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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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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내각은 1937년 2월 2일부터 6월 4일까지 123일 동안 존속한 일본의 내각이다.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장이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군부의 영향력 아래 소수 각료 중심의 실력 내각을 표방했다. 하지만 국회와의 소통 부재, 예산 삭감, 중의원 해산 이후 여당의 부진 등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내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37년 5월 31일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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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내각
내각 정보
내각 이름하야시 내각
원어 이름林内閣
내각 번호33대
국가 원수쇼와
수상하야시 센주로
수상 직책총리
수상 임기 전군사참의관, 예비역육군대장
성립일1937년 2월 2일
종료일1937년 6월 4일
정당쇼와회, 국민동맹 (각외 협력)
선거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해산1937년 3월 31일
해산 별칭무전취식 해산
하야시 센주로 내각 19370202
친임식 후의 각료
이전 내각히로타 내각
다음 내각제1차 고노에 내각
국회 회기제70회 제국의회
링크관저 공식 웹사이트

2. 재직 기간

1937년 2월 2일 ~ 1937년 6월 4일(총 123일)

3. 성립 배경

히로타 내각은 사회 혁신을 동반하는 총력전 체제 구축을 표방하며 여론의 지지를 얻은 육군(통제파)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1937년도 예산안 심의 중, 소위 "할복 문답"으로 국회와 대립하면서 정권 운영이 불투명해져 총사퇴했다. 후임으로는 우가키 가즈시게 전 조선 총독이 추천되었으나, 통제파는 우가키 군축을 실시했던 우가키와 노선이 정반대였기에 대립했다. 2·26 사건 이후 제정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 현역 장교를 육군대신으로 추천하지 않아 우가키 내각의 성립을 막았다. 우가키는 현역 복귀 후 육군대신 겸임을 시도했으나, 유아사 구라헤이 내대신 등 궁내 관료들이 육군의 보복을 두려워해 움직이지 않아 좌절되었다. 결국 우가키는 대명 사퇴하고, 통제파의 수장이었던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장이 추천되어 하야시 내각이 성립되었다.[13]

4. 내각 구성

하야시 내각은 1937년 2월 2일에 발족하여[2] 같은 해 6월 4일까지 존속하였다. 내각의 각료들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2]

출신국무대신
쇼와회1
육군해군3
관료2
민간2
합계8



각료들의 출신은 쇼와회 1명, 군부(육군 및 해군) 3명, 관료 2명, 민간 2명이었다. 내각서기관장과 법제국 장관은 관료 출신이었다.[2] 정무차관과 참여관은 임명되지 않았다.

4. 1. 각료

직책이름정당임기 시작임기 종료
내각총리대신하야시 센주로육군 군인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외무대신하야시 센주로육군 군인1937년 2월 2일1937년 3월 3일
사토 나오타케무소속1937년 3월 3일1937년 6월 4일
내무대신가와라다 가키치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대장대신유키 도요타로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육군대신나카무라 고타로육군 군인1937년 2월 2일1937년 2월 9일
스기야마 하지메육군 군인1937년 2월 9일1937년 6월 4일
해군대신요나이 미쓰마사해군 군인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사법대신시오노 스에히코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문부대신하야시 센주로육군 군인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농림대신야마자키 다쓰노스케쇼와카이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상공대신고도 다쿠오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체신대신야마자키 다쓰노스케쇼와카이1937년 2월 2일1937년 2월 10일
고다마 백작 히데오무소속1937년 2월 10일1937년 6월 4일
철도대신고도 다쿠오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탁무대신유키 도요타로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내각관방장관오하시 하치로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내각법제국 장관가와고에 다케오무소속1937년 2월 2일1937년 6월 4일



1937년(쇼와 12년) 2월 2일 임명[3]되었으며, 재임 기간은 123일이다.

4. 2. 내각서기관장 및 법제국 장관

하야시 내각의 내각서기관장은 오하시 하치로이며, 체신성 출신이다.[2] 법제국 장관은 가와고에 다케오이고 대장성 출신이다.[2] 두 사람 모두 1937년 2월 2일에 임명되어[3] 같은 해 6월 4일까지 재임하였다.

직책성명출신임기
내각서기관장오하시 하치로체신성1937년 2월 2일 ~ 1937년 6월 4일
법제국 장관가와고에 다케오대장성1937년 2월 2일 ~ 1937년 6월 4일


4. 3. 정무차관 및 참여관

정무차관 및 참여관은 임명되지 않았다.

5. 주요 정책 및 활동

히로타 내각이 군사 예산 증액과 증세를 둘러싼 국회와의 갈등으로 총사퇴한 후, 우가키 가즈시게 전 조선 총독이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장이 총리로 임명되어 하야시 내각이 성립되었다.


  • 군재 포괄 재정: 히로타 내각의 바바 에이이치 장관이 주도한 대규모 군사 예산 증액 및 증세 정책에 대한 반발로, 유키 도요타로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 장관으로 취임하여 예산 삭감을 추진했다. 다카하시 재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가야 오키노리, 이시와타 소타로가 각각 사무 차관 및 주세국장으로 복귀하여 예산 삭감을 주도했다.[13] 하야시 내각은 압도적인 소수 여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와의 타협을 통해 연말에 예산을 성립시켰다.
  • 기획청 설치: 혁신 관료들의 국책 연구 기관이었던 내각 조사국을 개편, 확충하여 1937년 5월 14일 기획청을 설치했다. 이를 통해 내각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13]


예산 가결 후, 하야시 총리는 두 거대 정당에 대한 징벌적 의도로 중의원을 해산했다("먹튀 해산"). 그러나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여당 세력은 오히려 의석을 줄이는 결과를 얻었다. 하야시 총리는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며 재차 해산을 암시했지만, 이는 타도 내각 운동을 촉발시켜 결국 사면초가에 몰려 내각 총사퇴로 이어졌다.

6. 내각의 종말

히로타 내각이 1937년도 예산안 심의 중 국회와 대립하여 총사퇴한 후, 우가키 가즈시게 전 조선 총독이 후임으로 추천되었으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한 통제파의 반대로 우가키 내각 성립이 좌절되었다. 이후 하야시 센주로 육군 대장이 추천되어 하야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하야시 내각은 소수 각료 중심의 실력 내각을 표방하며 국회와의 연락을 중단했고, 이로 인해 정우회·민정당은 야당으로 돌아섰다. 중의원에서는 쇼와회와 국민동맹의 각외 협력을 얻었지만, 양당을 합쳐도 중의원 466석 중 35석에 불과했다.

예산 가결 후, 하야시 총리는 두 거대 정당에 대한 징벌적 의도로 중의원을 해산했다("먹튀 해산").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여당 세력은 의석을 줄이는 결과가 나왔다. 그럼에도 하야시 총리는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며 재차 해산을 암시했지만, 이는 타도 내각 운동을 불러와 사면초가에 몰렸다. 결국 1937년 5월 31일, 내각 총사퇴를 하였다.

재임 일수는 당시 역대 최단인 123일이었다[13]。 하야시 내각은 단명하여 큰 실적을 남기지 못해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내각"으로 평가받았으며, "아무것도 안 하는 센주로 내각"이라고 비꼬아졌다.

7. 평가

하야시 내각은 전임 히로타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성립되었지만, 단명했고 큰 실적을 남기지 못해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내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3] 심지어 하야시 센주로 총리의 이름을 따서 "아무것도 안 하는 센주로 내각"이라고까지 비꼬아졌다.[13]

하야시 내각은 소수의 각료로 구성된 실력 내각을 표방했지만, 국회와의 소통 단절로 인해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중의원 해산 후 치러진 제2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여당 세력이 약진하지 못하면서 결국 123일 만에 총사퇴했다.[13]

참조

[1] 서적 The Political History of Modern Japan: Foreign Relations and Domestic Politic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10-10
[2] 웹사이트 Hayashi Cabinet http://www.kantei.go[...]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2959505/18}[...] 1937-02-02
[4]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2959530/18}[...] 1937-03-03
[5] 문서 日本商工会議所会頭
[6] 문서 1937年(昭和12年)5月31日、貴族院勅選議員勅任
[7] 문서 병기요양때문에 사임, 취임후 2일 만에 발열, 창티푸스를 발병, 장기요양이 필요하게 되어 재임 8일 만에 대신 사임
[8]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NDLDC|2959511/26}[...] 1937-02-09
[9] 문서 1937年(昭和12年)4月1日승관。
[10] 간행물 『官報』第3073号「叙任及辞令」 "{{NDLDC|2959556/9}}[...] 1937-04-02
[11] 문서 1937年(昭和12年)5月31日、貴族院議員勅任
[12] 간행물 『官報』第3121号「帝國議会」 1937-06-01
[13] 문서 やがて後の1945年(昭和20年)8月17日に就任した東久邇宮稔彦王首相により成立した東久邇宮内閣が同年10月9日に総辞職することで、日本国歴代内閣の在任期間において「54日間」と史上最短記録が更新され、2021年(令和3年)10月4日に就任した岸田文雄首相により成立した第1次岸田内閣が同年11月10日に総辞職したため、在任期間は「38日間」と史上最短記録をこちらが更新した(ただし総辞職直後の特別国会で岸田は首相に再び選出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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