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린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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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린데만은 1894년 독일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1940년 전함 비스마르크의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1941년 라인 연습 작전에 참여하여 영국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린데만은 비스마르크가 영국 해군에 의해 격침될 때 전사했으며, 사후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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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린데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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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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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4년 3월 28일 |
사망일 | 1941년 5월 27일 |
출생지 | 알텐키르헨, 독일 제국 |
사망지 | 북대서양 |
안장 위치 좌표 | '' |
소속 국가 | (1913년–1918년) (1918년–1933년) (1933년–1941년) |
군 종류 | |
복무 기간 | 1913년–1941년 |
최종 계급 | Kapitän zur See (Captain) |
지휘 | 제1 포병 중대, Friedrichsort 함선 건설 부서, OKM 해군 포술 학교 |
소속 부대 | 중순양함 |
주요 전투 | * 제1차 세계 대전 ** 알비온 작전 ** 스카파 플로 독일 함대 자침 사건 * 스페인 내전 * 제2차 세계 대전 ** 대서양 전투 *** 라인위붕 작전 **** 덴마크 해협 해전 **** 비스마르크 전함의 마지막 전투 |
수상 | 기사 철십자 훈장 (사후) |
친척 | 에른스트 하인리히 린데만 (조부) 게오르크 린데만 (사촌) |
서훈 내역 | |
훈장 | [[파일:Gallipoli-star-unadorned.jpg|25px|link=갈리폴리 성장|alt=오스만 전쟁기장]] [[파일:D-PRU EK 1914 2 Klasse BAR.svg|x20px|link=2급 1914년형 철십자장|alt=2급 1914년형 철십자장]] [[파일:D-PRU EK 1914 1 Klasse BAR.svg|x20px|link=1급 1914년형 철십자장|alt=1급 1914년형 철십자장]] [[파일:Friedrich-August Cross - military (Oldenburg) - ribbon bar.png|x20px|link=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십자장]] [[파일:DEU Ehrenkreuz des Weltkrieges Frontkaempfer BAR.svg|x20px|link=1914년/1918년 세계대전 명예십자장]] [[파일:Wehrmacht Long Service Award ribbon.png|x20px|link=국방군 근속상]] [[파일:Wehrmacht Long Service Award ribbon.png|x20px|link=국방군 근속상]] [[파일:Wehrmacht Long Service Award ribbon.png|x20px|link=국방군 근속상]] [[파일:Wehrmacht Long Service Award ribbon.png|x20px|link=국방군 근속상]] [[파일:SVE Svärdsorden BAR.svg|x20px|link=검기사단]] [[파일:Ribbon of War Merit Cross.png|x20px|link=전공십자장|2급 전공십자장]] [[파일:DEU EK 2Kl 1939Clasp BAR.svg|x20px|link=철십자 약장|alt=2급 1939년형 철십자 약장]] [[파일:DEU EK 1Kl 1939Clasp BAR.svg|x20px|link=철십자 약장|alt=1급 1939년형 철십자 약장]] [[파일:DEU EK 2 Klasse BAR.svg|x20px|link=2급 1939년형 철십자장]] [[파일:DEU EK 1 Klasse BAR.svg|x20px|link=1급 1939년형 철십자장]] |
2. 생애
에른스트 린데만은 1894년 독일에서 태어나 1913년 독일 제국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다가 무선 전신병 임무 교육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후 다시 전선에 복귀했으나, 독일 제국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린데만은 군대 감축에도 살아남았다.
린데만은 1920년 베를린 출신의 가수 샬럿 웨일과 결혼했으나, 해군 장교라는 직업 특성상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1932년 이혼했다. 이후 1933년 힐데가르트와 재혼했는데, 그녀는 린데만보다 14살 어렸다.
2. 1. 초기 생애
에른스트 린데만은 1894년 3월 28일 라인 주 베스터발트의 알텐키르헨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게오르크 하인리히 에른스트 린데만 박사(법학)였고, 어머니는 마리아 린데만(결혼 전 성씨는 리버)이었다. 에른스트는 세 자녀 중 첫째였다. 아버지 게오르크 린데만은 시보 판사(게리히트아세서)였으며, 나중에는 프로이센 중앙 토지 신용 회사(Preußische Central-Bodenkredit-Aktiengesellschaft AG)의 사장이었다.[1]1894년 4월 26일 개신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895년 가족은 베를린의 샬로텐부르크 지구로 이사하여 카르머 거리 6번지에 살았다.[2] 1896년에는 남동생 쿠르트가, 1900년에는 둘째 동생 한스-볼프강이 태어났다. 1903년, 가족은 다시 이사하여 베를린의 다렘 지구에 있는 자기 집으로 이사했으며, 그루네발트 숲 근처에 살았다.
1910년, 린데만이 16세였을 때, 그의 삼촌 해군 대령 프리드리히 티스마이어는 당시 프레게텐카피테인de(사령관) 계급으로 독일 제국 해군의 경순양함 (1909년 10월 – 1910년 1월)의 지휘관이었다. 하멜른에서 열린 가족 모임에서 린데만은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며 극동에서의 그의 항해 모험에 대해 들었다. 이러한 대화는 린데만을 해군 경력에 매료시켰다.
1912년 말 베를린 빌머스도르프의 비스마르크 김나지움(중등학교)을 졸업했으며, 아비투어 (졸업장)에서 평균 이상의 성적을 받았다. 그 후 6개월 동안 그는 로열 폴리테크닉 연구소 (리치먼드, 런던)에 다녔다. 1913년에 독일 제국 해군에 입대하였다.[24]
2. 2. 개인사
에른스트 린데만은 1920년 봄 베를린 출신의 가수 샤를로테 바일(결혼 전 성씨: 프리치, 1899년~1979년)과 만났다. 둘은 1921년 2월 1일에 결혼했고, 1924년 2월 26일 딸 헬가 마리아를 낳았다.[1] 해군 장교였던 린데만은 가족과 장기간 떨어져 지내야 했고, 이는 결혼 생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여 1932년 이혼했다.[2] 1933년 7월 20일, 린데만은 막내 동생의 처제인 힐데가르트 부르차르트와 약혼했다. 힐데가르트는 린데만보다 14살 어렸다.[3] 1934년 10월 27일, 둘은 베를린-다렘의 성 안넨 교회에서 고백교회 창립자이자 훗날 반나치 혐의로 투옥된 마르틴 니묄러의 집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4] 1939년 7월 6일에는 딸 하이디 마리아가 태어났다.[5]3. 해군 경력
에른스트 린데만은 1913년 독일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포술 장교가 되었고, 전함 "엘자스"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배속되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함포 교관을 맡았고, 1935년에는 독일 해군 제1교육부 교관으로 전임되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해군 총사령부 교육부에서 참사관을 거쳐 부장을 역임했으며, 1938년에 대령으로 진급했다.[24]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하면서 해군 재무장 시대가 시작되었고, 1935년 Reichsmarinede는 크리그스마린으로 개명되었다.
린데만은 해군 포술 학교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실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전함 비스마르크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지만, 함장 경험이 없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지휘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해군 최고의 포격 전술 전문가였고, 그의 우려는 기우였다. 훗날 비스마르크 생존자들은 린데만이 부하들을 잘 대해준 좋은 선장이었다고 진술했다.
1936년 기공, 1939년 2월 14일 진수된 비스마르크는 1940년 8월 린데만이 함부르크의 블롬 운트 포스 조선소에 도착하면서 완성되었다. 1940년 9월 28일, 비스마르크는 킬 운하를 통과했고, 발트 해에서 시험을 거친 후 1941년 라인 연습 작전에 참가했다.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린데만은 영국 함선 2척의 포격에도 귄터 뤼첸스 제독이 응사 명령을 내리지 않자, "내 지휘하의 전함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발포하라!"라고 외치며 독단적으로 공격을 지시했다. 그는 관망탑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후드에 명중탄을 날리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반파시켰으며, 구축함 등 여러 군함에 손상을 입혔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침몰했고, 린데만 대령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후 전투 직전 관망탑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린데만은 전투 중 포탄이 사령탑을 강타하면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령탑 피격 이후, 비스마르크 포술 장교는 갑판 위에서 수십 명의 수병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흰색 모자를 쓴 장교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독일 해군에서 흰색 모자는 지휘관만 착용할 수 있었다.
생존 수병 파울 힐렌은 마지막 전투 단계에서 상갑판으로 탈출, 20~30명의 사람들이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에는 흰색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고 진술했다.[21] 당시 이미 물 속에 있던 생존 기관병 루돌프 뢰머는 린데만이 비스마르크 함 앞쪽 38cm 포탑인 안톤 근처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전투 연락병인 선임 수병과 함께 있었고, 연락병에게 스스로를 구하라고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연락병은 린데만의 손을 잡고 앞쪽 깃대로 걸어갔다. 배가 뒤집히면서 둘은 잠시 차렷 자세를 취했고, 린데만과 연락병은 경례했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자 연락병은 물에 빠졌다. 린데만은 깃대를 붙잡고 경례를 계속하다 배와 함께 침몰했다.
1942년 1월 6일, 린데만의 아내 힐데가르트에게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사후 추서되었다. 이는 후드 격침 공적이었다.
린데만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타이타닉을 발견한 해양학자 로버트 발라드가 1989년 발견한 비스마르크호 잔해에서 함교 주변 50개 이상 포탄 구멍이 발견되어, 함교 피격으로 전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마지막 전투 직전인 08:00경 지휘교에서 린데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평소 지적이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낙천적이었던 린데만이 비관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고 묘사하며, 전투 피로나 뤼첸스와의 불화로 인한 것으로 추측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8월 독일의 선전포고와 함께 해군 사관학교의 모든 추가 훈련이 종료되었고, 정규 의무 장교 시험이 생략되었다. 1913년 승조원 전체는 독일 제국 해군의 다양한 부대에 배속되었다. 린데만은 라인하르트 셰어 부제독의 지휘하에 있는 고속 함대 제2 전투 전대에 속한 전함 에 배속되어 제3 무선 전신 장교 직책을 맡았다.[4] ''Lothringen''은 주로 북해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알텐브루흐(현재 쿠스하펜의 일부)와 브룬스뷔텔 사이를 왕복했다. 린데만은 1915년 6월 1일에 뮈르비크의 무선 전신 학교에 다니기 위해 ''Lothringen''을 떠났다.[5] 그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15년 7월에 돌아와 제2 무선 전신 장교를 맡았는데, 동료 장교들은 그의 비정상적으로 큰 귀에 맞는다고 농담을 했다. 그는 1915년 9월 18일에 ''Leutnant zur See''(소위)로 진급했다.[6]
1916년 3월 19일, 린데만은 새로 취역한 전함 (함장 막스 한 대령)으로 전출되어 제2 무선 전신 장교와 같은 계급을 받았다. ''Bayern''은 38cm포 8문을 장착하여 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군함이었다. 그녀의 승무원은 대부분 훈련함 역할을 계속 수행했던 ''Lothringen''에서 배정되었다. 로하르트 대령의 지휘하에 있는 ''Bayern''에서 린데만은 1917년 9월~10월에 알비온 작전에 참여했다. 알비온 작전의 목표는 당시 러시아 임시 정부의 일부였던 에스토니아의 사레마섬(외젤), 히우마섬(다고) 및 무후섬(문) 침공 및 점령이었다. 1917년 10월 12일 05시 07분, ''Bayern''은 파메로르트의 상륙 해변을 확보하기 위해 포격 위치로 이동하던 중 기뢰에 맞았다. 7명의 선원이 사망했다. 기뢰 피해에도 불구하고 ''Bayern''은 히우마섬 남쪽 끝의 토프리 곶에 있는 해안 방어 포대와 교전했다. ''Bayern''은 그날 14시에 임무에서 해제되었다. 10월 13일 타가만에서 예비 수리가 이루어진 후 1917년 11월 1일에 킬로 돌아왔다.
1918년 독일과의 휴전 협정 이후, ''Bayern''은 독일 고속 함대의 대부분과 함께 영국 그랜드 함대의 본거지인 스카파 플로우에 억류되었다. ''Bayern''은 1918년 11월 23일 린데만을 포함한 175명의 최소 승무원만 태우고 그곳에 도착했고, 그 후 독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아 1월 12일에 킬에 도착했다. 1919년 6월 21일, 루트비히 폰 로이터 제독은 스카파 플로우에서 독일 함대의 자침을 명령했고, ''Bayern''은 14시 30분에 침몰했다.
3. 2.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린데만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킬에 있는 해군 포술 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24] 1932년 4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934년에는 중순양함 아드미랄 셰어의 건조 감독을 명령받았고, 취역 후에는 포술장교가 되어 모든 무기를 책임지게 되었다.[16] 린데만이 승선한 아드미랄 셰어는 1936년 첫 출항을 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에 중령으로 진급하였다.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하면서, 해군 재무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35년에 Reichsmarinede는 ''크리그스마린''(Kriegsmarine)으로 개명되었다.
1935년, 독일 해군 제1교육부 교관으로 전임되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해군 총사령부 교육부에서 참사관을 거쳐 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1일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24]
린데만은 해군 포술 학교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적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새롭게 취역하는 전함 비스마르크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지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했다. 린데만은 함장 임무를 맡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함선 지휘관으로서는 특이한 경우였다. 해군 포술 학교 등에서 참모직을 거친 엘리트 해군 장교였지만, 현장 지휘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린데만은 독일 해군 전체를 통틀어 포격전술에 가장 능한 장교였고, 그의 걱정은 기우로 드러났다. 훗날 비스마르크의 생존자들은 린데만이 부하들을 잘 대해준 좋은 선장이었다고 진술했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비스마르크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은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독일 국가해군이 전쟁해군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1934년에는 중순양함 아드미랄 셰어 건조를 감독하고, 취역 후에는 포술장교로 모든 무기를 책임졌다. 1936년 아드미랄 셰어의 첫 출항에 함께 했고, 같은 해 10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해군 포술 대학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실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린데만은 1940년 전함 비스마르크의 함장으로 임명되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함장 경험이 없었던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지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했다. 하지만 린데만은 독일 해군 최고의 포격 전술 전문가였고, 그의 우려는 기우였다. 그의 지휘 아래 수병들은 린데만을 훌륭한 함장으로 평가했고, 부하들을 잘 대해줬다는 증언이 비스마르크 생존자들로부터 나왔다.
1936년 기공하여 1939년 2월 14일에 진수된 비스마르크는 1940년 8월 린데만이 함부르크의 블롬 운트 포스 조선소에 도착하면서 완성되었다. 1940년 9월 28일, 비스마르크는 킬 운하를 통과했고, 발트 해에서 시험을 거친 후 1941년 라인 연습 작전에 참가했다.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린데만은 영국 함선 2척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귄터 뤼첸스 제독이 응사 명령을 내리지 않자, "내 지휘하의 전함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발포하라!"라고 외치며 독단적으로 공격을 지시했다. 그는 관망탑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후드에 명중탄을 날리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반파시켰으며, 구축함 등 여러 군함에 손상을 입혔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침몰했고, 린데만 대령의 시신은 다른 승무원들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최후의 전투 직전 관망탑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린데만은 전투 중 포탄이 사령탑을 강타하면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령탑 피격 이후, 비스마르크의 한 포술 장교는 갑판 위에서 수십 명의 수병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흰색 모자를 쓴 장교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독일 해군에서 흰색 모자는 지휘관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생존한 수병 파울 힐렌은 마지막 전투 단계에서 상갑판으로 탈출했는데, 20~30명의 사람들이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에는 흰색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고 진술했다.[21] 당시 이미 물 속에 있던 생존한 기관병 루돌프 뢰머는 린데만이 비스마르크 함의 앞쪽 38cm 포탑인 안톤 근처의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전투 연락병인 선임 수병과 함께 있었고, 연락병에게 스스로를 구하라고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의 연락병은 린데만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앞쪽 깃대에 걸어갔다. 배가 뒤집히면서 둘은 잠시 차렷 자세를 취했고, 린데만과 그의 연락병은 경례했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자 연락병은 물에 빠졌다. 린데만은 깃대를 붙잡고 경례를 계속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
1942년 1월 6일, 린데만의 아내 힐데가르트에게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사후 추서되었다. 이는 후드 격침의 공적이었다.
린데만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타이타닉을 발견한 해양학자 로버트 발라드가 1989년 발견한 비스마르크호 잔해에서 함교 주변에 50개 이상의 포탄 구멍이 발견되어, 함교 피격으로 전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마지막 전투 직전인 08:00경에 지휘교에서 린데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평소 지적이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낙천적이었던 린데만이 비관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고 묘사하며, 전투 피로나 뤼첸스와의 불화로 인한 것으로 추측했다.
3. 3. 1. 라인 연습 작전
1941년, 라인 연습 작전에서 에른스트 린데만은 전함 비스마르크와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을 이끌고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연합군 선박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군 원수 귄터 뤼첸스 제독은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동등한 세력의 적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력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지연 작전으로 묶어두는 것"이라고 명령했다.[19]1941년 5월 19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고텐하펜을 출발했다. 5월 20일, 스웨덴 수상기 순양함 가 이들을 발견했고, 이 정보는 영국 해군에 전달되었다. 영국 해군은 스핏파이어 정찰기를 보내 5월 21일 베르겐 근처에서 독일 함대를 촬영했다.[19] 5월 23일, 덴마크 해협에서 순찰 중이던 영국 중순양함 과 가 독일 함대를 발견했다. 린데만은 "Feind in Sicht an Backbord, Schiff nimmt Gefecht aufde" (적 함정 좌현에 보인다. 교전하라!)라고 발표하며 교전을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다섯 발의 일제 사격을 했지만, 영국 순양함은 거리를 유지하며 감시했다. 이 교전으로 ''비스마르크''의 전방 레이더가 고장나, 뤼첸스는 ''프린츠 오이겐''에게 전방 레이더를 맡도록 지시했다.[19]
1941년 5월 24일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가 ''비스마르크''에 의해 격침되었다. ''프린츠 오이겐''의 수중 청음기는 좌현에서 외국 함선을 감지했고, 05:45에 두 척의 함선을 발견했다. 영국 함선은 05:53에 발포를 시작했다. 랜슬롯 홀랜드 부제독은 ''비스마르크''를 목표로 했지만, ''후드''는 ''프린츠 오이겐''을 향해 발포했다. 뤼첸스 제독은 즉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린데만은 "Ich lasse mir doch nicht mein Schiff unter dem Arsch wegschießen. Feuererlaubnis!de" (내 함선이 엉덩이 밑에서 격침되는 꼴은 못 본다. 사격 허가!)라고 답하며 독단적으로 공격을 지시했다.[19] 06:01, ''비스마르크''의 다섯 번째 일제 사격이 ''후드''의 주갑판에 명중, 탄약고 폭발을 일으켜 ''후드''는 3분 만에 침몰했다.[19]

폭발 후, 는 독일 함대의 집중 포격을 받고 06:09에 전투에서 이탈했다. 이 교전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비스마르크''에 세 발을 명중시켰고, 이로 인해 ''비스마르크''에 2000ton의 물이 유입되었다.[19]
린데만은 손상된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추격하려 했지만, 뤼첸스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린데만은 베르겐으로 귀환을 주장했지만, 뤼첸스는 생나제르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19] 오후에 뤼첸스는 ''프린츠 오이겐''에게 독립 작전을 명령했고, ''프린츠 오이겐''은 6월 1일에 프랑스 브레스트에 도착했다.[19]
''비스마르크''는 3일 후 영국 해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5월 24일, 825 해군 항공대의 소드피시 복엽기들이 에서 공격을 가해 ''비스마르크''에 피해를 입혔다.[19] 5월 26일, RAF 해안 사령부의 카탈리나 정찰기가 ''비스마르크''를 발견했고, 에서 출격한 소드피시들이 공격하여 방향타를 고정시켰다.[19]
1941년 5월 27일 아침, ''비스마르크''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았다. ''노포크''가 ''비스마르크''를 발견했고, 가 발포했다. ''비스마르크''는 반격했지만, , ''노포크'', 가 전투에 참여했다. 10:00에 모든 무기가 침묵했고, ''도싯셔''가 발사한 어뢰에 의해 ''비스마르크''는 10:36에 격침되었다. ''도싯셔''와 가 110명을 구조했고, 등이 5명을 더 구조했다.[19]
3. 3. 2. 비스마르크의 최후
1940년 8월, 전함 비스마르크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린데만은 인망이 두터웠고, 승무원들에게는 뒤에서 "아저씨"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다.[24] 1941년 5월, 비스마르크의 첫 출격이었던 "라인 연습 작전"에서,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켰지만, 7일 후 영국 함대의 함포 사격에 의해 비스마르크와 운명을 함께 했다.린데만 함장은 비스마르크가 덴마크 해협에서 영국 함선 2척에 의해 포격을 당했지만 뤼첸스 제독이 응사 명령을 내리지 않자, "내 지휘하의 전함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발포하라!"라고 말하며 독단적으로 공격을 명령했다. 그는 관망탑에서 전투를 직접 지휘했으며, 후드에 명중탄을 날리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반파시키고 구축함들과 여러 군함에 손상을 입혔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그 작전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린데만 대령의 시신은 거의 모든 승무원들의 시신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린데만 함장은 최후의 전투 직전 관망탑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 이후 전투 도중 포탄이 사령탑을 때렸다. 이후 린데만의 생존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지휘관 대부분은 360mm의 장갑으로 보호된 사령탑 안에 있었고, 포탄 여러 발이 연속해서 그곳을 때리는 바람에 장갑이 뚫리고 함장 집무실은 박살났다. 큰 폭발이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린데만이 그곳에 있었다면 모든 지휘관들은 전멸한 것이 된다. 린데만 함장 이외의 수뇌부는 영국 함대의 추격을 받은 이후부터 거의 밖으로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령탑이 포격당한 이후에, 비스마르크의 포술 장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비스마르크의 갑판 위에 수십 명의 수병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하얀색 모자를 착용한 장교를 봤다고 했다. 모든 독일 해군 함정에서, 흰색 모자는 오직 지휘관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생존한 ''수병'' 파울 힐렌은 마지막 전투 단계에서 상갑판으로 탈출했는데, 20~30명의 사람들이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에는 흰색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일반적으로 독일 해군 함정에서 흰색 모자는 지휘관만 착용한다.[21] 또한, 당시 이미 물 속에 있던 생존한 ''기관병'' 루돌프 뢰머는 린데만이 ''비스마르크'' 함의 앞쪽 38cm 포탑인 ''안톤'' 근처의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전투 연락병인 선임 수병과 함께 있었고, 연락병에게 스스로를 구하라고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의 연락병은 린데만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앞쪽 깃대에 걸어갔다. 배가 뒤집히면서 둘은 잠시 차렷 자세를 취했고, 린데만과 그의 연락병은 경례했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자 연락병은 물에 빠졌다. 린데만은 깃대를 붙잡고 경례를 계속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거의 일방적인 맹포격을 받았지만, 린데만은 침몰 직전까지 살아 있었다. 침몰 직전에 린데만이 함장 부속 전령병에게 헤엄쳐서 살아남으라고 명령했지만, 전령병이 그 명령을 거부했고, 전복된 함에서 경례를 하면서 해중에 수장되어 전사한 것이 생존자의 증언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24]
1942년 1월 6일 아내 힐데가르트 린데만에게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사후 추서 형태로 전달되었다.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한 공적 때문이었다.
린데만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는 뤼첸스 및 다른 장교들과 함께 영국 전함의 포격이 09:02에 ''비스마르크'' 함의 함교에 떨어지면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20] 타이타닉을 발견한 해양학자 로버트 발라드는 1989년에 ''비스마르크''호의 잔해를 발견했는데, 함 앞부분의 대부분의 상부 구조가 포탄에 의해 파괴되었고, 함교 주변에 50개 이상의 포탄 구멍이 있었다. 이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마지막 전투 직전인 08:00경에 지휘교에서 린데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평소에 지적이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낙천적이었던 린데만이 비관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고 묘사했다.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무시당했고, 나중에 이것이 전투 피로 때문인지 뤼첸스와의 불화로 그가 지쳐서인지 궁금해했다.
4. 사후
부르카르트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마지막 전투 직전인 오전 8시경에 지휘교에서 린데만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평소에 지적이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낙천적이었던 린데만이 비관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했다고 묘사했다. 폰 뮐렌하임-레히베르크는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무시당했고, 나중에 이것이 전투 피로 때문인지 뤼첸스와의 불화로 그가 지쳐서인지 궁금해했다.[20]
린데만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는 뤼첸스 및 다른 장교들과 함께 영국 전함의 포격이 오전 9시 2분에 ''비스마르크'' 함의 함교에 떨어지면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20] 타이타닉을 발견한 해양학자 로버트 발라드는 1989년에 ''비스마르크''호의 잔해를 발견했는데, 함 앞부분의 대부분의 상부 구조가 포탄에 의해 파괴되었고, 함교 주변에 50개 이상의 포탄 구멍이 있었다. 이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20]
또는 린데만은 함선의 조종 장치가 작동 불능이 되었을 때, 지휘 위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전에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전투 위치를 떠났을 수도 있다. 생존한 ''수병'' 파울 힐렌은 마지막 전투 단계에서 상갑판으로 탈출했는데, 20~30명의 사람들이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에는 흰색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일반적으로 독일 해군 함정에서 흰색 모자는 지휘관만 착용한다.[21] 또한, 당시 이미 물 속에 있던 생존한 ''기관병'' 루돌프 뢰머는 린데만이 ''비스마르크'' 함의 앞쪽 38cm 포탑인 ''안톤'' 근처의 함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전투 연락병인 선임 수병과 함께 있었고, 연락병에게 스스로를 구하라고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의 연락병은 린데만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앞쪽 깃대에 걸어갔다. 배가 뒤집히면서 둘은 잠시 차렷 자세를 취했고, 린데만과 그의 연락병은 경례했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자 연락병은 물에 빠졌다. 린데만은 깃대를 붙잡고 경례를 계속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21]
린데만의 1913년 승조원 동료들은 그의 죽음 이후 젊은 미망인에게 모두 연락했다. 1913년 승조원의 전 대장이었던 오토 클뤼버 대령은 1941년 가을에 린데만 부인에게 연락하여 명예 회원 자격을 제안했다. 1941년 12월 27일, 비스마르크 침몰 및 함장 사망 7개월 후,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은 사후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받았다. 그는 ''해군 최고 사령부(Oberkommando der Marine)''가 그의 숙련된 지휘가 영국 순양전함 ''후드''의 파괴와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가해진 피해에 크게 기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훈장을 받았다. 린데만은 ''해군(Kriegsmarine)''에서 94번째 철십자 기사 십자장 수훈자였다.
린데만의 제1 포술 장교인 아달베르트 슈나이더 중령은 1941년 5월 27일에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전통적으로 함장은 다른 승무원이 훈장을 받기 전에 이 훈장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예외는 ''국방군(Wehrmacht)''의 여러 집단에서 비판을 받았다. 에른스트 린데만의 사촌인 전 기병대 장군 게오르크 린데만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린데만과 Reichsmarinede 초창기부터 20년의 동료 관계를 유지해 온 에리히 레더 제독은 1942년 1월 6일 화요일에 다렘에서 린데만 부인에게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했다. 레더는 린데만의 어머니와 미망인에게 도덕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전함 비스마르크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린데만은 인망이 두터웠고, 승무원들에게는 뒤에서 "아저씨"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다.[24] 이듬해 5월, 비스마르크의 첫 출격이었던 "라인 연습 작전"에서,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켰지만, 그 7일 후, 영국 함대의 함포 사격에 의해 비스마르크와 운명을 함께 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거의 일방적인 맹포격을 받았지만, 린데만은 침몰 직전까지 살아 있었다. 침몰 직전에 린데만이 함장 부속 전령병에게 헤엄쳐서 살아남으라고 명령했지만, 전령병이 그 명령을 거부했고, 전복된 함복에서 경례를 하면서 해중에 수장되어 전사한 것이 생존자의 증언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24]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한 공적으로 인해, 사후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린데만 가문의 묘는 베를린 다렘구의 다렘 묘지에 있으며, 린데만의 묘비가 있다.
5. 훈장 내역
훈장 종류 | 수여 일자 |
---|---|
철십자 훈장 (1914) 2급 | |
철십자 훈장 (1914) 1급 | 1919년 9월 27일[22]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십자 훈장 2급 | [22] |
오스만 전쟁 훈장 ("갈리폴리 별" 또는 "철 초승달") | [22] |
제1차 세계 대전 명예 십자 훈장 | 1934년 12월 6일[22] |
근속 훈장 2급~4급 | 1936년 10월 2일[22] |
근속 훈장 1급 | 1938년 3월 16일[22] |
스페인 해군 공로 십자 훈장 3급 | 1939년 6월 6일[22] |
백색 스페인 해군 공로 십자 훈장 | 1939년 8월 21일[22] |
금색 스페인 해군 공로 십자 훈장 3급 | 1939년 8월 21일[22] |
스웨덴 왕립 검 훈장 | 1941년 1월 11일[22] |
전쟁 공로 십자 훈장 (칼이 달린 2급) | 1941년 1월 20일[22] |
철십자 훈장 부장 (1939) 2급 및 1급 | 1941년 5월[22] |
철십자 기사 철십자 훈장 | 1941년 12월 27일 (사후 추서) |
공해 함대 훈장 | 1942년 4월 1일 (사후 추서) |
참조
[1]
웹사이트
Eurohypo AG
http://www.uni-proto[...]
2011-03-29
[2]
문서
Carmer Street – Carmerstraße
[3]
문서
2nd Battle Squadron of the High Seas Fleet – II. Geschwader der Hochseeflotte
[4]
문서
3rd wireless telegraphy officer – III. FT Offizier; Funktelegrafie
[5]
문서
wireless telegraphy school – FT Schule
[6]
문서
telegraphy officer – II. FT Offizier
[7]
문서
Dahlem Protection Company – Schutzkompanie Dahlem
[8]
문서
Protection Regiment of Greater Berlin – Schutz-Regiment "Groß-Berlin"
[9]
문서
Naval Command Department – Marinekommandoamt (A)
[10]
문서
Admiralty Staff – Admiralstab
[11]
문서
Fleet Department – Flottenabteilung (A II)
[12]
문서
1st Artillery Company – 1. (Artillerie) Kompanie
[13]
문서
3rd Coastal Defense Department – Küstenabwehrabteilung III – K.W.A. III
[14]
문서
Baltic Naval Station – Marinestation der Ostsee
[15]
문서
Naval High Command – Oberkommando der Marine
[16]
문서
Naval Training Department – Marineausbildungsabteilung
[17]
문서
Naval Gunnery School – Schiffsartillerie-Schule – SAS
[18]
문서
Regarding personal names: Freiherr is a former title (translated as Baron). In Germany since 1919, it forms part of family names. The feminine forms are Freifrau and Freiin.
[19]
문서
Hood carried eight 42-calibre BL 15-inch Mk I naval gun|BL 15-inch Mark I guns. These guns were mounted in the hydraulically powered Mark II twin turrets which were designated 'A', 'B', 'X' and 'Y' from front to rear.
[20]
웹사이트
Bismarck
http://www.bismarck-[...]
2011-02-04
[21]
문서
Bismarck had four 38 cm SK C/34 naval gun|38 cm SK C/34 dual gun turrets. The two forward turrets were Anton and Bruno. The aft turrets were Caesar and Dora.
[22]
서적
Rangliste der Deutschen Reichsmarine
Reichswehrministerium, Mittler & Sohn
[23]
웹사이트
Sink the Bismarck!
null
2011-04-08
[24]
서적
戦艦ビスマルク発見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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