2000년대 이후 우익 시민단체에서 시민운동가이자 우익 단체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1]

3. 학력

3. 1. 비학위 수료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4. 평가

박희도는 진급 심사에만 특화된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여단장 시절 무장공비를 놓쳐 현역 부적합 전역 위기에 몰릴 정도로 무능했지만, 정병주 라인과 전두환 라인 양쪽에서 줄타기를 했다.[1]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이기는 편이 아군'이라는 마인드로 정병주 라인을 버리고 전두환 라인을 선택해 육군참모총장 자리까지 올랐다.[1] 그러나 1988년 6월, 임기를 6개월 남기고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으며 이후 현역 부적합 전역했다.[1]

실무 능력은 부족했지만 진급 심사 통과 능력은 뛰어났던 군인으로, 박희도의 존재는 진급 위주의 잘못된 인사 정책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여겨진다.[1]

5. 저서


  •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 (박희도, 샘터사, 1988)

6. 수상 경력

미국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7. 대중 매체에서

박희도는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뤄졌다.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기정수[1],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서상철[3] 박희도 역을 연기했다.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전인택[2],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배우 최병모가 박희도 역을 맡았다.

7. 1. TV 드라마

연도드라마 제목방송사배역
1995년제4공화국MBC기정수[1]
1995년코리아게이트SBS서상철[3]
2005년제5공화국MBC전인택[2]


7. 2. 영화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 최병모가 박희도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인터뷰]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 박정희-전두환을 말하다" http://www.ilyoseoul[...] 2013-07-01
[2] 웹사이트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http://www.ynamnews.[...] 2019-02-10
[3] 웹사이트 육참총장에 박희도대장 https://www.joongang[...] 1985-12-16
[4] 논문 Generals and Presidents: Establishing Civilian and Democratic Control in South Korea https://www.jstor.or[...] 2004
[5] 논문 South Korea at the Crossroads: An Evolving Democracy or Authoritarianism Revisited? https://www.jstor.or[...] 1990
[6] 논문 INTEREST GROUPS AND FOREIGN POLICY IN SOUTH KOREA: A CASE STUDY https://www.jstor.or[...] 1999
[7] 웹사이트 박희도 전육군참모총장 출국 https://www.hankyung[...] 1992-03-09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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