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메즈 요시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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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메즈 요시지로는 1882년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황도파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분류되었으며, 참모본부 총무부장, 중국 주둔군 사령관, 관동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44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항복에 반대하며 본토 결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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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즈 요시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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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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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우메즈 요시지로 |
원어 이름 | 梅津 美治郎 |
원어 이름 (일본어) | うめづ よしじろう |
출생일 | 1882년 1월 4일 |
사망일 | 1949년 1월 8일 |
출생지 | 나카쓰, 오이타현, 일본 |
사망지 | 스가모 형무소, 도쿄, 점령하 일본 |
군사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3년–1945년 |
최종 계급 | [[파일:帝國陸軍の階級―襟章―大将.svg|35px]] 대장 |
지휘 | 중국 주둔 일본군 일본 제국 육군 제2사단 일본 제1군 관동군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
주요 참전 | 러일 전쟁 만주국 평정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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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
직책 1 |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 |
재임 군주 1 | 쇼와 |
임기 시작 1 | 1944년 7월 18일 |
임기 종료 1 | 1945년 9월 |
전임자 1 | 도조 히데키 |
후임자 1 | 없음; 직책 폐지 |
직책 2 | 관동주 제17대 총독 |
재임 군주 2 | 쇼와 |
임기 시작 2 | 1939년 9월 7일 |
임기 종료 2 | 1944년 7월 18일 |
전임자 2 | 우에다 겐키치 |
후임자 2 | 야마다 오토조 |
기타 정보 |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1로6-12 |
로마자 표기 | Umezu Yoshijirō |
2. 생애
우메즈 요시지로는 1882년 1월 4일 일본 오이타현 나카쓰에서 태어나, 구마모토 현립 세세이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한 뒤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12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독일과 덴마크로 파견되었으며,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스위스 주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황도파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분류된다.
1930년 8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34년 3월 중국수비대사령관을 거쳐 1935년 6월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허잉친과 비밀리에 허잉친-우메즈 협정을 체결했다. 1938년 제1군사령관, 1939년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 대사를 지냈으며, 1942년 관동군총사령관을 거쳐 1944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참모본부 총무부장에 취임했으나, 황도파와 통제파 간의 갈등에 대응해야 했다. 1934년 중국 주둔군 사령관 시절에는 송철원 부대의 열하성 침범에 대응했고, 1935년에는 허잉친과 우메즈·허응친 협정을 체결하여 화북(華北) 지역의 반일 활동을 척결하고자 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육군성에 단호한 토벌을 요구했으며, 이후 육군차관으로서 테라이 주이치 육군대신과 함께 황도파를 숙청했다. 1939년 아베 내각 조각 시 쇼와 천황의 신임을 받아 관동군 사령관에 취임, 노몬한 사건 이후 관동군 참모들을 숙청했다.
1944년 사이판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도조 히데키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1945년 3월, 미국에 대한 세균전 계획에 반대하여 실행을 막았다.[14] 같은 해 5월 이후 종전을 위한 움직임 속에서도 표면적으로는 본토 결전을 주장했으나, 어전회의에서는 포츠담 선언 수락 대신 계전을 주장했다.[17] 그러나 일부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을 막고, 종전 후 9월 2일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1948년 11월 12일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며, 1949년 1월 8일 옥중에서 직장암으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우메즈 요시지로는 1882년 1월 4일 일본 오이타현 나카쓰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18세기부터 서점을 운영하였다. 젊었을 때는 어머니의 재혼 상대 성인 스에나가(是永) 성을 일시적으로 사용하여, 메이지 시대의 실역 정년 명부에는 "스에나가 미치지로"(是永美治郎)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마모토현립 제일고등학교(구마토) 재학 중 군 경력을 쌓기로 결심했다.[1] 구마모토육군지방소년학교[11], 육군중앙소년학교를 거쳐,[11] 1903년 11월 30일 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하고,[1] 이듬해 1904년 2월 12일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 1905년 6월 30일 중위로 진급한 후[1] 육군대학교 23기에 입학하여 1911년 수석 졸업했다.[1]1912년 3월 25일 대위로 진급한 후, 독일과 덴마크에서 추가 연수를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었다.[1] 덴마크 체류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일본군 군사 관찰원으로 활동했으며, 1918년 6월 1일 소좌로 진급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의 무관으로 임명되었다.[1]
1922년 2월 8일 중좌로, 1925년 12월 15일 대좌로 진급했다. 1920년대에는 정우회의 일원으로서, 급진적인 코도하 운동과 대립하여 군부 내에서 정치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대표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육군대학교 강사로 재직했고,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제3보병연대장을 역임했다.
1931년 8월에 참모본부 총무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이누카이 내각(犬養内閣)이 발족하고, 황도파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육상에 취임하자, 아라키는 마사키 신자부로(真崎甚三郎)를 참모차장에 임명하여 참모본부의 실권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마사키의 심복이자 대소 전략의 권위자인 오바타 토시시로(小畑敏四郎) 제3부장과, 나가타 테츠잔(永田鉄山) 제2부장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여, 오바타는 대소 준비에 전념할 것을 주장했고 나가타는 대중국 일격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스즈키 하야시미치(鈴木率道) 등 과장급도 끌어들여 다투었다. 우메즈는 후루소우 칸로(古荘幹郎) 제1부장과 함께 이 항쟁 대응에 고심했지만, 황도파의 전횡과 파벌 인사로 인해 마사키, 오바타 등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여, 결국 황도파와 통제파 양파의 각축으로 이어졌다.
우메즈는 1930년 8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보병여단장이 되었다.[2] 1933년 8월부터 참모본부에서 근무했고, 1933년 11월 스위스의 무관으로 파견되었다.[2] 1934년 3월 일본으로 귀국한 후 관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1월에는 열하성으로의 대규모 중국군 침입을 격퇴했다.[2]
1934년 11월 송철원(宋哲元)의 부하 펑지안(馮治安)의 부대가 열하성(熱河省)을 침범하여 대탄 서쪽 20km의 단목량(断木梁)에 진출하자, 관동군이 추격하여 송철원의 본거지 근처까지 접근했다. 우메즈는 송철원의 중재로 관동군이 추격을 멈추고 돌아갔다.
1935년 6월, 화북사변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시도로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의 협정인 허우메이즈 협정에 서명했고, 이를 통해 일본은 허베이성(河北省)의 10개 성을 장악하게 되었다.[2] 우메즈는 8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센다이 주둔 제2사단 사령관이 되었다.[2]
1935년 6월에는 국민혁명군의 허응친(何応欽)과 우메즈·허응친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화북(華北)에서 잇달아 발생한 반일 활동이 국민당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이를 척결하기 위해 협정을 맺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하북성(河北省) 내의 국민당 지부 폐지
- 국민당 하북성 주둔의 동북군 제51군, 국민당 중앙군 및 헌병 3단의 철수
- 하북성 주석인 우쉐충(于学忠)의 파면
- 모든 반일 단체와 그 활동의 단속
이 협정 제안에 대해 우메즈는 당초 전혀 몰랐고, 주둔군의 사카이 타카시(酒井隆) 참모장과 다카하시 다카시(高橋坦) 육군무관의 책략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는 1936년의 2.26 사건 쿠데타 시도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936년 3월부터 육군성 차관으로 임명되어 육군대신 테라우치 히사이치(寺内寿一) 밑에서 근무하며 군부 내 급진적인 코도하(皇道派) 구성원들을 다수 숙청했다.
1936년 2월, 2.26 사건이 발발했다. 제2사단장(센다이)이었던 우메즈는 제4사단장(오사카)인 타테카와 미쓰지(建川美次)와 전화로 조기 진압 방책에 대해 논의[13]하고, 육군성에 단호히 토벌을 요구하는 전보를 발송했다. 사건 후, 같은 해 3월에는 후루소우 칸로(古荘幹郎)의 후임으로 육군차관에 취임했다. 이듬해에 걸쳐 테라이 주이치(寺内寿一) 육군대신 밑에서 대규모 숙군 인사를 실시하여 황도파를 중앙에서 일소했다. 그때 육군성에 군무과를 신설하여 육군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한 것이 황도파의 반발을 불렀다. 일부 우익 활동가들로부터 "우메즈는 일본의 적화를 기도하고 있다"는 괴문서가 뿌려지는 결과가 되었다.
2. 2. 중일 전쟁
1934년 3월, 우메즈는 중국 주둔군 사령관에 취임했다.[13] 같은 해 11월, 송철원의 부하 펑지안의 부대가 열하성을 침범하여 대탄 서쪽 20km 지점인 단목량(断木梁)에 진출하자, 관동군이 추격하여 송철원의 본거지 근처까지 접근했다. 우메즈는 송철원의 중재로 관동군이 추격을 멈추고 돌아갔다.1935년 6월, 국민혁명군의 허잉친과 ‘우메즈·허잉친 협정’을 체결했다.[13] 당시 화북에서 잇달아 발생한 반일 활동이 국민당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이를 척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 하북성 내의 국민당 지부 모두 폐지
- 국민당 하북성 주둔의 동북군 제51군, 국민당 중앙군 및 헌병 3단의 철수
- 하북성 주석인 우쉐충의 파면
- 모든 반일 단체와 그 활동의 단속
이 협정 제안에 대해 우메즈는 당초 전혀 몰랐고, 주둔군의 사카이 타카시 참모장과 다카하시 다카시 육군무관의 책략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13]
2. 3. 태평양 전쟁
우메즈는 1938년 5월 제1군 사령관으로 중국에 돌아왔다. 당시 제1군은 전투를 끝내고 일본 점령 하의 중국 북부에 주둔군으로 있었다. 1939년 9월부터는 만주국 주둔군인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0년 8월 1일, 대장으로 진급했다.[3]1944년 7월, 도조 히데키가 사임하자 일본군 참모본부의 마지막 참모총장 겸 최고전쟁회의 위원이 되었다.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일본 해군 참모본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와 함께 1945년 8월 항복에 반대했다. 그는 군이 계속 싸워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면 일본이 더 나은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항복에 반대하는 하급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을 알았지만, 돕거나 방해하지 않았다.[4] 1945년 9월 2일, 히로히토 천황의 명령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항복식에서 전함 미주리 함상 군 최고 대표였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5] 11월 30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44년 12월, 해군의 오자와 시게사부로 중장이 Operation PX영어 (세균전)을 기획했다. 에노키오 요시오 해군대좌가 지휘하고, 세균을 가진 쥐나 모기를 미국 본토 서해안에 뿌려 생물 재해를 일으키는 작전이었다. 이400형 잠수함을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육군의 이시이 시로 (군의중장)의 협력을 요청하여 육해 공동 계획이 되었다.
1945년 3월 26일 해군 상층부는 동의했지만,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우메즈가 "미국에 대한 세균전은 전 인류에 대한 전쟁으로 발전한다"고 반대하여 실행되지 않았다. 전후 한동안 관계자들은 침묵했지만, 나중에 에노키오 전 대좌가 신문에서 경위를 밝혔다.[14]
1945년 5월 이후, 군·정부 수뇌 사이에서 종전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메즈는 패전 시 미국에 대한 배상금이 얼마나 커질 것인가를 걱정했다고 한다.
육군 군령의 장이었던 우메즈는 표면적으로는 본토 결전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5월 11일부터 개최된 최초의 최고전쟁지도회의 구성원 회합에서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대소 공작도 결국 미영과의 중개로 대동아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발언했을 때 "그대로다"라고 답하거나,[15] 6월 9일 쇼와 천황에게 관동군 시찰 보고를 할 때 "병력이 8개 사단 분밖에 없고, 탄약은 대회전 한 번 분밖에 없다"고 전달하는[16] 등, 전쟁 지속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천황에게는 본토 결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극비 자료도 제시했다.
8월 9일 심야 어전회의에서 육군대신 아난 미키와 함께 육군을 대표하여 포츠담 선언 수락이 아닌 계전에 의한 본토 결전을 주장했다.[17]
해군 군령부 총장 토요다 소무는 아난과 우메즈는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장교들의 압력 때문에 강경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17]
포츠담 선언 수락 통고 후 "번즈 답변"에서도 아난과 함께 "자주적 무장 해제와 본토 점령 거부"를 주장했다.[18]
그러나 14일 아침, 일부 장교들의 본토 결전 요구 쿠데타 계획을 아난에게 듣고 절대 반대하여 계획을 중지시켰다(宮城사건 참조). 육군 상층부에 "승조필근"(承詔必謹)을 철저히 하게 하고, 쿠데타 움직임에 후원을 주지 않았다.[19]
종전으로 조인식 전권을 의뢰받자, 항복에 찬성한 요나이 미쓰마사와 스즈키 칸타로(종전 당시 수상, 전 해군대장) 등이 적임자라며 거부했지만,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에서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했다.
2. 4. 전후
전후 우메즈는 SCAP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1948년 11월 12일 침략 전쟁을 수행한 혐의(1, 27, 29, 31, 32항)로 유죄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6]도쿄 재판 법정에서 우메즈는 히로타 고키, 시게미쓰 마모루 등과 마찬가지로 증언대에 서지 않고 침묵을 지켰으나, 도고 시게노리의 증언 내용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반론하기도 했다.
1949년 복역 중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하루 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사제가 그의 침대 옆에서 마지막 의식을 거행했다.[7] 우메즈는 생전에 군국주의적 국가 신토 종교를 따랐지만, 가족은 가톨릭을 선호했고 그의 딸은 가톨릭 수녀였다.[7] 그는 일기나 수기를 남기지 않았으며, 병상에는 "유창무력일"(幽窓無暦日)이라고만 쓴 종이 조각이 있었다.
3. 평가 및 논란
우메즈는 감정 표현이 적어 '능면(能面)'이라고 평가받았으며,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고 부하를 만들지도 않았다고 한다.[1] 그는 황도파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분류된다.[1]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직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점에서 전범으로서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
4. 기타
우메즈 요시지로는 감정 표현이 적어 '능면(能面)'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도 부하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8]
연도 | 훈장 종류 | 등급 | 비고 |
---|---|---|---|
1906년 | 6등급 | [8] | |
1906년 | 5등급 | [8] | |
1913년 | 5등급 | [9] | |
1915년 | 4등급 | [8] | |
1922년 | 3등급 | [8] | |
1933년 | 2등급 | [8] | |
1936년 | [8] | ||
1939년 | [8] | ||
1940년 | 2등급 | [8] |
연도 | 국가 | 훈장 종류 | 비고 |
---|---|---|---|
1937년 | 만주국 | 훈일위 주국장 | [39] |
1937년 | 나치 독일 | 독일 독수리 대십자훈장 | [40] |
1938년 | 이탈리아 왕국 | 왕관훈장 그랑크로아 | [41] |
1941년 | 이탈리아 왕국 |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 그랑코르도니 | [42] |
1941년 | 만주국 | 건국신묘창건기념장 | [43] |
1942년 | 만주국 | 훈일위 용광대수장 | [44] |
1944년 | 왕징웨이 정권 | 특급 동광훈장 | [45] |
1944년 | 만주국 | 대훈위 난화대수장 | [46] |
그의 장남 메이즈 미이치는 도쿄제국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해군 소위로 임관, 제9근거지대 분대사로 복무했다. 전후에는 아버지의 변호인을 맡았다. 손자 메이즈 시게미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우메즈 요시지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서적으로는 『마지막 참모총장 우메즈 미지로』(동간행회 편, 1976년), 기요하라 요시하루의 『참모총장 우메즈 미지로와 전쟁의 시대』(오이타합동신문사, 2008년), 사노 가즈유키의 『우메즈 미지로 대장 종전을 프로듀스한 남자』(겐주샤, 2015년), 이와이 슈이치로의 『마지막 참모총장 우메즈 미지로』(쇼덴샤신서, 2021년)가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가을바람(凩)』, 아사다 지로의 『태양의 유산(日輪の遺産)』, 야마자키 도요코의 『불모지대(不毛地帯)』 등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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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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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rove.nl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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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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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津美治郎、山田乙三が大将に進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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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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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자료
法廷証第129号: [梅津美治郎關スル人事局履歴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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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6267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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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8185号「叙任及辞令」
19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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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976号「叙任及辞令」
191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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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2500号「叙任及辞令」
19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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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3747号「叙任及辞令」
1925-02-20
[33]
간행물
官報 第931号「叙任及辞令」
1930-02-07
[34]
간행물
官報 第2307号「叙任及辞令」
1934-09-07
[35]
간행물
官報 第3439号「叙任及辞令」
1938-06-22
[36]
간행물
官報 第251号「叙任及辞令」
1913-06-02
[37]
간행물
官報 第2895号「叙任及辞令」
1922-03-30
[38]
간행물
官報 第602号「叙任及辞令」
1928-12-29
[39]
간행물
官報 第3395号「叙任及辞令」
1938-05-02
[40]
간행물
官報 「叙任及辞令」
1937-11-26
[41]
간행물
官報 「叙任及辞令」
1938-12-09
[42]
간행물
官報 第4343号「叙任及辞令」
1941-07-01
[43]
간행물
官報 第4632号 付録「辞令二」
1942-06-20
[44]
웹사이트
陸軍大将梅津美治郎外三十六名満洲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ノ件
https://www.digital.[...]
独立行政法人国立公文書館
2019-04-12
[45]
기록
野村直邦外五十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の件
国立公文書館
1944-08-10
[46]
아시아역사자료센터
有末精三外十七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の件
[47]
서적
야스쿠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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