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간타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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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1945년 4월 7일부터 1945년 8월 17일까지 133일 동안 재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출범하여, 소련을 통한 강화를 모색했으나 실패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 쇼와 천황의 결단과 함께 옥음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고, 8월 17일 내각은 총사직했다. 이 내각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의 독립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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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이즈미 내각은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 의해 구성된 자민당-공명당 연립 정부 내각으로, 차기 총리 후보들을 포함한 새로운 각료들이 임명되었으며, 행정 및 의료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교육, 헌법, 형법 개혁은 이루지 못했다.
스즈키 간타로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스즈키 간타로 내각 |
내각 번호 | 42대 |
총리 | 스즈키 간타로 |
총리 전직 | 남작, 추밀원 의장 |
성립일 | 1945년 4월 7일 |
해산일 | 1945년 8월 17일 |
여당 | 대정익찬회(~1945년 6월 13일) 대일본정치회 등 |
선거 | 없음 |
해산 | 없음 |
![]() | |
정부 수반 | 스즈키 간타로 |
정부 수반 직함 | 총리 |
국가 원수 | 히로히토 |
국가 원수 직함 | 천황 |
이전 내각 | 고이소 내각 |
후임 내각 | 히가시쿠니 내각 |
의회 | 제87회 제국의회 |
의회 상태 | 다수 (연립) |
정당 | 대정익찬회(1945년 6월 13일 까지) 대일본정치회 무소속 군부 |
내각 구성원 | |
후생대신 | 오카다 다다히코 |
내무대신 | 아베 겐키 |
대장대신 | 히로세 도요사쿠 |
국무대신 | 사쿠라이 효고로 |
외무대신 | 도고 시게노리 |
사법대신 | 마쓰자카 히로마사 |
국무대신 | 사콘지 세이조 |
종합기획국 총재 | 쓰키조 아키나가 |
군수대신 | 도요다 데이지로 |
총리 | 스즈키 간타로 |
국무대신 | 야스이 도지 |
내각서기관장 | 사코미즈 히사쓰네 |
육군대신 | 아나미 고레치카 |
국무대신 | 시모무라 히로시 |
농상대신 | 이시구로 다다아쓰 |
해군대신 | 요나이 미쓰마사 |
문부대신 | 오타 고조 |
법제국 장관 | 무라세 나오카이 |
교통대신 | 고비야마 나오토 |
2. 재직 기간
1945년 (쇼와 20년) 4월 7일 ~ 1945년 (쇼와 20년) 8월 17일) 총 133일 동안 재직하였다.[1]
스즈키 간타로일본어 내각은 1945년 4월 7일부터 8월 17일까지 존속했으며, 군부, 관료, 정치인 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었다.[1]
3. 내각의 구성
담당 부처 성명 정당 임기 시작 임기 종료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 대정요산회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외무대신 스즈키 간타로 대정요산회 1945년 4월 7일 1945년 4월 9일 도고 시게노리 무소속 1945년 4월 9일 1945년 8월 17일 내무대신 아베 겐키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재무대신 히로세 토요사쿠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군부 (육군)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5일 결원 1945년 8월 15일 1945년 8월 17일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 군부 (해군)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법무대신 마츠자카 히로마사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문부대신 오타 고조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후생대신 오카다 타다히코 대일본정치회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대동아성 대신 스즈키 간타로 대정요산회 1945년 4월 7일 1945년 4월 9일 도고 시게노리 무소속 1945년 4월 9일 1945년 8월 17일 농상무대신 이시구로 타다아쓰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군수대신 토요다 테이지로 군부 (해군)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운수통신대신 토요다 테이지로 군부 (해군) 1945년 4월 7일 1945년 4월 9일 결원 1945년 4월 9일 1945년 4월 11일 코비야마 나오토 무소속 1945년 4월 11일 1945년 5월 19일 운수대신 코비야마 나오토 무소속 1945년 5월 19일 1945년 8월 17일 국무대신 사쿠라이 효고로 대일본정치회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국무대신 사콘지 세이조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국무대신 시모무라 히로시 무소속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국무대신 야스이 토지 군부 (육군) 1945년 4월 7일 1945년 8월 17일
내각관방장관은 사코미즈 히사쓰네가, 법제국 장관은 무라세 나오키가 맡았다.[1]
3. 1. 국무대신
직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스즈키 간타로 | 퇴역 해군 대장, 남작 | 외무대신, 대동아대신 겸임 |
외무대신 | 스즈키 간타로 | 퇴역 해군 대장, 남작 | 내각총리대신, 대동아대신 겸임, 1945년 4월 9일 면직[3] |
도고 시게노리 | 귀족원, 무소속 | 대동아대신 겸임, 1945년 4월 9일 임명[3] | |
내무대신 | 아베 겐키 | 내무성 | |
대장대신 | 히로세 도요사쿠 | 대장성 | |
육군대신 | 아나미 고레치카 | 육군 대장 | 1945년 8월 14일 사망으로 결원[4] |
(결원) | 1945년 8월 14일부터 | ||
해군대신 | 요나이 미쓰마사 | 해군 대장 | |
사법대신 | 마쓰자카 히로마사 | 사법성, 검사장 | |
문부대신 | 오타 고조 | 귀족원, 무소속 | |
후생대신 | 오카다 다다히코 | 중의원, 대일본정치회 | |
대동아대신 | 스즈키 간타로 | 퇴역 해군 대장, 남작 | 내각총리대신, 외무대신 겸임, 1945년 4월 9일 면직 |
도고 시게노리 | 귀족원, 무소속 | 외무대신 겸임, 1945년 4월 9일 임명 | |
농상대신 | 이시구로 다다아쓰 | 귀족원, 무소속 | |
군수대신 | 도요다 데이지로 | 예비역 해군 대장 | 운수통신대신 겸임 |
운수통신대신 | 도요다 데이지로 | 예비역 해군 대장 | 군수대신 겸임, 1945년 4월 9일 면직 |
(결원) | 1945년 4월 11일까지 | ||
고비야마 나오토 | 민간 | 1945년 4월 11일 임명, 1945년 5월 19일 면직 | |
운수대신 | 고비야마 나오토 | 민간 | 1945년 5월 19일 임명 |
국무대신 | 사쿠라이 효고로 | 중의원, 대일본정치회 | |
국무대신 | 사콘지 세이조 | 귀족원, 무소속, 퇴역 해군 중장 | |
국무대신 | 시모무라 히로시 | 귀족원, 무소속 | 정보국 총재 |
국무대신 | 야스이 도지 | 예비역 육군 중장 | 1945년 4월 11일 임명 |
3. 2.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일본어 (귀족원, 무소속)가 내각서기관장을, 무라세 나오키일본어(귀족원, 무소속)가 법제국 장관을 맡았다. 두 사람 모두 1945년 4월 7일에 임명되어 1945년 8월 17일까지 재직하였다.[1][2]직명 | 대 | 성명 | 사진 | 출신 등 |
---|---|---|---|---|
내각서기관장 | 50 | 사코미즈 히사쓰네 | -- | 귀족원, 무소속 (무파) |
법제국 장관 | 44 | 무라세 나오키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
3. 3. 정무차관
1945년 5월 15일에 임명된 각 부처별 정무차관은 다음과 같다.[1]부처 | 성명 | 정당 |
---|---|---|
외무 부대신 | 이토 지로마루 자작 | 무소속 |
내무 부대신 | 구보이 요시미치 | 대일본정치결사회 |
재무 부대신 | 나카무라 산노조 | 대일본정치결사회 |
육군 부대신 | 고야마 쿠니타로 | 대일본정치결사회 |
해군 부대신 | 아야베 겐타로 | 대일본정치결사회 |
법무 부대신 | 하마노 뎃스타로 | 대일본정치결사회 |
문부 부대신 | 하시모토 사네아야 백작 | 무소속 |
후생 부대신 | 미요시 노부후사 | 대일본정치결사회 |
대동아 부대신 | 토요타 오사무 | 대일본정치결사회 |
농상무 부대신 | 우에다 코키치 | 대일본정치결사회 |
군수 부대신 | 노다 타케오 | 대일본정치결사회 |
운수 부대신 | 마나베 기주 | 대일본정치결사회 |
- 마나베 기주는 5월 19일 이전까지 교통통신 부대신을 겸임했다.
부처 | 성명 | 정당 |
---|---|---|
외무 차관 | 쓰루 소이치 | 대일본정치결사회 |
내무 차관 | 고이즈미 준야 | 대일본정치결사회 |
재무 차관 | 니시카와 사다이치 | 대일본정치결사회 |
육군 차관 | 오오카 타다쓰나 자작 | 무소속 |
해군 차관 | 고야마 카즈이 남작 | 무소속 |
법무 차관 | 구라토미 히토시 남작 | 무소속 |
문부 차관 | 이토 고로 | 대일본정치결사회 |
후생 차관 | 사이토 마사미 | 대일본정치결사회 |
대동아 차관 | 나구모 세이사쿠 | 대일본정치결사회 |
농상무 차관 | 후지모토 스테스케 | 대일본정치결사회 |
군수 차관 | 미키 다케오 | 대일본정치결사회 |
운수 차관 | 하타 부시로 | 대일본정치결사회 |
- 하타 부시로는 5월 19일 이전까지 교통통신 차관을 겸임했다.
3. 4. 참여관
1945년(쇼와 20년) 5월 15일에 임명된 각 부처별 참여관은 다음과 같다.[1]직책 | 성명 | 출신 등 |
---|---|---|
외무참여관 | 쓰루소 시치(鶴惣市)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내무참여관 |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대장참여관 | 니시카와 사다이치(西川貞一)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육군참여관 | 오오카 다다쓰나(大岡忠綱) | 귀족원/무소속(연구회)/자작 |
해군참여관 | 카미야마 요스즈(神山嘉瑞) | 귀족원/무소속(공정회)/남작 |
사법참여관 | 쿠라토미 킨(倉富鈞) | 귀족원/무소속(공정회)/남작 |
문부참여관 | 이토 고로(伊藤五郎)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후생참여관 | 사이토 마사미(斉藤正身)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대동아참여관 | 나구모 마사아키(南雲正朔)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농상참여관 | 후지모토 스케스케(藤本捨助)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군수참여관 |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운수통신참여관 | 하타 무쓰지로(羽田武嗣郎) | 중의원/대일본정치회 |
운수참여관 | 하타 무쓰지로(羽田武嗣郎) | 중의원/대일본정치회[8] |
4. 내각의 주요 활동
1945년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자살하고, 독일 국방군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일본은 일독이 삼국 동맹의 강력한 동맹국을 잃었다. 일본 본토 공습이 심해지는 가운데, 내각종합기획국은 전쟁 지속의 어려움을 보고했지만, 군부는 정신론을 앞세워 본토 결전을 주장했다. 1945년 6월 8일 어전회의에서 "국체 보존"을 위한 "전쟁 지도 대강"이 결정되고, 제국 의회에서 관련 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하면서 전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키도 고이치 내상과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을 추진했으나, 소련은 이미 얄타 회담에서 대일 참전을 결정한 상태였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자,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수락을 주장했지만,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묵살"하며 전쟁 완수를 선언했다.[9]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만주국을 침공하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발생하면서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1945년 8월 10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지위 보장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고,[10] 중립국을 통해 연합국에 전달되었다.[12]
1945년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쇼와 천황은 국민의 생명 보호를 위해 종전 칙서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9] 각료들의 서명과 옥음 방송 녹음이 이루어졌고,[17] 1945년 8월 15일 옥음 방송을 통해 포츠담 선언 수락과 일본의 항복이 선언되었다.[19] 같은 날 궁성 사건이 발생했지만 진압되었고,[18] 아난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자결했다.[18]
1945년 8월 17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내각 총사직하였다.[17]
4. 1. 대내외 정세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자살하고, 5월 8일에는 독일 국방군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일독이 삼국 동맹의 강력한 동맹국을 잃었다.[9] 일본 본토 공습이 날마다 심해졌고, 6월 6일 내각종합기획국은 '국력의 현황' 보고서를 통해 산업 현황상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군부는 "정신론을 보충하면 본토 결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6월 8일 어전회의에서 "국체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지도 대강"이 결정되었다. 이를 위한 법안 심의를 위해 6월 9일 제국 의회가 개회되었고, 단 4일 만에 법안이 가결되었다. 이 기간 중 스즈키 총리의 발언을 문제 삼아 의사가 분규(紛糾)한 천벌 발언 사건도 발생했다. 하지만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끝나면서 패색이 짙어졌다.[9]4. 2. 포츠담 선언 수락과 항복 결정
1945년 7월 26일, 영국, 중화민국, 미국 3개국 정상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부는 포츠담 선언을 조건부 강화로 보고 수락할 것을 주장했으나,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7월 28일 "정부는 중대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묵살(黙殺)'''하며, 단호히 전쟁 완수에 매진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9] 이는 일소 중립 조약을 맺은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1945년 8월 9일 새벽, 소련은 중립 조약을 무시하고 만주국을 침공했다(소련-일본 전쟁).[9]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에 결정타였다.
1945년 8월 10일 자정부터 열린 어전회의에서[9]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부,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추밀원 의장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는 천황의 지위 보장만을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다. 반면, 육군대신 아난 고레치카,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해군 군령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는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하며 수락에 반대했다.[9]
쇼와 천황은 스즈키 총리의 요청에 따라 평화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직접 밝히며 항복 결정을 내렸다. 1945년 8월 10일 오전 3시, 각의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이 승인되었다.[10] 일본 정부는 중립국 스위스와 스웨덴 공사를 통해[12]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군부 강경파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발했다. 1945년 8월 12일, 군령부 총장 도요다는 우메즈 육군 참모총장과 함께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14] 그러나 쇼와 천황의 확고한 의지로 항복은 결정되었고, 이후 옥음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4. 3. 옥음 방송과 내각 총사직
1945년 8월 14일 오전 11시부터 열린 어전회의(御前会議)에서 쇼와 천황(昭和天皇)은 "나는 어떻게 되든 국민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 내가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이 좋다면 언제든지 마이크 앞에 서겠다. 내각은 즉시 종전에 관한 칙서를 준비해 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9] 이에 따라 각료들은 종전 칙서에 서명했고, 심야에 쇼와 천황의 옥음 방송(玉音放送)이 황궁 내에서 녹음되었다.[17]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은 라디오 방송(옥음 방송)을 통해 일본 전 국민과 전군에 포츠담 선언(ポツダム宣言) 수락과 일본의 패전을 선언하였다.[19] 같은 날 새벽, 시이자키 지로(椎崎二郎) 중좌와 이다 마사타카(井田正孝) 중좌 등 육군 장교들이 옥음 방송 음원 강탈 및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아침에 진압되었다(궁성 사건(宮城事件)).[18]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대신은 8월 15일 새벽에 자결했다.[18]
8월 17일(8月17日),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성단(聖断)을 仰구하게 된 책임을 지겠다"며 내각 총사직(内閣総辞職)하였다.[17]
참조
[1]
웹사이트
Kantarō Suzuk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
1945-04-07
[3]
웹사이트
歴代外務大臣
https://www.mofa.go.[...]
[4]
텍스트
[5]
텍스트
[6]
간행물
『官報』第5583号「叙任及辞令」
NDLDC
1945-08-22
[7]
간행물
『官報』第5500号「叙任及辞令」
NDLDC
1945-05-17
[8]
간행물
『官報』第5505号「叙任及辞令」
NDLDC
1945-05-23
[9]
서적
昭和天皇実録
[10]
서적
大日本帝国の興亡5
早川書房
[11]
서적
昭和天皇実録
[12]
서적
最後の特派員
朝日ソノラマ
1988-07
[13]
서적
大日本帝国の興亡5
早川書房
[14]
서적
戦史叢書93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15]
서적
戦史叢書93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16]
서적
大日本帝国の興亡5
早川書房
[17]
서적
大日本帝国の興亡5
早川書房
[18]
서적
大日本帝国の興亡5
早川書房
[19]
서적
大日本帝国の興亡5
早川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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