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다다즈미 (18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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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다다즈미(1853년)는 쇼나이 번의 9대 번주 사카이 타다츠라의 아들로, 10대 번주 사카이 타다히로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막부 말기에 신초구미를 지휘하고 에도 시중 단속역을 맡았으며,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일원으로서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항복 후 개역되었다. 이후 육군 소좌로 임명되어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백작이 되었다. 191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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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즈미 (185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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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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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백작 |
본명 | 일본어: 酒井忠篤 (ふりがな: さかい ただずみ) |
어린 시절 이름 | 일본어: 繁之丞 (しげのじょう) |
묘호 | 蓬堂, 拗鳴 |
신호 | 忠篤命 |
묘소 | 야마가타현쓰루오카시 가주신마치의 다이토쿠지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좌위문위, 백작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모치 → 요시노부 → 메이지 천황 → 다이쇼 천황 |
번 | 데와 쇼나이 번 번주 |
씨족 | 사에몬노조 사카이가 |
출생 및 사망 | |
출생 | 가에이 6년 2월 13일 (1853년3월 22일) |
사망 | 다이쇼 4년 (1915년) 6월 6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사카이 다다아키 |
어머니 | 오기하라 몬조의 딸, 이오코 |
양아버지 | 사카이 다다히로 |
형제자매 | 다다노리, 사카이 다다즈미, 다다토모, 다다쓰네, 다다토시, 딸 (이나바 마사쿠니 정실 딸), 딸 (혼다 야스시게 정실), 딸 (토리이 다다토모 정실) 딸, (오코치 데루나리 정실), 딸 (마쓰다이라 다다카즈 정실 후 도자와 마사미쓰 계계실) |
배우자 | 정실: 시즈 (도쿠가와 요리요시 삼녀) |
자녀 | 다다요시, 다다타카, 다다노리, 딸 (사카이 다다키요 실), 딸, 요네코 (오규 지카타카 정실), 딸, 다카코 (사카이 다다즈미 실), 딸, 우타코 (오다쓰 시게오 실) 양녀: 아이코 (나이토 노부요시의 딸, 나이토 노부치카 자 나이토 노부토모 처) |
주요 경력 | |
에도 막부 |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섬김 |
쇼나이 번 | 11대 다이묘 (1862년 ~ 1868년) |
쇼나이 사카이 가 | |
사카이 백작가 당주 | 1대 (1884년 ~ 1915년) |
사카이 사에몬노조 가 종가 | 17대 (1862년 ~ 1868년), 19대 (1880년 ~ 1915년) |
계승 정보 | |
쇼나이 번 번주 | 전임: 사카이 다다토모 후임: 사카이 다다미치 |
사카이 사에몬노조 가 | 전임: 사카이 다다토모, 사카이 다다미치 후임: 사카이 다다미치, 사카이 다다나가 |
사카이 백작가 당주 | 후임: 사카이 다다나가 |
2. 생애
사카이 다다즈미는 가에이 6년(1853년) 쇼나이 번의 제9대 번주 사카이 타다츠라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분큐 2년(1862년), 숙부이자 제10대 번주인 사카이 타다히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번주 자리를 계승했다.[1]
막말의 혼란기에는 후다이 다이묘로서 막부 측에서 활동했다. 분큐 3년(1863년)에는 에도의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된 신초구미의 지휘를 맡았고,[1] 겐지 원년(1864년)에는 영지가 추가되어 17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에는 사쓰마번의 에도 저택을 불태우는 사건(에도 사쓰마 번저 방화 사건)을 주도했다.[1]
게이오 4년(1868년) 시작된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주요 일원으로 신정부군과 싸웠다. 쇼나이 번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항복했다.[1] 이로 인해 신정부에 반역한 죄로 개역 처분을 받고 영지는 12만 석으로 감봉되었으며, 동생 사카이 타다토미가 번주 자리를 이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2년(1869년)에 죄를 용서받았다.[1] 이후 사쓰마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병부성에 출사했으며, 일본 제국 육군 소좌로 임명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부터 독일에서 군사 제도를 연구하고 귀국했다.[1] 메이지 13년(1880년)에는 은거한 양자 다다토미의 뒤를 이어 다시 가독을 상속했으며,[1]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1] 다이쇼 4년(1915년) 6월 6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가에이 6년(1853년) 2월 13일, 제9대 번주 사카이 타다츠라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분큐 2년(1862년)에 숙부이자 제10대 번주인 사카이 타다히로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했다. 분큐 3년(1863년) 10월 26일에는 종4위하, 사에몬노조에 서임되었다.같은 해인 분큐 3년(1863년) 4월 15일에는 에도의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된 로시구미의 정예 부대인 신초구미의 책임자가 되었고, 11월에는 에도 시내 단속 임무를 맡았다. 겐지 원년(1864년) 8월 18일에는 데와국의 다가와 및 유리군 지역 약 2만 7000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아 총 17만 석의 고쿠다카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2. 2. 막말 동란기 활동
분큐 2년(1862년), 숙부이자 제10대 번주인 사카이 타다히로가 24세의 나이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서 가문을 계승했다. 분큐 3년(1863년) 10월 26일, 종4위하 사에몬노조에 서임되었다.막말의 동란 속에서, 그는 유력한 후다이 다이묘 가문 출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분큐 3년(1863년) 4월 15일에는 에도 시내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된 신초구미의 지휘를 맡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에도 시중 단속역에도 임명되었다. 겐지 원년(1864년) 8월 18일, 데와국의 다가와군과 유리군 등 약 2만 7천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아, 총 석고는 17만 석이 되었다.
게이오 2년(1866년)에는 번 내에서 대흉작으로 인해 감세를 요구하는 민중 봉기가 발생했으나, 마쓰다이라 곤주로 등이 이끄는 번의 주류파(사쿠파)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번 내에서 세력을 강화한 주류파는 게이오 3년(1867년)에 번의 정치 방침을 두고 대립하던 사카이 우쿄 등 공무합체파를 체포하고 숙청하여 번의 여론을 사쿠파로 통일시켰다(이를 '오야마 쇼다유 사건' 또는 '정묘의 옥'이라고도 한다). 같은 해 12월 25일, 타다즈미는 신초구미를 이끌고 사쓰마번의 에도 저택을 불태우는 사건(에도 사쓰마 번저 방화 사건)을 일으켰다[1].
게이오 4년(1868년)부터 시작된 보신 전쟁에서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한 후에도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핵심 멤버로서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쇼나이 번 군대는 아키타번과 신조번의 군대, 그리고 신정부군 본대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번들이 잇따라 신정부군에 항복하는 상황 속에서, 쇼나이 번은 군사적으로 거의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9월 25일에 신정부 측에 항복했다. 9월 27일에는 쓰루오카성을 개성하고 타다즈미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 12월 7일, 신정부에 반역했다는 죄목으로 영지 몰수(개역) 처분을 받았다. 이후 쇼나이 번은 그의 동생 사카이 타다토미가 번주가 되는 조건으로[1], 석고가 12만 석으로 감봉된 채 존속이 허가되었다.
2. 3. 에도 사쓰마 번저 방화 사건
신초구미 지휘관이었던 사카이 다다즈미는 1866년 말, 에도에 위치한 사쓰마 번의 저택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는 사건을 주도했다. 이는 당시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이다.2. 4. 보신 전쟁
게이오 4년(1868년)부터 시작된 보신 전쟁에서, 에도 사쓰마 번저 방화 사건 등으로 사쓰마번과 대립했던 쇼나이 번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신정부군과 맞서 싸웠다. 전쟁 초기, 쇼나이 군대는 아키타번과 신조번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연전연승했다.[1]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막부 측 세력의 패색이 짙어졌고, 주변의 동맹 번들이 잇따라 신정부군에 항복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쇼나이 번은 군사적으로 큰 패배를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번들의 항복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타다즈미는 그해 9월 25일에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9월 27일에는 성을 내어주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1]
같은 해 12월 7일, 타다즈미는 신정부에 반역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는 개역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쇼나이 번 자체는 동생인 사카이 타다토미가 번주 자리를 잇는 조건으로, 17만 석에서 12만 석으로 감봉된 채 존속을 허가받았다.[1]
2. 5. 메이지 유신 이후
보신 전쟁 이후 메이지 정부로부터 반역죄로 처벌받아 개역에 처해졌다.[1] 이후 쇼나이 번은 그의 동생이자 양자인 사카이 타다토미가 번주 자리를 이어받았고[1], 영지는 12만 고쿠다카로 감봉된 채 존속이 허가되었다.메이지 2년(1869년) 9월 23일, 다다즈미는 죄를 용서받았다.[1] 메이지 3년(1870년)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사쓰마로 보내졌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에는 병부성에 출사했다. 메이지 5년(1872년) 2월 육군 소좌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3월 사임하였다.
1872년 4월부터 군사 제도 연구를 목적으로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중이던 메이지 10년(1877년) 4월에는 육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메이지 12년(1879년) 6월에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메이지 13년(1880년) 2월, 양자였던 다다토미가 은거함에 따라 다시 사카이 가문의 가독을 상속했다.[1] 같은 해 3월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4월에는 육군 보병 중위직에서도 물러났다. 메이지 14년(1881년)에는 쓰루오카로 돌아갔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1][2] 다이쇼 4년(1915년) 6월 6일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6. 난슈오이쿤(南洲翁遺訓)
메이지 3년(1870년), 구 쇼나이 번사 70여 명은 사쓰마를 방문하여 사이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4] 이는 보신 전쟁 당시 쇼나이 번에 대한 사쓰마 측의 관대한 처분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사이고의 사상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메이지 22년(1889년), 사이고가 대일본제국헌법 반포에 따른 대사면령으로 사면되자, 미쓰야 토타로(三矢藤太郎)를 중심으로 한 구 쇼나이 번사들은 사이고의 가르침을 정리하였다. 이 결과물은 다음 해인 메이지 23년(1890년)에 『난슈 오이쿤』(南洲翁遺訓)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5]3. 가족 관계
- 아버지: 사카이 타다모토 - 쇼나이 번 9대 번주. 8대 번주 사카이 타다카타의 장남.
- 어머니: 이오코 - 오기와라 몬조의 딸
- 양아버지: 사카이 타다히로 - 쇼나이 번 10대 번주. 사카이 타다카타의 12남, 타다모토의 동생.
- 동생: 사카이 타다토미 - 쇼나이 번 12대 번주. 사카이 타다모토의 6남.
- 정실: 시즈 - 도쿠가와 요리토모의 셋째 딸, 공작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여동생
- 생모 불명의 자녀
- * 장녀: 사카이 나가코 - 남작 사카이 타다키요의 부인
- * 차녀: 사카이 마이코 (1885년생) - 자작 오기우 요시타카의 정실
- * 삼녀: 사카이 타카코 (1887년생) - 사카이 타다즈미(사카이 타다토미의 장남)의 아내[3]
- * 장남: 사카이 타다요시 (백작) (1888년 ~ 1962년) - 부인은 오기우 요시타카의 여동생
- * 차남: 사카이 타다타카 (1890년 ~ 1956년)
- * 삼남: 사카이 타다테이 (1893년 ~ 1962년)
- * 사녀: 사카이 우타코 (1899년생) - 오다치 시게오의 부인
- 양자
- * 여자: 사카이 아이코 - 나이토 노부토의 부인, 나이토 노부미의 딸
참조
[1]
서적
新編庄内人名辞典
[2]
간행물
官報
1884-07-08
[3]
서적
人事興信録
https://jahis.law.na[...]
1915-01
[4]
서적
新版 南洲翁遺訓 ビギナーズ 日本の思想
[5]
서적
新版 南洲翁遺訓 ビギナーズ 日本の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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