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찬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조찬위는 세종 사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사건을 의미한다. 단종의 어린 나이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자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단종을 폐위시킨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단종은 죽임을 당하고, 세조는 왕권을 강화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의 반정, 사화 등에 영향을 미쳤다.
세종과 문종의 사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권이 약화되고, 관료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숙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이 권력 쟁탈전에 뛰어들었으며, 계유정난을 빌미로 반정의 명분을 삼았다.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 일파와 안평대군의 친속들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영의정 겹 섭정에 오르고, 신숙주, 한명회, 권람 등은 선위의 형식으로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게 한다.
2. 배경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선왕 문종의 유명(遺命)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 보필하였다. 집현전 학자들 또한 이들을 도왔다.
세종에게는 18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 중 차남이자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함께 종친들의 수장격인 수양대군은 야망과 수완이 남달랐다. 모든 대군은 경쟁적으로 빈객을 맞아들여 세력을 확장했는데, 수양대군에게는 무인들이 모였다.
안평대군 주변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많이 모였으나, 수양대군 역시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숙주, 정창손, 김질, 정인지 등이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였다.
2. 1. 왕권 약화와 권력 투쟁
2. 2. 세력 형성
3. 경과
3. 1. 계유정난 (1453년)
수양대군은 모신(謨臣) 권람을 통하여 당시 경덕궁직으로 있던 한명회를 얻고, 한명회를 통해 다시 홍달손(洪達孫) · 양정(楊汀) 등의 유능한 무인(武人)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한명회는 세상을 읽는 능력이 있는 인물로 수양대군의 책사로 활동한다.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한명회와 권람은 왕권의 추락과 신권의 막강함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들어 정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먼저 단종을 협찬해 오던 3공(公) 가운데서 가장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를 제거하고자, 1453년(단종 1) 음력 10월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인 뒤, 김종서가 모반하므로 죽였는데 일이 절박하여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고 상주하였다. 곧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의정 황보인·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贊成) 이양(李穰) 등 반대파 중신(重臣)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鄭苯)·조수량(趙邃良 : 조극관(趙克寬)의 아우) 등을 귀양 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한편 김종서 등의 목을 베어 매달고 그 자손을 주살(誅殺)하였으며 이어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통했다고 하여 그를 강화도에 귀양 보내서 뒤에 사사(賜死)하였다.
3. 2. 세조의 즉위 (1455년)
수양대군은 정변으로 실권을 얻은 뒤 영의정부사, 이조·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정인지를 좌의정에,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이기도 한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여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금성대군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자, 단종은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이로써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였다.
3. 3. 단종 복위 운동과 실패
선위는 권남·정인지 등이 극비리에 추진하여 계략에 따른 왕위 강탈이었다. 이에 집현전 학자 출신인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및 병마절도사 조숭문, 유응부, 종사관 박심문 등은 단종 복위와 반역파 숙청을 꾀하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났다. 김질, 정창손 등이 사태의 불리함을 알고 이를 밀고하여, 세조는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작형(灼形 : 단근질) 등으로 형살(刑殺)되었고, 하위지도 참살되었으며,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고 군사 50명으로 호송하여 영월로 귀양 보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는 서인(庶人)으로 추폐(追廢)되었고,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 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府使)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인사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밀고로 탄로나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誅殺)되었다. 한남군, 영풍군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은 서인으로 폐하여졌다. 영의정 정인지·좌의정 정창손·이조판서 한명회·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였고,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17세였던 단종 역시 살해하였다.
4. 영향
세조 찬위는 조선 최초의 폐위 사건으로 중종 반정과 인조 반정, 이괄의 난, 경종 독살 미수 사건 등에 영향을 미쳤다. 세조 찬위, 곧 단종 폐위 사건은 뒤에도 사화(士禍)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또 문인·학자 간에도 많은 충격을 주어 대립 반목을 이루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권력 남용과 부정의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4. 1. 정치적 영향
세조 찬위는 조선 최초의 폐위 사건으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경종 독살 미수 사건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화(士禍)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문인과 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충격을 주어 대립과 반목을 심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로 이어졌으며, 공신 세력의 득세와 훈구파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4. 2. 사회적 영향
세조 찬위는 조선 최초의 폐위 사건으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경종 독살 미수 사건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림 세력의 성장을 억제하고, 사화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교적 명분론과 도덕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인·학자 간에도 많은 충격을 주어 대립 반목을 이루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4. 3. 역사적 평가
5. 같이 보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