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씨 (쓰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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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씨(宗氏)는 12세기경 쓰시마국의 재청관인으로 대두하여, 아비루 씨를 멸하고 쓰시마 전역을 장악했다. 13세기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일본 공격 당시 소 스케쿠니가 전사했으나, 소 씨는 쓰시마에서 세력을 유지했다. 난보쿠초 시대에 소 모리쿠니가 쇼니 씨의 슈고다이로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쓰시마국 지배를 승인받았다. 소 씨는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으며, 계해조약을 통해 무역을 독점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담당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조선 외교권을 외무성으로 이관하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 소 씨는 쓰시마 후추 번주 가문으로, 다이라 도모무네를 시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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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씨 (쓰시마) | |
---|---|
기본 정보 | |
![]() | |
성씨 | 소 씨 |
로마자 표기 | So-shi |
본관 | 쓰시마국 |
가문 | 고레무네 씨 |
시조 | 다이라노 도모무네 |
마지막 통치자 | 알 수 없음 |
현 당주 | 알 수 없음 |
창건 연도 | 11세기 |
해체 | 알 수 없음 |
통치 종료 | 1871년 |
분가 | 알 수 없음 |
가문 정보 | |
가명 | 소 씨 |
본성 | 고레무네아손 (자칭 간무 헤이시도모모리 류) |
가조 | 소 시게히사 |
종별 | 무가 화족 (백작) |
출신지 | 알 수 없음 |
근거지 | 쓰시마국 도쿄도메구로구가미메구로 |
주요 인물 | 소 사다모리 소 스케쿠니 소 요시토시 |
지류 | 알 수 없음 |
2. 역사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에 소 모리쿠니(宗盛国)는 쇼니 씨(少弐氏)의 슈고다이(守護代)로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로부터 쓰시마 국의 지배를 승인받았다. 이후 진제이 탄다이(鎮西探題) 성립과 함께 이마가와 씨(今川氏)가 쓰시마 슈고(対馬守護)가 되었으나, 이마가와 씨가 해임된 뒤에는 소 스미시게(宗澄茂)가 슈고다이로서 슈고직을 이어받았다.
2. 1. 가마쿠라 시대
12세기경 소씨는 쓰시마국의 재청관인으로써 대두하였고, 현지 최대의 세력이었던 아비루씨(阿比留氏)를 멸하고 쓰시마 전역을 손안에 넣었다. 고레무네 씨의 재청관인이 무사화되면서 묘지로써 소(宗)를 사용한 것이 고문서에 실려 있다.13세기 고려와 몽골(원)의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했을 당시에는 일본의 국경 방위를 맡아, 소 스케쿠니가 분전 끝에 전사하였으나, 그 뒤로도 쓰시마 안에서 소씨는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2] 소 스케쿠니는 실존이 확실한 최초의 당주로 쓰시마 국 지토다이를 역임했으며, 분에이의 역에서 일족 80여 기가 사스우라에서 전사했다.[8]
소 씨 가계 전승에 따르면,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다자이쇼니(大宰少弐) 무토 스케요리의 피관(被官)으로서, 쓰시마 최대의 호족 아비루 씨를 토벌한 소 시게히사를 초대 당주로 한다.[8] 다자이후는 고레무네 시게히사에게 반란을 진압하고 아비루 씨를 멸망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승리의 대가로 쓰시마의 슈고인 쇼니 씨로부터 지토 (지방 영지 관리인)의 직위를 받았다.[3]
무토 씨(쇼니 씨)의 슈고다이(守護代)·지토다이로서 쓰시마 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소 씨이다.
2. 2.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
무로마치 시대 초기, 쓰시마섬은 산지가 많고 농경지가 적어 소 씨는 조선과의 교역에 따른 이익에 의존해야 했다. 사이고쿠(西国)의 다이묘(大名), 상인, 쓰시마의 여러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교역을 행했으나, 소 씨 본종가는 조선의 왜구 정책 등을 이용해 점차 독점적 지위를 굳혀갔다.[4] 1443년, 쓰시마의 다이묘 소 사다모리는 계해조약을 제안하여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가는 무역선의 수를 결정하고,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했다. 소 씨는 조선에 대한 해적 공격 횟수를 대폭 줄이는 대가로 조선과의 일본 무역에 대한 사실상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소 씨가 일본의 주요 씨족 중 하나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무역에서 얻은 부와 권력은 작은 영토와 조선에 대한 종속적인 위치를 훨씬 넘어섰다. 소 씨는 조선에 '왜관'이라 불리는 일본인 거류지를 건설했다. 응영의 외구나 삼포 왜란으로 일시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조선 무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했다.센고쿠 시대에는 규슈(九州) 본토로 진출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모리씨, 시마즈씨, 오토모씨, 류조지씨에 막혀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에서는 히데요시를 따라 그 공으로 영지 지배권을 받았다. 임진왜란(일본명 '''분로쿠 · 게이초의 역''')에서는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따라 종군해 부산성(釜山城), 한성(漢城), 평양성(平壌城)을 공략해 함락시키는 등 일본군 선봉으로 조선과 명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며, 전투뿐 아니라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 측의 외교를 맡아 행하기도 했다.[6]
2. 3. 임진왜란과 에도 시대
센고쿠 시대에 소 씨는 규슈 본토로 진출하려 했으나 모리 씨, 시마즈 씨, 오토모 씨, 류조지 씨 등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충성하여 영지 지배권을 인정받았다.[2] 임진왜란(일본명 '''분로쿠 · 게이초의 역''')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부산성, 한성, 평양성을 공략하는 등 일본군 선봉에서 활약했으며,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 측 외교를 담당하기도 했다.[2]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 요시토시는 서군에 속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본래 영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1] 이후 소 씨는 쓰시마 후추 번의 번주 가문이 되었고, 에도 시대 동안 도쿠가와 막부가 유일하게 정식 국교를 맺었던 조선과의 외교 실무 및 무역 업무를 독점적으로 담당했다.[10] 1609년에는 조선과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까지 조선과 일본 간 외교 무역의 기본 구조를 정했다.[10] 이를 통해 일본은 은, 구리 등을, 조선은 인삼, 생사, 비단 직물 등을 수출했다.[10]
쓰시마 섬은 쌀 생산량이 적어 무곡(無穀)이었으나, 조선과의 외교 및 무역을 담당한 공로로 막부는 소 씨 가문에 국주격, 10만 석 격을 인정했다.[10] 번주의 관위도 국주 다이묘격의 종4위하 시종에 임명되었으며, 쓰시마노카미 관직을 대대로 세습했다.
소 씨 가문은 쓰시마 섬 외에도 1595년에 사쓰마국 이즈미군에 1만 석을 받았으며(1599년에 히젠국 기이군으로 변경), 1817년에는 히젠국 마쓰우라군, 쓰쿠시국 고이군, 시모쓰케국 도가군・아소군에 총 2만 석이 추가되었지만, 쓰시마 번의 재정은 쌀 생산에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 조선 무역에 의존했다.[10]
17세기 후반에는 무역 활황과 은광 재개발 성공으로 쓰시마 번은 "서국 제일의 부자"라고 칭송받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무역 불황과 은광 쇠퇴로 재정난에 빠졌다. 반복적인 절약과 막부의 재정 지원으로도 재정난은 해소되지 않아, 번 폐지 시에는 막대한 부채를 남겼다.[10]
산킨코타이는 특별히 3년에 한 번이면 되었다. 에도에 저택을 마련했고, 쓰시마 후추(이즈하라정)와의 사이를 다이묘 행렬을 벌여 왕래했다. 쓰시마 섬과 각 영지, 에도 저택뿐만 아니라, 교토, 오사카, 이키 가쓰모토, 하카타(나중에 폐지), 나가사키에도 창고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부산에는 왜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수백 명의 가신과 상인이 상주했다.[10]
2. 4.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84년(메이지 17년) 소 시게마사는 화족으로 편입되어 백작이 되었다. 본래 쓰시마 후추 번은 현미(번 본래의 쌀 수입) 5만 석 이하로 자작이 되어야 했지만, 과거 조선과의 교역을 담당했던 점과 10만 석격이 감안되어 백작위가 수여되었다.[4]시게마사의 아들 소 시게모치 백작은 귀족원의 백작 의원으로 당선되어 역임했다. 1923년 시게모치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소 씨 가문은 막대한 빚을 안고 있었다. 이에 재산 정리를 위해 유복한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쓰시마 출신 나가도메 고타로가 사재를 제공하여 혈연을 중시하는 구 번사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시게모치의 여동생의 아들인 구 구루리 번주 가문의 구로다 자작가의 구로다 다케시가 소 다케시로 소 씨를 상속하게 되었다.[5]
그러나 다케시는 당시 중학생이었고, 소 씨 가문은 파산 위기에 계속 시달렸다. 1931년 다케시는 고종의 서녀 이덕혜와 결혼했지만, 덕혜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왕가로부터 소 씨 가문에 연간 1만 엔 정도의 자금 원조가 이루어졌다.[6]
2. 4. 1. 조선 외교권의 외무성 이관 경위
1867년 대정봉환으로 신정부가 성립되었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 구 막부 세력이 일으킨 보신 전쟁으로 인해 정부는 외교에 전념할 수 없었다.이에 정부는 1868년 3월 23일, 소 요시타쓰에게 조선 외교를 계속 담당하게 함과 동시에, 대정봉환으로 일본의 정치와 외교가 조정에서 처리될 것임을 조선 정부에 전달하도록 명령했다.[10] 요시타쓰는 윤 4월 6일, 정부에 귀순을 맹세하고 조선과의 국교 및 무역에서 조선에 속국 취급받는 "종전의 숙폐"를 개정할 것을 제안하며, 대마번 단독이 아닌 정부 차원의 인원 파견을 요청했다.[10]
그러나 보신 전쟁 중인 정부는 인원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고, 4월 22일 소 씨에게 재차 통지를 통해 우선 막부가 폐지되고 일본의 정치가 일신된 것을 조선 정부에 전달하도록 명령했다.[10] 고마쓰 다테와키와 오시마 도모노스케의 회담에서 통고문과 메이지 정부의 새 인장 사용 등이 결정되었고, 대마번은 9월 29일 조선 정부에 대정 일신과 조선 정부가 준 인장 대신 메이지 정부의 인장을 사용할 것 등을 통고했다.[10]
흥선 대원군이 이끌던 조선 정부는 이에 경악했다. 중화 황제 외에는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 "황"이나 "칙" 글자 사용, 조선 정부가 하사한 인장 폐기 등은 조선에게 굴욕적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를 "격외"의 것으로 간주하여 수령을 거부했다. (서계 문제)[10]
1869년에 보신 전쟁이 정부군 승리로 대세가 결정되자, 정부, 특히 외무성은 소 씨와 조선의 "사신" 형태 외교를 폐지하고 외무성이 외교권을 장악하여 서양의 만국 공법에 따른 수호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10]
소 씨 측은 조선 외교 담당 지속 명령과 어긋난다고 상신했지만, 외무성은 태정관 보고에서 소 씨에게 외교 담당을 인정했던 것은 전란 중의 잠정 조치였으며, 특정 가문이 특정 국가와의 외교권을 세습하는 것은 "고례 묵수 인순 지사론"에 기초한 구 폐단임을 지적했다.[10] 러시아 등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활발한 상황에서 이러한 구 폐단을 지속하면 일본에 위험이 닥칠 것을 우려했다.[10]
당시 외무성에 조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외무성이 조선 외교를 관할하면서도 관료 파견 및 조사 전까지는 소 씨의 "사교"에 맡기는 "절충안"을 채택했고, 태정관은 1869년 11월 12일 소 씨에게 이를 통고했다. 그 때문에 소 씨는 이후에도 조선 외교권을 잡았다.[10]
외무성 관할 하에 조선 교섭을 계속했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교섭을 거부했다. 1870년 5월, 조선 정부는 청의 속국으로서 청 황제만을 황제·황상으로 받들며, 일본과는 국주·대군 칭호로 교류해 왔는데 갑자기 "황" 칭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섭을 거부했다.[10]
1872년 5월, 외무성은 소 씨의 외교 담당 파면을 정식 결정하고, 소 시게마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파면과 외교권 이양을 전달하고자 했다.[10] 7월 폐번치현으로 이즈하라번이 폐지되었지만, 7월 29일 소 시게마사는 외무대승이 되어 조선 외교에 계속 관여했다. 그러나 견사 계획은 소 씨의 재정 문제 등으로 실시되지 못했다.[10] 12월 18일 시게마사 파견은 중지되고, 사가라 단조·우라세 사이스케를 조선에 파견하여 소 씨의 외교 담당 파면 통지와 왜관 철수를 진행했다. 1873년 3월, 조선 측과 사가라 등의 면회가 실현되었지만, 조선 측이 태도를 밝히지 않아 일본 측은 왜관 폐지와 인원 철수를 강행했다.[10] 이로써 메이지 유신 후의 일조 교섭 및 중세 이래 소 씨와 조선의 외교 관계는 막을 내렸다.[10]
2. 4. 2. 소 씨의 백작위 서임 경위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다음 날 8일에 소 시게마사는 백작에 서임되었다.[4] 본래대로라면 현미(번 본래의 쌀 수입) 5만 석 이하인 후추 번은 자작이 되어야 했지만, 과거 조선과의 교역을 담당했던 점과 10만 석격이 감안되어 백작위가 수여되었다고 한다.'서작 내규'에서는 구 제후의 백작 기준이 현미 5만 석 이상의 중번 지사였지만, 구 이즈하라 번의 현미는 3만 5413석으로 백작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7] '서작 내규'는 모든 작위에 대해 훈공에 따른 서작을 인정하고 있지만, 소 씨의 경우에는 작위가 올라갈수록 훈공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예외 조치가 취해진 것은 히라도번 마쓰우라 씨와 소 씨뿐이었다. 소 씨는 마쓰우라 씨와 달리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소 씨가 국주격이었던 것이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소 씨 이외의 구 국주 다이묘가 모두 백작 이상이 되었기 때문에, 소 씨만을 자작으로 하면 소 씨에게서 불만이 나올 수 있어, 특례 조치로 백작으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8] 실제로 소 씨에서는 원래 받을 수 없는 백작위조차 불만이 있었던 듯하며, 구 국주임을 이유로 후작위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산조 사네토미에게 제출하기도 했다.[9]
3. 역대 당주
- 시게히사
- 스케쿠니
- 모리아키라
- 모리쿠니
- 쓰네시게
- 스미시게
- 요리시게
- 사다시게
- 사다모리 - 오에이의 외침 때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과 싸웠고, 조선 왕조와 관계를 맺었다.
- 시게요시 - 아시카가 요시나리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았다. 1461년에 조선 조정으로부터 "쓰시마 국 지배자" 칭호를 받았다.[11]
- 사다쿠니
- 무라모리 - 초명은 모리사다. 아시카가 요시무라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았다.
- 요시모리 - 초명은 모리즈미. 아시카가 요시타네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았다. 삼포왜란 발발 당시의 당주였다.
- 모리나가
- 마사모리
- 하루야스 - 초명은 사다히사, 사다야스.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하루시게로 바꾸었다가 다시 하루야스로 변경.
- 요시시게 - 아시카가 요시후지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음.
- 시게히사
- 요시즈미 -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음.
- 요시토시 - 처음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아키카게,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한 글자를 받아 요시카게로 바꾸었다. 1587년~1588년 사이에는 양부인 17대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기도 했다. 임진왜란(1592–1598) 동안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하에 있었다.
- 요시나리
- 요시자네
- 요시쓰구
- 요시미치
- 요시노부
- 미치히로
- 요시유키
- 요시아리
- 요시나가
- 요시카쓰
- 요시카쓰
- 요시카타
- 요시아키라
- 요시요리
- 요시타쓰
- 시게모치
- 다케유키 - 1931년부터 1953년까지 덕혜옹주와 결혼했다.
- 다쓰히토 - 현재 명목상의 당주이며, 다케유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사이의 아들이다.
4. 주요 가신
- 야나가와 노부노리
- 아메노모리 호슈
- 스야마 도안
5. 계보
소(宗)씨 가계 전승에 따르면,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다자이쇼니(大宰少弐) 무토 스케요리의 피관(被官)으로서 쓰시마 최대의 호족 아비루 씨를 토벌한 소 시게히사를 초대 당주로 한다.[8] 가계 전승에서는 시게히사는 간무 헤이씨기요모리 계이며, 타이라노 토모모리의 손자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다자이후재청 관인의 유이소 씨로 여겨진다.[8] 쓰시마 번의 공적인 자료인 "소씨 가계도"에는 "간겐 4년, 쓰시마 주(州) 재청 아비루 헤이타로를 멸하고, 마침내 아버지 지무네의 양도를 받아 습봉, 시게히사의 할머니의 씨를 취하여 유이소를 자가의 성으로 삼다"[9]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따르면 시게히사의 할머니가 유이소 씨였기 때문에 소 씨를 칭하고 성을 유이소로 했다는 것이다.
실존이 확실한 최초의 당주는 쓰시마 국 지토다이를 역임한 소 스케쿠니이며, 분에이 11년(1274년) 몽골의 침략(분에이의 역)에서 일족 80여 기와 함께 사스우라에서 전사했다.[8]
무토 씨(쇼니 씨)의 슈고다이(守護代)·지토다이로서 쓰시마 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소 씨이다.[8] 쇼니 씨는 분에이 10년(1273년) 무렵까지 쓰시마 슈고로 확인되지만, 그 후 박탈된 듯하며, 고안 9년(1286년) 이후에는 쓰시마 지토로 등장한다.[8] 그러나 이 가마쿠라 후기에 쇼니 씨-소 씨의 라인의 쓰시마 섬 지배는 강화되었다. 공사 징수·면제권, 소령 안도권 등은 가마쿠라 막부가 슈고에게 부여한 권한이 아니라, 원래 쓰시마노카미에 속하는 권한이지만, 가마쿠라 후기가 되면 쇼니 씨가 권한을 흡수하고, 소 씨가 지토다이로서 그 권한을 집행하게 된다.[8]
소 씨(쓰시마) 계보는 다음과 같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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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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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寛政重修諸家譜
続群書類従完成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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