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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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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센(神饌)은 신사에서 신에게 바치는 음식으로, 계절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678년 담산 신사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곡물, 해산물, 채소, 과일 등 다양한 종류가 준비된다. 신센 준비 과정은 정성을 다해 이루어지며,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이세 신궁과 같은 주요 신사에서는 특별한 신찬을 사용하며, 신상제와 같은 중요한 의식에서 햅쌀을 바친다. 신센은 나오라이라는 의식을 통해 신과 인간의 친밀함을 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신센을 준비하는 전통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기록을 남기고 전통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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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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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찬의 종류 및 준비

신사에서는 신찬(神饌)을 준비하기 위한 전용 건물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시메나와를 사용하여 신사 사무실을 외부와 분리한다. 그 후 신관이나 우지카미를 모시는 사람들인 '우지코'가 육식을 삼가고 몸을 정화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이때 '이비'라고 불리는 정화된 불을 사용하며, 신관들은 침이나 숨결이 신선에 닿지 않도록 종이로 입을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다.[1] 최근에 질병이나 죽음을 겪은 친척이 있는 사람은 신센 준비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주의를 기울인다.[1]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황실에서 가스가 대사의 가스가 축제와 같은 황실 영지 축제에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수석 집사를 파견하기도 했다.[1] 메이지 천황의 명령으로 전통 의식이 부활되면서 봉헌되는 신선은 황실 관련 축제에서 제공되는 특별한 종류로 돌아갔지만,[2] 그 준비는 일반 신토 신관들이 담당했다.[3]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다하려는 기본 개념이 있기 때문에,[5] 계절이나 지역에 따라 신센의 내용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제단 앞에 그 해의 첫 수확물을 먹지 않고 바치는 관습이 남아있는 지역도 있지만,[6] 계절 음식 중에서 공물을 선택하는 지역도 있다.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이후, 봄에는 밭을 갈고 가을에는 수확하는 것이 사회의 기본이 되었다. 쌀에는 우카노미타마라는 음식과 농업의 가미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쌀은 일본인의 삶과 깊이 연결되었다.[7] 이러한 이유로 모치나 사케 (오미키)와 같은 쌀로 만든 음식이나 음료가 주요 제물이 되었고,[8] "사케 없이는 가미도 없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8] 그러나 이 의식에는 특별한 형식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제물 또한 표준화되어 있지 않다.

곡물 외에도 해산물과 채소를 바치는 경우가 흔하며, 조류를 바치는 신사도 있지만, 동물의 고기를 신센으로 바치는 경우는 드물다. ''엔기시키''에는 신성한 술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떡과 같은 많은 특정한 공물이 나열되어 있으며, 졸인 가다랑어, 은어소금물에 삶은 요리, ''히시오''에 졸인 붕어와 같은 요리를 준비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많은 신사에서는 강한 냄새가 나지 않는 채소만으로 구성된 신센인 불교식 식단인 ''킨쿤쇼쿠''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사도 있다. 예를 들어 마늘은 가미가모 신사에 공물로 바쳐지며, 그 해에 사냥한 멧돼지의 머리를 바치는 ''오니에''라는 의식이 거행되는 시로미 신사에는 동물의 고기가 공물로 바쳐진다.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과 같이 사람을 기리는 신사에서는 맥주, 담배 또는 기타 기성품을 바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 또한 신센으로 여겨진다.[9]

지역 특산물이나 전통과 관련된 품목이 종종 신센으로 바쳐진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으며, 많은 것들이 지역의 특징적인 신토 의식의 형태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나라현우엉 의식, 시마네현의 가지 의식, 시가현의 오이 축제, 교토고추냉이 축제, 그리고 도쿄의 자두 축제 등이 있다.[6]

잘 익은 수확을 상징하는 음식 외에도, 후쿠이현 미하마의 미미 신사, 아오모리현 남부의 스와 신사, 시마네현 마쓰에에 있는 미호 신사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정기적으로 먹지 않는 식물인 를 공물로 바치는 신사도 있다.[10][11] 세 신사에서 마를 바치는 데는 세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12] 미미 신사에서는 기근 동안 허기를 면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13] 미호 신사에서는 에도 시대의 책에서 행운의 부적으로 여겨져 새해에 부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스와 신사에서는 전통적으로 약효 때문에 사용되었다.[14]

기름으로 조리된 음식은 종종 신센으로 여겨진다.[15] 기름은 전통적으로 참깨, 가야, 호두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음식을 기름에 튀기는 방법은 중국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를 ''도가시(唐菓子)'' 또는 중국 과자라고 불렀다고 한다.[15] 고베의 이쿠타 신사에서 제공되는 ''헤소당고(heso-dango)''는 쌀을 빻아 쌀가루로 만들고, 공 모양으로 굴린 다음, 가운데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만든다. 이것들을 교자 만두처럼 반원 모양으로 만들면 ''부토''라고 불린다. 8자 모양으로 엮으면 ''마가리모치''라고 불린다. 원통형일 경우 ''바이시''라고 불리지만, 원래는 Y자 모양으로 쪼개어 만들었다.[15]

나라의 이사가와 신사에서는 ''사사유리''(참나리) 백합으로 장식된 술통을 바친다.[16] 이는 모셔진 신인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가 젊었을 때 미와산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미와산을 흐르는 사이가와 강둑에는 그 백합이 피어나는 지역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신센으로 바쳐지는 백합은 미와산에서 가져온다.[17]

신센을 바치는 것과 관련된 많은 세부 사항들은 신뢰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 무분별하게 방법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18] 결과적으로 남겨진 모든 기록은 공식 기록이 거의 없는 개인적인 메모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신센의 준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특정 공물을 바치는 것이 왜 전통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신사도 많다.[19] 그러나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준비의 특정 측면을 전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기록을 남기기로 선택한 신사도 있었다.[20] 1871년, 태정관은 신토 사제의 세습제를 폐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가토리 신사는 의식의 세부 사항을 다양한 문서에 기록하여 정보를 전수했다.[21]

'우지코'가 신센을 준비하는 지역에서는 '미야자'라는 집단이 그 방법을 전승했다. '미야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가문은 '토야' 또는 주 가문으로 불렸고, 그 가문의 중심 인물은 '토닌'이라고 불렸다. '토닌'은 극심한 단식을 거쳐야 했으며, 미호 신사와 같은 신사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토닌'으로 선택되면 4년 동안 정화를 거쳐야 하고, 자정에 신사에서 기도해야 하며, 그 기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토닌'이 된 후에도 불순물을 제거한 방에 머물면서 여성은 물론 누구와도 만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신사도 있었다.[22] 일반적으로 '미야자'에 속한 사람들은 가문의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역할도 있었다.[23]

현재 시골 신사에서는 후계자를 찾기 어려워 찐 떡이나 찧은 떡을 상점에서 구매하고 떡의 모양만 만드는 경우도 있다.[24]

기타노텐만구 신사의 주임 사제는 원래 의식 전에 7일 동안 자신의 방에 머물며 여성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에는 의식을 고기 섭취를 3일 동안 금지하는 것으로 완화했다.[25]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추종자들의 후손들이 직접 신센을 준비하는 전통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로 보내진 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소지품을 가지고 교토로 돌아와 기타노텐만구 신사를 세웠을 때 신센을 준비하고 바치면서 망자의 영혼을 정화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26]

3. 1. 곡물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이후, 봄에는 밭을 갈고 가을에는 수확하는 것이 사회의 기본이 되었다. 쌀에는 우카노미타마라는 음식과 농업의 가미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쌀은 일본인의 삶과 깊이 연결되었다.[7] 이러한 이유로 모치나 사케 (오미키)와 같은 쌀로 만든 음식이나 음료가 주요 제물이 되었다.[8] "사케 없이는 가미도 없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8] 그러나 이 의식에는 특별한 형식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제물은 표준화되어 있지 않다.

쌀 이외의 곡물을 신에게 바치는 지역도 있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현 이라부섬에서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 때문에 조(粟) 등으로 만든 "음마다리"라는 술과 떡을 바친다. 시즈오카현 이와타시의 후야와타 신사나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기비쓰 신사 등에서도 조나 기장을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다.

쌀은 "시토기"라고 불리는 분말 형태로 가공되어 발효하면 술이 되고, 열을 가하면 떡이 된다. 당나라에서 기름을 사용한 조리법이 전해진 후에는 "부토"나 "마가리모치"가 되었으며, 아이누에게도 "시토"라는 떡으로 전해져 다양한 음식으로 발전했다.

3. 2. 해산물

곡물 외에도 해산물과 채소를 바치는 경우가 흔하며, 조류를 바치는 신사도 있지만, 동물의 고기를 ''신센''으로 바치는 경우는 드물다.[6] ''엔기시키''에는 졸인 가다랑어, 은어소금물에 삶은 요리, ''히시오''에 졸인 붕어와 같은 요리, 전복, 오징어, 멸치, 연어, 다시마, 미역, 등 다양한 해산물과 해조류가 신찬으로 기록되어 있다.

식물을 신찬으로 바치는 신사도 많다. 이사가와 신사에서는 사사유리 꽃으로 장식된 술통을 바치는데, 이는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가 살았던 미와산의 사이가와 강가에 사사유리가 만개했던 전설과 관련이 있다. 키타노 텐만구에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기리기 위해 홍매와 백매를 바친다.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에서는 대나무, 매화, 국화, 소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식물과 봉황, 학, 토끼, 나비 등 동물을 조합한 조화를 신찬으로 바친다.

3. 3. 채소 및 과일

神饌일본어에서 곡물 외의 재료로는 해산물과 채소가 많으며, 새를 바치는 신사는 적지 않지만, 짐승 고기를 바치는 신사는 제한적이다.

많은 신사에서는 강한 냄새가 나지 않는 채소만으로 구성된 神饌일본어인 불교식 식단인 '킨쿤쇼쿠'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사도 있다. 예를 들어 마늘은 가미가모 신사에 공물로 바쳐진다.[9] 지역 특산물이나 전통과 관련된 품목이 종종 神饌일본어으로 바쳐진다. 예를 들어, 나라현우엉 의식, 시마네현의 가지 의식, 시가현의 오이 축제, 교토고추냉이 축제, 그리고 도쿄의 자두 축제 등이 있다.[6]

잘 익은 수확을 상징하는 음식 외에도, 후쿠이현 미하마의 미미 신사, 아오모리현 남부의 스와 신사, 시마네현 마쓰에에 있는 미호 신사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정기적으로 먹지 않는 식물인 를 공물로 바치는 신사도 있다.[10][11]

엔기시키 제7권에는 신주 외에 , 귤, , 유자, 등의 과실, 콩, 팥 등의 콩류, 떡 등이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특정 신사에서 채소 및 과일이 받쳐진 예시이다.

### 가모별뢰신사 내진 신찬

가모 축제에서 가모별뢰신사에 바쳐지는 신찬에는 은 그릇이 많이 사용되며, 다음과 같은 채소와 과일이 포함된다.

품목
마늘
백합
가지
아오이 카츠라
어과자



### 가모별뢰신사 정적 신찬

정적 신찬은 가모 축제에 다른 곳에서 온 신을 위해 바쳐지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채소 및 과일이 포함된다.

품목
조림
씀바귀(후키)
생강
엉겅퀴(아자미)



### 이와시미즈하치만구

이와시미즈하치만구는 야와타시의 오토코야마 산중에 있는 사당으로, 바쳐지는 신찬에는 해산물이 많지만, 다음과 같은 채소 및 과일도 포함된다.

품목
우엉
연근
흰 오이
머리 토란 붙은 작은 토란
압과
고추냉이
하골
포도
가야
칠 밤


3. 4. 특수 신찬

2015년 현재에는 1871년(메이지 4년)에 제시된 제식 차례에 준거한 '''생찬'''이라고 불리는, 소재 그 자체를 헌공하는 생물 신찬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전에는 '''숙찬'''이라고 불리는, 조리 및 가공을 한, 일상생활에서의 식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신찬으로 헌공되었다. 그리고 일부 신사에서는 전통에 따라 이 형식의 신찬 헌공이 계승되고 있으며, 이러한 신찬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특수 신찬'''이라고도 불린다.

엔기시키 제7권 지7에 기재된 다이조사이의 품목에 따르면, 신주 외에 전복, 오징어, 멸치, 어랍, 태합, 가다랑어, 흥리, 도어, 연어 등의 해산물, 해채, 다시마, 미역, 자채(김) 등의 해조류, , 귤, , 유자, 등의 과실, 미두자, 콩, 팥 등의 콩류, 떡, 꼬인 떡, 고리떡 등의 떡류, 쌀튀밥 등이 바쳐졌다. 제5권 지5의 사이구(斎宮)의 품목에는 쌀, 밤, 백주, 흑주, 기름 등에 더해 전복, 가다랑어, 오징어, 소라, 은어, 붕어 등의 기록이 있으며, 이 중 가다랑어, 은어, 붕어에 대해서는 조린 가다랑어, 소금 조림 은어, 간장 조림 붕어 등 조리 방법의 기록도 있다.

금훈식을 요구받는 신찬이 있는 한편, 가모와케 이카즈치 신사에서는 마늘이 바쳐지며, 짐승 고기를 바치는 예로는, 긴쿄 신사에서 행해지는 "오니에"라고 불리는, 그 해에 사냥된 멧돼지의 머리를 봉납하는 의식에서 바쳐지는 신찬이 있다. 또는, 호코쿠 신사 등 실존했던 인물을 모시는 신사에서는 맥주나 담배와 같은 기성품이 바쳐지는 경우도 있으며, 이들 또한 신찬이다[27]

그 토지의 특산품이나 고사에 따른 신찬이 바쳐지는 경우도 많으며, 그것들은 현대에 계승되어, 그 토지 특유의 신사로서 형태를 남기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나라현의 우엉 먹는 신사, 시마네현의 가지 신사, 시가현의 오이 축제, 교토부의 와사비 축제, 이타도리 축제, 후쿠시마현의 생강 축제, 아키타현의 소꼬리풀 축제, 나가노현의 두릅 축제, 도쿄도의 자두 축제 등이 있다.

풍요로운 결실을 나타내는 식재료 외에도, 후쿠이현 미하마정에 있는 야미 신사, 아오모리현 산노헤군 난부정에 있는 스와 신사, 시마네현 마쓰에시에 있는 미호 신사 등에서는 참마(토코로)라고 불리는,일상적으로는 먹지 않는 음식이 바쳐지고 있다. 야미 신사에서는 기근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먹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여 바쳐진다고 하지만, 그에 반해 미호 신사에서는, 에도의 겐로쿠 시대에 쓰여진 『혼초 쇼쿠칸』에 "흰 수염이 많고, 장수의 축하로 정월의 봉래 장식에 사용했다"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상서로운 물건으로 신찬에 넣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스와 신사에서는 약으로 사용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신찬으로서 바쳐졌던 것이 아닌가 와 같은 식재료에 대해 세 곳에서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신불습합의 영향이 큰 담산 신사와 같은 사찰에서는 신찬에도 그 영향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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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산 신사는 678년(덴무 천황 7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장남이자 승려인 정혜에 의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유골을 개장하고 안치하기 위해 묘락사로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법상종이었으나, 헤이안 시대에는 천태종이 되었고, 후지와라씨의 번영에 따라 묘소로서 신위가 높아졌다. 926년(엔초 4년), 천신지기, 팔백만의 신들을 모시고, 대직관상을 합사한 총사가 건립되어, 다이고 천황에 의해 담봉대권현의 칙을 받았다.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신불분리를 받아, 성령원이 본전, 십삼중탑이 신묘, 호국원이 배전, 상행삼매당이 권전이 되어, 다무봉 일대는 담산 신사가 되었다.

헌공되는 「백미의 어식」이라는 말은 불설무량수경이나 대아미타경에도 보이며, 대법회 때 부처님 앞에 바쳐진 다양한 공물을 의미한다. 혹은 우란분에서는 한 여름 90일(사찰에 들어가 행해지는 90일간의 수행)을 마친 무례의 날에 백미의 어식으로 승려를 공양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불교의 풍습이 신불분리 이후에도 계승되어, 현대에 남았다고 한다.

또한, 가모와케 이카즈치 신사의 섭사인 나라 신사에서는, 가모제의 처음과 마지막에 악귀나 사귀에게 강반을 바치는 의식이 있으며, 이 강반을 「산반(さば)」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불교에 같은 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향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불교의 영향이 큰 신찬은 「사람이 먹는 것을 신에게도 먹게 해 드린다」는 생각과는 달리, 불단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제식 차례에 의한 생찬으로의 이행 이전부터 생찬으로 바쳐졌다.

3. 4. 1. 도가시(唐菓子)

기름으로 조리된 음식은 종종 신센으로 여겨진다.[15] 기름은 전통적으로 참깨, 가야, 호두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음식을 기름에 튀기는 방법은 중국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가시(唐菓子) 또는 중국 과자라고 불렀다고 한다.[15]

고베의 이쿠타 신사에서는 배꼽(''heso'')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진 헤소당고(heso-dango)라는 과자를 제공한다. 이것들은 쌀을 빻아 쌀가루로 만들고, 공 모양으로 굴린 다음, 가운데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만든다. 교자 만두처럼 반원 모양으로 만들면 ''buto''라고 불린다. 8자 모양으로 엮으면 ''magarimochi''라고 불린다. 원통형일 경우 ''baishi''라고 불리지만, 원래는 Y자 모양으로 쪼개어 만들었다.[15]

3. 5. 준비 과정

신사에서는 신센(神饌)을 준비하기 위한 전용 건물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시메나와를 사용하여 신사 사무실을 외부와 분리한다. 그 후 신관이나 우지카미를 모시는 사람들인 '우지코'가 육식을 삼가고 몸을 정화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이때 '이비'라고 불리는 정화된 불을 사용하며, 신관들은 침이나 숨결이 신선에 닿지 않도록 종이로 입을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다.[1] 최근에 질병이나 죽음을 겪은 친척이 있는 사람은 신센 준비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주의를 기울인다.[1]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황실에서 가스가 대사의 가스가 축제와 같은 황실 영지 축제에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수석 집사를 파견하기도 했다.[1] 메이지 천황의 명령으로 전통 의식이 부활되면서 봉헌되는 신선은 황실 관련 축제에서 제공되는 특별한 종류로 돌아갔지만,[2] 그 준비는 일반 신토 신관들이 담당했다.[3]

신센을 바치는 것과 관련된 많은 세부 사항들은 신뢰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18]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개인적인 메모 형태로 남겨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정 공물을 바치는 전통이 왜 생겼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신사도 많다.[19] 그러나 일부 신사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준비의 특정 측면을 전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20] 1871년, 태정관은 신토 사제의 세습제를 폐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가토리 신사는 의식의 세부 사항을 다양한 문서에 기록하여 정보를 전수했다.[21]

'우지코'가 신센을 준비하는 지역에서는 '미야자'라는 집단이 그 방법을 전승했다. '미야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가문은 '토야' 또는 주 가문으로 불렸고, 그 가문의 중심 인물은 '토닌'이라고 불렸다. '토닌'은 극심한 단식을 거쳐야 했으며, 미호 신사와 같은 신사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토닌'으로 선택되면 4년 동안 정화를 거쳐야 하고, 자정에 신사에서 기도해야 하며, 그 기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토닌'이 된 후에도 불순물을 제거한 방에 머물면서 여성은 물론 누구와도 만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신사도 있었다.[22] 일반적으로 '미야자'에 속한 사람들은 가문의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역할도 있었다.[23]

현재 시골 신사에서는 후계자를 찾기 어려워 찐 떡이나 찧은 떡을 상점에서 구매하고 떡의 모양만 만드는 경우도 있다.[24]

기타노텐만구 신사의 주임 사제는 원래 의식 전에 7일 동안 자신의 방에 머물며 여성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에는 의식을 고기 섭취를 3일 동안 금지하는 것으로 완화했다.[25]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추종자들의 후손들이 직접 신센을 준비하는 전통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로 보내진 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소지품을 가지고 교토로 돌아와 기타노텐만구 신사를 세웠을 때 신센을 준비하고 바치면서 망자의 영혼을 정화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26]

신찬 조제는 가스가 대사(春日大社)의 정전(竃殿, 헤쓰이도노), 가모미오야 신사(賀茂御祖神社)의 대취전(大炊殿, 오이도노) 등 전용 건물이 있는 신사는 그곳에서 조제를 실시한다. 그렇지 않은 신사에서는 사제 등을 시메나와를 사용하여 외부와 구분하고, 정진하고 청결을 유지한 신직이나 씨족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불은 이마비가 사용되며, 타액이나 숨결 등이 신찬에 닿지 않도록 입가를 흰 종이로 덮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근친에게 불행이 있었던 자는 조제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등, 조제에는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진다.

가스가 대사에서 행해지는 가스가 축제 등의 칙제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궁중에서 대선 (大膳)이 참향하여 어물의 조제를 담당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신찬은 특수 신찬으로 되돌아갔지만, 조제는 가스가 대사의 신직의 손으로 행해지고 있다.

정성을 다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한다는 개념이 근저에 있기 때문에, 계절이나 지역에 따라 바쳐지는 내용은 다채롭다. 첫 수확물은 신찬으로 신전에 봉납하기 전까지 먹지 않는 풍습이 남아있는 지역이 있다는 점에서도, 계절에 따라 제철 식재료 등에서 어물(御物)을 선택하고 그것을 바친다는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왼쪽 뒤편에 한 쌍의 높은 굽의 그릇이 보인다.


이렇게 조리된 음식은 토기(かわらけ), 높은 굽의 그릇(たかつき), 접시(おしき), 삼방, 통, 궤 등 다양한 그릇과 용기에 담겨 안(案) 등의 대 위에 헌공된다. 현재는 토기나 백자가 많이 사용되지만, 고식에 따라 세로로 쪼갠 판 삼나무에 가장자리에 칡 덩굴을 장식한 "헤기판(ヘギ板)"이라고 불리는, 접시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그릇을 사용하는 신사나, 짚을 30cm 정도의 길이로 맞추어 양쪽 끝을 묶어 배 모양으로 만든 "츠토(ツト)"라고 불리는 그릇으로 공물을 바치는 신사도 있다. 또한, 가스가 축제에서 바쳐지는 오타나 신찬(御棚神饌)처럼 껍질을 벗기지 않고 검은 나무 그대로의 질감을 남긴 시모토안(楉案)이 신찬의 이름이 되는 예도 있다.

시마네현 마쓰에시에 있는 미호 신사에는, 운반할 때 숨결이나 침이 신찬에 닿지 않도록 사카키 잎을 입에 문다는 작법이 남아 있다. 또는, 당궤(唐櫃)를 머리 위로 드는 두상 운반이라는 방식으로 신찬을 운반하는 신사가 전국 각지에 있으며, 이 역시 마찬가지로 숨결이나 침이 닿지 않도록 머리 위로 든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두상 운반은 옛날에는 7세기 후반의 고분 시대의 하니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선면고사경』 등 많은 문헌에 그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1741년(간포 원년)에 기록된 『하산잡담』에서는 여행지에서 드문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두상 운반은 당시 이미 일반적인 행위는 아니었지만, 신사처럼 고식을 존중하는 의식에서는 변함없이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인선에 있어서는 교토시 사쿄구에 있는 기타시라카와 덴만구처럼 성상(盛相)을 소녀, 고성(高盛り)을 미혼 여성, 세미(洗米)를 기혼 여성 등, 연령이나 혼인 상황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여 여성에게 맡기는 신사도 있지만, 남성이 행하는 경우도 있다.

헌공된 신찬은 씨족들에 의해 나오라이가 행해지거나, 참배객 등에게 대접되는 경우가 많지만, 시가현 오츠시에 있는 스미요시 대사의 산노 축제처럼, 그대로 비와호에 투공되는 경우나, 과거에는 새에게 바치기 위해 본전의 지붕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4. 주요 신사와 신찬

2015년 현재 특수 신찬을 헌공하는 신사는 전국 각지에 존재하지만,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신사명신찬명비고
이세 신궁신상제 「유귀 대어찬」미에현 이세시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이와시미즈제 「공화 신찬」교토부 야와타시
가모와케 이카즈치 신사가모제 미아레 신사(미아레 신사) 「내진 신찬」, 「외진 신찬」, 「정적 신찬」교토부 교토시
가모미오야 신사가모제 미카게 신사교토부 교토시
와카메카리 신사와카메카리 신사(메카리 신사) 「복증」, 「치고(이가타메)」, 「힘떡(치카라이)」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오이스기 신사에토에토제 「행」시가현 구사쓰시
기타노텐만구매화제 「매화 어공」교토시 가미교구
미호 신사아오시바가키 신사시마네현 마쓰에시
히요시 타이샤산노제 「아와즈의 어공」시가현 오쓰시
미미 신사예대제 「어선」후쿠이현 미카타군 미하마정
이소카와 신사삼지제나라현 나라시
아소 신사미타우에 신코식구마모토현 아소시
타데이카 신사, 구마노 신사타데이카 신사의 기온제와 구마노 신사의 예대제 「칠행기」후쿠시마현 미나미아이즈정 타지마
스와 신사예대제아오모리현 산노헤군 난부정
단잔 신사가키제 「백미의 어식」나라현 사쿠라이시
가토리 신궁대향제 「대향제 신찬」지바현 가토리시
긴카가미 신사예대제 「오니에」미야자키현 사이토시
가스가타이샤가스가제 「어선 신찬」, 「팔종 신찬」나라현 나라시
가모 신사매년 정월 초하루 「병 분할 신사」(이마즈시 무형 민속 문화재)도야마현 이마즈시
하쿠산히메 신사예대제 「특수 신찬」이시카와현 하쿠산시



단잔 신사처럼 사찰과 관계가 깊고, 신불습합의 영향이 큰 신사에서는 신찬에도 그 영향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1].

4. 1. 이세 신궁 (伊勢神宮)

신봉초|しんぽうしょう일본어에 따르면, 고대 율령 제도 하에서 신궁의 영지인 여러 국가의 칸베(神戸), 미쿠리야(御厨), 미소노(御園), 신덴(神田), 묘덴(名田) 등 약 1350개소의 토지에서 다양한 어물이 봉납되었다고 한다[1]。 804년(엔랴쿠 23년) 황대신궁 의식장|こうたいじんぐうぎしきちょう일본어에는 "6월 15일의 제사에 시마국 칸베의 백성들이 봉납하는 싱싱한 복어, 소라 등의 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헤이안 중기에 편찬된 엔기식|えんぎしき일본어에도 츠키나미사이(月次祭), 칸나메사이(神嘗祭)의 3절제에 랩(호지시, 훈제 건조 육류), 킨코(금해삼), 카츠오(굳은 생선, 가다랑어), 해조류, 소금, 기름 6되가 공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율령 제도가 붕괴한 이후에도 제사의 신찬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1871년(메이지 4년) 신궁 개혁으로 조직 개혁이 이루어진 후 전국의 영지는 전부 폐지되었고, 원칙적으로 신궁 스스로 어물을 조달하는 자급자족 제도로 바뀌었다[1]

신궁에서는 도요케오미카미(豊受大御神, 풍수대어신)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천조대어신)의 미케츠카미(御饌都神, 음식의 신)로 모셔진 이래 약 1500년 동안, 외궁의 미케전에서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신찬을 봉납하는 히고토 아사유 오미케사이(日別朝夕大御饌祭, 일별 조석 대어찬제), 또는 상전미찬(常典御饌)이라고 불리는 신사가 반복적으로 거행되어 왔다[2]。 일별 조석 대어찬제에서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도요케오오미카미가 마주하는 상전의 신좌와 별궁의 신좌를 합쳐 총 6개의 신좌가 마련되어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 신사를 집행하는 신직은 네기(禰宜, 궁사), 곤네기(権禰宜, 부궁사), 구조(宮掌, 궁사)가 1명씩, 그리고 출사 2명으로 총 5명이다[2]。 의식은 전날부터 제관에 들어가 정진하고 청결을 유지하며, 다음 날 아침 5시부터 이비야전에서 미히키리구(御火鑚具, 불씨를 일으키는 도구)로 금기를 피운 불을 지피고, 후지오카산 기슭에 위치한 가미노이미 신사(上御井神社)에서 솟아나는 물을 길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2]。 솟아나는 물은 구조와 출사가 긴 자루가 달린 물바가지를 사용하여 수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길어 올린다[3]。 가미노이미 신사(上御井神社)로 참향할 때는 구조가 선두에 서고, 돌아올 때는 솟아나는 물을 눈앞에 든 출사가 이비야전까지 선두를 걷는다[3]

일별 조석 대어찬제에서 바쳐지는 신찬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고와이(強飯, 찐밥) 세 그릇, 어염, 건가다랭이, 도미, 다시마, 계절 과일, 계절 채소 등이 토쿠라베를 깐 토기에 담겨 있으며, 청주 세 잔, 어수가 오리비츠에 담겨 헌상된다[3]。 도미는 여름에 붕장어나 마른 오징어 등의 건어물로 바뀌고, 다시마 외에 아라메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3]。 토기에 토쿠라베를 까는 것은 토기가 없던 시대의 흔적이며, 하루 두 번 거행되는 것은 고대의 식습관이 하루 두 끼였던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3]

이렇게 준비된 신찬은 봄, 여름에는 오전 8시와 오후 4시, 가을, 겨울에는 오전 9시와 오후 3시에 미케전에 봉헌된다[3]。 시간이 되면 흰색 제복을 입고, 선두는 네기, 꼬리에는 미카기(御鑰, 열쇠)를 든 구조 순서로 행렬을 이루어, 팔소에서 어염으로 몸을 깨끗이 한 후 미케전으로 참진한다[4]。 미케전에 도착하면 네기는 구조로부터 미카기를 받아 문을 열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 먼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다음으로 도요케오오미카미, 그리고 상전 신 앞에서 시코(膝行, 무릎으로 걷는 것)한 채 신찬을 헌상한다[4]。 먼저 삼나무 젓가락이 젓가락 받침에 놓이고, 품목별로 신찬을 놓고, 모든 것을 다 놓으면 네기에 의해 축사가 연주된다[4]。 축사는 외궁 창사의 유래, 황실의 안태, 국가의 번영, 오곡 풍년을 기원한 후, 팔도배라고 불리는 기립과 배례를 8번 반복하고, 야히라데(八開手, 박수)를 치는 동작을 한다[4]。 식사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때에 다시 시코로 신찬을 내리고 퇴하한다[4]。 아침 미케, 저녁 미케 각각 40분, 조리를 포함하면 4시간 정도의 의식이, 전시 중이나 쇼와 49년 태풍 제8호(태풍)에 의한 침수를 겪으면서도 150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4]

4. 2. 가스가타이샤 (春日大社)

담산 신사처럼 사찰과 관계가 깊고, 신불습합의 영향이 큰 신사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음식인 신찬에도 그 영향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1] 678년(덴무 천황 7년), 담산 신사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장남이자 승려인 정혜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유골을 다른 곳에 묻고 안치하기 위해 묘락사로 건립하였다.[2] 처음에는 법상종이었으나, 헤이안 시대에는 천태종이 되었고, 후지와라 씨가 번성함에 따라 묘소로서 신성함이 높아졌다.[2][3] 926년(엔초 4년), 천신지기와 팔백만 신들을 모시고 대직관상을 합사한 총사가 건립되었고, 다이고 천황으로부터 담봉대권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2]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신불분리를 거쳐 성령원이 본전, 십삼중탑이 신묘, 호국원이 배전, 상행삼매당이 권전이 되었고, 다무봉 일대는 담산 신사가 되었다.[4][5]

「백미의 어식」이라는 말은 불설무량수경이나 대아미타경에도 나오며, 대법회 때 부처님 앞에 바쳐진 다양한 공물을 뜻한다.[1] 우란분에서는 한여름 90일 동안 절에서 수행을 마친 날에 백미의 어식으로 승려를 공양하는 풍습도 있었다.[1] 이러한 불교 풍습이 신불분리 이후에도 이어져 현대까지 남았다고 한다.[1]

가모와케이카즈치 신사의 섭사인 나라 신사에서는 가모제 처음과 마지막에 악귀나 사귀에게 강반을 바치는 의식이 있는데, 이 강반을 「산반(さば)」이라고 부른다.[6] 이 역시 불교에 같은 말이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6]

이처럼 불교의 영향이 큰 신찬은 「사람이 먹는 것을 신에게도 먹게 해 드린다」는 생각과는 달리, 불단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7] 또한, 제사 순서에 따라 생찬(生饌, 날음식)으로 바뀌기 이전부터 생찬으로 바쳐졌다.

4. 3. 기타노텐만구 (北野天満宮)

원래 기타노텐만구 신사의 주임 사제는 의식 전에 7일 동안 자신의 방에 머물렀고, 여성이 만든 음식은 먹지 않았다. 그는 의식에 참석하기 전에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25] 2012년에는 사제가 맡은 다른 의무를 고려하여, 의식을 고기 섭취를 3일 동안 금지하는 것으로 완화했다.[25]

이는 단순히 후계자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추종자들의 후손들이 스스로 ''신센''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로 보내진 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소지품을 가지고 교토로 돌아와 기타노텐만구 신사가 세워졌을 때, 그들이 ''신센''을 준비하고 바치면서 망자의 영혼을 정화하며 삶을 이어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26]

4. 4. 가모와케 이카즈치 신사 (賀茂別雷神社)

헤이안 시대 중기에 축제는 가모 축제를 가리켰을 정도로, 가모 축제는 매우 영향력이 컸다. 그중 내진 신찬과 외진 신찬은 가모별뢰신사에 좌정하는 신에게 바쳐지는 신찬으로 여겨진다. 그릇에는 독을 제거하는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 많이 사용된다.[1]

아오이 카츠라葵桂|아오이로 카츠라를 꽂은 것. 아오이는 남성, 카츠라는 여성을 나타내며, 자손 번영을 기원한다.일본어어젓가락배 어밥粢|히와다를 배 모양으로 성형하여 만든 그릇에 밥을 넣은 것. 도시락의 원형으로 여겨진다.일본어배 어떡粢|배 어밥과 마찬가지로, 하나비라모치를 10장 넣고, 그 위에 팥을 올린 것.일본어잉어수컷
도미백합가지날치 건어물어과자御菓子|가야의 열매, 친 밤, 신마초, 불어 올림(아라레), 어하제(현미를 볶은 것), 청해초, 자해초, 계관해초, 육십해초, 다시마 등을 봉서지로 싼 것.일본어
마늘히와다치마키붕어코마료狛魚|남북조 시대부터 오닌의 난까지 대신을 수호했다는 고사가 남아있는 사자 코마에 바쳐지는 도미.일본어어신주



정적 신찬은 내진 신찬이나 외진 신찬에 대해 가모 축제에 다른 곳에서 온 신을 위해 바쳐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주칠한 당궤에 넣어져, 각각의 어물은 "잎반(히라데)"라고 불리는 그릇에 담아진다.[1]

말린 연어오징어(스루메)친 복어꽁치멸치魳|카마스일본어생 조개
가다랭이소금청태신마초다시마구운 해삼
멸치(고마메)날치조림煮染|팥을 삶은 것.일본어씀바귀蕗|후키일본어생강엉겅퀴薊|아자미일본어


4. 5. 미호 신사 (美保神社)

''우지코''(氏子)가 ''신센''(神饌)을 준비하는 지역에서는, 그 방법이 ''미야자''(宮座)라고 알려진 집단에 의해 전해졌다.[22] ''미야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가문은 ''토야''(頭屋) 또는 주 가문으로 알려졌고, 그 가문의 중심 인물은 ''토닌''(頭人)이라고 불렸다. 시스템을 자세히 설명하는 기록에 따르면, ''토닌''은 극심한 단식을 거쳐야 했다. 미호 신사와 같은 신사에서는 여전히 이에 관한 엄격한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토닌''으로 선택되면, 4년 동안 예외 없이 정화를 거쳐야 하며, 항상 자정에 신사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 그 기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침내 ''토닌''이 되었을 때조차, 모든 불순물을 제거한 방에 머물면서, 여성은 물론 그 누구와도 만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훈련을 더 거쳐야 하는 신사도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토닌''이 될 권위를 얻는 방법이었다.[22] 일반적인 규칙으로, ''미야자''에 속한 사람들은 가문의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역할도 있었다.[23]

5. 신찬과 한국 문화

신궁의 신찬에서 전복은 특별한 어물이다[31]。 어물 조제소에 신관들이 모여, 신찬의 대표로서 금기칼로 세 번 자르고 소금으로 무치는 특별한 의식이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내궁에 자리잡은 후, 야마토히메노 미코토가 어물을 찾아 시마국을 순행했을 때, 현재의 도바시 구니사키정에서 유귀잠녀의 해녀가 바친 전복에 감동하여 신궁에 헌납하도록 전한 오랜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신궁이 자리잡은 이래 2000년 이상 요로이자키에서 잡힌 전복이 봉납되어 왔다[31]

요로이자키에는 어물 조제소가 있으며, 매년 어업이 활발한 5월에는 이곳에서 노시아와비(熨斗鰒)가 만들어진다. 노시아와비는 비벼 씻어 미끈거림을 제거한 전복을 껍질을 벗기고 막대에 걸어 말린 후, 흰 천으로 덮은 위에서 미지근한 물을 뿌려 늘리면서 만드는 건어물이다.

중형 전복으로는 3미터 정도까지 껍질 벗기기가 가능하며, 물을 뿌리면서 4시간에서 5시간에 걸쳐 늘리기를 마치면 3배 가까이 늘어난다. 이렇게 늘린 전복은 다시 대나무 통을 사용하여 떡이나 우동처럼 늘여, 미토리아와비(見取鰒)와 타마누키아와비(玉貫鰒)용으로 정해진 치수로 잘라낸다.

큰 미토리아와비는 한쪽에 10장, 합해서 20장의 노시아와비가 짚끈으로 묶이고, 작은 미토리아와비는 한쪽에 3장과 2장씩, 합해서 5장이 한 조로 묶인다. 타마누키아와비는 엮은 짚끈에 한쪽에 12장, 양쪽으로 24장이 밧줄 사다리처럼 배치되어 말린다.

구니사키에서는 2010년에 생물, 노시아와비를 합해서 약 660kg이 봉납되었으며, 그 외에 미역, 톳, 아라메, 소라 등도 봉납된다.

6. 나오라이(直会)

직회도 참조

신센으로 신에게 바친 공물과 동일한 것, 또는 철거한 신센 그 자체를 향연으로 음식을 먹는 의식을 나오라이(直会)라고 한다[30]。신과 같은 것을 먹음으로써 신과의 친밀함을 더하고, 가호와 은혜를 얻어 자신의 영혼에 활력을 얻기 위한 신인공식의 의식으로 여겨진다.

표기에 관해서는 유량비(『속일본기』에 따른), 직상(『속일본후기』에 따른), 나호라비, 직식(모두 『황태신궁의식장』에 따른), 직회(『연희식』에 따른), 직례(『하학집』에 따른) 등 다양한 기술이 남아 있지만, 2012년 현재는 "직회"가 일반적이다. 어의에 대해서는 모토오리 노리나가

"나호리아비의 끊어짐, 곧 바로잡는다는 것은, 재계를 풀고 평상으로 돌아가는 뜻이다. (중략) 그래서 여러 신사의 신사에 말하는 직회도, 신사 후에 행하는 것으로, 같은 뜻이다"

라고 말한 이후, 해재, 즉 재계를 풀고 평상으로 복귀한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교토의 가모와케 이카즈치 신사에서 5월 12일 밤에 행하는 미아레 신사에서는, 신직이 제장에 도착하면 먼저 혼합 밥과 신주를 마시는 의식(잡는 어공)이 있으며, 그것을 나오라이(直会)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오라이(直회)는 반드시 신사의 마지막에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오라이(直会)의 옛 훈은 "나무리아히" 즉 신과 사람이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며, 천황이 매년 11월 23일에 행하는 신상제에서, 신찬을 친공한 후 어고문를 연주하고, 그 자리에서 신찬과 같은 어찬을 신과 함께 드는 의식이 있는 것처럼, 나오라이(直회)는 제례의 중추로 행해지는 신사로 여겨진다[30]。이 경우에는 신과 같은 것을 먹고, 내일부터의 생명의 양식을 얻는 공동 향연에 나오라이(直회)의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혹은, 국문학자인 오리쿠치 시노부처럼 "나오루"는 윤리나 도덕을 관장하는 나오비 신과 통하며, 제례 중에 범한 죄를 고치는 의미로 행해진다고 설하는 자도 있다.

7. 현대 사회와 신찬

신센을 바치는 것과 관련된 많은 세부 사항들은 신뢰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18] 결과적으로 남겨진 기록은 대부분 개인적인 메모였고, 공식적인 기록은 거의 없었다.[19] 신사들은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신센 준비의 특정 측면을 전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20] 1871년, 태정관은 신토 사제의 세습제를 폐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가토리 신사는 의식의 세부 사항을 다양한 문서에 기록했다.[21]

''우지코''가 신센을 준비하는 지역에서는, 그 방법이 ''미야자''라는 집단에 의해 전해졌다. ''미야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가문은 ''토야'' 또는 주 가문으로 알려졌고, 그 가문의 중심 인물은 ''토닌''이라고 불렸다. ''토닌''은 극심한 단식을 거쳐야 했다. 미호 신사와 같은 신사에서는 여전히 이에 관한 엄격한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22] 일반적인 규칙으로, ''미야자''에 속한 사람들은 가문의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역할도 있었다.[23]

현재 시골 신사에서 후계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필요한 떡의 양이 너무 많아 한 명의 신사 사제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이미 찐 떡과 찧은 떡을 상점에서 구매하고 떡의 모양을 만드는 일만 하기도 한다.[24]

원래 기타노텐만구 신사의 주임 사제는 의식 전에 7일 동안 자신의 방에 머물렀고,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의식에 참석하기 전에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에는, 사제가 맡은 다른 의무를 고려하여, 의식을 고기 섭취를 3일 동안 금지하는 것으로 완화했다.[25]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추종자들의 후손들이 스스로 신센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이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로 보내진 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소지품을 가지고 교토로 돌아와 기타노텐만구 신사가 세워졌을 때, 그들이 신센을 준비하고 바치면서 망자의 영혼을 정화하면서 삶을 이어갔다는 전설 때문이다.[26]

담산 신사와 같이 사찰과의 관계가 깊고, 신불습합의 영향이 큰 신사에서는 신찬에도 그 영향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담산 신사의 「백미의 어식」은 불설무량수경이나 대아미타경에 나오는, 대법회 때 부처님 앞에 바쳐진 다양한 공물을 의미한다. 우란분의 풍습이 신불분리 이후에도 계승되어 현대에 남았다고 한다.

가모와케 이카즈치 신사의 섭사인 나라 신사에서는 가모제의 처음과 마지막에 악귀나 사귀에게 강반을 바치는 의식이 있으며, 이 강반을 「산반(さば)」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불교의 영향이 큰 신찬은 「사람이 먹는 것을 신에게도 먹게 해 드린다」는 생각과는 달리, 불단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참조

[1] 문서 春日大社 秘儀開封
[2] 문서 神饌
[3] 문서 春日大社 秘儀開封
[4] 문서 雑穀の社会史
[5] 문서 神饌
[6] 문서 神饌 神と人との饗宴
[7] 문서 図解雑学 神道
[8] 문서 日本の食とこころ
[9] 웹사이트 西野神社社務日誌 http://d.hatena.ne.j[...] 2012-12-16
[10] 문서 神饌
[11] 문서 神饌
[12] 문서 神饌
[13] 문서 神饌
[14] 문서 神饌
[15] 문서 神饌 神と人との饗宴
[16] 웹사이트 國學院大學神道・神社史料集成 http://21coe.kokugak[...] 2012-12-30
[17] 문서 神饌
[18] 문서 神饌
[19] 문서 神饌
[20] 문서 神饌
[21] 문서 神饌
[22] 문서 神饌
[23] 문서 神饌
[24] 문서 神饌
[25] 문서 神饌
[26] 문서 神饌
[27] 웹사이트 神饌(しんせん) https://nisinojinnjy[...] 西野神社 2012-12-16
[28] 웹사이트 兎のお話 http://www.jinjahonc[...] 2012-12-16
[29] 웹사이트 國學院大學神道・神社史料集成 http://21coe.kokugak[...] 國學院大學 2012-12-30
[30] 웹사이트 直会 https://www.jinjahon[...] 2024-09-14
[31] 웹사이트 神宮の御料と御料地 https://www.isejingu[...] 202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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