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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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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는 1033년 또는 1034년에 태어나 1109년에 사망한 중세 시대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베크 수도원장이자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신학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주요 저서로는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 《왜 신은 사람이 되었는가》 등이 있으며, 특히 《프로슬로기온》에서 제시한 신의 존재 증명은 존재론적 논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셀무스의 사상은 중세 이후 철학,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술은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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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기본 정보
안셀무스 인장
안셀무스의 인장
존칭 접두사
이름안셀무스
직함캔터베리 대주교
교회학자
출생 이름안셀메 다오스타
다른 이름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로마자 표기Anselmus Cantuariensis
프랑스어Anselme d'Aoste (안셀메 다오스트)
Anselme du Bec (안셀메 뒤 벡)
이탈리아어Anselmo d'Aosta (안셀모 다오스타)
재임 시작1093년
재임 종료1109년 4월 21일
선임자랑프랑
후임자랄프 데스퀴르
서품해당 없음
축성1093년 12월 4일
직업수도사, 우선, 대수도원장, 대주교
다른 직책벡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출생일약 1033년
출생지아오스타, 부르군트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109년 4월 21일
사망지캔터베리, 잉글랜드 왕국
매장지캔터베리 대성당
부모군돌프
에르멘베르게
기념일4월 21일
숭배 대상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
성인 칭호주교, 신앙 고백자, 교회학자
("Doctor Magnificus")
시복일해당 없음
시복 장소해당 없음
시복 결정자해당 없음
시성일1494년 10월 4일
시성 장소로마, 교황령
시성 결정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
상징그의 주교관, 팔리움, 그리고 지팡이
그의 책
교회의 영적 독립성을 나타내는 배
명예 접미사OSB
철학 정보
지역서양 철학
* 영국 철학
* 이탈리아 철학
시대중세 철학
주요 저서프로슬로기온
쿠르 데우스 호모
학파스콜라 철학
신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주요 관심사형이상학, 신학
영향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에리우게나, 랑프랑
영향 받은 인물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오컴, 브래드워딘, 그로스테스테
주요 사상정도 논증, 존재론적 논증, 속죄 만족설

2. 생애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는 1033년 혹은 1034년에 신성로마제국 부르군트 왕국의 아오스타(현재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곤돌포(Gondulfoit)였고, 어머니는 에르멘베르가(Ermenbergait)였다.

안셀무스의 일생은 베크 수도원에서 신학자로 활동하던 시기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재임하며 정치·종교적 갈등 속에서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헌신한 시기로 나뉜다.

베카 디 노나는 아오스타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안셀무스가 어린 시절에 신비로운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지는 장소이다.


안셀무스는 어렸을 때 고향 근처 베카 디 노나 정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기적적인 환상을 보았다고 성인전에 기록되어 있다.

안셀무스는 베크 수도원 시절,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믿는다'는 태도로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움, 진리론 등을 저술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시절에는 쿠르 데우스 호모(왜 신은 사람이 되었는가)를 저술했다.

산트안셀모는 로마에 위치해 있으며, 베네딕토 연합회의 수도원장(Abbot Primate)이 있다.


안셀무스는 1720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으며, doctor magnificusla ("위대한 박사") 또는 doctor Marianusla ("마리아 박사")로 알려져 있다.

2. 1. 초기 생애 (1033/34-1059)

1033년 혹은 1034년에 신성로마제국 부르군트 왕국의 아오스타(현재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서 귀족 가문인 아버지 곤돌포(Gondulfoit)와 어머니 에르멘베르가(Ermenbergait)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군둘프[2] 또는 군둘프[3] 또는 곤돌프[4]는 롬바르드족 귀족이었으며,[5] 어머니 에르멘베르제[4]는 평화로운 콘라트의 손녀였을 가능성이 크다.[6]



아오스타,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 거리의 성 안셀모 기념비


안셀무스의 아버지는 때때로 거칠고 폭력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지만[8] 당시 기록은 그를 단순히 관대하거나 재산을 부주의하게 사용한 것으로 묘사한다.[9] 한편, 안셀무스의 어머니 에르멘베르제는 인내심이 강하고 독실한 종교인이었으며,[8] 가족 재산을 신중하게 관리하여 남편의 단점을 보완했다.[9]

안셀무스는 15세 때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해 원장이 거절했다.[10] 그가 앓았던 병은 그의 실망감에 대한 심인성 효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8] 회복 후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한동안 걱정 없는 삶을 살았다.[8]

어머니가 아마도 여동생 리체라를 낳다가 돌아가신 후,[11] 안셀무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전 생활 방식을 후회했지만, 아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새로운 신앙을 고백했다.[12] 군둘프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12] 23세의 안셀무스는[13] 하인 한 명을 데리고[8] 집을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3년 동안 부르군디 왕국과 프랑스 왕국을 방랑했다.[10]

2. 2. 베크 수도원 시대 (1059-1093)

1059년, 안셀무스는 노르망디의 르 벡 수도원에 들어가 랑프랑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1] 1063년, 랑프랑이 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자 안셀무스는 베크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다.[1] 1078년에는 베크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15년간 수도원을 이끌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신학 교육 기관으로 발전시켰다.[1] 이 시기에 『모놀로기온』 (1076년), 『프로슬로기온』 (1077-78년), 『진리에 대하여』, 『선택의 자유에 대하여』, 『악마의 타락에 대하여』 등 주요 저서를 집필했다.[1]

2. 3. 캔터베리 대주교 시대 (1093-1109)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벡 수도원은 영국 해협 건너편에 광대한 토지를 기증받았다. 안셀무스는 수도원 재산을 관리하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를 알현하며, 1070년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랑프랑을 방문하기 위해 가끔 잉글랜드를 방문했다. 그는 윌리엄 1세에게 존경받았고, 캔터베리에서 그가 보여준 좋은 인상은 그를 랑프랑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1089년 랑프랑이 사망하자, 윌리엄 2세는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고 교구의 토지와 수입을 차지했다. 안셀무스는 왕에게 반대하여 임명되는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잉글랜드행을 피했다. 1092년, 체스터 백작 휴의 요청으로 성 베르부르 수도원 설립에 대한 조언을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윌리엄 2세는 크리스마스에 안셀무스나 다른 누구도 살아있는 동안 캔터베리에 앉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1093년 3월, 앨버스턴에서 심각한 병에 걸린 그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안셀무스에게 고해를 듣고 종부성사를 집행하게 했다. 그는 포로 석방, 부채 탕감, 법에 따른 통치를 약속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093년 3월 6일,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지명했고, 성직자들은 주교 지팡이를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며 ''테 데움''과 함께 인근 교회로 옮겼다. 안셀무스는 나이와 건강 악화를 이유로 거절하려 했고, 벡의 수도사들도 반대했다. 더럼의 주교 윌리엄과 레스터 백작 로버트가 협상했고, 8월 24일, 안셀무스는 그레고리오 개혁에 따라 왕이 압수한 교회 토지 반환, 영적 조언 수용,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 거부, 우르바노 2세 지지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윌리엄 2세는 첫 번째 조건에만 동의했고, 며칠 후 약속을 어겼다. 여론 압력으로 캔터베리 토지를 부분적으로 반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안셀무스는 노르망디에서의 의무를 면제받고,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1093년 9월 25일 캔터베리 대성당에 착좌했다. 같은 날, 윌리엄 2세는 교구 토지를 돌려주었다.

8세기 중반부터 관구 대주교는 교황이 보낸 양모 팔리움 없이는 서품될 수 없었다. 안셀무스는 로마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윌리엄은 허락하지 않았다. 서임권 투쟁 속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는 서로를 교황 폐위권으로 폐위시켰고, 하인리히는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필리프 1세는 우르바노 2세를 인정했지만, 기베르트는 1084년 이후 로마를 점령했다. 윌리엄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고, 잉글랜드 신하가 교황을 인정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팔리움 없이 안셀무스를 대주교로 서품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안셀무스는 관리, 신중함, 적절한 가르침, 기도, 묵상 등 수도원적 이상을 유지했다. 그는 개혁과 캔터베리의 이익을 옹호했다. 그는 개혁 지원을 위해 왕실을 압박했고, 왕실 특권에 대한 반대는 두 번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역사가들은 안셀무스를 교황청과 뜻을 같이하는 인물로, 그의 재임 기간을 서임권 투쟁의 잉글랜드 무대로 본다. 그는 캔터베리를 해방시키고, 요크와 웨일스 주교들의 복종에 대한 교황 승인을 받고, 아일랜드 주교들에 대한 권한을 얻었다. 그러나 캔터베리-요크 분쟁이 해결되기 전 사망했고, 교황 호노리우스 2세는 요크의 손을 들어주었다.



안셀무스 주교 재임 기간, 캔터베리 대성당은 크라이스트 처치 수도원장 에르눌프(1096–1107)와 콘라드(1108–1126)에 의해 확장되었다. 동쪽 끝이 철거되고, 지하 묘실 위에 확장된 성가대석이 배치되어 대성당 길이가 두 배로 늘어났다. 새로운 성가대석은 자체 익랑과 세 개의 측면 예배당으로 열리는 반원형 주랑을 갖춘 독립 교회 형태였다.

안셀무스의 비전은 자체 권위를 가진 가톨릭 교회였으며, 이는 왕의 통치를 바라는 윌리엄 2세와 충돌했다. 첫 갈등은 서임 달에 발생했다. 윌리엄 2세는 로베르 2세로부터 노르망디를 빼앗을 준비를 했고 자금이 필요했다. 안셀무스는 500GBP를 제공했지만, 윌리엄은 1000GBP를 요구했다. 안셀무스는 거절하고, 공석을 채우고, 주교들의 자유로운 공의회 참석, 근친상간적 결혼 반대 교회법 집행을 왕에게 압박했다. 그러다 입을 다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셀무스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답했고, "주군의 호의를 말이나 당나귀처럼 사는 것을 경멸한다"고 말했다. 왕은 안셀무스의 축복은 필요 없다고 답했다. "나는 그를 미워하며, 앞으로도 더욱 미워할 것이다." 안셀무스는 캔터베리로 물러나 ''인간이 되신 하느님'' 작업을 시작했다.



윌리엄이 돌아오자 안셀무스는 팔리움을 얻기 위해 우르바노 2세에게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095년 2월 25일, 로킹엄에서 회의가 열렸다. 다음 날, 윌리엄은 주교들에게 안셀무스를 대주교로 대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주교들은 왕 편을 들었고, 윌리엄 드 생칼레는 안셀무스 폐위와 추방을 조언했다. 귀족들로 인해 회의는 교착되었고 연기되었다. 윌리엄은 윌리엄 웨어레와스트와 제라르를 이탈리아로 보내, 우르바노에게 팔리움을 가진 교황 사절을 보내도록 설득했다. 알바노 주교 발터가 선택되었고, 더럼 주교와 비밀 협상했다. 왕은 사절을 받아들이는 권리 인정, 성직자들의 교황 서신 수신 금지 대가로 우르바노 지지에 동의했다. 발터는 윌리엄이 우르바노를 인정하자 주교 폐위를 거부했다. 윌리엄은 팔리움을 다른 이에게 팔려 했지만 실패했고, 안셀무스에게 대가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윌리엄은 직접 수여하려 했지만, 안셀무스는 거절했다. 결국, 팔리움은 캔터베리 제단에 놓였고, 안셀무스는 1095년 6월 10일에 받았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이 선포되었다. 안셀무스는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지만, 수도원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답했다. 서던은 "중요한 선택은 천상의 예루살렘과 파괴의 비전인 지상의 예루살렘 사이였다"고 요약했다. 1096년 12월, 더럼 주교가 병에 걸리자 안셀무스는 임종을 위로했다. 2년 동안 윌리엄은 안셀무스의 개혁, 특히 공의회 소집 권리에 반대했지만, 공개 분쟁은 없었다. 1094년, 웨일스인들이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고, 윌리엄의 1095년 침략은 실패했다. 1097년 포위스와 귀네드 공격도 실패했고, 국경 요새를 건설해야 했다. 그는 안셀무스에게 충분한 기사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벌금을 부과하려 했다. 윌리엄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안셀무스는 로마로 가 교황 조언을 구하려 했다. 윌리엄은 허가를 거부했다. 협상은 "추방 아니면 복종"으로 끝났다. 떠나면 캔터베리를 점령하고, 머물면 벌금과 교황에게 호소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했다.

2. 3. 1. 윌리엄 2세와의 갈등 (1093-1100)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벡 수도원은 잉글랜드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안셀무스는 때때로 이곳을 방문했다. 그의 온화한 성격과 신앙심 덕분에, 안셀무스는 잉글랜드에서 존경받았고,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랑프랑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벡 수도원의 십자가. 벡 수도원과 캔터베리 대성당의 연결을 기념한다. 랑프랑, 안셀무스, 그리고 테오발드는 모두 잉글랜드에서 수석 주교(primates)를 역임하기 전에 벡에서 수도원장이었다.


1089년 랑프랑 사후, 윌리엄 2세는 대주교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주교좌의 토지와 재산을 압수했다. 1092년, 체스터 백작 휴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를 방문한 안셀무스는, 윌리엄 2세에 의해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다.

1093년, 병에 걸린 윌리엄 2세는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지명했다.

19세기 잉글랜드 주교들이 안셀무스를 대성당으로 끌고 가는 모습


안셀무스는 갈등 끝에 주교좌를 수락하고, 1093년 12월 4일 주교 서임을 받았다. 그는 대주교직을 맡는 조건으로 다음 사항을 윌리엄 2세에게 요구했다.

  • 몰수한 대주교 관구 재산 반환
  • 대주교의 종교적 권고 수용
  • 대립 교황클레멘스 3세를 부인하고, 우르바노 2세를 교황으로 인정


윌리엄 2세는 이 약속을 했지만, 첫 번째 사항만 부분적으로 인정되었고, 세 번째 사항은 안셀무스와 윌리엄 2세를 갈등 관계로 만들었다.

윌리엄 2세는 병상에서 회복된 후, 안셀무스에게 대주교좌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재산 증여를 요구했다. 안셀무스는 이를 성직 매매로 보고 거절했고, 분노한 윌리엄 2세는 복수했다. 교회의 규칙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는 팔리움을 교황에게서 직접 받아야 했다. 안셀무스는 팔리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갈 것을 주장했지만, 윌리엄 2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095년, 윌리엄 2세는 로마에 몰래 사절을 보내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인정하고 팔리움을 가진 교황 특사를 요청했다. 윌리엄 2세는 직접 팔리움을 수여하려 했지만, 안셀무스는 속세 왕권의 교회 내 개입을 거부하며 국왕에게서 받는 것을 거부했다.

1097년 10월, 안셀무스는 윌리엄 2세의 허락 없이 로마로 갔다. 분노한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의 귀환을 금지하고 대주교 관구 재산을 즉시 압수하여 자신의 죽음까지 유지했다. 로마에서 안셀무스는 우르바노 2세의 환영을 받았고, 1098년 바리 공의회에서 정교회 대표들에 맞서 가톨릭 교리(필리오케 문제 참조)를 변호했다.

2. 3. 2. 헨리 1세와의 갈등 및 화해 (1100-1107)

1100년, 윌리엄 2세가 사냥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형 로베르가 부재한 틈을 타 왕위를 계승한 헨리 1세는 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안셀무스를 즉시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11] 그러나 헨리 1세 역시 선왕과 마찬가지로 서임권을 요구했고, 안셀무스는 이를 거부하며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11]

헨리 1세는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여러 차례 서임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부했다.[11] 이 기간 동안 안셀무스는 1103년 4월부터 1106년 8월까지 추방 상태에 있었다.[11]

마침내 1107년, 웨스트민스터 교회 회의에서 헨리 1세가 서임권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안셀무스와 헨리 1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11] 이 웨스트민스터 협정은 1122년 보름스 협약의 모델이 되어, 오랜 서임권 투쟁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11]

2. 3. 3. 말년 (1107-1109)

안셀무스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캔터베리 대교구 대주교 직무에 전념하며 교구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사망했다. 1494년 (혹은 존 모턴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1497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0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7][8][9][10]

3. 신학 및 철학 사상

안셀무스는 초기 스콜라 철학자로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강조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는 신앙을 전제하고 이성을 추구한 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스콜라적으로 계승하였다고 평가받는다.[13]

캔터베리 대성당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


안셀무스는 1097년 10월에 캔터베리를 떠났고, 윌리엄 왕은 즉시 그의 주교직 수입을 압수했다. 안셀무스는 리옹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사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성령의 발현에 대한 서방 교리를 변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098년 4월 로마에 도착한 안셀무스는 카푸아 포위전 동안 교황 곁에 머물렀다. 로제르 백작은 안셀무스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슬람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는 반대했다.

1098년 10월 바리 공의회에서 안셀무스는 185명의 주교 앞에서 ''필리오케''와 무교병의 성찬례 사용에 대한 변호를 했다. 이는 종종 실패한 종교 통합 대화로 묘사되지만, 참석한 "그리스인"은 남부 이탈리아의 지역 주교들일 가능성이 높다. 공의회의 공식 기록은 유실되었지만, 안셀무스는 나중에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la로 정리했다. 노르만 영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그리스인들은 교황 수위권과 안셀무스의 신학을 수용했다.

안셀무스는 이듬해 로마의 성 베드로에서 열린 부활절 공의회에 참석하여 명예로운 자리에 앉았다. 우르바노 교황은 평신도 서임권과 성직자들이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금지했다. 안셀무스는 다음 날 로마를 떠나 리옹으로 갔다.

3. 1. 신의 존재 증명

안셀무스는 저서 《프로스로기온(Proslogionla)》에서 다음과 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 대전제: 신은 그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 소전제: 그러나 이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결론: 그러므로 신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13]


로마넬리의 ''마틸다 백작 부인과 교황 우르바노 2세 앞에서 만나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프로스 로기온』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 신은 그 이상 더 큰 것이 없는 존재이다.

#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 만약 그런 존재가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상 큰 것이 없다"는 정의에 반한다.

# 따라서, 신은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이 증명은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존재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불렸으며, 르네 데카르트 등 중세 이후의 철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3. 2. 신앙과 이성

안셀무스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14]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안셀무스가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처녀작인 『모놀로기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백"을 의미하는 이 논문에서, 그는 신의 존재와 특성을 이성으로 파악하려 했다. 이는 그전까지의 미신과도 같은, 기독교의 위광을 내세워 신을 논하는 것과는 선을 그었다.

『프로스 로기온』은 구상 당시 "이해를 구하는 신앙"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그의 신학자, 스콜라 철학자로서의 자세를 특징짓는 것으로서 종종 언급된다. 이 입장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거나 논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 입장이 아니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입장도 아니며, 믿고 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를 구하는 자세, 혹은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믿는 자세로 해석된다.

신의 존재 증명은, 『프로스 로기온』의 특히 제2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 신은 그 이상 더 큰 것이 없는 존재이다.

#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 만약 그런 존재가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상 큰 것이 없다"는 정의에 반한다.

# 따라서, 신은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이 증명은, 후에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존재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불리며, 르네 데카르트 등 중세 이후의 철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역사상, 신학자나 철학자에 의해, 신의 존재 증명은 많은 측면에서 검토되었다.)

3. 3. 속죄 교리

안셀무스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해 조직적으로 교리화했다.[15] 그의 저서 『왜 신은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안셀무스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신이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는 속죄론을 제시했다. 그는 죄가 신의 무한한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 즉 신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4. 저서

안셀무스는 벡에 있는 동안 다음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2]


  • De Grammaticola
  • Monologionla
  • Proslogionla
  • De Veritatela
  • De Libertate Arbitriila
  • De Casu Diabolila
  • De Fide Trinitatisla, De Incarnatione Verbila로도 알려짐[1]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후에는 다음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2]

  • Cur Deus Homola
  • De Conceptu Virginalila
  • 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la
  • De Sacrificio Azymi et Fermentatila
  • De Sacramentis Ecclesiaela
  • De Concordiala


안셀무스가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처녀작인 『모놀로기온』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독백'을 의미하는 이 논문에서 그는 신의 존재와 특성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이는 이전까지 미신과 같이 기독교의 권위를 내세워 신을 논하는 것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또 다른 주요 논문인 『프로슬로기온』은 구상 당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는데, 이는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로서 그의 자세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이 입장은 이해할 수 있거나 논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 것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도 아닌, 믿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를 추구하거나,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믿는 자세로 해석된다.

신의 존재 증명은 『프로슬로기온』의 제2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략 다음과 같다.

1. 신은 그 이상 더 큰 것이 없는 존재이다.

2.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편이 더 크다.

3. 만약 그런 존재가 인간의 이해 안에만 있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상 큰 것이 없다'는 정의에 어긋난다.

4. 따라서 신은 인간의 이해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이 증명은 훗날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라고 불렸으며, 르네 데카르트 등 중세 이후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역사적으로 신학자나 철학자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신의 존재 증명을 검토해 왔다.)

안셀무스의 저서 및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

  • 『안셀무스 전집』(전 1권, 후루타 아키라 역, 세이분샤, 1980년)
  • 『기도와 묵상』(후루타 아키라 역, 쿄분칸, 2007년)
  • 『중세 사상 원전 대계 7 전기 스콜라 철학』(클라우스 리젠후버 외, 조치 대학 중세 사상 연구소 편역, 헤이본샤, 1996년)
  •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을 비롯한 안셀무스의 주요 저서 수록.
  • 『중세 사상 원전 대계 제2기 3 안셀무스 저작집·서간집』 야나이 요시아키 역(조치 대학 중세 사상 연구소 편·감수, 헤이본샤, 2022년)
  • 성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나가사와 노부히사 역 (이와나미 문고) 1942년, 각·수차례 복간
  • -- 『모놀로기온』 나가사와 노부히사 역 (이와나미 문고) 1946년, 복간 1988년
  • -- 『쿠르 데우스 호모 - 신은 어째서 인간이 되셨는가』 나가사와 노부히사 역 (이와나미 문고) 1948년

5. 유산 및 영향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로는 에드머, 알렉산더, 길버트 크리스핀,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넨시스, 랑의 안셀무스 등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필사되어 널리 퍼졌으며,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던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을 포함한 스콜라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3] 그의 사상은 성령의 유출과 속죄에 대한 많은 후속 논의를 이끌었으며, 자유 의지와 예정설에 대한 후대의 많은 논쟁을 예견한다.

안셀무스가 사망한 직후, 그의 사제이자 비서였던 에드머(Vita et Conversatione Anselmi Cantuariensisla)와 수도사 알렉산더(Ex Dictis Beati Anselmila)에 의해 두 개의 안셀무스 전기가 쓰여졌다. 에드머는 또한 그의 역사서(Historia Novorumla)에서 안셀무스가 잉글랜드 군주들과 벌인 투쟁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1930년대 초 프랑스 학자들을 중심으로 안셀무스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기독교 철학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졌다.[13]

현대 학계는 안셀무스의 주교 리더십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프뢰리히[13]와 슈미트[13]는 안셀무스가 경건한 학자이자 성직자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세속적인 갈등을 최소화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본[13]은 "경건함과 심오한 사색에 대한 이미지"가 정치적 책략가의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서던[13]은 에드머가 기록한 경건하고 마지못해 교회 지도자가 되었던 전통적인 시각을 지지한다.[13]

5. 1. 철학 및 신학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신 존재 증명과 속죄론은 후대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논쟁 주제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 등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3]

안셀무스는 저서 《프로스로기온(Proslogionla)》에서 다음과 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 대전제: 신은 그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 소전제: 그러나 이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결론: 그러므로 신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13]


이 증명은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존재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불렸으며, 르네 데카르트 등 중세 이후 철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안셀무스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교리화하여 기독교 역사에 공헌하였다.[15]

《모놀로기온(Monologiumla, "독백")》은 1075년과 1076년에 쓰여졌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았다. 안셀무스는 성경이나 교부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1장에서 안셀무스는 누구나 "적당히 지적이라면"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로스로기온(Proslogiumla, "강론")》은 1077–1078년에 쓰여졌다. 이 작품은 하나님께 드리는 확장된 직접적인 연설의 형태로 쓰였다. 안셀무스는 "증명을 위해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단 하나의 논증,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을 제시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이 작품의 두 번째 장으로 간주된다. 이 장에서 안셀무스는 무신론자조차도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존재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진 가장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id quo nihil maius cogitari possitla) 그러나 그러한 존재의 속성에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가능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5. 2. 종교 개혁 및 근대 철학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종교 개혁 시기 루터칼뱅 등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15] 그의 존재론적 논증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 근대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3] 칸트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을 '존재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이라고 불렀다.

5. 3. 현대 신학 및 철학

20세기, 칼 바르트는 안셀무스의 신학을 재조명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개념을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으로 채택했다.[13] 이 입장은 이해할 수 있거나 논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믿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를 구하거나,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믿는 자세로 해석된다. 현대에도 안셀무스의 철학 및 신학 사상은 종교 철학, 윤리학, 형이상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5. 4. 한국 기독교에의 영향

안셀무스의 신학과 철학은 한국의 신학 교육과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작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 신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한국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안셀무스의 주요 저작 및 연구서는 다음과 같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구 분제목번역 및 출판 정보
주요 저작『안셀무스 전집』후루타 아키라 역, 세이분샤, 1980년 (전 1권)
『기도와 묵상』후루타 아키라 역, 쿄분칸, 2007년
『중세 사상 원전 대계 7 전기 스콜라 철학』클라우스 리젠후버 외, 조치 대학 중세 사상 연구소 편역, 헤이본샤, 1996년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 등 수록)
『중세 사상 원전 대계 제2기 3 안셀무스 저작집·서간집』야나이 요시아키 역, 조치 대학 중세 사상 연구소 편·감수, 헤이본샤, 2022년
『프로슬로기온』나가사와 노부히사 역, 이와나미 문고, 1942년 (각·수차례 복간)
『모놀로기온』나가사와 노부히사 역, 이와나미 문고, 1946년 (복간 1988년)
주요 저작『쿠르 데우스 호모 - 신은 어째서 인간이 되셨는가』나가사와 노부히사 역, 이와나미 문고, 1948년
연구서『성 안셀무스의 생애』이구루 토루, 추오 출판사, 1981년
『안셀무스의 신학』오노 타다노부, 신교 출판사, 1985년
『성 안셀무스 신학의 교의학적 연구』사사키 토루, 산파울로, 2013년
『지해를 구하는 신앙 안셀무스의 신의 존재 증명』칼 바르트, 요시나가 마사요시 역, 신교 출판사, 신판 2015년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풍경 속의 초상』R.W. 서던, 야나이 요시아키 역, 지센칸, 2015년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사상은 한국 기독교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Notable Lutheran Saints https://web.archive.[...] 2019-07-16
[2] 백과사전 Saint Anselm of Canterbury https://www.britanni[...] 2018-11-24
[3] 간행물 Canterbury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Society http://canterbury-bu[...] 2015-06-30
[4] 웹사이트 Waymarking http://www.waymarkin[...] Groundspeak 2012-04-28
[5] 성경 Psalm 14:1
[6] 성경 Psalm 53:1
[7] 블로그 The Stained Glass of Canterbury, Modern Edition http://aclerkofoxfor[...] 2011-04-27
[8] 간행물 Canterbury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Society http://canterbury-bu[...] 2015-06-30
[9] 웹사이트 Archbishop Welby launches monastic community at Lambeth Palace http://www.christian[...] Christian Today 2015-09-18
[10]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3-27
[11] 서적 YOUCAT(日本語)――カトリック教会の青年向けカテキズム カトリック中央協議会 2013-06-30
[12] 웹사이트 Laudate 聖人カレンダー http://www.pauline.o[...] 聖パウロ女子修道会 2014-04-24
[13] 서적 신학은 인간학이다 분도출판사 2003
[14] 웹사이트 [christianreview] 믿음과 인간의 이성, 그리고 신학 http://www.christian[...] 2018-03-28
[15] 서적 Christ’s atonement: a multi-dimensional approach http://worldcat.org/[...]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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