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주치 (동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치(朱治)는 중국 후한 말, 오(吳)나라의 무장이다. 젊은 시절 현의 관리를 거쳐 효렴으로 추천되었으며, 손견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동탁 군을 격파하고, 손견 사후에는 손책을 보좌하며 원술에게 의탁했다. 손책에게 강동 평정을 권유하고 오군도위로 승진했으며, 손책 사후에는 손권을 섬기며 오군태수와 부의장군을 역임했다. 손권 대에 비릉후에 봉해졌으며,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오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224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주재가 작위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24년 사망 - 글염
    글염은 선조의 신임을 받아 선조상서로 승진하여 관료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고 강압적인 개혁 방식으로 정치적 입지를 잃었으며, 한성부 판윤에 임명될 뻔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승문원에서 글을 다듬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 156년 출생 - 동소
    동소는 후한 말부터 위나라 초까지 활동한 정치가이자 책사로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하다 조조에게 천거된 후 헌제 천도,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 중요한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위나라 건국과 안정에 공헌했다.
  • 156년 출생 - 손견
    손견은 후한 말의 군벌이자 오나라의 시조이며 손책과 손권의 아버지로, 황건적의 난 진압 등 공을 세웠고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낙양 함락에 기여했으나, 향양 전투 중 전사했으며, 뛰어난 무력과 리더십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과감한 성격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 동오의 장군 - 사일
    사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초 교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궁을 보좌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합포 태수를 역임했으나, 손권에게 귀순 후 사휘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며 격변기의 사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동오의 장군 - 미방
    미방은 유비 휘하에서 활약하다 관우와의 불화로 손권에게 투항하여 오나라 장수가 되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에게 항복하려다 처형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주치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주치
본관고장현(故鄣縣)
군리(君理)
출생156년
사망224년 (68세)
소속
활동 시기후한 말 ~ 삼국 시대
관직 및 작위
주요 관직사마(司馬)
도위(都尉)
오군 태수(吳郡太守)
부의장군(扶義將軍)
안국장군(安國將軍)
작위비릉후(毗陵侯)
가족 관계
자녀주채(朱才)
주지(朱紀)
주위(朱緯)
주만세(朱萬歲)
친척주연(朱然) (외조카)
손책(孫策)의 딸 (며느리)
생애
초기 경력손견(孫堅) 휘하에서 사마(司馬)로 복무
손견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
손책 휘하손견 사후 손책(孫策)을 섬김
오군 태수손권(孫權)을 섬기며 오군 태수를 역임
202년부터 오군을 다스림
부의장군손권으로부터 부의장군(扶義將軍)에 임명됨
안국장군만년에 안국장군(安國將軍)에 임명됨
사망224년 사망
기타 정보
봉읍고장후(故鄣侯)

2. 생애

주치는 젊은 시절 현의 관리가 되었으며, 효렴으로 추거되어 양주에서 종사로 일했다. 이후 손견을 따라 각지를 정벌하며 공을 세웠다. 188년에는 손견을 도와 장사, 영릉, 계양에서 일어난 주조(周朝), 소마(蘇馬) 등의 모반을 토벌하여 도위를 대행했고, 190년에는 반동탁연합군에 참가하여 양인 전투에서 동탁의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에 입성했다. 이후 독군교위를 대행하며 서주목 도겸을 도와 황건적을 토벌했다.[7]

손견이 죽은 후에는 손책을 보좌하며 원술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원술의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고 손책에게 강동을 평정하여 독립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 태부 마일제에게 초빙되어 속관이 되었고, 오군도위로 승진했다. 곡아에 있던 손책의 가족을 보호하고, 전당으로 진격하여 오군태수 허공을 격파하여 오군을 장악하고 오군태수를 겸직했다. 194년의 일로 추정된다.[7]

200년 손책이 죽자 장소 등과 함께 손권을 주인으로 모셨다. 202년 손권에 의해 정식으로 오군태수에 임명되었고 부의장군을 겸임하며 누, 유권, 무석, 비릉을 봉읍으로 받았다. 소수 민족과 산월을 토벌하고 황건 잔당을 잡아 죽이는 등 동남쪽 평정에 힘썼다.[7]

손분이 조조에게 인질을 보내려 하자 이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했다.[7]

222년 비릉후에 봉해지고 오군태수를 겸임했으며, 223년 안국장군에 임명되고 고향 고장으로 봉읍이 옮겨졌다. 고향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1년 후 오군으로 돌아왔다. 224년 사망했다.[7]

손권의 아우 손익이 성급하고 감정적인 성격이라, 주치가 자주 꾸짖고 도의로 회유하였다.[7] 주치는 오군태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공족 자제들과 '오군 4성'이라 일컫는 군의 유력 호족들을 많이 등용했다. 군에는 관리가 항상 수천 명 있었고, 몇 년에 한 번씩 왕부로 수백 명씩 보냈다. 주치는 군에서 보내는 공물도 매년 끊이지 않았으며, 손권은 후하게 보답했다.[7] 늙어서 고향을 그리워하여 고장현에 주둔하며 산월을 진무하고, 고을 부로들과 교류하며 1년을 지내고 다시 오군으로 돌아왔다.[7]

2. 1. 초기 활동

젊은 시절 현의 관리를 지냈으며, 효렴으로 추천되어 양주에서 종사로 임명되었다. 손견을 따라 여러 지역을 정벌했으며, 188년 장사, 영릉, 계양에서 일어난 주조(周朝), 소마(蘇馬) 등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손견의 표로 도위를 대행했다.[7] 190년 반동탁연합군이 일어나자 손견을 따라 종군하여 양인 전투에서 동탁의 군대를 무찌르고 낙양에 입성했다. 손견의 표로 독군교위를 대행하고, 동쪽으로 가 서주목 도겸을 도와 황건적을 토벌했다.[7]

2. 2. 손책 보좌

191년 손견이 사망한 후, 주치는 손견의 뒤를 이은 손책을 보좌하며 원술에게 의탁했다.[7] 원술의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본 주치는 손책에게 강동을 평정하여 독립할 것을 권유했다.[7] 마침 태부 마일제에게 초빙되어 속관이 되었고, 오군도위로 승진했다.[7]

주치는 곡아로 사람을 보내 손책의 가족을 모셔오고 보호했다.[7] 이후 전당으로 진격하여 오군태수 허공을 유권에서 격파하니, 허공은 엄백호에게 달아났다.[7] 이로써 주치는 오군을 장악하고 오군태수를 겸직하게 되었다. 주치가 오군에 31년간 재직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사건이 194년에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7]

2. 3. 손권 보좌

200년, 손책이 죽자, 장소 등과 함께 손권을 주인으로 모셨다.[7] 202년, 손권에 의해 오군태수에 임명되었으며 부의장군을 겸임하고, 누, 유권, 무석, 비릉을 봉읍으로 받아 다스렸다.[7] 소수 민족이나 산월을 토벌하고, 손권을 도와 동남쪽을 평정했으며, 황건 잔당 진패(陳敗), 만병(萬秉) 등을 사로잡아 베어 죽였다.[7]

손분의 딸은 조창의 부인이었다.[7] 208년 조조가 형주 자사 유종의 항복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오자, 손분은 두려워 아들을 인질로 보내려 했다. 주치는 이를 듣고 손분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여 그만두게 했다.[7]

222년, 비릉후에 봉해졌으며 오군태수를 겸임했다.[7] 223년, 안국장군에 임명되었고, 고향 고장으로 봉읍이 옮겨졌다.[7] 고향 단양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1년 후 오군으로 돌아왔다.[7] 224년 사망했다.[7]

3. 가족 관계

朱治|주치중국어에게는 누이가 있었다.[1] 양자로 주연을 들였는데, 주연은 본래 주치의 생질이었다.[1] 친아들로는 주재가 있었고, 주재에게는 주완(朱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1] 그 외에 주기(朱紀), 주위(朱緯), 주만세(朱萬歲) 등의 아들이 있었다.[1] 주기의 경우 손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1] 주위와 주만세는 요절했다.[1] 주완은 서릉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있다.[3]

관계이름비고
누나?이름 불명[1]
양자주연본래 주치의 생질[1]
아들주재주완(朱琬)의 아버지[1]
손자주완(朱琬)주재의 아들, 서릉 전투 참전[3]
아들주기(朱紀)손책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1]
아들주위(朱緯)요절[1]
아들주만세(朱萬歲)요절[1]


4. 평가

진수는 주치와 여범을 옛 신하로서 기용되었다고 평가했다.[1] 주치는 부귀한 신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수레와 의복은 공급되는 것만을 썼다. 손권은 항상 주치가 국가를 위해 전력을 다해 일하는 것을 칭찬했으며, 주치의 공적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4] 손권은 주치를 매우 존경하여 그를 극진히 대우하고, 그가 참내할 때마다 직접 맞이하여 홀(笏)을 잡고 서로 배례를 나누었으며, 연회에서도 후한 대우를 했다.[5] 또한 손권은 주치에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명문에 "안국"이라고 새겼다.[6]

5. 일화

손권은 주치를 매우 존경하여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치의 공적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제갈근손권 앞에서 자문자답을 선보이며 그 속에서 은근슬쩍 주치를 나무랐고, 또한 주치의 변명을 헤아렸다. 손권은 납득하고 웃으며 "안회의 덕은 사람들 사이에 친밀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당신이 지금 한 것과 같은 말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

손권의 등용 때 추천인을 맡았던 탓에, 손권은 장군 자리를 몇 차례 거쳐 마침내 오왕이 되었는데, 주치가 매번 참내할 때마다 손권은 직접 맞이하여 홀(笏)을 잡고 서로 배례를 나누었으며, 연회에서도 후한 대우를 하고, 부하 관리들에게도 개인적인 알현을 허락했다고 한다.[5]

주치는 젊은 시절부터 정벌에 종사하여 황무 2년(223년), 잇따른 공적으로 안국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손권은 주치에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명문(銘文)에 "'''안국'''"이라고 새겼다.[6]

6.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책원술 밑에서 불우함을 탄식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며, 원래 손견의 부하라고 자칭한다. 원술의 가신이라는 설정의 여범과 함께 원술에게서 병사를 빌릴 방도를 상담하고, 손견이 일찍이 낙양에서 발견하여 가지고 돌아온 옥새를 담보로 병사를 빌리는 책략을 생각해낸다. 적벽대전에서는 여범과 함께 사방순경사로 육군 제후들을 통솔하게 한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2] 서적 三国志
[3] 서적 三国志
[4] 서적 三国志
[5] 서적 三国志
[6] 서적 古今刀剣録
[7] 서적 삼국지 https://zh.wikisou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