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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모토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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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시 모토지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후쿠오카 번사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청일 전쟁, 미서 전쟁, 의화단 운동에 참전했다. 러일 전쟁 당시 스웨덴을 거점으로 러시아 혁명 지원 공작을 펼쳐, 레닌 등과 접촉하며 반제국 조직을 지원하고 사보타주를 전개했다. 이후 조선에서 헌병 사령관과 경무 총장을 겸임하며 무단 통치를 추진했으며, 대만 총독으로 재임하며 인프라 및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조선 통치와 관련된 부정적 평가와 러시아 혁명 지원 공작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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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모토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일본 장군 아카시 모토지로
아카시 모토지로
작위남작
존칭정3위
이름아카시 모토지로
원어 이름明石 元二郎
출생1864년 9월 1일
출생지일본 지쿠젠국 후쿠오카
사망1919년 10월 26일
사망지일본 후쿠오카
별명없음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89년–1919년
최종 계급대장
참전청일 전쟁
러일 전쟁
관직
직책제7대 대만 총독
임기 시작1918년 6월 6일
임기 종료1919년 10월 24일
이전안도 데이비
이후덴 겐지로
직책 2제3대 경무총장
임기 21910년 7월 1일 - 1914년 4월 17일
이전 2오카 기시치로
이후 2다치바나 고이치로
직책 3제11대 제6사단장
임기 31915년 10월 4일 - 1918년 6월 6일
이전 3우메자와 미치하루
이후 3고이케 야스유키
기타
묘소삼판교 묘지 (현재의 린썬 공원)

2. 생애

1864년 후쿠오카번에서 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8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구 육사 6기)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889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5기)를 졸업하였다. 청일 전쟁 당시 근위사단 소속으로 가와카미 소로쿠 장군의 참모로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랴오둥반도, 중국 북부, 타이완, 안남 등지를 여행했고,[1]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는 군사 참관인으로 필리핀에 파견되었으며,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톈진에 주둔했다.[1] 독일 유학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장, 미국-스페인 전쟁마닐라 관전 무관 등을 역임하였다.[1][15]

1901년 프랑스 주재 무관을 거쳐 1902년 러시아 제국 공사관 소속 육군 무관으로 전임되었다. 영일 동맹에 기초한 정보 협력을 통해 영국 비밀 정보부 요원 시드니 레일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1903년 아카시의 요청으로 레일리는 뤼순으로 가서 러시아군 정보와 뤼순 요새 도면을 일본에 넘겨주었다.[2]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후, 중립국 스웨덴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참모본부는 아카시에게 당시 일본 제국 예산 2억 3,000만 엔의 250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현재 가치 400억 엔 이상)을 지급하여 러시아 혁명 지원 공작을 획책했다.[62] 아카시는 유럽 전역의 반제국 조직을 지원하며 정보 수집, 파업, 태업, 무력 봉기 등 러시아 내분 공작을 벌였다.[17] 레닌, 표트르 크로폿킨 등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핀란드 혁명당 등 다양한 저항 운동 조직과 연락하여 자금 및 총기를 지원하고 데모, 파업, 철도 파괴 공작 등을 전개했다.[17]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 암살, 피의 일요일 사건, 포템킨 반란 등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4] 이나바 치하루등 역사학자들은 오흐라나의 감시, 레닌과의 회담 및 레닌의 감사 발언 사실 확인 불가, 아카시의 직접 관여 근거 희박 등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20][21][22] 이토 히로부미는 "아카시 혼자 일본군 10개 사단의 일을 했다"고 평가했고,[19]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아카시 모토지로 한 명으로 만주의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고 평가했다는 문헌이 존재한다.[19]

1905년 말 일본으로 귀환하여 재혼 후, 소장으로 조선 주둔 지상군에 입대하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함께 조선에 남아 헌병을 조직하였고, 49세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3도창의군의 허위를 심문했다.[5] 아카시는 흑룡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의 정치적 목표에 공감했지만, 회원 명단에는 이름이 없어 실제 회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 8월 1일, 한국에서의 공로로 한국 식민지화 훈장을 받았다.[5]

조선총독부 경무국 총감 시절의 아카시


1918년 대장으로 진급되었고 데라우치 총리에 의하여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화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6] 타이완의 기본적 시설과 경제를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대전 계획, 타이완 전력 공사 설립, 일월담 수력발전소 계획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카시는 진흙물 강 근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콘크리트 파이프를 설치하고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큰 댐을 건설하였다.[6] 아카시가 타이완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총 26000km에 달하는 "가난 관개 시스템" 건설이었다. 이는 당시 대만 정부의 1년 예산을 넘는 비용이었다. 일본 국회는 1918년 2천 6백만 엔의 추가 예산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864년 후쿠오카번에서 번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8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구 육사 6기)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889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5기)를 졸업하였다.

청일 전쟁 당시 근위사단 소속으로 가와카미 소로쿠 장군의 참모로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랴오둥반도, 중국 북부, 타이완, 안남 등지를 여행했다.[1]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는 군사 참관인으로 필리핀에 파견되었고,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중국 북부 톈진에 주둔했다.[1]

독일 유학,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장, 미국-스페인 전쟁마닐라 관전 무관 등을 역임하였다.[1][15]

2. 2. 러일 전쟁 참전

1901년 프랑스 주재 무관을 거쳐 1902년 러시아 제국 공사관 소속 육군 무관으로 전임하였다. 영일 동맹에 기초한 정보 협력을 통해 영국 비밀 정보부 요원 시드니 레일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1903년 아카시의 요청으로 레일리는 뤼순으로 가서 러시아군 정보와 뤼순 요새 도면을 일본에 넘겨주었다.[2]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후, 중립국 스웨덴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참모본부는 아카시에게 당시 일본 제국 예산 2억 3,000만 엔의 250분의 1에 해당하는 1000000JPY(현재 가치 400억 엔 이상)을 지급하여 러시아 혁명 지원 공작을 획책했다.[62] 아카시는 주로 유럽 전역의 반제국 조직을 지원하며 정보 수집, 파업, 태업, 무력 봉기 등 러시아 내분 공작을 벌였다.[17] 레닌, 표트르 크로폿킨 등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핀란드 혁명당 등 다양한 저항 운동 조직과 연락하여 자금 및 총기를 지원하고 데모, 파업, 철도 파괴 공작 등을 전개했다.[17]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 암살, 피의 일요일 사건, 포템킨 반란 등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4] 이나바 치하루등 역사학자들은 오흐라나의 감시, 레닌과의 회담 및 레닌의 감사 발언 사실 확인 불가, 아카시의 직접 관여 근거 희박 등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20][21][22]

이토 히로부미는 "아카시 혼자 일본군 10개 사단의 일을 했다"고 평가했다.[19]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아카시 모토지로 한 명으로 만주의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고 평가했다는 문헌이 존재한다.[19]

2. 3. 한국에서의 활동

1905년 말 일본으로 귀환하여 재혼 후, 소장으로 조선 주둔 지상군에 입대하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함께 조선에 남아 헌병을 조직하였고, 49세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3도창의군의 허위를 심문했다.[5]

아카시는 흑룡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의 정치적 목표에 공감했지만, 회원 명단에는 이름이 없어 실제 회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 8월 1일, 한국에서의 공로로 한국 식민지화 훈장을 받았다.[5]

2. 4. 타이완 총독 시절

1918년 아카시는 대장으로 진급되었고 데라우치 총리에 의하여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화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6]

아카시는 타이완의 기본적 시설과 경제를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대전 계획, 타이완 전력 공사 설립, 일월담 수력발전소 계획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카시는 진흙물 강 근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콘크리트 파이프를 설치하고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큰 댐을 건설하였다.[6]

아카시가 타이완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총 26000km에 달하는 "가난 관개 시스템" 건설이었다. 이는 당시 대만 정부의 1년 예산을 넘는 비용이었다. 일본 국회는 1918년 2천 6백만 엔의 추가 예산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했다.[6]

3. 사후

타이베이에 있던 아카시의 원래 묘비


아카시 모토지로는 총독직을 맡은 지 1년 후, 자신의 고향 후쿠오카시를 방문하던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유언에서 "국민적 수호자와 타이완 국민을 위한 수호적 영혼으로 섬기는 데" 타이완에 안장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였다.[6][7]

그는 다이호쿠주 묘지에 매장되어 타이완에 묻힌 유일한 일본 총독이 되었다. 타이완인들은 그의 가족을 위한 모금을 후원하고, 기념비 건립을 위해 오늘날의 300만달러를 기증하였다. 그의 유해는 1999년 신타이베이시 싼즈구의 푸윈산 기독교 묘지에 재안치되었다.[6][7]

아카시의 죽음은 수많은 음모론을 낳았다. "아카시 대령"의 화려한 활약상(실제와 상상 모두)은 일본에서 수많은 소설, 만화, 영화 및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었으며, 그는 "일본의 제임스 본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4. 평가

아카시 모토지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러일 전쟁 시기 정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만 총독 재임 시절에는 타이완의 인프라 확충과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으로 재임하면서 13도창의군의 허위를 심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5]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한국인의 관점에서 비판받는다.

레닌과의 관계 및 러시아 혁명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란은 아카시 모토지로의 활동 중 가장 주목받는 부분 중 하나이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은 아카시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러시아 내부의 혼란을 야기하고 혁명 운동을 지원하도록 했다. 아카시는 유럽 전역의 반제국 조직에 자금을 지원하고, 정보 수집, 파업, 태업, 무력 봉기 등 다양한 공작 활동을 펼쳤다.

4. 1. 긍정적 평가

러일 전쟁 시기 정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만 총독 재임 시절에는 타이완의 인프라 확충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대전 계획, 대만 전력 회사 창립, 일월담 수력 발전소 건설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아카시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총 16000km에 달하는 "가-난 관개 시스템" 건설이다. 이는 당시 대만 정부 1년 예산을 초과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일본 제국 의회는 1918년에 2,600만 엔(오늘날 약 20억달러)의 추가 예산을 특별법으로 통과시켜야 했다.[6]

4. 2. 부정적 평가



아카시 모토지로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으로 재임하면서 13도창의군의 허위를 심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한국인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5]

4. 3. 논란

레닌과의 관계 및 러시아 혁명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란은 아카시 모토지로의 활동 중 가장 주목받는 부분 중 하나이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은 아카시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러시아 내부의 혼란을 야기하고 혁명 운동을 지원하도록 했다.

니시베 스스무는 아카시가 사용한 공작금이 지금 가치로 수백억 엔, 심지어 1조 엔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언급하며, 이 자금이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부추기는 데 사용되었다고 평가했다.[62]

아카시는 유럽 전역의 반제국 조직에 자금을 지원하고, 정보 수집, 파업, 태업, 무력 봉기 등 다양한 공작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은 러시아 국내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반전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아카시는 레닌, 가폰 신부, 표트르 크로폿킨 등 러시아 혁명에 관련된 주요 인사들과 접촉하며 제정 러시아를 몰락시키는 데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 발발 전, 아카시는 레닌을 지원하기 위해 100만 엔(당시 엄청난 액수)의 재량 예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1]

야마가타 아리토모메이지 천황에게 아카시 대령이 "만주에 있는 10개 사단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그의 공작 활동은 일본의 승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았다.

5. 가족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아카시 스케쿠로후쿠오카 번사
아내쿠니코오리 야스무네의 차녀, 언니의 남편은 츠키나리 이사오
아내노부쿠로다 하리마의 딸, 조카(언니의 아들)는 남작 쿠로다 카즈요시
장남아카시 모토나가남작, 아내 와코의 외할아버지는 나이토 요리나오, 형은 나이토 요리히로
손자아카시 모토츠구모토나가의 아들


6. 저서


  • 《낙화유수 : 아카시 모토지로 대장 유고집》(落花流水:明石元二郎大将遺稿, 육군참모본부에 대한 복명서 국립국회도서관 소장)[1]
  • : 히로세 노부테루 감수·편·해제 『근대 외교 회고록 제2권』(유마니 서방, 근대 미간 사료 총서 5, 2000년)에 수록[1]
  • 데라우치 마사타케 앞으로의 아카시 모토지로 서한 부록 『낙화유수』 원고』 "상우 북클릿" (부용 서방 출판, 2014년). 상우 클럽 사료 조사실 편[1]

참조

[1] 서적 Busch
[2] 서적 Ace of Spies
[3] 서적 Reilly, Ace of Spies
[4] 서적 Busch
[5] 웹사이트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 2022-07-04
[6] 서적 Becoming Japanese
[7] 뉴스 Taiwan in Time: The elite Japanese cemetery that became a slum https://www.taipeiti[...] 2024-10-20
[8] 간행물 筑紫史談 筑紫史談会 1918
[9] 서적 陸軍大将略歴〔大正期〕:明石元二郎 2013
[10]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11] 웹사이트 No.380 企画展 「武士の履歴書」(平成23年2月15日 - 4月10日) http://museum.city.f[...] 福岡市博物館 2022-03-21
[12] 서적 ずんだれ士官は往く 2005
[13] 서적 明石元二郎:日露戦争の功労者か探偵政治の悪魔か 2013
[14] 간행물 官報 1886-12-27
[15]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16]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17]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18]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19] 서적 歴代陸軍大将全覧(大正篇) 中公新書ラクレ
[20] 웹사이트 大国ロシアを震撼させた陰の将軍 http://homepage3.nif[...] 1991
[21] 서적 明石工作 謀略の日露戦争 丸善ライブラリー 1995
[22] 웹사이트 明治・大正・昭和30の「真実」 http://www.bunshun.c[...]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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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웹사이트 日露戦争で暗躍した「もう一人のゾルゲ」 http://www.shinchosh[...] 新潮社 2005
[26] 서적 もはや、これまで: 経綸酔狂問答 PHP研究所 2013
[27]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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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明石元二郎 https://jahis.law.na[...] 19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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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간행물 官報 1896-04-21
[3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03-12
[3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4-02-20
[3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7-12-11
[3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2-12-29
[4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5-10-21
[4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8-08-01
[4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9-10-27
[4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2-29
[4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12-16
[45] 간행물 辞令 官報 1896-05-01
[46] 웹사이트 中野文庫 - 旧・金鵄勲章受章者一覧 https://web.archive.[...]
[47] 간행물 辞令 官報 1909-07-06
[4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9-05-24
[49] 간행물 辞令 官報 1913-04-09
[5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5-11-04
[5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7-24
[52] 간행물 辞令 官報 1916-12-13
[5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2-04-10
[5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0-04-23
[55]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56] 서적 歴代陸軍大将全覧(大正篇) 中公新書ラクレ
[57]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58] 서적 日本はなぜ日露戦争に勝てたのか 中経出版
[59] 웹사이트 第13回全国藩校サミット 福岡大会 修猷山脈 https://www.shuyukan[...]
[60] 서적 明石元二郎 上巻 原書房 1968
[61] 뉴스 古寧頭戦役60周年に日本の軍事顧問団関係者の家族らが台湾を訪問 http://www.taiwanemb[...] 台北駐日経済文化代表処 2009-10-27
[62] 서적 もはや、これまで: 経綸酔狂問答 PHP研究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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