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라이도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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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라이도네르는 에스토니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884년에 태어나 1953년에 사망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 에스토니아군을 지휘하여 승리했고, 에스토니아 육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이후 정치 활동을 통해 국회의원과 국제 연맹 대표로 활동했으며,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는 군 최고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정당 활동을 금지하는 등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1940년 소련에 점령된 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수감 중 사망했다. 그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의 공로로 국민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1934년 쿠데타 가담과 1940년 소련에 항복한 것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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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라이도네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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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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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한 라이도네르 |
출생일 | 1884년 2월 12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현 빌리안디현(현 빌리안디주) 비라치시 바르디아 |
사망일 | 1953년 3월 13일 |
사망지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블라디미르 |
배우자 | 마리아 크루셰프스카 (1911년 10월 30일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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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러시아 제국 에스토니아 |
소속 군대 | 러시아 제국 육군 에스토니아군 |
복무 기간 | 1901년-1920년 1924년-1925년 1934년-1940년 |
최종 계급 | 킨드랄 (장군) |
지휘 | 에스토니아 방위군 총사령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
훈장 | 자유 십자 훈장, 1등급 1급 자유 십자 훈장, 3등급 1급 백성 훈장 독수리 십자 훈장, 1등급 에스토니아 적십자 훈장, 1등급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Johan Laidoner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요한 라이도너는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자치구 비우젠디현(현재의 비이라트시현 바야 마을) 외곽 라야 농장에서 태어났다. 여름에는 목동으로 일하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교회학교에 다녔다.[1] 1901년 육군에 지원하여 보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첫 부임지는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였다. 1902년, 빌뉴스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훗날 아내가 될 폴란드인 마리아 스카르벡-크루셰프스카를 만났다. 190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콜라이 사관학교에 진학했다.[1]
1911년, 라이도너는 마리아와 결혼했으나, 1913년에 얻은 아들 미하일은 192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라이도너 부부는 마리아의 조카 알렉세이 크루셰프스키를 입양했다.[1][2]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 에스토니아군 제1사단을 지휘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라이도너는 영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17] 1918년 에스토니아 육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후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1919년에는 에스토니아 군사학교를 설립했다.
1920년, 중장으로 승진한 라이도너는 육군 총사령관에서 물러나 에스토니아 올림픽 위원회 등 정부 기관에 참여했다. 국제 연맹 에스토니아 대표로 활동하며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확장에 대해 고립주의를 고수했다. 1924년 12월, 육군 총사령관직에 복귀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1926년, 라이도너는 국제 연맹을 통해 모술 인근 터키와 이라크 간의 영토 분쟁을 중재했다.[17] 영국과의 관계가 깊었지만, 중재 과정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터키 측 주장에 더 배려했다.[17][18]
1934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극우 단체 “바이프스 운동”이 파시즘을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얻자, 콘스탄틴 팻츠의 요청으로 육군 총사령관에 복귀했다. 팻츠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라이도너는 팻츠와 협력하여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했다.
2. 1. 러시아 제국군 복무
요한 라이도너는 1884년 2월 12일 빌란디현 바르야 마을 비이라트시 교구에 있는 라바 농장에서 농장 일꾼 야크 라이도너와 그의 아내 마리 (결혼 전 성씨 사르센) 사이에서 네 아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1] 그는 비이라트시 초등학교와 1900년 빌란디 시립학교에서 기본 교육을 받았다. 가난한 부모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1901년 자원하여 러시아 제국 육군에 입대하였다.[1]1901년부터 1902년까지 코브노(현재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 주둔한 제110 카마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빌나(현재 빌뉴스)의 보병 장교 학교에서 수학했다. 1905년 4월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진급했다.[1] 졸업 후에는 당시 조지아 망글리시에 주둔하고 있던 제13 예레반 그레나디어 연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연대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고, 결국 중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1908년에는 중위로 진급했다.[1]
1909년부터 1912년까지 제국 니콜라스 군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여 1등급 졸업장을 받았다.[1] 1911년 10월 3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던 중 빌뉴스에서 만났던 폴란드 귀족 출신의 마리아 스카르벡-크루셰프스카와 결혼했다.[2] 1912년 졸업 후 참모 대좌로 진급하여 그의 연대로 돌아갔다. 다음 해에 참모본부에 임명되어 1년 동안 제1 코카서스 소총 연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3] 그 후 코카서스 군관구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니콜라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라이도너는 러시아 제국군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라이도너는 7개의 훈장을 받았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이도네르는 제3 코카서스 군단의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3] 1914년 11월 26일, 그는 대위(Kapitan)로 진급했다. 1915년 3월, 라이도네르는 같은 군단의 제21 보병 사단(21st Infantry Division)의 고급 참모로 임명되었다. 1915년 10월, 그는 러시아 제국 서부 전선(Western Front) 참모 정보부 사령관의 부관이 되었고, 1916년 8월 15일, 라이도네르는 중령(Podpolkovnik)으로 진급했다.[3] 1917년 3월부터 9월까지 그는 제1 코카서스 그레나디어 사단(1st Caucasus Grenadier Division)의 참모 사령관으로, 1917년 10월부터 11월까지는 제62 보병 사단(62nd Infantry Division)의 참모 사령관으로 복무했다.[1]1918년 1월 5일, 라이도네르는 새로 편성된 에스토니아 제1 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 1918년 2월 18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었고, 이미 에스토니아 섬들을 점령한(Operation Albion) 독일군이 본토에 상륙했다. 다음 날, 라이도네르는 사단장직에서 사임하고 러시아로 떠났다.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포했지만, 이후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3.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1918년 4월 4일, 페트로그라드에 거주하던 라이도너는 에스토니아 임시 정부에 의해 폴코브니크(대령)로 진급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1918년 11월 28일 에스토니아를 침략하면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라이도너는 12월 23일 에스토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립 전쟁을 지휘했다. 1920년 3월 21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3월 26일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1][7]
3. 1. 에스토니아군 총사령관 임명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 이후,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11월 28일 에스토니아를 침략하면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라이도너는 12월 14일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2월 23일 에스토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3]1919년 1월 1일, 에스토니아군은 13,000명이 조금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5,700명이 비루 전선에서 8,000명의 소비에트군과 맞서 싸웠다.[5] 1월 초, 에스토니아군은 발크라-케흐라 방어선에서 소비에트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1월 3일 라이도너는 핀란드 자원병과 장갑열차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을 앞세워 반격을 개시했다. 11일 만에 제1사단은 동쪽으로 200km 진격했고, 제2사단은 에스토니아 남부의 소비에트군을 공격했다. 타르투와 나르바를 해방한 후, 1919년 1월 20일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다.[6] 1919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의 첫 독립기념일에 라이도너는 소비에트군이 에스토니아에서 몰락했고 6,000명 이상의 병력과 40문의 대포를 노획했다고 보고했다.
라이도너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군대 내에 효과적인 지휘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참호전 경험과 제한적인 부대 규모를 고려하여, 라이도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로와 기차역을 장갑열차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더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대대 및 소대 규모의 부대를 사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했다.
3. 2. 독립 전쟁의 승리
독일의 항복 이후,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1918년 11월 28일 에스토니아를 침략하면서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1] 1918년 12월 23일, 임시 정부는 라이도너를 에스토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3]

1919년 1월 1일, 에스토니아군은 13,000명이 조금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5,700명이 비루 전선에서 8,000명의 소비에트군과 맞서 싸웠다.[5] 1월 초, 에스토니아군은 발크라-케흐라 방어선에서 소비에트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1월 3일 라이도너는 핀란드 자원병과 장갑열차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을 앞세워 반격을 개시했다. 11일 만에 제1사단은 동쪽으로 200km 진격했고, 제2사단은 에스토니아 남부의 소비에트군을 공격했다. 타르투와 나르바를 해방한 후, 그는 1919년 1월 20일 소장으로 진급했다.[6] 1919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의 첫 독립기념일에 라이도너는 소비에트군이 에스토니아에서 몰락했고 6,000명 이상의 병력과 40문의 대포를 노획했다고 보고했다.
라이도너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고, 군대 내에 효과적인 지휘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참호전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자신의 부대 규모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라이도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로와 기차역을 장갑열차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더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대대 및 소대 규모의 부대를 사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라이도너는 1920년 3월 21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1920년 3월 26일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1][7]
4. 전후 정치 활동
1924년 12월 1일, 에스토니아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서 파견된 돌격대와 함께 쿠데타를 시도했다. 정부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라이도너를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 쿠데타 시도는 5시간 만에 끝났지만, 주모자들을 추적하는 작업은 계속되었고 수 주간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1925년 1월 8일, 계엄령이 해제된 후 라이도너는 최고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군 복무를 다시 그만두었다.[3][7]
1934년, 콘스탄틴 팻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라이도너를 다시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7][9] 이는 바프스 운동의 정치적 부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팻스, 카렐 에엔팔루 내무부 장관과 함께 라이도너는 정당 해산, 언론 자유 제한 등 권위주의적 통치, 즉 "침묵의 시대"를 수립했다. 라이도너는 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국방 정책을 감독하며 무기 현대화, 징병을 통한 군대 확장, 대학 군사 훈련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1935년, 팻스는 대통령직에 올라 국가 방위 강화를 명분으로 중앙 집권적 헌법 개정을 추진했고,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투옥되었다. 팻스는 대통령령으로 정치를 하고 선거를 연기했다. 바프스 운동 지도자들은 재판 후 투옥되었다가 정권 기반이 굳어진 후 석방되었다. 1936년, 라이도너는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장례식과 조지 6세의 즉위식에 참석했다.[17]
팻스와 라이도너는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했다. 팻스는 코포라티즘을 도입하여 각계 대표자들을 통해 여론을 결집하고 정부 안정성을 높이려 했다.
1939년, 라이도너는 주변국들의 확장과 무기 개량을 이유로 육군 장비 현대화와 징병 확대를 요구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28일, 소련-에스토니아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어 소련군이 에스토니아에 군사 기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도너는 이 조약에 반대했지만, 1940년 6월 17일 팻스 대통령의 결정으로 에스토니아는 소련에 점령되었다. 소련은 에스토니아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라이도너 부부도 체포 직전 미국 영사 부부의 방문을 받았다. 라이도너는 체포 후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나, 처형은 면했다. 그는 수감 중 유서를 남겼고, 1953년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묘비 없이 매장되어 위치가 불분명하다. 라이도너 사후, 그의 아내 마리아는 석방되었으나 70세가 되어서야 에스토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20]
4. 1. 국회의원 및 국제 연맹 활동

전쟁 후 라이도네르는 리이기코구(에스토니아 의회) 의원이 되었고, 1920년부터 1929년까지 보수 정당인 농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3] 그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부터 1929년까지 국제 연맹 총회의 에스토니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고립주의적 입장으로 알려졌다.
1925년, 라이도네르는 국제 연맹으로부터 이라크에 특별 사절단을 이끌고 터키가 모술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학대하고 강제 추방했다는 주장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3][8] 라이도너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터키와 이라크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938년에 리이기코구 선거가 재개되었고, 라이도네르는 직권으로 국회의원을 겸하게 되었다. 1939년 2월, 라이도네르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4. 2. 모술 분쟁 중재
1925년, 라이도너는 국제 연맹의 위임을 받아 이라크 특별 사절단을 이끌고 터키가 모술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학대하고 강제 추방했다는 주장을 조사했다.[3][8] 라이도너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터키와 이라크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5. "침묵의 시대"와 권위주의 통치
전쟁 후 라이도너는 리이기코구(에스토니아 의회) 의원이 되었고, 1920년부터 1929년까지 보수 정당인 농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3] 그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부터 1929년까지 국제 연맹 총회의 에스토니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고립주의적 입장으로 알려졌다.
1925년, 라이도너는 국제 연맹으로부터 이라크에 특별 사절단을 이끌고 터키가 모술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학대하고 강제 추방했다는 주장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3][8] 라이도너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터키와 이라크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935년, 콘스탄틴 팻스는 국가 방위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며 중앙 집권적인 헌법 개정을 시도했고,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투옥되었다. 팻스는 대통령령을 이용하여 정치를 수행했고,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바프스 운동 지도자들은 재판 결과 투옥되었으나, 팻스와 라이도너가 정권 기반을 굳힌 후 석방되었다. 1936년, 라이도너는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장례식과 조지 6세의 즉위식에 참석했다.[17]
팻스와 라이도너의 개혁에는 대학교에서의 군사 훈련 의무화와 언론 및 출판의 자유에 대한 규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팻스와 라이도너 모두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에스토니아를 민주주의 체제로 되돌리려면 안정적인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팻스는 코포라티즘을 도입하여 각계를 대표하는 유력자들이 민중을 지도함으로써 여론을 결집하고 정부의 안정성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리이기코구 선거는 1938년에 재개되었고, 라이도너는 직권으로 국회의원을 겸하게 되었다.
1939년, 소련-에스토니아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소비에트 군대가 에스토니아 영토 내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었지만, 라이도너는 이 조약에 반대하고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다.[19] 그러나 1940년 6월 17일, 대통령 콘스탄틴 팻스의 결단으로 에스토니아는 전투 없이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는 것을 선택했다. 소련 당국은 에스토니아 지도자들을 잇달아 체포했고, 라이도너와 그의 아내 마리아도 체포되기 몇 시간 전, 미국 영사 존 윌리 부부가 이들의 집을 방문했다.[17] 마리아는 윌리의 아내 일레나에게 "이 집과 정원은 이제 우리의 감옥과 다름없어요. 언제 체포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의 충만하고 행복했던 삶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이제 제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라고 말했다.[17] 라이도너는 체포되었지만,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처형을 면한 소수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수감 중이던 1944년 불어-러시아어 사전 여백에 유서를 적었다.[17] 유서는 "조국 에스토니아여,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17] 공산화된 에스토니아 정부도 모스크바에 라이도너의 석방을 계속 간청했지만, 그는 1953년 5월 14일,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 근처의 묘지에 묘비도 없이 매장되어 현재까지도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소련 붕괴 후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짐).
라이도너 사후, 그의 아내 마리아도 석방되었다. 그러나 마리아가 에스토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70세 생일을 맞이한 후였다.[20]
5. 1. 바프스 운동 진압과 권위주의 체제 구축
1924년 12월 1일, 에스토니아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서 파견된 돌격대와 함께 쿠데타를 시도했다. 정부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라이도너를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 쿠데타 시도는 5시간 만에 진압되었지만, 주모자들을 추적하는 작업은 계속되었고, 상황은 수 주간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1925년 1월 8일, 계엄령이 해제된 후 라이도너는 최고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군 복무를 그만두었다.[3][7]1934년 3월 12일, 국가 원로 콘스탄틴 팻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라이도너를 다시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7][9] 이는 바프스 운동의 정치적 부상과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잠재적 성공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팻스와 내무부 장관 카렐 에엔팔루와 함께 라이도너는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 이른바 "침묵의 시대"를 수립했다. 라이도너는 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국방 정책을 감독했다. 그의 개혁에는 대규모 무기 및 장비 현대화 프로그램, 징병을 통한 군대 확장, 대학에서의 군사 훈련 도입 등이 포함되었다. 1938년 1월 1일,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양원제 의회인 라흐부스코구(Rahvuskogu, 국민의회)가 설치되었고, 라이도너는 최고 사령관 자격으로 상원 의원이 되었다. 1939년 2월 24일, 그는 장군으로 승진했다.[10]
5. 2. 군 개혁과 국방 강화
1924년 12월 1일, 에스토니아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서 파견된 돌격대와 함께 쿠데타를 시도했다. 정부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라이도너를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 쿠데타 시도는 5시간 만에 끝났지만, 주모자들을 추적하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상황은 수 주간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1925년 1월 8일, 계엄령이 해제된 후 라이도너는 최고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군 복무를 그만두었다.[3][7]
1934년 3월 12일, 국가 원로 콘스탄틴 팻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라이도너를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7][9] 팻스는 내무부 장관 카렐 에엔팔루와 함께 라이도너는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 소위 "침묵의 시대"를 수립했다.
라이도너는 군 최고 사령관으로 남아 국방 정책을 감독했다. 그의 개혁에는 대규모 무기 및 장비 현대화 프로그램, 징병을 통한 군대 확장, 대학에서의 군사 훈련 도입 등이 포함되었다. 1939년 2월 24일, 그는 장군으로 승진했다.[10]
1939년, 라이도너는 주변 국가들의 급속한 확장과 무기 개량을 배경으로 육군 장비의 현대화 및 개량, 그리고 징병 확대를 요구하는 계획을 정부에 제출했다.
6. 소련 점령과 최후
1939년, 라이도네르는 주변 국가들의 급속한 확장과 무기 개량을 배경으로 육군 장비의 현대화 및 개량, 그리고 징병 확대를 요구하는 계획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해 9월 28일, 소련-에스토니아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소비에트 군대가 에스토니아 영토 내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었지만, 라이도네르는 이 조약에 반대하고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다.[19] 그러나 1940년 6월 17일, 대통령 패츠의 결단으로 에스토니아는 전투 없이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소련 당국은 에스토니아 지도자들을 잇달아 체포했고, 그 압력은 라이도네르에게까지 미치려 했다. 라이도네르와 그의 아내 마리아가 체포되기 몇 시간 전, 두 사람의 집을 미국 영사 존 윌리와 그의 아내 일레나가 방문했다.[17] 일레나의 저서에 따르면, 마리아 여사는 "이 집과 정원, 이제 우리의 감옥과 다름없어요. 언제 체포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의 충만하고 행복했던 삶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이제 제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라고 말했다.[17]
라이도네르는 체포되었지만,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처형을 면한 소수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시베리아로 추방된 그는 수감 중이던 1944년, 불어-러시아어 사전을 입수하여 그 여백에 유서를 적었다.[17] 유서는 "조국 에스토니아여,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17] 공산화된 에스토니아 정부도 모스크바에 라이도네르의 석방을 계속 간청했지만, 그는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 근처의 묘지에 묘비도 없이 매장되어 현재까지도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소련 붕괴 후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짐).
1940년 3월 6일, 리이기코구에서 라이도네르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현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직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차례의 전쟁 재난이 우리에게 닥칠 것입니다. 지금까지와 같은 평화로운 생활은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운명은 어떤 입장의 사람들에게도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적어도 국가의 독립만이라도 지켜내고자, 우리는 정부를 운영하고, 대통령을 두고, 저와 같은 육군 장관이나 병사들을 두고 있습니다.
1944년 4월 26일, 키로프 감옥에서 작성한 라이도네르의 수기는 다음과 같다.
> 1940년 여름, 저는 망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준비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결단의 결과로부터 도망치거나, 그 책임을 지지 않고 공포에 떨리는 짓은 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의 주권이란 근대 역사 속에서 길러져 온, 보석처럼 아름다운 문화적 개념입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달성함으로써, 확실히 이 최고의 가치를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이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제 명예입니다.
> 저는 평생의 대부분을 조국의 위해 바쳤습니다. 이 사업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국민의 앞에서도 –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21년 반 지속된 에스토니아의 독립은 연표상으로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빛나는 독립기의 기억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다시 독립을 쟁취하려는 동포들을 고무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1940년 6월 19일, 빌레스 정권은 저를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러시아로 송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1년 6월 28일, 제58조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저는 마침내 NKVD에 의해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정부가 저를 제명하고, 소련 정부도 또한 제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통보받았습니다. 저는 에스토니아의 삼권 분립을 파괴하고, 1924년의 데모를 탄압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일했고,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도 막았던 것입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의 외교 활동은, 천지신명에 맹세컨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
> 꼭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4년 동안 투옥되어 있지만,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공포에 질려 살아가는 동물적인 삶에 가치는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61세에 투옥되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제 결단이 결과적으로 지금도 친애하는 친구, 그리고 아내를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 또한 제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투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저를 용서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제 아내였던 것을 후회할 일도, 그녀는 분명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강한 정신적 지주입니다. 아내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아멘.
>
>
> 제 수기는 이제 끝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국은 없고, “에스토니아”도 러시아도 저를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NKVD의 장관이 말하길, 저는 영향력이 있으므로, 죽을 때까지 투옥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마치 호수처럼 고요합니다. 왜냐하면 조국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영어 시를 빌려서, “조국 에스토니아여,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J.L.
>
> 많은 동포들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 하지만 멸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코.
6. 1. 체포와 강제 이주
1940년 6월 17일, 소련은 에스토니아를 점령했다. 라이도네르는 1940년 6월 22일 공식적으로 육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7] 1940년 7월 19일, 그와 그의 아내는 러시아 펜자로 강제 추방되어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강제 망명 생활을 했다. 1941년 6월 23일, 그들은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6월 28일 NKVD에 의해 투옥되었다. 1942년 9월, 라이도네르 부부는 콘스탄틴 팻츠와 여러 전직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정치인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의 부티르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키로프와 이바노보의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52년 4월 16일, 라이도네르는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로 이송되었고, 1953년 3월 13일 사망했다.[3] 그는 교도소 묘지에 매장되었지만, 그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1]
라이도네르의 양자 알렉세이도 NKVD에 체포되었다. 그는 1941년 11월 26일 솔리캄스크 강제 수용소에서 흉부 외상으로 사망했다.[11]
마리아 라이다네르는 1954년 석방되어 에스토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1978년 빌얀디 근처 야메얄라에서 사망하여 탈린 시셀린나 묘지에 아들 마이클 옆에 묻혔다.[11]
6. 2. 투옥과 사망
소련의 에스토니아 점령 후, 라이도네르는 1940년 6월 22일 육군 총사령관직에서 공식 해임되었다.[7] 1940년 7월 19일, 라이도네르와 그의 아내는 러시아 펜자로 강제 추방되어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1941년 6월 23일 가택 연금되었고, 6월 28일 NKVD에 의해 투옥되었다.[3]
1942년 9월, 라이도네르 부부는 콘스탄틴 팻츠 등 다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정치인들과 함께 모스크바의 부티르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키로프와 이바노보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1952년 4월 16일, 라이도네르는 25년형을 선고받고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로 이송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53년 3월 13일 사망했다.[3] 그의 유해는 교도소 묘지에 매장되었으나,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1]
라이도네르의 양아들 알렉세이 역시 NKVD에 체포되어 1941년 11월 26일 솔리캄스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11]
아내 마리아 라이도네르는 1954년에 석방되어 에스토니아로 돌아왔다. 그녀는 1978년 빌랸디 근처 야메얄라에서 사망했고, 탈린 시셀린나 묘지에 있는 아들 마이클 옆에 묻혔다.[11]
7. 유산과 평가
요한 라이도네르는 에스토니아에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유산은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영웅으로서의 긍정적인 측면과 정치적 행보와 관련된 논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라이도네르는 생전에 에스토니아, 영국, 러시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프랑스, 폴란드, 스웨덴, 독일 등 여러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들은 공산 정권 시절 미국 육군에 의해 보관되었다가 2004년 에스토니아에 반환되었다. 그의 출생지 근처인 비이라트시 마을에는 라이도네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7. 1. 논란과 재평가
라이도네르에 대한 에스토니아 내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12] 독립 전쟁에서의 지휘 능력과 성공으로 국민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콘스탄틴 퍄츠를 지지하고 1934년 쿠데타에 가담했으며 1940년 소련에 항복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다.[13][14]
라이도네르의 이름을 딴 기념물, 추모비, 장소가 여러 곳 있다.
- 라이도너의 고향인 바르자(Vardja)에 있는 그의 기념비는 1940년 소련 점령 이후 파괴되었고 1990년 복원되었다.
- 2001년, 라이도너의 옛 거주지였던 비임시 영지에 그의 이름을 딴 에스토니아 전쟁 박물관이 개관했다.[15]
- 2004년, 라이도너 장군의 기마상이 빌란디 성 유적 옆에 세워졌다.[16]
- 빌란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공원이 있다.
- 2009년, 에스티 포스트(Eesti Post)는 라이도너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 빌뉴스 육군사관학교에는 라이도너를 기리는 명판이 있다.
7. 2. 기념 사업
라이도너의 이름을 딴 기념물, 추모비, 장소가 여러 곳 있다.- 라이도너의 고향인 바르자(Vardja)에 있는 그의 기념비는 1940년 소련 점령 이후 파괴되었고 1990년 복원되었다.
- 2001년, 라이도너의 옛 거주지였던 비임시 영지에 그의 이름을 딴 에스토니아 전쟁 박물관이 개관했다.[15]
- 2004년, 라이도너 장군의 기마상이 빌란디 성 유적 옆에 세워졌다.[16]
- 빌란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공원이 있다.
- 2009년, 에스티 포스트(Eesti Post)는 라이도너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 빌뉴스 육군사관학교에는 라이도너를 기리는 명판이 있다.
다행히도 에스토니아 국민들에게는 라이도네르의 자택과 유품 상당수가 보존되어 있다.[17] 이는 라이도네르가 요시프 스탈린보다 약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생전에 에스토니아의 독립 국가였던 흔적을 없애기 위해 NKVD에 관련 물품을 모두 폐기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17]
라이도네르의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공적을 기념하여 2009년 우정청은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8. 훈장
요한 라이도네르는 에스토니아, 영국, 러시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프랑스, 폴란드,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복무와 용맹을 기리는 훈장을 받았다.[17] 이 훈장들은 공산당 통치하의 에스토니아에서 비밀리에 반출되어 미국 육군에 보관되었다가 2004년 에스토니아에 공식 반환되었다.[17]
에스토니아 훈장 및 훈표 | |
자유 십자훈장(Cross of Liberty), 1등급 1위 | |
자유 십자훈장, 3등급 1위 | |
![]() | 백성 훈장(Order of the White Star), 특별 휘장 |
![]() | 독수리 십자 훈장(Order of the Cross of the Eagle), 1등급 |
에스토니아 적십자 훈장(Order of the Estonian Red Cross), 1등급 | |
러시아 훈장 및 훈표 | |
성 블라디미르 훈장(Order of Saint Vladimir), 4등급 | |
성 안나 훈장(Order of Saint Anna), 2등급 | |
성 안나 훈장, 4등급 |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Order of Saint Stanislaus (House of Romanov)), 2등급 | |
용감한 자를 위한 황금 무기(Golden Weapon for Bravery) | |
외국 훈장 | |
![]() | 핀란드 백장미 훈장(Order of the White Rose of Finland), 대십자장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of Honour), 사령관 | |
독일 올림픽 훈장(German Olympic Decoration), 1등급 | |
![]() | 라트비아 라치플레시스 훈장(Order of Lāčplēsis), 1등급 |
라치플레시스 훈장, 2등급 | |
라치플레시스 훈장, 3등급 | |
리투아니아 비타우타스 대공 훈장(Order of Vytautas the Great), 대십자장 | |
폴란드 백색 독수리 훈장(Order of the White Eagle (Poland)) | |
무공훈장(Order of Virtuti Militari), 5등급 | |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 대십자장 | |
스웨덴 검 훈장(Order of the Sword), 대십자장 | |
영국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Order of St Michael and St George), 명예 기사 사령관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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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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