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키 가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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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가키 가즈시게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육군대신, 조선총독,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오카야마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에서 3위를 기록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육군대신과 조선총독을 거치며 군축과 문치주의를 추진했으나, 군부 내 반발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총리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1953년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임기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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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가즈시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우가키 가즈시게 |
원어 이름 | 宇垣 一成 |
출생일 | 1868년 8월 9일 |
사망일 | 1956년 4월 30일 |
출생지 | 오카야마, 비젠, 일본 |
사망지 | 이즈노쿠니, 시즈오카,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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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외무대신 | 제41대 외무대신 |
재임 기간 | 1938년 5월 26일 ~ 1938년 9월 30일 |
국왕 | 쇼와 천황 |
수상 | 고노에 후미마로 |
이전 외무대신 | 히로타 고키 |
다음 외무대신 | 아리타 하치로 |
식민지 대신 | 제12대 척무대신 |
재임 기간 | 1938년 5월 26일 ~ 1938년 9월 30일 |
수상 | 고노에 후미마로 |
이전 식민지 대신 | 오타니 소뉴 |
다음 식민지 대신 | 고노에 후미마로 |
조선 총독 | 제6대 조선 총독 |
재임 기간 | 1931년 6월 17일 ~ 1936년 8월 5일 |
이전 조선 총독 | 사이토 마코토 |
다음 조선 총독 | 미나미 지로 |
육군대신 | 제19대 육군대신 |
재임 기간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국왕 | 쇼와 천황 |
수상 | 하마구치 오사치 |
이전 육군대신 | 시라카와 요시노리 |
다음 육군대신 | 미나미 지로 |
조선 총독 (대리) | 조선 총독 (임시) |
재임 기간 | 1927년 4월 15일 ~ 1927년 10월 1일 |
이전 조선 총독 (대리) | 사이토 마코토 |
다음 조선 총독 (대리) | 야마나시 한조 |
육군대신 | 제17대 육군대신 |
재임 기간 | 1924년 1월 7일 ~ 1927년 4월 20일 |
수상 |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
이전 육군대신 | 다나카 기이치 |
다음 육군대신 | 시라카와 요시노리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
군종 | 일본 육군 |
복무 기간 | 1891년 ~ 1931년 |
최종 계급 | 육군 대장 |
참전 전투 | 러일 전쟁 |
기타 이력 | 6대 조선 총독 육군 대신 외무 대신 |
기타 정보 | |
작위 | 정2위 |
훈장 | 훈1등 욱일대수장 공4급 금치훈장 |
2. 인물과 경력
우가키 가즈시게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오카야마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1기)와 일본 육군대학교(14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오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며, 러일 전쟁 참전과 육군 내 주요 보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924년 육군대신으로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재임 중 군 현대화를 명분으로 4개 사단을 폐지하는 '우가키 군축'을 단행했으나, 이는 군 내부의 극심한 반발을 샀고 결국 1927년 처음으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시 육군대신을 맡았지만, 1931년 군부 쿠데타 미수 사건(3월 사건) 처리 과정에서 군부의 신망을 잃고 예편하였다.
1931년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1936년까지 재직했다. 이 시기 그는 식민지 농촌 통제 강화와 전쟁 동원 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농촌진흥운동' 등을 추진했으며, 황국신민화 정책과 내선일체를 내세워 조선의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했다.
1937년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938년 외무대신으로서 중일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저지로 실패하고 사임했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 공직추방되었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 기소는 면했다. 1953년 참의원 선거에서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별다른 활동 없이 1956년 사망했다.
2. 1. 젊은 시절
1868년(게이오 4년) 비젠국 이와나시군 오오우치무라(현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동구 세토정 오오우치)의 가난한 농가(물마시는 농민 우가키 모쿠에몬의 집)에서 5남매 중 막내(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8] 어릴 적 이름은 모쿠지(杢次)였으나, 1896년(메이지 29년)에 가즈시게(一成)로 개명하였다. 일본 제국 해군 중장이 되는 우가키 마토메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지만 친척 관계는 아니다.학문에 뛰어나 젊은 나이에 교원 채용 시험에 합격하여 10대에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후 도쿄로 상경하여 세이죠 학원을 거쳐 일본군 육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였다. 병사로 복무 중 군조로 진급하였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1890년(메이지 23년) 7월 26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는데, 보병과 103명 중 11위의 우수한 성적이었다. 견습사관을 거쳐 1891년(메이지 24년) 3월 24일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900년(메이지 33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14기)를 39명 중 3위로 졸업하고 황실 하사군도를 받았다. 대위 시절 사쓰마 출신의 가와카미 소로쿠 장군의 눈에 띄었으며, 오카 이치노스케를 따르기도 했다. 위관 시절 승진이 다소 늦었던 것은 오카 이치노스케를 따랐기 때문에 육군 내 야마가타파의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1902년(메이지 35년)부터 1904년(메이지 37년)까지, 그리고 1906년(메이지 39년)부터 1907년(메이지 40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군사 참관원으로 독일에 유학하였다. 첫 유학 기간 중 첫 번째 부인인 긴에가 사망하였고, 1907년 오하라 사다코와 재혼하였다. 이후 다나카 기이치 장군의 눈에 띄어 1910년(메이지 43년) 육군 보병 대좌로 진급하였다.
2. 2. 군인 생활
비젠국(현 오카야마현 세토시) 오치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난 우가키는[8] 젊은 시절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도쿄로 이주, 세이죠 학원을 거쳐 육군에 입대했다. 군조 계급에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90년 7월, 1기생으로 졸업했다. 당시 졸업 성적은 103명 중 11위였다. 이듬해인 1891년 3월,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896년에는 이름을 '일성(一成)'으로 개명하였다.1900년에는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14기생으로 졸업했는데, 39명 중 3위라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하사 군도를 받았고 유학 자격도 얻었다. 위관 시절에는 사쓰마 출신 가와카미 소로쿠의 눈에 띄어 그의 비호를 받았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귀국 후 러일 전쟁에 참모로 참전했다. 이 기간 중 첫 부인 긴에(鎮恵)를 잃었다. 1906년 다시 독일 유학길에 올랐고, 1907년 오하라 사다코(小原貞子)와 재혼하였다.
이후 육군 내 주요 보직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다.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계급/보직 | 비고 |
---|---|---|
1890년 | 육군사관학교 졸업 (1기) | 103명 중 11등 |
1891년 | 육군 보병 소위 임관 | |
1900년 | 육군대학 졸업 (14기) | 39명 중 3등, 하사 군도 수여 |
1902년 ~ 1904년 | 독일 유학 | |
1904년 ~ 1905년 | 러일 전쟁 참전 | 참모 |
1906년 ~ 1907년 | 독일 유학 | |
1910년 | 육군 보병 대좌 진급 | |
1911년 |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 | |
1913년 | 육군 소장 진급 |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폐지 반대로 보병 제6연대장 좌천 |
1916년 | 참모본부 제1부장 | |
1918년 | 참모본부 총무부장 겸임 | |
1919년 | 육군 중장 진급 | |
1919년 ~ 1921년 | 육군대학 총장 | |
1921년 ~ 1922년 | 제10사단장 | 히메지 주둔 |
1923년 | 육군차관 | |
1925년 | 육군 대장 진급 |
1913년에는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이 추진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가 나고야의 보병 제6연대장으로 잠시 좌천되기도 했으나, 이후 군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1923년 육군차관에 임명된 이후, 1924년 기요우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 3. 육군차관과 육군장관 시절
1923년 육군성 차관을 거쳐, 1924년 1월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입헌정우회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다나카 기이치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다. 우가키는 이후 가토 다카아키 내각과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도 1927년 4월까지 육군대신직을 유지했다. 그는 미국을 잠재적인 제1 가상 적국으로 설정할 경우 일본 제국 해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며, 일본 제국 육군의 정치적 우위를 지키려 노력했다.육군대신 재임 중 우가키는 군의 현대화를 목표로 군비 축소와 병력 감축을 단행했는데, 이는 '우가키 군축'으로 불린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의 합의 사항 이행과 가토 내각의 재정 긴축 정책(1925년 5월~) 속에서 추진된 이 군축은, 단순히 규모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일본 육군의 체질을 양적 팽창에서 질적 향상으로 전환하고 장비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를 위해 1925년 4개 보병 사단(제13사단, 제15사단, 제17사단, 제18사단)을 폐지하고 약 2,000명의 장교를 퇴역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또한 징집병의 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고위 장교들의 조기 퇴역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절약된 예산은 신형 장비 도입과 훈련 강화 등 군 근대화에 투입되었다.[1]
그러나 이러한 군축은 군 내부, 특히 강경파와 일본 군국주의 성향의 우익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샀다. 군축으로 인해 많은 장교들이 강제 퇴역당하면서 우가키는 육군 내에서 인기를 크게 잃었고, 이는 훗날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군부 내 반발로 인해 1927년 4월 육군대신직에서 물러나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1] (첫 조선총독 임기는 1927년 12월까지였다.)
1925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으며, 1929년 7월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대공황 발발 이후 하마구치 내각의 경제 정책 실패와 1930년 런던 해군 조약 체결을 통한 군축 추진은 우익 세력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1931년에는 육군 내 비밀결사 조직인 '사쿠라카이' 소속 청년 장교들이 우가키를 총리로 추대하려 했던 쿠데타 미수 사건(3월 사건)이 발생했다. 우가키는 이들의 쿠데타 계획에 협력하지는 않았으나, 사건 관련자들을 제대로 처벌하는 데 실패하면서 군 내부의 신망을 잃었다. 결국 동료 장교들의 지지를 상실한 우가키는 1931년 4월 군에서 물러나 다시 조선총독직을 수락하게 되었다.[2] 우가키 군축에 대한 육군 내부의 뿌리 깊은 반감은 이후 그의 정치적 재기를 계속해서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2. 4. 조선총독 재직
우가키 가즈시게는 1927년 4월, 처음으로 조선총독에 임명되었다. 이는 가토 다카아키 내각과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재직(1924년 1월 ~ 1927년 4월)하던 중, 재정 긴축 정책에 따라 4개 보병 사단(제13사단, 제15사단, 제17사단, 제18사단)을 해체하는 군축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로 약 2,000명의 장교가 퇴역하게 되면서 우가키는 군부 내에서 인기를 크게 잃었고, 결국 육군대신직을 이어가는 대신 조선총독직을 수락하게 되었다.[1] 그의 첫 번째 조선총독 임기는 1927년 12월까지였다.이후 1929년 장군으로 승진하고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1929년 7월~)을 맡았으나, 대공황 이후 경제 정책 실패와 런던 해군 조약을 통한 군축 추진 등으로 우익 세력의 반발을 샀다. 1931년에는 자신을 수상으로 추대하려던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3.15 사건) 관련자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군부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1931년 4월 군에서 사임하고, 같은 해 6월 사이토 마코토의 후임으로 다시 조선 총독에 부임하여 1936년 8월까지 재직했다.
두 번째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우가키는 이전의 노골적인 무단 통치 대신 '문치'를 표방하며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한국 농촌 구제 및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운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운동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선의 농촌 사회를 통제하고 전체주의적 동원 체제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 다가오는 침략 전쟁에 대비하여 식량 증산과 인력 동원을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민족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이나 문맹 퇴치 운동 등은 철저히 외면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다.
또한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선융합(日鮮融合), 지방진흥 등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 산업 정책 측면에서는 북부 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중화학 공업 육성에 힘썼는데, 이는 군수품 생산 능력을 확보하여 대륙 침략 전쟁을 뒷받침하려는 의도였다.[2] 이와 함께 최남선, 윤치호, 이광수와 같은 조선의 주요 지식인들을 상대로 회유 정책을 펼쳐 식민 통치에 협력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우가키의 통치에 대한 저항도 있었다. 193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는 유진만, 이덕주 등 한인애국단 단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우가키 총독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4월 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계획은 미수에 그쳤다.[52]
우가키의 통치는 이전과 이후의 더욱 강압적인 통치 방식과 비교하여 일부 '화해 정책'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2], 근본적으로는 식민지 수탈 구조를 공고히 하고 전쟁 준비를 위한 동원 체제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총독 퇴임 이후 히로타 고키 내각이 붕괴하자 천황으로부터 내각 조각 명령을 받았으나, 과거 육군대신 시절 군축을 단행했던 일로 군부의 거부와 우파 정치인들의 반발에 부딪혀 수상 취임에는 실패했다.
2. 5. 척무, 외무장관 시절
1938년 척무대신을 거쳐 같은 해 5월 고노에 후미마로 제1차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식민지대신직도 맡았다. 외무대신으로서 우가키는 중일전쟁의 확전을 피하고 미국, 영국, 중화민국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 대사의 도움을 받아 중화민국 총리 쿵샹시와 직접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일본 내 호전적인 군부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일본군은 고노에 총리에게 모든 협상은 군부가 주도해야 하며 민간인(외무대신)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고노에 총리는 군부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에 우가키는 평화 협상 노력이 좌절된 것에 항의하며 임명된 지 불과 4개월 만인 1938년 9월 외무대신직과 식민지대신직에서 사임하였다. 이후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2. 6. 패전과 최후
1944년 다쿠쇼쿠 대학 제5대 학장에 취임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조속한 종식을 지지하는 활동에 참여했다.[18]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다른 전 일본 정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직추방되었다.[18]이후 도쿄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재판을 주도한 검사 조지프 키넌은 우가키를 미나미 지로,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케이스케 등과 함께 "파시즘에 저항한 평화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키넌은 이들을 파티에 초대하여 환대하기도 했으며, 우가키는 결국 전쟁 범죄로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1952년 공직 추방이 해제되었고, 1953년 4월에 실시된 제3회 참의원 선거에 전국구로 출마하여 당시 당선 기준선인 약 15만 표를 훨씬 넘는 51만 3765표를 얻어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19][20] 그러나 선거 운동 중에 건강 문제로 쓰러져, 이후 참의원으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1956년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나가오카의 자택(쇼라이소)에서 참의원 임기 중 사망하였다. 야마다 후타로는 사인이 화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이라고 주장했다.[21] 향년 87세였으며, 이는 당시 현직 참의원으로서 최고령 사망 기록(타이)이었다.[23] (다른 한 명은 이치카와 후사에) 묘소는 도쿄도 후추시에 있는 다마 령원에 있다.[22]
3. 평가
우가키 가즈시게에 대한 평가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복합적이다. 조선 총독으로서 황국신민화정책과 농촌진흥운동 등을 추진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하고 만주사변 및 중일전쟁 수행을 위한 인력 동원에 힘썼다는 점에서, 특히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52] 그의 통치는 일선융화(日鮮融合)와 내선일체를 내세워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으며,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에 의해 암살 대상이 되기도 했다.[52]
일본 내에서는 군축 단행과 의회주의 존중 태도로 인해 일부 평화주의 세력이나 정당 정치인들로부터 기대를 받기도 했다. 도쿄재판을 주도한 키넌 검사는 그를 파시즘에 저항한 평화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육군대신 시절의 군축과 3.15 사건 등에서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변화로 인해 군부 내에서는 "박쥐 같은 사내"라는 비판과 함께 깊은 불신을 받았다. 그의 애매한 화법과 일관성 없는 행보는 쇼와 천황에게도 불신을 사, 천황은 그를 총리감으로 부적절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유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군부의 반발과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여러 차례의 옹립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총리가 되지 못하면서 "정계의 행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태양(총리) 주변을 맴돌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행성에 빗댄 평가이다. 개인적으로는 강한 출세욕과 자의식 과잉의 면모를 보였다는 지적도 있다.[8][24]
3. 1. 긍정적 평가
1937년 9월 사임 후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우가키 가즈시게는 민간의 평화주의 그룹으로부터 폭넓은 신임을 받으며 여러 차례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 특히 군부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로서 기대를 모았다.요시다 시게루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여러 차례 우가키를 총리로 옹립하려 시도했다. 1939년 히라누마 내각 총사퇴설이 돌자 마키노 노부아키, 가바야마 아이스케 등을 통해 옹립을 추진했으나 쇼와 천황과 육군이 아베 노부유키를 지지하여 무산되었다. 1940년 가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총사퇴를 권고하며 우가키에게 조각(組閣, 내각 구성)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1942년에는 우가키와 히라누마 기이치로, 우가키와 마사키 신자부로(육군 황도파 영수)의 회담을 주선하고,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사전 교섭 후 우가키에게 조각을 제의했으나, 우가키 본인이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의 조각을 원치 않아 거절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시다의 활동은 결국 1945년 4월 헌병대에 체포되는 빌미가 되었다.
우가키 옹립 시도는 요시다뿐만이 아니었다. 도조 내각 타도를 외치던 나카노 마사타케 등은 1943년 우가키를 후임 총리로 내세우며 퇴진 운동을 벌였고, 중신들의 동의까지 얻었다. 우가키 본인도 이를 승낙하고 도조 내각 타도에 찬성했으나, 이 운동은 도조 히데키에 의해 사전에 탄압되어 우가키 내각은 성립되지 못했다. 결국 육군대신 시절 단행한 대규모 군축과 3.15 사건 당시의 태도 변화 등으로 육군 내 반대 세력이 많았던 우가키는 총리가 되지 못하고 1944년 다쿠쇼쿠 대학 제5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공직추방[18]되었으나, 도쿄재판을 주도한 검사 키넌은 미나미, 와카쓰키, 오카다와 함께 우가키를 "파시즘에 저항한 평화주의자"라고 칭찬하며 환대했다.
1952년 공직추방이 해제된 후, 1953년 4월 제3회 참의원 선거 전국구에 출마하여 당시 당선권인 약 15만 표를 훨씬 넘는 51만 3765표를 얻어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19][20] 이는 당시 그의 높은 대중적 인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선거 운동 중 쓰러져 의원 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고 1956년 의원 재직 중 사망했다.[21][22]
우가키는 거물 군인임에도 의회주의를 존중하여 정당 정치인 그룹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전전에는 민정당 총재로, 전후 직후에는 일본진보당 총재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3. 2. 부정적 평가
1931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는 이전의 무단통치 대신 '문치'를 내세우며 황국신민화정책과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 농촌을 구제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통치 체제를 전체주의적 동원 체제로 재편성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 운동을 내세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며 조선의 인력을 식량 증산과 대륙 침략 전쟁 수행에 총동원하였다.[52] 또한 '일선융화(日鮮融合)', '내선일체' 등을 내세우며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고, 최남선, 윤치호, 이광수와 같은 조선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그의 식민 통치 행보에 맞서 193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는 유진만, 이덕주 등 한인애국단원을 파견하여 우가키 암살을 시도했으나, 4월 7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미수에 그쳤다.[52]군부 내에서도 그의 기회주의적인 행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우에하라 유우사쿠를 중심으로 한 규슈 파벌은 그를 "박쥐 같은 사내"라고 조롱했는데, 이는 다나카 기이치의 심복으로 육군대신에 발탁되었음에도, 자신의 파벌 강화를 위해 반(反) 장주파적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에 집착하고 정당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며, 3.15 사건처럼 군부에 의한 국가 지배를 모의했음에도,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총리대신으로 지명되자 이를 전면 부정하는 등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3.15 사건 당시에도 실행 직전에 태도를 바꿨는데, 군국주의를 적극 추진했던 인물의 이러한 변절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는 그가 파시즘에 저항했다기보다는 파시즘 세력에게 용납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들어 두겠다"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여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외무대신 재임 중 발생한 장고봉 사건 처리 과정에서 보인 그의 모호한 태도는 마치 출병을 용인한 것처럼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쇼와 천황에게는 명확히 반대 의견을 상주했음에도,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천황의 불신을 샀다. 『쇼와 천황 독백록』에는 "이런 사람을 총리대신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혹평이 기록되어 있다. 쇼와 천황은 3.15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우가키 특유의 애매한 화법을 지목하기도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총리 후보였고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었음에도, 육군 내 반발 등으로 결국 총리직에 오르지 못하면서 '정계의 행성(惑星)'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태양(총리) 주위를 맴돌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이 될 수 없는 행성에 빗댄 것이다.
3. 3. 중립적 평가
우에하라 유우사쿠(원수)를 중심으로 한 규슈 파벌에게는 “박쥐 같은 사내”라는 조롱을 받았다. 다나카 기이치의 신임으로 육군대신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파벌 강화를 위해 예비역 편입이나 육사 출신 배제 등 반장주파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평가가 있다.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고수하고 정당 정치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3·15 사건 등을 통해 군부에 의한 국가 지배를 꾀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사이온지 킨모치에 의해 총리대신으로 지명되자 이러한 기존의 입장을 모두 부정하며 태도를 바꾸었다. 3·15 사건에 대해서도 입장을 변경했다. 이러한 모습은 군국주의를 추진해 온 인물의 변절로 비춰져, 이시하라뿐 아니라 우가키 파벌 내부에서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는 그가 파시즘에 저항했다기보다는 파시즘 세력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들어 두겠다"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자주 사용했으며, 외무대신 시절 발생한 장고봉 사건에서는 그의 발언이 마치 출병을 용인한 것처럼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우가키는 쇼와 천황에게 명확하게 반대 의견을 상주했으나, 천황은 오히려 그에 대해 불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쇼와 천황 독백록''에서는 “이런 사람을 총리대신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혹평했다. 쇼와 천황은 3·15 사건의 원인도 우가키의 모호한 표현 방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는 유력한 총리 후보였고, 내각 조각 실패 후에도 여러 차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총리가 되지 못한 채 사망하여 “정계의 행성”이라 불렸다. 이는 행성이 태양(총리) 주위를 계속 돌지만 스스로 태양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빗댄 별명이다. 한편, 거물 군인으로서는 드물게 의회주의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정당 정치가 그룹에게 인기가 많았다. 전쟁 전에는 민정당 총재로, 전쟁 후에는 일본진보당 총재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모두 실현되지는 못했다.
4. 우가키 군축
1923년 육군성 차관을 거쳐 그 해 육군대신으로 임명된 우가키 가즈시게는 군의 현대화를 목표로 병력 감축을 추진했는데, 이는 '우가키 군축'으로 불리게 된다. 1924년 1월,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가토 다카아키 내각과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도 1927년 4월까지 유임되었다. 그의 임명 배경에는 입헌정우회와 그의 후원자였던 다나카 기이치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1]
우가키는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의 군비 축소 합의와 미국 등의 요구, 그리고 가토 다카아키 내각의 재정 긴축 정책에 부응하는 형태로 군축을 단행했다. 표면적으로는 군사 예산 삭감 요구에 따른 것이었지만, 실제 목표는 일본 육군의 체질을 양적 팽창에서 질적 향상으로 전환하고 장비의 현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만약 미국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삼을 경우 일본 제국 해군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일본 정치에서 일본 제국 육군의 우위를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다.[1]
1925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우가키 군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사단 감축 | 제13사단(고다시), 제15사단(토요하시시), 제17사단(오카야마시), 제18사단(쿠루메시) 등 총 4개 사단 해체 |
기타 부대/시설 폐지 | 연대구 사령부 16곳, 육군병원 5곳, 육군유년학교 2곳 폐지 |
인력 감축 | 약 2,000명의 장교 강제 퇴역, 징집병 복무 기간 단축, 고위 장교 조기 퇴역 |
장비 현대화 및 부대/학교 신설 | 절약된 예산으로 전차 연대 및 고사포 연대 각 1개, 비행 연대 2개, 대만 주둔 산포병 연대 1개 신설. 자동차 학교 및 통신학교 개교. 비행기, 전차, 경기관총, 자동차 견인포, 야전 중포 등 신무기 배치 |
학교 교련 강화 | 감축으로 남게 된 장교들을 중학교 이상 학교에 배치하여 군사교육 실시, 국가 총동원 체제 구축 시도 |
그러나 이러한 군축은 군 내부, 특히 강경파와 일본 군국주의자, 우익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많은 장교들이 강제로 퇴역하게 되면서 우가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육군 내에서 그의 인기와 입지는 급격히 추락했다. 군축으로 확보된 예산이 군 현대화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조차 그의 낮은 인기를 회복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1] 결국 우가키는 1927년 4월 육군대신직에서 물러나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1929년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복귀하여 추가 군축을 검토했으나, 자신의 건강 악화와 하마구치 수상 피격 사건 등으로 실현하지 못했다.[9] 이 시기 발생한 3.15 사건은 우가키를 수상으로 추대하려던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였는데, 우가키는 연루 의혹에도 불구하고 관련자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군부 내 지지를 더욱 잃었다.
우가키 군축은 비록 군 현대화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군부의 거센 반발을 야기하며 우가키 개인에게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훗날 그가 수상이 되려 할 때마다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고, "비애국자", "외세에 굴복한 자"라는 비방의 빌미가 되어 결국 수상 취임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5. 우가키 파벌
장주파의 지도자였던 다나카 기이치 밑에서 성장한 우가키는 다나카파를 계승하여 일본 제국 육군 내에서 강력한 파벌을 형성했다. 이는 다나카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츠노 이스케가 사망한 이후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25] 우가키 파벌은 1920년대 육군의 주요 요직을 장악했으며,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육사 기수 | 주요 경력 |
---|---|---|
카나야 노부조 | 5기 | 참모총장 |
하타 에이타로 | 7기 | 육군차관 |
미나미 지로 | 6기 | 육군대신, 조선총독 |
아베 노부유키 | 9기 | 수상, 육군대신, 조선총독 |
니노미야 하루시게 | 12기 | 문부대신, 참모차장 |
스기야마 겐 | 12기 | 원수,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 |
코이소 구니아키 | 12기 | 수상, 육군차관, 조선총독 |
타테카와 요시츠구 | 13기 | 참모본부 제1부장 |
우가키의 동기인 스즈키 소로쿠(참모총장)와 시라카와 요시노리(육군대신) 역시 우가키에게 협조적인 관계였다. 우가키 파벌은 구성원 대부분이 장주 출신이 아니라는 특징을 가졌는데, 이는 기존의 장주파 중심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력 구도를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스가노 쇼이치나 마츠키 나오아키 같은 장주 출신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주요 직위에서 밀려났다.[25]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나가타 테츠잔 등을 중심으로 한 중견 장교 그룹인 잇세카이가 등장하면서 우가키파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잇세카이 회원들은 장주파의 계보를 잇는 우가키파의 육군 장악에 불만을 품고, 과장급 요직을 점차 독점하며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
결정적인 계기는 1931년 이누카이 내각 구성 시 찾아왔다. 우가키는 아베 노부유키를 육군대신으로 추천했으나, 나가타와 스즈키 테이이치 등이 정우회의 오가와 헤이키치, 모리 코쿠 등에게 공작을 벌여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아라키는 우가키파와 대립하던 우에하라 유우사쿠 파벌 계열의 인물로, 칸인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을 참모총장으로, 마사키 신자부로를 참모차장으로 임명하는 등 육군 중앙의 주요 직위에서 우가키파 인물들을 대거 배제했다. 이로 인해 육군 내 권력 구도는 크게 변화했다.
이후 1936년 2.26 사건 이후 단행된 황도파 숙청 과정에서, 우가키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미나미 지로, 아베 노부유키, 타테카와 요시츠구 등이 예비역으로 편입되면서 파벌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25] 반(反)우가키파의 핵심 인물인 이시하라 간지와 타나카 신이치가 우가키 군축 당시 폐지된 부대 출신이라는 점도 이러한 반감의 한 원인으로 분석된다.[13]
6. 기타
1937년 9월 외무대신 사임 후 일선에서 물러났음에도, 민간의 중신층을 포함한 폭넓은 평화파 그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우가키 가즈시게는 여러 차례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
특히, 요시다 시게루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여러 차례 우가키를 총리로 옹립하려 시도했으나, 육군과 내대신 유아사 쿠라헤이, 키도 고이치 등의 반대로 모두 실패했다. 요시다는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45년 4월 헌병대에 체포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939년 히라누마 내각 총사퇴설이 돌자 요시다는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 등과 함께 우가키 옹립 공작을 벌였으나, 쇼와 천황과 육군이 아베 노부유키를 지지하면서 무산되었다. 1940년 가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총사퇴를 권고하며 우가키에게 조각 공작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1942년에는 우가키와 히라누마 기이치로, 우가키와 마사키 진자부로(육군 황도파 영수)의 회담을 주선했으며, 12월에는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사전 교섭 후 우가키에게 조각을 제의했으나, 우가키는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의 조각을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우가키 옹립 시도는 요시다 외에도 있었다. 도조 내각 타도를 주장했던 나카노 마사타케 등은 1943년 우가키를 후계 총리로 내세우며 퇴진 운동을 벌였고 중신들의 동의도 얻었다. 우가키 본인도 이 계획을 승낙하고 도조 내각 타도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도조 히데키에 의해 사전에 탄압되어 우가키 내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군부를 제압할 인물로 기대를 모았지만, 육군대신 시절의 대규모 군축(우가키 군축)과 3.15 사건 처리 과정에서의 입장 변화 등으로 육군 내에 적이 많았던 우가키는 끝내 총리가 되지 못하고 1944년 다쿠쇼쿠 대학 제5대 학장에 취임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공직추방[18]되었다. 도쿄재판을 주도한 수석 검사 키넌은 미나미,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케이스케와 함께 우가키를 "파시즘에 저항한 평화주의자"라고 칭찬하며 네 사람을 파티에 초대해 환대했다.
1952년 공직 추방이 해제되었고, 1953년 4월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전국구에 출마하여 최고 득표인 51만 3765표를 얻어 1위로 당선되었다.[19][20] 그러나 선거 운동 중 쓰러져 이후 의원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작가 야마다 후타로에 따르면 사인은 "회의 중 화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21]으로 추정되며, 1956년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나가오카(당시 이즈나가오카정)의 쇼라이소에서 의원 재직 중 사망했다. 향년 87세였으며, 이는 2016년 기준 현직 참의원으로서 최고령 사망 기록(타이)이다.[23] (다른 한 명은 이치카와 후사에) 묘소는 다마 령원[22]에 있다.
우가키는 시골 사람 같은 소박한 외모였지만, 남다른 출세욕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된다.[8] 다나카 기이치의 도움으로 육군대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가 상당히 크다", "제국의 운명 성쇠는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고 적을 정도로 강한 자의식을 드러냈다.
공개된 『우가키 카즈나리 일기』(정식 명칭: 『일여암수상록』)에는 감탄사 '!'가 2000회 이상, '!!'가 1000회 이상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7. 수상 후보
우가키 군축은 중학교 이상 학교의 교련 교육 의무화 같은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군축에 반발한 군부 내에서 우가키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훗날 그가 조선 총독을 거쳐 총리직에 도전했을 때, '비애국자', '외세에 굴복한 자'라는 비난의 빌미가 되어 정치적 행보에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1937년, 히로타 고키 내각이 무너진 후 일본으로 돌아온 우가키는 그해 2월 총리로 지명되었다. 원로 사이온지 킨모치는 과거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우가키가 군축을 성공시킨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가 군부를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1] 또한 우가키는 온건한 외교 정책을 추구하고 군부 내 파시즘적 경향에 비판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여론의 지지도 받았다. 당시 일본은 만주 사변(1931년), 5·15 사건(1932년), 국제 연맹 탈퇴(1933년), 2·26 사건(1936년) 등을 거치며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었고, 군부 황도파 등에 의한 테러, 정치 부패로 인한 불신 등으로 정국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군부의 정치 개입이 노골화되면서 전쟁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 주도의 정치를 원했던 육군 내 강경파, 특히 이시하라 간지 참모본부 제1부장 직무대리와 다나카 신이치 육군성 병무국 병무과장 등은 우가키 내각 출범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12] 이들은 우가키가 총리직을 수락하러 가는 길에 헌병 사령관을 보내 사퇴를 종용했으나 우가키는 이를 거부하고 총리 지명을 받았다. 포기하지 않은 이시하라 등은 군부 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 육군대신 자리에 아무도 취임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펼쳤다. 과거 '우가키 사천왕'으로 불렸던 스기야마 겐 교육총감과 코이소 쿠니아키 조선군 사령관조차 육군 수뇌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신직을 거부했다. 우가키는 예비역 대장인 자신이 직접 육군대신을 겸임하려 했으나, 내대신 유아스 쿠라헤이 등의 반대로 이마저 무산되었다.[11] 결국 우가키는 내각 구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총리직은 하야시 센주로에게 돌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 군부대신 자격을 예비역까지 확대하려 할 때 이를 강경하게 반대했던 인물이 당시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이었던 우가키 자신이었다. 그런데 1936년 히로타 내각에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가 부활하면서, 정작 자신이 그 제도 때문에 총리직을 맡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군부가 각료 임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내각 구성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일본 의회 정부와 민주주의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전쟁 기간 동안 군부가 민간 정부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3] 훗날 이시하라 간지는 우가키 조각을 무산시킨 자신의 행동을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회고했는데, 이는 우가키 내각이 들어섰다면 이후 일본이 중국과의 전면전이나 미국과의 전쟁으로 치닫는 흐름을 막을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이온지 긴모치 역시 이 사건으로 크게 낙담하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칠 정도였다.[11] 우가키에 대한 군부 내 반감에는 우가키 군축으로 인해 자신들의 소속 부대가 폐지된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13]
1937년 조각 실패 이후에도 우가키는 여러 차례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 1938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외무대신 겸 척무대신을 맡기도 했으나, "육군이 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끝내 총리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특히 요시다 시게루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여러 차례 우가키를 총리로 옹립하려 시도했지만, 육군과 기시, 기도 고이치 등 측근 세력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1943년에는 도조 히데키 내각 타도를 추진하던 나카노 마사타케 등이 우가키를 후임 총리로 내세우고 중신들의 동의까지 얻었으나, 이 움직임 역시 도조 히데키에 의해 사전에 탄압되어 무산되었다.
결국, 군부를 제어할 인물로 기대를 모았던 우가키는 육군대신 시절 단행한 대규모 군축과 3·15 사건 당시의 태도 변화 등으로 인해 육군 내부에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총리직 등극의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총리가 되지 못한 채 1944년 다쿠쇼쿠 대학 제5대 학장에 취임했다.
여러 내각 출범 시기에 우가키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추천 시기 (내각) | 추천 인물 |
---|---|
아베 노부유키 내각 (제37대) | 코노에 후미마로, 사이온지 킨모치 |
도조 히데키 내각 (제41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케이스케, 키요우라 케이고 |
코이소 쿠니아키 내각 (제42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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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Way of the Heavenly Swor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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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lasting 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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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1919-09-11
[3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1-10-01
[33]
기타
陸軍大臣宇垣一成叙位ノ件
アジア歴史センター
[3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4-01-12
[3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7-01-25
[36]
간행물
官報
1930-02-07
[37]
기록
外務大臣宇垣一成外一名叙位ノ件/大蔵大臣池田成彬
アジア歴史センター
[38]
간행물
官報
1896-12-02
[39]
간행물
官報
1902-12-01
[40]
간행물
官報
1906-12-04
[41]
간행물
官報
1914-05-18
[42]
간행물
官報
1916-07-19
[43]
간행물
官報
1918-10-02
[44]
간행물
官報
1921-04-19
[45]
간행물
官報
1922-02-14
[46]
간행물
官報
1924-02-25
[47]
간행물
官報
1907-07-21
[48]
간행물
官報
1931-12-28
[49]
기록
特ニ前官ノ礼遇ヲ賜フ 宇垣一成
アジア歴史センター
[50]
기록
特ニ国務大臣タル前官ノ礼遇ヲ賜フ 宇垣一成
アジア歴史センター
[51]
기록
特ニ前官ノ礼遇ヲ賜フ 宇垣一成
アジア歴史センター
[52]
웹사이트
유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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