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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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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지 잭슨은 1946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1967년부터 1987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야구 선수이다. 캔자스시티/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뉴욕 양키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에서 뛰며 통산 563홈런을 기록했고, 1973년 아메리칸 리그 MVP, 월드 시리즈 MVP 2회, MLB 올스타 14회 선정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1993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0월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차례 논란과 비판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통산 2597개의 삼진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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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잭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1년 뉴욕 양키스 시절의 레지 잭슨
포지션우익수
타석좌타
투구좌투
출생지펜실베이니아주몽고메리 카운티
데뷔 리그MLB
데뷔일1967년 6월 9일
데뷔 팀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최종 리그MLB
최종일1987년 10월 4일
최종 팀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통계
타율0.262
안타2,584
홈런563
타점1,702
선수 경력
캔자스시티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67–1975)
볼티모어 오리올스 (1976)
뉴욕 양키스 (1977–1981)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82–1986)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87)
수상 및 업적
올스타14회 (1969, 1971–1975, 1977–1984)
월드 시리즈 우승5회 (19721974, 1977, 1978)
AL MVP1973년
월드 시리즈 MVP2회 (1973, 1977)
실버 슬러거 상2회 (1980, 1982)
AL 홈런왕4회 (1973, 1975, 1980, 1982)
AL 타점왕1973년
영구 결번애슬레틱스 No. 9
뉴욕 양키스 No. 44
명예의 전당애슬레틱스 명예의 전당
모뉴먼트 파크 헌액
명예의 전당 헌액
종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날짜1993년
득표율93.6% (첫 투표)
고등학교
대학교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기타 정보
현재 직책휴스턴 애스트로스 특별 고문

2. 생애

레지날드 마르티네즈 "레지" 잭슨은 1946년 5월 18일, 펜실베이니아주 첼트넘 타운십의 와인코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르티네즈 잭슨은 푸에르토리코계 혼혈이었고, 재단사로 일했으며, 니그로 리그의 뉴어크 이글스에서 2루수로 뛰었던 경력이 있다.[5] 잭슨은 어머니 클라라의 네 자녀 중 막내였으며, 아버지의 이전 결혼에서 얻은 두 명의 이복 형제가 있었다.[6] 그가 여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아버지가 그와 이복 형제 한 명을 맡아 키웠다.[10]

잭슨은 1964년 첼트넘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고교 시절 미식축구, 농구, 야구, 육상 등 여러 종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7]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던 중 무릎 부상과 경추 골절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운동을 계속했다.[8] 야구에서는 뛰어난 타격 능력과 투수로서 노히터를 기록하기도 했다.[9]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1학년 때 멕시코계 미국인인 제니 캠포스를 만나 교제했으며,[12] 두 사람은 1968년 결혼했으나 1973년 이혼했다. 잭슨에게는 1990년대 초에 태어난 외동딸 킴벌리가 있다.[67]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비시즌에는 ABC 스포츠에서 현장 리포터 및 해설가로 활동했다. 특히 1976년 가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기 직전에는 ABC 중계 부스에서 해설가로 참여하여, 훗날 자신이 속하게 될 양키스가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을 분석하기도 했다.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경력

레지날드 마르티네즈 "레지" 잭슨은 1946년 5월 18일, 펜실베이니아주 첼트넘 타운십의 와인코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르티네즈 잭슨은 푸에르토리코계 혼혈이었고, 재단사로 일했으며, 니그로 리그의 뉴어크 이글스에서 2루수로 뛰었다.[5] 그는 어머니 클라라의 네 자녀 중 막내였으며, 아버지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명의 이복 형제가 있었다.[6] 그가 여섯 살 때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가 잭슨과 이복 형제 한 명을 맡아 키웠다.[10] 그들은 와인코트에서 몇 안 되는 흑인 가족 중 하나였다.

잭슨은 1964년 첼트넘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곳에서 미식축구, 농구, 야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만능 스포츠맨이었다.[7] 미식축구에서 테일백으로 활약하던 중, 3학년 시즌 초반 무릎 부상을 입었다. 의사들은 다시 미식축구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지만, 그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 복귀했다.[8] 그러나 그 경기에서 경추 골절로 5개의 경추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해 6주간 입원하고 한 달 동안 목에 깁스를 해야 했다. 의사들은 다시 걷거나 미식축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잭슨은 또다시 역경을 이겨냈다.[8] 야구 팀에서는 타율 0.550을 기록했고, 여러 번의 노히터를 기록하기도 했다.[9] 고등학교 4학년 중반에는 그의 아버지가 밀주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9]

고등학교 졸업 후, 잭슨은 미식축구 선수로서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 미식축구팀, 조지아 불독스 미식축구팀, 오클라호마 수너스 미식축구팀 등 여러 대학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이 대학들은 잭슨을 영입하기 위해 인종의 벽을 허물 의향까지 보였으나,[10] 잭슨은 당시 남부의 인종 차별적 분위기에 대한 두려움과[9] 오클라호마 대학 측이 백인 여자친구와의 교제를 만류했기 때문에 이 제안들을 거절했다.[9] 야구 선수로서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미네소타 트윈스 등이 관심을 보였고, 특히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한스 로버트는 그의 영입에 적극적이었다.[9] 하지만 고향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그의 타격 기술을 문제 삼아 영입을 거절했다.[10]

아버지의 대학 진학 권유와 미식축구와 야구를 병행하고 싶었던 잭슨의 바람에 따라,[10] 그는 템피에 있는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ASU)에서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의 고등학교 미식축구 코치가 ASU의 수석 코치 프랭크 쿠쉬와 연결해주었고, 쿠쉬는 잭슨이 두 종목을 병행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ASU 입학 후, 잭슨은 미식축구 훈련이 끝난 어느 날 야구부 코치 바비 윙클스를 찾아가 팀 합류 가능성을 물었다. 윙클스는 그의 타격 연습을 지켜본 후 즉시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잭슨은 미식축구 장비를 착용한 채로 두 번째 스윙 만에 홈런을 쳤고, 총 다섯 번의 타석에서 세 개의 홈런을 기록했다.[11] 잭슨은 팀 훈련에는 참여할 수 있었지만, 당시 NCAA 규정에 따라 신입생은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11] 잭슨은 수비수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신입생 시즌 이후 야구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12] 그의 기량 향상을 위해 윙클스는 그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연계된 아마추어 팀인 리오네스에 배정했다. 잭슨은 리오네스에서 수많은 팀 기록을 경신했고, 이에 오리올스는 그에게 5만달러의 계약 보너스를 제시하며 영입을 시도했다.[13] 하지만 잭슨은 대학 장학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11]

1966년 2학년이 된 잭슨은 ASU 야구팀의 주전 중견수로 활약하며 (훗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릭 먼데이를 대체했다) 단일 시즌 최다 홈런 팀 기록을 깨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올 아메리카 팀에 선정되었다.[14] 그의 활약은 미키 맨틀을 발굴한 뉴욕 양키스의 톰 그린웨이드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대니 머터를 포함한 많은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다.[14] 애리조나 주립대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사이클링 히트 달성에 3루타 하나만을 남겨두었고, 수비에서는 슬라이딩 캐치와 홈 보살을 기록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14] 그는 피닉스 시립 경기장에서 홈런을 친 최초의 대학 선수이기도 했다.[15]

1966년 6월 7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잭슨은 전체 2순위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지명되었다.[16] 당시 1순위 지명권을 가졌던 뉴욕 메츠는 17세의 포수 스티브 칠코트를 선택했다.[17][18] 잭슨은 메츠가 자신이 백인 여자친구와 교제했기 때문에 자신을 지명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19] 당시 ASU 코치였던 윙클스는 이 주장을 부인하며 메츠의 결정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20] 이후 메츠의 조 맥도날드는 팀의 포수 포지션 보강 필요성에 따라 칠코트를 지명했다고 밝혔으나, 당시 메츠 구단을 운영했던 조지 바이스의 실제 의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0]

잭슨은 6월 13일, 9.5만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애슬레틱스와 계약했으며,[21] 쇼트 시즌 A 노스웨스트 리그의 루이스턴 브롱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1] 당시 감독은 그레이디 윌슨이었다.[22] 6월 24일 오리건주 유진에서 열린 프로 데뷔전에서는 5타수 무안타에 그쳤으나,[23][24] 다음 경기에서 첫 안타와 홈런을 기록했다.[25][26] 6월 30일 루이스턴에서의 홈 개막전에서는 2루타3루타를 쳤다.[27] 7월 6일 브롱스 소속 마지막 경기에서는 1회에 투구에 머리를 맞았지만 경기를 계속 뛰었고, 경기 후 두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하여 하룻밤 동안 관찰을 받았다.[28][29]

잭슨은 1966년에 두 개의 A급 팀에서 뛰었다. 브롱스에서는 단 12경기에 출전했고,[10][30] 이후 캘리포니아 리그의 모데스토 너츠로 옮겨 56경기에서 2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67년에는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더블 A 서던 리그의 버밍햄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는데, 팀 내 몇 안 되는 흑인 선수 중 한 명이었다.[31] 그는 당시 팀 감독이었던 존 맥나마라가 인종 차별 등 어려움이 많았던 그 시즌을 헤쳐나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2. 2. 프로 경력

1946년 출생하여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능 스포츠맨으로 알려졌다.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야구와 풋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TSN(The Sporting News) 선정 '올해의 대학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196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이 유력했던 뉴욕 메츠는 그 대신 젊은 포수 스티브 칠코트를 선택했고, 잭슨은 전체 2순위로 당시 캔자스시티에 연고를 두었던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지명되었다.[16][17][18] 잭슨 본인은 메츠 스카우트 대니 윈클스가 백인 여자 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메츠가 자신을 뽑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주장했지만,[19] 윈클스는 이를 부인했다.[20] 당시 메츠 단장이었던 조지 바이스의 진짜 의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메츠가 팀의 필요에 따라 포수를 지명했다는 설명도 있다.[20]

잭슨은 1966년 6월 13일, 9.5만달러에 애슬레틱스와 계약하고[21] 쇼트 시즌 싱글 A 노스웨스트 리그의 루이스-클라크 브롱스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22] 이후 같은 해 캘리포니아 리그의 모데스토(A급)를 거쳐, 1967년에는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더블 A 팀 버밍햄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다. 당시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부 지역에서 소수의 흑인 선수 중 한 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감독 존 맥나마라의 도움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했다고 회고했다.[31] 마이너 리그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은 잭슨은 곧 메이저 리그 무대에 오르게 된다.

2. 2. 1. 캔자스시티/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67-1975)

1966년 MLB 드래프트에서 뉴욕 메츠 대신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 1라운드(전체 2순위)로 지명되었다. 1967년 6월 9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이날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5회 선두 타자로 나와 3루타를 기록하며 첫 메이저 리그 안타를 신고했다.

팀이 1968년 시즌 전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잭슨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그해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했다. 신인으로서 홈런 29개(리그 4위)를 기록하며 뛰어난 장타력을 선보였지만, 타율은 0.250에 머물렀고 삼진을 무려 171개나 당하며 리그 최다를 기록했다. 그의 큰 스윙은 많은 홈런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많은 삼진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5년간 734개의 삼진을 당하며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많은 삼진을 당한 타자'가 되었다.

1969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폭발적인 타격감을 선보이며 8월이 되기 전에 40홈런을 넘어서, 1961년 로저 메리스가 세운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61개) 경신 가능성까지 제기되었다.[34] 이 해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나, 큰 관심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8월 이후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남은 기간 단 7개의 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최종 성적은 타율 .275, 47홈런(리그 3위), 118타점(리그 2위), 123득점(리그 1위), 장타율 .608(리그 1위)을 기록했고, MVP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1970년에는 타율 .237, 23홈런, 66타점으로 부진했으며, 리그 최다인 135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구단주 찰리 O. 핀리는 그를 마이너 리그로 보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35] 시즌 후 푸에르토리코 윈터 리그에 참가하여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71년에도 시즌 초반 부진했지만 점차 회복했고, 올스타전에서는 디트로이트타이거 스타디움 우익수 지붕 위 변압기를 맞히는 기념비적인 홈런을 쳤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77, 32홈런, 80타점, 그리고 4년 연속 리그 최다인 161삼진을 기록했다. 팀은 1931년 이후 처음으로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나, ALCS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3연패로 탈락했다. (잭슨은 3차전에서 2홈런을 기록했다.)

1972년 스프링 트레이닝 때 잭슨이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나자, 처음에는 동료들이 반대했지만 구단주 핀리는 이를 마음에 들어하며 모든 선수에게 콧수염을 기르면 300USD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콧수염의 날' 행사까지 열었다.[36] 이 해 잭슨은 타율 .265, 25홈런, 75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다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ALCS 최종 5차전에서 결승 득점을 올리는 과정에서 홈 스틸을 시도하다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월드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팀은 신시내티 레즈를 7경기 접전 끝에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73년 월드 시리즈 3차전 전의 잭슨


1973년은 잭슨에게 최고의 해였다. 타율 .293, 32홈런, 117타점, 99득점, 장타율 .531을 기록하며 리그 홈런, 타점, 득점, 장타율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고, 만장일치로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팀은 3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뉴욕 메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존 매클랙을 상대로 쐐기 2점 홈런을 치는 등 타율 .310, 6타점의 맹활약으로 팀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74년 시즌 전, 연봉 중재 소송에서 승리하여 전년도 7만달러에서 거의 두 배인 13.5만달러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38] 6월 5일에는 디트로이트에서 팀 동료 빌리 노스와 라커룸에서 싸움을 벌여 어깨 부상을 당했고, 싸움을 말리던 포수 레이 포스는 목 부상으로 3개월간 결장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팀은 4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잭슨은 1차전 선제 홈런을 포함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월드 시리즈 3연패에 기여했다. 시즌 성적은 타율 .289, 29홈런, 93타점이었다. 오클랜드 시절 잭슨은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는데,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나 태도에 대해 팬과 동료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렸다.[37]

1975년 시즌 전 연봉 중재에서는 패배하여 14만달러에 계약했다.[39] 이 해 잭슨은 타율 .253, 36홈런, 104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두 번째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팀은 5년 연속 지구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ALCS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3연패로 탈락했다. 시즌 종료 후, 팀의 에이스 투수였던 캣피쉬 헌터가 자유 계약 선수 제도를 통해 팀을 떠난 상황에서, 구단주 핀리는 1976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될 잭슨의 높은 연봉에 대한 부담 때문에 그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했다. 이로써 잭슨의 9년간의 애슬레틱스 생활은 마무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총 25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2. 2. 2. 볼티모어 오리올스 (1976)

1975년에 14만달러를 받았던 잭슨은 1976년 시즌을 앞두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 연장을 거부한 9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3년간 60만달러 계약을 요구했다.[40]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FA) 자격 취득이 예정되어 있었고, 구단주 찰리 핀리가 지불할 의사가 없었던 더 높은 연봉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있었다. 핀리와의 대립 끝에 잭슨은 1976년 4월 2일, 켄 홀츠먼, 마이너 리그 우완 투수 빌 반 보멜과 함께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애슬레틱스는 그 대가로 돈 베일러, 마이크 토레즈, 폴 미첼을 받았다.[39]

잭슨은 오리올스와의 계약서에도 즉시 서명하지 않고 시즌을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으나, 4주 후 팀에 합류하여[41] 5월 2일에 첫 타석에 들어섰다.[42][43][44][45] 잭슨이 볼티모어에서 보낸 유일한 시즌인 1976년에 그는 타율 .277, 27홈런, 91타점을 기록했으며, .502의 장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1위를 기록했고 개인 통산 최다인 28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46]

볼티모어와 오클랜드는 1976년 각 리그에서 2위를 차지했고, 뉴욕 양키스캔자스시티 로열스가 ALCS에 진출했다. 이는 1970년 이후 애슬레틱스 팀 없이 치러진 첫 ALCS였다. 당시 팀 동료였던 짐 파머는 훗날 잭슨에 대해 "레지 잭슨은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만함'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오만하지 않다."라고 평가하면서도,[47] 오리올스가 그와 재계약하지 않아 자유 계약 선수로 풀어준 것을 "멍청한" 실수라고 비판했다.[47] 시즌 종료 후 잭슨은 자유 계약 선수(FA) 자격을 얻었다.

2. 2. 3. 뉴욕 양키스 (1977-1981)

양키스는 1976년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에게 패배했다. 한 달 뒤인 11월 29일, 잭슨은 총 296만달러의 5년 계약을 양키스와 체결했다.[48][49][50] 오클랜드와 볼티모어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9번은 이미 양키스의 3루수 그레이그 네틀스가 사용하고 있었다. 잭슨은 재키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42번을 요청했으나, 시즌 시작 전 투수 코치 아트 파울러에게 배정되었다. 당시 통산 홈런 기록 보유자였던 행크 아론이 막 은퇴한 것을 고려하여, 잭슨은 아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44번을 요청하여 받았다. 그는 1977년 스프링 트레이닝 첫날에는 프랭크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20번을 잠시 착용했다가 44번으로 최종 변경했다. 흥미롭게도 잭슨이 44번 전에 요청했거나 잠시 사용했던 번호들(9번 로저 매리스, 20번 호르헤 포사다, 42번 마리아노 리베라)은 훗날 양키스에서 영구 결번 처리되었으며, 42번은 재키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전체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1977년 양키스에서의 첫 시즌은 순탄치 않았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 포수이자 팀 주장인 서먼 먼슨, 외야수 루 피니엘라 등 일부 선수들은 그의 합류에 기대를 표했지만, 현장 감독 빌리 마틴은 그렇지 않았다. 마틴은 1972년 타이거스 감독 시절, 잭슨이 속한 애슬레틱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잭슨과 마틴의 관계는 처음부터 껄끄러웠다.

잭슨과 팀 동료들 사이의 관계는 ''SPORT'' 매거진의 작가 로버트 워드와의 인터뷰 내용이 보도되면서 더욱 긴장되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중 가진 인터뷰에서 잭슨이 자신을 팀의 핵심 동력, 즉 "술을 휘젓는 빨대(the straw that stirs the drink)"라고 표현하며 먼슨을 깎아내렸다는 내용이 1977년 6월호에 실렸다.
잭슨이 양키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잭슨은 먼슨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말이 왜곡되었다고 일관되게 부인했다.[51] 그러나 ''The New York Times''의 데이브 앤더슨 기자는 잭슨이 자신에게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고 1977년 7월에 보도했다.[52] 팀 동료, 감독, 구단주,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먼슨과의 갈등설은 잭슨의 팀 내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6월 18일,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 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전국 생중계 경기에서 사건이 터졌다. 짐 라이스가 친 얕은 뜬공을 잭슨이 설렁설렁 처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분노한 마틴 감독은 이닝이 끝나기도 전에 잭슨을 경기에서 빼고 폴 블레어로 교체했다. 덕아웃으로 들어온 잭슨에게 마틴 감독은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다. 잭슨은 마틴의 음주 문제를 거론하며 판단력 부족을 비난했고, 마틴은 잭슨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코치 요기 베라엘스턴 하워드가 그를 제지해야 했다. 이 장면은 TV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양키스 구단은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잭슨과 마틴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마틴 감독에게 잭슨을 남은 시즌 동안 4번 타자(클린업 히터)로 기용하거나, 아니면 감독직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마틴은 결국 잭슨을 4번 타순에 배치했고, 이후 잭슨의 타격은 살아나 다음 50경기에서 13개의 홈런과 49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9월 14일, 치열한 지구 우승 경쟁 중이던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는 레지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쳐 팀에 2-0 승리를 안겼다. 양키스는 결국 레드삭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2.5경기 차로 따돌리고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며, 아메리카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꺾고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77년 월드 시리즈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시리즈 도중 인터뷰를 받던 서먼 먼슨이 포스트시즌 활약이 뛰어난 잭슨이 더 적합한 인터뷰 대상이라며 "미스터 옥토버(Mr. October)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별명은 잭슨의 상징이 되었다. 잭슨은 시리즈 4차전과 5차전에서도 홈런을 기록했다.

잭슨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은 6차전에서 나왔다. 그는 다저스의 투수 3명(버트 후튼, 엘리아스 소사, 찰리 호프)을 상대로 각각 던진 첫 번째 공을 모두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진기록을 세웠다(첫 타석에서는 볼넷으로 출루). 첫 홈런은 선발 투수 후튼을 상대로 양키 스타디움 우측 하단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라인 드라이브 타구였다. 두 번째 홈런은 구원 투수 소사를 상대로 더 빠른 라인 드라이브 타구로 거의 같은 지점에 떨어졌다. 팬들의 "레지! 레지! 레지!" 연호 속에서 터진 세 번째 홈런은 너클볼 투수 찰리 호프를 상대로 중앙 담장 너머 검은색 배터스 아이(batter's eye) 좌석까지 날아가는 약 144.78m짜리 초대형 홈런이었다. 잭슨은 훗날 진 마이클과 버디 테벳츠가 제공한 스카우팅 리포트가 다저스 투수들이 자신을 상대할 때 몸쪽 공을 주로 던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에 대비한 것이 주효했다고 밝혔다.[53]

잭슨은 5차전 마지막 타석에서 다저스 투수 돈 서튼을 상대로 홈런을 쳤기 때문에, 6차전의 3개 홈런을 포함하면 4명의 다른 투수를 상대로 4번의 연속된 스윙에서 4개의 홈런을 기록한 셈이 되었다. 그는 서로 다른 두 팀(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77년 월드 시리즈에서만 5개의 홈런(마지막 3개는 모두 초구 공략)을 포함해 통산 27번의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10개의 홈런, 24타점, .357의 타율을 기록했다. 베이브 루스, 알버트 푸홀스, 파블로 산도발만이 단일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3개의 홈런을 기록한 선수들이며, 루스는 1926년과 1928년 두 차례나 이 기록을 달성했다. 잭슨이 1977년 시리즈에서 기록한 총 25루타는 루스가 1928년에 세운 22루타 기록을 넘어선 월드 시리즈 신기록이었으며(윌리 스타젤1979년에 타이기록 수립), 단일 시리즈 5홈런 기록은 이후 체이스 어틀리(2009년)와 조지 스프링어(2017년)가 타이를 이루었다.

6차전 막판, 흥분한 팬들이 잭슨이 수비하던 우익수 근처 필드로 폭죽을 던지는 등 소란이 일자, 잭슨은 안전을 위해 타격 헬멧을 쓰고 필드를 잠시 벗어나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팬들이 필드로 쏟아져 나왔고, 잭슨은 마치 미식축구 라인배커처럼 팬들을 헤치며 라커룸으로 달려가야 했다.[54]

배트를 휘두르는 잭슨(1979년)


1977년에는 타율 .286, 32홈런, 110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지구 2연패에 공헌했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타율 .125로 부진했지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3승 2패로 앞선 6차전에서 모두 초구를 공략해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는 등 5타점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시리즈 통산 타율 .450, 5홈런, 8타점의 성적으로 팀에 15년 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안기며 개인 통산 2번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이 활약으로 "'''미스터 옥토버'''"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8년에는 타율 .274, 27홈런, 97타점을 기록했다. 팀은 시즌 중 보스턴 레드삭스에 최대 14경기 차까지 뒤졌으나, 놀라운 추격 끝에 정규 시즌 마지막 날 동률을 이루었다. 10월 2일에 열린 단판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잭슨은 추가점을 뽑는 홈런을 쳐내며 팀의 극적인 지구 우승에 공헌했다. 로열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타율 .462, 2홈런, 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연패를 이끌었고, 다저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도 타율 .391, 2홈런, 8타점의 활약으로 팀의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79년에는 타율 .297, 29홈런, 89타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지구 4위에 머물렀다. 시즌 종료 후, 제휴 관계에 있던 일본 프로야구 팀 닛폰햄 파이터스로의 이적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107]

1980년에는 개인 통산 유일하게 타율 .300을 기록했으며, 41홈런과 111타점을 올려 5년 만에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팀은 2년 만에 지구 우승을 되찾았다. 그 해 처음 제정된 실버 슬러거 상 (외야수 부문)을 수상했으며, MVP 투표에서는 조지 브렛에 이어 2위에 올랐다. 하지만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홈런과 타점 없이 부진했고, 팀은 3연패로 탈락했다.

1981년에는 50일간의 파업으로 6월에 시즌이 중단될 때까지 타율이 2할을 밑도는 부진에 빠졌다. 재개 후에는 회복했지만 타율 .237, 15홈런, 54타점으로 마쳤다. 그 해에는 전기/후기제로 변칙적인 일정이 되어 팀은 전반기 우승을 차지했다.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2홈런, 4타점을 기록했다. 친정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부상으로 이후 결장했지만 팀은 3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저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4차전부터 복귀하여 홈런을 치는 등 타율 .333을 기록했지만 팀은 2승 4패로 패퇴했다. 오프 시즌에 자유 계약 선수(FA)가 되었다.

2. 2. 4.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82-1986)

잭슨은 1981년 시즌이 끝나고 다시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구단주이자 유명 연예인이었던 진 오트리는 잭슨이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뛰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1982년 1월 22일 그와 5년 계약을 체결했다.

1982년 4월 27일, 잭슨이 에인절스 소속으로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른 첫 경기에서, 그는 시즌 초반의 부진을 딛고 전 동료 론 가이드리를 상대로 홈런을 터뜨렸다. 타석에 들어선 잭슨을 향해 양키스 팬들은 "레지!"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잭슨을 떠나보낸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에 대한 분노를 담아 "스타인브레너는 엿 먹어라!(Steinbrenner sucks!)"라는 외침으로 바뀌었다. 훗날 잭슨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무렵, 스타인브레너는 잭슨을 보낸 것이 양키스 구단주로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해 잭슨은 리그 최다인 156개의 삼진을 당했지만, 타율 .275, 39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고먼 토마스와 함께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에인절스는 3년 만에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달성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ALCS)에서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피트 부코비치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했지만, 이후 타율 .111로 부진했다. 팀은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진출까지 1승만을 남겨두었으나, 이후 3연패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시즌 후 잭슨은 개인 통산 두 번째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했다.

1983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소속의 잭슨


1983년 시즌에는 후반기 타율 .173으로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시즌 막바지에는 대타로 출전하는 빈도가 늘어났고, 최종 성적은 타율 .194, 14홈런, 49타점으로 신인 시절을 제외하면 커리어 최저 기록이었다.

1984년 9월 17일, 애너하임 스타디움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서 잭슨은 투수 버드 블랙을 상대로 개인 통산 500번째 홈런을 달성했다. 이는 그가 메이저 리그에서 첫 홈런을 친 지 정확히 17년이 되는 날이었다.

1986년 시즌, 잭슨은 4월에 타율 .407을 기록하는 등 6월까지 3할 타율을 유지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후반기에는 다시 타율 .195로 부진했다. 9월 18일 로열스와의 경기에서는 17년 만에 개인 통산 두 번째 한 경기 3홈런을 기록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41, 18홈런, 58타점이었으나, 92개의 볼넷을 얻어내며 여전한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팀은 4년 만에 다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ALCS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잭슨은 타율 .192로 부진했고, 팀은 3승 1패로 앞서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 1승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5차전 9회초 데이브 헨더슨에게 역전 홈런을 맞는 등 충격적인 3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시즌 종료 후 잭슨은 다시 자유 계약 선수(FA) 자격을 얻었다.

2. 2. 5.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복귀 (1987)

1986년 12월 24일, 잭슨은 친정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1년 계약을 맺으며 복귀했다. 1987년 시즌, 그는 오클랜드에서 이전에 사용했던 등번호 9번 대신, 뉴욕 양키스 시절부터 자신과 가장 연관된 등번호 44번을 달고 뛰었다.

41세가 된 잭슨은 시즌 초,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이로 인한 기량 저하를 보이며 타율 2할 전후의 부진을 겪었고, 시즌 후반에는 주전에서 밀려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 최종 성적은 타율 .220, 15홈런, 43타점에 그쳤다.

1987년 10월 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다.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그는 부러진 배트로 중전 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은 화이트삭스에게 5-2로 패배했다. 이 경기를 끝으로 잭슨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던 마지막 선수로 기록되었다.

은퇴 후인 1988년 1월, 잭슨은 일본 프로 야구 진출 가능성을 언급하며 "가격이 나왔습니다. 액수가 제가 안 한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시즌 막판 뉴욕 양키스로 복귀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으나, 잭슨은 이를 부인하며 "안 돼, 절대 안 돼. 유니폼 입은 모습은 못 볼 겁니다. 난 끝났어. 나에게 포크를 꽂아."라고 말하며 은퇴 의사를 확고히 했다.

2. 3. 은퇴 이후

1987년 시즌 후 은퇴를 발표했으며, 10월 4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마지막 타석을 소화했다. 이듬해인 1988년 1월, 일본 프로 야구 진출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으나 결국 은퇴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시즌 막바지 뉴욕 양키스 복귀설이 제기되었지만, 잭슨 본인이 이를 부인하며 은퇴 의사를 재확인했다.

1993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3.62%의 높은 득표율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특별 고문 자격으로 뉴욕 양키스 구단과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하며, 때때로 훈련장에 방문하여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다.[63]

2021년 5월 12일에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합류하여 구단주 짐 크레인의 특별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애스트로스 재단, 애스트로스 골프 재단 등과 협력하며 지역 사회 지원, 특히 STEM 교육 및 기술 개발을 통한 다양성 및 포용 증진에 기여했다.[63] 휴스턴이 2022년 월드 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고 우승하면서, 잭슨은 애스트로스 구단의 일원으로 우승을 경험했다.[64] 2024년 11월 10일,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면서 애스트로스 고문직을 사임했다.[65]

선수 시절부터 비시즌 동안 ABC 스포츠에서 현장 리포터 및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도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1983년, 1985년, 1987년에는 월드 시리즈 트로피 시상식을 주관했고, 1988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해설을 맡았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는 니켈로데온에서 ''레지 잭슨의 스포츠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영화 ''총알탄 사나이''에서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암살 시도에 이용되는 에인절스 외야수 역할로 출연했으며, ''리치 리치'', ''베이스키볼'', ''섬머 오브 샘'', ''벤치워머스'' 등 여러 영화와 ''디프런트 스트로크'', ''러브 보트'', ''아치 벙커의 말년'', ''맥가이버'', ''제퍼슨 가족'', ''말콤네 가족'' 등 다수의 TV 시리즈에도 본인 역할 등으로 출연했다. 스타 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조르디 라 포지 역할 후보로 고려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르바 버튼에게 돌아갔다.[68]

2010년에는 동료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밥 깁슨과 함께 ''60피트 6인치''라는 책을 공동 집필하여 자신들의 야구 경력과 철학을 공유했다. 1988년에는 세가 마스터 시스템용 야구 비디오 게임 ''레지 잭슨 베이스볼''이 그의 이름을 걸고 출시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어퍼 덱 컴퍼니의 광고 모델 및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사인 카드 프로모션 등에 참여했는데, 이는 트레이딩 카드 시장에서 사인 카드의 인기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69][70] 1980년대 초에는 파나소닉의 미국 현지 광고에도 출연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차례의 큰 화재를 겪었다. 1976년 오클랜드 자택 화재로 1973년 MVP 상과 월드 시리즈 트로피 등을 잃었고[71], 같은 집이 1991년 오클랜드 산불로 다시 불타며 더 많은 기념품이 소실되었다.[72] 1988년에는 수집용 자동차를 보관하던 창고 화재로 320만달러 상당의 자동차가 파괴되었다.[67] 2005년에는 탬파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67] 그는 전 샌프란시스코 49ers 감독이자 목사인 마이크 싱글터리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으며 내면의 변화를 겪었다고 밝히기도 했다.[67]

호탕하고 직설적인 성격 탓에 현역 시절 구단주, 감독, 동료 선수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았으나, 심판에게는 항상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팬 서비스에도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밀워키 브루어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에가와 스구루와 맞대결한 후, 자신을 "미국의 반역아"라고 칭한 에가와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배트를 선물한 일화도 있다. 과거 약물 사용 경력이나 의혹이 있는 선수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반대했으나, 이후 이중 잣대 문제를 지적하며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자이언츠''에는 그를 모델로 한 "로지 잭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3. 논란과 비판

호쾌한 성격과 거침없는 언행으로 인해 선수 시절 주변과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잦았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에는 구단주 찰스 O. 핀리와, 뉴욕 양키스 시절에는 당시 주장이었던 써먼 먼슨과 그라운드 안팎에서 대립했다. 특히 양키스 시절 감독 빌리 마틴 및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와의 불편한 관계는 여러 차례 미디어에 보도될 정도였다. 마틴 감독과는 원수지간으로 알려졌는데, 1977년 6월 18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 중에는 기용법을 놓고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전국으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반면, 심판에게는 매우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항의할 때는 반드시 고개를 숙였고, 심판을 노려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 심판은 "젊은 시절 그에게 '거포는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은퇴할 때까지 심판 판정에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의 매너는 최고였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팬 서비스에도 적극적이어서, 팬들이 사인을 요청하면 경기 전에도 가능한 한 흔쾌히 응해주었다.

밀워키 브루어스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하여 메이저 리그에 도전했던 일본 투수 에가와 스구루와 맞대결하여 중견수 앞 안타를 친 일화도 있다. 경기 전 에가와가 "나는 일본에서 반역아로 불렸다. 미국에서 반역아로 불리는 레지 잭슨에게 삼진을 잡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한 것을 알게 된 잭슨은, 경기 후 안타를 쳤던 배트에 "Good luck"이라는 메시지를 적어 선물했다. (에가와는 해당 경기에서 2실점했고, 개막 전에 방출되어 메이저 리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과거에는 약물 복용 전력이 있는 선수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나는 약물 사용 및 의혹이 있는 자에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런 선수들이 (투표) 1년 만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경우가 있다. 이중 잣대가 존재하므로 생각을 바꿨다"라고 설명하며 입장을 변경했다.

4. 주요 기록

OAK35135118132144136611111005461.178.269.305.57419681546145538213813629250741444250551713.250.316.452.7681969152677549123151363473341181351111420121428.275.410.6081.01819701495144265710121223195662617237511813510.237.359.458.817197115064256787157293322888016100663561617.277.352.508.8601972135572499721322522523675984259781255.265.350.473.82319731516295399915828232286117228077611711113.293.383.531.914197414860450690146251292609325508862041058.289.391.514.9051975157669593911503933630310417806675313310.253.329.511.8401976BAL13455849884138272272509128702547410817.277.351.502.8531977NYY14660652593150392322891101730474431293.286.375.550.925197813958151182140135272449714110358291338.274.356.477.83319791315374657813824229253899805653210717.297.382.544.926198014360151494154224413071111202831521227.300.398.597.9951981943823343379171151435403014621828.237.330.428.7581982CAL153621530921461713928210145048512215610.275.375.532.907198311645839743771411413549020552541405.194.290.340.63019841435845256711717225213818410557314110.223.300.406.706198514354146064116270272248512027812113816.252.360.487.847198613251741965101122181715811039211311514.241.379.408.7871987OAK1153743364274141151354321013304973.220.297.402.699MLB: 21년282011416986415512584463495634834170222811513681375194962597183.262.356.490.846

5. 수상 및 영예

잭슨은 21시즌 동안 활약하며 11번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6번의 리그 우승과 5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단 두 번의 패배 시즌만을 겪으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
주요 수상 및 기록



또한, 그는 통산 2,597개의 삼진으로 이 부문 역대 1위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한 경기 4개 이상의 삼진을 의미하는 골든 소브레로는 23번 기록하여 역대 2위에 올라 있다. (2014년 라이언 하워드에게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1위였다.) 그는 통산 500홈런 클럽 선수 중 한 시즌에 30개 이상의 홈런을 연속으로 기록한 적이 없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6. 평가

선수 생활 21시즌 중 18시즌에서 세 자릿수가 넘는 삼진을 당했으며, 통산 2597개의 삼진으로 역대 최다 기록이라는 불명예 기록도 가지고 있다. 선수 시절 그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코치와 구단주로부터 불화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통산 563홈런, 1702타점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고, 특히 월드 시리즈에서는 통산 10홈런, 24타점, 타율 .357, 장타율 .755의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 때문에 많은 MLB 팬들은 그를 큰 경기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터뜨려주는 최고의 클러치 히터, '미스터 옥토버' 로 기억한다.

호쾌한 성격과 거침없는 언행으로 인해 늘 주변과 문제를 일으켰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에는 구단주 찰스 O. 핀리와, 뉴욕 양키스 시절에는 당시 주장이었던 써먼 먼슨과 그라운드 안팎에서 대립했다. 또한 당시 감독 빌리 마틴 및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와의 관계는 여러 차례 미디어에 보도될 정도로 좋지 않았다. 특히 마틴 감독과는 원수지간으로 평가받았으며, 1977년 6월 18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는 선수 기용법을 놓고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이 전국 중계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반면, 심판에 대한 매너는 좋았다고 평가받는다. 항의할 때는 반드시 고개를 숙였고, 심판을 노려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한 심판은 "젊은 시절 그에게 '거포는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은퇴할 때까지 심판의 판정에 한마디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매너는 최고다"라고 칭찬했다. 또한, 팬들이 원하는 사인에는 경기 전에도 가능한 한 흔쾌히 응해주었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하여 메이저 리그에 도전했던 일본 투수 에가와 스구루와 대결하여 중견수 앞에 안타를 친 적이 있다. 경기 전 에가와는 "나는 일본에서 반역아라고 불렸다. 미국에서 반역아라고 불리는 레지 잭슨에게 삼진을 잡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고, 이를 알고 있던 잭슨은 경기 후 안타를 쳤던 배트에 "good luck"이라는 메시지를 적어 선물했다. (에가와는 그 경기에서 2실점했고, 개막 전에 방출되어 메이저 리그 도전은 거기서 끝났다.)

과거, 약물 스캔들이 거론된 인물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에 반대 입장이었으나, 후에 "나는 약물 사용 및 의혹이 있는 자에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런 자들이 1년 만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사실이 있다. 이중 잣대가 있으므로 나는 생각을 바꿨다"라고 설명하며 입장을 변경했다.

7. 한국과의 관계

(작성할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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