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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깁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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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밥 깁슨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투수이다. 어린 시절 여러 질병을 앓았지만, 크레이턴 대학교에서 농구 선수로 활동하며 운동 능력을 키웠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 1964년과 1967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68년에는 평균자책점 1.12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고, 통산 251승을 기록했다. 9번의 올스타 선정, 2번의 월드 시리즈 MVP, 9번의 골든 글러브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으며, 1981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0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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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깁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2년의 밥 깁슨
포지션투수
타석우타
투구우투
출생일1935년 11월 9일
사망일2020년 10월 2일
출생지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사망지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데뷔 리그MLB
데뷔일1959년 4월 15일
데뷔 팀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최종 리그MLB
최종일1975년 9월 3일
최종 팀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주요 성적
승패 기록251승 174패
평균 자책점2.91
탈삼진3,117
수상 경력
올스타9회 (1962, 1962², 1965–1970, 1972)
월드 시리즈 우승2회 (1964, 1967)
NL MVP1968년
NL 사이 영 상2회 (1968년, 1970년)
월드 시리즈 MVP2회 (1964년, 1967년)
골드 글러브 상9회 (1965–1973)
NL 최다 승1970년
MLB 평균 자책점 1위1968년
NL 탈삼진 1위1968년
노히트 노런1971년 8월 14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영구 결번45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있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있음
명예의 전당 헌액1981년
명예의 전당 득표율84.0% (첫 투표)
선수 경력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59–1975)
아마추어 경력크레이턴 대학교
코치 경력
뉴욕 메츠 (1981)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82 - 198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5)

2. 어린 시절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깁슨이 태어나기 3달 전, 그의 부친은 결핵으로 사망했다.[1] 어린 시절 구루병, 기관지 천식, 폐렴, 심잡음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4] 스포츠에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야구농구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15살 터울의 형 조시는 깁슨의 멘토이자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5] 오마하 기술 고등학교에서 육상, 농구, 야구 팀에서 활동했다.[7] 고등학교 시절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심장 잡음이 발생하여,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운동을 할 수 있었다. 크레이턴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며 농구 선수로 활약했고,[10] 졸업을 앞두고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농구 팀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야구 팀의 관심을 받았다.[11]

1962년

3. 야구 경력

195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하여 4월 5일 구원 투수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잠시 마이너 리그를 거쳐 7월 30일 선발 투수로 복귀, 메이저 리그 첫 승을 기록했다. 1960년에는 6월 중순까지 카디널스와 마이너 리그를 오가며 3승 6패, 평균자책점 5.61을 기록한 뒤 베네수엘라에서 동계 야구를 했다. 1961년 7월 조니 킨 감독 부임 후 선발 투수로 고정되어 11승 6패,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했다.

깁슨의 메이저 리그 통산 투구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세이브승률이닝피안타홈런볼넷탈삼진평균자책점
1959STL13350.37575.277439483.33
1960STL27360.33386.297748695.61
1961STL3513121.520211.1186131191663.24
1962STL3215131.536233.217415952082.85
1963STL361890.667254.222419962043.39
1964STL4019121.613287.125025862453.01
1965STL3820121.625299.0243341032703.07
1966STL3521120.636280.121020782252.44
1967STL241370.650175.115110401472.98
1968STL342290.710304.219811622681.12
1969STL3520130.606314.025112952692.18
1970STL342370.767294.026213882743.12
1971STL3116130.552245.221514761853.04
1972STL3419110.633278.022614882082.46
1973STL2512100.545195.015912571422.77
1974STL3311130.458240.0236241041293.82
1975STL223102.231109.01201062605.04
통산(17년)5282511746.5913884.13279257133631172.91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깁슨의 메이저 리그 통산 수비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
1959STL1361022.889
1960STL27714031.000
1961STL35143524.961
1962STL32183536.946
1963STL36272850.917
1964STL40243664.909
1965STL38273331.952
1966STL35262824.964
1967STL241923001.000
1968STL34212812.980
1969STL35213235.946
1970STL34223243.931
1971STL31103931.942
1972STL34124613.983
1973STL25112422.946
1974STL33202624.958
1975STL2261532.875
통산(17년)5282914844246.949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굵은 글씨 연도'''는 골드글러브상 수상


1971년 8월 통산 200승과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 200승을,[68] 열흘 뒤 피츠버그 파이리츠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68] 1972년 19승, 통산 9번째이자 마지막 200탈삼진,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했다.[21] 6월 21일 제시 헤인스의 구단 최다 승리 기록을 경신했다.

1974년 7월 17일 월터 존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이자 내셔널 리그 최초로 3,000탈삼진을 기록했다.[72] 1975년 1월 은퇴를 발표, 그해 3승 10패, 평균자책점 5.04를 기록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73][21]

3. 1. 초기 (1957~1961)

1957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하며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깁슨은 3천 달러의 보너스를 받고 카디널스와 계약했지만,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서 농구 선수로도 활동했다.[13] 1959년 4월 15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나, 곧 마이너 리그로 다시 내려갔다. 7월 30일 메이저 리그로 복귀하여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첫 메이저 리그 승리를 완봉승으로 기록했다.[15][16]

1960년 시즌에도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를 오가며 어려움을 겪었다. 6월 중순까지 카디널스와 그들의 로체스터 제휴 팀 사이에서 9이닝을 투구했고,[13] 3승 6패, 5.6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후 시즌이 끝난 뒤 베네수엘라에서 겨울 야구를 하며 기량을 향상시켰다.[17]

1961년 시즌 초반에는 솔리 헤머스 감독에 의해 불펜과 선발을 오갔다.[19] 깁슨은 헤머스 감독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자신과 커트 플러드가 제대로 기용되지 못했다고 밝혔다.[20] 7월, 조니 킨 감독이 부임하면서 깁슨은 선발 투수로 고정되었다. 킨 감독과 깁슨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깁슨은 그해 13승 12패,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21]

깁슨은 팀 동료 빌 화이트, 커트 플러드와 함께 모든 선수들이 같은 클럽하우스와 호텔 객실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에 서명하기 3년 전에 인종 차별을 종식시킨 최초의 스포츠 팀이 되었다.[22]

3. 2. 전성기 (1962~1970)

1962년 5월 말, 깁슨은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기까지 22⅔ 이닝 연속 무실점 투구를 펼쳤다.[24] 그 해 두 번의 올스타전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두 번째 경기에서 2이닝을 던졌다.[25] 시즌 후반에 발목 골절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깁슨은 1962년에 처음으로 200 탈삼진을 기록하는 시즌을 보냈다.[21][26]

1963년 깁슨의 발목 재활은 더딘 과정이었고, 5월 19일까지 단 한 번의 승리만을 기록했다.[27] 깁슨은 그 후 슬라이더와 두 가지 다른 패스트볼 투구를 사용하여 7월 말까지 6연승을 거두었다.[28] 그와 다른 모든 메이저 리그 투수들은 스트라이크 존을 확대한 그 시즌의 규칙 변경으로 인해 혜택을 받았다.[29] 그의 투구 실력에 더해 깁슨은 공격적인 면에서도 활약을 보여 20타점을 기록하여 다른 내셔널 리그 팀의 투수진 전체의 타점 합계를 능가했다.[30] 깁슨의 18승과 스탠 뮤지얼의 은퇴를 앞둔 상황에서 받은 추가적인 동기 부여에도 불구하고, 카디널스는 1위를 6경기 차로 마쳤다.[31]

1963년 시즌 후반의 페넌트 레이스를 바탕으로 1964년 카디널스는 당시 미국에 만연했던 인종적 갈등이 없는 강한 동료애를 발전시켰다.[32][33] 이러한 분위기는 1960년 팀의 스프링 트레이닝 호텔 통합에서 비롯되었으며, 깁슨과 동료 빌 화이트는 팀 내에서 인종 차별적 비방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다.[34] 8월 23일, 카디널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11경기 뒤쳐져 있었고, 9월 21일에는 6경기 반 차로 뒤쳐져 있었다. 이후 카디널스의 9연승과 필리스의 10연패가 이어지면서 시즌은 마지막 경기로 접어들었다. 카디널스는 뉴욕 메츠와 맞붙었고, 깁슨은 5회에 구원 투수로 경기에 들어섰다. 깁슨은 경기에 들어설 당시 필리스가 신시내티 레즈를 4–0으로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4이닝 동안 2안타만 허용하며 구원 투구를 펼쳤으며, 팀 동료들은 11득점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35]

다음으로 그들은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와 맞붙었다. 깁슨은 시리즈 7경기 중 3경기에서 양키스의 선발 투수 멜 스토틀마이어와 맞붙었고, 깁슨은 2차전을 패배하고 5차전에서 승리했다. 7차전에서 깁슨은 2일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지만 9회까지 투구하며 필 린츠와 클리트 보이어에게 홈런을 허용하여 점수는 7–5로 카디널스가 앞섰다. 레이 사데키와 바니 슐츠가 카디널스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가운데, 깁슨은 마지막 아웃을 바비 리처드슨에게서 잡아내며, 카디널스에게 1946년 이후 첫 번째 월드 챔피언십을 안겨주었다. 깁슨은 2승과 함께 31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새로운 월드 시리즈 기록을 세웠다.

깁슨은 1965년 시즌에도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8월에 카디널스가 페넌트 레이스에서 멀어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깁슨이 처음으로 20승을 거둘 수 있는지에 쏠렸다. 깁슨은 시즌 마지막 날, 새로운 카디널스 감독 레드 쇼엔디스트가 많은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준 경기에서 20승을 노렸다. 깁슨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5–2로 꺾고 승리했다.

1966년 시즌은 카디널스를 위해 부시 기념 경기장이 개장하는 해였고 깁슨은 올스타전에서 홈 팬들 앞에서 경기를 펼치도록 선정되었지만, 당시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다.[41]

카디널스는 1967년 시즌 올스타 브레이크 전에 3½ 경기 차로 앞서 나갔고, 깁슨은 1967년 올스타전에서 7회와 8회를 투구했다. 깁슨은 7월 15일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깁슨의 오른 다리에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맞았을 때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대결했다. 다리가 골절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깁슨은 세 명의 타자를 더 상대했고, 결국 오른 종아리뼈가 발목 위에서 부러졌다. 깁슨이 9월 7일에 복귀한 후, 카디널스는 9월 18일에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확보했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10½ 경기 차로 앞섰다.[44]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1967년 월드 시리즈에서 깁슨은 1차전, 4차전(5안타 완봉승), 7차전에서 단 3자책점과 14안타만을 허용했는데, 마지막 두 기록은 1905년 월드 시리즈의 크리스티 매튜슨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1964년과 마찬가지로 깁슨은 7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었고, 상대는 2차전에서 1안타를 허용한 짐 론보그였다. 깁슨은 또한 7차전에서 3–0으로 만드는 홈런을 치며 공격에도 기여했다.[47]

1968년 시즌은 "투수의 해"로 알려지게 되었고, 깁슨은 투수력의 우위를 이끌었다.[49] 그의 평균자책점(ERA)은 1.12로, 라이브볼 시대 기록이자 300이닝 이상을 던진 메이저 리그 기록이었다. 이는 54년 전 더치 레너드의 0.96점 이후 가장 낮은 메이저 리그 ERA였다. 게다가 깁슨은 13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21]

깁슨은 6월과 7월에 치른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모두 승리했고, 매번 완투(그 중 8번은 완봉승)했으며, 108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6점의 자책점(0.50 ERA)만을 허용했다. 깁슨은 이 기간 동안 47 연속 무실점 이닝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메이저 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긴 무실점 기록이었다. 그는 또한 91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며, 2회 연속 NL 이달의 선수를 수상했다.[50] 깁슨은 시즌을 34번의 선발 등판 중 28번의 완투로 마쳤다. 그가 완투하지 못한 경기에서는 대타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깁슨이 시즌 내내 다른 투수로 교체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21]

깁슨은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다. 데니 맥클레인이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면서, 1968년은 지금까지 두 MVP가 모두 투수에게 돌아간 유일한 해로 남아 있으며, 맥클레인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31승 6패를 기록했다.[51]

깁슨은 22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12라는 기록적인 낮은 ERA에도 불구하고 9번의 패배를 기록했는데, 이는 야구 전반에 걸쳐 빈약한 타격이 자신의 팀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68년 카디널스는 1명의 .300 타자를 보유했고, 팀 내 홈런 및 타점 1위는 각각 16개와 79개에 불과했다.[52] 그의 9번의 패배 중 2번은 1–0 경기였고, 그 중 하나는 9월 17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투수 게이로드 페리의 노히터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자이언츠는 1회에 타율이 낮은 론 헌트의 홈런으로 득점했는데, 깁슨이 304⅔이닝 동안 허용한 11개의 홈런 중 하나였다.[53]

1968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깁슨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17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우며 1963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샌디 코팩스가 세운 15개의 기록을 깼다.[54] 그는 또한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각 이닝마다 최소 한 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유일한 투수 중 한 명인 에드 왈시에 합류했는데, 왈시는 1906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이 기록을 세웠다. 9회에 미키 스탠리에게 선두 타자 안타를 허용한 후, 깁슨은 타이거스의 강타자 알 칼라인, Norm Cash, 윌리 호턴을 연이어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했다.[55]

깁슨은 다음 경기인 4차전에 등판하여 타이거스의 에이스 데니 맥클레인을 상대로 10–1로 승리했다. 두 팀은 계속해서 치열하게 싸웠고, 1968년 10월 10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또 다른 승자 독식 7차전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이 경기에서 깁슨은 타이거스 투수 미키 로치와 맞붙었고, 두 투수는 처음 6이닝 동안 상대 팀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7회 초, 깁슨은 처음 두 타자를 아웃시킨 후 두 개의 연속 안타를 허용했다. 디트로이트 타자 짐 노스롭은 중견수 커트 플러드의 머리 위로 2루타를 날렸고, 이로 인해 디트로이트가 시리즈에서 승리했다.

깁슨과 맥클레인의 기록적인 활약에 힘입어 1968년 시즌의 전체 투구 기록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투수 관련 규칙을 변경하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때때로 "깁슨 규칙"으로 알려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1969년에 투수 마운드를 약 38.10cm에서 약 25.40cm로 낮추었고 – 팀들은 이 규칙을 거의 따르지 않았고 리그에서도 시행하지 않았지만 – 스트라이크 존의 높이를 타자의 겨드랑이에서 유니폼 글자로 줄였다.[60]

1969년 깁슨은 20승, 평균자책점 2.18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1970년에는 23승을 거두며 두 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3. 3. 후기 (1971~1975)

1971년 8월 깁슨은 두 가지 중요한 기록을 세웠다. 8월 4일에는 부시 기념 경기장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7-2로 꺾고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68] 열흘 뒤에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팀을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11-0으로 완파했다.[68] 이 경기에서 깁슨은 10개의 삼진을 잡았는데, 마지막 아웃 카운트도 삼진이었다. 또한 5회 희생 플라이로 1점, 8회 안타로 2점을 추가하며 스스로 승리에 기여했다. 이 노히트 노런은 1907년 닉 매독스가 엑스포지션 파크에서 기록한 이후 피츠버그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으며,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의 이전 구장인 포브스 필드에서는 62년 역사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69]

깁슨은 1972년 시즌을 5연패로 시작했지만, 19승을 거두며 시즌을 마감했고, 9번째이자 마지막으로 200탈삼진 시즌을 기록했다. 또한 생애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했다.[21] 6월 21일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제시 헤인스의 구단 최다 승리 기록을 경신했다.

1974년 여름, 깁슨은 연승을 기대했지만, 무릎 부종이 계속되었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월터 존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두 번째로 3,000탈삼진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으며, 내셔널 리그에서는 최초였다. 이 기록의 희생자는 신시내티 레즈의 세자르 헤로니모였다.[72]

1975년 1월, 깁슨은 197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이후 전 부인 샬린과의 이혼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야구를 계속했다고 밝혔다.[73] 그의 마지막 시즌 성적은 3승 10패, 평균자책점 5.04였다.[21]

4. 선수 이후의 경력

1975년 시즌을 마친 후 깁슨은 오마하로 돌아갔다. 카디널스 단장 빙 데바인은 구단 고위 관계자들의 승인이 불확실한 직업을 제안했지만, 깁슨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거절했다. 오마하로 돌아온 깁슨은 지역 은행에서 근무하고, KOWH 라디오 방송국의 주요 투자자로 활동했으며, "Gibson's Spirits and Sustenance" 식당을 운영했다.[88]

1981년, 깁슨은 뉴욕 메츠 감독 조 토리의 제안으로 "태도 코치"라는 직책을 맡아 야구계에 복귀했다.[89] 1982년 토리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감독으로 옮겨가면서 깁슨을 투수 코치로 기용했고, 브레이브스는 1982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카디널스에게 패했다.[90][91] 깁슨은 1984년 시즌까지 브레이브스 코치로 활동했다.[92]

1985년부터 1989년까지 깁슨은 KMOX 라디오 방송국에서 카디널스 경기 전후 쇼를 진행했다.[93] 1990년 ESPN에서 야구 경기 해설을 맡기도 했지만,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문제로 거절했다.[94] 1995년, 깁슨은 다시 토리의 투수 코치로 카디널스에 합류했다.

1975년 9월 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깁슨의 등번호 45번을 영구 결번했다.[97] 1981년 깁슨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98] 1999년 스포팅 뉴스 선정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중 31위에 올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에 선정되었다.[99][100] 그는 세인트루이스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고, 부시 스타디움 외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2013년 오마하의 워너 공원 외부에 또 다른 동상이 세워졌고, 로젠블랫 스타디움 북쪽 거리는 "Bob Gibson Boulevard"로 명명되었다. 2014년 깁슨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07]

5. 사망

2020년 10월 2일, 밥 깁슨은 오마하에서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8] 깁슨은 2019년 7월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 화학 요법 치료를 시작했으나,[117] 1년 넘게 암과 싸운 끝에 결국 호스피스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카디널스 팬들은 부시 스타디움에 있는 깁슨의 동상에 헌화하며 그를 추모했다.[119] 카디널스 구단은 다음 시즌 유니폼에 "45" 추모 패치를 부착하고, 8월 22일을 "밥 깁슨의 날"로 지정하여 깁슨을 기렸다. 이날 행사에는 전 동료 선수들과 깁슨의 가족이 참석하여 경기 전 추모 행사를 가졌다.[120]

깁슨의 장례식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가족장으로 비공개 진행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오마하의 에버그린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121]

6. 수상 경력

수상 내용연도
올스타 선정1962,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2
월드 시리즈 우승1964, 1967
골드 글러브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내셔널 리그 MVP1968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1968, 1970
월드 시리즈 MVP1964, 1967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81



밥 호프(가운데)와 데니 맥클레인(왼쪽)과 함께한 깁슨, ''밥 호프 쇼''. 깁슨과 맥클레인은 1968년 "투수의 해" 시즌을 이끌었다.


1968년 시즌은 "투수의 해"로 알려졌고, 깁슨은 투수 지배의 선두였다.[49] 그의 평균자책점은 라이브볼 시대의 기록 1.12였으며 300이닝 이상을 던진 메이저 리그 기록이다. 이는 54년 전 더치 레너드의 0.96점 이래 최저의 메이저 리그 방어율이었다. 깁슨은 13개의 완봉승을 기록했다.[21]

깁슨은 6월7월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모두 승리했고, 매번 완투(그 중 8번은 완봉승)했으며, 108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6점의 자책점(0.50 ERA)만을 허용했다. 깁슨은 이 기간 동안 47 연속 무실점 이닝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메이저 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긴 무실점 기록이었다. 그는 또한 91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으며, 2회 연속 NL 이달의 선수를 수상하였다.[50] 깁슨은 시즌을 34번의 선발 등판 중 28번의 완투로 마쳤다. 그가 완투하지 못한 경기에서 대타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깁슨이 시즌 내내 다른 투수로 교체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21]

깁슨은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다. 데니 맥클레인이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면서, 1968년은 지금까지 두 MVP가 모두 투수에게 돌아간 유일한 해로 남아 있다.[51]

깁슨은 22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12라는 기록적인 낮은 ERA에도 불구하고 9번의 패배를 기록했는데, 이는 야구 전반에 걸쳐 빈약한 타격이 자신의 팀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68년 카디널스는 1명의 .300 타자를 보유했고, 팀 내 홈런 및 타점 1위는 각각 16개와 79개에 불과했다.[52] 그의 9번의 패배 중 2번은 1–0 경기였고, 그 중 하나는 9월 17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투수 게일로드 페리의 노히터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자이언츠는 1회에 타율이 낮은 론 헌트의 홈런으로 득점했는데, 깁슨이 이닝 동안 허용한 11개의 홈런 중 하나였다.[53]

1968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깁슨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17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우며 1963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샌디 코팩스가 세운 15개의 기록을 깼다.[54] 그는 또한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각 이닝마다 최소 한 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유일한 투수 중 한 명인 에드 왈시에 합류했는데, 왈시는 1906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이 기록을 세웠다. 9회에 미키 스탠리에게 선두 타자 안타를 허용한 후, 깁슨은 타이거스의 강타자 알 칼라인, Norm Cash, 윌리 호턴을 연이어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했다.[55]

깁슨은 다음 경기인 4차전에 등판하여 타이거스의 에이스 데니 맥클레인을 상대로 10–1로 승리했다. 두 팀은 계속해서 치열하게 싸웠고, 1968년 10월 10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또 다른 승자 독식 7차전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이 경기에서 깁슨은 타이거스 투수 미키 로치와 맞붙었고, 두 투수는 처음 6이닝 동안 상대 팀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7회 초, 깁슨은 처음 두 타자를 아웃시킨 후 두 개의 연속 안타를 허용했다. 디트로이트 타자 짐 노스롭은 중견수 커트 플러드의 머리 위로 2루타를 날렸고, 이로 인해 디트로이트가 시리즈에서 승리했다.

깁슨과 맥클레인의 업적에 힘입어 1968년 시즌의 전체 투구 기록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투수 관련 규칙을 변경하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때때로 "깁슨 규칙"으로 알려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1969년에 투수 마운드를 약 38.10cm에서 약 25.40cm로 낮추었고, 스트라이크 존의 높이를 타자의 겨드랑이에서 유니폼 글자로 줄였다.[60]

깁슨의 등번호 45번은 1975년 9월 1일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97] 그는 1981년에 첫 번째 투표에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98]

1999년, 그는 ''더 스포팅 뉴스'' 목록에서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중 31위에 랭크되었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에 선출되었다.[99][100]

7. 선수로서의 특징

깁슨은 폭발적인 투구 동작으로 마운드에서 빠르게 공을 던졌으며, 공을 던질 때마다 1루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그는 정교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낮고 3/4 지점에서 공을 던지는 팔 각도를 사용했다. 그의 구종은 슬라이더와 투심 패스트볼, 포심 패스트볼을 구사했다.[2]

그는 치열한 경쟁심을 가진 선수로, 스트라이크 존을 장악하고 타자를 위협하기 위해 빈볼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동시대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돈 드라이스데일과 비슷했다.[2][83] 하지만 그는 고의로 타자를 맞추는 경우는 드물었다. 드라이스데일이 통산 154명의 타자를 맞춘 것에 비해, 깁슨은 더 많은 타자를 상대했음에도 102명만을 맞혔다.[21] 게다가 드라이스데일은 5번이나 리그에서 최다 사구를 기록했지만, 깁슨은 단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고, 3위 안에 든 적도 한 번뿐이었다.[84]

그는 위압적인 선수로 명성을 얻었지만, 깁슨은 동료들이 그에 대해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에 종종 반박하며,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특별히 노력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투구할 때 찡그리는 유일한 이유는 시력이 좋지 않아 포수의 사인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며, 투구할 때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85]

깁슨은 또한 상대 선수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1965년 올스타전에서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포수 조 토레가 9회에 깁슨의 공을 받았는데, 경기 후 그가 깁슨의 투구를 칭찬하자 깁슨은 그를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고 떠났다.[2] 그는 또한 때때로 팀 동료, 특히 포수에게 무뚝뚝하게 대했다. 팀 맥카버가 한 번 마운드에 올라와 상의하자 깁슨은 그를 무시하며 "투구에 대해 네가 아는 거라고는 치기 어렵다는 것뿐이야."라고 말했다.[86]

투구 후 1루 측으로 크게 넘어지는 호쾌한 투구 폼에서 나오는 강속구와, 거친 몸쪽 승부를 무기로 하는 스타일을 구사했다. 타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자세와 거친 성격 때문에 "'''Hoot'''"라는 별명을 얻었다. 원래 제구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구나 머리 근처를 노리는 빈볼로 의심되는 투구가 많아 "'''헤드헌터'''"라고 불렸다. 스리쿼터에서 일품인 커브에 더해, 속구구속이 거의 변하지 않는 슬라이더도 던졌다.[122] 특히 기브슨과 돈 드라이스데일의 대기록(58.2이닝 연속 무실점)이 있던 1968년에는, 행크 아론이 "하드 슬라이더가 들어갈 때의 기브슨은 전능하신 신(God almighty)"이라고 말할 정도였다.[124] 수비도 매우 뛰어나, 골드글러브상의 단골 수상자이기도 했다.[122] 타자로서의 능력도 뛰어나, 통산 24홈런, 144타점, 13도루를 기록했다. 종종 대타나 대주자로도 기용되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통산 9경기에 등판하여, 그 중 8경기를 완투, 81이닝을 던져 7승 2패, 평균자책점 1.89를 기록했다. 1964년부터 1968년에 걸쳐서는 7연승을 기록했다. 타자로서도 2홈런을 기록했다.

투수로서의 구종은 라이징 패스트볼(떠오르는 듯한 속구), 슬라이더, 싱킹 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이었다. 투구 폼은 스리쿼터였다.

메이저 리그 통산 투수 기록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59STL139210350--.37533375.27743921484035283.331.53
19602712200360--.33339986.29774861693061545.611.67
19613527102013121--.520916211.118613119761668191763.241.44
19623230155115131--.536967233.2174159591020811084742.851.15
1963363314201890--.6671088254.2224199611320461110963.391.26
19644036172219121--.6131191287.125025869924560106963.011.17
19653836206120121--.6251233299.024334103611270811101023.071.16
19663535205021120--.6361119280.121020785522512090762.441.03
1967242410211370--.650703175.11511040331473162582.981.09
19683434281362290--.7101161304.21981162672684049381.120.85
19693535284020130--.6061270314.025112957102694284762.181.10
1970343423322370--.7671213294.0262138894274511111023.121.19
19713131205216130--.5521026245.2215147611718510096833.041.18
19723434234119110--.6331119278.0226148811320810283762.461.13
19732525131112100--.545790195.01591257631426171602.7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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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17년52848225556172511746--.591160683884.132792571336118102311710813142012582.911.19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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