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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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리투아니아는 16세기 초에 처음 언급된 지명으로, 현재 리투아니아 북부, 칼리닌그라드 주,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 주에 걸쳐 있던 지역을 지칭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독일 기사단의 지배를 받았으며, 1918년 이후 리투아니아와 독일 사이의 영토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1923년 클라이페다 지역이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으나, 1939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독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러시아의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 주를 포함한다.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리투아니아어 서적 출판과 민족 부흥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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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투아니아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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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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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마ž오이 리에투바 (Mažoji Lietuva) |
기타 명칭 | 리투아니아 소국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클라인리타우엔 (Kleinlitauen) 리트바 므니에이샤 (Litwa Mniejsza) 말라야 리트바 (Малая Литва) |
구분 | 리투아니아의 민족지학적 지역 |
위치 | 리투아니아, 러시아 |
중심지 | 틸žė (틸지트) |
최대 도시 | 클라이페다 |
면적 | 2848 km² (네만강 우안, 클라이페다 지역 기준, 칼리닌그라드 주 제외) |
인구 (1925년) | 141650명 (네만강 우안, 클라이페다 지역 기준, 칼리닌그라드 주 제외) |
시간대 | CET (GMT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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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소 리투아니아"라는 용어는 동프로이센의 옛 지방 최북단 지역(약 31500km2)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16세기 초(1517년에서 1526년 사이) 시몬 그루나우의 프로이센 연대기에서 Kleinlittawde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 또 다른 프로이센 연대기 저자인 루카스 다비드에 의해 반복되었다.[3] 19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20세기에는 역사학자, 민족지학자 사이에서 더 널리 사용되었다.
독일 기사단이 13세기에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발트 독일인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소 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가 프로이센의 일부가 되었다. 멜노 조약 이후 독일 제국에 속했던 클라이페다 지역은 1945년에 리투아니아에 귀속되었다.
1618년부터 프로이센 국가의 법적 문서에서 리투아니아인이 거주하는 행정 구역(나드루비아와 스칼로비아)을 지칭하는 데 "리투아니아 주"( Provinz Litthauende), "리투아니아 구"( Littauische Ämterde), "리투아니아 군"( Littauischer Kreisde) 또는 단순히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Preußisch Litauende), "리투아니아"( Litauende)와 같은 행정 용어가 사용되었다. 리투아니아 주는 1738년부터 프로이센 지도에서 Klein Litaude, Klein Litauende, Preussisch Litthauende, ''Little Lithuania'', ''Litvania''로 명명되었다.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등의 개념의 공식적인 사용은 1815-1818년의 행정 개혁 이후 현저하게 감소했다.[3]
3. 지리
소 리투아니아는 북쪽으로는 댕게 강 하류, 남쪽으로는 프레골랴 강(Priegliuslt)의 주요 지류 사이의 지역을 포함한다. 남서쪽 경계선은 쿠로니아 석호에서 데이메나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졌고, 프레골랴 강을 따라 우나 강 (Alnalt) 강으로, 알나(현대 드루즈바) 마을까지 이어졌으며, 거기에서 아슈비네 강을 따라 아슈비니스 호수까지, 거기에서 동쪽으로 리투아니아 대지역의 경계까지 이어졌다. 이 지역은 약 11400km2를 포함했다.
과거 소 리투아니아 지역은 현재 칼리닌그라드 주의 일부(칼리닌그라드 시와 그 주변 제외),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 주의 일부 지역, 그리고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 구 자치구, 실루테 구 자치구, 클라이페다 시, 파게지아이 자치구, 네링가 자치구 등을 포함한다.
1773년부터 1918년까지 소 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왕국의 동프로이센 지방의 일부였다. 이곳은 과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외부 지역이었으며, 많은 수의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했다. 민족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였으며, 주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던 리투아니아 대지역의 주민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주요 도시로는 클라이페다(메멜)와 틸제(틸시트)가 있었다. 다른 마을로는 라가이네(라그니트), 실로카르체마(헤이데크루크, 실루테로 개명), 굼비네(굼비넨), 이스트루티스(인스터부르크), 스탈루페나이(스탈루포넨)가 있다.
4. 역사
1863년 1월 봉기로 러시아 제국 내에서 리투아니아어 출판이 금지되자, 동프로이센, 특히 틸지트나 라그니트 등 소 리투아니아에서 리투아니아어 서적이 인쇄되어 러시아령 리투아니아로 몰래 반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로이센의 리투아니아인 활동가들은 소 리투아니아를 "대 리투아니아"에 통합할 것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리투아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네만강 북쪽의 메멜 지역은 독일에서 분리되어 연합국의 보호령인 메멜 영토가 되었다. 1923년 1월, 클라이페다 봉기가 일어났고, 클라이페다 지역은 1923년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다.[45]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1933년 나치 독일의 경제 제재로 경제적 중요성이 감소했다.
1939년 3월 20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최후통첩을 통해 리투아니아에 메멜 지역 양도를 요구했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3월 22일 독일에 이 지역을 넘겼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전 나치 독일의 마지막 영토 획득이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독일에 병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독일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소련에 의해 독일로 추방되었다. 소련은 1944년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1945년 메멜 지역을 리투아니아 SSR에 편입시켰다. 동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은 폴란드와 소련으로 분할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칼리닌그라드주를 제안했지만, 서기 안타나스 스네치쿠스는 이를 거절했다.
2010년, 1990년의 기밀 문서에서 소련 지도부가 칼리닌그라드 반환 협상 의향을 나타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나, 독일 외교관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46] 소련 붕괴 이후, 칼리닌그라드주는 러시아의 월경지가 되었다. 현재 리투아니아, 독일, 폴란드는 이 지역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
4. 1. 리투아니아 소지역 이전
소 리투아니아라는 명칭은 16세기에 붙여졌지만, 이 지역은 그 이전에도 리투아니아인과 민족적, 정치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13세기에는 민다우가스의 리투아니아가 이 지역을 부분적으로 지배하기도 했다.[4] 이후 튜턴 기사단이 1275년부터 1276년까지 이 지역을 점령하여 통치했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알기르다스는 공식적으로, 비타우타스는 비공식적으로 이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여겼다.[5]
4. 1. 1. 독일-리투아니아 경쟁
13세기 서부 리투아니아는 북쪽의 리보니아 기사단과 남쪽의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민도우가스는 세례와 왕권 인정을 대가로 사모기티아를 기사단에 넘겼다.[6] 1253년 7월, 민도우가스는 나드루비아와 카르슈바를 기사단에 증여했고, 1259년에는 다이나바와 스칼로비아를 증여했으나, 1259년의 증여는 기사단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두르베 전투 (1260) 이후 모든 발트 부족들이 기사단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민도우가스는 1261년에 리보니아 기사단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했다. 1263년 민도우가스와 두 아들이 암살당하면서 민도우가스 왕가는 단절되었다. 알기르다스는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에 대한 협상 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게,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에 우크라, 프레골랴 강 및 발트해까지의 땅을 돌려줄 때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1358).
그룬발트 전투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기사단 사이에 사모기티아에 대한 분쟁이 시작되었다.[6] 황제 지기스문트의 대표 베네딕트 마크라이는 네만강 오른쪽(벨류오나, 클라이페다)을 리투아니아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1413).[7] 그러나 기사단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황제 지기스문트는 사모기티아를 기사단에 인정했다(1420). 비타우타스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멜노 조약이 체결되어 클라이페다는 기사단에 남게 되었다.
4. 2. 소 리투아니아의 등장
1525년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튜튼 기사단 국가는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고, 소 리투아니아라는 용어가 등장했다.[14] 소 리투아니아는 1701년까지 프로이센 공국의 일부였고, 이후 프로이센 왕국, 1871년부터는 독일 제국의 일부였다가 1920년에 분할되었다. 멜노 조약으로 설정된 정치적 경계는 1923년 클라이페다 지역이 리투아니아에 합병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세기 폴란드 분할에 저항하는 폴란드 비밀 저항 세력은 이 지역을 통해 러시아령 아우구스투프 현 및 사모기티아로 무기를 밀수했다.[10] 일부는 프로이센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11] 1892년 ''폴란드 왕국의 지리 사전''은 틸지트를 소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언급했다.[12]
1863년 1월 봉기 이후, 러시아 제국 내에서 리투아니아어 출판이 금지되자, 동프로이센, 특히 틸지트나 라그니트와 같은 소 리투아니아에서 리투아니아어 서적이 인쇄되어 러시아령 리투아니아로 밀수되었다.
4.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후, 일부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 활동가들은 틸지트 조약에 서명하여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이 거주하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독일로부터 분리, 리투아니아와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네만강 북쪽에서 메멜까지의 지역은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로부터 분리되어 메멜 영토라고 불렸으며, 연합국의 보호령이 되었다.[13] 1923년 1월, 클라이페다 봉기가 일어나 클라이페다 지역은 리투아니아에 합병되었다.[13] 이 합병은 리투아니아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지만, 1933년 나치 독일이 경제 제재를 가한 후 경제적 중요성이 감소했다. 나치 독일은 이 지역의 리투아니아인을 박해했으며, 1938년에는 리투아니아 기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대규모 지명 개명 캠페인을 벌였다. 1940년 틸지트에서 발행된 마지막 리투아니아 신문은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14]
1939년 3월 20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여 클라이페다 지역을 독일 통제하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15] 리투아니아는 최후통첩에 굴복, 1939년 3월 22일 늦은 저녁에 논란이 있는 이 지역을 독일에게 양도했다.[16]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얻은 마지막 영토 획득이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점령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은 현재의 그로모보 (라우크노스|Lauknoslt)에 호헨브루흐 강제 수용소|Hohenbruchde를 운영했으며, 다양한 국적의 연합군 포로를 위한 여러 포로 수용소를 운영했다.[17]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추방된 폴란드인들은 클라이페다와 틸지트 인근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19]
4. 2.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옛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인과 리투아니아인들은 서부 독일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추방되었다. 소련은 1944년 리투아니아를 재점령했고, 1945년 멤멜 지역은 새로 형성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으며, 리투아니아 소 지역의 나머지는 폴란드(현재 바르미아-마주리 주를 형성하는 작은 부분)와 소련(칼리닌그라드 주의 동부 지역)으로 분할되었다.[20]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칼리닌그라드 주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제공했다. 그러나 안타나스 스네치쿠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20] 2010년, 1990년에 소련 지도부가 칼리닌그라드를 대가로 독일에 반환하는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비밀 문서가 발견되었으나, 이 제안은 독일 외교관에 의해 거부되었다.[20] 소련 해체 이후, 칼리닌그라드 주는 러시아의 월경지가 되었다. 현재 리투아니아, 독일, 폴란드는 이 지역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
5. 민족 구성
소리투아니아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을 리에투비닝카이(Lietuvininkai)라고 불렀다.[26][27] 역사적으로 리에투비닝카이는 모든 리투아니아인을 부르는 두 가지 명칭 중 하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리투비스'라는 단어가 더 널리 사용되었지만, 소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비닌카스'가 선호되었다.
1816년 이전 기록은 단편적이고 불확실하지만, 1825년부터 1836년까지 프로이센에서 사용 언어를 집계했다. 1709년 이전에는 많은 사람이 거주하여 30만 명에 달했으나, 1709~1711년 페스트 유행으로 인구의 53%에 해당하는 리투아니아인이 사망했다.
1914년 이전에는 독일계 리투아니아인이 독일어를 사용했고, 클라이페다와 마넨 부근에서는 리투아니아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 추방으로 독일계가 독일로 송환되면서 리투아니아어가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독일어의 잔재도 많아 한동안 구두로 사용되었다.
1873년 이전에는 독일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독일어가 이민으로 인해 증가했다. 리투아니아인도 독일 문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1924년에는 소 리투아니아인의 24%가 자신을 리투아니아인으로, 42%가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또는 클라이페다인(독일어 클라이페타 방언을 사용하는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인식했다.
소리투아니아는 고대 프로이센인, 독일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 '''고대 프로이센인:''' 훗날 독일 기사단의 핵심 영토가 된 지역의 원주민이자 주요 거주민이었다. 정복과 기독교 개종 이후, 프로이센 귀족들은 기사단의 봉신이 되었고 독일화되었다. 마지막 프로이센어 사용자는 17세기 말경에 사라졌다.
- '''독일인:''' 1709~1711년 이전에는 소 리투아니아의 독일인 비율이 낮았다. 이후 독일인은 프로이센 내에서 지배적인 민족 집단이 되었다.[25]
- '''폴란드인:''' 다르케멘(현재 오지르스크)과 골다프 지역은 리투아니아 소지방과 남쪽의 마주리아 지역 사이의 과도기적 지역으로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모두 상당수 거주했다.[28]
독일화는 직접적,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1709년 흑사병 이후 약 9천 개의 농장이 비었고, 1736년부터 1756년까지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농장을 되살렸다. 이로 인해 독일인 비율이 증가했다. 1800년까지 대부분의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다.[1] 1873년 이전에는 강제적인 독일화는 없었다.[1] 독일 통일 이후,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웠다.[1]
5. 1. 리에투비닝카이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의 기원
1816년 이전의 기록은 단편적이고 불확실하지만, 1825년부터 1836년까지 프로이센 당국이 사용 언어를 집계했다.[24] 1709년 이전까지 소리투아니아 지역에는 많은 사람이 거주하여 인구가 30만 명에 달했으나, 1709년부터 1711년까지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인구의 53%를 차지하던 리투아니아인들이 사망했다.[24]1914년 이전에는 독일계 리투아니아인들이 독일어를 사용했다. 클라이페다와 마넨 부근에서는 리투아니아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 추방으로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로 송환되면서 리투아니아어가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독일어의 잔재도 많아 한동안 구두로 사용되었다.[24]
1873년 이전에는 독일어화가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민에 의해 독일어 사용이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리투아니아인들도 독일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24] 1924년에는 소(小) 리투아니아인의 24%가 자신을 리투아니아인으로, 42%가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또는 클라이페다인(독일어 클라이페타 방언을 사용하는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인식했다.[24]
5. 1. 1. 역사 기술
초기에는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이 프로이센의 토착민으로 여겨졌다. 이는 A. 베젠베르거의 프로이센-리투아니아어 경계선에 근거했으며, 나드루비아인과 스칼로비아인이 서부 리투아니아인이자 리에투빈닌크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1919년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두 번째 이론은 1919년 G. 모르텐센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소(小) 리투아니아 지역의 첫 번째 리투아니아인 거주자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모르텐센은 스칼로비아인, 나드루비아인, 수도비아인이 독일 침략 이전에는 프로이센인이었고, 리투아니아인은 15~16세기에 사모기티아와 수발키야에서 온 식민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G. 모르텐센은 황무지 개념을 만들어, 네만 강 양쪽의 카우나스까지의 지역이 13~14세기에 황폐해졌다고 보았다. G. 모르텐센의 남편 H. 모르텐센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인의 재정착은 15세기 마지막 분기에 시작되었다.[21]
그러나 리투아니아 역사학자 K. 야블론스키스, 고고학자 P. 쿨리카우스카스 등은 황량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숲(고대 독일어 ''wildnis, wiltnis'')과 대규모 리투아니아 이주의 개념을 부인했다. 리투아니아 이주에 대한 생각은 안타나스 살리스, 제노나스 이빈스키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J. 유르기니스는 리투아니아로 가는 전쟁 도로에 대한 묘사를 연구하여, ''wildnis''라는 단어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된 곳을 발견했다. 그는 wildnis가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승인에 따라 법적으로 기사단에 속했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기사단의 지배를 받지 않은 리투아니아의 일부라고 추론했다. 황폐한 땅에 대한 이론은 Z. 징케비치우스에 의해 비판되었는데, 그는 오래된 발트어 지명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H. 워미안스키는 나드루비아인과 스칼로비아인 부족이 부족 사회 질서 시대부터 리투아니아 식민지화로 인해 민족적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했다. 언어학자 Z. 징케비치우스는 나드루비아인과 스칼로비아인이 독일 침략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리투아니아인과 프로이센인 사이의 과도기적 부족이었다고 추정했다.
5. 1. 2. 배경
독일의 침략과 전쟁은 발트해 지역의 질서를 바꾸었다. 튜턴 기사단이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는 일부 축소되었다. 네만 강은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선이 되었고, 수도비아 숲은 방어 요새 역할을 했다.[21] 전쟁은 인구 감소와 발트 부족의 이주를 촉진했다. 나드루비아와 스칼로비아는 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받아 민족적으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5. 1. 3.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 인구

나중에 소(小) 리투아니아가 된 나드루비아와 스칼로비아는 프로이센 민족을 기반으로 했지만, 지명에서는 리투아니아적 요소가 우세했다.[24] 이 지역은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했다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온 난민과 이주민들에 의해 다시 채워졌다.[24] 1422년 멜노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고 트라카이, 빌뉴스, 사모기티아에서 온 리투아니아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리투아니아 농부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트라카이 보이보데의 수도비아 숲으로 도망쳐 살기도 했는데, 이는 16세기 후반까지 가능했다.
1816년 이전의 기록은 불확실하지만, 1825년부터 1836년까지 프로이센에서 사용 언어를 조사했다. 1709-1711년에는 페스트 유행으로 인구의 53%였던 리투아니아인들이 사망했다. 1914년 이전에는 독일계 리투아니아인들이 독일어를 사용했고, 클라이페다와 마넨 부근에서는 리투아니아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 추방으로 독일계가 독일로 돌아가면서 리투아니아어가 주류가 되었지만, 독일어의 잔재는 한동안 구두로 사용되었다.
1873년 이전에는 독일어화가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어 사용은 이민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리투아니아인들도 독일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1924년에는 소(小) 리투아니아인의 24%가 자신을 리투아니아인으로, 42%가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또는 클라이페다인(독일어 클라이페타 방언을 사용하는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인식했다.
5. 2. 분포
리투아니아 소지역은 15세기 또는 16세기에 독특한 민족 문화 지역으로 등장했다. 이 지역은 북쪽의 댕게 강 하류와 남쪽의 프레골랴 강(Priegliuslt) 주요 지류 사이의 지역을 포함하며, 면적은 약 11400km2이다.[24] 과거 리투아니아 소지역의 민족 지역은 오늘날 칼리닌그라드 주의 일부(칼리닌그라드 시와 그 주변 제외),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 주의 일부 지역,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 구 자치구, 실루테 구 자치구, 클라이페다 시, 파게지아이 자치구, 네링가 자치구를 포함한다.이 지역의 인구는 발트 부족, 리투아니아인 이주민,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식민주의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인구의 기층은 주로 옛 프로이센인(삼비아인, 북 바르티안인, 나탕기안인, 스칼로비아인, 나드루비아인), 수도비아인, 일부 쿠로니아인)이거나 인접 지역 출신(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온 신규 이주민, 사모기티아인, 수도비아인, 프로이센인 등)이었다.
18세기 동안 와나 강 동쪽과 프레골랴 강 하류 북쪽 지역에서 리투아니아 인구 비율은 약 절반으로 감소했다. 특히 1709–1711년의 흑사병 이후 리투아니아 인구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1724년 프로이센 국왕 프레데리크 빌헬름 1세는 폴란드인, 사모기티아인, 유대인의 리투아니아 소 지역 정착을 금지하고 독일인 식민지화를 시작했다.[25] 19세기 말부터 독일화가 가속화되면서 리투아니아인은 멜멜란트 지역의 약 절반과 틸제 및 라가이네에서만 다수를 차지했다.
5. 2. 1. 행정
리투아니아 소지역은 행정적으로 처음에는 나드루비아와 스칼로비아로 구분되었으며,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현(縣), 리투아니아 주,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또는 "리투아니아" (Litt(h)auen|리트(ㅎ)아우엔de)라는 이름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24] 행정 구역인 리투아니아 주(삼비아 주의 행정 구역 일부) (약 10000km2)는 당시 클라이페다(메멜), 틸제(틸시트, 소베츠크), 라가이네(라가니타, 라그니트, 네만) 및 이스루티스(인스터부르크, 체르냐홉스크)의 4개 구역으로 구성되었다.5. 2. 2. 계산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의 실제 거주 지역은 행정 구역보다 넓었으며, 19세기와 20세기 초 독일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준으로 리투아니아 지역을 결정했다.[3]- 지명: 아달베르트 베첸베르거와 M. 퇴펜은 지명을 분석하여 리투아니아어와 구(Old) 프러시아어 사이의 언어 경계를 파악했다. 우나 강 우안과 프레골랴 강 북쪽의 지명은 대부분 리투아니아어 특징('-upē', '-kiemiai', '-kiemis', '-kēmiai')을 보였고, 좌안은 프러시아어 특징('-apē', '-kaimis')을 보였다. 이 지역(약 11430km2)은 리투아니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간주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소리투아니아로 이해된다.
- 건축 양식: 쾨니히스베르크, 프레골랴 강 하류, 우나 강 사이 지역은 독일-리투아니아 건축 양식이 혼합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주로 프러시아인과 리투아니아인, 나중에는 독일인과 리투아니아인이 거주했다. 리투아니아 주는 이 지역과 삼비아 반도를 포함하여 더 넓은 소리투아니아 지역(약 18000km2)을 나타낸다.
- 어휘: 리투아니아 시골 일상 어휘 사용 지역을 기준으로 리투아니아 지역을 파악했다.
- 교회 설교 언어: 1719년에 리투아니아어 설교가 사용된 교회를 기준으로 F. 테츠너는 리투아니아 교구의 남쪽 경계를 정의했다. 그는 20세기 초 "200년 전 리투아니아어 사용 지역은 프로이센의 현재 10개 구를 제외하고도 쾨니히스베르크, 주비닌카이, 밸루바, 기르다바, 다르키에미스 및 굼비네 구를 포함했다"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른 리투아니아 지역의 경계는 행정 구역보다 더 남서쪽에 위치했다.
5. 3. 민족 구성
리투아니아 소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을 리에투비닝카이(Lietuvininkai)라고 불렀다.[26][27]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리에투비닝카이는 모든 리투아니아인을 부르는 두 가지 명칭 중 하나였다. 1341년 프스코프의 두 번째 연대기에는 리에투비닝카이(''Литовники'')가 언급되어 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리투비스'라는 단어가 더 널리 사용되었지만, 소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비닌카스'가 선호되었다.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은 사모기티아에 사는 북쪽 이웃들을 "러시아 리투아니아인"이라고 불렀고, 수와우키 지역의 남동쪽 이웃들을 "폴란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불렀다.리투아니아인들은 주로 농촌 지역에 거주했다. 1709~1711년 흑사병 발생 이전에는 리투아니아 지역과 랍구바 지구에 최대 30만 명이 거주했으며, 이 기간 동안 약 16만 명의 리투아니아인이 사망했는데, 이는 이 지역 인구의 53%에 해당했다.
1816년 이전의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1825년부터 1836년까지 프로이센에서 사용 언어를 집계했다. 1914년 이전에는 독일계 리투아니아인에 의해 독일어가 사용되었다. 리투아니아어는 클라이페다와 마넨 부근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인 추방으로 독일계가 독일로 송환되면서 리투아니아어가 주류가 되었다.
1873년 이전에는 독일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독일어가 이민으로 인해 증가했다. 리투아니아인도 독일 문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1924년에는 소 리투아니아인의 24%가 자신을 리투아니아인으로, 42%가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또는 클라이페다인(독일어 클라이페타 방언을 사용하는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인식했다.
5. 3. 1. 고대 프로이센인
프로이센인은 훗날 독일 기사단의 핵심 영토가 된 지역의 원주민이자 주요 거주민이었다. 정복과 기독교 개종 이후, 프로이센 귀족들은 기사단의 봉신이 되었고 독일화되었다. 기사단 장교들은 1309년에 지역 주민들과 프로이센어로 대화하는 것을 중단했다. 기사단 소멸과 종교 개혁 확산 이후 프로이센인의 상황은 다소 나아졌다. 1545년부터 1561년 사이에 프로이센어로 된 3개의 개혁교리서가 출판되었다.프로이센 마을 사람들은 프로이센 지역 북부에서는 리투아니아인으로, 남부에서는 독일인 또는 폴란드인으로 동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리투아니아인과 민족 프로이센인이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지역도 있었다. 삼비아 반도에서는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과 독일인 인구가 16세기와 17세기 초까지 소수였다. 이후 독일인이 반도의 민족 다수가 되었고 리투아니아인은 소수로 남았다. 요나스 브레트쿠나스의 사례는 프로이센-리투아니아어 이중 언어 구사 현상을 보여준다. 마지막 프로이센어 사용자는 17세기 말경에 사라졌다.
5. 3. 2. 독일인
1709~1711년 이전에는 소(小) 리투아니아의 독일인 비율이 낮았다. 이후 독일인은 프로이센 내에서 지배적인 민족 집단이 되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인 1945년, 소련은 동유럽 거의 전부를 점령하여 프로이센인, 리투아니아인, 독일인을 가리지 않고 사실상 지역 주민을 집단 학살했다. 겨울 동안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얼어붙은 만을 건너갔고, 집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제거되었다.5. 3. 3. 폴란드인
다르케멘(현재 오지르스크)과 골다프 지역은 리투아니아 소(小)지방과 남쪽의 마주리아 지역 사이의 과도기적 지역으로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모두 상당수 거주했다.[28] 폴란드인이 세운 마을로는 카자체(Piątkipl), 네크라소보(Karpowo Wielkiepl) 및 말체보(Karpówkopl)가 있었다.[35] 브라스니켄의 크렌츠키 가문, 메흐케멘의 메탈스키 가문 등 폴란드 귀족 가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사례가 있었다.[36]1724년부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리투아니아 소(小)지방에 새로운 폴란드인 정착을 금지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5년 프로이센 자료에 따르면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이 지역의 북부 지역에 거주했으며, 가장 많은 폴란드인들이 틸시트(Tylżapl, 현재 소비에츠크)와 스톨루포넨(Stołupianypl, 현재 네스테로프) 지역에 거주했다.[28]
11월 봉기 실패 이후 폴란드 반군들은 1832년에 이 지역, 특히 틸시트와 인스터부르크(Wystrućpl, 현재 체르냐홉스크)에 억류되었다.[37] 폴란드 1월 봉기 동안 폴란드의 러시아 분할 지역에서는 인스터부르크(Wystrućpl)에 반군을 위한 무기를 밀수하는 비밀 폴란드 조직이 있었다.[38] 이 조직은 1864년 11월 프로이센 당국에 의해 발각되었다.[3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인들이 호헨부르흐 강제 수용소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폴란드 전쟁 포로들이 Stalag I-C와 Stalag Luft VI 전쟁 포로 수용소의 수감자들 중 하나였고,[42] 폴란드 민간인들도 (클라이페다와 틸시트 인근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19] 폴란드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활동하여 클라이페다 근처에서 폴란드 지하 언론의 주요 밀수 지점 중 하나를 운영했으며,[43] 인스터부르크(Wystrućpl)에는 농민 대대의 지부가 있었다.[44]
5. 4. 독일화
독일화 과정은 직접적,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구 프로이센인들은 개종 후 독일인과 동일한 시민권을 받았지만, 구 프로이센 귀족들은 권리 획득을 위해 기다려야 했다. 1709년 흑사병 이후 약 9천 개의 농장이 비었고, 1736년에서 1756년까지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농장을 되살렸다. 이로 인해 독일인 비율이 증가했다. 1800년까지 대부분의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다.[1] 1873년 이전에는 강제적인 독일화는 없었다.[1] 독일 통일 이후,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들은 독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웠다.[1] 19세기 말 독일어가 교육 시스템에서 의무화되었지만, 나치 시대에도 신문과 책은 리투아니아어로 출판되었고, 교회 예배도 리투아니아어로 진행되었다.[1] ''아우슈라''(새벽) 또는 ''바르파스(종)''와 같은 리투아니아 정기 간행물은 러시아 통제 하의 리투아니아 근처에서 인쇄되어 밀수되었다.[1]6. 문화
마르티나스 마즈비다스가 준비한 최초의 리투아니아어 책은 1547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인쇄되었으며, 최초의 리투아니아어 문법서인 다니엘 클라인의 ''Grammatica Litvanica''는 1653년에 인쇄되었다.
리투아니아 소(小) 지역은 철학자이자 작가인 비두나스, 목사이자 시인이자 ''사계''의 저자인 크리스티요나스 도넬라이티스의 고향으로, 이는 리투아니아 문학의 시작을 알린다. ''사계''는 리투아니아계 프로이센 시골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리투아니아 소(小) 지역은 러시아가 통제하는 리투아니아 본토에서 박해받던 리투아니아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그 영토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을 때 서서히 폴란드화되었고, 특히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면서 심하게 러시아화되었다. 1864년부터 1904년까지 러시아에서 리투아니아어 인쇄가 금지되는 동안, 리투아니아 서적은 틸지트, 라그니트, 메멜, 쾨니히스베르크와 같은 동프로이센 도시에서 인쇄되었고, ''크니게네샤이''에 의해 러시아로 밀수되었다. 요나스 바사나비치우스가 편집한 ''아우슈라'', 빈카스 쿠디르카의 ''바르파스''와 같은 최초의 리투아니아어 정기간행물이 리투아니아 소(小) 지역에서 출판되었다. 이들은 19세기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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