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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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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바스티앙은 1554년에 태어나 1578년에 사망한 포르투갈의 왕이었다. 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조모와 대숙부의 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전쟁과 종교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며, 모로코 원정을 추진했으나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 이후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세바스티앙은 '세바스티앙주의'라는 메시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세바스티앙은 긍정적, 부정적인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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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 (포르투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크리스토방 드 모라es의 초상화, 1571-74년경
크리스토방 드 모라es의 초상화, 1571-74년경
칭호포르투갈 국왕
재위 기간1557년 6월 11일 – 1578년 8월 4일
대관식1557년 6월 16일, 리스본
이전 통치자주앙 3세
다음 통치자엔히크
섭정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1557–1562)
출생일1554년 1월 20일
출생지히베이라 궁전, 리스본, 포르투갈 왕국
사망1578년 8월 4일 (24세)
사망 장소카사르엘케비르, 사디 왕조
왕가아비스
아버지주앙 마누엘
어머니후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종교로마 가톨릭교
세바스티앙 서명
세바스티앙 서명
통치
별칭(바람직한 자)
(숨겨진 자)

2. 생애

1557년 주앙 3세가 사망하자 세바스티앙은 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처음에는 할머니 카타리나가, 1562년부터 1568년까지는 큰아버지인 엔히크 추기경이 섭정을 맡아 후견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바스티앙은 십자군 원정을 강하게 열망했다.[12] 그는 조부 주앙 3세가 유지 및 방위 비용 문제로 포기했던 모로코의 도시들을 되찾고자 했다.[8] 세바스티앙의 원정 계획은 대담했지만, 계획, 전략, 퇴각 등은 고려하지 않았고, 그는 그러한 요소들을 겁쟁이의 생각이라며 무시했다.[11] 원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과 교회에 무거운 부담을 지웠고, 외국 상인에게서 막대한 군자금을 빌렸다.[11]

1574년 세바스티앙은 사아드 왕조 치하의 모로코에 처음 상륙하여 3개월간 머물렀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1] 귀국 후 원정 준비를 다시 시작했고, 숙부 펠리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펠리페 2세는 세바스티앙의 원정 결과를 불안하게 여겨, 1562년 코르테스에서 결정되었던[9]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의 결혼을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9]

1578년 여름, 아부 마르완 압드 알-말리크 1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물레이 무함마드가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하자, 세바스티앙은 용병을 포함한 약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모로코로 향했다. 그러나 세바스티앙의 군대는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규율도 부족했다.[13] 1578년 8월 4일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이슬람 군대와 교전하여 포르투갈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13][14] 세바스티앙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14] 모로코 원정에 사용된 비용은 국가 수입의 절반에 달했고, 국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13][14] 세바스티앙에게는 왕비도 후계자도 없었기에,[14] 포르투갈의 국정은 혼란에 빠졌다.

2. 1. 어린 시절

1554년 ''Sentenças para a Ensinança e Doutrina do Príncipe''에서 갓 태어난 세바스티앙


세바스티앙은 1554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안 축일)에 태어났으며, 이를 기념하여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세바스티앙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아버지는 주앙 마누엘이며, 아버지 사망 18일 후에 태어나 왕세자가 되었다.[18] 광장에 모여든 군중에게 왕자 탄생이 알려지자, 군중은 환호하며 축복하였다.[19]

어머니 후아나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에게 포르투갈 왕위가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기에 세바스티앙의 탄생은 국민들에게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고, "대망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18] 세바스티앙 탄생 4개월 후, 어머니 후아나는 약혼 당시 약정에 따라 모국 에스파냐로 돌아갔다.[19]

1557년 할아버지 주앙 3세 사망 후, 3세 나이로 즉위했고, 할머니 카타리나가 섭정으로서 후견했다. 1562년부터 1568년까지는 큰아버지인 추기경 돈 엔히크가 섭정을 맡았다.

세바스티앙은 담대하고 모험심이 풍부하여 "기사왕"이라 불렸다.[21] 그러나 정서 불안정과 허영심이 강한 성격 탓에 타인 의견을 거의 듣지 않았다.[18] 자신에게 아첨하며 좋은 의견만 말하는 인물에게만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22] 11세 때 바탈랴를 방문한 세바스티앙은 주앙 2세 묘를 파내고 유해를 일으켜 세우며 "그야말로 왕의 책무를 가장 잘 수행한 인물이다"라고 말했다.[21]

세바스티앙은 사냥과 승마에 몰두하여 국정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정무 실권은 엔히크 추기경과 그 측근들에게 넘어갔다.[19] 가정교사 예수회 신부 카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전전한 경력이 있는 감시역 돈 아레이호는 세바스티앙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19] 14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종교에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18] 조부 주앙 3세와 카를 5세, 숙부 펠리페 2세 등 유럽 강대국 군주를 친척으로 둔 세바스티앙은 자신 또한 위대한 왕이 될 운명이라 믿으며 성장했다.[19]

2. 2. 교육과 성격

세바스티앙은 할아버지 주앙 3세의 많은 아들들이 모두 요절한 가운데, 아버지 주앙 마누엘마저 사망한 지 18일 뒤에 태어났다.[18]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왕자의 탄생 소식에 환호하며 축복했는데,[19] 이는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에게 포르투갈 왕위가 넘어갈 가능성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앙은 '대망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18] 1월 28일에 세례를 받고 성인 세바스티아누스의 이름을 따 세바스티앙이라 명명되었다.[19]

1557년 주앙 3세가 사망하자 세바스티앙은 3세의 나이로 즉위했고, 할머니 카타리나가 섭정을 맡았다. 1562년부터 1568년까지는 큰아버지인 추기경 돈 엔히크가 섭정을 맡았다. 1562년 소집된 코르테스는 세바스티앙에게 결혼을 요청했고,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의 약혼이 결정되었다.[20]

세바스티앙은 담력 있고 모험심이 풍부하여 '기사왕'이라고도 불렸지만,[21] 정서가 불안정하고 허영심이 강했으며,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았다.[18] 아첨하며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에게만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22] 11세 때 바탈랴를 방문한 세바스티앙은 주앙 2세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세워 놓고 "왕의 책무를 가장 잘 완수한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1]

세바스티앙은 사냥과 승마에 몰두하며 국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정무 실권은 엔히크 추기경과 그 측근들에게 넘어갔다.[19] 예수회 소속 가정교사 카마라 신부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전전한 경험이 있는 돈 아레이죠는 세바스티앙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9] 14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종교에 지나치게 흥미를 보였다.[18] 세바스티앙은 유럽 강대국 군주들을 친척으로 둔 덕에 자신도 위대한 왕이 될 운명이라고 믿으며 성장했다.[19]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테아티노회 소속 두 성직자와 항상 함께하며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다. 어린 시절 세바스티앙은 방문객을 피해 수도승들과 함께 숨기도 했다.

2. 3. 결혼 계획

1562년에 소집된 코르테스는 세바스티앙에게 결혼을 요청했고, 백부인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의 약혼이 결정되었다.[20]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세바스티앙의 모로코 원정 계획을 불안하게 여겨 결혼을 연기했다.[20]

프랑스의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막내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세바스티앙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오랫동안 추진했으며, 펠리페 2세도 때때로 이 계획을 지지했다. 그러나 세바스티앙은 프랑스에서 위그노 개신교도의 온건한 탄압에 감명을 받지 못했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보기 전에는 발루아 왕가와 묶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그 계획을 스스로 중단했다. 이후 그는 교황의 사절단에 설득되어 마르그리트가 위그노 앙리 4세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르그리트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프랑스 국왕과 그의 어머니는 이미 마르그리트를 앙리와 결혼시키려 했다. 세바스티앙의 제안은 거절되었고, 마르그리트는 1572년에 앙리와 결혼했다.

세바스티앙은 또한 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 (막시밀리안은 카를 5세의 조카)에게도 제안을 받았다. 세바스티앙은 1577년 자신의 외삼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딸이자 첫 번째 사촌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에게 구혼했다.

세바스티앙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왕비 후보자를 모두 거절해왔기 때문에, 적자는 없었다.[25]

2. 4. 모로코 원정과 죽음

세바스티앙은 모로코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강하게 열망했다.[23] 그는 조부 주앙 3세가 유지 및 방위 비용 문제로 포기했던 모로코 도시들의 회복을 원했다.[19] 1574년, 세바스티앙은 사아드 왕조가 지배하던 모로코에 처음 상륙하여 3개월간 머물렀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22]

1576년 아부 압달라 무하마드 2세 사디가 왕위를 잃고 포르투갈로 망명하면서 모로코의 왕위 계승 다툼은 그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망명한 그는 터키의 지원을 받는 삼촌이자 경쟁자인 아부 마르완 압드 알-말리크 1세 사디를 물리치는 데 세바스티앙의 도움을 요청했다.

1577년 크리스마스 무렵, 세바스티앙은 과달루페에서 삼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를 만났다. 펠리페 2세는 오스만 제국과 휴전을 협상 중이었기에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스페인 의용병 파견을 약속했다.

아브 마르완 압드 알 말리크 1세에게 왕위를 빼앗긴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가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하자, 1578년 여름 세바스티앙은 용병을 포함한 약 1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다시 모로코로 향했다.[24] 세바스티앙의 군대는 통솔이 잘 되지 않았고 규율도 부족했다.[24] 아르질라에서 세바스티앙은 동맹인 아부 압둘라 모하메드 2세와 합류했는데, 그는 약 6,000명의 무어인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지휘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륙으로 진격했다.

1578년 8월 4일,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이슬람 군대와 교전하여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큰 패배를 당했다.[24][25] 세바스티앙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25] 그는 마지막으로 적진으로 돌진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의 시신을 찾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80년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후 모로코에서 그의 유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제르니모스 수도원의 벨렘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 벨렝에 매장했다. 그러나 그 시신은 세바스티앙의 것으로 확인되지 않아 그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로코 원정에 사용된 비용은 국가 수입의 절반에 달했고, 국가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24][25] 세바스티앙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독신이었고 왕비 후보자를 모두 거절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었다.[25]

3. 정책

세바스티앙 1세는 친정 기간 동안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왕국의 행정, 사법, 군사 제도를 재정비했다.[22] 또한 코임브라 대학교 의학 및 약학 분야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브라질 원주민을 지원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1569년 리스본페스트가 발생하자 세비야에서 의사를 초빙하고 병원을 설립하여 환자들을 돌보았다. 페스트 희생자의 미망인과 고아를 위한 시설을 마련하고 유모를 제공하기도 했다.

1575년 ''알메이림 법령''을 통해 고체 및 액체 상품의 측정 시스템을 확립하고 공무원의 역할을 정의했다. 1576년에는 ''공동 곡물 창고''를 설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대출을 제공했다.

세바스티앙, 포르투갈 국왕 (1565년경) – 크리스토방 드 모라이스 작


''포르투갈의 D. 세바스티앙 초상화''; 크리스토방 드 모라이스, 1572.

3. 1. 식민지 확장

1559년 포르투갈군은 인도 서해안의 다만 재정복에 성공하였다.[21] 1567년에는 브라질 총독 멤 드 사(Mem de Sá)가 남아메리카의 리우데자네이루 만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요새를 점령하였다. 요새는 식민지로 재건되어 후의 리우데자네이루로 발전하였다. 1570년에는 앙골라의 식민지화를 개시하였다. 1562년에는 모로코, 1570년에는 인도의 고아, 차울이 공격을 받았지만, 방어에 성공하였다.[21]

3. 2. 법률 및 기타 정책

세바스티앙 1세가 직접 통치하던 시기 포르투갈 국내는 안정되어 대규모 정치 개혁은 없었다.[22] 신앙 및 교회 관련 법령이 많이 제정되어 포르투갈 본토와 식민지에 새로운 교구 설치, 종교재판소의 권한 강화 등이 실시되었다.

세바스티앙은 외교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프랑스와 관계를 강화했다. 또한 왕국의 행정, 사법, 군사 체계를 재정비했다. 1568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의학이나 약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만들었다.

같은 해, 브라질에서 프랑스와의 전투를 도운 원주민들에게 보상했다. 테미미노스 부족의 추장 아라리보이아에게는 과나바라 만 근처의 땅을 주었다. 1569년, 두아르테 누네스 데 레앙에게 왕국의 모든 법과 법적 문서를 "Código Sebastiânico"(세바스티앙 법전)으로 알려진 "Leis Extravagantes" 모음에 수집하도록 명령했다.

1569년 리스본에서 대규모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세바스티앙은 세비야에서 의사를 불러 포르투갈 의사들이 페스트와 싸우는 것을 돕게 했다. 그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리스본에 두 개의 병원을 만들었다.

그는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들의 미망인과 고아를 위해 "Recolhimento de Santa Marta"(산타 마르타의 쉼터) 및 "Recolhimento dos Meninos"(어린이의 쉼터)를 만들고 아기를 돌보기 위한 유모를 제공했다.

세바스티앙은 군사 조직 모델이 될 ''Lei das Armas''(무기법)이라는 군사 관련 법률을 제정했다. 1570년, 인도 연맹 전쟁 중 고아가 범 아시아 연합의 공격을 받았지만, 포르투갈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또한 1570년, 세바스티앙은 브라질 원주민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억류된 자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1572년,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는 자신의 걸작 ''우스 루지아다스''를 발표하고 세바스티앙에게 헌정하는 시를 바쳐 왕실 연금을 받았다. 1573년, 그는 오우리케 전투에 대한 헌사로 카스트루 베르드에 왕립 바실리카 건설을 의뢰했다. 1575년에는 ''Carta de Lei de Almeirim''(알메이림 법령)을 통해 왕은 고체 및 액체 제품의 측정 시스템을 확립하고 공무원의 역할을 정의했다.

1576년 세바스티앙의 명령으로 ''Celeiros Comuns''(공동 곡물 창고)가 문을 열었다. 이는 농작물 생산량이 감소했을 때 가난한 농민을 돕기 위한 대출 기관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신용을 제공하고 씨앗과 상품을 대출해 주었다. 그들은 손실에서 회복되면 농산물로 부채를 갚을 수 있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페드루 누네스는 세바스티앙에 의해 해상 조종사를 위한 천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누네스가 ''Petri Nonii Salaciensis Opera''를 저술한 것도 세바스티앙의 통치 기간이었다.

1577년, 세바스티앙의 법령 ''Da nova ordem do juízo, sobre o abreviar das demandas, e execução dellas''(소송 단축 및 집행에 관한 새로운 사법 질서)는 소송 처리 시간을 단축하고, 변호사, 서기 및 기타 법원 관계자의 활동을 규제했으며, 지연에 대한 벌금을 부과했다.

3. 3. 일본인 노예 무역 중지 명령

세바스티앙은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 규모가 커져서 가톨릭교회로의 개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1571년에 일본인 노예 거래 중지를 명령했다.[15][16]

4. 세바스티앙주의

1580년부터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며 곤궁해진 민중은 구세주의 출현을 열망했다[26]. 1530년 신발 가게 주인 반다라가 쓴, 숨은 왕이 민중을 해방한다는 예언시에 세바스티앙을 적용시켜, 세바스티앙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패배를 부끄럽게 여겨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세바스티앙주의(메시아 대망론)는 스페인 지배를 끝내는 민중 반란의 원동력이 되었고, 브라간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26].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수도원에 있는 무덤. 포르투갈 펠리페 1세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세바스티앙으로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장기적으로 세바스티앙에 대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나타났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위대한 포르투갈 애국자였으며, 포르투갈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돌아와 돕는 "산속에서 잠든 왕"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아서 왕, 독일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또는 비잔틴의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와 유사).

그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을 구하기 위해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돌아올 ''O Encoberto'' (''가려진 자'') 또는 ''O Desejado'' (''갈망하는 자'')로 불렸다. 이러한 전설은 안토니우 곤칼베스 드 반다라가 쓴 대중적인 운문(''트로바스'')의 대량 유통을 통해 강력하게 홍보되었다. 19세기 후반에도 브라질 세르탕의 카누두스 마을의 "세바스티안주의자" 농민들은 왕이 돌아와 "무신론자" 브라질 공화국에 대한 카누두스 전쟁에서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세바스티앙의 삶은 1843년 이탈리아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오페라 ''돔 세바스티앙''에서 극화되었다. 벨기에 극작가 폴 드레스도 1975년 희곡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또는 신의 대위''에서 그의 삶을 극화했다. 세바스티앙의 실종과 귀환에 대한 전설은 포르투갈 밴드 콰르테토 1111 (1968)의 인기곡 A Lenda d'El Rei D. Sebastião|세바스티앙 왕의 전설pt의 기초가 되었다.

4. 1. 세바스티앙을 사칭하는 자들

1580년부터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며 곤궁해진 민중들은 구세주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었다[26]. 1530년 신발 가게 주인 반다라가 쓴, 숨은 왕이 민중을 해방한다는 예언시에 세바스티앙을 적용시켜, 세바스티앙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패배를 부끄럽게 여겨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민중들은 세바스티앙의 귀국을 믿었고, 각지에서 세바스티앙을 사칭하는 자들이 다수 나타났다[26].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 패배 이후, 모로코에 억류된 포르투갈 군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여러 군인들이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이로 인해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세바스티앙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왕위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세바스티앙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세바스티앙주의 신앙으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는 펠리페가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후, 왕이라고 사칭하는 가짜 왕위 주장자들이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에 나타났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의 이베리아 연합 시대 동안, 네 명의 다른 왕위 주장자들이 돌아온 세바스티앙 왕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중에는 가브리엘 데 에스피노사도 있었다. 이탈리아인이었던 마지막 왕위 주장자는 1619년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다른 한 명은 스페인에 의해 베네치아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1603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4][5]

5. 평가

세바스티앙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 양쪽으로 나뉘며, 그에 대한 무관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티모시 코츠는 세바스티앙을 미성숙하고 고집스러운 젊은이로 평가하며, 모로코에서 레콩키스타(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통치자로부터의 기독교 재정복)를 시도한 것이 그의 죽음뿐만 아니라 결국 아비스 왕가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2]

반면, 포르투갈 역사 학자 앤서니 R. 디즈니는 세바스티앙을 포르투갈이 배출한 특별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그는 세바스티앙이 왕위에 오를 당시 신하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조국의 독립을 지켜줄 왕자로 널리 환영받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세바스티앙이 여러 면에서 왕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했고, 많은 법률을 제정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상당한 연민을 보였다고 평가했다.[3]

5. 1. 모로코에서의 평가

세바스티앙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모로코에서 수 세기 동안 기사도의 숭고한 이상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인물로 남아 있었다. 1923년, 스페인 보호령을 고고학적으로 탐사하던 유명한 포르투갈 고고학자이자 문장학자, 족보학자인 아폰소 드 도르넬라스는 재무부 장관 엘 하치 압드 셀람 벤 엘 아르비 베누나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6]

"수많은 리그에 걸쳐 아랍인들이 존경과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포르투갈인들이 이곳에 있었다. 만약 역사에 기록된 가치 있는 전사로서의 조상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그 포르투갈인들과 싸웠기 때문이다."

베누나는 또 "한 왕이 자신의 위대함, 사치스러운 삶, 화려함을 버리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이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대규모로 전투를 벌이기 위해 떠났다"는 것은 모로코가 사소한 분쟁으로 인한 오랜 내부 갈등 끝에 막 통합되었을 때 높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베누나는 포르투갈인들이 벨렘에 있는 유해가 세바스티앙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6]

아실라에서는 도르넬라스의 위임을 받은 지사 바샤 세리프 시드 무스타파 벤 라이순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6]

"이곳은 포르투갈의 위대한 왕, 세바스티앙이 상륙했던 곳이며,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를 최고의 왕으로 존경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Rendered as Sebastiam in Archaic Portuguese
[2] 간행물 Habsburg Iberia Points West History Today 2018-03
[3] 서적 A History of Portugal and the Portuguese Empire from Beginnings to 1807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4] 서적 The Baker Who Pretended to Be King of Portuga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5] 간행물 From King Sebastian of Portugal to Miguel de Cervantes and don Quijote: A Genealogy of Myth and Influence MLN 2020
[6] 서적 De Ceuta a Alcácer Kibir em 1923 Casa Portuguesa 1924
[7]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8] 서적 世界伝記大事典 世界編
[9] 서적 波乱万丈のポルトガル史
[10] 서적 波乱万丈のポルトガル史
[11] 서적 ポルトガル
[12]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13] 서적 ポルトガル
[14]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15] 서적 Monumenta Nipponica (Slavery in Medieval Japan) Sophia University 2004-12
[16] 서적 Monumenta Nipponica: Studies on Japanese Culture, Past and Present, Volume 59, Issues 3-4 https://books.google[...] Sophia University 2014-02-02
[17]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18] 서적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19] 서적 세계 전기 대사전 세계편
[20] 서적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21] 서적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22] 서적 포르투갈
[23] 서적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24] 서적 포르투갈
[25] 서적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26] 서적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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