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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오키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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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야 오키노리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대장 대신, 법무 대신 등을 역임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로 활동했으며, 제네바 및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제1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 대장 대신을 지내며 전시 재정을 담당했으나, 전쟁에는 반대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가석방되었으며,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로, 미국, 타이완, 대한민국과의 유대를 옹호했으며, 일본 유족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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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오키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가야 오키노리
원어 이름賀屋 興宣
원어 이름 (언어)ja
출생일1889년 1월 30일
출생지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사망일1977년 5월 9일
사망지도쿄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학력도쿄 제국대학
경력
전직대장 관료, 일본유족회 회장
칭호/훈장정3위, 법학사 (도쿄 제국대학, 1917년)
정치 경력
역대 직책제17대/18대 법무대신
제37대/44대 대장대신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
법무대신내각: 제2차 이케다 제3차 개조 내각, 제3차 이케다 내각
임기 시작: 1963년 7월 18일
임기 종료: 1964년 7월 18일
대장대신내각: 제1차 고노에 내각 / 도조 내각
임기 시작: 1937년 6월 4일 / 1941년 10월 18일
임기 종료: 1938년 5월 26일 / 1944년 2월 19일
중의원 의원선거구: 도쿄도 제3구
당선 횟수: 5회
임기 시작: 1958년 5월 23일
임기 종료: 1972년 11월 13일
귀족원 의원선출 방식: 칙선 의원
임기 시작: 1938년 12월 9일
임기 종료: 1945년 12월 3일
기타 직책[[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10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총재: 이케다 하야토
임기 시작: 1962년
임기 종료: 1963년
대장성 차관총리: 하야시 센주로
장관: 유키 도요타로
임기 시작: 1937년 2월 2일
임기 종료: 1937년 6월 4일
전임: 가와고에 다카오
후임: 이시와타 소타로

2. 생애

1889년, 지금의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국학자 후지이 이쓰와 애국 부인회 간사를 맡던 가야 가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나이 4세 때, 어머니의 큰아버지의 대를 이어 성을 가야(賀屋) 로 개칭하였다.[1]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 학과를 졸업한 뒤 대장성에 들어갔으며, 관료일 시기에는 육·해군 예산을 담당해 젊은 군인들과도 친했다.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 1929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각각 전권의 수행원으로서 참석했고, 전시에는 경제 정책을 방향 짓는 등, 혁신 관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일 년 동안 대장 대신을 지냈고, 1941년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의 도조 내각에서도 다시 대장 대신으로 전시 재정을 담당[25] 했지만, 도고 시게노리 외무 대신과 함께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시종 반대하였다.

전시하에는 전시 공채를 남발해 증세에 의한 군사비 중심의 예산을 짰다. 이 예산 편성은 화베이에서의 자원 개발이나, 대동아공영권을 중심으로 한 블록 경제를 상정한 것이며,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이유도 이 예산의 책임자였던 일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가야 오키노리는 1889년 1월 30일, 히로시마에서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4세 때 어머니의 가문을 따라 가야 가문의 계승자가 되기 위해 입양되었다.[1]

가야는 도쿄에 있는 명문 제1고등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훗날 사회주의 지도자가 된 가와카미 조타로와 동급생이었다. 심각한 정치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그 후 가야는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재무성에 들어가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재무성에서 가야는 예산국에서 근무하며 종종 육군 및 해군 예산을 처리했다. 역시 히로시마 출신인 이케다 하야토가 그의 가까운 부하가 되었다. 가야는 1934년 예산국장, 1936년 재무국장을 거쳐 1937년에는 재무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고노에 후미마로가 내각을 구성했을 때 가야는 재무대신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38년 5월 내각이 끝날 때까지 재임했으며, 이후 귀족원 종신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38년 8월 가야는 일본의 지배 하에 있는 중국 북부의 산업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준정부 기업인 북지개발회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1년 10월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재무대신으로 재임명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 자격으로 그는 1944년 2월 사임하기 전까지 전시 재정을 담당했다.

일본의 항복 이후, 가야는 전시 정부에서의 역할로 인해 전쟁 범죄자로 체포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동료 수감자이자 전 내각 동료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친구가 되었다.[2]

가야는 1955년에 가석방되었고, 그의 형은 나중에 이미 복역한 기간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1957년 기시가 총리가 되자 기시의 개인 고문이 되었다. 가야는 1958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기시의 파벌에 속했지만, 그의 전 부하인 이케다 하야토와도 가까웠다. 그는 기시 하에서 미일 안보 조약 개정 작업에 참여했다.

기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이케다는 1962년 가야를 정책 조사 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그는 일본 전몰자 유족회 회장이 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63년 법무대신으로 입각하여 1964년까지 그 직을 역임했다. 가야는 1972년 중의원을 은퇴했고, 1977년에 사망했다.

가야는 타이완, 대한민국미국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옹호했다. 그는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며, 한 부고 기사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개와 같은 삶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고 인용했다.[3]

|thumb|250px|중의원 예산위원회실에서 비밀 회의를 앞두고 유키 도요타로 재무상(중앙)에게 귓속말하는 가야 차관(우), 쇼와 12년]]

  • 1889년(메이지 22년) - 히로시마현히로시마시 다카조초(현 나카구 혼카와초)에서 태어났다. 옛 성은 후지이.
  • 1917년(다이쇼 6년)
  • * 3월 - 도쿄 제국 대학법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
  • * 4월 - 대장성 입성
  • * 10월 - 고등 문관 시험 합격
  • 1920년(다이쇼 9년) 3월 - 주계국 예산 결산과
  • 1927년(쇼와 2년) 4월 - 제네바 군축 회의 전권 수행원
  • 1928년(쇼와 3년) 1월 - 대장 대신비서관 (사무 담당)
  • 1930년(쇼와 5년) 3월 10일 - 주계국 사계과장
  • 1932년(쇼와 7년) 11월 24일 - 주계국 예산 결산과장
  • 1934년(쇼와 9년) 5월 22일 - 대장성 주계국장
  • 1936년(쇼와 11년) 5월 30일 - 대장성 이재국장
  • 1937년(쇼와 12년)
  • * 2월 2일 - 대장 차관
  • * 6월 4일 - 제1차 고노에 내각에 대장 대신으로 입각
  • 1938년(쇼와 13년) 12월 9일 -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칙임[14]
  • 1939년(쇼와 14년) - 오타니 소년의 후임으로 북지나 개발 주식회사 제2대 총재 취임
  • 1941년(쇼와 16년) 10월 18일 - 도조 내각에 대장 대신으로 입각
  • 1945년(쇼와 20년) 9월 - A급 전범 혐의로 체포 구속
  • 1948년(쇼와 23년) 11월 12일 -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의해 종신형 판결을 받고 복역
  • 1955년(쇼와 30년) 9월 17일 - 가석방
  • 1956년(쇼와 31년) - 산업 계획 회의 위원
  • 1958년(쇼와 33년) - 정식 사면. 5월의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구 도쿄 3구)으로 입후보하여 첫 당선, 이후 5기 연속 당선
  • 1963년(쇼와 38년) 7월 - 제2차 이케다 제3차 개조 내각법무대신으로 입각. 이어지는 제3차 이케다 내각에도 유임
  • 1972년(쇼와 47년) 11월 - 정계 은퇴.
  • 1977년(쇼와 52년) 4월 28일 - 사망. 향년 88세.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9년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국학자 후지이 이쓰와 애국 부인회 간사를 맡던 가야 가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나이 4세 때, 어머니의 큰아버지의 대를 이어 성을 가야(賀屋) 로 개칭하였다.[1] 부친 쪽 조부는 야마구치현 구게군 가미노세키정 나가시마의 시라이다하치만 궁사 후지이 아쓰토모이며, 부친 쪽 숙부에는 야스쿠니 신사 제3대 구지 가모 햐쿠주가 있다. 가야 씨의 먼 조상은 남북조 시대의 무장 아카마쓰 노리무라이며, 에도 시대에는 대대로 히로시마번의 무사로서 아사노 가문을 섬겼다.

히로시마 제1중학교에서는 바둑 기사 세고시 겐사쿠와 동급생이었다. 1908년 구제 제일고등학교 영법과에 입학하여, 가와카미 조타로, 가와이 에이지로 등과 동급생으로 교류하였다. 191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고, 가케히 고쓰히코의 법리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1] 1917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법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1]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 1929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전권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2. 2. 대장성 관료 시절

가야 오키노리는 1889년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국학자인 아버지와 애국 부인회 간사를 맡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7] 4세 때 어머니의 큰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야(賀屋)로 성을 바꾸었다.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1917년 대장성에 들어갔다.[7]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8]

대장성 입성 직후, 가야는 뉴욕유럽에서 근무했다. 이후 주로 주계국에서 근무하며 재무대신 비서관, 주계국 사계과장, 주계국 예산결산과 과장, 주계국 국장, 이재국 국장, 대장차관을 역임했다.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와 1929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전권 수행원으로 참석했다.[9] 런던 회의에서는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차석 수행원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9]

가야는 전시 경제 정책을 방향 짓는 데 기여한 혁신 관료(신 관료)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육·해군 예산을 담당하며 젊은 군인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 대신을 지냈고, 1941년 도조 내각에서 다시 대장 대신으로 전시 재정을 담당했다.[25] 그는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반대했지만, 전시 공채를 남발하여 증세에 의한 군사비 중심의 예산을 편성했다. 이러한 예산 편성은 화베이의 자원 개발과 대동아공영권을 중심으로 한 블록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으며,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이유도 이 예산의 책임자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2. 3. 전시 재정 정책

가야 오키노리는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대장 대신으로 임명되어, 중일 전쟁 전시 예산 편성에 관여했다.[25] 1941년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도조 내각에서 다시 대장 대신을 맡아 전시 재정을 담당했다.[25] 하지만, 도고 시게노리 외무 대신과 함께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는 시종 반대했다.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답변하는 가야 재무대신(1937년(쇼와 12년))


전시에는 전시 공채를 남발하고 증세를 통해 군사비 중심의 예산을 편성하여 전시 체제를 유지했다.[25] 이러한 예산 편성은 화베이 지역 자원 개발과 대동아공영권을 중심으로 한 블록 경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가야 오키노리가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주된 이유도 이러한 전시 예산 편성의 책임자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38년 12월 9일,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4]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에는 대장성이 설치한 전후 통화 대책 위원회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통화 정책을 확립하기 위해 설립)의 위원장에 취임했다[10]

2. 4. 극동 국제 군사 재판과 전후

가야 오키노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고 약 10년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2] 옥중에서도 "지금까지 떨어졌으니, 오히려 시원하군요"와 같이 유연하게 행동했다고 고다마 요시오는 전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수년간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지병이 없어지고 오래 살게 되었다고 회상했으며, 가야는 천식이 완치되었다고 한다.[2] 재판에서 일본의 공모죄에 대한 질문에 "군부는 달려나가고, 정치가들은 곤란해하고, 북(북진론)이다, 남(남진론)이다, 라고 국내는 엉망진창이었고, 덕분에 제대로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을 공동 모의라고 하다니, 부끄러울 정도다"라고 답변했다.

1955년 9월 17일 스즈키 데이이치, 하시모토 긴고로 등과 함께 가석방되었고,[27] 1958년 정식 사면되었다. 이후 도쿄도 제3구에서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5회 연속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경제 고문 및 외교 조사 회장으로서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참여했고, 이케다 내각[26]법무대신과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역임하며 자유민주당의 우파 및 강경파 정치가로 활동했다.[27] 시게미쓰 마모루,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A급 전범으로 정계에 복귀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며,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도 관여했다.[27]

A급 전범으로 스가모 형무소에 출두한 가야 오키노리


가야는 타이완, 대한민국미국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옹호한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다.[3] 그는 "공산주의는 개와 같은 삶을 의미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정계 은퇴 후에는 미국 공화당, 중앙 정보국(CIA), 중화민국장제스 정권과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유족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 반공주의 세력, 자민당, 우익을 연결하는 피크서 역할을 했다.[12][13]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 문서에 따르면, 가야는 CIA의 일본 반공화 협력자 목록에 "PASONNET-1"이라는 코드네임으로 올라 있었다.[12][13]

1972년 정계를 은퇴하고 1977년 사망했다.

2. 5. 정계 복귀와 활동

가야 오키노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아 약 10년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27] 옥중에서도 "지금까지 떨어졌으니, 오히려 시원하군요"라고 말하는 등 유연하게 행동했으며, 기시 노부스케는 서로 규칙적인 생활을 강요당한 덕분에 지병이 없어지고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가야는 천식을 앓고 있었지만, 옥중 생활로 완치되었다고 한다. 재판에서 일본의 공모죄에 대한 질문에 "군부는 달려나가고, 정치가들은 곤란해하고, 북(북진론)이다, 남(남진론)이다, 라고 국내는 엉망진창이었고, 덕분에 제대로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을 공동 모의라고 하다니, 부끄러울 정도다"라고 말했다.[12][13] 1955년 9월 17일 스즈키 데이이치, 하시모토 긴고로 등과 함께 가석방되었다.[27]

1958년 정식 사면 후, 도쿄도 제3구에서의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하여 5회 연속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경제 고문이나 외교 조사 회장으로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임한 것 외에, 이케다 내각[26]법무대신과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역임해 자유민주당의 우파 및 강경파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27] 이케다 하야토는 대장성 관료 시절에 동향 선배였던 가야와 가까웠다[11]고 하며, 총리 취임 후 그를 중용했고, 가야는 열성적으로 기시의 안보 개정과 이케다의 소득 배증 정책에 진력했다. 가야는 시게미쓰 마모루,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A급 전범이 정계로 복귀한 대표적인 사례로, 후에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도 깊숙하게 개입하였다.[27]

1972년 정계 은퇴 후에는 "자유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조직, 타이완을 방문하여 중화민국을 옹호하는 등 독자적인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미국 공화당과 중앙 정보국 (CIA), 그리고 중화민국장제스 정권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유족회 초대 회장이 되는 등 국제 반공주의 세력, 자민당, 우익의 트라이앵글을 잇는 피크서로서 국내외의 우익 인맥을 구축했다.[12][13] 2007년 공개된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 소장 문서에는, CIA가 작성한 일본의 반공화를 추진하기 위한 현지 협력자 (행동원) 목록에 가야의 이름이 올라 있으며, 코드네임은 "PASONNET-1"이었다.[12][13]

가야는 타이완, 대한민국미국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옹호했으며,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다.[3] 1977년 사망했으며,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2. 6. 말년

가야 오키노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아 약 10년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27] 1955년 9월 17일스즈키 데이이치, 하시모토 긴고로 등과 함께 가석방되었다.[27]

1958년 정식 사면 후, 도쿄도 제3구에서의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5회 연속 당선되었다.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경제 고문이나 외교 조사 회장으로 안보 개정에 임한 것 외에, 이케다 내각[26]법무대신과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역임해 자유민주당의 우파 및 강경파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 가야는 시게미쓰 마모루,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A급 전범이 정계로 복귀한 대표적인 사례로, 후에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도 깊숙하게 개입하였다.[27] 1972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1977년 4월 28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평가와 비판

가야 오키노리는 바둑을 좋아하여 6단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스가모 형무소 복역 중에는 이노 세키야 등과 바둑을 두었다.

전몰 장병의 단순한 유족 상호 원조 단체였던 '일본 유족 후생 연맹'을 '일본 유족회'로 개칭하고 우경화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받거나,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면서도 사면 후에 요직에 취임한 것을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강경파이면서도 과거의 패전 책임을 통감하여 서훈을 거절하거나,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 중 형장으로 향하는 A급 전범을 목격한 경험에서 법무대신 당시에는 사형 집행에 부정적이었다는 일면도 있었다. 사실, 가야가 법무대신이었던 1964년은 일본 근세 이후 처음으로 사형이 실시되지 않은 해였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가야를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으며, "그렇게 냉정하고, 사람을 비웃고, 명석한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평가했다. 대화하고, 논의하고, 상대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철저하게 논파하고, 경멸한 다음 내던지는, 풍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다. 면도칼보다는 단도와 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전후에 한때 있었던 대관료에서 훌륭한 정치인이 된 인물로 가야를 꼽았으며, 그 이유로 전쟁 중에 군과 싸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야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통제 경제를 한 인물로 평가하며, 가야 자신도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3년이나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재정 덕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이시하라는 가야를 모델로 한 소설 '공인'을 썼으며, 가야 자신도 감동하여 스스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서간을 이시하라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후년에 밝혀졌다.

아내와는 열렬한 연애 결혼으로, 아내의 통야의 밤에는 밤새도록 아내의 몸을 쓸어주었다. 다음날 장의사가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몸이 따뜻하네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일본 사회당의 위원장을 맡았던 가미조 다케타로와는 구제 제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가미조가 사망했을 때는 추도문을 썼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히라누마 다케오의 히라누마 가문과는 이웃으로서 교류가 있었으며, 히라누마는 학생 시절에는 가야의 손자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 히라누마가 정치인으로서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토 에이사쿠의 비서가 되는 것도 가야의 주선이라고 한다.

3. 1. 긍정적 평가

가야 오키노리는 강경파이면서도 과거의 패전 책임을 통감하여 서훈을 거절하였다. 또한, 스가모에서 복역 중 형장으로 향하는 A급 전범을 목격한 경험에서 법무대신 당시에는 사형 집행에 부정적이었다는 일면도 있었다. 실제로 가야가 법무대신이었던 1964년은 일본 근세 이후 처음으로 사형이 실시되지 않은 해였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가야를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으며, "그렇게 냉정하고, 사람을 비웃고, 명석한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시하라는 가야를 모델로 한 소설 '공인'을 썼으며, 가야 자신도 감동하여 스스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서간을 이시하라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후년에 밝혀졌다.

일본 사회당의 위원장을 맡았던 가미조 다케타로와는 구제 제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가미조가 사망했을 때 추도문을 썼다. 히라누마 다케오의 히라누마 가문과는 이웃으로서 교류가 있었으며, 히라누마는 학생 시절 가야 손자의 가정교사를 했다. 히라누마가 정치인으로서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토 에이사쿠의 비서가 된 것도 가야의 주선이었다고 한다.

바둑을 좋아하여 6단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스가모 형무소 복역 중에는 이노 세키야 등과 바둑을 두었다. 아내와는 열렬한 연애 결혼으로, 아내의 통야의 밤에는 밤새도록 아내의 몸을 쓸어주었다. 다음날 장의사가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몸이 따뜻하네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3. 2. 부정적 평가

가야 오키노리는 '일본 유족 후생 연맹'을 '일본 유족회'로 개칭하고 우경화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거나,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면서도 사면 후에 요직에 취임한 것을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강경파이면서도 과거의 패전 책임을 통감하여 서훈을 거절했다. 또한,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 중 A급 전범이 형장으로 향하는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법무대신 당시에는 사형 집행에 부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실제로 가야가 법무대신이었던 1964년은 일본 근세 이후 처음으로 사형이 실시되지 않은 해였다.

3. 3. 한국과의 관계

4.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실시년도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총선거1958년도쿄도 제3구자유민주당96,910표 (27.9%)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1960년도쿄도 제3구자유민주당90,540표 (26.7%)2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1963년도쿄도 제3구자유민주당93,714표 (25.8%)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1967년도쿄도 제3구자유민주당96,381표 (20.5%)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1969년도쿄도 제3구자유민주당63,527표 (14.5%)4위당선중선거구제


5. 저서


  • 가와데 쇼보에서 1937년 『총후의 재정 경제』를 저술했다.
  • 금일의 문제사에서 1938년 『전시 하의 경제 생활』을 저술했다.
  • 아사히 신문사에서 1938년 『장기전과 경제 보국』을 저술했다.
  • 아사히 신문사에서 1940년 『전환기 일본의 재정과 경제』를 저술했다.
  • 대정익찬회 선전부에서 1943년 『정신·신체·가계』를 저술했다.
  • 신정경 연구회에서 1959년 『"소득 2배 증" 경제 10개년 계획에 대한 주문』을 저술했다.
  • 일본경제신문사에서 1963년 『나의 이력서 제19집 가야 오키노리』를 저술했다.
  • 경제 왕래사에서 1964년 『건강 장수 젊어지기』를 저술했다.
  • 이시하라 신타로와 공동 저술하여 경제 왕래사에서 1969년 『신구의 대결인가 조화인가』를 저술했다.
  • 오자키 유키오 기념 재단 지도자 시리즈에서 1971년 『중일 관계의 문제점』(강연 책자)을 저술했다.
  • 낭만에서 1972년, 경제 왕래사에서 1976년 『전전·전후 80년』을 저술했다.
  • 낭만에서 1973년 『이대로라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본 공산 혁명』을 저술했다.
  • 가야 마사오·가야 가즈코가 편집하여 1979년 『소용돌이 속 가야 오키노리 유고 초』(사립)를 저술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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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Okinori Kaya https://imtfe.law.vi[...] Library 2022-11-30
[3] 간행물 Obituary https://web.archive.[...] 1977-05-09
[4] 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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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뉴스 財務省事務次官に田中氏昇格 異例の3代連続同期 http://www.asahi.com[...] 朝日新聞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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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뉴스 「この国のかたち」対談 石原慎太郎都知事×葛西敬之JR東海会長 201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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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간행물 叙任及辞令 193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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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뉴스 요미우리, 전쟁당시 지도자 책임 日 언론으론 첫 규명 시도 http://media.daum.ne[...]
[26] 문서 제2차 이케다 내각 (제3차 개조), 제3차 이케다 내각
[27] 뉴스 A급 전범 합사, 日정부.전범자 깊숙 개입 http://media.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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