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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월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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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4년 월드 시리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뉴욕 양키스를 4승 3패로 꺾고 우승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마지막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1950년대 뉴욕 양키스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흑인 및 라틴계 선수 영입에 대한 내셔널 리그의 증가하는 열정을 보여주며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밥 깁슨은 2승 1패, 3.00 평균자책점, 31개의 탈삼진으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이 시리즈는 뉴욕 양키스 왕조의 몰락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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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월드 시리즈
월드 시리즈 정보
연도1964년
정식 명칭제61회 월드 시리즈 (61st World Series)
국가세계
우승 팀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4승)
우승 팀 리그NL
우승 팀 약칭STL
우승 횟수18년 만에 10번째 우승
우승 팀 감독조니 킨
우승 팀 시즌 성적93승 69패, 승률 .574, GA: 1
준우승 팀뉴욕 양키스 (3승)
준우승 팀 리그AL
준우승 팀 약칭NYY
준우승 횟수5년 연속 29번째
준우승 팀 감독요기 베라
준우승 팀 시즌 성적99승 63패, 승률 .611, GA: 1
경기 날짜10월 7일–15일
경기 장소부시 스타디움 (세인트루이스)
양키 스타디움 (뉴욕)
MVP밥 깁슨 (세인트루이스)
텔레비전 중계NBC
텔레비전 중계 해설해리 캐리 & 커트 가우디 (세인트루이스)
필 리주토 & 조 가라지올라 (뉴욕)
라디오 중계NBC
라디오 중계 해설조 가라지올라 & 필 리주토 (세인트루이스)
커트 가우디 & 해리 캐리 (뉴욕)
심판프랭크 세코리 (NL), 빌 매킨리 (AL), 켄 버크하트 (NL), 행크 소어 (AL), 비니 스미스 (NL), 앨 스미스 (AL)
명예의 전당 선수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루 브록
밥 깁슨
뉴욕 양키스:
요기 베라 (감독)
화이티 포드
미키 맨틀
총 관중7경기 합계: 32만 1807명
경기당 평균 관중4만 5972명
우승 팀 선수 분배 금액선수 1인당 8622.19달러
준우승 팀 선수 분배 금액선수 1인당 5309.29달러

2. 배경

1964년 월드 시리즈와 그 이전 시즌은 이후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964년 10월''의 주제가 되었다. 이 시리즈는 맨틀, 매리스, 포드, 베라 등 1950년대 뉴욕 양키스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같이 흑인 및 라틴계 선수 영입에 적극적이었던 내셔널 리그 팀들의 성공이 챔피언십 팀 구성 방식에 있어 영구적인 패러다임 전환이었음을 보여주면서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시리즈에서는 카디널스의 3루수 켄 보이어와 양키스의 3루수 클리트 보이어 형제가 맞대결을 펼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1]

또한,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6명의 심판 모두가 포지션을 번갈아 가며 맡았다. 1947년부터 1963년까지의 시리즈에서는 내야 심판 4명만 포지션을 교대했고, 나머지 2명의 심판은 시리즈 전체 기간 동안 외야에서만 활동했다.

미키 맨틀은 자신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가 된 이 시리즈에서 홈런 3개를 추가하여, 통산 18개로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종전 기록(15개)을 넘어섰다.

한편, 유틸리티 내야수 체트 트레일은 이전에 메이저 리그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니 쿠벡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트레일은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고(필 린즈가 쿠벡 대신 출전), 결국 선수 경력 동안 단 한 번의 메이저 리그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2]

양 팀 감독이었던 요기 베라(양키스)와 조니 킨(카디널스)은 모두 세인트루이스 출신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향팀인 카디널스에서 선수로 뛴 경험은 없었다. 베라는 선수 생활 전체를 뉴욕에서 보냈고, 킨은 카디널스의 팜 시스템 소속이었으나 선수로서는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2. 1. 뉴욕 양키스

1963년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양키스는 1964년 투수력이 강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떠오르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8월 22일, 양키스는 1위와 5.5 게임 차이로 3위에 머물렀다. 최근에 콜업된 투수 멜 스토틀마이어 (9승 3패)를 중심으로, 그리고 클리블랜드에서 뉴욕으로 트레이드 된 후 2승 0패, 7세이브를 기록한 페드로 라모스를 영입한 후, 양키스는 27승 8패를 기록하며 5경기를 남겨두고 3.5 게임 차이로 선두를 굳혔다. 디트로이트에서 두 경기를 진 후, 양키스는 시즌 마지막 날 바로 전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8-3으로 꺾고 페넌트를 확정했다.

2. 2.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63년 내셔널 리그 2위를 차지했던 카디널스는 1964년 뉴욕 양키스보다 더 극적인 과정을 거쳐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시즌 내내 카디널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필라델피아 필리스, 신시내티 레즈와 치열한 4파전을 벌였다. 시즌 막바지, 필리스는 12경기를 남겨두고 6.5경기 차로 앞서며 우승이 유력해 보였으나, 이후 10연패에 빠지며 큰 위기를 맞았다.

시즌 종료 2경기를 남겨둔 시점까지도 네 팀 모두에게 우승 가능성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10월 3일 컵스에게 10-7로 패배하며 가장 먼저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다. 같은 날 카디널스는 약체 뉴욕 메츠에게 15-5로 대패했고, 필리스는 레즈를 4-3으로 꺾고 10연패에서 벗어났다.

시즌 마지막 날, 카디널스와 레즈는 공동 선두였고 필리스는 1경기 차로 그 뒤를 쫓고 있었다. 필리스는 레즈를 이기고, 동시에 메츠가 카디널스를 꺾어주기를 바라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첫 3자 동률 타이브레이커 상황을 기대했다. 필리스는 레즈를 10-0으로 대파하며 자신들의 역할을 해냈지만, 카디널스가 뉴욕 메츠를 상대로 초반 3-2 열세를 극복하고 11-5로 승리하면서 극적으로 내셔널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한편, 시즌 중반 카디널스는 시카고 컵스와 선수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외야수 루 브록을 영입하고 투수 어니 브로글리오 등을 내주었는데, 이 브록-브로글리오 트레이드는 훗날 야구 역사상 가장 불균형적인 트레이드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된다.

3. 시리즈 결과

1964년 월드 시리즈는 10월 7일부터 10월 15일까지 총 7경기로 치러졌으며, 내셔널 리그 챔피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뉴욕 양키스를 4승 3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날짜경기원정팀 (선공)점수홈팀 (후공)개최 구장
10월 7일 (수)1차전뉴욕 양키스5-9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부시 스타디움
10월 8일 (목)2차전뉴욕 양키스8-3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0월 9일 (금)이동일
10월 10일 (토)3차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2뉴욕 양키스양키 스타디움
10월 11일 (일)4차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4-3뉴욕 양키스
10월 12일 (월)5차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5-2 (10)뉴욕 양키스
10월 13일 (화)이동일
10월 14일 (수)6차전뉴욕 양키스8-3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부시 스타디움
10월 15일 (목)7차전뉴욕 양키스5-7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우승: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4승 3패 / 18년 만에 7번째)



'''시리즈 요약'''

3. 1. 1차전 (10월 7일, 부시 스타디움)

1964년 10월 7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홈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뉴욕 양키스를 9-5로 꺾었다. 승리 투수는 레이 사데키, 패전 투수는 와이티 포드, 세이브는 바니 슐츠가 기록했다. 양키스의 톰 트레쉬와 카디널스의 마이크 섀넌이 홈런을 기록했다.[3][30]

1964년 월드 시리즈 1차전 결과
123456789RHE
뉴욕 양키스 (NYY)0300100105122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STL)11000403X9120
colspan=13 style="text-align:left;" |



6회 동점 2점 홈런을 친 마이크 섀넌


카디널스는 스카우팅 보고서를 통해 미키 맨틀의 부상이 수비에 영향을 미쳐 추가 진루가 가능하다는 점과, 와이티 포드를 상대로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점을 파악했다.[10][12] 이러한 전략은 효과를 보아, 카디널스 타자들은 여러 차례 추가 베이스를 얻어냈고[11], 레이 사데키, 칼 워윅, 마이크 섀넌 등은 타석 초반에 안타를 만들어내며 타점을 올렸다.[12]

경기는 1회말 카디널스가 켄 보이어의 희생 플라이로 선취점을 뽑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2회초 양키스의 톰 트레쉬가 레이 사데키를 상대로 2점 홈런을 터뜨려 2-1로 역전했고, 이어진 클리트 보이어의 안타와 도루, 포드의 적시타로 3-1까지 달아났다. 카디널스도 2회말 마이크 섀넌의 안타와 사데키의 적시타로 한 점을 만회하며 3-2로 추격했다.

5회초 양키스가 트레쉬의 1타점 2루타로 4-2로 점수 차를 벌렸지만, 카디널스는 6회말 대거 4점을 뽑아내며 경기를 뒤집었다. 섀넌이 동점 2점 홈런을 쏘아 올렸고, 팀 맥카버의 2루타 이후 마운드에 오른 양키스 구원 투수 알 다우닝을 상대로 칼 워윅과 커트 플러드가 연속 적시타를 터뜨려 6-4로 역전에 성공했다.

양키스는 8회초 조니 블랜차드의 2루타와 바비 리처드슨의 적시타로 6-5까지 따라붙었으나, 카디널스는 8회말 볼넷 2개와 상대 실책으로 만든 만루 기회에서 플러드의 적시타와 루 브록의 2타점 2루타로 3점을 추가하며 9-5로 달아나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9회초 바니 슐츠가 양키스 타선을 삼자범퇴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하고 세이브를 기록했다.

양키스 선발 와이티 포드는 1964년 시즌 내내 팔 통증과 감각 마비 증세로 고생했으며, 이날 경기에서도 통증을 느끼며 자신의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특히 6회 섀넌에게 맞은 동점 홈런은 포드가 던진 슬라이더였다.[13] 이 경기는 포드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 등판이 되었다. 포드는 양키스 소속으로 총 22번의 월드 시리즈 경기에 등판하여 10승을 거두었으며, 1960년부터 1962년까지 기록한 33⅔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은 여전히 월드 시리즈 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3. 2. 2차전 (10월 8일, 부시 스타디움)

1964년 10월 8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렸다.[4] 경기 시간은 2시간 29분이었고, 30,805명의 관중이 경기를 지켜보았다.[4]

멜 스토틀마이어


경기 결과
123456789RHE
뉴욕 양키스0001012048120
세인트루이스001000011370


  • '''승리 투수''': 멜 스토틀마이어 (1–0)
  • '''패전 투수''': 밥 깁슨 (0–1)
  • '''홈런''': NYY – 필 린츠 (1) (9회 1점)


카디널스의 에이스 밥 깁슨은 시즌 후반 등판 부담으로 1차전을 건너뛰고 2차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8이닝 동안 4실점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반면,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8월에 마이너 리그에서 승격된 신인 우완 멜 스토틀마이어였다. 스토틀마이어는 7개의 안타를 허용하며 3실점했지만,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12]

경기는 3회 말 카디널스가 먼저 점수를 냈다. 주자 2, 3루 상황에서 커트 플러드의 땅볼 타점으로 1-0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양키스는 4회 초 클리트 보이어의 만루 희생 플라이로 즉시 1-1 동점을 만들었다. 6회 초, 양키스는 볼넷과 몸에 맞는 공으로 만든 기회에서 톰 트레쉬의 적시타로 2-1 역전에 성공했다.

7회 초 양키스는 추가점을 뽑았다. 선두 타자 필 린츠가 안타로 출루한 뒤 폭투로 3루까지 진루했고, 바비 리차드슨의 적시타로 홈을 밟았다. 리차드슨 역시 단타 후 3루까지 진루했고, 미키 맨틀의 땅볼 때 득점하며 점수는 4-1로 벌어졌다.

카디널스는 8회 말 루 브록의 땅볼 타점으로 1점을 만회하며 4-2로 추격했다. 하지만 양키스는 9회 초 대량 득점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선두 타자 린츠가 솔로 홈런을 터뜨려 5-2를 만들었다. 이후 1사 상황에서 구원 등판한 바니 슐츠를 상대로 미키 맨틀이 적시 2루타를 쳤고, 고의 사구 후 조 페피톤의 적시타와 트레쉬의 희생 플라이가 이어지며 양키스는 8-2까지 달아났다.

카디널스는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딕 그로트의 선두 타자 3루타와 팀 맥카버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붙었지만, 스토틀마이어는 이후 두 타자를 범타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최종 스코어 8-3으로 양키스가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은 1승 1패 동률이 되었고, 양 팀은 뉴욕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3. 3. 3차전 (10월 10일, 양키 스타디움)

'''1964년 10월 10일 토요일 — 양키 스타디움, 브롱크스, 뉴욕'''
123456789RHE
세인트루이스000010000160
뉴욕 양키스010000001252
colspan="13" style="text-align:left;" |



미키 맨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발 커트 시몬스뉴욕 양키스의 선발 짐 보튼은 효과적인 투구를 펼치며 투수전을 벌였다. 시몬스는 17개의 땅볼 아웃을 유도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양키스는 2회말 클리트 보이어2루타로 선취점을 얻었으나, 5회초 카디널스 선발 투수 시몬스가 직접 적시타를 쳐 경기는 1-1 동점이 되었다. 보튼은 여러 차례 실점 위기를 넘겼고, 특히 카디널스 상위 타선을 21타수 2안타로 막아내는 등 효과적으로 봉쇄했다.[12]

9회말, 1-1 동점 상황에서 양키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두 타자로 나선 미키 맨틀은 다음 타자 엘스턴 하워드에게 자신이 홈런을 칠 것이라고 예고했다는 일화가 있다.[14] 맨틀은 카디널스의 구원 투수 바니 슐츠의 초구 너클볼을 받아쳐[12]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며 양키스에게 2-1 승리를 안겼다. 슐츠는 시즌 막판 카디널스의 상승세를 이끈 핵심 불펜 투수였으나, 양키스 측은 스카우팅 리포트를 통해 그가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던지는 너클볼이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쉽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홈런은 맨틀의 월드 시리즈 통산 16번째 홈런으로,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종전 월드 시리즈 최다 홈런 기록(15개)을 경신하는 것이었다.

3. 4. 4차전 (10월 11일, 양키 스타디움)

켄 보이어


1964년 10월 11일, 미국 뉴욕주 뉴욕 브롱크스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4차전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를 4-3으로 꺾었다.[6]

세인트루이스의 선발 투수 레이 사데키는 1회말 시작과 함께 양키스의 첫 네 타자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선두 타자 필 린츠의 2루타에 이어 바비 리처드슨이 적시 2루타를 쳐 양키스가 1-0으로 앞서 나갔다. 계속된 공격에서 미키 맨틀의 적시타로 점수는 2-0이 되었고, 결국 사데키는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구원 등판한 로저 크레이그는 엘스턴 하워드에게 적시타를 맞아 3점째를 내주었지만, 이후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5회까지 양키스가 3-0으로 리드했고,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양키스 선발 알 다우닝에게 단 1안타로 묶여 있었다.

경기의 흐름을 바꾼 것은 6회초 세인트루이스의 공격이었다. 대타로 나선 칼 워윅이 안타를 치고 나갔고, 커트 플러드가 다시 안타를 쳐 1사 1, 2루 기회를 만들었다. 딕 그로트의 땅볼 타구를 양키스 2루수 바비 리처드슨이 처리하지 못하는 실책을 범하면서 병살로 이닝이 끝날 수 있었던 상황은 1사 만루의 절호의 기회로 바뀌었다.

타석에는 1차전에서 다우닝에게 삼진을 당했던 켄 보이어가 들어섰다. 보이어는 다우닝의 높은 체인지업을 예상하고 타격했고, 이는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역전 만루 홈런으로 이어졌다. 스코어는 순식간에 4-3으로 뒤집혔다. 이후 세인트루이스는 론 테일러가 크레이그에 이어 등판하여 마지막 4이닝을 단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세이브를 기록했다.[30]

승리 투수는 로저 크레이그, 패전 투수는 알 다우닝, 세이브는 론 테일러에게 돌아갔다. 켄 보이어의 극적인 만루 홈런 덕분에 세인트루이스는 시리즈 전적을 2승 2패 동률로 만들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3. 5. 5차전 (10월 12일, 양키 스타디움)

팀 맥카버


1964년 10월 12일 월요일 오후 1시(ET), 미국 뉴욕주 뉴욕 브롱크스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5차전은 연장 10회 접전 끝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를 5-2로 꺾었다.[7]

12345678910RHE
세인트루이스00002000035101
뉴욕 양키스0000000020262
승리 투수: 밥 깁슨 (1-1)    패전 투수: 피트 미켈슨 (0-1)
홈런STL: 팀 맥카버 (10회 3점)    NYY: 톰 트레쉬 (9회 2점)



5회 초, 카디널스는 선발 투수 밥 깁슨의 안타로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 타자 커트 플러드의 땅볼 때 2루수 바비 리처드슨이 실책을 저질러 병살 플레이 기회가 무산되었고, 주자 두 명이 살아나갔다. 이전 14타석에서 안타가 없던 루 브록이 적시타를 쳐 깁슨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이어진 빌 화이트의 땅볼 때 유격수 필 린츠가 송구 실책을 범하면서 플러드까지 득점하여 카디널스가 2-0으로 앞서나갔다.[15]

양키스는 2-0으로 뒤진 9회 말 반격에 나섰다. 선두 타자 미키 맨틀이 유격수 딕 그로트의 실책으로 출루했다. 1사 1루 상황에서 조 페피톤은 밥 깁슨의 다리를 맞고 3루 선상으로 굴러가는 강한 타구를 쳤다. 깁슨은 재빨리 공을 잡아 1루로 송구하여 아웃 카운트를 늘렸고, 카디널스는 승리까지 아웃 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두었다.[16] 그러나 2사 주자 2루 상황에서 톰 트레쉬가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극적인 동점 2점 홈런을 터뜨려 경기는 연장전으로 향했다.

연장 10회 초, 카디널스는 다시 리드를 잡았다. 1사 주자 1, 2루 상황에서 좌타자 팀 맥카버가 타석에 들어섰다. 양키스 감독 요기 베라는 좌완 전문 구원 투수 스티브 해밀턴을 기용하는 대신 우완 투수 피트 미켈슨을 마운드에 올렸다.[17] 맥카버는 미켈슨을 상대로 결승 3점 홈런을 쏘아 올렸고, 카디널스는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서며 홈 구장인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게 되었다.[12] 당시 22세였던 맥카버는 이 시리즈에서 23타수 11안타(타율 .478)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참고로 맥카버의 통산 타율은 .271이다.

이 경기는 1973년 시즌 후 재건축되기 전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기였다. 또한, 이 경기는 2024년 8월 31일까지 카디널스가 양키스를 상대로 거둔 마지막 원정 승리이기도 했다. 경기 시간은 2시간 37분이었고, 관중 수는 65,633명이었다.[7]

3. 6. 6차전 (10월 14일, 부시 스타디움)

1964년 10월 14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렸다.[8]

로저 매리스(왼쪽)와 미키 맨틀(오른쪽)


1회말, 세인트루이스는 주자 1, 3루 상황에서 빌 화이트의 병살타로 선취점을 얻었다. 그러나 뉴욕 양키스는 5회초, 선두 타자 톰 트레쉬의 2루타와 2사 후 짐 보튼이 커트 시몬스를 상대로 적시타를 쳐 동점을 만들었다.

6회초에는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이 연속 홈런(백투백 홈런)을 터뜨리며 뉴욕 양키스가 3-1로 경기를 뒤집었다. 8회초, 뉴욕 양키스는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2사 주자 2명 상황에서 엘스턴 하워드가 바니 슐츠를 상대로 적시타를 쳐 4-1로 점수 차를 벌렸다. 이어진 볼넷으로 만루가 되자, 세인트루이스는 투수를 고디 리처드슨으로 교체했지만, 조 페피톤이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점수는 8-1까지 벌어졌다.

세인트루이스는 8회말 무사 2, 3루에서 빌 화이트의 땅볼 타점으로 1점을 만회했고, 9회말에는 밥 스키너가 스티브 해밀턴을 상대로 주자 2명을 두고 적시타를 쳐 1점을 더 따라붙었다. 하지만 다음 타자 커트 플러드가 병살타를 치면서 경기는 뉴욕 양키스의 8-3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로 시리즈는 최종 7차전으로 향하게 되었다.

3. 7. 7차전 (10월 15일, 부시 스타디움)

NYY: 미키 맨틀 (3, 6회 3점), 클리트 보이어 (1, 9회 1점), 필 린즈 (2, 9회 1점)
STL: 루 브록 (1, 5회 1점), 켄 보이어 (2, 7회 1점)



밥 깁슨


1963년 월드 시리즈에서 다저스에게 패배한 양키스는 1921년-22년 뉴욕 자이언츠에게 연패한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패배 위기에 놓였다. 반면 카디널스는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밥 깁슨은 이틀 휴식 후 시리즈 3번째 선발 등판에 나섰다. 그는 피로감을 느꼈지만, 이를 양키스에게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빠르게 투구했다.[18] 4회 말, 카디널스는 3점을 먼저 얻었다. 필 린즈의 1루 송구 실책으로 양키스는 병살 플레이 기회를 놓쳤고, 그 사이 빌 화이트가 득점했다. 이어 팀 맥카버가 3루 주자 딕 그로트와 함께 더블 스틸을 성공시키며 추가점을 올렸다.[11][19] 5회에는 선발 멜 스토틀마이어가 어깨 통증으로 알 다우닝과 교체되었고,[20] 루 브록은 다우닝의 초구를 받아쳐 홈런을 기록했다. 카디널스는 이 회에 2점을 더 추가하며 점수 차를 6-0으로 벌렸다.

양키스는 6회 초 미키 맨틀의 3점 홈런으로 추격을 시작하며 점수를 6-3으로 좁혔다. 이 홈런으로 맨틀은 자신의 월드 시리즈 통산 홈런 기록을 더 늘렸다. 하지만 카디널스의 켄 보이어는 7회 말 솔로 홈런으로 응수하며 점수를 7-3으로 다시 벌렸다. 양키스의 보비 리처드슨은 7회에 안타를 추가하며 단일 월드 시리즈 13안타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이후 1968년 브록, 1986년 마티 바렛과 타이를 이루었다.) 깁슨은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조니 케인 감독은 그를 교체하지 않고 계속 마운드를 지키게 했다.[21]

9회 초, 양키스는 마지막 반격에 나섰다. 1사 후 켄 보이어의 동생인 클리트 보이어가 홈런을 쳐 7-4를 만들었다. 대타 조니 블랜차드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필 린즈가 다시 홈런을 터뜨리며 7-5, 2점 차까지 따라붙었다. 그러나 다음 타자 리처드슨이 2루수 달 맥스빌에게 팝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나면서 경기는 카디널스의 승리로 끝났다.

완투승을 거둔 밥 깁슨은 시리즈 2승 1패, 평균자책점 3.00, 27이닝 동안 31탈삼진을 기록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양키스 투수 짐 부턴은 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모두 승리하고 시리즈 평균자책점 1.56을 기록했으며, 6년 후 야구 회고록 ''볼 포''를 집필했다. 시리즈 종료 후 양키스는 요기 베라 감독을 해고하고, 카디널스 감독이었던 조니 케인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케인은 카디널스 구단주 거시 부시와의 불화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요기 베라는 다음 시즌 뉴욕 메츠에 선수 겸 코치로 합류하여 케이시 스텡겔과 재회했다.

시리즈 MVP 투표에서 깁슨에 이어 2위를 차지한 팀 맥카버는 시리즈 타율 .478, 11안타, 5타점, 1홈런, 4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1964년 카디널스는 1962년 월드 시리즈1972년 월드 시리즈 사이 기간 동안 홈 필드 어드밴티지를 가진 팀 중 유일하게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되었다.

이 7차전 경기는 초대 부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기였다. 세인트루이스에서의 다음 월드 시리즈 경기는 1967년 월드 시리즈에서 카디널스가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우승했을 때, 전 시즌에 개장한 부시 기념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4. 시리즈 MVP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투수 밥 깁슨이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깁슨은 시리즈 동안 3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2승 1패, 3.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27이닝 동안 31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활약을 펼쳤다.

같은 팀의 팀 맥카버는 MVP 투표에서 깁슨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맥카버는 시리즈에서 .478의 높은 타율과 함께 11안타, 5타점, 1홈런, 4득점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

5. 의의 및 영향

1964년 월드 시리즈와 그 이전 시즌은 이후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964년 10월''의 주제가 되었다. 이 시리즈는 맨틀, 매리스, 포드, 베라 등이 이끈 1950년대 뉴욕 양키스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처럼 흑인 및 라틴계 선수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내셔널 리그의 변화가 성공적인 팀 구성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임을 증명하며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리즈에서는 카디널스의 3루수 켄 보이어와 양키스의 3루수 클리트 보이어 형제가 맞붙는 진풍경이 펼쳐졌다.[1] 또한,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6명의 심판 모두가 포지션을 번갈아 가며 맡았다. 이전 1947년부터 1963년까지의 시리즈에서는 내야 심판 4명만 교대로 투입되고, 나머지 2명은 시리즈 내내 외야에만 고정되었다.

미키 맨틀은 자신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가 된 이 대회에서 홈런 3개를 추가하며, 베이브 루스의 15개를 넘어선 통산 18개의 월드 시리즈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다.

한편, 양키스의 유틸리티 내야수 체트 트레일은 이전 메이저 리그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니 쿠벡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월드 시리즈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트레일은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고(필 린즈가 쿠벡 대신 주로 출전), 결국 선수 생활 동안 단 한 경기의 메이저 리그 경기도 뛰지 못했다.[2]

시리즈 종료 후, 카디널스의 감독 조니 킨은 사임했고, 양키스는 감독 요기 베라를 해임했다. 베라는 이후 코치 겸 선수로 케이시 스텡걸이 감독을 맡고 있던 뉴욕 메츠로 이적했다. 놀랍게도 양키스의 새 감독으로는 불과 며칠 전까지 양키스를 꺾은 상대 팀 카디널스의 감독이었던 킨이 선임되었다. 킨은 구단주 오거스트 부시와의 갈등으로 인해 시리즈 결과와 상관없이 시즌 후반부터 이미 사임을 결심한 상태였다. 그는 선수들이 우승 후 샴페인 샤워를 즐기는 동안, 축하와 재계약 논의를 위해 찾아온 구단주에게 9월 말에 작성해 둔 사표를 제출했다. 한편, 양키스 구단은 신인 감독으로 팀을 리그 우승까지 이끈 베라의 지도력에 대해 내부적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고, 킨의 사임 의사 또한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를 차기 감독 후보 1순위로 고려하고 있었다. 킨이 공식적으로 카디널스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양키스는 다른 구단에 킨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베라를 즉시 해임하고 킨을 감독으로 영입하는 발 빠른 결정을 내렸다.

흥미롭게도, 양 팀의 감독이었던 베라와 킨은 모두 세인트루이스 출신이었지만, 정작 고향팀인 카디널스에서 선수로 뛴 경험은 없었다. 베라는 선수 생활 전체를 뉴욕 양키스에서 보냈고, 킨은 카디널스 팜 시스템 출신이었지만 선수로서는 메이저 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6. 기타

1964년 월드 시리즈와 그 이전 시즌은 이후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964년 10월''의 주제가 되었다. 이 시리즈는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지는데, 맨틀, 매리스, 포드, 베라 등이 활약했던 1950년대 뉴욕 양키스 왕조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같이 흑인 및 라틴계 선수를 적극적으로 영입한 내셔널 리그 팀들의 성공이 챔피언십 팀 구성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었음을 시사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카디널스의 켄 보이어와 양키스클리트 보이어 형제가 각 팀의 3루수로 맞붙는 진풍경이 펼쳐졌다.[1]

또한,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6명의 심판 모두가 포지션을 번갈아 가며 맡았다. 1947년부터 1963년까지의 시리즈에서는 내야 심판 4명만 교대로 투입되고, 나머지 2명의 심판은 시리즈 내내 외야에만 머물렀다.

미키 맨틀은 자신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가 된 이 대회에서 홈런 3개를 추가하며 통산 18개로 베이브 루스의 종전 기록(15개)을 넘어섰다.

양키스의 유틸리티 내야수 체트 트레일은 이전 메이저 리그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토니 쿠벡의 부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월드 시리즈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트레일은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고(필 린즈가 쿠벡을 대신해 출전했다), 결국 선수 생활 동안 단 한 경기의 메이저 리그 경기도 뛰지 못했다.[2]

양 팀 감독인 요기 베라(양키스)와 조니 키인(카디널스)은 모두 세인트루이스 출신이었지만, 정작 고향팀인 카디널스에서는 선수로 뛴 경험이 없었다. 베라는 선수 생활 전체를 뉴욕에서 보냈고, 키인은 카디널스 팜 시스템 출신이지만 선수로서는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참조

[1] 뉴스 The Ultimate Sibling Rivalry: 8 Sets of Brothers Who Faced Off in Sports Championships https://www.biograph[...] 2023-02-09
[2] 웹사이트 A's Notebook: Kiger Arrives http://www.sfgate.co[...] San Francisco Chronicle 2006-10-13
[3]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1 – New York Yankees vs. St. Louis Cardinal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4]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2 – New York Yankees vs. St. Louis Cardinal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5]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3 – St. Louis Cardinals vs. New York Yankee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6]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4 – St. Louis Cardinals vs. New York Yankee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7]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5 – St. Louis Cardinals vs. New York Yankee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8]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6 – New York Yankees vs. St. Louis Cardinal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9] 웹사이트 1964 World Series Game 7 – New York Yankees vs. St. Louis Cardinals http://www.retroshee[...] Retrosheet 2009-09-13
[10] 문서 Halberstam 318
[11] 뉴스 Speed Won the World Series https://archive.toda[...] Sports Illustrated 1964-10-26
[12] 뉴스 An Even Series—With Some Fresh Faces https://archive.toda[...] Sports Illustrated 1964-10-19
[13] 문서 Halberstam 320
[14] 문서 Halberstam 329
[15] 문서 Halberstam 339
[16] 문서 Halberstam 340
[17] 문서 Halberstam 340–1
[18] 문서 Halberstam 345
[19] 문서 Halberstam 347
[20] 문서 Halberstam 348
[21] 문서 Halberstam 349
[22] 웹사이트 World Series Gate Receipts and Player Shares http://www.baseball-[...] Baseball Almanac 2009-06-14
[23] 웹사이트 World Series Gate Receipts http://www.baseball-[...] 2018-12-22
[24] 문서 殿堂入りは指導者としてではなく、二塁手としての功績が評価されてのもの。
[25] 문서 殿堂入りは監督としてではなく、捕手としての功績が評価されてのもの。
[26] 뉴스 A look at all 15 walk-off home runs in World Series history https://www.cbssport[...] CBSSports.com 2018-12-24
[27] 뉴스 Mickey Mantle's 1964 World Series jersey sold at auction for $1.32M http://www.espn.com/[...] ESPN.com 2018-12-24
[28] 간행물 October 15, 1964: Bob Gibson pitches Cardinals to World Series crown in Game 7 https://sabr.org/gam[...]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2018-12-24
[29] 뉴스 THERE ARE NO, REPEAT, NO DYNASTIES https://www.chicagot[...] Chicago Tribune 2018-12-24
[30] 문서 MLBにおいてセーブが公式記録となったのは{{mlby|1969|d=y}}のことである。そのため、今シリーズでのセーブは参考記録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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