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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탄금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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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주 탄금대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일본군에 맞서 충주 탄금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조선은 한성부 방어를 위해 신립을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약 8,000명의 병력을 충주에 집결시켰다. 신립은 조령 방어를 포기하고 달천 평야에서 기병을 활용한 전술을 펼치려 했으나, 일본군의 매복과 조총 공격에 조선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신립은 자결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을 확보했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다. 신립의 전략적 실책과 조선군의 전술적 한계가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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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탄금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날짜1592년 6월 7일 (그레고리력); 1592년 4월 28일 (음력)
장소탄금대, 충주 근처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도요토미 정권
교전국 2조선
지휘관
도요토미 정권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조선신립
변기
김여물
이일
이종장
병력 규모
도요토미 정권18,700명
조선8,000–16,000명
피해 규모
도요토미 정권약 150명 사상
조선전멸
대부분 익사
8,000명 전사
이일 도주
수백 명 포로

2. 배경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산진성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선 조정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이전의 왜구들과는 달리 본격적인 전면전에 직면한 조정은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급파했으나, 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4] 이에 선조는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던 신립에게 왜군 방어 임무를 맡기고, 상방검을 하사하여 그에게 왕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경력을 가진 신립은 한성부(현재의 서울) 방어를 위해 긴급히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오랜 평화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징집된 병사들은 훈련이 부족했다. 신립은 내금위 친위대를 지원받고 왕으로부터 직접 칼을 하사받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25]

신립은 약 8,000명의 병력을 충주에 집결시켰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동래, 대구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쳐 온 병사들이었다. 신립은 당초 조령을 요새화하여 일본군을 막으려 했으나, 상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일이 조령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피해 퇴각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결국 신립은 충주 인근의 평원에서 한강을 등지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배수진을 선택했다. 이는 평원이 기병을 활용하기에 유리했지만, 한강으로 인해 퇴각이 불가능한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약 20,000명의 일본군 제2군은 상주 북쪽 문경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와 합류했다. 가토는 고니시가 자신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어기고 앞서 진격한 것에 분노하여, 자신이 선두를 맡아 한성을 점령하겠다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두 군대는 함께 조령을 넘어 충주로 접근했고, 가토는 고니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갑자기 야영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 조정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신립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를 삼도 도순찰사로 임명했다. 신립은 한성에서 80명의 군관(사관)을 이끌고 충주로 향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신립 대신 유성룡이 모병한 8,000명을 부사(부관) 김여물[25]에게 이끌게 하여 선발대로 보냈다고 한다.[4] 신립은 후발대로 활을 쏠 수 있는 자 수천 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충주로 가는 도중에 읍병을 모아 8,000명을 추가로 확보했다.

4월 26일, 신립은 군을 이끌고 탄산역으로 진군했다. 여러 장수들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조령(새재)에서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립은 이를 무시하고 조령에서 이일상주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에 낙담하여 충주로 퇴각했다. 김여물과 충주목사 이종장이 조령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이 지형은 기병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넓은 들에서 맞이하여 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후퇴를 명령하고 조령을 지키던 조방장 변기와 이일을 소환하여 요새를 포기하게 했다.

같은 날, 함창과 문경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 현감 신길원을 참수하고, 고모산성과 조령의 다른 산성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한 후, 27일 새벽 조령을 넘어 탄산역에 도착했다.

신립은 이일과 면담했지만, 이일은 "이 적은 북로의 제압하기 쉬움과는 비교할 수 없다. 지금, 천험에 의지하지 않고 넓은 들에서 싸우려 하지만 승산이 없다. 오히려 퇴각하여 한성을 지켜야 한다"고 경고했지만,[26] 신립은 격노하며 이일을 전투 대열에 합류시켰다. 이일은 패잔병, 농민, 피난민들로부터 지원자를 모아 6,000명의 병사를 이끌었다.

3. 전투 준비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산진성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자, 조선 조정은 신립에게 왜군 방어 임무를 부여하고 상방검을 하사하여 큰 권한을 주었다.

신립은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하여 단월역에 주둔하면서 약 8,0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 병력에는 정예 기병과 함께 상주 등 이전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쳐 온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초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방어하려 했으나, 이일의 패전 소식과 일본군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종사관 김여물은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궁병으로 방어할 것을 주장했고, 이종장도 이에 찬성했지만, 신립은 기병의 활용을 위해 충주 인근의 탄금대 평야를 전장으로 선택했다. 이일은 한강 방어선 구축을 주장했으나, 신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신립의 결정은 조선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한강을 등진 탄금대는 배수진의 형태가 되어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41][42][43][44]

3. 1. 전력

구분조선군일본군
총 병력최대 1만 6천 명[32]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지휘, 제2군: 가토 기요마사 지휘, 약 2만 명
주력 부대내금위 친위대 포함 약 8,000명 (대부분 동래, 대구 등지에서 패주한 병사)[33], 기병 중심, 궁술 능숙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백병전에 능한 사무라이
지휘관신립 (조령 방어 포기, 탄금대 배수진)고니시 유키나가 (선봉장, 풍부한 전투 경험), 가토 기요마사 (제2군 지휘, 고니시 유키나가와 경쟁 관계)
특이사항조총 대비 부족[33]철저한 정찰로 조선군 상황 파악


3. 1. 1. 조선군

징비록에는 조선군의 규모가 8천 명의 정예병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이보다 더 많은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조선군이 8만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과장된 수치로 여겨진다. 난중잡록에는 6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야사(野史)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선조실록에 나타난 도성 근방에서 모집한 8천 명과, 징비록,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충청도에서 합류한 8천 명을 합쳐 최대 1만 6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32]

부산동래가 함락되자, 조선 조정은 이일과 신립에게 한성부(현재의 서울)로 향하는 길목 방어를 맡겼다. 신립은 내금위 친위대를 포함한 약 8,000명의 병력을 충주에 집결시켰는데, 이들 중 다수는 동래, 대구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쳐 온 병사들이었다. 신립은 원래 조령을 요새화하려 했으나, 상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일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일본군이 이미 조령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계획을 변경했다. 결국 신립은 충주 인근 평원에서 한강을 등지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평원은 기병에게 유리했지만, 한강 때문에 퇴각이 불가능했다.[33]

조선군의 주력은 기병이었고, 궁술에 능한 병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신립의 전략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장군과 군인, 역사학자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았다. 특히 조령을 포기한 것에 대해, 훗날 참전하여 이 지형을 본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신총병(申總兵)은 '''무모한 자'''로다"라고 혹평했다고 알려져 있다.

3. 1. 2.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은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선봉 부대였다. 일본군의 주력은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었으며, 백병전에 능한 사무라이들도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지휘관이었으며, 조선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26] 일본군은 조령을 넘기 전 철저한 정찰을 통해 조선군의 방어 상황을 파악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약 20,000명의 일본군 제2군은 상주 바로 북쪽에 있는 문경에서 고니시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이곳은 한성으로 가는 동쪽과 중앙 경로가 합쳐지는 지점이었다. 가토는 그의 경쟁자인 고니시가 부산에서 자신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어기고 훨씬 앞서 진격한 것에 분노했다. 가토는 그의 군대가 이제 선두를 맡아 한성을 점령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고니시는 거절했다. 두 군대는 함께 조령을 넘어 충주로 접근했고, 가토는 갑자기 야영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고니시가 신립의 기병대와 전투를 벌이도록 유도하여 그를 어리석고 무능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험난한 길로, 고개를 넘기 전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스스로 마을에 불을 지른 문경 현감 신길원을 붙잡아 길 안내를 시키려 설득했으나, 거절당하자 참수했다. 유키나가는 상당히 조심하여 요새 고모산성에 접근하여 정찰을 반복했으나 복병 등에는 마주치지 않았고, 조령의 다른 산성들도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4월 27일 오전 4시, 제1대는 문경을 출발하여 산길을 4시간 걸려 조령을 통과하여 안보역에 도착했다. 정오에는 탄산역에 이르렀다.

4. 전투 진행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는 1592년 4월 28일(음력) 정오 무렵 충주에 도착했다.[45] 일본 측 기록인 '서정일기'에 따르면, 일본군은 조선 측 기록과는 달리 이미 27일에 단월역에 도착하여 매복하고 있었다.[45] 신립은 일본군이 27일 밤에 도착했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도 정찰병을 참수하는 등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46][47][48]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고니시가 일본 날짜로 음력 4월 25일에 문경에 도착한 후 곧바로 선봉군을 충주로 보냈고, 일본 날짜로 음력 4월 26일(한국 날짜로 음력 4월 27일)에 선봉군이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9] 먼저 출발한 선봉군의 대장은 고니시 사쿠에몬(유키시게)이었고, 이들은 충주 근처 단월역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충돌할 뻔했으나 무마되었다.[50]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 22,800명은 단월강 남쪽 풍동에 진을 쳤고, 가토 기요마사나베시마 나오시게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단월강을 건너 단월역으로 진입하다가 고니시 사쿠에몬에게 저지당하고 후방군으로 뒤따랐다.[50]

고니시 사쿠에몬의 선발대와 가토 기요마사의 2,000명은 단월역에 매복했고, 이때 정탐하던 충주 목사 이종장과 이일이 빠져나가지 못해 신립에게 보고가 전달되지 않았다.[51]

회본태합기의 일본군이 27일 밤에 당도했다는 급보를 듣고 신립이 급히 마을로 가는 장면 삽화


신립은 기병을 활용하여 보병인 일본군을 충주의 넓은 평야(달천 평야)로 끌어들여 승리하려 했다. 전투는 언덕, 산간, 성이 아닌 대규모 기병과 보병의 야전으로 이루어졌다.[53] 전투 장소는 단월역 앞의 달천 평야였으며, 논밭이 많았다.[54][55][56]

1592년 4월 28일(음력) 정오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의 중앙군이 단월역 앞 마을(충주 건국대 캠퍼스)로 진입했다.[58][59]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군에게 연설을 하며 승리를 확신시켰고, 일본군은 3개의 군대로 나뉘어 운용되었다.[62]

신립의 16,000 군사는 일본군의 좌군, 우군, 배후 공격 부대, 충주성 점령 기동부대의 존재를 모르고 중앙군만 보고 승리를 확신하여 학익진을 펼쳐 중앙군을 포위하려 했다.[71] 그러나 달천 평야의 논밭은 물이 차 있어 기병의 기동력을 제한했고, 진격 속도도 더뎠다.[72][73][74]

조선군 8,000명과 일본 중앙군이 마주치자 일본군의 깃발이 갑자기 많아져 혼란을 일으켰고, 일본군의 좌군과 우군이 조총과 장궁으로 공격했다.[75][76][77][78][79][80] 중앙군 역시 조총과 장궁으로 공격하여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고 2~3차례 돌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81][82][83]

그 사이 충주성이 일본군 기동 부대에 점령당했고,[84] 신립은 충주성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본 정예군에게 크게 패했다.[85] 일본군은 조선군 8,000명의 배후를 치며 완벽히 포위하고 진격했다.[86][87][88][89]

조선군은 일본군이 60만 명이나 된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도망쳤고,[88] 일본군은 조총 사격과 함께 2m의 일본도를 든 노다치 사무라이들이 공격하여 조선군을 4면으로 포위했다. 결국 조선군은 달천강으로 몰려 대부분 익사했고, 생존자는 이일을 포함해 겨우 4명에 불과했다.[74][90][91][92][93][94][95][96][97][98][99]

전투 후 일본군은 조선군 시체 3,000구의 목을 베고 수백 명의 포로를 잡았다.[100] 가토 기요마사는 전투를 구경만 했다.[101]

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 선조수정실록 등에는 신립과 김여물이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립이 물에 뛰어든 지점은 탄금대의 열두대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는 월탄에서 뛰었다고 되어 있다.

신립과 김여물이 일본군에게 붙잡혀 참수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 루이스가 신립의 목을 벴다고 나오며,[102] '회본태합기'에는 김여물이 참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3] 충청도 예천군의 민간 전승에도 신립이 참수되었다고 전하며,[104] 일본 측 기록 '중정일본외사'에도 신립이 참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5]

회본태합기의 김여물 삽화

5. 전투 결과 및 영향

탄금대 전투는 조선군의 대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일본군은 한양으로 가는 길을 빠르게 확보했다. 신립의 전략적 실책과 조선군의 전술적 한계가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106]

조정에서는 패전 소식을 올린 이일은 평복 차림으로 북상해 왕의 행렬과 만났다. 충주 백성들은 신립의 6만 대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전투 후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난중잡록》에 남아있다.[106]

>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충주로 일본군을 유인한 경응순을 우연히 만나 목을 베었고, 경응순을 따라오던 이덕형은 이를 보고 놀라 달아났다.[106]

전투 후, 가토 기요마사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군대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에 합류했다. 가토는 고니시의 성공에 분노하여 한성 공격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다. 고니시는 한강을 건너는 두 가지 길을 제안했고, 가토는 지름길을 택했다. 두 장군은 경쟁적으로 진격했다.

6월 7일, 충주 전투 패전 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지자, 한성은 큰 혼란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랐고, 이산해는 국왕의 피난을 주장했다.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수도 방어를 명했으나, 일본군이 수도를 점령하자 평양으로 피난했다. 이후 의주까지 이동했다. 국왕이 떠난 후, 백성들은 궁궐을 약탈하고 공공 건물을 불태웠다.[2][3]

6월 8일, 가토 군대는 한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어 뗏목을 만들어 6월 11일 한강을 건넜다. 김명원은 소수의 병력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가토 군대는 저항 없이 한강을 건넜다. 6월 12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동대문을 통해 한성에 먼저 입성했고, 가토는 남대문으로 들어왔다. 6월 16일, 구로다 나가마사 군대가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1만 명의 군대와 함께 도착했다.[31]

탄금대 패전 소식은 선조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한성 백성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는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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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1598 http://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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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서적 징비록
[100] 일기 일본 서정일기 1592-04-27
[101] 서적 일본사
[102] 서적 일본사
[103] 서적 회본태합기
[104] 구비문학 한국구비문학대계
[105] 역사서 重訂日本外史
[106] 서적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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