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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분 (손견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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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분은 손견의 형인 손강의 아들로, 손견의 조카이다. 손견의 거병에 참여하여 유표를 공격하는 등 활약했으며, 손견 사후에는 원술에게 의탁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강동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고, 조조와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는 예장 태수로 11년간 재직하다 사망했으며, 아들 손린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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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분 (손견 조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손분
본관오군 부양현
백양(伯陽)
작위도정후(都亭侯)
사망 년도210년
활동 시기후한 말
관직
소속손견원술손책 → 손권
관직예장태수(豫章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
가족 관계
아버지손강(孫羌)
아들손준 (孫峻)
손안(孫安)
손희(孫熙)
손기(孫奇)
조창의 아내

2. 생애

손분(孫賁)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손견의 형인 손강의 맏아들이다. 동생으로는 손부가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부인 손견에게 의탁하여 길러졌다.[5]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아직 어렸던 동생을 직접 키웠기에 형제간의 우애가 깊다는 평판을 얻었다.

초기에는 군의 독우(督郵)와 수장(守長)을 지내다가, 숙부 손견동탁 토벌을 위해 거병하자 관직을 버리고 합류했다.[5] 손견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91년 손견이 유표와의 전투 중 전사하자, 당시 손책보다 나이가 많았던 손분은 남은 군대를 수습하여 손견의 옛 주군이었던 원술에게 의탁했다.[5]

원술 밑에서 예주 자사, 단양 도위 등으로 임명되었으나,[5][15] 197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자 그를 떠나 강동으로 건너가 손책에게 합류했다.[5] 손책을 도와 유훈, 황조 등을 공격하고 강동 평정에 기여했으며, 그 공으로 예장태수로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5][15]

건안 5년(200년), 조조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딸을 조조의 아들 조창에게 시집보냈다.[15][5] 208년 조조가 형주를 점령하자 잠시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주치의 만류로 그만두었다.[15][5] 같은 해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정로장군에 임명되었다.[15]

손분은 예장 태수로 11년간 재직하다가 사망했다.[5] 정확한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나, 정황상 건안 15년(21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 손린이 뒤를 이었다.[5]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관계

손분은 손견의 형인 손강의 맏아들이며, 동생으로 손보와 손부가 있었다. 손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손분과 손부는 숙부인 손견에게 맡겨져 길러졌다. 손분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아직 젖먹이였던 동생 손보를 직접 길렀기에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에 군의 독우(督郵)와 현장(縣長)을 지내다가, 숙부 손견이 동탁 토벌을 위해 거병하자 관직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낙양에서 돌아온 손견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형주유표를 공격할 때는 부대를 이끌기도 했다.

손견이 전사한 후에는 손책보다 나이가 많았던 손분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손견의 주군이었던 원술에게 의탁했다. 원술 휘하에서 오경과 함께 활동했으며, 예주 자사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젊은 나이였기에 명목상의 직책에 가까웠다.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자 손분은 오경, 주유, 노숙 등과 함께 원술을 떠나 손책에게 합류했는데, 이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수춘에 억류되었다가 나중에야 합류할 수 있었다.

건안 5년(200년), 조조의 주선으로 손분의 딸이 조조의 아들인 조창에게 시집가기도 했다. 손분에게는 아들 손린이 있었으며, 손린은 후에 손분의 뒤를 이었다.[5]

2. 2. 손견 군에서의 활약

손분은 군의 독우(督郵)와 현장(縣長)을 지내다가 숙부 손견동탁 토벌을 위해 거병하자 관직을 버리고 합류했다. 그는 손견의 친형인 손강의 장남이었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 손보와 함께 숙부 손견에게 의탁하여 길러졌다.[5]

손분은 낙양에서 돌아온 손견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형주유표를 공격할 때는 부대를 이끌기도 했다.[5] 191년 손견이 유표와의 전투 중 전사하자, 손분은 당시 손책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남은 군대를 수습하여 손견의 유해를 고향으로 운구했다.[5] 이후 손견의 주군이었던 원술에게로 갔다.[5]

2. 3. 원술 휘하에서의 활동

초평 3년(192년), 숙부 손견유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손분은 손견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영구를 본향으로 옮긴 뒤 원술에게 의탁했다. 당시 손책보다 나이가 많았던 손분은 많은 군사와 장수를 모아 손견의 옛 주군이었던 원술에게 합류했다.[5]

이듬해(193년), 원술의 명으로 원소가 임명한 구강군 태수 주앙을 음릉(陰陵)에서 격파했다. 이에 원술은 표를 올려 손분을 과거 손견이 지냈던 예주 자사로 삼았다. 하지만 손분이 아직 젊었기에 이는 명목상의 직책에 가까웠다. 이후 단양 도위로 전임되었고, 정로장군을 대행하며 산월 토벌 임무를 맡았다.

조정에서 유요를 양주자사로 임명했으나, 그는 치소인 수춘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손분은 오경(손견의 처남)과 함께 유요를 받아들여 곡아(曲阿)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원술이 강동 지역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유요는 원술에게 반기를 들었고, 손분은 오경과 함께 유요에게 쫓겨나 역양(歷陽, 현재의 허현)에 주둔하게 되었다.

원술의 명령으로 손분은 오경과 함께 다시 유요를 공격했으나, 유요가 보낸 횡강진(橫江津)의 번능·우미와 당리구(當利口)의 장영을 1년 넘게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전했다.

흥평 원년(194년) 12월, 원군으로 온 손책과 힘을 합쳐 마침내 번능, 우미, 장영을 격파하고 유요를 공격하여 예장군으로 몰아냈다. 이후 오경과 함께 손책의 명으로 원술에게 돌아가 전황을 보고했다.

건안 2년(197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중나라를 세우자, 손분은 구강군 태수로 임명받았으나[14]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처자를 수춘에 남겨둔 채 강남으로 가서 손책에게 합류했다. 이때 오경, 주유, 노숙 등도 원술을 떠나 손책에게 귀순했다. 손분의 아내와 자녀들은 나중에야 그와 합류할 수 있었다.[5]

2. 4. 손책과의 협력과 강동 평정

숙부 손견이 전사한 후, 손책보다 나이가 많았던 손분은 손견의 남은 군대를 이끌고 원술 휘하로 들어갔다.[5] 원술 밑에서 예주 자사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실권은 거의 없었다.[5][15]

유요가 손책의 외숙인 오경을 공격하자, 손분은 주유와 함께 오경을 도우러 나섰다. 이때 강동으로 진출한 손책이 도착하였고, 손분과 주유는 손책의 군대에 합류했다.[5] 이후 손분은 원술의 명령으로 오경과 함께 유요를 공격했으나 고전하기도 했다. 손책의 도움으로 유요군을 격파하고 유요를 예장으로 몰아냈다.

건안 2년(197년),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손분은 오경, 주유, 노숙 등과 함께 원술을 완전히 떠나 손책에게 귀순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수춘에 억류되었다가 나중에야 합류할 수 있었다.[5] 손분은 손책을 따라 강동 평정 전쟁에 참여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이 원술의 잔존 세력인 여강태수 유훈과 그를 돕던 강하태수 황조를 공격할 때 종군하였다.[15][5]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손책은 유요 사후 아직 세력이 남아있던 예장군을 평정하고 상표(上表)하여 손분을 예장 태수로 삼았다.[15] 손분은 이후 도정후(都亭侯)에도 봉해졌다.[15]

건안 5년(200년),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자 원소와 대치 중이던 조조손책과의 관계를 다지기 위해 혼인 동맹을 추진했고, 이때 손분의 딸이 조조의 아들 조창에게 시집갔다.[15][5]

2. 5. 조조와의 관계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후, 원소와 대치하던 조조손책을 견제하기 위해 혼인 관계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건안 5년(200년), 조조의 주선으로 손분의 딸이 조조의 아들 조창에게 시집갔다.[15][5]

관도 전투 시기에는 조조의 부하 장수 하후돈으로부터 형주유표를 견제해달라는 요청을 서신으로 받기도 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여 유종의 항복을 받아내자 손분은 두려움을 느꼈다. 기존에 조조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주치의 설득으로 실행하지 않았다.[15][5]

2. 6. 죽음

예장태수 관직에 11년간 있다가 사망했으며,[5] 아들 손린이 뒤를 이었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몇 가지 정황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손분이 맡았던 정로장군 직책은 손교가 이어받았고, 예장 태수 자리는 손분 사후 아들 손린에게 이어졌다가 이후 고소, 채유 순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고소는 예장 태수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사망했고, 채유는 여몽의 추천으로 태수가 되었다는 기록 등을 종합하면, 손분은 건안 15년(21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가계

손견 · 손정의 계보는 각 항목을 참조할 것.

손강(손분의 아버지)

참조

[1] 문서 As Sun Ben is older than Sun Ce, his birth year should be before 175.
[2] 서적 Sun Ben's biography in ''Sanguozhi'' indicate that he was Administrator of Yuzhang for 11 years when he died.
[3] 서적 Sun Ben's biography in ''Sanguozhi'' indicate that Sun Lin was 9 (by East Asian reckoning) when he took over from his father as Administrator of Yuzhang. The biography also indicate that Sun Lin died in the 12th year of the ''Chi'wu'' era of Sun Quan's reign.
[4] 서적 This event was listed in Zhu Zhi's biography in ''Sanguozhi''.
[5] 서적 "In Sun Quan's biography in ''Sanguozhi'', it is mentioned that in 210 (15th year of the ''Jian'an'' era), Poyang Commandery was carved out from Yuzhang. ([建安]十五年,分豫章为鄱阳郡...) ''Sanguozhi'', vol.47. It is unknown if Sun Ben died before or after this division."
[6] 서적 正史 三国志 6巻 筑摩書房
[7] 서적 写真と絵でわかる三国志 西東社
[8] 서적 三国志
[9] 서적 真誥・稽神枢
[10] 서적 晋書
[11] 서적 孫策が形勢が有利になった後、すぐに攻めかかるように孫賁に命じていたため、僮芝が病気になったことを知ると、孫賁は直ちに孫輔と周瑜を使って廬陵を攻略した。
[12] 서적 三国志
[13] 서적 三国志
[14] 문서 원술은 중나라를 건국하면서, 구강태수를 회남윤(淮南尹)으로 고쳤다. 실제로는 회남윤을 제수받았을 것이다.
[15] 서적 자치통감(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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