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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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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잡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임진왜란 시기 파천 논의에서 천도를 주장하고,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제수에 반대하는 등 주요 사건에 관여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배움이 부족하고 무능하며 뇌물을 받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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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잡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잡 초상화
신잡 초상화 (17세기)
출생일1541년
사망일1609년
직업문신
정치인

2. 생애

신잡은 1583년 (선조 1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2] 그는 선조 때 중신으로, 임진왜란 등 여러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위 섹션에서 이미 다루고 있으므로, 추가적인 정보는 작성하지 않는다.

2. 1. 초기 관직 생활

1583년 (선조 1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2] 1589년 12월 정암수를 비롯한 유생들이 이산해, 정언신, 정인홍, 유성룡 등을 지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 중 정암수 외 10여 명을 압송해 국문하는 사건에 대해 유생들을 두둔하다가 정적들로부터 탄핵을 당하였다.

당시 사헌부에는 대사헌 최황, 집의 성영, 장령 심희수·윤섬, 지평 신잡·우준민이, 사간원에는 대사간 이증, 사간 오억령, 헌납 백유함·유대진, 정언 강찬과 이흡 등이 있었다.

1591년 2월 이순신이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로 제수되자, 사간원정언(正言)으로서 가리포 첨사로 제수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제수함은 옳지 않다고 간언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대패하자 파천 논의가 이루어질 때 신잡은 거세게 항의했다. 이후 송도(개성)로 파천한 후, 천도를 가장 먼저 주장한 이산해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산해를 영의정직에서 파직시키고(5월 1일), 이어 영의정이 된 유성룡도 과거 김성일의 말에 동의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6월 1일).

신잡은 이후 우승지로 승진한 후 송도에서 선조의 교서를 가지고 서울로 향하던 도중, 서울이 이미 왜군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송도로 돌아와 서경(평양)으로의 천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양사로부터 탄핵 주청을 받게 되지만, 서울에서 파천하기 전 광해군의 책봉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선조의 신임을 얻고 있던 신잡은 그 관직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계속 승진했다.

159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있었으나 문신인 신잡은 그 직위를 잘 수행하지 못하자 중앙으로 복귀하여 감찰 업무 등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1596년 평안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도 평안도 병마절도사 때의 예를 들어 잘못된 인선이라며 주청을 받아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중앙직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선조 때 중신으로 각종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2. 임진왜란 시기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대패하자 파천 논의가 이루어질 때 신잡은 거세게 항의했다. 이후 송도(개성)로 파천한 후 천도를 가장 먼저 주장한 이산해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산해를 영의정직에서 파직시키고(5월 1일), 이어 영의정이 된 유성룡도 과거 김성일의 말에 동의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6월 1일).[2]

선조의 교서를 가지고 서울로 향하던 신잡은 서울이 이미 왜군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송도로 돌아와 서경(평양)으로의 천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때문에 양사로부터 탄핵 주청을 받았지만, 서울에서 파천하기 전 광해군의 책봉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선조의 신임을 얻고 있던 신잡은 우승지로 승진하는 등 관직을 유지했다.[2]

159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문신이었던 신잡은 그 직위를 잘 수행하지 못해 중앙으로 복귀하여 감찰 업무 등을 주로 담당했다.[2]

1596년 평안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도 평안도 병마절도사 때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인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중앙직으로 복귀했다.[2]

2. 3. 임진왜란 이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대패하자 파천 논의가 이루어질 때 신잡은 거세게 항의했다. 이후 송도(개성)로 파천한 후 천도를 가장 먼저 주장한 이산해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이산해를 영의정직에서 물러나게 하고(5월 1일), 이어 영의정이 된 유성룡도 과거 김성일의 말에 동의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한다(6월 1일).[2]

신잡은 이후 우승지로 승진한 후 송도에서 선조의 교서를 가지고 서울로 향하던 도중 서울이 이미 왜군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송도로 돌아와 서경(평양)으로의 천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지만, 서울에서 파천하기 전 광해군의 책봉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선조의 신임을 얻고 있던 신잡은 그 관직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계속 승진했다.[2]

159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있었으나 문신인 신잡은 그 직위를 잘 수행하지 못하자 중앙으로 복귀하고 감찰 업무 등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1596년 평안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도 평안도 병마절도사 때의 예를 들어 잘못된 인사라고 비판받아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중앙직으로 복귀했다.[2]

그는 선조 때 중신으로 각종 사건에서 중요 역할을 하던 인물이다.[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신상1480년 ~ 1530년
할머니전주 이씨계양군의 손녀, 부림군 이식(李湜)의 3녀
아버지신화국(申華國)1517년 ~ 1578년
어머니파평 윤씨윤회정(尹懷貞)의 딸
누나평산부부인 신지향(平山府夫人 申芝香)1538년 ~ 1622년, 인헌왕후의 모친
남동생신급(申礏)1543년 ~ 1592년
남동생신립1546년 ~ 1592년
조카신경진1575년 ~ 1643년
남동생신할(申硈)1548년 ~ 1592년
여동생신단향(申檀香)1550년 ~ ?
여동생신계숙(申季淑)1553년 ~ ?
부인남원 양씨양사근(梁思謹)의 딸
장남신경희(申景禧)1561년 ~ 1615년
장녀신경매(申敬妹)1564년 ~ ?
차남신경지(申景祉)1566년 ~ ?
차녀신경란(申敬蘭)1576년 ~ ?
3녀신말란(申末蘭)1578년 ~ ?

[3]

4. 사초에 나타난 신잡

신잡은 선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신잡은 배운 바가 모자라고 문반이지만 무반처럼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받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추잡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지위가 정경에 이르렀는데, 뇌물이 문전에 가득차서 벼슬을 판다는 비방이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1]

신잡은 이산해와 작당한 자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전 초기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을 탄핵하고 비방하던 것을 멈추고 이산해의 동인 세력에 기대고 선조의 수족같이 움직여 후세 사람들에게 아주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추악하고 무능하며 남을 헐뜯기를 일삼는다고 하여 ‘총사’(叢祠)라고 지목하였다.[2]

5. 주요 경력

연도직책
1583년정시문과 병과 급제
1586년정언 (정6품)
1592년우승지 (정3품)
1592년이조참의 (정3품)
1592년형조참판 (종2품)
1593년병조참판 (종2품)
1593년평안도 병마절도사 (종2품)
1595년형조판서 (정2품)
1596년특진관 (정2품)
1596년평안감사 (종2품)
1596년동지중추부사
1596년좌참찬 (정2품)
1596년우참찬 (정2품)
1597년행 대호군
1597년검찰사
1601년함경감사
1602년병조판서
1602년빙고제조
1603년지중추부사 (정2품)
1604년지의금부사
1604년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2등, 평천군
1609년사망[2]


6. 평가

신잡은 선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그는 배운 것이 부족하고 문반이지만 무반처럼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잡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지위가 정경에 이르렀는데, 뇌물이 문전에 가득 차 벼슬을 판다는 비방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임진왜란 이전, 신잡은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을 탄핵하고 비방했으나, 이후 이산해 세력에 기대고 선조의 수족처럼 움직여 후세 사람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총사'(叢祠)라고 부르며 추악하고 무능하며 남을 헐뜯는다고 비판했다.[1]

6. 1. 부정적 평가

신잡은 선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신잡은 배운 것이 부족하고 문반이지만 무반처럼 무식하다고 평가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추잡하고 욕심이 많았으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지위가 정경에 이르렀는데, 뇌물이 문전에 가득 차 벼슬을 판다는 비방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1]

신잡은 이산해와 작당한 자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전 초기 이산해 등 동인 세력을 탄핵하고 비방하던 것을 멈추고 이산해의 동인 세력에 기대고 선조의 수족같이 움직여 후세 사람들에게 아주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추악하고 무능하며 남을 헐뜯기를 일삼는다고 하여 '총사'(叢祠)라고 불렀다.[1]

참조

[1] 서적 연려실기술
[2]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3] 웹사이트 선원록 http://royal.aks.ac.[...]
[3] 웹사이트 http://royal.ak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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