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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데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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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데이이치는 일본 육군 군인으로, 1888년 지바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군부 내에서 '신사복을 입은 군인'으로 불리며 주로 대외적, 관료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만주사변 당시 국제 연맹 탈퇴론을 주장하며 군부 내에서 입지를 다졌으며, 2·26 사건 당시 청년 장교 설득에 나섰다. 제2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 국무대신을 역임했으며, 태평양 전쟁 개전을 주장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되었고, 사면 후에는 자유민주당의 참의원 선거 출마 요청을 거절했다. 1989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한국에서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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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데이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즈키 데이이치
이름스즈키 데이이치 (鈴木 貞一)
출생1888년 12월 16일
출생지일본 지바현
사망1989년 7월 15일
사망지일본 지바현 시바야마정
별칭양복을 입은 군인
군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10년 - 1941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경력
출신 학교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이전 직업육군
보직제3군 참모장
흥아원 총무장관 대리
보병 제14연대장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정치 경력
직책국무대신
기획원 총재
내각제2차 고노에 내각
제3차 고노에 내각
도조 내각
임기 시작1941년 4월 4일
임기 종료1943년 10월 8일
직책 2귀족원 의원
임기 시작 21943년 10월 8일
임기 종료 21945년 12월 3일
직책 3내각고문
임기 시작 31943년 11월
임기 종료 31944년 10월
기타 직책 1대일본산업보국회 회장
임기 시작 41944년 9월
임기 종료 41945년 8월
기타 직책 2산업계획회의 위원
기타 직책 3대동아건설심의회 간사장
기타 정보
칭호 및 훈장정3위
훈2등 서보장
훈3등 욱일중수장
추가 정보
웹사이트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2. 생애

1888년 지바현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코시바히카리정의 사숙 세이케이학사와 게이호쿠 중학교를 졸업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대령이었던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만주의 임업 개발에 참여하려는 열망을 품고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 지원하려 했으나, 일본 육군 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삼촌의 권유로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1]

191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22기), 1917년 육군대학교(29기)를 졸업했다. 육군대학교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했으며, 졸업 후 참모본부 중국반·작전과에서 근무하며 상하이, 베이징, 우한에 주재했다.[1]

1927년 미야마 가메사부로 등과 목요회를 결성했다. 1929년 나가타 데쓰잔,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하라 간지 등이 이엽회와 목요회를 합쳐 일석회를 결성하자, 스즈키도 참여했다.[1] 1931년 3월 사건에 가담했다.[2]

스즈키는 "양복을 입은 군인"으로 불릴 정도로 실전 부대 경험이 적고, 대외적·관료적 업무를 주로 맡았다. 1931년 만주 사변 발발 후 군무국에서 근무하며 만몽반을 발족, 독단적으로 만주 정책을 추진했다. 시라토리 도시오, 모리 가쿠와 연계하여 국제 연맹 탈퇴를 주장, 군부 내 연맹 탈퇴 추진파로 알려졌다. 1933년 정보기관 신문반장이 되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함께 청년 장교 설득에 나섰다. 황도파와 통제파 분열 후 양측에 가까웠으나, 사건 후 통제파로 갈아타 도조 히데키 측근이 되었다. 육군 내에서는 드문 기회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다. 2·26 사건 후, 황도파 좌천 인사의 일환으로 1938년 4월 14일 제3군 참모장이 되었다.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에 의해 흥아원 정무부장으로 발탁되었다.[6] 1940년 8월 1일 중장으로 승진, 12월 23일 흥아원 총무장관 서리를 겸임했다. 1941년 4월 4일 예비역 편입과 동시에 제2차 고노에 내각 국무대신 겸 기획원 총재로 취임했다. 이후 제3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 각각 국무대신을 맡았다. 도조 내각에선 영국의 인도 식민성을 본따 대동아성을 설립하였고, 일본 외무성의 아시아 관계 권한을 모두 육군이 강탈해 스스로가 사실상 외무 대신이 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6]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 1941년 10월-12월의 어전 회의에서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 분석 결과를 토대로 개전을 주장했다. 회의에서 스즈키는, ABCD 포위망 등으로 인해 석유가 금수 조치된 이상, 3년 후에는 공급 불가능하게 되어 산업도 쇠퇴하고 군사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되며, 중국뿐만 아니라 만주·한반도·대만도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쇼와 천황에게 "앉아서 상대의 압박을 기다리는 것보다, 국력의 유지 증진에 유리하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한 뒤, 미국·영국·네덜란드와 개전하여 남방 자원 지대를 점령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고 설명했다.[7]

1942년 대동아건설심의회 간사장을 역임했다. 1943년 10월 8일 귀족원 의원에 취임하여, 내각 고문, 대일본산업보국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3일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8] 1955년 9월 17일 하시모토 긴고로, 가야 오키노리와 함께 가석방되었고, 1958년에 사면되었다. 스이가모 프리즌 수감 중에는 스즈키의 목소리가 옥중의 기상 알람 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9]

사면 후에는 산업 계획 회의 위원을 잠시 맡았으나,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 성립 후 자유민주당으로부터 참의원 선거 출마 요청을 받았지만,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강하게 거절하고 이후 공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사토 에이사쿠의 브레인으로서 그를 지원하는 등,[10] 보수 정치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자문을 제공했다.

1973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지바현 시바야마정 산속의 생가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1989년 7월 15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A급 전범 중 유일하게 헤이세이 시대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다.[5]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인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8년 지바현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코시바히카리정의 사숙 세이케이학사와 게이호쿠 중학교를 졸업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대령이었던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만주의 임업 개발에 참여하려는 열망을 품고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 지원하려 했으나, 일본 육군 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삼촌의 권유로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1]

191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22기), 1917년 육군대학교(29기)를 졸업했다. 육군대학교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했다.[1]

2. 2. 군 경력

191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2기), 1917년 육군대학교 (29기)를 졸업했다. 육군대학교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했으며, 졸업 후 참모본부 중국반·작전과에서 근무하며 상하이, 베이징, 우한에 주재했다.[1]

1927년 미야마 가메사부로 등과 목요회를 결성했다. 1929년 나가타 데쓰잔,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하라 간지 등이 이엽회와 목요회를 합쳐 일석회를 결성하자, 스즈키도 참여했다.[1] 1931년 3월 사건에 가담했다.[2]

스즈키는 "양복을 입은 군인"으로 불릴 정도로 실전 부대 경험이 적고, 대외적·관료적 업무를 주로 맡았다. 1931년 만주 사변 발발 후 군무국에서 근무하며 만몽반을 발족, 독단적으로 만주 정책을 추진했다. 시라토리 도시오, 모리 가쿠와 연계하여 국제 연맹 탈퇴를 주장, 군부 내 연맹 탈퇴 추진파로 알려졌다.

1933년 정보기관 신문반장이 되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함께 청년 장교 설득에 나섰다. 황도파와 통제파 분열 후 양측에 가까웠으나, 사건 후 통제파로 갈아타 도조 히데키 측근이 되었다. 육군 내에서는 드문 기회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다.

2·26 사건 후, 황도파 좌천 인사의 일환으로 1938년 4월 14일 제3군 참모장이 되었다.

2. 3. 정치 경력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에 의해 흥아원 정무부장으로 발탁되었다.[6] 1940년 8월 1일 중장으로 승진, 12월 23일 흥아원 총무장관 서리를 겸임했다. 1941년 4월 4일 예비역 편입과 동시에 제2차 고노에 내각 국무대신 겸 기획원 총재로 취임했다. 이후 제3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 각각 국무대신을 맡았다. 도조 내각에선 영국의 인도 식민성을 본따 대동아성을 설립하였고, 일본 외무성의 아시아 관계 권한을 모두 육군이 강탈해 스스로가 사실상 외무 대신이 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6]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 1941년 10월-12월의 어전 회의에서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 분석 결과를 토대로 개전을 주장했다. 회의에서 스즈키는, ABCD 포위망 등으로 인해 석유가 금수 조치된 이상, 3년 후에는 공급 불가능하게 되어 산업도 쇠퇴하고 군사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되며, 중국뿐만 아니라 만주·한반도·대만도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쇼와 천황에게 "앉아서 상대의 압박을 기다리는 것보다, 국력의 유지 증진에 유리하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한 뒤, 미국·영국·네덜란드와 개전하여 남방 자원 지대를 점령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고 설명했다.[7]

1942년 대동아건설심의회 간사장을 역임했다. 1943년 10월 8일 귀족원 의원에 취임하여, 내각 고문, 대일본산업보국회 회장을 역임했다.

2. 4. 전후

1945년 12월 3일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8] 1955년 9월 17일 하시모토 긴고로, 가야 오키노리와 함께 가석방되었고, 1958년에 사면되었다.

스이가모 프리즌 수감 중에는 스즈키의 목소리가 옥중의 기상 알람 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9]

사면 후에는 산업 계획 회의 위원을 잠시 맡았으나,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 성립 후 자유민주당으로부터 참의원 선거 출마 요청을 받았지만,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강하게 거절하고 이후 공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사토 에이사쿠의 브레인으로서 그를 지원하는 등,[10] 보수 정치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자문을 제공했다.

1973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지바현 시바야마정 산속의 생가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1989년 7월 15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A급 전범 중 유일하게 헤이세이 시대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다.[5]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인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다.

3. 연보

4. 서훈


참조

[1] 서적 Planning for Empire: Reform Bureaucrats and the Japanese Wartime State https://archive.org/[...] Cornell University Press 2011
[2] 서적 Japan's War: The Great Pacific Conflict McGraw Hill 1986
[3] 서적 Strategy and Command: The First Two Years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the Army 1966
[4] 간행물 『官報』第4086号「叙任及辞令」 1940-10-19
[5] 웹사이트 鈴木貞一とは https://kotobank.jp/[...] 2021-12-09
[6] 뉴스 日本ニュース第72号|NHK戦争証言アーカイブス https://www2.nhk.or.[...]
[7] 서적 <遂行された国策「開戦」>三国一朗ほか編『太平洋戦争前期 昭和史探訪.3』 番町書房のち角川文庫
[8] 문서
[9] 서적
[10] 서적
[11] 간행물 『貴族院要覧(丙)』昭和21年12月増訂
[12] 간행물 『貴族院要覧(丙)』昭和21年12月増訂
[13] 문서 法廷証第126号: {{Nowiki|[鈴木貞一關スル人事局履歴書]}} "{{NDLDC|10273430}}"
[14] 간행물 『官報』第8313号「叙任及辞令」 1911-03-11
[15] 간행물 『官報』第460号「叙任及辞令」 1914-02-12
[16] 간행물 『官報』第1988号「叙任及辞令」 1919-03-21
[17] 간행물 『官報』第3534号「叙任及辞令」 1924-06-05
[18] 간행물 『官報』第2133号「叙任及辞令」 1934-02-13
[19] 간행물 『官報』第3283号「叙任及辞令」 1937-12-10
[20] 간행물 『官報』第4182号「叙任及辞令」 1940-12-13
[21] 간행물 『官報』第4310号「叙任及辞令」 1941-05-23
[22] 간행물 『官報』第4920号「叙任及辞令」 1943-06-09
[23] 간행물 『官報』第2130号「叙任及辞令」 1934-02-09
[24]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25] 간행물 『官報』第4086号「叙任及辞令」 1940-08-19
[26] 기타 長谷川清外三十一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の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A1011[...]
[27] 웹사이트 야후 재팬의 스즈키 데이이치에 대한 설명 http://100.yaho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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