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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쓰치미카도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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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쓰치미카도 천황(後土御門天皇)은 일본의 제103대 천황으로, 1464년 고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로 즉위했다. 즉위 직후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교토가 혼란에 빠지고 황실 재정이 고갈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난을 피해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저택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난 이후 고대 의식을 부활시키려 노력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00년에 사망했으며, 장례 비용 부족으로 시신이 한 달 이상 궁궐에 방치되는 등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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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쓰치미카도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쓰치미카도 천황
이름고쓰치미카도 천황
일본어後土御門天皇 (Go-Tsuchimikado-tennō)
다른 표기後 (Go-)
추존 칭호고쓰치미카도인 (後土御門院) 또는 고쓰치미카도 천황 (後土御門天皇)
후사히토 (成仁)
출생일1442년 7월 3일
사망일1500년 10월 21일
매장지후카쿠사 기타노 미사사기 (深草北陵) (교토)
서명
재위 기간
재위 시작1464년 8월 21일
재위 종료1500년 10월 21일
일본 연호 재위 기간간쇼 5년 7월 19일 (음력) - 메이오 9년 9월 29일 (음력)
즉위식1465년 5월 22일 (분쇼 원년 4월 28일 (음력))
대嘗祭1467년 1월 23일 (분쇼 원년 12월 18일 (음력))
시대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
연호간쇼
분쇼
오닌
분메이
초쿄
엔토쿠
메이오
혈통
아버지고하나조노 천황
어머니오오이노미카도 (후지와라) 노부코
배우자니와타 아사코
간슈지 부사코
자녀가쓰히토 친왕 (고카시와바라 천황)
다카아쓰 친왕
오젠 여왕
니손 법친왕
이마와카미야
다이지코인노미야
지엔 여왕
리슈 여왕
정치
쇼군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히사
아시카가 요시타네
기타 정보
출생지와케노호 나리 저택
사망지구로도 어소
칭호쇼토칸 (법명)
이전 천황고하나조노 천황
다음 천황고카시와바라 천황
황실일본 황실

2. 생애

고하나조노 천황의 아들로 태어나 1464년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천조했다.[4] 1465년에 정식으로 즉위했으나,[8] 즉위 직후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교토는 10년 넘게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사찰과 귀족 저택이 불타고 조정의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황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5][8] 천황은 난을 피해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저택에서 오랫동안 피난 생활을 해야 했다.[8]

오닌의 난 이후 황폐해진 조정의 의례 복원에 힘썼으나[12],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사방배나 삼절회 등 일부 의식은 그의 노력으로 재개되었다.[11][12] 재위 기간 중 메이오의 정변과 같은 정치적 혼란과 역병 유행 등 어려움이 계속되었으며, 여러 차례 양위를 시도했으나 아시카가 쇼군가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13]

1500년 10월 21일(음력 9월 28일) 59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나,[14] 당시 조정의 극심한 재정난으로 인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시신이 한 달 이상 궁궐 창고에 방치되는 비극을 겪었다.[14][15] 기부금이 모인 후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36년 2개월에 걸친 재위 기간은 고카쿠 천황 이전의 일본 역사에서 가장 긴 치세 중 하나였으나, 전란과 혼란 속에서 황실의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기이기도 했다. 능묘는 교토 후시미구의 후카쿠사노키타노미사사기에 있다.[6]

2. 1. 출생과 즉위

생모인 이요쿄(伊与局)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출가시킬 생각으로 아버지인 고하나조노 천황의 친가인 후시미노미야가에서 자랐다. 그러나 고하나조노 천황에게 다른 남자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생모를 공경 가문인 다이쿠미카도가의 양녀로 삼아 황위 계승자로 정해졌다.[8]

간쇼 원년(1455년), 14세가 되자 시독(侍読) 나카하라 야스토미에게 학문을 배웠고, 그 외에도 요시다 카네토모, 이치죠 카네요시, 키요하라 무네카타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와카(和歌)와 한학(漢学) 강의를 들었다.

초로쿠 원년(1457년) 12월 19일에 친왕 선하(親王宣下)를 받았다.[8] 간쇼 5년(1464년) 7월 19일(양력 8월 21일)[4], 아버지 고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를 받아 천조(践祚)하였다.[4][8] 즉위식(即位式)은 이듬해인 간쇼 6년(1465년) 12월 27일에 거행되었다.[8] 즉위 후 분메이 2년(1470년)까지는 아버지 고하나조노 상황이 원정(院政)을 펼쳤다.[8]

천조 직후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교토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사찰, 신사, 공경들의 저택이 불타 없어지고[5][8] 조정의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황실의 권위는 크게 쇠퇴하였다.[5][8] 천황 자신도 당시 교토에서 유행하던 홍역(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리는 등 재난을 겪었다.[9] 난을 피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저택인 무로마치데이(室町第)에서 10년간 피난 생활을 해야 했다.[8] 피난 생활 중에는 요시마사의 정실히노 도미코를 섬기는 상로(上臈) 하나야마인 가네코와 간통하여 황녀를 출산했다는 기록이 있다(『친쵸쿄키』 문메이 5년 10월 22일 조).[10] 이는 당시의 혼란한 상황과 당사자들의 신분 때문에 불문에 부쳐졌다.[10] 히노 도미코와의 간통 소문도 돌았다. 또한 오닌의 난 중임에도 불구하고 쇼군 요시마사가 무로마치데이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는데, 천황이 항상 동석하여 함께 음주하는 상황이었다고 전해진다(『친쵸쿄키』, 『지츠타카공키』).[11] 이는 전쟁 중에도 연회를 즐기는 쇼군과 이에 동석하는 천황의 모습에서 당시 조정과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었음을 보여준다.

2. 2. 오닌의 난과 피난

간쇼 5년(1464년) 7월 19일, 아버지 고하나조노 천황의 양위를 받아 천조(践祚)했다.[4] (즉위는 1465년 12월 27일) 문명 2년(1470년)까지는 아버지 고하나조노 상황의 원정이 이루어졌다.

천조 직후인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교토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 혼란 속에서 사찰, 신사, 공경들의 저택이 불타 없어졌고, 조정의 재정은 고갈되어 극도로 쇠퇴했다.[5] 천황 자신도 당시 교토에서 유행하던 홍역으로 추정되는 병("적진", 赤疹)을 앓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9]

오닌의 난을 피하기 위해 천황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머물던 무로마치데이(室町第)로 거처를 옮겨 약 10년간 피난 생활을 해야 했다. 이 피난 생활 중에는 쇼군 요시마사의 정실인 히노 토미코를 섬기던 상로(上臈) 하나야마인 가네코와 간통하여 황녀를 출산했다. 본래 엄벌에 처해져야 할 행위였으나, 당사자들의 신분 때문에 천황과 가네코 모두 불문에 부쳐졌다.[10] 히노 토미코와의 간통 소문도 돌았다. 또한, 난리 중임에도 불구하고 쇼군 요시마사는 무로마치데이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는데, 천황 역시 이 연회에 참석하여 함께 술을 마시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11]

전란으로 인해 오닌 2년(1468년) 정월 초하루에는 사방배(四方拝)를 비롯한 조정의 여러 의식(조의)이 중단되기도 했다.

문명 9년(1477년) 오닌의 난이 종결되자 천황은 교토의 평정을 축하하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검을 하사했다. 이후 문명 11년(1479년)에는 내리(内裏)의 수리가 완료되어 피난처였던 무로마치데이에서 황궁으로 돌아왔다.

2. 3. 조정 의례 복원 노력

온인의 난으로 인해 사찰과 공경(公卿)의 저택이 불타고 조정의 재정이 고갈되면서 궁중은 크게 쇠퇴하였다.[5] 오닌(応仁) 2년(1468년) 1월 1일에는 사방배(四方拝)를 비롯한 조정 의례 일체가 중지되기도 했다.[9]

난이 끝난 직후에는 궁중의 옛 의식을 부활시키려는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으나,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조정의 고래 의식 부활에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해 모든 의식을 복원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노력으로 일부 중요한 의식들이 재개되었다.

  • 켄쇼고신가쿠(賢所御神楽)는 문명 4년(1472년)부터 문명 7년(1475년) 사이에 재흥되었는데, 이는 천황 본인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기록되어 있다.[17]
  • 문명 7년(1475년) 1월 1일에는 중지되었던 사방배(四方拝)가 재개되었다.[11]
  • 원일(元日), 백마(白馬), 답가(踏歌)의 삼절회(三節会) 역시 재흥되었다. 이 시기 절회(節会)에 참여했던 공가들의 명단인 “절회제역인공(節会諸役人控)”이 현재 국립역사민속박물관(国立歴史民俗博物館)에 소장되어 전해진다.[12]

2. 4. 말년과 죽음

오닌의 난이 끝난 후, 조정의 재정은 고갈되었고 황궁은 쇠퇴하였다.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조정의 전통 의식 부활에 열정을 쏟았으나[12], 재정난 등으로 인해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원일절회, 백마절회, 답가절회의 삼절회는 재흥되었고,[12] 겐쇼 고신카구라(1472년-1475년 사이 재흥), 사방배(1475년 재개) 등 일부 의식은 천황의 강한 의지에 따라 복구되었다. 분메이 11년(1479년)에는 다이리의 수리가 끝나 피난처였던 무로마치 다이에서 환궁했다.[12]

말년에는 역병이 자주 유행하여, 초쿄 2년(1488년)과 메이오 원년(1489년)에 역병이 돌자, 천황은 선대 천황들이 쓴 반야심경을 가져와 예배하고 사찰과 신사에 기도를 명하며 역병 종식을 빌었다.[12] 또한, 엔토쿠 3년(1491년)에는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요청에 따라 롯카쿠 다카요리 토벌을 명하는 윤지와 니시키노미하타를 하사하기도 했다.[12]

메이오의 정변(1493년)이 일어나자 이에 분개하여 한때 양위를 결심했으나, 신하 간로지 지카나가의 만류로 취소했다. 당시 조정은 양위 의식을 치를 비용조차 없었으며, 정변을 일으킨 호소카와 마사모토에게 비용을 빌려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총 다섯 차례 양위를 시도했지만,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던 아시카가 쇼군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13]

메이오 9년(1500년) 9월 28일, 고쓰치미카도 천황은 고쇼의 구로도에서 5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14] 그러나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천황의 시신은 40일 넘게 궁궐 창고에 방치되었다.[14][15] 고노에 마사이에는 자신의 일기 『고호코인키』에 "오늘 밤 선대 군주(고쓰치미카도 천황)의 장례가 치러진다. (중략) 오늘에 이르러 붕어하신 지 43일째이다. 이토록 장례가 늦어진 전례가 있었던가"라고 기록하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15] 기부금이 모인 후에야 장례가 치러져 센뉴지로 옮겨졌다.[15] 일설에는 헤이안 시대 고이치조 천황 이후 재위 중 붕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아들 고카시와바라 천황에게 형식상 양위한 뒤 '상황'의 장례로 치렀다는 해석도 있다.[16] 에도 시대 문헌 『속본조통감』에는 시신이 부패하여 벌레가 들끓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부 처리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7]

능묘는 교토 후시미구의 후카쿠사노키타노미사사기에 있다.[6]

3. 연호

고쓰치미카도 천황(後土御門天皇일본어)의 재위 기간은 다음 연호(年号)들을 통해 알 수 있다.[3]

연호사용 기간
간쇼(寛正)1465년 12월 27일 ~ 1466년 2월 28일
분쇼(文正)1466년 2월 28일 ~ 1467년 3월 5일
오닌(応仁)1467년 3월 5일 ~ 1469년 3월 28일
분메이(文明)1469년 3월 28일 ~ 1487년 7월 20일
초쿄(長享)1487년 7월 20일 ~ 1489년 8월 21일
엔토쿠(延徳)1489년 8월 21일 ~ 1492년 7월 19일
메이오(明応)1492년 7월 19일 ~ 1500년 9월 28일


4. 가계

아버지는 고하나조노 천황이며, 어머니는 오이노미카도 노부코(大炊御門信子)이다.

부계로는 할아버지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親王), 할머니 庭田幸子|니와타 사치코일본어가 있다. 증조부는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伏見宮栄仁親王)과 庭田経有|니와타 쓰네아리일본어이며, 고조부 중에는 북조 제3대 천황인 스코 천황(崇光天皇)도 포함된다.

모계로는 할아버지 藤原孝長|후지와라 다카나가일본어가 있다.

4. 1. 부모와 형제

즉위 전 이름(諱, 이미나)은 '''成仁親王|후사히토 신노일본어'''였다.[3]

아버지는 고하나조노 천황이고, 어머니는 후지와라 다카나가(藤原高長)의 딸인 오이노미카도 노부코(大炊御門(藤原)信子|오이노미카도 노부코일본어)이다.

자녀
생모자녀 이름비고
니와타(미나모토) 아사코(庭田(源)朝子|니와타 (미나모토) 아사코일본어)
(1437–1492)
(니와타 시게카타(庭田重賢|니와타 시게카타일본어)의 딸, 후의 소교쿠몬인(蒼玉門院|소교쿠몬인일본어))
카츠히토 친왕(勝仁親王|카츠히토 신노일본어)장남, 후의 고카시와바라 천황
타카아사 친왕(尊敦親王|타카아사 신노일본어)차남 (1472–1504), 후의 손덴 입도친왕(尊伝入道親王|손덴 뉴도신노일본어)
아들(1475)
카주지(후지와라) 후사코(勧修寺(藤原)房子|칸주지 후사코일본어)
(카주지 노리히데(勧修寺教秀|칸주지 노리히데일본어)의 딸)
다이지코인노미야(大慈光院宮|다이지코인노미야일본어)장녀
리슈 여왕(理秀女王|리슈 조오일본어)다섯째 딸
치엔 여왕(智円女王|치엔 조오일본어)넷째 딸
(1485)
카잔인(후지와라) 카네코(花山院(藤原)兼子|카잔인 카네코일본어)
(카잔인 모치타다(花山院持忠|카잔인 모치타다일본어)의 딸)
요젠 여왕(応善女王|오젠 조오일본어)셋째 딸
닌손 법친왕(仁尊法親王|닌손 홋신노일본어)셋째 아들
치엔 여왕(知円女王|치엔 조오일본어)둘째 딸
이마와카노미야(今若宮|이마와카노미야일본어)넷째 아들
생모 불명지쇼 여왕(慈勝女王|지쇼 조오일본어)


4. 2. 배우자와 자녀

(1437 ~ 1492)
(니와타 시게카타의 딸, 쇼교쿠몬인(蒼玉門院))장남: 가츠히토 친왕(勝仁親王)1464년 ~ 1526년훗날의 고카시와바라 천황차남: 타츠아츠 친왕(尊敦親王)1472년 ~ 1504년존덴 법친왕 (尊傳入道親王), 세이렌인(青蓮院) 주지황자1475년요절텐지(典侍) 가쥬지 후사코(勧修寺房子)
(생몰년 미상)
(가쥬지 노리히데의 딸, 아사노츠보네(阿茶局), 신다이텐지(新大典侍))장녀: 다이지코인노미야(大慈光院宮)생몰년 미상오카노덴(岡殿)황녀1485년요절넷째 딸: 치엔 여왕(智円女王)1486년 ~ 1513년안젠지(安禅寺) 주지다섯째 딸: 리슈 여왕(理琇女王)1489년 ~ 1532년호쿄지(宝鏡寺) 주지궁인(宮人) 가잔인 가네코(花山院兼子)
(1448년 ~ 1513년)
(가잔인 모치타다의 딸, 조로노츠보네(上臈局))둘째 딸: 호우안지노미야(保安寺宮)1473년 ~ 1533년이즈미 호안지(和泉宝安寺) 주지셋째 딸: 오젠 여왕(応善女王)1476년 ~ 1497년주가쿠 에센(寿岳恵仙), 안젠지(安禅寺) 주지셋째 아들: 닌손 법친왕(仁尊法親王)1482년 ~ 1515년닌고 법친왕(仁悟法親王), 엔만인(円満院) 주지넷째 아들: 호우렌인노미야(法蓮院宮)1484년 ~ 1494년시모카와라노미야(下河原宮), 이마와카노미야(今若宮), 조죠인(上乗院) 주지생모 불명둘째 딸: 지쇼 여왕(慈勝女王)1470년 ~ 1509년대성사(大聖寺) 주지양자후시미노미야 구니다카 친왕1456년 ~ 1532년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 친왕의 아들


참조

[1] 웹사이트 後土御門天皇 (103) http://www.kunaicho.[...] 2013-08-28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4]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5]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7]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8] 서적 中世禁裏女房の研究 思文閣出版
[9] 웹사이트 応仁の乱と疫病の流行 https://www.tenri-u.[...] 天理大学文学部歴史文化学科 2021-05-06
[10] 서적 中世の国家と天皇・儀礼 校倉書房
[11] 서적 義政期の将軍家と天皇家 勉誠出版
[12] 서적 室町期廷臣社会論 塙書房
[13] 서적 母なる天皇―女性的君主制の過去・現在・未来
[14] 서적 母なる天皇―女性的君主制の過去・現在・未来
[15] 서적 戦国時代の貴族―『言継卿記』が描く京都 講談社学術文庫
[16] 서적 中世の国家と天皇・儀礼 校倉書房
[17] 서적 〈凶事記〉の作成とその意義 岩田書院
[18] 서적 母なる天皇―女性的君主制の過去・現在・未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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