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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노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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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사노 가오루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도쿄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비서관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중의원 의원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문부대신, 내각관방부장관, 통상대신 등을 지냈으며, 200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경제 재정 정책에 정통하며, 소비세 증세를 통한 재정 재건을 주장하는 등 정책통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2010년 일본의 새벽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탈당했고, 2011년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을 역임했다. 2012년 후두암으로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201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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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노 가오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Kaoru Yosano 1998.jpg
1998년 공식 사진
이름요사노 가오루
로마자 표기Yosano Kaoru
한자 표기与謝野 馨
출생일1938년 8월 22일
출생지도쿄 지요다구 고지마치
사망일2017년 5월 23일
사망지도쿄
아버지요사노 시게루
어머니요사노 미치코
친척요사노 아키코 (할머니)
학력도쿄 대학 졸업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경력
정당자유민주당 (1976–2010; 2017)
다른 정당일출 (2010–2011)
무소속 (2011–2017)
전직일본원자력발전 직원
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의원 의원 비서
관직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재정정책)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
후쿠다 야스오 개조내각
아소 내각
간 나오토 제2차 개조내각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저출산 대책
남녀 공동 참여
재무대신아소 내각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금융)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
아소 내각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규제 개혁)후쿠다 야스오 개조내각
내각관방장관제1차 아베 개조내각
납치 문제 담당 대신제1차 아베 개조내각
통상산업대신오부치 내각
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
문부대신무라야마 내각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담당)제2차 하시모토 내각
의원
중의원 의원구 도쿄 1구
도쿄 1구
비례 도쿄 블록
도쿄 1구
비례 도쿄 블록
당선 횟수10회
자유민주당
세제 조사회장총재: 아베 신조
정무조사회장총재: 고이즈미 준이치로
기타 정보
작위정3위
훈장[[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욱일대수장
학위법학사 (도쿄 대학, 1963년)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장남: 요사노 유
차남: 요사노 조
친족 (정치가)증조부: 요사노 레이겐
대백부: 호 쇼타로
조부: 요사노 뎃칸
조모: 요사노 아키코
아버지: 요사노 히데
어머니: 요사노 미치코
동생: 요사노 다쓰
여동생: 요사노 후미코
사촌 동생: 요사노 히사시

2. 생애

도쿄 대학 졸업 후 일본원자력발전에서 근무하던 요사노 가오루는 민사당의 핵 확산 방지 조약 관련 유럽 방문 조사단에 통역으로 동행하며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나카소네 야스히로와의 만남은 훗날 그의 정계 진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7년, 39세에 여포성 림프종을 앓은 요사노 가오루는 이후 오랜 암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80] 중의원 첫 당선 10개월 후 발병한 여포성 림프종은 10년 뒤 장간막으로 전이되었으나, 국립암연구센터에서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고 1993년에 치료를 마쳤다.

2000년 직장암 절제, 2001년 전립선암 치료(호르몬 요법 및 방사선 치료), 2006년 하인두암으로 성대 일부와 목 림프절, 암 조직 절제 및 방사선 치료 후 방광염을 겪었다.[80]

하인두암 수술 후 식도 협착으로 인한 음식 섭취 어려움을 겪었으나, 식도 확장 치료와 노력으로 극복했다. 2012년 흡인성 폐렴 발병 후, 요사노는 정상적인 식생활을 위해 성대 절제 수술을 결심하고, 이로 인해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80]

요사노 가오루의 30년이 넘는 암 투병 생활은 2012년 『전신암 정치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선거명선거구정당명득표수득표율정수득표순후보자당락연령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40,96314.05%359낙선34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53,03418.39%329당선38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40,79617.04%348낙선41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76,27425.92%319당선41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59,18923.36%319당선45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67,28527.10%319당선47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63,82424.87%3210당선51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39,86718.18%329당선54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 제1구자유민주당82,09839.19%114당선58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 제1구자유민주당90,54040.09%125낙선61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비례 도쿄(도쿄 제1구)자유민주당103,78543.99%1725비례당선65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 제1구자유민주당149,89454.58%114당선67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비례 도쿄(도쿄 제1구)자유민주당130,03043.51%1729비례당선70


2. 1. 초기 생애

도쿄부(東京都) 도쿄시(東京市) 고지마치구(麹町区)(현 도쿄도 지요다구)에서 요사노 히데와 요사노 미치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히데는 시인 요사노 텟칸과 아키코 부부의 차남으로 외교관이었다.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베이징에 부임하여 0세 때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4세 무렵 일본으로 귀국했는데, 같은 해 할머니 아키코가 사망했다. 할아버지 텟칸은 가오루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사망하여 만난 적이 없었고, 아키코와의 추억도 거의 없어 조부모는 가족이 아니라 교과서에 실린 역사 속 인물 같은 느낌이라고 저서에서 적고 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했지만, 일본에 남겨진 가족의 생활은 궁핍하여 무임승차로 어머니와 함께 파출소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 도쿄 대공습을 겪었다. 미나토구립 아자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자부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이집트 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 카이로 교외 헬리오폴리스의 영어 학교로 편입했다. 이때, 자신이 패전국의 국민임을 강렬하게 느끼고, 일본의 문화·경제를 일류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1차 시험까지 통과하지만, 생각을 바꿔 일본으로 귀국했다. 아자부 고등학교에 편입하여, 히라누마 타케오와 동급생이 되었다. 도쿄대 입시에 실패했지만, 히라누마에 따르면 졸업식에서 표창을 받을 정도의 우등생이었다. 슨다이 고등 예비교(현 슨다이 예비학교)에서 1년간 재수를 거쳐 도쿄 대학 문과 Ⅰ류에 입학했다. 이른바 전학련 세대였지만, 학생 운동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코마바 시대에는 수업에 실망하여 문학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좋아하는 분야는 형사법이었다.[18] 학생 시절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아리시마 타케오의 "카인의 후예", 후에도 자신의 사고에 영향을 준 책으로, 아오미 준이치의 "법철학 개론", 단도 시게미츠의 "형법 강요" 등을 꼽고 있다. 경식 야구부에 소속되어, 매니저를 맡았다. 이때 2년 후배로 니이야 신지가 있었다.

1963년, 도쿄 대학 법학부 제3류(정치 코스)를 졸업했다(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명예 고문 오카다 아키시게와 전 재무관 나카히라 유키노리는 도쿄대 법학부 동기).[19] 어머니의 지인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소개로 일본원자력발전에 입사했다.[20] 일본원자력발전에서는, 처음 기술부에 배속되어, 후에 외교관이 되는 이마이 류키치 계장의 훈도를 받고, 영어 전문 문헌의 번역 등도 담당했다. 후에 사무계로 옮겨, 미국에서의 자금 조달이나 원자력 보험과 같은 금융 업무에 종사했다.

회사의 지시에 따라, 민사당의 핵 확산 방지 조약에 관한 방문 유럽 조사단에 원자력 전문가·통역으로 동행,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영국, 이탈리아, 독일 등을 방문했다. 조사단 멤버는 후의 위원장 사사키 료사쿠를 비롯해 소네 마스시, 오카자와 칸지, 와타나베 아키라였다. 요사노에게는 정치인과 깊이 관련된 첫걸음이었고, 이러한 민사당의 인물들과는 정계 진출 후에도 친밀한 관계가 이어지게 된다. 사사키와 함께 독일 체류 중에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조우, 두 정치인의 식사에 수행하는 등의 일을 했는데, 이것이 정계 진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카소네와는 취업 알선 이후, 스터디 등을 통해 친교가 있었지만, 귀국 후에 역시 같은 스터디의 멤버였던 와타나베 츠네오를 통해 비서가 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2. 2. 정치 경력

도쿄 대학을 졸업한 요사노는 1972년 중의원 선거에 낙선한 후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1976년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2007년 8월 27일, 아베 신조 총리의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임명되어 시오자키 야스히사를 대신했다. 그는 후쿠다 야스오가 아베의 뒤를 이은 9월 27일 마치무라 노부타카로 교체되었다.[1] 2008년 8월 1일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과 규제 개혁 담당 대신으로 임명되었다.[2]

2009년 미국 재무부 장관 티모시 가이트너와 만나는 요사노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사임 이후, 요사노는 2008년 9월 8일 자유민주당 총재 출마를 선언했다. 2008년 총재 선거에서 2008년 9월 22일에 아소 다로가 527표 중 351표를 얻어 당선되었고, 요사노는 66표로 2위를 차지했다.[5] 2008년 9월 24일에 임명된 아소 내각에서 요사노는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직을 유지했다.[6] 2009년 2월 18일, G7 회의 건으로 나카가와 쇼이치가 사임하면서, 그는 재무대신과 금융 담당 대신을 맡았다.

2010년 4월 4일, 요사노, 히라누마 다케오, 소노다 히로유키, 후지이 다카오 및 나카가와 요시오는 자민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인 일본의 새벽당을 창당할 계획을 발표했다.[7] 그는 2011년 1월 13일 일본의 새벽당을 탈당하고[8] 간 나오토 내각에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으로 합류했다.[9]

요사노는 국가의 부채에 시달리는 재정 구조를 재건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을 옹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정부에 합류한 후 그는 2012년 소비세 인상 계획을 수립했다. 이 법안은 2012년 6월 26일 중의원을 통과했고[10] 2012년 8월 10일 참의원을 통과했다.[11]

1968년 일본원자력발전을 퇴직하고, 나카소네의 비서가 되었다.

1972년 12월의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도쿄도 제1구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76년 12월의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1구에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 나카소네 파에 소속되었다.[22]

1979년의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내세운 일반 소비세로 인한 역풍을 받아 낙선했지만, 1980년의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 위원장의 아스카다 이치오를 제치고 득표수 1위로 당선되어 부활했다. 이후, 과학 기술·통상 산업 관계를 시작으로, 통상 산업정무차관, 자민당 상공부 회장, 중의원 상공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상공족, 정책통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카소네 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1990년다케시타 파의 실력자였던 가지야마 세이로쿠 밑에서 국회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인연으로 "가지야마 문하"를 자칭하며 사제 관계를 형성했다.[23]

1994년, 자민당이 정권 복귀한 무라야마 내각(자사사 연립정권)에서 문부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1996년, 자민당 단독 내각이 된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는, 가지야마 내각관방장관 밑에서 내각관방부장관 (정무)에 취임했다. 1998년, 하시모토 내각 다음의 오부치 내각에서 통산대신에 취임했다. 통산대신이면서, 소관 외 (법무성 관할)인 통신 감청법 성립에 힘을 쏟았다.

2000년 6월의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현직 해강전만리에게 패배하여, 중복 입후보했던 비례대표 도쿄 블록에서도 부활하지 못하고 낙선했다.

2003년 11월의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선거구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해강전에게 패했지만, 비례 부활로 3년 만에 국정에 복귀했고, 이후에는 당의 금융 조사 회장을 역임했다. 2004년에 자민당 정조회장에 취임하여, 고이즈미 총리가 추진하는 우정 민영화에 진력하여, 2005년 9월에 실시된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해강전에게 비례구에서의 부활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005년에 발족한 제3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 (금융, 경제 재정 정책)에 취임했다.

2007년 8월 27일 발족한 제1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 내각 관방 장관 (납치 문제 담당 대신 겸임)에 취임했다.

2007년 9월 12일, 소신 표명 연설 직후 갑자기 아베가 사임을 표명했다. 이후 아베는 컨디션 불량으로 입원하는 사태가 되었다. 아베가 입원해도 수상 임시 대리는 임명되지 않았지만, 관방 장관인 요사노가 관저를 사실상 지휘하여, "요사노 관저"라고 불렸다. 같은 해 9월 26일후쿠다 야스오 내각 발족에 따라 관방 장관·납치 담당상을 퇴임했다.

2008년 8월 2일, 후쿠다 내각의 내각 개조 (후쿠다 개조 내각)에 의해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 (경제 재정 정책, 규제 개혁)에 취임했다. 경제 재정 담당상 재임 중, 후쿠다 총리의 사임 표명에 따른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재정 재건을 호소하여 2위에 올랐고, 아소 내각에서는 경제 재정 담당상에 재임했다.

2009년 2월 17일, 재무대신 겸 금융 담당 대신 나카가와 쇼이치가 사임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지명되어 요사노 혼자 경제 관련 3개 각료를 겸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 아소 내각 총사퇴로 재무상·금융 담당상을 퇴임했다.

선거명선거구정당명득표수득표율정수득표순후보자당락연령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40,96314.05%359낙선34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53,03418.39%329당선38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40,79617.04%348낙선41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76,27425.92%319당선41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59,18923.36%319당선45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67,28527.10%319당선47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63,82424.87%3210당선51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도쿄 제1구자유민주당39,86718.18%329당선54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 제1구자유민주당82,09839.19%114당선58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 제1구자유민주당90,54040.09%125낙선61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비례 도쿄(도쿄 제1구)자유민주당103,78543.99%1725비례당선65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 제1구자유민주당149,89454.58%114당선67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비례 도쿄(도쿄 제1구)자유민주당130,03043.51%1729비례당선70


2. 3. 정계 은퇴 이후

與謝野 馨|요사노 가오루일본어는 2009년 아소 내각의 총사퇴로 재무상 및 금융 담당상에서 물러났다.[29]

1977년, 39세에 여포성 림프종을 앓은 이후 암 투병을 계속하였다. 여포성 림프종 발병 당시에는 중의원 첫 당선 10개월 후였다. 10년 정도 지난 후 장간막으로 전이되었지만, 국립암연구센터에서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아 1993년에 치료를 마쳤다.[80]

2000년 8월에 항문에서 10cm의 직장암을 절제했고, 2001년 가을에 전립선암이 발견되어 호르몬 요법과 방사선 치료로 완치했다. 2006년 10월에는 하인두암으로 성대를 남기고 목의 림프절과 목의 암 부분을 절제했으며, 방사선 치료의 영향으로 방광염을 앓았다.[80]

하인두암 절제 수술로 식도가 좁아져 통과 장애와 흡인으로 인해 체중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 후 식도를 넓히는 치료를 받고, 흡인하지 않고 삼키는 요령을 익혀 스스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012년에 수술 부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좁아져 흡인성 폐렴이 발병했다. 그래서 목소리를 잃더라도 평범하게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일상생활을 하고 싶다는 판단에서, 성대를 절제하여 음식물이 통하는 길과 공기가 통하는 길을 완전히 분리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이 성대 절제로 정계 은퇴를 표명하게 되었다.[80]

30년이 넘는 암과의 투병 생활은 2012년에 『전신암 정치인』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3. 정책 및 주장

요사노 가오루는 정계에서 정책 전문가로 평가받는다.[55] 상공족 의원으로 기반을 다졌지만, 통신 감청법 제정이나 인권 옹호 법안 관련 법무성과 협상하는 등 법무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약해 간염 소송에서는 법무성과의 조정을 맡아 의원 입법 사안을 작성, 2007년 후쿠다 야스오가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관료 작성 정책 설명 능력이 뛰어나 자민당 시절부터 "정계의 정책통"으로 평가받았다.[55] 그러나 모리나가 타쿠로 도쿄 외국어 대학교 교수는 "재정 재건 우선 요사노 주장은 재무성 주장과 같다"고 비판한다.[56]

국회 대책, 의원 운영 관련 직책을 역임하며 조정 능력과 당내외 인맥을 활용한 정치 수완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지야마 세이로쿠 문하의 의운·국대족"을 자임하며 조정형 정치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58]

소선거구제 폐지, 중선거구제 부활론자이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야스쿠니 신사가 A급 전범을 분사하면 해결된다는 입장으로, "일중 양국 문제에 양국 모두 만족할 해결이 필요하다"고 했다.[60]

영주 외국인 지방 선거권 부여에 반대하며, 자민당 시절 재일 한국인 등 영주자 지방 선거권 부여는 위헌이라는 논문을 썼다.

"e-Japan 중점 계획 특명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요사노는 오픈 소스 활용을 추진해왔다.[61] "OSS 추진은 일본 경쟁력 향상 열쇠"[62]라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편중 폐해를 지적, 리눅스 등 선택지 존재로 경쟁, 편의성 향상 지론을 폈다.[61]

3. 1. 경제 정책

요사노 가오루는 규제 완화가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택시 신규 참여나 일용직 파견 등으로 인한 임금 격차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88]

2008년 후쿠다 야스오 내각에서 경제재정정책 및 규제 개혁 담당 대신으로 임명되었다.[2] 200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소 다로에게 패배했지만, 아소 내각에서도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직을 유지했다.[6] 2009년 나카가와 쇼이치의 사임으로 재무대신과 금융 담당 대신을 겸임하게 되었다.

2010년 간 나오토 내각에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으로 합류했다.[9] 국가 부채로 어려움을 겪는 재정 구조를 재건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을 옹호했으며, 민주당 정부에 합류한 후 2012년 소비세 인상 계획을 수립했다. 이 법안은 2012년 6월 26일 중의원을 통과했고,[10] 같은 해 8월 10일 참의원을 통과했다.[11] 2011년 노다 내각 출범과 함께 경제 재정 정책 담당 대신에서 물러났다.

3. 2. 사회 정책

규제 완화가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택시의 신규 참여나 일용직 파견 등으로 인한 임금 격차를 문제시하고 있다.[88]

3. 3. 외교 정책

요사노 가오루는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 야스쿠니 신사 A급 전범 분사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가 자발적으로 A급 전범을 분사하면 해결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중 양국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양쪽이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60]
  • 외국인 참정권 반대: 영주 외국인에게 지방 선거권 부여에 반대한다. 자민당 시절,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영주자에 대한 지방 선거권 부여는 위헌이라는 견해를 담은 논문을 집필했다.

4. 논란 및 비판

요사노 가오루는 정계에서 정책통으로 평가받았으나,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 정책 및 정치 성향 관련
  • 상공족 출신으로 통신 감청법 제정, 인권 옹호 법안 관련 법무성 교섭 등 법무족 의원으로 활동했다. 약해 간염 소송에서는 의원 입법 사안을 작성하고, 2007년 후쿠다 야스오의 정치적 결단을 위한 환경을 조성했다.[55]
  • 스스로 "가지야마 세이로쿠 문하의 의운·국대족"을 자임하며 조정형 정치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58]
  • 경제 성장과 소비세 증세를 통한 재정 재건을 주장하는 재정 재건론자였다.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임 회장을 역임하고, 가스미가세키 매장금 활용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상승 조류파와 대립했다.
  • 규제 완화 만능주의에 반대하며, 택시 신규 진입, 일용 파견 등으로 인한 임금 격차를 문제시했다.[59]
  • 소선거구제 폐지 및 중선거구제 부활론자였다.
  •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해결을 위해 야스쿠니 신사의 자발적인 A급 전범 분사를 주장했다.[60]
  • 영주 외국인 지방 선거권 부여에 반대하며, 재일 한국인 등 영주자에 대한 지방 선거권 부여가 위헌이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 오픈 소스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통산상 시절 TRON 프로젝트, 리눅스 진흥책 정리를 지시하고,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당내 e-Japan 중점 계획 특명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정부 조달 가이드라인 설정을 제언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편중의 폐해를 지적하며, 리눅스 등 다른 선택지 존재를 통한 경쟁과 편의성 향상을 주장했다.[61]

  • 관료 지향적 태도 비판
  • 관료가 작성한 정책을 설명하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경제서는 일본은행 OB 요시노 토시히코의 이와나미 신서 한 권만 읽었다"라고 고백했다.[55]
  • 모리나가 타쿠로 도쿄 외국어 대학교 교수는 "재정 재건을 우선하는 요사노의 주장은 재무성의 주장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56]
  • 아베 신조는 제1차 아베 내각 발족 당시 요사노를 내각 관방 장관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주변에서 요사노의 관료 지향적 자세를 경계하여 시오자키 야스히사를 기용했다. (이후 요사노는 제1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 관방 장관으로 입각)[26]
  • 일본 은행의 국채 직접 인수가 법률로 금지되어 불가능하다고 발언하며 부흥 증세를 추진했지만,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국회 의결을 거쳐 가능하며, 현 시점에서도 일본 은행은 연간 10조 엔 정도의 국채 직접 인수를 실시하고 있다.[57]

  • 사설 비서 치한 혐의
  • 1986년부터 요사노의 사설 비서를 맡았고, 한때 공설 비서도 맡았던 인물이 2008년 8월 25일 지하철역 계단에서 여성의 엉덩이를 만진 치한 혐의로 서류 송치되었다. 비서는 혐의를 부인하다가 인정하고 사직했다.[66]

  • 암 투병
  • 1977년 39세에 여포성 림프종 발병 후, 국립암연구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1993년 치료를 마쳤다.[80]
  • 2000년 8월 직장암 절제, 2001년 가을 전립선암 발병 후 호르몬 요법과 방사선 치료로 완치했다.
  • 2006년 10월 하인두암으로 성대를 남기고 목 림프절과 암 부분을 절제,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방광염을 앓았다.[80]
  • 하인두암 수술 후 식도 협착, 흡인성 폐렴 등으로 2012년 성대 절제 수술을 받고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80]
  • 30년 넘는 암 투병 생활을 2012년 『전신암 정치인』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4. 1. 발언 관련 논란


  • 2008년 9월 17일 자민당 총재 선거 당시 시마네현 이즈모시 가두 연설에서, 미국 증권 대기업 리먼 브라더스의 경영 파탄에 대해 "일본에도 물론 영향은 있지만, 벌이 쏜 정도다. 이로써 일본의 금융기관이 아플 일은 절대로 없다. 침착하고 냉정한 행동이 요구된다"라며 일본 경제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81][82]
  • 2011년 5월 20일 각의 후 회견에서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신의 섭리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도쿄전력의 쓰나미 대책은)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지혜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하여, 도쿄전력에 사고 배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국내외에서 안전 대책 미비와 인재(人災)라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러한 논리로 도쿄전력을 옹호하는 요사노에 대해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다"라고 믿어 온 지역 주민들의 비판이 예상된다고 보도되었다.[83] 요사노는 일본원자력발전 출신으로, 통산대신 재임 중인 1999년 6월 시가 원자력 발전소 사고, 9월 도카이무라 JCO 임계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일관되게 원자력 발전 옹호론을 펼쳤다.
  • 2011년 7월 5일 기자 회견에서 "(디플레이션이라는) 정의 없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1% 정도의 물가 하락은 노동자, 연금 소득자에게는 플러스가 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84][85]
  • 2011년 7월 19일, 2011 FIFA 여자 월드컵에서 일본 여자 축구 대표팀의 우승에 대해 "일본에서는 여성 쪽이 남성보다 우수하다. 새롭게 그 증명이 하나 더해졌다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남녀 공동 참여 담당 특명 담당상 재임 시기 발언)[86]
  • 현행 제도상 발행 가능한 정부 지폐에 관해, "통화의 액면 가격 단위는 엔으로 하고, 그 액면 가격은 1엔의 정수배로 한다"라고 규정한 통화의 단위 및 화폐의 발행 등에 관한 법률에 반해 " '엔'이라는 것은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냥' 등으로요, 해야죠. 신용이 있습니까? 유통되지 않아요"라고 발언했다. 다카하시 요이치는 법정 통화인 정부 지폐의 단위에 법률상 "냥"은 사용할 수 없으며, 요사노의 발언은 법률 위반이라고 지적했다.[87]

4. 2. 정치자금 관련 논란

요사노 가오루는 무라카미 펀드로부터 2004년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 기재된 40만 엔의 정치헌금을 받았다.[63]

트럭 수송 업계의 정치 단체인 도로 운송 경영 연구회(도로 특정 재원을 자금원으로 하여, 일반 재원화에 반대하고 있다)로부터 정치헌금을 받고 있다.[64]

후쿠시마현 지사의 부패 사건과 관련된 대형 건설 회사인 마에다 건설 공업의 이사 명예 회장을 역임했던 마에다 또헤이로부터 정치 헌금을 받았다. 마에다는 부패 사건이 발각된 후, 이사 명예 회장직을 사임했다. 요사노 측은 "무슨 일이 생기면 돌려줘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실례다"라며 받은 헌금을 반환하지 않겠다는 의향을 밝혔다.[65]

5. 사생활

요사노 가오루는 골프, 컴퓨터 조립, 사진 촬영, 낚시, 바둑 등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1] 로마 가톨릭교 신자였다.[12] 신장은 169cm, 체중은 63kg이었다. 본명은 "與謝野馨" (구자형)이나, 보도 등에서는 "与謝野馨" (신자체)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2013년 봄 서훈 당시 내각부 수훈자 명부에는 "성명"란에 "與謝野馨"[47], "예명 등"란에 "与謝野馨"[47]이 병기되었고, 『관보』에도 "與謝野馨"[48]으로 표기되었다. 2012년 9월 5일 후두암으로 인해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며,[13] 2017년 5월 23일 사망했다.[14][15]

5. 1. 가족

구 분인 물비 고
증조부요사노 레이겐승려
조부요사노 텟칸가인
조모요사노 아키코가인
조부반나이 토라지구마가와 전기 사장
큰아버지오오토리 슈타로공학자
아버지요사노 슈외교관
어머니요사노 미치코평론가, 수필가
남동생요사노 토오루금융
여동생요사노 후미코시인, 미술 평론가
사촌요사노 히사시건축가
조카요사노 신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비례 도쿄 블록 단독 후보, 차점으로 낙선
장남요사노 마사루도카이 여객철도 (주) 근무
차남요사노 미노루미쓰비시 그룹 근무
장인이시카와 카즈오주부노토모사 제2대 사장
먼 친척아카마츠 카츠마로중의원 의원



도쿄부(東京都) 도쿄시(東京市) 고지마치구(麹町区)(현 도쿄도 지요다구)에서 요사노 히데와 요사노 미치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히데는 시인 요사노 텟칸과 아키코 부부의 차남으로 외교관이었다.

5. 2. 취미

취미는 골프, 컴퓨터 조립, 바둑, 사진 촬영, 천체 관측, 낚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1]

; 바둑

바둑 실력은 아마 7단으로, 정계 최강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10월 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와 대결했지만 패배했다. 오자와는 아마 6단이므로 "정치적인 배려가 아니냐"는 억측도 돌았지만, 요사노 본인은 "정말로 졌다"고 인정하고 있다.[68] 최근에는 인터넷 바둑 대국 사이트도 이용하며, 핸들 네임은 "카오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전 상대에게 여성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아, 아소 다로에게 소재로 쓰이고 있다.[69]

; 컴퓨터

리눅스오픈 소스의 동향 등 정보기술에 조예가 깊다고 자처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13년 시점에서 컴퓨터 조립을 총 20대 이상 조립했으며,[70][71][72][73][74] 그 중 한 대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2000,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XP, 터보리눅스 등의 OS를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 조립 기술에 대해 "부품이 포장에서 풀려 책상 위에 놓여 있으면, 1시간 정도면 조립해 버리고, OS 설치까지 2시간 정도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61] 아키하바라에서 부품을 사는 것이 취미였다고 하는데, 다니던 곳이 옴진리교 관계 PC점 마하포샤였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75] 빅카메라나 TWO TOP, USERS SIDE, T-ZONE 등의 각 점포도 자주 이용하고 있다.[61] 노안의 영향도 있어 모니터와 키보드에 대해서는, 인간의 눈과 손가락이 생생하게 접하는 중요한 휴먼 머신 인터페이스라는 지론에서, IPS 액정과 키보드에 대해서는 국산 메이커의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요사노가 정보기술에 정통하다는 소식을 들은 니와고는,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즈음하여 의원 회관에서 "니코니코 생방송" 출연을 타진했다.[76][77] 요사노 본인은 부재였지만 요사노의 비서가 응대했고, 후일 출연 의뢰를 거절했다.[76][77]

; 사진

사진 실력은 전문가 수준에 달해, 요사노에게 찍어달라고 한 사진을 선거 포스터에 사용하는 의원도 있다.[78]

5. 3. 종교

로마 가톨릭교 신자였다.[12] 가톨릭교회의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세례는 받지 않았다.[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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