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가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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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가라샤는 1563년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아케치 타마 또는 타마코이다. 가톨릭 세례명인 그라시아에서 유래한 '가라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78년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결혼하여,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반역자의 딸이 되었지만, 남편의 보호 아래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의 인질이 되려 하자 가신에게 죽임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은 기독교 신앙과 남편에 대한 충절을 지킨 순교로 여겨지며, 일본 역사 소설,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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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가라샤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아케치 타마 |
다른 이름 | 아케치 타마 아케치 타마코 슈린인 |
출생 | 1563년 |
출생지 | 에치젠국, 일본 |
세례 | 1587년 |
사망 | 1600년 8월 25일 |
사망지 | 오사카, 일본 |
사망 원인 | 그라시아의 요청에 따라 오가사와라 쇼사이에게 살해됨 |
안장 장소 | 소젠지 (오사카, 일본) |
안장 장소 좌표 | 34.733778 |
활동 시기 |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종교 | 기독교 (가톨릭교회) |
배우자 | 호소카와 타다오키 |
자녀 | 호소카와 타다타카 호소카와 타다아키 호소카와 타다토시 |
어머니 | 츠마키 히로코 |
아버지 | 아케치 미쓰히데 |
친척 | 호소카와 후지타카 (외삼촌) |
이름 | |
일본어 이름 | |
일본어 이름 (한자) | 明智玉 明智珠 明智玉子 明智珠子 |
로마자 표기 | Hosokawa Garasha |
기타 정보 | |
알려진 정보 | 학자 교사 순교자 |
세례 정보 | |
세례명 | 가라시아 |
세례 교회 | 가톨릭 교회 (기리시탄) |
수세일 | 1587년 |
2. 명칭
그녀는 태어날 때 아케치 타마(Akechi Tama) 또는 타마코(Tamako)라고 불렸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이름인 가라샤(Garasha)는 가톨릭 세례명인 그라시아(Gracia)에서 유래했다.[4]
에이로쿠 6년(1563년) 에치젠국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와 그의 아내 히로코 사이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둘째 딸이라는 설도 있다.[4]) 텐쇼 6년(1578년) 8월, 아버지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호소카와 후지타카(유사이)의 장남인 다다오키에게 시집갔다.[5] 텐쇼 7년(1579년)에는 장녀(오쵸), 텐쇼 8년(1580년)에는 장남(호소카와 다다타카)이 태어났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성(姓) + 세례명으로 선교사 자료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기독교인으로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라고 불렀다고 해석하는[15] 학자도 있으나, 직접적인 1차 자료는 없고, 1920년대에 교회에서 퍼진 역사 용어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자료에서는 에치고노덴 오쿠가타(越中殿奥方)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16] 남편인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도 역사 용어일 뿐이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는 나가오카 에치고노카미(長岡越中守)나 하시바 탄고지주종(羽柴丹後侍従) 등을 이름으로 사용했고, 호소카와(細川)로 개칭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인 사후)이다.[17]
명치 타마코(明智玉子)[18]가 본명이라고도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현대나 고대와 달리 통일적인 호적이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명(=호적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19](실명=이름(諱)과는 다르다). 또한 고대 이래의 실명 호칭 회피의 풍습 속에서 젊은 여성이 실명을 사용하는 장면은 극히 제한적이다.[20] 특히 ~코(子) 형태의 이름(諱)는 당시 사회 관념상 여성이 서위·임관할 때 조정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될 뿐이며(그 경우 본성과 조합된다), 출생 이름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21] 성(名字)(묘자, 우지) + 실명 = 본명이라는 이름의 틀은 근대의 산물일 뿐이며,[22], 성(苗字) + ~코(子) 식 여성 이름이 본명(=호적명)으로서 공적인 지위를 얻는 것은 메이지 4년, 출생 이름으로 일반화되는 것은 메이지 중기 이후이다.[23]
본인 서명은 "타(た)[24]" 한 글자[25] 외에, 소지종(小侍従)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카(か)"라고 서명한 것으로 보이는 한 통과, 남편에게 "가라샤(からしや)"라고 명기한 한 통이 있다. 당시 사회 관념에 비추어 보더라도, 통칭으로 세례명을 사용하거나 불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공가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부부 동성명에 따랐다고 가정하면 "나가오카 가라샤(長岡ガラシャ)"가 되므로, 어느 쪽이든 호소카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라는 명칭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26] "명치 가라샤(明智ガラシヤ)[27]" 표기가 채용되기도 한다.
3. 생애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으로 아버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사망하고 아케치 가문이 멸망하자, 타마는 남편 호소카와 다다오키에 의해 1584년까지 단고 반도(현 교토부)의 산악 지대에 유폐되었다.[28] 이 시기 타마는 기요하라 마리아 등의 시녀들의 도움을 받았다.
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재로 타마는 오사카 호소카와 저택으로 돌아왔으나, 감시를 받았다. 타마는 다카야마 우콘과 하녀 마리아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587년 봄 비밀리에 오사카 교회를 방문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금지령 이후, 타마는 하녀에게 세례를 받고 "그라시아(Gracia)"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1]
1600년(게이초 5년) 7월 16일(8월 24일), 다다오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우에스기 정벌에 출진한 사이, 이시다 미쓰나리는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했다. 가라샤는 이를 거부하고, 가신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쇼사이)에게 자신을 개착(介錯)하게 한 뒤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가라샤의 죽음은 이시다 측에 큰 영향을 주어, 제후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는 작전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년도 가라샤의 약력 다다오키의 동향 친자녀의 업적 비고 1563년 에치젠에서 출생 교토에서 출생 호소카와 교쵸케의 하루모토 사망 1578년 나가오카 다다오키와 가쓰류지 성에서 결혼 아케치 타마와 가쓰류지 성에서 결혼 1579년 장녀 쵸(長女・ちょう) 출생 아케치 미쓰히데, 단바 평정 1580년 탄고·미야즈 성으로 이주 아버지 후지타카가 탄고 일국을 받음 장남 다다타카(忠隆) 출생 1581년 교토 고마조로에(御馬揃え) 참가 1582년 아지치노에 유폐 아버지로부터 나가오카 가문의 가독을 계승 혼노지의 변 1583년 유폐 상태 시즈가타케 전투 참가 차남 오키아키(興秋) 출생 1584년 오사카로 이주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참가 1585년 키슈 정벌 참가 히데요시가 관백 취임 1586년 삼남 다다토시(忠利) 출생 텐쇼 지진 1587년 오사카의 교회를 처음 방문. 세례를 받고 가라샤라고 이름을 씀
(이혼을 생각하지만 그만둠)규슈 정벌 참가 차남 오키아키가 세례받음 바테렌 추방령 발포 1588년 차녀 타라(たら) 출생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참가 1591년 히데쓰구가 관백 취임, 히데요시는 태합(太閤)이 됨 1592년 진주성 공방전 참가 분로쿠의 역 1593년 진주성 공방전 참가 분로쿠의 역 1595년 다다오키에게 신앙을 고백 저택 안에 작은 성당을 건설 차녀 타라가 세례받음 히데쓰구 사건 1596년 장녀 오쵸(おちょう)가 세례받음 게이쵸 대지진·산펠리페호 사건 1597년 게이쵸의 역 시작·26성인의 순교 1598년 히데요시 사망·게이쵸의 역 종료 1599년 미쓰나리 저택을 습격 1600년 오사카·호소카와 저택에서 사망 세키가하라 전투 참가. 장남 다다타카를 폐적 삼남 다다토시가 후계자가 됨 (1601년) 가라샤의 장례식을 교회 장례식으로 거행
3. 1. 어린 시절과 결혼
에이로쿠 6년(1563년) 에치젠국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와 그의 아내 히로코 사이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둘째 딸이라는 설도 있다.[4]) 출생시 이름은 '''아케치 타마(Akechi Tama)''' 또는 타마코(Tamako)였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이름인 가라샤(Garasha)는 가톨릭 세례명인 그라시아(Gracia)에서 유래했다.
텐쇼 6년(1578년) 8월, 아버지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발안으로 호소카와 후지타카(유사이)의 장남인 다다오키에게 시집갔다.[5] 노부나가는 가신들 사이의 혼인을 통제하는 계획을 세웠고, 여기서 주군의 명령에 따른 혼인인 "주명혼"이 생겨났다고 생각된다.[5] 같은 해 8월, 쇼류지 성으로 시집갔다.[6]
텐쇼 7년(1579년)에는 장녀( 오쵸), 텐쇼 8년(1580년)에는 장남(호소카와 다다타카, 후의 나가오카 큐무)이 태어났다. 쇼류지 성에서 2년을 보낸 후, 같은 해 8월 남편 다다오키가 단고 12만 석을 받았기 때문에, 단고 하치만야마 성, 그 다음 미야즈 성으로 이사했다.[6]
1582년 6월, 아버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배반하고 살해함으로써, 타마는 반역자의 딸이 되었다. 다다오키는 타마와 이혼하지 않고, 그녀를 단고 반도(현 교토부)의 산악 지대에 있는 미도노(Midono) 마을로 보내 1584년까지 숨겨두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다오키에게 타마를 오사카의 호소카와 저택으로 데려오라고 요청하여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3. 2. 혼노지의 변과 유폐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이 발생했다. 그 후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버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죽고, 아케치 가문도 "역적의 일족"으로 몰려 숙청당했다.[28]
타마는 남편 호소카와 다다오키에 의해 1584년까지 단고 반도(현 교토부)의 산악 지대에 있는 미도노 마을에 유폐되었다.[28] 이 기간 동안 그녀를 지지한 것은, 결혼할 때 데려온 소지중과 호소카와 가문 친척인 기요하라 가문의 기요하라 마리아 등의 시녀들이었다.
교토탄고시 야사에정 스가와에는 호소카와 가라샤 은거지 비석("호소카와 타다오키 부인 은거지"라고 새겨져 있다)이 세워져 있다.[28]
당시 이혼하면 아내는 친가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케치 가문이 곧 멸망한 상황도 있지만, 아케치 가문의 "찻집"이 있던 아지치노로 보내진 점과 유폐 시대에 아이를 출산한 점으로 미루어, 그가 타마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29] 한편, 타마는 단바국 후나이군 미토노에 머물렀고, 다나고쿠 아지치노 유폐설은 사실상 거의 성립할 여지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3. 3. 기독교 신앙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태어난 타마(가라샤)는 16세에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결혼했다. 1582년 아버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살해하면서 타마는 반역자의 딸로 몰렸다. 다다오키는 타마와 이혼하지 않고 그녀를 교토부 미도노 마을에 숨겨두었다가, 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오사카의 호소카와 저택으로 데려왔다.[30]
타마는 하녀 기요하라 카요(세례명 마리아)와 기독교 친구인 다카야마 우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87년 봄, 타마는 비밀리에 오사카 교회를 방문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 금지령을 내린 것을 알고 세례를 결심했다. 집을 나갈 수 없었던 타마는 하녀에게 세례를 받고 "그라시아(Gracia)"라는 기독교 이름을 받았다.[31] 그라시아(ガラシャ)는 Gratia|그라티아la(은총, 신의 은혜)를 뜻하며, 로마 바티칸식 발음으로는 "그라치아"이다. 그녀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라틴어와 포르투갈어를 공부했다.
1595년, 다다오키는 도요토미 히데쓰구와의 친분 때문에 위험에 처하자 그라시아에게 자신이 죽으면 자살하라고 말했다. 그라시아가 사제들에게 묻자, 사제들은 자살이 중대한 죄라고 답했다.
기리시탄 배교령(바테렌 추방령)이 발표된 상황에서, 큐슈에서 귀국한 타다오키는 세례를 받은 것에 분노하여 배교를 강요했지만, 가라샤는 완강하게 거부했고, 마침내 타다오키도 묵인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가라샤의 개종 과정은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통해 알려졌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가라샤의 실제 이야기에 가까운 내용을 담은 라틴어 희곡 「강한 여인…다른 이름으로는, 단고 왕국의 여왕 그라치아」(Fortis mulier, seu Gratia regina regni Tangola)[41]가 제작되었다. 이 희곡은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의 성명 축일(7월 26일) 기념으로 1698년 7월 31일 빈의 예수회 교육 시설에서 음악이 곁들여진 연극 형식으로 초연되었다.[42] 극본은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믿던 예수회 교장 요한 바티스타 아돌프가 집필하고, 음악은 요한 베른하르트 슈타우트가 작곡하였다.
아돌프는 이 희곡의 요약 문서[43]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단고 왕국의 여왕 그라치아"[44]라고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집필에 있어 직접적인 근거로 코르넬리우스 하자르트 저 「교회의 역사-전세계에 퍼진 가톨릭 신앙」의 독일어 번역본[45] 제1부 제13장, 「일본 교회사-단고의 여왕의 개종과 그리스도 신앙」[46]을 명시하고 있다.
희곡에서는 그라치아(=가라샤)의 죽음이 순교로 묘사된다. 미몽하고 야만적인 군주인 남편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다 최후에는 목숨을 잃고 폭군을 개심시켰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한 교훈적인 줄거리이다. 이 희곡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3. 4. 죽음
이시다 미쓰나리가 그라시아를 인질로 잡으려 하자, 가신인 오가사와라 쇼사이가 그녀를 죽이고 저택에 불을 지른 후 할복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인질극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4]
1600년(게이초 5년) 7월 16일(8월 24일), 다다오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우에스기 정벌에 출진했다. 그는 저택을 떠날 때마다 “만약 내가 없는 사이에 아내의 명예에 위험이 생긴다면, 일본의 관습에 따라 먼저 아내를 죽이고, 모두 할복하여 아내와 함께 죽도록 하라”고 가신들에게 명령했다.[32]
이 틈을 타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사카 다마즈쿠리의 호소카와 저택에 있던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가라샤는 이를 거부했다. 다음 날, 미쓰나리가 병사들을 시켜 저택을 포위하자, 가신들은 가라샤에게 모든 상황을 전했다. 가라샤는 잠시 기도한 후 시녀들과 부인들을 불러 모아 “남편의 명령대로 나 혼자 죽고 싶다”고 말하고,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살은 기독교에서 금지되어 있었기에, 가로인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쇼사이)가 가라샤를 개착(介錯)하고, 시체가 남지 않도록 저택에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질러 자결했다. 유언시는 “흩어져야 할 때를 알았기에 세상의 꽃도 꽃이요 사람도 사람이로다.”이다.
사망 수 시간 후, 신부 니에키・솔디・오르간티노는 호소카와 저택 폐허에서 가라샤의 유골을 수습하여 사카이의 기리시탄 묘지에 매장했다. 다다오키는 가라샤의 죽음을 슬퍼하며 1601년(게이초 6년)에 오르간티노에게 교회 장례식을 의뢰하여 장례식에도 참례했고, 후에 유골을 오사카의 숭선사로 이장했다. 법호는 슈린인덴 카야 소우규쿠 다이시이다.
이시다 측은 가라샤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에 놀라 제후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는 작전을 확대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호소카와 가라샤(玉子)는 기독교인의 계율과 남편의 명령을 지켜 자결하지 않고 소사이(少斎)의 손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타 기유이치의 『세키가하라 고합센 소우시』에는 스스로 가슴을 찔렀다고 적혀 있으며, 가와무라 븐쿠(河村文庫)본에는 더 나아가 10세의 아들과 8세의 딸을 살해한 후 자결했다고 적혀 있다.[34]
4. 인물됨과 평가
호소카와 가라샤는 교만하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4] 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게 된 후에는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온화해졌다고 한다.
가라샤는 일이 있으면 갑옷을 입고 말을 타, 적과 맞서 싸우더라도 남자 못지않다고 말했다. 남편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가신을 죽이고 그 칼에 묻은 피를 자신의 소매로 닦아도 아무렇지 않게 며칠 동안이나 갈아입지 않았다. 결국 다다오키가 사과하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 밤 다다오키가 가라샤의 방에 들어와 "늦은 밤에 들어온 것은 무엇인가"라며 장난스럽게 노래하듯 말하자, 가라샤는 즉시 "등불이 꺼지고 잠자리의 별빛"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망 후 시(辭世)로 알려진 "흩어져야 할 때를 알고 세상의 꽃도 꽃이요 사람도 사람이로다 (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는 『호소카와가기』 편저자가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시즈오카현 지사 가와카쓰 헤이타가 2024년에 사직할 때 인용하여 화제가 되었다.[35][36]
가라샤의 친필 편지는 국립국회도서관(마쓰모토 문서)에 10통,[37] 에이세이문고에 4통, 도쿄 국립박물관에 1통(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보낸 편지),[38] 구마모토 현립미술관(미야케가 문서)에 1통(미야케 시게토시에게 보낸 편지), 고시쥬(小侍従)의 후손인 마쓰모토가에 1통 등 총 17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람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서체에 차이가 있으며, 서명만 가라샤의 친필이고 나머지는 서기(右筆)가 쓴 편지가 섞여 있다고 추측된다. 수신인의 대부분은 고시쥬이며, 편지 내용에서도 가라샤가 고시쥬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다. 내용도 풍부하며, 안채의 가장으로서 남편 다다오키에 대한 배려, 사용인에 대한 대우, 간사이 지방으로 보내는 선물이나 절기 준비 지시 등이 적혀 있다.
장남이자 후에 폐적된 호소카와 다다타카의 딸이 사이온지 사네하루에게 시집감으로써 고메이 천황의 생모인 쇼닌노미야 마사코와 연결되므로, 현 천황을 비롯한 현재의 일본 황실에는 가라샤의 피가 이어지고 있다.[39][40]
가라샤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기록은 아래 표와 같다.
년 | 가라샤의 약력 | 다다오키의 동향 | 친생자의 업적 | 비고 |
---|---|---|---|---|
1563년 | 에치젠에서 출생 | 교토에서 출생 | 호소카와 교쵸케의 호소카와 하루모토 사망 | |
1578년 | 나가오카 다다오키와 가쓰류지성에서 결혼 | 아케치 타마와 가쓰류지성에서 결혼 | ||
1579년 | 장녀·쵸(長女・ちょう) 출생 | 아케치 미쓰히데, 단바 평정 | ||
1580년 | 탄고·미야즈성으로 이주 | 아버지·후지타카가 탄고(丹後) 일국을 받음 | 장남·다다타카(忠隆) 출생 | |
1581년 | 교토 고마조로에(御馬揃え) 참가 | |||
1582년 | 아지치노에 유폐 | 아버지로부터 나가오카 가문의 가독을 계승 | 혼노지의 변 | |
1583년 | 유폐 상태 | 시즈가타케 전투 참가 | 차남·오키아키(興秋) 출생 | |
1584년 | 오사카로 이주 |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참가 | ||
1585년 | 기슈 정벌 참가 | 히데요시가 관백 취임 | ||
1586년 | 삼남·다다토시(忠利) 출생 | 덴쇼 지진 | ||
1587년 | 오사카의 교회를 처음 방문. 세례를 받고 가라샤라고 이름을 씀 (이혼을 생각하지만 그만둠) | 규슈 정벌 참가 | 차남·오키아키가 세례받음 | 바테렌 추방령 발포 |
1588년 | 차녀·타라(たら) 출생 | |||
1590년 | 오다와라 정벌 참가 | |||
1591년 | 히데쓰구가 관백 취임, 히데요시는 태합(太閤)이 됨 | |||
1592년 | 진주성 공방전 참가 | 분로쿠의 역 | ||
1593년 | 진주성 공방전 참가 | 분로쿠의 역 | ||
1595년 | 다다오키에게 신앙을 고백 | 저택 안에 작은 성당을 건설 | 차녀·타라가 세례받음 | 히데쓰구 사건 |
1596년 | 장녀·오쵸(おちょう)가 세례받음 | 게이초 대지진·산펠리페호 사건 | ||
1597년 | 게이쵸의 역 시작·26성인의 순교 | |||
1598년 | 히데요시 사망·게이쵸의 역 종료 | |||
1599년 | 미쓰나리 저택을 습격 | |||
1600년 | 오사카·호소카와 저택에서 사망 | 세키가하라 전투 참가. 장남·다다타카를 폐적 | 삼남·다다토시가 후계자가 됨 | |
(1601년) | 가라샤의 장례식을 교회 장례식으로 거행 | |||
5. 현대의 재조명
호소카와 가라샤는 일본 역사 소설과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1887년부터 2006년까지 40편이 넘는 무대극, 영화, TV 드라마 등에 등장했으며, 당시 역사에 대한 대중적인 글이나 강연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영문 제목: Lady Gracia: a Samurai Wife's Love, Strife and Faith)은 역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제임스 클라벨은 그의 소설 『쇼군』에서 마리코 토다라는 인물의 모델로 가라샤를 사용했다.[6] 또한 클라벨은 바스코 로드리게스의 일본인 아내(일본 이름은 냥냥)에게 가라샤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이 책은 1980년에 TV 미니시리즈 『쇼군』으로 각색되었는데, 마리코 역은 일본 여배우 시마다 요코가 연기했다. 시마다 요코는 1978년 일본 대하드라마 『황금의 날들』에서 이미 가라샤를 연기한 바 있다. 마리코의 이야기는 가라샤의 이야기와 상당히 비슷하지만, 죽음의 방식은 다르다. 『쇼군』(2024년 미니시리즈)에서는 토다 마리코 역을 사와이 안나가 연기한다.[7]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베른하르트 슈타우트는 1698년에 ''Mulier fortis cuius pretium de ultimis finibus sive Gratia Regni Tango Regina exantlatis pro Christo aerumnis clara''를 작곡했다.[8]
《호소카와 그라치아》는 3막으로 구성된 서정 오페라로, 일본어로 쓰인 최초의 작품이다. 이탈리아 선교사이자 음악가인 빈첸초 치마티가 작곡했다. 1940년에는 가사와 노래로 된 서정극 형태로 공연되었고, 이후 1960년, 1965년, 1966년, 1967년, 1989년, 2004년에 완전히 음악으로 편곡되어 공연되었다.[9]
코에이의 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삼국무쌍 2 익스트림 레전드''부터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또한 ''무장연합 3''에서도 플레이 가능하다.[10] 그녀는 일본에서 ''포켓몬 + 노부나가의 야망''으로 알려진 ''포켓몬 + 꿈결의 무사''의 엔딩 이후 스토리 모드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며, 파트너 포켓몬은 몽얌나와 고디모아젤이다.[11]
교토부 나가오카쿄시에서는 매년 11월에 나가오카쿄 갈라샤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가라샤가 쇼류지성에 시집온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며, 1992년부터 매년 11월 둘째 일요일에 가마 행렬과 혼례식 등을 거행한다.[48]
그녀는 브라우저 게임 ''도검난무''에서 이벤트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또한 ''도검난무'' 스테이지 연극 ''기전: 이쿠사유의 아다바나''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며, 스핀오프 비디오 게임 ''도검난무 무쌍''에도 등장한다.
'''드라마/영화'''
연도 | 제목 | 방송사/제작사 | 배우 |
---|---|---|---|
1960년 | 성녀상 | TBS | 카가와 쿄코 |
1960년 | 적은 혼노지에 있다 | 쇼치쿠 | 키시 케이코 |
1964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 | TV 아사히 | 무라마츠 에이코 |
1970년 | 오사카 성의 여인 | 간사이 TV | 야치구사 카오루 |
1973년 | 나라 뺏기 이야기 | NHK | 하야시 히로코 |
1978년 | 황금의 날들 | NHK | 시마다 요코 |
1981년 | 여자 태합기 | NHK | 오카 마유미 |
1981년 | 세키가하라 | TBS | 쿠리하라 코마키 |
1981년 | 마계전생 | 도에이 | 카나 아키코 |
1983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 | NHK | 마루오 리에 |
1988년 | 여인들의 백만 석 | NTV | 이케우치 준코 |
1988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 | TBS | 카노 미유키 |
1992년 | 노부나가 KING OF ZIPANGU | NHK | 이마무라 케이코 |
1994년 | 오다 노부나가 | TV 도쿄 | 토다 나호 |
1996년 | 히데요시 | NHK | 타무라 에리코 |
2000년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 NHK | 스즈키 쿄카 |
2002년 | 토시이에와 마츠~카가 백만석 이야기~ | NHK | 나카니시 카나코 |
2005년 | 나라 뺏기 이야기 | TV 도쿄 | 이시카와 리카 |
2006년 | 공명의 갈림길 | NHK | 하세가와 쿄코 |
2007년 | 아케치 미쓰히데~신에게 사랑받지 못한 남자~ | 후지 TV | 사사키 마오 |
2011년 | 고우 ~공주들의 전국~ | NHK | 미무라 리에[49] |
2013년 | 리큐에게 묻다 | 도에이 | 쿠로타니 유카 |
2016년 | 사나다마루 | NHK | 하시모토 마나미 |
2020년-2022년 | 무대 도검난무 | 나나미 히로키 | |
2020년 | 기린이 온다 | NHK | 오카베 아카리/오카베 미카리→시미즈 코토네→다케노야 사키→아시다 마나 |
2020년 | 미쓰히데의 스마트폰 | NHK | 유모토 유즈→마츠자와 카렌 |
2024년 | SHOGUN 장군 | FX 제작 디즈니+ 배포 | 사와이 안나 |
6. 논란과 이설
호소카와 가라샤(細川ガラシャ)라는 이름은 세례명 '그라시아(Gracia)'에서 유래되었지만, 이 명칭에 대한 논란과 이설이 존재한다.
- 명칭 논란:
- 일부 학자들은 가라샤가 기독교인으로서 "호소카와 가라샤"로 불렸다고 주장하지만,[15] 직접적인 1차 자료는 없고, 1920년대 교회에서 퍼진 역사 용어일 가능성이 제기된다.[16]
- 당시 자료에는 "에치고노덴 오쿠가타(越中殿奥方)"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16] 남편인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도 "호소카와"라는 성씨를 사용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인 사후)이다.[17]
- 가라샤 본인의 서명은 "타(た)[24]", "카(か)", "가라샤(からしや)" 등으로 나타나며,[25] 당시 사회 관념상 세례명을 통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호소카와 가라샤"라는 명칭은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26]
- "아케치 타마(明智玉)" 또는 타마코(玉子)가 본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18] 당시 일본에는 통일된 호적이 없었기 때문에 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19]
- "~코(子)" 형태의 이름은 당시 여성이 조정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될 뿐, 출생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21] "성(名字) + ~코(子)" 식 여성 이름이 본명으로 공적인 지위를 얻은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이다.[23]
- 죽음에 대한 이설:
- 일반적으로 가라샤는 기독교 계율과 남편의 명령 사이에서 자결하지 않고 가신 오가사와라 쇼사이(小笠原少斎)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했다고 알려져 있다.
- 그러나 오타 규이치(太田牛一)의 『세키가하라 고합센 소우시(関ヶ原御合戦双紙)』에는 가라샤가 스스로 가슴을 찔렀다고 기록되어 있고,[34] 다른 판본에는 10세 아들과 8세 딸을 살해한 후 자결했다고 적혀 있다.[34]
- 『겐케이쿄키(言経卿記)』에도 가라샤의 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기록되어 있다.[34]
- 호소카와 가문의 계보에는 가라샤가 낳은 자녀 중 당시 13세였던 타라(多羅) 외에 다른 남매는 인정되지 않아, 아이들의 희생에 대한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34]
7. 가계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본명은 '''아케치 타마'''(Akechi Tama) 또는 타마코(Tamako)였다. 세례명은 그라시아(Gracia)이며, 역사적으로 알려진 가라샤(Garasha)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16세에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결혼하여 5명 또는 6명의 자녀를 두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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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호소카와 가라샤'라는 이름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여성이 남편의 성을 쓰는 것이 정착된 메이지 시대에 이르름과 동시에 일본 기독교인들이 가라샤의 종교인으로서의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례명을 부각하여 홍보하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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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오다 노부타다의 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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