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칼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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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 칼라인은 1934년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953년부터 1974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활약한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이다. 뛰어난 수비와 타격 능력을 겸비하여 10번의 골드 글러브상, 15번의 올스타 선정, 1955년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198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통산 3,007안타를 기록하고, 타이거스 구단에서 선수, 해설자, 구단 특별 보좌관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미스터 타이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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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칼라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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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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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우익수 |
출생일 | 1934년 12월 19일 |
사망일 | 2020년 4월 6일 (향년 85세) |
출생지 |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사망지 | 미국 미시간주 블룸필드힐스 |
타격 | 우타 |
투구 | 우투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53년 6월 25일 |
데뷔 팀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74년 10월 2일 |
최종 팀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통계 | |
타율 | .297 |
안타 | 3,007 |
홈런 | 399 |
타점 | 1,583 |
선수 경력 | |
팀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53년–1974년)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선정 | 18회 (1955년–1961년², 1962년²–1967년, 1971년, 1974년) |
월드 시리즈 우승 | 1968년 |
골드 글러브 상 | 10회 (1957년–1959년, 1961년–1967년) |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 1973년 |
AL 타격 챔피언 | 1955년 |
영구 결번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No. 6 |
명예의 전당 헌액 | 1980년 |
명예의 전당 투표율 | 88.3% (첫 투표) |
기타 정보 | |
참고 자료 | 알 칼라인 알 칼라인 통계 알 칼라인 전기 알 칼라인 - 회장 특별 보좌역 |
2. 어린 시절
Al Kaline영어은 1934년 12월 19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고, 친척 중에는 세미 프로 야구 선수도 있었지만, 가족 중 누구도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없었다.[5]
알 칼라인은 195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계약금 35000USD (현재 가치로 334459USD)에 계약했다. 당시 MLB에 적용되던 보너스 룰[67]에 따라 그해 6월 25일 타이거스에 합류하여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30경기에 출전했다. 신인 시절 등번호는 25번이었지만, 다음 해부터 6번을 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 야구를 시작하여 주로 투수를 했지만, 칼라인은 8세 때 왼쪽 다리에 골수염을 앓게 되어 그 부위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6] 이 수술로 흉터와 영구적인 기형이 남았지만, 그는 유소년 야구에서 뛰어난 투수였다.[8] 칼라인은 아홉 살 때 패스트볼, 체인지업, 커브볼을 던지는 법을 배웠다.[7]
고등학교는 지역 볼티모어의 볼티모어 사우스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처음에는 농구와 미식축구 선수였지만, 부상을 입은 탓에 야구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야구 팀에는 투수가 많았기 때문에 외야수로 전향했다.[7] 그는 4년 내내 야구에서 주(州) 대표팀 선수로 선정되었다.[8] 칼라인은 자신이 공부를 못했지만,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들이 그가 야구 선수가 될 것이라고 믿고 그를 통과시켰다고 말했다.[9]
3. 메이저 리그 경력
1955년, 20세의 칼라인은 152경기에 출전하여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고, 1967년까지 연속 출전했다. 시즌 종료 후 .340의 타율, 27홈런, 102타점, 200안타를 기록하여 MLB 역사상 최연소 수위 타자가 되었다. 이는 칼라인의 유일한 타격 타이틀이다. MLB 최연소 수위 타자는 팀의 대선배 타이 콥과 불과 1일 차이였다. MVP 투표에서는 요기 베라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956년에도 타율 .314, 27홈런, 128타점을 기록했고, 수비에서도 18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1957년에는 새롭게 창설된 골드글러브상을 처음 수상했고, 1958년에도 23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1961년에는 타율 .324를 기록, 수위 타자가 된 팀 동료 놈 캐시(.361)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62년 개막부터 35경기까지 타율 .345, 13홈런, 38타점을 기록했지만, 5월 26일 뉴욕 양키스전에서 쇄골 골절로 57경기 결장했다. 복귀 후 100경기에 출전하여 29홈런, 94타점을 기록했고, 시즌 오프에는 미일 야구에 참가(타이거스 단독팀)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1963년에는 타율 .312, 27홈런, 101타점을 기록, MVP 투표에서 엘스턴 하워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64년에는 유년기부터 앓았던 왼쪽 다리 골수염으로 고통받았고, 시즌 종료 후 왼쪽 다리 성형 수술을 받았다. 이후 부상과의 싸움이 많아져, 1967년 여름에는 배트 랙에 손을 부딪혀 골절, 1968년에는 팔 골절로 2개월이나 전력에서 이탈해야 했다.
하지만 팀 동료들의 분발과 메이요 스미스 감독의 적절한 기용으로 팀은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29타수 11안타, 타율 .379, 2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1945년 이후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71년, 칼라인은 타이거스 선수 최초로 100000USD를 제시받았지만, 1970년 시즌 타율 .278, 21홈런에 그친 것을 이유로 고사하고 95000USD에서 100000USD 사이를 희망했다.
1974년에는 지명 타자로 활동했고, 9월 24일, 볼티모어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데이브 맥낼리에게서 2루타를 쳐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다. 달성 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표명, 10월 2일까지 통산 3007안타를 기록하고 은퇴했다.
칼라인이 남긴 2834경기 출전, 1277사사구, 399홈런은 타이거스 구단 기록이며, 특히 홈런은 1개만 더 쳤으면 400홈런이 되었기에 아쉬웠다. 통산 3007안타는 타이 콥의 구단 기록(3902안타)에 이어 2위이다.
3. 1. 초기 경력 (1953년 ~ 1960년)
칼라인은 1953년 6월 25일 18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보너스 규정에 따라 메이저 리그 팀과 4000USD가 넘는 계약 보너스를 받은 선수는 2년 동안 25인 로스터에 포함되어야 했기에, 칼라인은 15000USD의 보너스를 받고 마이너 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1][12]
데뷔전에서 칼라인은 6회말 중견수로 교체 투입되었고, 9회초 해리 버드를 상대로 첫 타석에서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7월 8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루이스 알로마를 상대로 첫 안타(1루타)를 기록했고, 워싱턴 세네이터스를 상대로 월트 드로포를 대신해 투구 득점을 올리며 돈 룬드의 2루타로 1루로 돌아왔다. 이 득점으로 칼라인은 "볼티모어 그레이하운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3년, 감독 프레드 허친슨은 떠오르는 스타 칼라인을 테드 윌리엄스에게 소개했다. 윌리엄스는 칼라인에게 로우볼을 치는 법, 더 무거운 방망이를 휘두르는 법 등 오프 시즌 연습 경기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고, 이는 칼라인의 경기, 특히 오프 시즌의 특성이 되었다. 9월 16일, 칼라인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3개의 1루타를 치고 첫 득점을 올리며 윌리엄스의 조언을 실천에 옮겼다. 칼라인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사첼 페이지에게 안타를 치는 등 꾸준히 밝은 모습을 보였고, 클리블랜드에서 9회 대타로 나와 첫 홈런을 기록했다. 1953년 스포팅 뉴스의 기사에 따르면, 타이거스는 칼라인을 2루수와 유격수로 기용하려 했으나 결국 외야수로 고정했다.
1953년 시즌 후, 칼라인은 볼티모어로 돌아와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며 윌리엄스의 조언을 실천했다. 그는 쉬는 동안 안쪽 방에서 방망이를 가져가 팔이 피곤해질 때까지 휘두르는 연습을 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연인 매지 루이즈 해밀턴과 꾸준히 데이트를 했고, 1954년 시즌 후 결혼했다.
쿠바에서 겨울 경기를 뛰던 중, 주전 외야수 스티브 수치콕이 손목 부상을 당하면서 칼라인은 우익수에서 훈련할 기회를 얻었다. 수치콕의 손목이 낫지 않자, 19세의 칼라인은 주전 우익수가 되었다. 칼라인은 뛰어난 수비력으로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공격력도 빠르게 성장하여 시즌 대부분 .25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8월 말에는 타율이 .283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홈 경기에서 칼라인은 첫 주요 부상을 입었다. 브릭스 스타디움에서 오른쪽으로 안타된 플라이 볼을 쫓다가 파울 범위로 돌출된 칸막이 좌석으로 달려가 보호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이 사고 후, 타이거스 회장 스파이크 브릭스는 칼라인이 다시 부상당할 것을 우려하여 좌석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칼라인은 .276의 타율로 첫 풀타임 시즌을 마쳤지만, 4개의 홈런과 43타점에 그치는 등 장타력 부족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오프 시즌 동안 칼라인은 타격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 디마지오와 비교될 정도로 발전하며 팬들과 새 감독 버키 해리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4월 17일, 그는 6회에 2개를 포함하여 3개의 홈런을 쳤다. 4월 말, 칼라인은 1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453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는 올스타 경기에서 아메리칸 리그의 선발 우익수로 팬들에 의해 투표되었다. 7월 말, 칼라인은 타율, 득점, 타점, 안타, 홈런에서 리그를 이끌고 있었다. 9월 초까지 뜨거운 타격감을 유지하던 칼라인은 슬럼프에 빠졌지만, 시즌 200안타 달성이라는 목표에 집중하며 슬럼프를 극복하고 정확히 200안타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는 .340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다. 20세의 나이로 칼라인은 타이 콥이 1907년 타격 타이틀을 획득했을 때보다 1살 어리게 최연소 타격 챔피언이 되었다. 스포팅 뉴스의 10월 5일 논점에서는 칼라인이 콥보다 디마지오와 더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1956년 시즌 전, 칼라인은 체격을 키웠고, 대중에게 더 편안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시즌 초, 칼라인은 본루에서 불편해 보였는데, 버키 해리스 감독은 그가 투구를 너무 쫓아다니고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칼라인은 1955년의 뛰어난 시즌을 이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지만, 2년 연속 올스타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올스타전 기간 동안 칼라인은 테드 윌리엄스를 찾아 조언을 구했고, 윌리엄스는 본루에서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후, 칼라인은 타율을 .276에서 .314로 끌어올리며 시즌을 마감했다. 오프 시즌 동안, 스파이크 브릭스의 부친의 사유지가 타이거스를 라디오 방송국 소유주들인 프레드 노어와 존 페처가 이끄는 11명의 기업 연합에 매각했다.
1957년 시즌 전, 칼라인은 사업가 프랭크 칼린을 만나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포워드 고디 호우와 함께 새로운 사업 투자를 시작했다. 호우와 칼라인은 자동차 부품 디자인 하도급을 받는 판매원이 되기로 했지만, 칼라인은 망설였다. 그러나 루이즈는 좋은 투자 기회라고 확신했고, 칼라인, 호우, 칼린은 미시간 자동차 생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칼라인은 부회장을 맡았고, 사업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세 사람은 호우-칼라인-칼린 주식회사도 설립했다.
오프 시즌 동안 칼라인은 브릭스가 제시한 연봉 인상안에 만족하지 못했다. 브릭스는 칼라인이 미키 맨틀만큼 좋은 선수이고 그만큼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언급하며, 3000USD의 보너스가 포함된 계약서를 설명과 휴일 인사 없이 돌려보냈다고 비난했다. 칼라인은 결국 계약을 체결했지만, 많은 팬들은 그를 자만심에 찬 선수로 여겼고, 기자들은 적대적인 질문과 암시를 던졌다. 칼라인은 기자 회견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더욱 내성적으로 변했다.
1957년 시즌은 칼라인에게 성공적이었다. 그는 느리게 시작했지만, 여전히 올스타 경기 선발 선수로 선택되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칼라인은 타격감을 회복하며 8월 말 타율을 .300 가까이 끌어올렸다. 8월 21일, 그의 첫 아들 마크 앨버트가 태어났다. 칼라인의 뛰어난 타격과 수비는 타이거스가 4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고, 그는 10개의 골드 글러브 상 중 첫 번째 상을 받았다. 칼라인은 .313의 타율로 1958년에도 뛰어난 타격과 수비를 이어갔고, 2년 연속 골드 글러브 상을 받으며 타이거스는 5위에 머물렀다.
1959년 시즌은 칼라인에게 변화와 발전의 시기였다. 그는 정규 중견수 하비 퀸이 팔에 공을 맞은 후 중견수로 이동했다. 칼라인은 우익수를 선호했지만, 중견수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퀸이 부상에서 복귀하자, 새 감독 지미 다이크스는 칼라인을 중견수에, 퀸을 우익수로 기용했다. 칼라인은 새 포지션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용감하고 튼튼한 리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잘못된 투구에 뺨을 맞은 후, 칼라인은 5경기 동안 벤치를 지켰지만, 경기에 뛰고 싶어 다이크스 감독에게 요청했다. 칼라인은 올스타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동료 중견수 미키 맨틀과 맞붙었다. 또한 칼라인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빌리 피어스를 상대로 개인 통산 1,000번째 안타를 기록했다. 칼라인은 타격왕 경쟁에서 퀸(.353)에 이어 .327로 2위를 차지했고, 타이거스는 4위를 기록했다.
1960년 시즌 전, 빌 드윗이 타이거스의 회장 겸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드윗은 즉시 놈 캐시를 영입하고, 타격왕 퀸을 홈런왕 록키 콜라비토와 트레이드하며 팀을 개편했다. 5월, 타이거스와 칼라인은 상승세와 하락세를 모두 겪었다. 칼라인은 .250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경기 외적인 방해 요인으로 꼽았다. 세금을 줄이기 위해 칼라인의 사업 파트너 프랭크 칼린은 칼라인과 호우에게 경주마를 구매하도록 설득했다. 경주마는 야구 선수들에게 금지된 사교 활동으로 여겨졌고, 이 사건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칼라인은 빠르게 경주마 사업에서 손을 떼고 경마와 도박에서 멀어졌다. 시즌은 타이거스와 칼라인에게 더욱 좌절스럽게 흘러갔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칼라인은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당했지만, 경기 후 심판에게 사과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후보 선수로 선발되었지만,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6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드윗은 홈런왕과 타격왕을 맞바꾸는 역사적인 트레이드에 이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 조 고든과 다이크스 감독을 맞바꾸는 또 다른 역사적인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시즌의 혼란은 칼라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그는 1954년 이후 가장 낮은 타율인 .278로 시즌을 마감했다.
3. 2. 전성기 (1961년 ~ 1968년)
Al Kaline영어은 1961년에 7번째 올스타 경기에 선발되었고, .324의 타율로 타격 2위를 기록하며 "올해의 아메리칸 리그 복귀 선수"로 선정되었다.[21] 그해 칼라인은 41개의 2루타로 메이저리그를 이끌었고, 노름 캐시에 이어 아메리칸 리그 타율 2위를 기록했다. 타이거스는 101승을 거두었지만, 로저 매리스 (61개)와 미키 맨틀 (54개)의 홈런 활약에 힘입은 뉴욕 양키스에 8경기 뒤져 2위에 머물렀다.
1962년, 칼라인은 20년 선수 생활에 대한 열망과 함께 시즌을 시작했다. 이전 시즌의 낮은 스트라이크아웃 수를 이유로, 타석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임하기로 결심했다. 5월 21일까지 .358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5월 26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엘스턴 하워드의 뜬공을 잡으려다 오른쪽 어깨에 착지하며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21] 이 부상으로 최소 2개월 결장이 예상되었고, 칼라인이 빠진 57일 동안 타이거스는 페넌트 경쟁에서 밀려났다. 칼라인은 부상으로 8연속 올스타전 출전이 좌절되었지만, 시즌 막판에 복귀하여 29개의 홈런과 .304의 타율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을 세웠다. 타이거스는 1위 양키스에 10.5경기 뒤졌지만, 칼라인은 5번째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하고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6위를 차지했다.
1963년, 칼라인은 더 많은 장타를 노리기 위해 타격 방식을 바꾸었다. 무릎 부상으로 고전하며 칼 야스트렘스키에게 타격왕 타이틀을 내주었지만, .312의 타율로 2위를 기록하고 27개의 홈런과 10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고 6번째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2][22] 1963년 3월 말, 칼라인은 몸 상태가 좋다고 말했고, 스프링 트레이닝 53타석에서 .373의 타율을 기록했다.[21]
1964년, 칼라인은 어린 시절 수술을 받았던 왼쪽 발에 다시 부상을 입었다. 감독 찰리 드레슨에게 부상을 숨겼지만, 4월 말 부상이 악화되어 몇몇 경기에서 벤치를 지켜야 했다. 10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타이거스는 그 시즌 4위를 기록했고, 칼라인은 .293의 타율과 7번째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칼라인은 어린 시절 골수염에 걸렸던 왼쪽 발에 1964년 시즌 내내 통증을 느꼈고, 통증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통풍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한 의사들을 찾아 주사를 맞았다.[23]
1965년, 칼라인은 특수 신발을 착용하며 .281의 타율을 기록했고, 중견수와 우익수로 번갈아 출전하며 8번째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 오프 시즌 동안 칼라인은 발 수술을 받았다. 다음 시즌에도 여전히 통증을 느낀 칼라인은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 교정 신발을 처방받았다. 1965년 6월까지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서 말도 안 될 정도"라고 말했다.[23] 스포츠 작가 밀턴 그로스는 칼라인의 변형된 발에 대해 "새끼발가락과 가운데 발가락은 땅에 닿지 않습니다. 네 번째 발가락이 늘어났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짧아졌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은 두 번째 발가락과 겹치고, 네 번째 발가락은 엄지발가락과 겹치기 시작했으며, 엄지발가락은 왼쪽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완벽한 선수라고 불려온 타이거스에서 그의 선수 생활 내내, 칼라인은 불구와 다름없었습니다."라고 묘사했다.[23]
1966년, 심근경색으로 이전 시즌을 놓쳤던 드레슨 감독이 다시 병에 걸려 밥 스위프트 코치로 교체되었고, 드레슨과 스위프트는 모두 그 해에 사망했다. 프랭크 스캐프가 감독 대행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칼라인은 12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29개의 홈런과 .288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이거스가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9번째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하였다.
1967년, 새 감독 메이요 스미스 아래 타이거스는 큰 기대를 모았다. 스미스는 칼라인을 다시 우익수로 기용했다. 칼라인은 1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스트라이크아웃을 당한 후 방망이를 걸이에 쳐서 손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26경기에 결장했다. 1962년과 달리 타이거스는 칼라인 없이도 선전하며 15승 11패를 기록했다. 타이거스는 시즌 내내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레드삭스와 동률 2위를 기록했다. 칼라인은 31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25개의 홈런(통산 300번째 홈런 포함)과 78개의 타점, .308의 타율을 기록했다. 칼라인은 자신의 10번째이자 마지막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 레드삭스는 1967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하였다. 1967년 여름, 평소 침착한 칼라인은 야구 배트를 배트 랙에 부딪혀 손뼈가 부러졌다.[24] 칼라인은 한 달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가 복귀했을 때 타이거스는 4팀의 페넌트 레이스에 참여했지만, 팀은 1위 보스턴 레드삭스에 1경기 뒤져 시즌을 마쳤다.[42]
1968년, 33세의 칼라인은 야구에 전념하기 위해 미시간 자동차 생산 주식회사에서 물러났다. 4월 18일, 인디언스를 상대로 5-0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 2,000번째 경기에 출전했다. 5월 19일, 307번째 홈런을 쳐 행크 그린버그를 제치고 타이거스 통산 홈런 1위가 되었다. 그러나 6일 후, 루 크로스의 투구에 팔이 부러져 7월 1일까지 결장했다. 칼라인의 결장 기간 동안 짐 노스럽이 우익수로 활약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칼라인이 복귀했을 때, 주로 대타자로 기용되었고 1루수로도 출전했다. 9월 14일 데니 매클레인의 30번째 승리 경기에서 동점 득점을 올렸고, 9월 17일에는 놈 캐시를 대신해 대타로 출전하여 타이거스의 페넌트 우승을 결정짓는 득점을 올렸다. 경기 후, 칼라인은 스미스 감독에게 자신이 빠진 동안 다른 선수들이 잘 해줬기 때문에 월드 시리즈에서 뛸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미스 감독은 칼라인을 기용하기 위해 중견수 미키 스탠리를 유격수로, 짐 노스럽을 중견수로, 칼라인을 우익수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라인업을 선보였다. 이 전략은 타이거스가 3승 1패로 뒤지던 상황에서 3연승을 거두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라인은 .379의 타율과 2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25] ESPN은 나중에 스미스의 이 결정을 20세기의 10대 위대한 코칭 결정 중 하나로 꼽았다.[26] 1968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시리즈의 첫 4경기 중 3경기를 승리했고, 5차전 7회 초에 3-2로 앞서고 있었는데, 칼라인은 만루 상황에서 안타를 쳐 2점을 득점했다.[27] 타이거스는 그 경기에서 승리했고, 6차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칼라인은 6차전 3회에 10득점을 올린 타이거스에서 2안타, 2득점, 3타점을 기록했다. 디트로이트는 1945년 이후 첫 번째 월드 챔피언십을 위해 7차전에서 승리했다. 그의 유일한 월드 시리즈 출전에서 칼라인은 7경기에서 .379의 타율, 2개의 홈런, 8개의 타점을 기록했다.[28] 그의 승리에 대해 칼라인과 그의 팀 동료들은 각각 10000USD의 보너스 수표를 받았다(당시 칼라인의 연봉은 "약 70000USD"였다).[29]
3. 3. 마지막 시즌 (1969년 ~ 1974년)
칼라인은 월드 시리즈에서 활약하는 데 자신의 목적 중 하나를 달성하였다. 20년 경력의 그의 목적을 완수할 때가 된 것이다. 칼라인은 꾸준히 안타를 치고 영예를 얻었다. 1969년 그는 사상 최고의 타이거스 팀으로 투표되었다. 1970년 8월 2일은 스타디움 뒤편 체리 스트리트를 칼라인 드라이브로 개명한 알 칼라인의 날이었다. 1971년 칼라인은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자신의 17번째 올스타 경기에서 하먼 킬브루의 홈런에 득점하였다. 1972년 7월 1일 칼라인은 369번째 홈런을 쳐 랠프 카이너와 함께 통산 18위에 올랐다. 타이거스가 챔피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패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 해는 칼라인의 빅 리그 20번째 시즌이었다. 1974년 시즌은 칼라인의 마지막 시즌이었고, 처음으로 전임 지명 대타자로 활약했다. 그는 15번째이자 마지막 올스타 팀에 임명되었다. 9월 24일 고향 볼티모어에서 데이브 맥널리를 상대로 3,000번째 안타를 쳤다.[39][40][41]
1970년 칼라인은 외야 충돌 사고로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5월 30일 경기 도중, 칼라인은 플라이볼을 잡으려다 중견수 짐 노스럽과 충돌했다. 칼라인은 경고 트랙에 쓰러져 즉시 질식하기 시작했다. 턱이 고정되고 혀가 기도를 막은 것이다. 좌익수 윌리 호튼이 달려와 칼라인의 입을 벌려 기도를 확보해 생명을 구했다. 칼라인은 들것에 실려 나가 병원에서 밤을 보냈다. 그는 나중에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30]
1971년 .294의 타율을 기록한 후, 칼라인은 10만 달러(현재 가치로 631306USD)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타이거스 선수가 되었다. 그는 1970년에 16홈런, .278의 타율을 기록한 후 자격이 없다며 전년도 9만 5천 달러에서 10만 달러로의 인상을 거절했다.[31][32] 디트로이트는 레드삭스에 반 게임 뒤진 채 1972년 우승 경쟁을 했다.[33] 칼라인은 두 경기에서 8타수 5안타 3득점을 기록했다.[34] 디트로이트는 첫 두 경기에서 승리하며 아메리카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확정지었다.[35][36] 칼라인은 1972년 106경기에서 .313의 타율을 기록하며 1967년 이후 처음으로 .300 이상을 기록했다. 타이거스는 레지 잭슨이 5차전에서 홈 스틸을 성공시킨 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1972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다.[37] 1973년 3월, 칼라인은 경기 안팎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했다.[38]
1974년 9월 24일, 칼라인은 데이브 맥넬리를 상대로 2루타를 쳐 MLB 역사상 3,000안타를 달성한 12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정표 달성 후, 칼라인은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를 발표했다.[42] 1974년 10월 3일 마지막 경기 후 "이제 끝났으니 기쁘다. 그리울 것 같지는 않다. 스프링 트레이닝은 그리울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43]
칼라인은 통산 3,007안타(당시 11위, 현재 32위), 498 2루타, 75 3루타, 399홈런(2024년 현재 타이거스 기록, 현재 58위), 1,622득점, 1,277볼넷, 1,582타점(현재 44위)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2] 통산 9번 .300 이상 타율, 7번 25개 이상 홈런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 .297을 기록했다.[2] 타이거스 통산 출장 경기(2,834), 볼넷(1,277), 희생 플라이(104)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44] 삼진보다 볼넷(1,020개)이 더 많았다. 통산 .311(119타수 37안타)의 대타 타율과 2홈런, 23타점을 기록했다.[45] 한 시즌 최다 삼진은 마지막 시즌에 기록한 75개였다. 이전에는 한 시즌에 66개 이상 삼진을 당한 적이 없었다. 포지션 선수 중 칼라인은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 통산 92.8로 역대 29위(외야수 중 15위)이다.[46]
1971년 연봉 갱신에서 칼라인은 타이거스 선수 최초로 10만 달러(현재 631306USD)를 제시받았지만, 1970년 시즌 타율 .278, 21홈런에 그친 것을 이유로 고사하고 9만 5천 달러에서 10만 달러 사이를 희망했다.
1974년 전년도 도입된 지명 타자로 활동했고, 9월 24일, 볼티모어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데이브 맥낼리에게서 2루타를 쳐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다. 달성 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표명했다. 10월 2일까지 통산 3007안타를 기록하고 은퇴했다.
칼라인이 남긴 2834경기 출전, 1277사사구, 399홈런은 타이거스 구단 기록이며, 특히 홈런은 1개만 더 쳤으면 400홈런이 되었기에 아쉬웠다. 통산 3007안타는 타이 콥의 구단 기록(3902안타)에 이어 2위이다.
4. 은퇴 이후
칼라인은 .297의 타율을 기록하며, 3,007개의 안타, 498개의 2루타, 75개의 3루타, 399개의 홈런, 1,622개의 득점, 1,583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부상으로 인해 594경기에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또한, 통산 .987의 수비율과 함께 10번의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의 외야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어니 하웰과 요기 베라는 2001년 스포팅 뉴스의 기사에서 칼라인이 역대 최고의 강한 어깨를 가진 외야수 중 한 명이라고 언급했다.
1976년, 칼라인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텔레비전 방송 해설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1980년에는 듀크 스나이더, 척 클라인, 톰 요키와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칼라인은 가족의 성원에 감사하며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만약 제가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한 가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항상 최선을 다해 야구를 위해 헌신했으며, 경기, 타이거스, 그리고 제 가족에게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칼라인은 선수 시절보다 더 긴 25년을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봄 훈련 강사로 참여하여 커크 깁슨에게 외야 수비를 가르치기도 했다. 2001년, 칼라인은 타이거스의 구단주 마이크 일리치의 특별 고문이 되기 위해 방송계를 떠났다. 2003년, 새로운 단장 데이브 돔브로스키는 칼라인과 그의 전 동료 선수 윌리 호턴을 단장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칼라인은 방송과 특별 임명을 통해 타이거스와 50년 이상 관계를 맺어왔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타이거"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6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20년 4월 6일, 칼라인은 미시간주 블룸필드힐스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은퇴 후 칼라인은 디트로이트 지역에 거주하면서 플로리다에도 집을 두고 타이거스 구단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5년부터 2002년까지 팀의 텔레비전 중계에서 조지 켈과 함께 해설을 맡았고, 이후에는 구단 컨설턴트로 활동했다.[25] 2003년부터는 타이거스 사장/CEO/단장 데이브 돔브로스키의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하며,[25]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외야수 코칭과 멘토링을 담당했다.[58] 전 타이거스 팀 동료 윌리 호튼도 이 직책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2006년 월드 시리즈에서 코메리카 파크에서 시구를 했다.[25] 칼라인은 2020년 사망할 때까지 보좌관 역할을 계속했다. 한 팀에서 67년간 활동한 것은 MLB 역사상 가장 긴 재임 기간 중 하나였다.[59]
오랜 선수 생활과 타이거스 구단과의 오랜 인연으로 인해 칼라인은 "미스터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었다.[60]
1980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듀크 스나이더와 함께 헌액되었으며, 같은 해 타이거스는 칼라인의 등번호 ''''6''''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코메리카 파크에 있는 칼라인의 동상은 외야 펜스에 기대어 공을 잡는 모습으로, 그의 뛰어난 외야 수비를 기리고 있다.
2020년 4월 6일, 향년 85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가족에 의해 발표되었다.[68]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5. 선수로서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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