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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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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기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심달원의 고손자이자 권필의 문하생으로, 인조반정 이후 형조좌랑, 병조참판, 좌의정을 거쳐 청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평정에 기여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활약했지만, 흥안군을 죽인 일로 인조에게 미움을 받았고, 1644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되었다. 심기원의 사후, 그의 라이벌이었던 김자점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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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원 - [인물]에 관한 문서
귀족 정보
이름심기원
沈器遠
작위청원부원군
(靑原府院君)
출생일1587년
출생지조선
사망일1644년
사망지조선에서 사형[사지절단(거열형)] 집행됨
국적조선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풍천 임씨
공직자 정보
이름심기원
沈器遠
출생일1587년
출생지조선
사망일1644년
사망지조선
국적조선
직업공신
도원수
광주유수 겸 수어사
병조판서
좌의정
소속 정당서인
작위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아버지 : 심간
어머니 : 평양 조씨
배우자풍천 임씨
자녀1남 1녀
심석경(아들)
형제심기중(동생)
심기주(동생)
심기성(동생)
친척심우정(종조부)
심현(당숙)
심집(당숙)
심석반(조카)
심석명(조카)
심석보(조카)
심석로(조카)
심석현(조카)
상훈정사공신 1등

2. 생애

심기원은 기묘명현 심달원의 고손자로, 권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흥안군 이제를 독단적으로 처형하여 인조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군사 요직을 맡아 국방에 힘썼다. 1640년 이후 호위대장, 남한산성 수어사,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1642년 우의정, 1643년 좌의정에 오르는 등 인조 치하에서 최고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1644년,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부하들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고 가산이 몰수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 심기원이 역모를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괄의 난 진압 과정에서 인조의 서삼촌 흥안군 이제를 즉결 처형한 일로 인조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는 점, 그리고 당시 정적이던 김자점의 모함 가능성 등이 제기되고 있다.

2. 1. 인조반정 이전

기묘명현 심달원의 고손자로 태어나 권필의 문하생이 되었다.[1] 1623년 유생 신분으로 김유,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였다.

2. 2. 인조반정

1623년 김유,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였다. 반정 직후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 동부승지로 빠르게 승진하였고, 그 해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24년 병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다.[1]

2. 3. 인조반정 이후

1623년 김유,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였다. 반정 직후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 동부승지로 빠르게 승진하여 그 해에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24년 병조참판으로 승진하였고,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다.[1] 같은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 도원수(漢南都元帥)가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이괄이 왕으로 세운 인조의 서삼촌 흥안군 이제를 독단적으로 처형하여 인조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4도 도검찰사(都檢察使)[2], 호위대장[3], 강화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를 지냈고, 1628년(인조 6) 유효립의 난 진압을 도운 공로로 영사원종공신 1등(寧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팔도 도원수)[4]가 되어 한양 도성과 남한산성의 방어를 책임졌다. 그러나 패전의 책임으로 한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1640년 다시 호위대장으로 기용되고[5], 남한산성 수어사[6], 1641년 병조판서[7], 판의금부[8]를 지냈다. 1642년 우의정을 거쳐 1643년 좌의정이 되었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9]

2. 4. 역모 혐의와 처형

1644년 회은군 이덕인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고발을 받아 여러 부하들과 함께 능지처참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1] 그가 모반을 꾀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인조의 서삼촌인 흥안군을 국문도 없이 멋대로 죽여 하옥된 적이 있었다. 이때 이미 인조에게 크게 밉보였으며, 심기원이 능지처참을 당한 데에는 모반보다도 이 사건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 당시 권력 중심부에서 심기원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자점이 역모를 조작했다는 견해도 있다.

심기원이 처형당할 때 두 팔과 두 다리를 토막 내려 하자, 크게 놀라 '이런 형벌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형리가 "김상공(김자점)의 분부대로 거행할 뿐"이라고 답했다. 이에 심기원은 김자점도 훗날 자신과 똑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라 저주하였고, 훗날 김자점 역시 사지가 칼로 절단된 후에 참수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3. 사후

훗날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론청나라에 밀고했다가 발각되어 유형당하고, 이어 아들 김익(金釴)과 반역을 획책하려다가 발각되어 함께 주살될 때 산 채로 사지절단형을 받게 된다.

4. 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심달원(沈達源)기묘명현, 승문원 판교, 증 이조판서
증조부심자(沈鎡)선공감 첨정, 증 좌찬성
조부심우직(沈友直)은산현감
아버지심간(沈諫)청풍군수
어머니평양 조씨
부인풍천 임씨
아들심석경(沈碩慶)
청송 심씨(靑松沈氏)
사위방명소(房明熽)찰방(察訪) 방원진(房元震)의 아들
동생심기중(沈器重)금화현감, 증 좌승지
조카심석반, 심석명, 심석보, 심석로, 심석현
동생심기주(沈器周)수원부사
동생심기성(沈器成)정사공신 2등에 책록됨, 청주목사, 가의대부 파주목사
종조부심우정(沈友正)여주목사 증 이조판서
당숙심현(沈誢)이조판서, 증 영의정, 박장원(朴長遠)의 외조부, 돈녕부 도정으로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부인 여산 송씨와 순절(자결).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당숙심집(沈諿)심현(沈誢)의 동생, 영의정 심상규(沈象奎)의 8대조,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자호란 때 화친의 조건이 되는 볼모로서 왕족인 능봉군(綾峯君)이 왕의 동생으로, 판서인 심집(沈諿)이 대신으로 가장했다가 발각되어 실패.


5. 관련 작품

참조

[1] 실록 인조실록 2년 7월 26일 1번째 기사 1624-07-26
[2] 실록 인조실록 5년 2월 15일 8번째 기사 1627-02-15
[3] 실록 인조실록 5년 10월 1일 5번째 기사 1627-10-01
[4] 실록 인조실록 15년 2월 10일 1번째 기사 1637-02-10
[5] 실록 인조실록 18년 2월 2일 2번째 기사 1640-02-02
[6] 실록 인조실록 18년 4월 8일 1번째 기사 1640-04-08
[7] 실록 인조실록 19년 2월 3일 2번째 기사 1641-02-03
[8] 실록 인조실록 19년 4월 16일 3번째 기사 1641-04-16
[9] 실록 인조실록 21년 11월 20일 1번째 기사 164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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