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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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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희수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1570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광해군 즉위 후 정승으로 임명되었으나, 임해군 처단에 반대하고 폐모론을 비판하다가 낙향했다. 그는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여러 차례 요직을 역임하며 당쟁 속에서도 활동했다. 심형래의 12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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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심희수
심희수 영정
이름심희수
한자 표기沈喜壽
출생일1548년
출생지조선
사망일1622년
사망지조선
국적조선
종교유교 (성리학)
학력
학력 사항1570년 (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감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당(湖堂, 사가독서)
경력
주요 경력이조판서
대제학
좌의정
소속 정당남인
작위해당사항 없음
가족
아버지영의정 심건(沈鍵)
어머니정경부인 광주 이씨(廣州 李氏) - 교리 이연경(李延慶)의 딸
배우자정경부인 광주 노씨(光州 盧氏) - 첨정 노극신(盧克愼)의 딸
자녀양자 : 심창(沈昶) - 동생 심창수(沈昌壽)의 아들
수상
훈장청백리(淸白吏)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
기타
웹사이트해당사항 없음

2. 생애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에 이황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2] 15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사가독서)을 거쳐, 홍문관수찬, 사간, 장령, 응교, 부응교를 지냈다.[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상관에 올라 병조참지가 되었다.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영접하였고, 우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참찬관을 겸하며 도승지를 계속 하다가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어 명나라 총독 고양겸(顧養謙)의 접반사가 되었다.[3] 공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리 양호의 접반사가 되었다.[4] 예문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이 되고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좌찬성이 되었다.[5]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가 되어 다시 명나라 경리 양호의 접반사가 되었다.[6] 또한, 새로 임명된 명나라 경리 만세덕의 접반사가 되었다.[7] 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다시 좌찬성에 이르렀고, 이후 지돈녕부사, 대제학을 하다가 우찬성, 이조판서, 대제학, 좌찬성을 거쳐 이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동지경연사를 겸하다 판의금부사와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당시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추숭하려 하자 강력하게 반대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등과 함께 정승으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주로 우의정으로서, 임해군을 처단하는 데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계축옥사영창대군을 처리하는 데 반대 의견을 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임해군의 역모를 무고하고 옥사를 국문하였던 여러 신하들을 녹훈할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강제 책록되었다.[8] 영돈녕부사가 되어 허균과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지만, 이후 폐모론이 일어나자 반대를 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낙향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가 되었다.[9][10][1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에 이황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2] 15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2]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 장령, 응교, 부응교를 역임했다.

2. 2. 관료 생활과 임진왜란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에 이황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사가독서)을 거쳐, 홍문관수찬, 사간, 장령, 응교, 부응교를 지냈다.[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상관에 올라 병조참지가 되었다.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영접하였고, 우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참찬관을 겸하며 도승지를 계속 하다가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어 명나라 총독 고양겸(顧養謙)의 접반사가 되었다.[3] 공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리 양호의 접반사가 되었다.[4] 예문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이 되고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좌찬성이 되었다.[5]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가 되어 다시 명나라 경리 양호의 접반사가 되었다.[6] 또한, 새로 임명된 명나라 경리 만세덕의 접반사가 되었다.[7] 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다시 좌찬성에 이르렀고, 이후 지돈녕부사, 대제학을 하다가 우찬성, 이조판서, 대제학, 좌찬성을 거쳐 이조판서와 공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동지경연사를 겸하다 판의금부사와 판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당시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추숭하려 하자 강력하게 반대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등과 함께 정승으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주로 우의정으로서, 임해군을 처단하는 데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계축옥사영창대군을 처리하는 데 반대 의견을 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임해군의 역모를 무고하고 옥사를 국문하였던 여러 신하들을 녹훈할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강제 책록되었다.[8] 영돈녕부사가 되어 허균과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지만, 이후 폐모론이 일어나자 반대를 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낙향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가 되었다.[9][10][11]

2. 3. 정유재란과 외교 활동

심희수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리 양호(楊鎬)의 접반사가 되었다.[6] 또한, 새로 임명된 명나라 경리 만세덕(萬世德)의 접반사가 되었다.[7] 공조판서가 되었을 때에도 명나라 경리 양호(楊鎬)의 접반사가 되었다.[4]

2. 4. 광해군 시대와 말년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8]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등과 함께 정승으로 다시 임명되었는데, 주로 우의정으로서 임해군을 처단하는 데 부당함을 주장하였다.[8] 계축옥사영창대군을 처리하는 데 반대 의견을 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임해군의 역모를 무고하고 옥사를 국문하였던 여러 신하들을 녹훈할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강제 책록되었다.[8] 영돈녕부사가 되어 허균과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오지만, 이후 폐모론이 일어나자 반대를 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다시 낙향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가 되었다.[9][10][11]

3. 가계

심희수는 사헌부 장령 · 증 영의정 심순문(沈順門)의 증손이고, 동지돈녕부사 · 증 좌찬성 심봉원(沈봉원)의 손자이며, 승문원 권지정자 · 증 영의정 심건(沈鍵)의 아들이다. 심연원, 심달원, 심통원의 종손자이고, 명종 국구 심강, 심전, 심뇌의 당질이며, 명종왕비 인순왕후, 심의겸, 심충겸, 심우승과는 6촌지간이다. 유명 코미디언 · 개그맨 · 방송인 · 가수 · 연극배우 · 영화배우 · 영화감독 · 영화제작자 · 기업인 심형래의 12대조이다.

가계도


4. 평가

5. 기타

참조

[1] 문서 청구야담
[2] 역사기록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 12월 19일 을사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92-12-19
[3] 역사기록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4월 23일 신미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94-04-23
[4] 역사기록 선조실록 69권, 선조 28년 11월 20일 무자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95-11-20
[5] 역사기록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6일 계해 10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97-10-06
[6] 역사기록 선조실록 103권, 선조 31년 8월 12일 을축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98-08-12
[7] 역사기록 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17일 계사 8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599-08-17
[8] 역사기록 광해군일기<중초본> 64권, 광해 5년 3월 12일 경오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1613-03-12
[9] 역사서 선조실록
[10] 역사서 광해군일기
[11]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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