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쓰구 모토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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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에쓰구 모토야스는 1560년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즈모 국 스에쓰기 장을 받아 스에쓰기 씨를 칭했다. 1578년 첫 출전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오쓰 성 공격을 지휘했으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받았으나 1601년 사망했으며, 그의 자손은 조슈 번의 아사 모리 가문이 되었다. 히로시마 시의 모토야스 다리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덴쇼 4년(1578년) 형 모토하루를 따라 이나바 국미야이시 성을 공격하여 첫 출전의 공적을 세웠다. 덴쇼 13년(1585년), 모리 가가 시코쿠 정벌에 참여한 틈을 타 난조 나오히데에게 호키 국가와라야마 성을 빼앗기자, 해당 성을 탈환하여 전공을 칭송받았다. 같은 해, 겟산토다 성 성주가 되었다. 덴쇼 19년(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깃카와 쓰네토키(히로이에)에게 겟산토다 성으로의 이전을 명했기 때문에, 모토야스는 빈고 국의 칸나베 성으로 옮겨졌다.
히로시마시에 놓인 모토야스 다리는 모토야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다리는 데루모토가 히로시마를 축성할 때 함께 놓였다. 모토야스와 이 다리의 관계는 모토야스 자신이 가설을 지휘했다는 설과, 모토야스의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에 놓였다는 설이 있다. 이 다리가 놓인 강이 모토야스 다리에서 유래하여 모토야스 강으로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모토야스는 간접적으로 강의 이름에도 관련되어 있다.
2. 생애
분로쿠 4년(1595년) 2월 22일 대장대보에 임명되었으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분로쿠의 역 후 게이초 3년(1598년), 세토 내해에 접한 작은 반도 위에 오지야마 성을 축성하고 거성을 칸나베에서 옮겼다. 적남 모토노부도 이 성에서 태어났다.
게이초 5년(1600년),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및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대립하자, 모리 가문 내에서는 어느 쪽에 협력할지 크게 논란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모토야스는 가문 내의 수습에 힘쓰면서, 데루모토의 명을 받아 가타타 모토요시 등과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의 소령이었던 이요 국의 주민 구에다 마타자에몬에게 내응하도록 서신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내응 공작에도 종사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에이로쿠 3년(1560년) 아키 국다카다 군요시다 장에서 아키 국의 전국 다이묘였던 모리 모토나리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모토나리로부터 이즈모 국 스에쓰기 장 2400 관의 영지와 스에쓰기 성을 하사받아 성씨를 '스에쓰기'라고 칭했다. 동복 형인 모토아키가 스기모리 가에 양자로 들어간 뒤에는 스기모리 가의 가독을 이었다고도 한다.
덴쇼 13년(1585년), 모토아키가 급사하자 그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2. 2. 임진왜란 참전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에 주군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조선에 출진했다.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을 공격하여 1,000명 이상의 적병을 격파하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큰 공을 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장을 받았다. 1595년 음력 2월 22일에는 종5위하·대장대보에 임명되었고, 도요토미 씨 성을 하사받았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스에쓰구 모토야스는 전초전인 후시미 성 공격에 참여했다. 후시미 성이 함락된 후, 모토야스는 서군의 대장으로서 15,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교고쿠 다카쓰구가 농성하는 오쓰 성을 공격했다(오쓰 성 전투). 모토야스는 본진을 나가토 산에 두고,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군세와 연계하여 대포로 성을 공격했다. 9월 13일에는 총공격을 시작하여 해자를 메우고 산노마루, 니노마루를 함락하여 혼마루에 육박했다. 9월 15일, 다카쓰구의 군을 항복시켰으나, 이날은 세키가하라 본전 당일이었기에 결국 본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주력 부대의 패배 소식을 들은 모토야스 등은 오사카 성으로 돌아가 항전을 준비했지만, 데루모토의 의향에 따라 오사카 성에서 퇴거하고 귀국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이 감봉되면서, 모토야스도 같은 해 11월 2일에 나가토 국 아사 군 아라타키 성 부근의 7,700석을 하사받았다.
2. 4. 말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공격에 참여하였고, 후시미 성 함락 후에는 서군의 대장으로서 15,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교고쿠 다카쓰구가 농성하는 오쓰 성을 공격했다(오쓰 성 전투). 모토야스는 본진을 나가토 산에 두고,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군세와 연계하여 대포로 성 안에 공격을 가했다. 1600년 9월 13일에는 총공격을 시작하여, 해자를 메우고 산노마루, 니노마루를 함락하여 혼마루에 육박했고, 9월 15일에는 성주 다카쓰구의 군을 항복시켰지만, 이날은 세키가하라 본 전투 당일이었고, 결국 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주력 부대의 패배 소식을 들은 모토야스 등은 오사카 성으로 돌아가 항전을 준비했지만, 모리 데루모토의 의향에 따라 오사카 성을 퇴거하고 귀국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이 감봉됨에 따라, 모토야스도 같은 해 11월 2일에 나가토 국 아사 군의 아라타키 성 부근의 7700석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게이초 6년 1월 13일에 오사카 기쓰의 모리 숙영지에서 병사했다. 향년 42세였다. 어린 적남 모리 모토노부가 뒤를 이었다.
모토야스의 자손은 후에 10500석을 하사받아, 조슈 번 일문 가로의 '''아사 모리 가'''가 되었다.
3. 가계
관계 이름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1497-1571) 어머니 미요시 씨 정실 스기하라 모리시게의 딸 (?-?) - 이혼 계실 야노노 츠보네(?-1611) - 요시미 히로요리의 딸. 1611년7월 7일(게이초 16년 5월 27일) 사망. 스오국 야마구치 슈케이사에 매장. 법명은 게이요 에이가. 측실 신쇼인(?-1660) - 교토 가모 씨의 딸. 1660년5월 20일(만지 3년 4월 12일) 사망. 나가토국 아사군 호슈산 도겐지에 매장. 법명은 신쇼인 쿄슈 소하쿠. 장남 모리 모토노부(1598-1667) - 아사 모리가 3대 당주.
4. 모토야스와 모토야스 다리
5.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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