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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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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규하는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제10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경기고등학교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대동학원을 거쳐 경성사범학교 교수를 지냈다. 외무부 통상국장, 주일대표부 총영사,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 1979년 12·12 군사 반란 이후 대통령 직무를 수행했으나, 1980년 8월 하야했다. 퇴임 후 국정자문회의 의장,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2006년 사망했다. 그는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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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9년 최규하 대통령 공식 초상화
1979년 공식 초상화
이름최규하
출생일1919년 7월 16일
출생지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 (일본 제국 조선)
사망일2006년 10월 22일
사망지서울특별시 마포
안장지국립대전현충원
본관강릉
배우자홍기 (1935년 결혼, 2004년 사망)
학력도쿄고등사범학교
서명Choi Kyu-Hah signature (Sugyeol).svg
한자 이름崔圭夏
로마자 표기Choe Gyuha
일본어 이름さい けいか (사이 케이카)
별명현석(玄石), 서옥(瑞玉)
종교무종교
직책
제10대 대통령재임 시작: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 1979년 12월 6일 (정식 대통령)
재임 종료: 1980년 8월 16일
제12대 국무총리재임 시작: 1975년 12월 18일
재임 종료: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1979년 10월 26일 ~ 1979년 12월 6일
정치
소속 정당무소속
주요 활동
대통령 재임 기간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역임
1979년 12월 6일, 대통령으로 취임
1980년 8월 16일, 사임
국무총리 재임 기간1975년 12월 19일 ~ 1979년 12월 5일
주요 정책대통령 권한대행 기간 동안 12.12 군사 반란 발생
5.17 군사 쿠데타로 전두환에게 권력 이양
가족 관계
배우자홍기
자녀2남 1녀
최양오
이응선
기타
로마자 표기 (한글 이름)Choe Gyu-ha
로마자 표기 (한자 이름)Choi Kyu-ha
한자 (본명)崔圭夏
로마자 표기 (별명)Hyeonseok, Seook
일본어 표기 (본명)さい けいか (사이 케이카)

2. 생애

최규하는 1919년 7월 16일 일제강점기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현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출생했다. 양반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 학자였다. 어린 시절 梅原圭一|우메하라 케이이치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경기고등학교와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를 졸업하고 영어 영문학 학위를 받은 후, 만주국대동학원에 유학했다. 1943년 졸업 후 1945년 경성사범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46년부터 33년간 관료 생활을 했다.

농림부 량정과장을 시작으로 외무부 통상국장, 외무차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1년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김종필의 후임으로 국무총리가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2월 6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약 8개월간 재임했다.

취임 당시 조기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으나, 계엄령 하에서 군을 거의 장악하지 못해 전두환의 쿠데타를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장관의 재가가 없으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굽히지 않았고, 쿠데타 성공 후 재가를 요구받았을 때에도 서류에 날짜와 시간을 기입하여 사후 재가임을 기록하는 등 최소한의 저항을 보였다.

1980년 4월, 전두환과 다른 정치인들의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임명했다. 5월,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실상''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광주에서는 학생 시위가 격화되어 광주 항쟁이 발생, 전두환의 군대에 의해 5일 만에 약 98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최규하는 항쟁 직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국무총리 박충훈이 전두환이 1980년 9월 1일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권한대행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군부와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국회까지 무력화시킨 전두환 장군이 결성한 국보위가 초법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최규하의 권위는 완전히 상실되었고, 이로 인해 대통령직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다. 결국 1980년 8월 16일 전격적으로 하야를 발표하게 된다.

역대 대통령 중 재임 기간이 짧았던 탓에 존재감이 희미한 인물로 여겨지지만, 병석에 누운 홍기 부인의 간병에 헌신하는 등 인간적인 면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사퇴 후 대중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지내다 2006년 10월 22일 급성 심부전으로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했다.[5][6][7] 그의 장례식은 2006년 10월 26일에 거행되었으며, 노무현 대통령, 권양숙 여사, 한명숙 국무총리, 전직 대통령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이 참석했다.[2] 최규하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2]

다음은 최규하의 생애를 정리한 표이다.

연도사건
1919년 7월 16일강원도 원주 출생
1937년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1941년 3월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제3부 졸업
1943년만주국 대동학원 정치행정학과 졸업
1945년경성사범대학교 교수
1946년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 과장
1951년-1967년외무부 통상국장, 주일 한국 대표부 공사, 외무부 차관
1967년-1971년제4대 외무부 장관
1971년-1975년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12월-1976년 3월국무총리 대행
1976년 3월-1979년 12월제12대 국무총리
1979년 12월 6일-1980년 8월 16일제10대 대통령
1980년 5월 31일-8월 16일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대표위원장
1981년-1988년국정자문회의 의장
1991년-1993년민족사시정국민회의 의장
2006년 10월 22일서거


2. 1. 생애 초기

최규하는 일제강점기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 가문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 유생이었다. 어린 시절 최규하는 일본식 이름인 梅原圭一|우메하라 케이이치일본어를 사용했다.[4]

경기고등학교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후, 만주국대동학원에서 유학했다. 1943년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1945년 경성사범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46년부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35년 11월에는 홍기와 결혼하였다.

그는 농림부 량정과장을 시작으로 외무부 통상국장, 외무차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1년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국무총리를 거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2월 6일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전두환의 숙군 쿠데타 등으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1980년 8월 16일 사임했다.[4]

2. 1. 1. 출생과 가계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면 봉산리(현,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아버지 최양오(崔養吾)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 최양오는 학교 훈도를 역임했고, 잠시 원주군 원주면장을 역임하기도 했다.[4] 할아버지 최재민(崔在民)은 1897년 성균관박사를 역임했다. 박사는 조선의 관직 명칭이었으며 그의 집은 할아버지가 성균관박사를 역임한 이유로 최박사댁이라 불렸다.[4]

어릴 적부터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 〈효경〉 등을 시작으로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통감〉 등을 읽었다.[4]

1932년 3월 30일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4] 1935년 11월 경성고보 4학년 재학 중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셋째 딸 홍기(洪基)와 결혼했다.[4]

2. 1. 2. 학창 시절

梅原圭一|우메하라 케이이치일본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면 봉산리(현,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아버지 최양오(崔養吾)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양오는 학교 훈도를 역임했고, 잠시 원주군 원주면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최재민(崔在民)은 1897년 성균관박사를 역임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9]

1932년 3월 30일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경성고보 4학년 재학 중인 1935년 11월 부모의 뜻에 따라 홍기(洪基)와 결혼했다.[9] 1937년 2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경성제1고보 졸업 동기생으로는 이영섭 대법원장 등이 있다.[10]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의 전신)로 진학해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3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7월 5일 만주국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하였다.[12]

2. 1. 3. 교육 활동과 공직 진출

최규하는 원주를 떠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종로구 단성사 뒤 봉익동의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9] 1937년 2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33기로 졸업했다. 그의 경성제1고보 졸업 동기생은 이영섭 대법원장 등이다.[10] 낙제를 하여 1년 유급되어 복학생이 된 민관식은 최규하와 함께 졸업장을 받았지만 그의 고교 1년 선배였다.[10]

어학 실력에 뛰어났던 그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했던 이승만 다음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대통령으로 꼽히기도 한다.[11]

1941년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만주국 국립 대동학원을 정치행정 전공으로 수료하였다. 1945년 경성사범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46년 4월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을 시작으로, 1947년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 1948년 농림부 양정국 양정과장 및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쳤다.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같은 해 ECAFE 무역진흥회의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여했다.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58], 주일대표부 참사관,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 외무부차관을 역임했다. 1960년에는 외무부 장관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1962년 동양화학 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외무부 장관 고문이 되었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외교담당 고문 및 의장을 역임했다.

2. 2. 공직 생활

1945년 경성사범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46년부터 33년간 관료 생활을 했다. 농림부 량정과장을 시작으로 외무부 통상국장, 외무차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1년에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했고, 1975년김종필의 후임으로 국무총리가 되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재직하며 ECAFE 무역진흥회의에 한국 측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1952년 7월 17일 도쿄의 주일대한민국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하였다. 1953년 10월 6일 ~ 10월 10일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회담에 한국-일본 양측 대표단 각 18명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1954년 10월 6일 ~ 10월 1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경제위원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55년 7월 8일이사관에 임명되고 외자청 직원을 겸직하였다. 1957년 5월 16일 주일한국대표부 참사관(參事官) 등을 지냈으며, 그해 12월에는 재일교포체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4월부터 10월까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측 대표로 참여하였으나 배상액수에 대한 한일 양국간 입장차이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59년 3월 20일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 제11·12·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59년 9월 12일 귀국하여 외무부차관이 됐고, 1960년부터는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하다가 4·19 혁명 후인 1960년 5월 12일 외무부 차관직을 사임했다.[15]

2. 2. 1. 외교관 활동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58] 같은 해 ECAFE 무역진흥회의에 한국 측 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1952년에는 주일대표부 총영사[58]와 참사관을 역임하였고, 1959년에는 주일대표부 공사가 되었다. 이후 외무부 차관을 거쳐 1960년에는 외무부 장관 직무대행을 수행하였다.

1962년 서울 아시아반공연맹 총회에 참석하여 임시의장으로 사회를 보았으며, 민족반공연맹 임시총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반공연맹 총회에 다녀온 뒤 외무부장관 고문으로 복귀하고, 같은 해 7월 새로 개최되는 한일회담의 고문이 되었다. 1963년 외무부 본부 대사를 거쳐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4월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 교섭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5월 8일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정책소위 고문, 1964년 주말레이시아 대사(1964년 11월~1967년 6월)를 지내고 귀국하여 1967년 6월 외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2. 2. 2. 국무총리 재직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에 기용되었다. 박정희는 그의 '과묵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부족한 점을 높이 평가해 그를 국무총리로 발탁했다'고 한다.[20] 1977년 7월 25일 및 26일에는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제10차 안보 연례협의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21] 이 회의에 최규하는 서종철 국방부장관, 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부장관, 노재현 대한민국 합참의장, 조지 에스 브라운 미 합참의장, 그리고 양국 정부의 고위 외교 및 국방 관리들과 함께 참석하였다.[21]

1977년 7월 26일에는 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과 면담하였다.[22] 이어 제10차 한미안보연례회의에 국방부 장관 서종철, 합동참모본부 의장 노재현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선출됐다.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동창회에 초대되어도 거절했다고 한다.

1979년 6월 30일과 7월 1일, 서울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간의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최규하는 한국측 각료로서 회담에 배석하였다.[23] 이 회담에는 한국측에서 최규하 국무총리, 박동진 외무부장관,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용식 대사가, 미국 측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차관보 및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가 배석하였다.[23]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습되어 살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았다.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2. 3. 대통령 재임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았다.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15]

1977년 7월 25일 및 26일에는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제10차 안보 연례협의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21] 최규하는 서종철 국방부장관, 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부장관, 노재현 대한민국 합참의장, 조지 에스 브라운 미 합참의장, 그리고 양국 정부의 고위 외교 및 국방관리들과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21]

1979년 6월 30일과 7월 1일에는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최규하는 한국측 각료의 한 사람으로 배석하였다.[23] 이 회담에는 한국측에서 최규하 국무총리, 박동진 외무부장관,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용식 대사가, 미국 측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차관보 및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가 배석하였다.[23]

2. 3. 1. 집권 초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김종필에게 차기 대통령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12월 6일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약 8개월간 재임했다. 한국 역대 대통령 중 재임 기간이 가장 짧다.[4]

취임 당시 조기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으나, 계엄령 하에서 군을 거의 장악하지 못했기에 거의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두환의 숙군 쿠데타를 추인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흐름에 휘말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통령직에 취임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임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로부터 "불운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전두환 등 신군부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의 재가가 없으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굽히지 않았고, 쿠데타 성공 후 재가를 요구받았을 때에도 서류에 날짜와 시간을 기입하여 어디까지나 사후 재가임을 기록하는 등 최소한의 저항도 보였다.[4]

또한 짧은 대통령 재임 중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방문도 성사시켰다. 참고로, 중동 방문에서 귀국한 직후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 조치를 추인했고, 광주 사태가 발생했다.[4]

2. 3. 2.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10·26 사건을 수사 중이던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사건 당일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와 협의한 정황을 포착,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체포 작전을 벌였다. 이를 12·12 군사반란이라 한다.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정승화 체포 재가를 미뤘으나, 결국 12월 13일 새벽 사후 승인했다. 노재현 장관은 총소리에 피신했다가 한미연합사 상황실에서 최규하와 통화했으나, 대통령 지시를 따르지 않고 신현확 등의 설득으로 대통령에게 갔다.[28]

1980년 4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고 국보위 부위원장을 맡아 사실상 집권하자 전국에서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다. 대학생들은 서울역 광장을 점거하고 시위하다가 정부 대응을 기다리며 해산했다.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강요했다.[38] 최규하는 5.16 정변을 언급하며 반대했지만,[39] 군부의 강요에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만 수용했다.

5월 18일 신군부는 국회와 중앙청을 점거하고 주요 정치인을 체포, 가택 연금했다. 이는 5·18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서울의 봄 시기 학생운동권에서 최규하 책임론이 제기됐으나, 신계륜은 군부가 문제였다고 반박했다.[40]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과 군부는 최규하 정부를 장악했다. 1980년 4월,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5월,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실상''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광주에서는 광주 항쟁이 발생, 5일 만에 약 98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최규하는 항쟁 직후 사퇴했고, 박충훈이 권한대행을 맡았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 3. 3.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하야

10·26 사건 이후 최규하는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사건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와 협의했다는 점을 포착, 12.12 사태를 일으킨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고자 정승화 체포 재가를 미뤘으나, 결국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 사후 승인했다.[28] 노재현 장관은 12월 12일 오후 7시 20분경 총소리에 피신, 육군본부와 한미연합사를 거쳐 12월 13일 오전 3시 50분경 신현확 국무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설득으로 최규하에게 돌아갔다.[28]

하나회는 12.12 군사 반란으로 국방부 고관과 정승화, 정병주, 장태완 등을 감금하고 군부와 정부를 장악했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는 국정자문회의를 구성, 윤보선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2월 29일 김대중 등 687명을 복권시켰다.

1980년 4월, 최규하는 전두환의 강요로 그를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사실상 실권이 없었던 최규하는 내각 구성에도 자신의 뜻을 반영하지 못했고, 청와대에서 장관들을 보기조차 힘들었다.[34] 전두환 겸임 시절 청와대는 적막했고, 최규하의 회의 소집은 미스유니버스 대책회의 등 몇 번에 불과했다.

1980년 4월 12일, 최규하는 권영민 비서관에게 국민 여론을 물었고, '최 주사'라는 답에 불같이 화를 냈다.[35][36][37] 1980년 4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과 국보위 부위원장을 겸하며 실질적 집권자가 되자, 전국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역 광장 시위 후, 학생들은 해산했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강요했다.[38] 최규하는 5월 16일 '시국수습방안'에 반대,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고 했으나,[39]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만 수용했다.

5월 18일, 신군부는 국회의사당과 중앙청을 점거, 김종필, 김대중 등을 체포하고 김영삼 등을 가택연금했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서울의 봄 시기, 학생운동권은 최규하가 아닌 군부가 문제라고 인식했다.[40]

1980년 5월 25일, 최규하는 광주를 방문해 담화문만 발표하고 서울로 돌아갔다.[41] 26일 재방문했으나, 형식적 담화문만 방송하고 밤 10시에 서울로 복귀했다.[42]

5월 27일, 최규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 31일 의장이 되었다. 신군부의 요구를[43] 하루 동안 회피했으나, 27일 국무회의 통과 후 국보위가 발족,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국보위는 군사혁명위원회와 같았다.[44][43] 전두환 등은 국보위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를 압박, 하야시켰다.[45]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박정희처럼 육군대장으로 진급, 전역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45]

1980년 7월 30일, 최규하는 수원 새마을 연수원을 시찰했다. 같은 날, 김정렬은 신군부의 부탁으로 최규하에게 5시간 동안 하야를 요구했고, 8월 16일 최규하는 사임했다.[46] 1979년 12월, 전두환과 군 동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1980년 초 정부를 장악했다.

1980년 4월,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5월,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 ''사실상''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광주에서는 시위가 격화, 광주 항쟁으로 이어져 5일 만에 약 987명이 사망했다. 최규하는 항쟁 직후 사퇴했고, 박충훈이 권한대행을 맡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2. 4. 퇴임 이후

1980년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직과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으며,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충훈 총리서리가 임시로 맡았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새 대통령 취임식에 최규하 내외가 초청되었는데, 부인 홍기 여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20]

1981년 4월 20일 국정자문회의가 발족되자 1988년 2월까지 최규하는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을 기부했고, 1985년 1월 17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낙준 추모 예배에 참석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12.12와 신군부 집권 과정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국회 청문회 출석 및 증언 요구가 있었으나, 최규하는 끝내 진술을 거부했다.

1988년 11월 전두환이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자 1993년 2월까지 최규하는 다시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국회는 5공 청산을 이유로 최규하에게 국정 증인 채택을 요구했으나, 최규하는 출석을 거부했다. 1988년 11월 19일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과 최규하의 국정 증언은 회피했지만, 전두환 형제 등을 비리 혐의로 구속했다.[47] 전경환 처벌과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빌미로 최규하에 대한 증언 출석 요구는 철회되었다.

1991년부터 최규하는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제3대 의장을 지냈다.

사퇴 후 최규하는 대중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지내다가 2006년 10월 22일에 사망했다.[1] 2006년 10월 26일에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노무현 대통령, 권양숙 여사, 한명숙 국무총리, 전직 대통령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이 참석했다.[2] 최규하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2]

3.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위치한 묘소.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오전 7시 37분에 서거했다.[50] 서울대 병원측은 "최 전 대통령이 오전 병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심경기가 있었다"며 "급성심부전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51] 향년 87세였다.

생전 그의 엄격할 정도의 청렴함은 서거 이후에 월간조선 등을 통해 알려졌다. 1973년 마포구 서교동 사저로 이사한 이후 서거할 때까지 연탄 보일러를 사용했다. 국무총리 재임 당시 강원도 장성광업소(태백시 소재)에서 광부들과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즐겨 신던 태화고무신은 밑창이 닳면 고무타이어 조각을 붙여 신었고, 청와대 시절 사용했던 가구를 폐기하지 않고 사저로 가져와 사용했다. 지독히도 무더웠던 1953년 갓 태어난 셋째딸(종혜)을 위해 장만한 나쇼날 선풍기 또한 2006년 서거할 때까지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주황색 플라스틱 재질의 이쑤시개 또한 닦아서 계속 재활용하였고, 달력 뒷면을 오려 이면지로 이용하였다. 안경 또한 그의 청렴함을 증명해주는 소재다. 연지색의 로이드 뿔테 근시 안경은 화동 경기고 재학 시절부터 외무부차관을 재임한 1960년까지 사용하였고, 이후 말레이시아 대사 시절부터 대통령 사임에 이르기까지 반뿔테 근시 안경과 뿔테 원시 안경을 겸용하였다. 사임 이후 서교동 시절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부터 사용한 반뿔테 근시 안경(현재 초당대학교 안경박물관 소장, 안경다리가 부러짐), 서거 전까지 사용한 반뿔테 근시 안경 등이 그것이다.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으며,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이 참여했다.[2]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2] 생가는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소재하며 현재는 원주역사박물관내에 위치해 있다. 2010년 12월 3일 그가 다녔던 원주초등학교에 최규하 기념관(현석관)이 세워졌다.[52]

2012년 10월 2일 최규하 기념사업회가 강원도 원주시에서 조직되었다.[53]

4. 평가와 비판

12.12 군사 반란으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고 정부의 실권을 차지하면서, 최규하는 사실상 권한이 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했다.[34] 1980년 4월에는 전두환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하여 권력 핵심을 신군부에 넘겨주었다.[34] 당시 국민들은 최규하를 '최 주사'라고 부르며 사실상 권한이 없는 대통령으로 인식했다.[35][36][37]

1980년 5월,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최규하에게 강요했다.[38] 최규하는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며 반대했지만,[39] 신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비상계엄 확대 방안을 수용했다.[39]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최규하는 광주를 방문하여 사태 수습을 위한 담화문만 발표하고 서울로 복귀하여 비판을 받았다.[41][42] 1980년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설치되었고, 최규하는 국보위 의장을 맡았지만, 실권은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상임위원회에 있었다.[43] 국보위는 사실상 군사혁명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했다.[44] 결국 최규하는 1980년 8월 16일, 신군부의 압력과 국보위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45][46]

이후,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지 않고, 전두환의 집권을 도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위원회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여 국회 모독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4] 미국 국무부 보고서는 최규하에 대해 "언행이 느리고 따분하며, 현직 임무 수행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고 활기에 차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20]

스스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고, 대통령 재임 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4. 1. 긍정적 평가

역대 대통령 중 재임 기간이 짧았던 탓에 존재감이 희미한 인물로 여겨지지만, 병석에 누운 홍기 부인의 간병에 헌신하는 등 인간적인 면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 대통령 경험자들은 재임 중 암살, 망명, 본인이나 친족의 체포, 투옥, 자살 등의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매우 많은 가운데, 대통령 퇴임 후에도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역임하는 등 '''본인·친족 모두 화를 면한 극소수의 대통령 경험자'''라는 점이다(단, 전술한 대로 대통령직 자체는 쿠데타에 의한 사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결과로 상실했다). 최규하 이외에는 2022년 임기를 마친 문재인이 있을 뿐이다(2023년 현재).

관료 시절부터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했고, 특히 사생활에서는 검소함을 유지했으며 대통령 퇴임 후에도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다.

4. 2. 부정적 평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최규하는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으나,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겼다.[34]

1980년 4월,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권력의 핵심을 신군부에 넘겨주게 되었다.[34]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최규하를 '최 주사'라고 부르며 사실상 권한이 없는 대통령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35][36][37]

1980년 5월,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최규하에게 강요했다.[38] 최규하는 이에 반대했지만,[39] 결국 신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비상계엄 확대 방안을 수용했다.[39]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최규하는 광주를 방문하여 사태 수습을 위한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실질적인 해결 노력 없이 서울로 복귀하여 비판을 받았다.[41][42]

1980년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설치되었고, 최규하는 국보위 의장을 맡았지만, 실권은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상임위원회에 있었다.[43] 국보위는 사실상 군사혁명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했다.[44]

결국 최규하는 1980년 8월 16일, 신군부의 압력과 국보위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45][46]

이후,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지 않고, 전두환의 집권을 도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위원회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여 국회 모독죄로 고발당하기도 했다.[4]

미국 국무부 보고서는 최규하에 대해 "언행이 느리고 따분하며, 현직 임무 수행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고 활기에 차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20]

4. 3. 논란

스스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해 논란이 있다. 특히 친일 행적이 의심되어 논란이 가중되었다.[55]

1980년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는 과정이 미심쩍지만, 대통령 재임 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김정렬에게 부탁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 하야를 종용했다는 의혹도 있다. 최규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던 신현확 전 총리는 1995년 12월 16일 검찰 진술에서 "81년 김정렬씨에게 최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한 사실이 있다고 분명히 들었다"고 진술했다.[56] 실제 김정렬은 최대통령이 설악산으로 하계 휴가를 떠나기 직전 청와대를 방문하여 그와 독대하였다.[57]

오랫동안 12.12나 5.18에 대한 증언 진술을 거부하였다. 그는 진술 거부에 대해 '그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진술 거부의 이유를 피력하였다.[54] 그가 침묵과 인터뷰 거절, 면담 거절로 일관하자 당시 만화에서는 그가 손으로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것을 풍자하여 '최규하 요가연구소 개설'이라는 풍자 만화들이 나돌기도 했다. 후년에는 국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특별위원회의 출석 요구나 임의 동행 명령 등을 거부했기 때문에 국회 모독죄 등으로 형사 고발당했다.[4]

5. 기타

1989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 이택승 등은 최규하, 전두환, 이희성, 김만기(당시 국보위 정화분과위원장) 등을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48] 그러나 3년 뒤인 1992년 서울지검으로부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았다.[48]

1992년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19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연임 건의를 사양하고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을 후임으로 내정,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명예의장에 추대되어 2006년까지 재임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의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았지만,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했다.

1999년 6월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49]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에 참석하거나, 국무총리 등 정치인들의 내방을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였으며, 2004년부터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하는 횟수가 잦아지며 대외 활동을 중단하였다.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신임대표를 입원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예방한 것이 언론에 비친 최규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04년 7월 20일, 부인 홍기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최규하의 경성고보 졸업 동기이자 1년 선배였던 민관식의 수집품 목록에는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만찬 음식 메뉴가 있다. 민관식은 국회의장 직무대행 자격으로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 경축 만찬에 초대되었다.[60] 최규하 대통령 취임 경축 만찬에는 주한 외교사절과 함께 민관식 국회의장 직무대행, 이영섭 대법원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60] 이날 청와대는 최상의 만찬을 내놓았다. 메뉴는 훈제 알래스카 연어, 쇠고기 수프, 광어찜, 셔벗, 쇠고기 등심구이, 데운 야채, 샐러드, 커피 순이었다.[60] 적포도주백포도주였다.[60]

대한민국 건국 초기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178cm의 장신이었다. 혈액형은 A형이다.

2023년 한국 영화 12.12: 그날은 최한규라는 가명으로 최 전 대통령을 묘사한다.[3]

; 영화



; 텔레비전 드라마

  • 제5공화국 (2005년) - 김성겸이 최규하 역을 연기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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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Daejeon National Cemetery Timeline http://www.dnc.go.kr[...] Daejeon National Cemetery 2014-09-28
[3] 뉴스 2023.11.23 Now Playing https://koreajoongan[...] 2023
[4] 웹사이트 失墜する「韓国大統領」たち。逮捕、収監、暗殺、亡命、自殺... https://www.huffingt[...] 2018-04-10
[5] 뉴스 KBS뉴스9 https://news.kbs.co.[...] 2006-10-22
[6] 뉴스 MBC뉴스데스크 https://imnews.imbc.[...] 2006-10-22
[7] 뉴스 SBS8뉴스 https://news.sbs.co.[...] 2006-10-22
[8] 서적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9]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5
[10]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5
[11] 서적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12] 웹사이트 http://www.jabo.co.k[...]
[13] 뉴스 최규하, 단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은 대통령의 업보 https://www.hani.co.[...] 한겨레 2015-02-13
[14] 웹인용 食糧農業會議에 韓國代表도 參加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사 1949-09-02
[15] 웹사이트 최규하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16] 서적 한국 학생운동사 파라북스 2011
[17] 서적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18] 뉴스 https://newslibrary.[...] 1970-05-22
[19] 뉴스 https://newslibrary.[...] 1970-11-26
[20]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21] 서적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22] 서적 한미동맹의 비전과 과제 동아시아연구원 2006
[23] 서적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24]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25] 서적 바로 보는 우리 역사 서해문집 2004
[26] 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27] 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28] 웹사이트 노재현의 피신과 재가지연 http://www.systemclu[...] 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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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뉴스 모두들 각하를 최(崔)주사라 부릅니다 보고에 역정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08-11-27
[37] 뉴스 나 같은 이에 누가 총을 겨누겠나 https://www.yeongnam[...] 영남일보 2008-11-28
[38] 뉴스 5.18사건 재수사 종결,내일 기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6-01-22
[39] 뉴스 신군부,시국수습안 대통령 반대불구 강행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40] 서적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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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43] 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44] 기타
[45] 서적 우리 한국사 푸른역사 2006
[46] 서적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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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적 고문의 한국현대사 야만시대의 기록 역사비평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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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뉴스 연합뉴스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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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뉴스 원주초교에 ‘최규하 기념관’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10-12-03
[53] 뉴스 최규하 前 대통령 기념사업회 8일 원주서 창립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54] 서적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55] 뉴스 친일사전 등재 박정희 건국훈장 논란 http://sports.khan.c[...] 경향신문 2009-11-08
[56] 웹인용 신현확 검찰 진술서 http://myweb.jnu.ac.[...] 201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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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웹인용 대한민국 직원록 1952년 http://db.history.go[...] 2008-11-19
[59]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인물과 사상사 2003
[60]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5
[6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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