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베르트 슈나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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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독일 해군 장교로, 1904년 독일에서 태어나 1922년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해군에서 다양한 훈련을 받았으며, 여러 함선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함 비스마르크의 포술부 장교로 근무하며 덴마크 해협 해전에 참여하여 영국 해군 함선과 교전했다. 그는 비스마르크 침몰 당시 전사했으며, 사후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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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베르트 슈나이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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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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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4년 3월 10일 |
출생지 | 할레 (잘레) |
사망일 | 1941년 5월 27일 |
사망지 | 대서양 |
매장지 좌표 | 48° 10′ N, 16° 12′ W |
소속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1933년까지) 나치 독일 |
군 종류 |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 나치 독일 해군 |
복무 기간 | 1922년–1941년 |
최종 계급 | 프레가텐카피텐 (사후) |
주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대서양 전투 라인위붕 작전 덴마크 해협 해전 비스마르크 전함 최후 전투 |
훈장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이후 활동 | 없음 |
경력 | |
이전 보직 | SKS 니오베 "포켓 전함" 도이칠란트 경순양함 뉘른베르크 전함 비스마르크 |
2. 초기 생애 및 해군 경력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1904년 3월 10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작센 주 할레 (잘레)에서 태어났다.[1] 1922년 3월 30일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해안 방어 부대 3부대 3중대(3. Kompanie Küstenwehr-Abteilung (K.W.A) IIIde)에서 첫 보병 훈련을 받았다. 1922년 10월 4일, 슈나이더는 함선 기반 훈련의 첫 번째 단계로 에 탑승했다. ''하노버''에 이어, 그는 1923년 4월 4일 SKS ''니오베''에, 1923년 7월 2일 에 탑승했다. 그는 1923년 4월 1일 일등 수병(Matrosengefreiter]]/Gefreiterde)으로 진급했다. 슈나이더는 1924년 3월 30일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뮈르비크 해군 사관학교에서 장교 후보생(Fähnrichde) 과정을 수료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1924년 4월 1일 소위(Fähnrich zur See/
장교 후보생 훈련 후, 슈나이더는 1925년 4월 1일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어뢰 및 통신 학교(Torpedo- und Nachrichtenschulede)에서 소위들을 위한 어뢰 과정을 수료했으며, 1925년 6월 3일 킬-비크에 있는 실험 지뢰 및 시범 사령부(Sperrversuchs- und Lehrkommandode)에서 소위들을 위한 지뢰 과정(Fähnrichs-Sperr-Lehrgangde)을 수료했다.[28]
2. 1. 초기 생애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1904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해군에 들어갔으며, 독일 제국 패망 이후에도 그는 해군에 남아서 일한 장교들 가운데 하나였다.2. 2. 해군 복무 초기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1922년 3월 30일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1] 그는 해안 방어 부대 3부대 3중대(3. Kompanie Küstenwehr-Abteilung (K.W.A) IIIde)에서 첫 보병 훈련을 받았다. 1922년 10월 4일, 슈나이더는 함선 기반 훈련의 첫 번째 단계로 에 탑승했다. 이후 1923년 4월 4일 SKS ''니오베''를 거쳐, 1923년 7월 2일 에 탑승했다.[1] 1923년 4월 1일, 그는 일등 수병(Matrosengefreiter]]/1924년 3월 30일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뮈르비크 해군 사관학교에서 장교 후보생(Fähnrichde) 과정을 수료했으며, 1924년 4월 1일 소위(Fähnrich zur See]]/Ensign (rank)de)로 진급했다.[1] 1925년에는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어뢰 및 통신 학교(Torpedo- und Nachrichtenschulede)에서 소위들을 위한
2. 3. 전간기 해군 경력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1904년 3월 10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작센 주 할레 (잘레)에서 태어났다.[1] 1922년 3월 30일 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해안 방어 부대 3부대 3중대(3. Kompanie Küstenwehr-Abteilung (K.W.A) IIIde)에서 첫 보병 훈련을 받았다.[1] 1922년 10월 4일, 슈나이더는 함선 기반 훈련의 첫 번째 단계로 에 탑승했다.[1] ''하노버''에 이어, 그는 1923년 4월 4일 SKS ''니오베''에, 1923년 7월 2일 에 탑승했다.[1] 1923년 4월 1일 일등 수병(Matrosengefreiterde)으로 진급했다.[1] 슈나이더는 1924년 3월 30일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뮈르비크 해군 사관학교에서 장교 후보생(Fähnrichde) 과정을 수료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1924년 4월 1일 소위(Fähnrich zur Seede)로 진급했다.[1]장교 후보생 훈련 후, 슈나이더는 1925년 4월 1일 플렌스부르크-뮈르비크에 있는 어뢰 및 통신 학교(Torpedo- und Nachrichtenschulede)에서 소위들을 위한 어뢰 과정을 수료했으며,[28] 1925년 6월 3일 킬-비크에 있는 실험 지뢰 및 시범 사령부(Sperrversuchs- und Lehrkommandode)에서 소위들을 위한 지뢰 과정(Fähnrichs-Sperr-Lehrgangde)을 수료했다.[28]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라인 연습 작전에서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전함 비스마르크의 포술부 장교로 근무했다.[2] 비스마르크는 에른스트 린데만 해군 대령의 지휘를 받았으며, 헬무트 브링크만 해군 대령의 지휘를 받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연합군 선박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2] 대제독 에리히 레더는 함대 사령관 군터 뤼첸스 제독에게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동등한 전력의 적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전투 능력을 보존하면서 지연 작전으로 묶어두어 ''프린츠 오이겐''이 호송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와 "이 작전의 주요 목표는 적의 상선이며, 적의 군함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하고 과도한 위험 없이 수행할 수 있을 때만 교전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2]
비스마르크가 덴마크 해협을 통과할 때, 영국 군함 2척으로부터 사격을 당했지만 뤼첸스 제독이 응사 명령을 내리지 않자, 슈나이더는 함교로 가서 "발포 허가를 요청합니다."라고 물었다. 이에 린데만 함장은 "내 배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발포하라!"라고 대답했다.[2]
1941년 5월 19일 오전 2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고텐하펜(현재 그디니아)을 출발하여 발트해를 거쳐 대서양으로 향했다.[3] 5월 20일 대벨트 해협을 통과했고, 다음 날 정오쯤 노르웨이 베르겐의 그림스타 피오르드에 닻을 내렸다.[3] 프린츠 오이겐은 유조선 ''볼린''으로부터 연료를 보급받았다.[3] 노르웨이에 주둔하고 있던 슈나이더의 형제, 야전 군의관 오토 슈나이더 박사가 비스마르크에 잠시 들러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5월 21일 저녁 22시경 비스마르크에서 마지막으로 하선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3] 슈나이더 박사는 나중에 그의 형제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이 자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주장했다.[3]
5월 23일 저녁, 독일 함대는 덴마크 해협을 순찰하던 영국 중순양함 와 ''노포크''에 의해 탐지되었다.[4] 비스마르크는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다섯 번의 일제 사격을 했다.[4] 이 교전으로 비스마르크의 전방 레이더가 고장났고, 뤼첸스는 프린츠 오이겐에게 비스마르크 앞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해야 했다.[4]
1941년 5월 24일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가 침몰했는데, 아마도 ''Bismarck''에 의해서였을 것이다.[5] ''Prinz Eugen''의 수중청음기는 05:00에 항구 쪽에 있는 미확인 선박의 소리를 감지했다. 독일군은 05:45에 두 척의 선박 굴뚝에서 연기를 발견했고, 이는 ''Bismarck''에 경보를 울렸다. 슈나이더는 처음에는 이들을 두 척의 중순양함으로 보고했다. 첫 번째 영국군의 일제 사격으로 전함으로 밝혀졌지만, 영국 함대가 항구로 방향을 돌린 후에야 정확한 정체가 드러났다.[5]
영국 함선들은 05:53에 독일군에 발포하기 시작했다. 랜슬롯 홀랜드 부제독은 처음에 ''Bismarck''을 목표로 삼을 계획이었지만, 전투 순서가 바뀌어 ''Prince of Wales''와 ''Hood''는 대신 ''Prinz Eugen''에 포격을 가했다. ''Prince of Wales''의 함장 존 리치는 이 오류를 감지하고 자신의 포를 ''Bismarck''에 발사하도록 지시했다. 독일 함대는 아직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 함대 사령관 뤼첸스 제독은 즉시 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5]
전투가 시작된 지 2분 후, 슈나이더의 여러 차례 질문에 "발사 허가를 요청합니다?/Frage Feuererlaubnisde"라고 하자, 성급한 린데만은 "내 배가 엉덩이 밑에서 격침되는 꼴은 못 본다. 발사!/Ich lasse mir doch nicht mein Schiff unter dem Arsch wegschießen. Feuererlaubnisde"라고 답했다.[6] 이 린데만의 인용문은 당시 후방 사격 지휘 장치에서 ''Suffolk''과 ''Norfolk''를 감시하고 슈나이더의 명령을 포술 인터콤으로 듣고 있던 부르카르트 프라이헤어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에 의해 인용되었다.[6]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는 린데만의 개인 보좌관이었으며, 1941년 5월 27일 ''Bismarck''의 최후 전투에서 생존한 최고위 장교였다. ''Bismarck''의 마지막 날에 대해 알려진 많은 정보는 그의 목격담에 기인한다.[7][8]
''Bismarck''는 05:55에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는데, 처음에는 ''Anton''과 ''Bruno'' 포탑을 발사하고 잠시 후 ''Cesar''와 ''Dora'' 포탑을 발사하여 "반 일제 사격"이라고 불렸다.[9] 이 포탄들은 표적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었고, 이에 슈나이더는 사정거리와 좌우 편차를 수정하여 4 hm의 조정을 지시했다.[10] 긴 일제 사격은 "과녁 너머"로, 짧은 일제 사격은 명중으로 판단했다. 그런 다음 슈나이더는 완전한 일제 사격(전체 일제 사격)을 지시했고, 이어서 두 번의 더 빠른 일제 사격을 가했다.[11] 06:01에 약 180 hm 거리에서 발사된 이 다섯 번째 38 cm 포탄의 일제 사격은 ''Hood''의 주 마스트 근처를 명중한 것으로 보였고, 한 발은 마스트 뒤 "X" 포탑 사이 어딘가에 명중했을 것이다.[11][12] 즉시 눈에 띄는 폭발은 없었고, 슈나이더는 "이건 불발탄인가? 확실히 파고 들어갔군./Nanu, war das ein Blindgänger? Der hat sich wohl reingefressen.de"라고 말했다.[13] 그런 다음 거대한 화염이 ''Hood''의 주 마스트 근처에서 폭발했고, 이어서 함선의 후미 부분을 파괴하는 엄청난 탄약고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Hood''의 허리가 부러졌고, 3분 만에 침몰한 이 배의 마지막 모습은 물 속에서 거의 수직으로 서 있는 선수였다.[14][15] 슈나이더는 린데만 함장과 함께 후드를 격침시키는 데 일조했다.
폭발 후 HMS ''Prince of Wales''는 두 척의 독일 함선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그녀는 약 06:09에 교전을 중단했는데, ''Bismarck''에서 4발, ''Prinz Eugen''에서 3발의 직격탄을 맞은 후였다. 그러나 이 짧은 교전 동안 ''Prince of Wales''도 ''Bismarck''에 세 발의 포탄을 명중시켰다. 한 발은 사령관의 보트에 명중하여 함교의 수상기 발사기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포탄은 선수를 관통하여 반대편으로 나갔다. 세 번째 포탄은 수면 아래 선체 장갑에 명중하여 함선 내부에서 폭발했고, 발전기실을 침수시키고 인접한 보일러실의 벌크헤드를 손상시켜 부분적으로 침수시켰다. 이 마지막 두 발의 명중으로 2000톤의 물이 함선으로 들어왔다.[16]
시간 | 포탑에서 발사된 일제 사격 | 표적 | 결과 |
---|---|---|---|
05:55 | 1차 Anton 및 Bruno 1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5:56 | 2차 Anton 및 Bruno 2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5:57 | 3차 Anton 및 Bruno 3차 Cesar 및 Dora | Hood | 사격 통제탑 명중 |
05:58 | 4차 Anton 및 Bruno 4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5:59 | 5차 Anton 및 Bruno 5차 Cesar 및 Dora | Hood | 명중, Hood 폭발 |
06:00 | 6차 Anton 및 Bruno 6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6:01 | 7차 Anton 및 Bruno 7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2 | 8차 Anton 및 Bruno 8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나침반 플랫폼 명중 |
06:03 | 9차 Anton 및 Bruno 9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2발 명중, 1발은 물밑 선미, 1발은 우현 133mm 부사격 통제 장치 명중 |
06:04 | 10차 Anton 및 Bruno 10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슈퍼마린 월러스 항공기 크레인 명중 |
06:05 | 11차 Anton 및 Bruno 11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6 | 12차 Anton 및 Bruno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7 | 12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8 | 13차 Anton 및 Bruno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9 | 13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1941년 5월 27일,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후드를 격침시킨 아달베르트 슈나이더에게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은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다.[20] 5월 27일 오전 2시 17분, ''Group West''는 ''비스마르크''로부터 슈나이더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할 것을 권고하는 전문을 받았고, 3시 51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훈장을 수여했다는 답신이 확인되었다.[20] ''Matrosengefreiter'' 아돌프 아이히는 귄터 뤼첸스 제독과 에른스트 린데만이 수여 후 악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21][22]
다음 날,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의 추격을 받게 된다. 5월 26일, 제209 비행대대 RAF 소속 카탈리나 정찰기가 생나제르 서쪽 약 1,300km 지점에서 ''비스마르크''를 발견했고, 제임스 소머빌 제독이 지휘하는 Force H가 ''비스마르크'' 저지를 명령받았다.[19] 그날 저녁, HMS ''Ark Royal''에서 출격한 소드피쉬 어뢰 폭격기들이 공격을 시작하여 ''비스마르크''의 방향타를 고장 냈다.[19]
5월 27일, 영국 해군 전함 와 를 포함한 함대가 ''비스마르크''를 공격했다.[24] 8시 49분, ''비스마르크''는 반격을 시작했지만, 영국 함대의 집중 포화에 큰 피해를 입었다. 8시 53분에 전방 지휘소가 피격되었고, 9시 2분에는 전방 포탑 2기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24] 9시 18분에는 후방 지휘소가 파괴되었고, 9시 24분에는 포탑 ''도라''가 무력화되었다.[24] 9시 40분에는 함 중앙에 화재가 발생했고, 9시 50분에는 포탑 ''카이사르''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24] 10시 정각에 ''비스마르크''의 모든 무기가 침묵했다.[24]
결국 ''비스마르크''는 10시 36분, 우에상 서쪽 약 560km 지점에서 침몰했다.[24] Dorsetshire와 가 110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 5명의 선원은 와 기상 관측선 ''작센발트''에 의해 구조되었다.[24] 슈나이더 소령은 전투 도중 사령탑에 포탄 여러 발이 한꺼번에 명중하면서 전사하였다[24]
3. 1. 라인 연습 작전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라인 연습 작전에서 전함 비스마르크의 포술부 장교로 근무했다.[2] 비스마르크는 에른스트 린데만 해군 대령의 지휘를 받았으며, 헬무트 브링크만 해군 대령의 지휘를 받는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연합군 선박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2] 대제독 에리히 레더는 함대 사령관 군터 뤼첸스 제독에게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동등한 전력의 적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전투 능력을 보존하면서 지연 작전으로 묶어두어 ''프린츠 오이겐''이 호송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와 "이 작전의 주요 목표는 적의 상선이며, 적의 군함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하고 과도한 위험 없이 수행할 수 있을 때만 교전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2]비스마르크가 덴마크 해협을 통과할 때, 영국 군함 2척으로부터 사격을 당했지만 뤼첸스 제독이 응사 명령을 내리지 않자, 슈나이더는 함교로 가서 "발포 허가를 요청합니다."라고 물었다. 이에 린데만 함장은 "내 배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발포하라!"라고 대답했다.[2]
1941년 5월 19일 오전 2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고텐하펜(현재 그디니아)을 출발하여 발트해를 거쳐 대서양으로 향했다.[3] 5월 20일 대벨트 해협을 통과했고, 다음 날 정오쯤 노르웨이 베르겐의 그림스타 피오르드에 닻을 내렸다.[3] 프린츠 오이겐은 유조선 ''볼린''으로부터 연료를 보급받았다.[3] 노르웨이에 주둔하고 있던 슈나이더의 형제, 야전 군의관 오토 슈나이더 박사가 비스마르크에 잠시 들러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5월 21일 저녁 22시경 비스마르크에서 마지막으로 하선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3] 슈나이더 박사는 나중에 그의 형제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이 자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주장했다.[3]
5월 23일 저녁, 독일 함대는 덴마크 해협을 순찰하던 영국 중순양함 와 ''노포크''에 의해 탐지되었다.[4] 비스마르크는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다섯 번의 일제 사격을 했다.[4] 이 교전으로 비스마르크의 전방 레이더가 고장났고, 뤼첸스는 프린츠 오이겐에게 비스마르크 앞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해야 했다.[4]
3. 2. 덴마크 해협 해전
라인 연습 작전에서,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전함 비스마르크의 포술부 장교로 근무했다.[5] 비스마르크가 덴마크 해협을 통과할 때, 영국 군함 2척으로부터 사격을 당했지만 귄터 뤼첸스 제독이 응사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자,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슈나이더는 함교로 가서 "발포 허가를 요청합니다."라고 물었다. 이에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은 "내 배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발포하라!"라고 대답했다.[6]1941년 5월 24일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가 침몰했는데, 아마도 ''Bismarck''에 의해서였을 것이다.[5] ''Prinz Eugen''의 수중청음기는 05:00에 항구 쪽에 있는 미확인 선박의 소리를 감지했다. 독일군은 05:45에 두 척의 선박 굴뚝에서 연기를 발견했고, 이는 ''Bismarck''에 경보를 울렸다. 슈나이더는 처음에는 이들을 두 척의 중순양함으로 보고했다. 첫 번째 영국군의 일제 사격으로 전함으로 밝혀졌지만, 영국 함대가 항구로 방향을 돌린 후에야 정확한 정체가 드러났다.[5]
영국 함선들은 05:53에 독일군에 발포하기 시작했다. 랜슬롯 홀랜드 부제독은 처음에 ''Bismarck''을 목표로 삼을 계획이었지만, 전투 순서가 바뀌어 ''Prince of Wales''와 ''Hood''는 대신 ''Prinz Eugen''에 포격을 가했다. ''Prince of Wales''의 함장 존 리치는 이 오류를 감지하고 자신의 포를 ''Bismarck''에 발사하도록 지시했다. 독일 함대는 아직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 함대 사령관 뤼첸스 제독은 즉시 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5]
전투가 시작된 지 2분 후, 슈나이더의 여러 차례 질문에 "발사 허가를 요청합니다?/Frage Feuererlaubnisde"라고 하자, 성급한 린데만은 "내 배가 엉덩이 밑에서 격침되는 꼴은 못 본다. 발사!/Ich lasse mir doch nicht mein Schiff unter dem Arsch wegschießen. Feuererlaubnisde"라고 답했다.[6] 이 린데만의 인용문은 당시 후방 사격 지휘 장치에서 ''Suffolk''과 ''Norfolk''를 감시하고 슈나이더의 명령을 포술 인터콤으로 듣고 있던 부르카르트 프라이헤어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에 의해 인용되었다.[6]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는 린데만의 개인 보좌관이었으며, 1941년 5월 27일 ''Bismarck''의 최후 전투에서 생존한 최고위 장교였다. ''Bismarck''의 마지막 날에 대해 알려진 많은 정보는 그의 목격담에 기인한다.[7][8]
''Bismarck''는 05:55에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는데, 처음에는 ''Anton''과 ''Bruno'' 포탑을 발사하고 잠시 후 ''Cesar''와 ''Dora'' 포탑을 발사하여 "반 일제 사격"이라고 불렸다.[9] 이 포탄들은 표적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었고, 이에 슈나이더는 사정거리와 좌우 편차를 수정하여 4 hm의 조정을 지시했다.[10] 긴 일제 사격은 "과녁 너머"로, 짧은 일제 사격은 명중으로 판단했다. 그런 다음 슈나이더는 완전한 일제 사격(전체 일제 사격)을 지시했고, 이어서 두 번의 더 빠른 일제 사격을 가했다.[11] 06:01에 약 180 hm 거리에서 발사된 이 다섯 번째 38 cm 포탄의 일제 사격은 ''Hood''의 주 마스트 근처를 명중한 것으로 보였고, 한 발은 마스트 뒤 "X" 포탑 사이 어딘가에 명중했을 것이다.[11][12] 즉시 눈에 띄는 폭발은 없었고, 슈나이더는 "이건 불발탄인가? 확실히 파고 들어갔군./Nanu, war das ein Blindgänger? Der hat sich wohl reingefressen.de"라고 말했다.[13] 그런 다음 거대한 화염이 ''Hood''의 주 마스트 근처에서 폭발했고, 이어서 함선의 후미 부분을 파괴하는 엄청난 탄약고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Hood''의 허리가 부러졌고, 3분 만에 침몰한 이 배의 마지막 모습은 물 속에서 거의 수직으로 서 있는 선수였다.[14][15] 슈나이더는 린데만 함장과 함께 후드를 격침시키는 데 일조했다.
폭발 후 HMS ''Prince of Wales''는 두 척의 독일 함선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그녀는 약 06:09에 교전을 중단했는데, ''Bismarck''에서 4발, ''Prinz Eugen''에서 3발의 직격탄을 맞은 후였다. 그러나 이 짧은 교전 동안 ''Prince of Wales''도 ''Bismarck''에 세 발의 포탄을 명중시켰다. 한 발은 사령관의 보트에 명중하여 함교의 수상기 발사기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포탄은 선수를 관통하여 반대편으로 나갔다. 세 번째 포탄은 수면 아래 선체 장갑에 명중하여 함선 내부에서 폭발했고, 발전기실을 침수시키고 인접한 보일러실의 벌크헤드를 손상시켜 부분적으로 침수시켰다. 이 마지막 두 발의 명중으로 2000톤의 물이 함선으로 들어왔다.[16]
시간 | 포탑에서 발사된 일제 사격 | 표적 | 결과 |
---|---|---|---|
05:55 | 1차 Anton 및 Bruno 1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5:56 | 2차 Anton 및 Bruno 2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5:57 | 3차 Anton 및 Bruno 3차 Cesar 및 Dora | Hood | 사격 통제탑 명중 |
05:58 | 4차 Anton 및 Bruno 4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5:59 | 5차 Anton 및 Bruno 5차 Cesar 및 Dora | Hood | 명중, Hood 폭발 |
06:00 | 6차 Anton 및 Bruno 6차 Cesar 및 Dora | Hood | 빗나감 |
06:01 | 7차 Anton 및 Bruno 7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2 | 8차 Anton 및 Bruno 8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나침반 플랫폼 명중 |
06:03 | 9차 Anton 및 Bruno 9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2발 명중, 1발은 물밑 선미, 1발은 우현 133mm 부사격 통제 장치 명중 |
06:04 | 10차 Anton 및 Bruno 10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슈퍼마린 월러스 항공기 크레인 명중 |
06:05 | 11차 Anton 및 Bruno 11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6 | 12차 Anton 및 Bruno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7 | 12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8 | 13차 Anton 및 Bruno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06:09 | 13차 Cesar 및 Dora | Prince of Wales | 빗나감 |
3. 3. 비스마르크 추격전
1941년 5월 27일,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후드를 격침시킨 아달베르트 슈나이더에게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은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다.[20] 5월 27일 오전 2시 17분, ''Group West''는 ''비스마르크''로부터 슈나이더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할 것을 권고하는 전문을 받았고, 3시 51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훈장을 수여했다는 답신이 확인되었다.[20] ''Matrosengefreiter'' 아돌프 아이히는 귄터 뤼첸스 제독과 에른스트 린데만이 수여 후 악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21][22]다음 날,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의 추격을 받게 된다. 5월 26일, 제209 비행대대 RAF 소속 카탈리나 정찰기가 생나제르 서쪽 약 1,300km 지점에서 ''비스마르크''를 발견했고, 제임스 소머빌 제독이 지휘하는 Force H가 ''비스마르크'' 저지를 명령받았다.[19] 그날 저녁, HMS ''Ark Royal''에서 출격한 소드피쉬 어뢰 폭격기들이 공격을 시작하여 ''비스마르크''의 방향타를 고장 냈다.[19]
5월 27일, 영국 해군 전함 와 를 포함한 함대가 ''비스마르크''를 공격했다.[24] 8시 49분, ''비스마르크''는 반격을 시작했지만, 영국 함대의 집중 포화에 큰 피해를 입었다. 8시 53분에 전방 지휘소가 피격되었고, 9시 2분에는 전방 포탑 2기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24] 9시 18분에는 후방 지휘소가 파괴되었고, 9시 24분에는 포탑 ''도라''가 무력화되었다.[24] 9시 40분에는 함 중앙에 화재가 발생했고, 9시 50분에는 포탑 ''카이사르''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24] 10시 정각에 ''비스마르크''의 모든 무기가 침묵했다.[24]
결국 ''비스마르크''는 10시 36분, 우에상 서쪽 약 560km 지점에서 침몰했다.[24] Dorsetshire와 가 110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 5명의 선원은 와 기상 관측선 ''작센발트''에 의해 구조되었다.[24] 슈나이더 소령은 전투 도중 사령탑에 포탄 여러 발이 한꺼번에 명중하면서 전사하였다[24]
4. 슈나이더의 죽음과 유산
5월 26일,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으로부터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다음 날 아침, 비스마르크는 88분 동안 영국 함대와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25]
5월 27일 08:47에 로드니함에서, 08:48에 킹 조지 5세함에서 첫 번째 일제 사격이 이루어졌다.[25] 슈나이더는 비스마르크함의 후방 포탑이 적절한 각도로 사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드니함에 부분적인 일제 사격을 가했다.[25] 슈나이더의 조준은 정확했고, 그는 첫 세 발의 일제 사격이 짧았고, 표적에 명중했고, 목표 지점을 넘어갔다고 보고했다.[25] 킹 조지 5세함과 로드니함은 손상된 방향타 때문에 비스마르크함이 대응할 수 없는 기동인 비스마르크함의 좌현을 지나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25]
비스마르크함은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주포 사격 통제 장치가 파괴되었고, 그 다음에는 ''안톤''과 ''브루노'' 포탑이 고장을 일으켰다.[25] 전투 도중 사령탑에 포탄 여러 발이 한꺼번에 맞으면서 슈나이더 소령도 그곳에 있던 27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사하였다.[25]
부르카르트 프라이헤르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는 사격 통신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슈나이더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보고를 했다.[25] 슈나이더는 주포와 부포가 전투 준비가 되었음을 보고하고 사격 명령을 내렸다.[25] 슈나이더는 HMS 노퍽함에서 발사된 8인치 포탄이 주포 사격 통제 장치에 있는 그의 전투 위치를 강타했을 때인 09:02에 사망했다.[26]
슈나이더는 사후 1941년 5월 1일자로 함장(프리깃텐카피탄/프리깃텐카피탄de)으로 추서되었으나, 이 진급은 그의 인사 기록에는 없다.[27]
4. 1. 최후의 전투와 죽음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5월 26일, 에른스트 린데만 함장으로부터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다음 날 아침, 비스마르크는 88분 동안 영국 함대와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25]5월 27일 08:47에 로드니함에서, 08:48에 킹 조지 5세함에서 첫 번째 일제 사격이 이루어졌다.[25] 슈나이더는 비스마르크함의 후방 포탑이 적절한 각도로 사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드니함에 부분적인 일제 사격을 가했다.[25] 슈나이더의 조준은 정확했고, 그는 첫 세 발의 일제 사격이 짧았고, 표적에 명중했고, 목표 지점을 넘어갔다고 보고했다.[25] 킹 조지 5세함과 로드니함은 손상된 방향타 때문에 비스마르크함이 대응할 수 없는 기동인 비스마르크함의 좌현을 지나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25]
비스마르크함은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주포 사격 통제 장치가 파괴되었고, 그 다음에는 ''안톤''과 ''브루노'' 포탑이 고장을 일으켰다.[25] 전투 도중 사령탑에 포탄 여러 발이 한꺼번에 맞으면서 슈나이더 소령도 그곳에 있던 27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사하였다.[25]
부르카르트 프라이헤르 폰 뮐렌하임-레흐베르크는 사격 통신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슈나이더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보고를 했다.[25] 슈나이더는 주포와 부포가 전투 준비가 되었음을 보고하고 사격 명령을 내렸다.[25] 슈나이더는 함에서 발사된 8인치 포탄이 주포 사격 통제 장치에 있는 그의 전투 위치를 강타했을 때인 09:02에 사망했다.[26]
슈나이더는 사후 1941년 5월 1일자로 함장(프리깃텐카피탄/프리깃텐카피탄de)으로 추서되었으나, 이 진급은 그의 인사 기록에는 없다.[27]
4. 2. 사후 평가 및 추서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비스마르크가 영국 함대에 의해 격침되기 하루 전,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으로부터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다음 날,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와 88분 동안 격전을 벌였고, 전투 도중 사령탑에 포탄 여러 발이 명중하면서 슈나이더 소령은 다른 27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사하였다.4. 3. 유산
5. 슈나이더의 훈장
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근무 공로 훈장 4급과 3급(1936년 10월 2일)[28], 헝가리 공화국 공로 훈장(1938년 8월 20일)[28]을 받았다. 1939년에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28] 1940년 7월 30일에는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8] 원양 함대 배지는 1941년에 받았다.[27] 1941년 5월 27일에는 코르벳텐카피탄(Korvettenkapitän) 계급으로 전함 "비스마르크"(Bismarck)의 제1 포술 장교로서 철십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9][30][31]
6. 슈나이더의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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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베르트 슈나이더는 1923년 4월 1일 수병 2등병으로 해군에 입대했다.[27] 1924년 4월 1일에는 해군 사관 후보생이 되었고,[27] 1926년 10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27] 이후 1928년 7월 1일 해군 대위로 진급했으며,[27] 1934년 10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27] 1938년 8월 1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27] 1941년 5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의 인사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27]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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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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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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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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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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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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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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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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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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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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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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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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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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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5]
서적
[1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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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History—The Battle of the Denmark Strait
http://www.bismarck-[...]
2013-04-14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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