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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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상만은 조선 시대 명문가 출신으로, 187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고종 시기에 한림, 동부승지, 이조참의, 대사성 등을 역임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성천부사로 파직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태복사장, 경모궁 제조, 경효전 제조, 영희전 제조 등을 거쳐 칙임관 3등까지 올랐다. 1916년 사망했다.
심상만은 심성택의 아들로 태어나 심희순에게 양자로 갔다. 심상만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1]
2. 가계
관계 성명 비고 본인 심상만 심연원 - 심광세 - 심총 - 심약하 - 심장 - 심우현의 후손인 심성택(沈星澤)의 아들, 이조참의 · 대사성 · 비서승 · 경효전 제조 · 영희전 제조 · 종묘서 제조 · 봉상사 제조 · 장례원 소경 · 홍릉 제조 · 기로소 비서장 부인 전주 이씨 완림군 이재원의 딸
2. 1. 친가
2. 2. 양가
구분 | 관계 | 성명 | 비고 |
---|---|---|---|
친가 | 14대조 | 심연원 | 영의정 · 청천부원군 |
13대조 | 심강 | 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 청릉부원군 · 증 영의정 | |
12대조 | 심의겸 | 서인의 초대 영수, 병조판서 | |
11대조 | 심엄 | 옥과현감 · 증 영의정 · 청송부원군 | |
10대조 | 심광세 | 홍문관 응교 · 증 이조참판 | |
9대조 | 심총 | 경기도 광주부윤 | |
8대조 | 심약하 | 돈녕부 판관, 선조 왕자 경창군의 사위 | |
7대조 | 심장 | ||
6대조 | 심우현 | ||
5대조 | 심박 | ||
고조부 | 심휘지 | ||
증조부 | 심능호 | ||
조부 | 심의동 | 돈녕부 도정 | |
아버지 | 심성택 | ||
심상만은 심연원 - 심광세 - 심총 - 심약하 - 심장 - 심우현의 후손인 심성택(沈星澤)의 아들로 태어나, 심희순에게 양자로 갔다.[1] | |||
양가 | 14대조 | 심달원 | 기묘명현 · 승문원 판교 · 증 이조판서 |
13대조 | 심자 | 선공감 첨정 · 증 좌찬성 | |
12대조 | 심우정 | 여주목사 · 증 이조판서 | |
11대조 | 심집 | 정사공신 좌의정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심기원의 당숙, 형조판서 · 예조판서 | |
10대조 | 심동귀 | 홍문관 응교 · 증 대사헌 | |
9대조 | 심유 | 홍문관 부제학 · 대사성 | |
8대조 | 심한주 | 고양군수 · 증 이조참의 | |
7대조 | 심봉휘 | 능주목사 · 증 이조참판 | |
6대조 | 심성희 | 이조참판 · 증 이조판서 | |
5대조 | 심공헌 | 증 좌찬성 | |
고조부 | 심염조 | 규장각 직제학 · 황해도 관찰사 · 증 영의정 | |
증조부 | 심상규 | 초계문신 · 규장각 제학 · 육조판서 · 문형(홍문관·예문관 대제학) · 영의정 · 원상 | |
조부 | 심정우 | 증 비서승(비서원 승지) | |
아버지 | 심희순 | 양자, 심연원 - 심광세 - 심은 - 심약명 - 심속 - 심득현의 후손인 심의필(沈宜弼)의 아들, 이조참의 · 대사성 · 증 홍문관 제학 | |
양가 | 장인 | 완림군 이재원 | 내무독판 · 종정경 · 판돈녕부사, 청송 심씨 심우영(沈愚永, 효종의 부마 청평도위 심익현의 고손, 영의정 심지원의 5대손)의 사위 |
양가 | 부인 | 전주 이씨 | 완림군 이재원의 딸 |
심상만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의 관료이다. 1872년(고종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1873년 한림(翰林)이 되었고, 1879년에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1] 1884년 이조참의, 1890년 대사성을 역임했다.
3. 생애
1894년 평안도 성천부사로 부임했으나, 동학농민운동 발생 시 관청을 비운 죄로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1897년 비서승 겸 장례에 제수되었고, 이후 궁내부 특진관에 올라 칙임관 4등이 되었다.[2]
1916년 (순종 9년) 사망하였고, 순종은 그의 상에 특별히 100KRW을 하사하였다.[3]
3. 1. 조선 고종 시기
1872년(고종 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3년 한림(翰林)이 되었다.
1879년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1]
1884년 이조참의, 1890년 대사성을 지냈다.
1894년 관서지방(평안도) 성천부사로 나아갔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관부(官府, 관청)를 비운 죄로 잠시 파직되었다.
1897년 비서승 겸 장례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시종원 시종(侍從院 侍從)을 거쳐,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2]
3. 2. 대한제국 고종 시기
1898년(고종 35년) 심상만은 태복사장(太僕司長) · 경모궁 제조(景慕宮提調)에 제수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
1899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 영희전 제조(永禧殿提調)에 제수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
1901년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에 제수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
1903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제수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
1904년 장례원 소경(掌隷院少卿) · 홍릉 제조(洪陵提調)에 제수되고 칙임관 4등에 올랐다.
1907년 영희전 제조(永禧殿提調) · 기로소 비서장(耆老所祕書長) · 홍릉 제조(洪陵提調)에 제수되고 칙임관 3등에 올랐다.
3. 3. 일제강점기
1916년 (순종 9년) 순종이 전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심상만의 상(喪)에 특별히 100KRW을 하사하였다.[3]
참조
[1]
역사기록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 8월 10일 신해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
역사기록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3월 3일 양력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역사기록
순종실록부록 7권, 순종 9년 10월 9일 양력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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