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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아이 히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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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단장, 해설가, 평론가이다. 선수 시절에는 롯데 오리온스, 주니치 드래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활동하며 타격 트리플 크라운 3회, MVP 2회 등 뛰어난 기록을 세웠다. 감독으로서는 주니치 드래건스를 이끌며 리그 우승 4회, 일본 시리즈 우승 1회를 달성했고, 2007년에는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다. 이후 주니치 드래건스 단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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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아이 히로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치아이 히로미쓰
2007년 오치아이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 시절)
원어 이름落合 博満 (おちあい ひろみつ)
출생일1953년 12월 9일
출생지아키타현 미나미아키타군 와카미 정
사망일알 수 없음
신장178 cm
체중82 kg
利き腕오른손
타석오른손
수비 위치1루수, 3루수, 2루수
선수 경력
아마추어도시바 후추
프로롯데 오리온스 (1979년 ~ 1986년)
주니치 드래건스 (1987년 ~ 199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4년 ~ 1996년)
닛폰햄 파이터스 (1997년 ~ 1998년)
드래프트1978년 드래프트 3순위
첫 출장1979년 5월 29일
마지막 경기1998년 10월 7일
감독 경력
소속팀주니치 드래건스 (2004년 ~ 2011년)
프런트 경력
소속팀주니치 드래건스 단장 (2013년 ~ 2017년)
국가대표 경력
국가일본
선출 연도2011년
선출 방법경기자 표창
기록
NPB 데뷔1979년 5월 29일, 롯데 오리온스
NPB 마지막 경기1998년 10월 7일, 닛폰햄 파이터스
타율0.311
안타2371
홈런510
타점1564
수상
퍼시픽 리그 MVP2회 (1982년, 1985년)
일본 프로 야구 트리플 크라운3회 (1982년, 1985년, 1986년)
명예의 전당
종류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2011년
유튜브 채널 정보
채널명【公式】落合博満のオレ流チャンネル
채널 URL【공식】오치아이 히로미쓰의 오레류 채널
활동 기간2022년 3월 18일 - 현재
장르야구
구독자 수49.8만 명 (2024년 8월 14일 기준)
조회수76,466,778회 (2024년 8월 14일 기준)
실버 버튼 획득2022년

2. 선수 경력

아키타현 미나미아키타군에서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197]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100여 편의 영화를 감상할 정도로 영화광이었으며,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를 일곱 차례나 보면서 극중 노래 가사(영어)를 기억했을 정도였다.[197]

1969년, 아키타현립 아키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서 활약했지만, 선배들의 불합리한 언행에 참지 못하고 야구부를 퇴단했다.[197] 그러나 경기 때마다 부원들의 설득으로 복귀하여 4번 타자로 활약했다.[197] 고교 졸업 후 1972년 도요 대학에 진학했지만, 체육계 내부의 관행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상과 부진까지 겹치면서 반년 만에 야구부를 퇴단하고 대학도 중퇴했다.[197]

고향 아키타로 돌아간 후, 볼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로 볼러를 꿈꿨으나, 속도 위반으로 범칙금을 내면서 수험료를 마련하지 못해 프로 테스트 응시를 포기했다.[197] 고교 시절 은사의 권유로 1974년 후추시에 있는 도쿄 시바우라 전기 공장에 기간제 직원으로 입사, 공장 내 사회인 야구팀 도시바 후추에 입단했다.[197]

도시바 후추에서 5년 동안 정규 경기에서 약 7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맹활약했고, 1978년 아마추어 야구 전일본 대표 선수로 발탁되었다.[197]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롯데 오리온스로부터 3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197] 오치아이를 영입한 조노우치 구니오는 “변화구에 강하고 상대 투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타입의 타자”라는 이유로 오치아이의 자질을 간파했다고 밝혔다.[197] 한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가와 사건으로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면서 오치아이 지명은 무산되었다.[197]

2. 1. 프로 입단 전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아키타현 미나미아키타군에서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197]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100여 편의 영화를 감상할 정도로 영화광이었으며,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를 일곱 차례나 보면서 극중 노래 가사(영어)를 기억했을 정도였다.[197]

1969년, 아키타현립 아키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서 활약했지만, 선배들의 불합리한 언행에 참지 못하고 야구부를 퇴단했다.[197] 그러나 경기 때마다 부원들의 설득으로 복귀하여 4번 타자로 활약했다.[197] 고교 졸업 후 1972년 도요 대학에 진학했지만, 체육계 내부의 관행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상과 부진까지 겹치면서 반년 만에 야구부를 퇴단하고 대학도 중퇴했다.[197]

고향 아키타로 돌아간 후, 볼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로 볼러를 꿈꿨으나, 속도 위반으로 범칙금을 내면서 수험료를 마련하지 못해 프로 테스트 응시를 포기했다.[197] 고교 시절 은사의 권유로 1974년 후추시에 있는 도쿄 시바우라 전기 공장에 기간제 직원으로 입사, 공장 내 사회인 야구팀 도시바 후추에 입단했다.[197]

도시바 후추에서 5년 동안 정규 경기에서 약 7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맹활약했고, 1978년 아마추어 야구 전일본 대표 선수로 발탁되었다.[197]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롯데 오리온스로부터 3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197] 오치아이를 영입한 조노우치 구니오는 “변화구에 강하고 상대 투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타입의 타자”라는 이유로 오치아이의 자질을 간파했다고 밝혔다.[197] 한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가와 사건으로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면서 오치아이 지명은 무산되었다.[197]

2. 2.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79년, 프로 입단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야마우치 가즈히로는 오치아이의 타격 폼(어퍼 스윙) 교정에 착수했다. "호스로 물을 뿌리는 느낌으로 쳐라"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오치아이는 "당시 자신은 야마우치 감독의 고도한 타격 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며, 야마우치의 타법으로는 공이 앞으로 날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베테랑 포수 도이 겐지의 부드러운 손목을 사용하는 폼을 흉내 내는 등 자신만의 스타일(가미누시 타법)[30], 즉 '오레류'(オレ流)를 추구했다.[32]

1980년, 2군에서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이스턴 리그 신기록을 세웠고, 시즌 후반 1군에 복귀하여 57경기에 출전, 15홈런을 기록하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에 출전했다.

1981년,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하여 당시 퍼시픽 리그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에게서 "10년, 15년 후 일본 프로 야구를 짊어질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고 3할 2푼 6리의 타율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아리토 미치요, 레온 리, 레론 리와 클린업 타선을 이끌며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1982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당시 기준, 28세)로 타격 3관왕(타율 .325, 32홈런, 99타점)을 차지했다.[35] 1983년에는 타율 .332로 3년 연속 수위타자를 기록했다.

1985년, 타율 .367(우타자 역대 최고 타율), 52홈런(당시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146타점(현재 퍼시픽 리그 기록)으로 통산 두 번째 3관왕을 차지했다. 득점권 타율 .492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40]

1986년, 2년 연속이자 통산 세 번째 3관왕(타율 .360, 50홈런, 116타점)을 달성했다. 이는 오 사다하루, 랜디 바스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에서 단 3명만이 달성한 기록이며, 통산 3회는 오치아이가 유일하다. 시즌 종료 후, 우시지마 가즈히코, 가미카와 세이지, 히라누마 사다하루, 구와타 시게루와의 1대 4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했고, 일본인 선수 최초로 연봉 1억 엔을 돌파했다.

연도등번호GPAABRH2B3BHRTBRBISBCSSBSFBBHBPKDPERRAVGOBPSLGOPS
1979롯데 오리온스63669647153122671000411221.234.290.406.696
19805718816628477015993210221712355.283.349.596.946
1981127502423691381933326290631468655179.326.423.6191.043
1982128552462861503213228099820481558117.325.428.6061.034
1983119497428791422212524175650364252147.332.419.563.982
19841295624568914317333265948104984331416.314.436.5811.017
19851305684601181692115235114651041013401619.367.481.7631.244
1986123522417981501105031111651011013591510.360.487.7461.232


2. 3.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오치아이는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 첫 해인 1987년에 센트럴 리그 경기에 데뷔했지만, 홈런과 타점 모두 급격히 떨어지면서 타이틀 없이 시즌을 마쳤다. 시노즈카 도시오, 쇼다 고조 등과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지만, 2리 차로 리그 3위인 타율 3할 3푼 1리를 기록했다.[53] 8월 20일에는 장남이 태어났다.

1988년에는 32홈런, 95타점(모두 리그 2위), 승리 타점 19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2] 규정 타석을 채운 이후 처음으로 타율 3할 아래(.293)를 기록했다. 6월 1일부터 8월 2일까지 타순은 3번으로 강등되었고, 4번 타자는 게리 레이시치였다.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승 4패로 패했다.

1989년에는 116타점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이적 후 처음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 양대 리그에서 타점왕을 차지한 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54] 래리 패리시와 홈런왕 경쟁을 벌였지만, 2개 차이로 타이틀을 놓쳤다. 8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나고야 돔)에서는 9회 1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 중이던 사이토 마사키에게서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쳤다. 오프 시즌 계약 갱신 후 기자 회견에서 연봉 1억 6500만 엔으로 갱신했음을 밝혔다.[55]

1990년에는 34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 양대 리그 홈런왕을 차지한 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5월 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통산 350홈런을 달성했다.[56] 올스타전 제2전(헤이와다이 구장)에서는 노모 히데오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했다.

1991년 2월, 일본인 선수 최초로 연봉 조정을 신청했다. 조정 결과 3월 8일에 구단 제시액인 2억 2000만 엔으로 합의했다.[57] 정규 시즌에서는 37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지만, 타율(.340)은 후루타 아쓰야에게 3리 차이로 뒤져 2위에 그쳤다.[58] 야쿠르트와의 최종전에서는 1경기 6개의 볼넷이라는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웠다. 시즌 후 연봉 3억 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59]

199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를 탈퇴했다. 같은 해 오치아이 에이지가 입단하면서, 스코어보드에 히로미쓰는 '오치아이'로 표기되었다. 성적은 22홈런, 71타점으로 1984년 이후 타이틀 없이 시즌을 마쳤다.

1993년 5월 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에서, 사상 최초로 양대 리그 200홈런을 달성했다. 주니치 시절 5번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60]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61] 계약은 2년에 연봉 4억 500만 엔이었다.[62]

12월, 40세의 나이로 이적한 오치아이는 새로운 동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야구계 OB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63]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오치아이의 반골 정신에 불을 붙였다.[64][65][66]

2. 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 하에 팀의 두 차례 리그 우승(1994년, 1996년)에 기여하는 등 팀의 4번 타자로서 맹활약했다.[67][68] 1994년은 왼쪽 옆구리와 왼손 손목에 사구를 맞는 등 부진에 시달렸지만, 10.8 결전에서 이마나카 신지로부터 선제 홈런을 날려 우승에 기여했다.[69] 그러나 같은 경기 3회말 수비 중 왼쪽 내전근을 다쳐,[69] 일본 시리즈에서는 제3경기에 지명 타자로 출전했을 뿐이었다. 1994년은 현역 시절 유일한 일본 제일이었으며, 감독 시절을 포함해도 이 해가 유일한 완전 제패였다.

1995년에는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지만[71]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가입을 거부했다.[72][73] 41세 4개월에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한 것은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었다(이후 미야모토 신야가 기록을 경신).[74]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 MVP도 획득했다.[75]

199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7번째인 통산 500홈런과 역대 7번째 통산 1500타점을 동시에 달성했다.[76] 8월 31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노구치 시게키로부터 사구를 받아 왼쪽 손목에 골절상을 입는 부상을 당했다.[77][78]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부터 복귀했다. 시즌 종료 후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이적한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요미우리에 입단한 것의 영향으로 출전 기회를 요구하는 등 요미우리 구단에 자유 계약을 신청했다.[79][80][81] 오치아이는 "(유년 시절부터 팬이고 존경하는) 나가시마 감독이, (자신과 키요하라 중 누구를 기용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라고 코멘트했다.[82][83]

2. 5.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97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입단 제의를 거절하고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이끄는 닛폰햄 파이터스에 2년 계약으로 이적하며 등번호 '3'번을 배정받았다.[200] 5월 17일 시점에는 타율 .339를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6월 이후 나이로 인한 쇠퇴와 피로가 겹쳐 타율이 하락했다. 8월 22일 오릭스전에서 오시마 코이치의 타구를 잡다가 왼손 부상을 당해 왼쪽 넷째 손가락 말단 관절뼈가 탈구되기도 했다.[84] 이후 선발 출장은 8경기에 그쳤다. 오스기 가쓰오에 이어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두 번째 양대 리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200] 9월 14일 긴테츠전에서는 고이케 히데로의 노히트 노런을 저지하는 좌익선 2루타를 날리기도 했지만, 타율 .262, 3홈런, 43타점으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44세의 나이로 규정 타석을 채운 것은 2023년 종료 시점에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

1998년 시즌에는 팀의 '빅뱅 타선'이 폭발하는 와중에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84] 전년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배팅 글러브를 착용하고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고,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전하여 4월 하순까지 타율 .300을 유지했지만, 이후 타율이 하락하면서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은 오치아이의 타순을 하위로 내리고 니시우라 가쓰타쿠를 4번 타자로 기용했다. 팀은 개막부터 연승하며 선두를 질주했지만, 오치아이의 출장 기회는 줄어들었다. 9월 이후 팀은 부상자 속출 등으로 급격히 부진하여 세이부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7일 롯데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대타로 출전한 것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으며, 구로키 도모히로를 상대로 1루 땅볼을 기록했다. 오치아이는 당일 우에다 감독으로부터 선발 출장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스스로 프로 데뷔 첫 타석과 같은 대타로 마지막 출전을 선택했다.[84]

3. 은퇴 이후

2012년에는 닛칸 스포츠의 평론가로 복귀했다.

2013년 10월 주니치 드래건스의 단장으로 부임했으며, 2017년 1월에 물러났다.[201]

3. 1. 해설가·평론가 시절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99년부터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 1999년부터 2001년까지 TV 아사히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으며, 당시 캐치프레이즈는 '''오레류 해설'''(オレ流解説)이었다.[1] TV 아사히와의 전속 계약이 해소된 후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85] TV 아사히 시절부터 출연했던 규슈 아사히 방송의 중계에 자주 등장했다. 또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2001년 2월에는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이끌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타격 코치를 맡기도 했다.[1]

3. 2. 주니치 감독 시절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의 감독을 역임했다.[2] 2003년 10월 8일, 주니치 드래곤스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3년 계약).[86] 취임하자마자, 16명의 선수의 등번호를 변경하고, 유니폼 디자인을 주니치 전통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형 디자인에서 변경했다. 이 유니폼은 퇴임하는 2011년까지 사용되었다. 감독 부임 1년째인 2004년에는 3년간 1군에서의 등판 기회가 없었던 가와사키 겐지로를 개막전 선발 투수로 기용했고 가와사키는 5실점을 기록하면서 경기 도중에 강판당했지만 팀은 역전승을 거뒀다. 팀의 에이스인 가와카미 겐신을 3차전에 선발로 등판시켜 3연패의 위험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가와사키의 개막전 기용으로 팀에게 자극을 주면서도 선발 투수에 관한 정보 누설이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을 두어 그 후에 말하고 있다. 취임 1년 만에 팀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먼저 3승을 기록하면서도 3승 4패라는 성적을 기록해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아시아 챔피언으로 빛나, 선수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오치아이 히로미쓰(2007년 11월 11일 도쿄 돔)


, 타이론 우즈의 구타 사건에 의한 출장 정지와 교류전에 있어서의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결국 시즌 2위로 마감했다. 에는 2년 만에 2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87] 평소에는 벤치에 앉아 표정 변화가 없는 오치아이가, 요미우리와의 우승 결정전에서 우즈가 만루 홈런을 날리자 껴안아 맞이했고,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도 처음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감격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승 4패로 패배하여 또다시 일본 제일을 놓쳤다. 오프에 구단과 새롭게 2년 계약을 맺었다.

, 페넌트레이스에서는 연패를 놓쳐 2위였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한신과 요미우리를 이기고 일본 시리즈에 진출,닛폰햄 파이터스와 싸워 4승 1패로 일본 제일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구단으로서는 53년 만에 2번째 일본 제일이었으며, 게다가 그 후에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팀을 아시아 챔피언으로 이끌었다.[3]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주니치의 감독, 선수로서 처음으로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다.

은 3위로 마쳤다. 감독 취임 5년차에 순위, 승리 수, 승률 모두 최악이었다. 주력 선수들의 부진과 쇠퇴, 후쿠도메 고스케의 메이저 이적, 베이징 올림픽에서 5명의 주력 선수가 빠져나가면서 타격력이 리그 최악의 성적에 빠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2nd 스테이지에서는 요미우리에게 1승만을 거두며 패퇴했다. 오프에 구단과 새롭게 3년 계약을 맺었다. 은 2위로 마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2nd 스테이지에서도 요미우리에게 1승만을 거두며 패퇴했다.

, 감독으로서 3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2nd 스테이지에서 요미우리를 4승 1패로 꺾고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지바 롯데 마린스에 2승 4패 1무로 패배하여, 일본 제일은 되지 못했다. 또한, 주니치 구단에서 7년 연속으로 지휘한 감독이 되어, 요나미네 이사오(1972년 - 1977년)와 호시노 센이치(제2차 정권 시기의 1996년 - 2001년)의 6년 연속을 넘어, 구단 역대 1위가 되었다.

1월 14일, 2011년도 야구 체육 박물관(야구 전당) 경기자 표창에 선정되었다. 시즌 중인 9월 22일, 구단으로부터 그해 시즌을 끝으로 감독 퇴임이 발표되었지만[88], 10월 6일에 선두로 부상, 18일에 142번째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감독으로서 4번째 리그 우승), 강력한 투수력으로 구단 사상 첫 리그 연패를 달성했다. 감독으로서의 계약은 10월을 기점으로 만료되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하루 단위의 계약 갱신이 이루어졌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를 4승 2패(리그 우승 어드밴티지 1승 포함)로 제압하고, 2년 연속(감독으로서 5번째) 일본 시리즈 진출을 확정, 경기 후에는 당초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헹가래가 이루어졌다[89]。 일본 시리즈는 3승 4패로 전년에 이어 일본 제일을 놓쳤기 때문에, 이것이 감독으로서 마지막 헹가래가 되었다. 11월 10일, 센트럴 리그로부터 최우수 감독상에 선정된 것이 발표되었다[90]。 11월 20일, 일본 시리즈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패배한 경기 종료를 마지막으로, 감독에서 퇴임했다.

오치아이가 감독을 맡았던 주니치는, 8년간 리그 우승 4회, 일본 시리즈 출전 5회, 일본 제일 1회, B클래스(4위 이하) 0회였다. 역대 주니치 감독 중 최고의 성적이다. 감독 재임 기간 중에는 넓은 나고야 돔을 이용하여 투수력을 무기로 페넌트 시즌을 치렀다.[164] 투수 기용에 관해서는 자신이 야수였기 때문에, 두터운 신뢰를 보내는 헤드코치 모리 시게카즈에게 맡기고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공격 면에서는 사인이 거의 없었고, 기본은 선수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고 한다.

3. 3. 주니치 단장 시절

2013년 10월 주니치 드래건스의 단장(GM)으로 부임했으며, 2017년 1월에 물러났다.[201] 주니치 구단에 신설된 제너럴 매니저(GM) 직책으로, 처음에는 고문을 제안받았지만 스스로 GM직을 제안하여 연봉 8000만 엔으로 계약했다.[96]

GM 취임 후, 이바타 히로카즈(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나카타 겐이치(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적)를 제외한 주니치 선수들과의 계약 갱신에서 총 연봉 추정 8억 엔 이상의 비용 절감을 실현했다.[96] 이는 구단주 시라이 분고가 요구해 온 예산 내 연봉 억제 방침에 따른 것으로, 오치아이는 "자신이 편성을 책임지고 모든 것을 맡겨주면, 연봉 삭감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GM이 좋다"라고 제안하여 성사되었다.[96]

하지만, 이러한 예산 제약으로 인해 대형 보강은 어려웠다. 시마 모토히로(당시 라쿠텐), 스미타니 긴지로(당시는 세이부) 등 자유 계약 선수(FA) 영입을 검토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97]

주니치는 2016년에 19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고, 2016년 12월 20일, 구단은 계약 만료 시점인 2017년 1월을 기점으로 오치아이가 GM에서 퇴임한다고 발표했다.[6]

4. 지도 스타일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감독 재임 8년 동안 매년 A클래스 진입, 리그 우승 4회(2010년과 2011년 센트럴 리그 연패 포함), 일본 시리즈 우승 1회의 뛰어난 실적을 남겼다.[164] 야수 출신으로 코치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넓은 나고야 돔을 활용한 투수력 중심의 전략과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지도 방식으로 팀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투수 기용은 전적으로 모리 시게카즈 헤드 코치에게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았으며,[164] 공격 시에는 선수들에게 자유로운 플레이를 허용했다.[164] 홈 경기에서는 나고야 돔의 이점을 활용, 투수력으로 승리하는 경기를 펼쳤고, 하위 팀과의 경기에서는 신중한 선수 기용으로 자만을 경계했다.[164]

다카야나기 히데키는 오치아이에 대해 "경기 중 흔들림 없이 자신이 생각한 야구를 관철한다"고 평가했다.[165] 야마모토 마사예언자에 비유하며, 그의 뛰어난 통찰력을 언급했다.[166]

경기 중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는데, 이는 선수들이 벤치를 주시하며 감독의 반응에 영향을 받는 것을 고려한 행동이었다.[167] 그는 "선수는 벤치를 보고 있다. 화내는 모습을 보이면, 선수들의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고 설명하며, 과거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방식을 답습했음을 시사했다.[167]

2006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다나카 마사히로 지명 대신 도조 나오미치를 지명했는데, 이는 본사 명령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168] 2007년 일본 시리즈 5차전에서는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이어가던 야마이 다이스케를 9회에 이와세 히토키로 교체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7년 일본 시리즈 퍼펙트 게임 릴레이 참조)[169]

2007년에는 주니치 구단 최초로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으며, 당시 심사 위원장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강한 신념과 선수를 잘 키우는 방법, 자신의 야구관을 가지고 강한 팀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170] 오카다 아키노부는 오치아이 감독이 선수 육성을 통해 승리하겠다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171]

2010년과 2011년에는 팀 타율과 득점이 리그 최하위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 사상 최초의 리그 연패를 달성했다.[172] 2011년 5월에는 "앞으로 50번 질 수 있다"는 발언을 했는데,[173] 결과적으로 그 해 주니치의 61패가 우승 라인이 되었다.

FA 권리에 대해서는 선수들의 권리임을 인정하며,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선수들의 FA 이적을 허용했다. 언론에 대해서는 팀 정보 유출을 경계하여 경기 후 코멘트를 짧게 하는 경향이 있었으며,[174] 이로 인해 "팬 서비스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75] 이에 대해 오치아이는 "이기면 팬은 따라온다"고 응수했다.[175]

201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감독에서 퇴임했는데, 이는 구단 내부의 반대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6][177] 그는 지도자로서 프로 선수를 육성하는 데 있어 "체(體)기(技)심(心)"의 순서를 중요하게 여겼다.[178] 오치아이 감독 퇴임 이후 주니치는 저조한 성적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의 감독 복귀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179]

5. 논란 및 비판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선수 시절 타격 트리플 크라운 3회, MVP 2회, 수위 타자 5회, 홈런왕 5회, 타점왕 5회, 최고 출루율 7회를 기록했다.[209] 특히 1985년에는 시즌 타율 .367(우타자 역대 3위), 52홈런(우타자 일본인 역대 최다 타이), 146타점(퍼시픽 리그 기록), 장타율 .763(퍼시픽 리그 기록), 118득점(우타자 퍼시픽 리그 기록), 351루타(우타자 퍼시픽 리그 기록), 득점권 타율 .492(일본 기록)를 기록하며 엄청난 성적을 남겼다. 1986년에도 시즌 타율 .360(우타자 사상 최초), 50홈런(역대 2위), 출루율 .487(퍼시픽 리그 기록)을 기록하며 2년 연속 5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사상 최초)

통산 타율은 .3108(우타자 일본인 역대 최고, 5000타석 이상 우타자 최고),[210] 통산 장타율 .564(우타자 일본인 역대 1위), 통산 출루율 .422(역대 2위, 우타자 역대 1위), 통산 볼넷 1475개(역대 2위, 우타자 역대 1위)를 기록했다.[209]

그 외에도 시즌 타율 3할 6푼 이상 2회(일본 타이 기록, 우타자 사상 최초), 시즌 30홈런 이상 9회(역대 3위), 17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역대 4위), 양대 리그 1000안타 이상(역대 2번째), 양대 리그 200홈런 이상,[209] 1경기 6볼넷(일본 기록), 5경기 연속 홈런 등 다양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감독으로서는 쇼리키 마쓰타로상(2007년)과 최우수 감독상(2011년)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타이틀횟수연도
타격 트리플 크라운31982, 1985, 1986
수위 타자51981~1983, 1985, 1986
홈런왕51982, 1985, 1986, 1990, 1991
타점왕51982, 1985, 1986, 1989, 1990
출루율 1위71982, 1985~1988, 1990, 1991
최다 안타11982
최다 승리 타점51982, 1985, 1988, 1989, 1993
최우수 선수21982, 1985
베스트 나인101981~1986, 1988~1991
야구 명예의 전당-2011
월간 MVP61985년 9월, 1986년 5월, 1988년 8월, 1989년 8월, 1990년 5월, 1991년 8월
우수 JCB・MEP상11990
올스타전 MVP2 제3전, 제1전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대상11982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40주년 특별상 쿄라쿠배-2007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31982, 1985, 1986
도민 문화 영예상-1985
아키타현 현민 영예장-1987
IBM Player of the Year상11991
신어·유행어 대상 신어 부문 동상-1993
좋은 부부의 날 나이스 커플-1995
쇼리키 마쓰타로상12007
최우수 감독상-2011


7. 에피소드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1980년 12월에 결혼했으나 3개월 만에 이혼했고,[107] 1984년 12월에 9살 연상의 노부코와 재혼했다. 노부코는 훗날 연예인 활동을 시작했고, 히로미쓰가 긍정적이지 않았던 FA권 행사나 감독 취임 등을 결단하게 했다. 장남은 성우 오치아이 후쿠시이며, 전 프로레슬러 자이언트 오치아이는 조카(누나의 아들)이다. 오치아이 일가는 히로미쓰가 삼관왕을 획득한 것에 걸맞게 "트리플 크라운 패밀리"라고 불린다.[108] 손자도 있으며, 2024년 4월 21일 방송된 '선데이 모닝' 생방송에서 그해 크리스마스에 손자를 위해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려고 수염을 기르고 있다고 밝혔다.[109]

투수로서 입단한 아이코 마사시에게 타자 전향을 권유하고 타격을 지도했다.[110] 아이코는 1981년 입단 후 3년간 투수로서 활약했지만 결과를 내지 못했고, 1983년 시즌 종료 후 감독 야마모토 카즈요시로부터 "투수를 계속할 건지, 아니면 타자로 전향할 건지" 강요받았지만 즉시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치아이로부터 타자 전향을 권유받고 결심했다. 1984년 봄 캠프에서 오치아이는 아이코에게 타격 지도를 했다.[111] 오치아이는 "집에 있어도 할 일이 없어서"라고 말하면서도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2군 경기를 관전하며 아이코의 타격을 보기도 했다.[112] 아이코는 오치아이에게 배운 타격술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113] 롯데 시절 오치아이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했기 때문에 아이코와 양자 결연을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하며, 아이코는 "잘못하면 후쿠시 군의 형이 될 뻔했다"라고 말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2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나,[114] 1992년에는 선수회를 탈퇴했다. 1993년, FA 제도를 이용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프로 입단 전부터 나가시마 시게오의 팬이었고,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은퇴 경기를 관전했다. 1992년부터 나가시마가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오치아이는 롯데 시절 "나가시마 씨가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면,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받아요"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115] 그러나 후년, 오치아이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기자 회견에서 "나가시마 씨를 헹가래 쳐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역 시절, 프로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야마우치 카즈히로로부터 폼 교정을 받았지만, 지도받은 타법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야마우치와의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고, 야마우치로부터 배운 것이 자신의 배팅에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16] 오치아이는 야마우치로부터 전수받은 타격 연습법을 현역 말년까지 실천했다.[117]

에어컨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현역 시절에는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땀을 흘리면서 잠을 잤다.

롯데 재적 시대, 한큐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야마다 히사시와 라이벌로 인정하며 명승부를 펼쳤다. 1980년 5월 28일 한큐전에서 2안타를 친 오치아이를 본 야마다는 "굉장한 타자가 나타났다. 저 녀석은 삼관왕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118] 오치아이는 프로 입단 초기, 야마다의 싱커를 전혀 치지 못했지만, 야마다 본인에게 공략법을 물어 "센터 리턴을 하라"라는 조언을 받아 극복했다. 1982년 4월 29일, 야마다의 200승이 걸린 경기에서 오치아이는 3개의 홈런을 쳤다.[119]

야마모토 마사는 감독 시절 오치아이로부터 "나이는 그라운드에 서면 관계없다"라는 말을 들었고, 2009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이 말에 감사하고 있다고 적었다. 2007년 시즌 야마모토를 여러 번 2군으로 보냈지만, 야마모토는 "오치아이 감독은 정말 나를 끈기 있게 마운드에 올려주었다"라고 기술했다.[121]

폭력을 싫어하며, 감독 취임 직후 모든 코치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어도 선수에게 손을 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122] 호시노 센이치 감독 시절 철권 제재가 일상적이었던 주니치 구단의 관습을 바꾸기 위해 팀의 폭력 근절에 고심했으며, 오치아이는 "팀에서 폭력을 없애는 데 5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123][124] 스포츠계 전체의 폭력 지도 근절에 대해 "앞으로 수십 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25]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이바타 히로카즈를 혹독하게 훈련시킨 적이 있고, 이 때문에 "이바타로부터는, 항상 짜증 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바타는 아라키 마사히로와 함께 아라이바 콤비로서 활약하게 되었고, 활약의 장을 오치아이가 만들었다고 인정받기도 한다.[126]

젊었을 때는 음주를 했지만 30세 무렵에는 단주를 했다.[127] 오프 시즌의 자율 훈련 장소로서 나가노현의 히루가미 온천을 애용했으며, "오치아이 로드"가 남아 있다.[128] 1989년 1월에는 "히루가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129]

롯데 시절 감독이었던 이나오 가즈히사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다. 이나오 감독 취임 회견 후, 오치아이는 이나오에게 "'관리 야구'를 하십니까? 아니면, 선수에게 맡기십니까?"라고 물었고, 이나오는 "나는 관리는 안 할 거야"라고 대답했다.[130] 같은 시즌 전반기 타율이 2할 정도였던 오치아이의 타순 강등 제안에 이나오는 머리를 숙여가면서까지 4번 타자 기용을 계속했고, 오치아이는 시즌 후반기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했다.[131] 오치아이의 이나오에 대한 사숙은 이때가 계기라고 한다.

1985년 캠프에서 오치아이는 배트를 전혀 휘두르지 않고 수비 연습만으로 하체 근력을 키웠으며, 같은 해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획득했다. 당시 팀 동료인 아이코에 따르면 오치아이는 "벤치에서 옆에 앉은 이나오 씨가 '오치, 슬슬 부탁한다'라고 말하면, '알겠습니다'라며 일어나 한 방 치고 돌아옵니다"라고 말했다.[132][133]

이나오와의 관계는 그라운드 밖으로도 이어졌다. 후지 마나미가 오치아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 이나오와 오치아이가 냄비를 함께 먹고 있었고, 오치아이가 냄비 담당을 맡았으며, 이나오가 소파에 잠들었는데, 그 모습을 오치아이가 즐겁게 바라보았다고 한다.[134] '히루가미 사건' 때도 드래건스 측이 중재 역할을 이나오에게 의뢰했고, 오치아이도 이나오의 전화로 은퇴를 보류했다. 오치아이가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한 2007년 11월 13일은 이나오의 기일이기도 하며, 회견에서 이나오에 대해 "감독과 선수의 입장을 넘어 야구를 이야기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오치아이는 "7명의 감독을 모셨지만, 야구를 배운 사람은 야마우치 가즈히로 씨와 이나오 씨뿐"이라고 회고했다.[135]

통산 500안타, 1000안타, 1500안타, 2000안타는 모두 홈런으로 달성했다. 1000경기 출전, 2000경기 출전 시에도 홈런을 쳤다.

뛰어난 배트 컨트롤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 1987년 주니치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구단은 타격 연습장을 급조했다. 오치아이는 피칭 머신의 공을 쳐서 타구를 네트에 맞혀 걸린 공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다나카 토시유키는 "마치 마법과 같은 배트 컨트롤"이라고 회고했다.[136]
  • 나고야 구장에서 타격 연습 중 심판에게 "10개 쳐서 몇 개가 스탠드에 들어갈 것 같아?"라고 물었고, 오치아이는 "8개다"라고 말하고 8개를 스탠드에 넣었다.
  • 타격 투수에게 몸 정면에 공을 던지게 해서 모든 공을 배트 중심에 맞춰 쳐냈고, 토스 배팅에서 투수 가슴에 라인 드라이브로 쳐냈다.[137]
  • 롯데 시절에는 길이 35인치 배트를 사용했다. 난카이의 몬다 히로미츠는 "저 길이의 배트를 다루는 것은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라고 회고하고 있다.[138]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는 배트 그립 굵기가 0.2mm 달라도 알아차렸다.[139]


입단 초기에는 3루수였지만, 2년차부터 2루수로 전향했고, 처음 3관왕을 획득한 해의 포지션도 2루수였다. 그 다음 해에는 1루수로 전향했지만, 아리토시 미치요의 외야수 전향으로 3루수로 돌아왔고, 이후 다시 1루수로 전향했다. "센추리 베스트 나인(20세기 베스트 나인)" 투표에서 오치아이는 2루수로서 노미네이트되어 선정되었다. 베스트 나인은 1루수로 4회, 2루수로 2회, 3루수로 4회 선정되었다.

내야 수비에 대해 '''가장 어려운 것은 1루수, 가장 쉬운 것은 3루수'''라고 단정했다.

유니폼 바지 밑단을 끝까지 내리는 착용법은 주니치 시절 오치아이가 우노 마사루와 함께 시작한 것이 처음이라고 여겨진다. 롯데 시절 타격 코치 히로노 이사오의 권유로 나무 배트 함수율을 관리할 수 있는 배트 케이스(후지 시리시아 화학제) 사용을 시작했다.

마에다 토모노리의 타격을 높이 평가하며, 타격 지도를 할 때 "히로시마의 마에다를 참고해라"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흉내에 대해서는 "흉내 내면 슬럼프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니 절대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140] 이시미네 카즈히코의 안쪽 공 치기를 높이 평가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잘했지만, 프로에 들어가면서부터 못하게 되었다"라고 혹평한 뒤 "고등학교 때 그대로 했으면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41]

외국인 선수 입장과 존재감도 존중하며, "그들이 없으면 일본 야구계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공언하고 있다.[142]

제3회 WBC 일본 대표 감독 취임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오치아이 본인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발언하며 부인했고, 야마모토 고지가 감독으로 취임했다.[143][144][145][146]

모회사가 신문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단 인터뷰에서 "언론을 이용해서 선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그만두었다"라며 모회사를 경시하는 발언을 했다. 노무라 가쓰야와의 대담에서는 "기자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준다는 마음으로 언론 대응도 확실히 해라"라고 훈계받았다.[147]

2011년, 감독 퇴임 후 나가시마 가즈시게와의 대담에서 통일구 영향에 대해 "전혀 관계 없다", "변명"이라고 발언하며 "선수가 '통일구는 날아가지 않는다'는 말에 도망쳤다"라고 말했다.[148]

2022년 4월 11일, 야구계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 "숨어서 연습하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했다.[149]

2023년 10월 3일, 장거리 런닝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특히 투수는 런닝 훈련 양으로 성적이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최근 런닝 훈련 부정론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입장을 보였다.[150]

1978년 하렘 베이스볼 위크에서 쿠바 선수에게 사구를 맞은 이후 쿠바 선수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5년 쿠바 선수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오마르 리나레스의 수형을 오치아이 히로미쓰 야구 기념관에서 받을 수 있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리나레스는 흔쾌히 승낙했다. 안토니오 파체코, 빅토르 메사와 함께 오치아이 저택을 방문했다.

리나레스가 방문했을 때 오치아이는 집에 없었다. 시간 제한으로 오치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떠났는데, 노부코 부인에게 연락을 받은 오치아이가 달려왔다. 파체코 생일 축하도 있어서 노부코 부인과 후쿠시도 합류하여 축하 행사는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야구 담론으로 의기투합했고, 오치아이는 리나레스에게 "47세까지 플레이하겠다"고 약속했다.

1996년 5월, 오치아이는 다시 그들의 숙소를 방문하여 리나레스와 파체코에게 자신의 배트를 각각 1개씩 선물했다. 망명 직전 롤란드 아로요의 생일도 축하했다. 훗날, 리나레스 모교인 피나르 델 리오 대학 "리나레스 전시회" 회장 한가운데에 오치아이 배트가 전시되었다.[151] 2004년, 주니치에서 오치아이는 감독, 리나레스는 1루수 레귤러라는 관계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등번호에 대한 고집이 강해서, 오치아이 히로미쓰 기념관은 등번호 6에 맞춰 육각형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2010년 이후에는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프레임 테두리 부분에는 한자로 "六(여섯 륙)"이라고 새겨져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 당시에는 6번을 시노즈카 가즈노리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60번을 사용했다(시노즈카가 은퇴한 다음 해인 1995년부터는 6번으로 변경).[152]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취임 후에는 6을 두 개 겹친 66번을 등번호로 했다.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취임 후에도 등번호에 대한 고집을 보여주었으며, 타니시게 모토노부의 등번호를 27번으로 변경시켰다. 모리노 마사히코의 등번호를 8번, 31번으로 변경했다. 타츠나미 카즈요시의 등번호 3번을 모리노에게 주려고 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주니치의 에이스 넘버는 '20'"이라는 생각에도 부정적이었으며, 나카타 켄이치에게 20번을 부여했다. "나에게는 18번이 에이스 번호다"라고 설명했다.[153]

나카자토 아츠시나 사토 미츠루 등에게는 1년만 유예를 주지만, 지배하에 있는 선수 중 가장 아래라는 의미로 등번호를 70번으로 변경시켰다.

"등번호 00번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2011년부터 결번으로 하기로 했지만, GM 복귀 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앤더슨 에르난데스가 사용했다.

프로 입단 후 토요타 크라운(110계·세단형)을 구입했다. 호신을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실시했다. 현재는 다지 데이토나와 애스턴 마틴 V8(통칭 '본드카') 2대를 소유하고 있다.

아들 오치아이 후쿠시의 영향도 있어[154], 건담 시리즈를 좋아한다. 건프라에도 애착이 있어, 가장 좋아하는 모빌 슈트는 윙 건담 제로(EW판)이다. 2008년 1월에는 반다이 하비 센터를 방문하여 건담 엑시아의 주니치 드래곤즈 컬러 버전을 선물받았다.[157]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미라클 자이언츠 동몽군에 실명으로 주니치 선수로 등장했다. 성우는 사와키 이쿠야가 담당했다. 노부코 부인도 극중에 등장했다. 그러나, 정작 오치아이 본인은 이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158]

무류의 영화광으로도 알려져 있다.[159]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부보다 영화관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휴일에는 자택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많았고, 후쿠시와 함께 터미네이터 등을 보았던 것이, 후에 후쿠시가 성우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60]

중학교 시절 정기 시험에서 영어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했고, 고등학교 입시에서도 영어는 백지였다. 감독 시절에는 "여기는 일본이니까 일본어를 사용해"라며 외국인 선수들에게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요구했지만,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영어를 모른다고 말하면 외국인 선수 쪽에서도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대응했다.

2022년 5월 스포츠닛폰의 취재에서 "무엇이든 영문으로 해버리는 것은, 영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161]

2006년 9월 20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요코하마와의 경기에서, 감독실에 놓아두었던 현금 37만 엔과 면허증 등이 들어있는 서류 가방을 분실했다. 경찰이 정식 수사를 했지만, 가방은 발견되지 않았고 범인도 불명인 채였다.[162][163]

8. 같이 보기


  • 후루야 토오루 저, 『프로 야구 & 메이저 리그 해설자 명감, 지금 방송석 내의 음성만으로 보내드립니다』(2013년 7월 1일, 메타모르 출판 발행. 코드: ISBN 978-4-89595-8448)
  • 아리모토 요시아키 『프로 야구 삼국지』, 마이니치 신문사, 1992년
  • 자이언트 오치아이 - 조카에 해당하는 격투가.
  • 마키타 토모타케 -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의 기획 「너무 사소해서 전해지지 않는 성대모사 선수권」에서 오치아이의 성대모사를 하여 이름을 알린 제약 회사 근무 남성.
  • 미네 류타 - 배우·탤런트. 현역 시절부터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교류가 있다. 자신도 드래곤즈 팬이어서, 우승 시 맥주 뿌리기에 참가하거나, 자신이 사회를 맡는 드래곤즈 HOT 스튜디오에서는 민영 방송국에서 유일하게 매년 캠프 전에 미네와 오치아이의 인터뷰를 방송하고 있다.
  • 네지메 쇼이치, 테리 이토 - 두 사람 모두 오치아이에 관한 저서를 출판하고 있다.
  • 시라이 분고 - 주니치 신문사 대표이사 회장·주니치 드래곤즈 구단주. 공사 모두 친분이 있으며, 오치아이를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으로 초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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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웹사이트 落合「中日のタブー暴露」講演会を実況中継(2)「選手の性格で指導を変えた」 http://www.asagei.co[...] 徳間書店 2017-06-17
[145] 웹사이트 落合「中日のタブー暴露」講演会を実況中継(3)立浪派と山崎派が対立している http://www.asagei.co[...] 徳間書店 2017-06-17
[146] 웹사이트 落合「中日のタブー暴露」講演会を実況中継(4)日本球界はコーチの給料が安い http://www.asagei.co[...] 徳間書店 2017-06-17
[147] 간행물 有本義明のコメント 週刊新潮 2010-10-07
[148] 웹사이트 落合監督断言 「他の監督はやりやすくなった。逃げ道なくなったもん」 https://news.livedoo[...] 2011-12-01
[149] 웹사이트 落合博満氏が「野球のレベルが落ちてはいる」と感じる部分は? 現代に合わせたオレ流指導についても語る https://www.sponichi[...] 2022-12-19
[150] 웹사이트 落合博満氏 “長距離のランニングは効果が薄い”という考え方「これはないと思います」 https://www.sponichi[...] 2024-04-01
[151] 서적 熱球伝説―キューバリナレスを育てた野球王国 岩波書店
[152] 뉴스 (제목 없음) スポーツニッポン 1993-12-19
[153] 뉴스 中日・落合監督が竜投伝統のエースナンバー「20」を否定 スポーツ報知 2004-12-15
[154] 서적 フクシ伝説 集英社
[155] Youtube 【責任者登場】ガンダム大好き落合博満、『水星の魔女』制作責任者に聞いてはいけないこと聞いてみた! https://www.youtube.[...] 2023-04-04
[156] 웹사이트 落合博満氏 鋭すぎる質問連発にNG連発?!「機動戦士ガンダム 水星の魔女」EPタジタジ… https://www.sponichi[...] 2023-04-04
[157] 블로그 中日ドラゴンズ「落合監督」BHC来訪! http://blog.lalabit.[...] 2008-01-15
[158] 웹사이트 落合博満氏 消える魔球を攻略した童夢くん知らず 巨人在籍時はすでに… https://www.sponichi[...] 2024-01-09
[159] 웹사이트 “投手大国”秋田…“東北の星飛雄馬”も輩出 https://www.zakzak.c[...] 2020-07-22
[160] 웹사이트 落合福嗣 声優を目指したきっかけは父・博満氏とのひととき「ターミネーターになれるかな?」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24-10-08
[161] 웹사이트 落合博満氏 英語嫌いの伝説の数々明かす 「なんでも横文字にしてしまうのは…理解不能」 https://www.sponichi[...] 2022-12-19
[162] 웹사이트 落合バッグ盗難事件と長嶋コーチ解雇の関係 https://gendai.media[...]
[163] 웹사이트 【長嶋清幸コラム】怒りの退団会見につながった落合監督の「バッグ盗難事件」 https://www.tokyo-sp[...]
[164] 웹사이트 辻発彦「西武は最強の“アマチュア野球”」 https://www.ninomiya[...] 2022-12-19
[165] 간행물 門田博光と南海ホークス、パンチ佐藤の漢の背中!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23-05
[166] Youtube ワガママ・星野監督、預言者・落合監督!? 中年の星 中日ドラゴンズ 山本昌が語る名監督たちの姿...1億円もらっても? <日本 プロ野球 名球会> https://www.youtube.[...] YouTube 2022-12-19
[167] 웹사이트 SportsWatch 落合監督が告白、試合中に無表情貫くも、その裏では・・・? https://web.archive.[...] 2011-12-01
[168] 웹사이트 落合博満、田中将大をドラフト指名しなかった理由「本心を言うと…」 https://news.mynavi.[...] 2024-08-27
[169] 방송 戦え!スポーツ内閣 【緊急生放送!落合博満が大いに語る▼日本シリーズの夜に… https://tvtopic.goo.[...]
[170] 웹사이트 中日落合監督が初の正力賞 https://www.nikkansp[...] 2022-12-19
[171] 간행물 中日・落合の再生工場を見に行く 週刊現代 2009-08-15
[172] 웹사이트 球団史上初の連覇!中日・落合監督「扉を開いた」 https://www.sponichi[...] 2022-12-19
[173] 웹사이트 続く貧打…落合監督「あと50負けられる」 https://www.sponichi[...] 2022-12-19
[174] 간행물 中日・落合の再生工場を見に行く 週刊現代 2009-08-15
[175] 웹사이트 中日がファンクラブ会報で落合批判 「感謝の心、感じられなかった」 https://www.j-cast.c[...] 2022-12-19
[176] 웹사이트 落合監督&信子夫人“ぶっちゃけ対談”大逆転Vの裏側「全てはそこから」 https://www.sponichi[...] 2011-10-19
[177] 서적 プロ野球12球団ファンクラブ全部に10年間入会してみた! 集英社
[178] 웹사이트 落合博満は「心技体」ではなく「体技心」で選手を育てた https://tenro-in.com[...] 2021-07-17
[179] 웹사이트 落合博満氏 中日監督復帰は「まずないでしょう」と話す理由 https://www.sponichi[...] 2023-04-25
[180] 웹사이트 2007年 日本プロスポーツ大賞発表!!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181] 웹사이트 東京都文化賞・都民文化栄誉章 http://www.seikatubu[...] 東京都生活文化局
[182] 웹사이트 歴代ナイスカップル表彰 http://www.422fufu.c[...] 講談社
[183]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1993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92-12
[184] 웹사이트 2013年当時、メ〜テレ公式サイト内で配信された6月15日放送のロッテ対中日告知ページ https://web.archive.[...] 2013-06-15
[185] 웹사이트 2002年当時、東海ラジオウェブサイト内に掲載されたプロ野球中継日程表 https://web.archive.[...] 2002-10-22
[186] 웹사이트 2003年当時、東海ラジオウェブサイト内に掲載されたプロ野球中継日程表 https://web.archive.[...] 2003-10-06
[187] 웹사이트 2002年6月11日の中京地区におけるテレビ番組予定表 https://web.archive.[...] 日刊スポーツ 2002-06-11
[188] 웹사이트 侍プロ野球 2012「中日×巨人」 https://web.archive.[...] 2012-05-15
[189] 웹사이트 巨人戦 初解説 落合博満 原巨人をメッタ斬り https://web.archive.[...] 2012-04-20
[190] 웹사이트 【読売解説遊戯】落合博満が斬る巨人軍「オレ流時々フェイク」とは? http://www.plus-blog[...] 2012-04-20
[191] 웹사이트 番組表検索結果(キーワード…「プロ野球」「落合博満」) http://cgi2.nhk.or.j[...] 2012-2013
[192] 웹사이트 落合・森の昨季中日首脳陣 中日戦解説で高木采配メッタ斬り https://www.news-pos[...] 2012-10-22
[193] 서적 プロ野球&メジャーリーグ解説者名鑑
[194] 웹사이트 木村拓哉さん出演の「FMVシリーズ」TV-CM第15弾「オレ流」篇 https://pr.fujitsu.c[...] 富士通 2005-01-11
[195] 웹사이트 日めくりプロ野球11月 http://www.sponichi.[...] 2007-11
[196] 웹사이트 【特報】 日本野球界伝説の「三冠王」が、異世界転生!? 仕掛け人はドアラ?? 衝撃の新連載『落合博満のオレ流転生』本日開幕! https://morning.koda[...] 講談社 2024-03-28
[197] 문서 오치아이는 고교 시절에 야구부 퇴단과 복귀를 7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198] 문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가입 조건 및 오치아이의 거부
[199] 웹사이트 1995年 名球会目指してきたわけじゃない 落合博満、資格獲得も入会辞退 http://www.sponichi.[...] 2016-03-15
[200] 문서 등번호 ‘6’번은 당시 다나카 유키오가 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3’번으로 정해졌다.
[201] 웹사이트 오치아이 주니치 단장, 성적 부진으로 내년 1월 퇴임 https://m.sports.nav[...]
[202] 문서 오치아이의 등번호 16번과 히라타 료스케, 모리노의 등번호 선정 이유
[203] 문서 양대 리그의 홈런왕을 석권한 것은 사상 처음.
[204] 문서 양대 리그 타점왕은 사상 처음이며, 현재도 유일함.
[205] 문서 5차례 수상은 역대 최다 기록이며, 1989년과 1993년은 특별상.
[206] 문서 우승 팀 이외로부터 두 차례 이상 선정된 것은 오 사다하루(1964년, 1974년)에 이어 두 번째임.
[207] 문서 포지션별 수상 년도
[208] 문서 2011년은 센트럴 리그 연맹 특별 수상.
[209] 문서 사상 처음이자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가장 유일함.
[210] 문서 우타자로서는 일본인 역대 최고 타율, 5000타수 이상에서는 우타자 최고 타율 기록.
[211] 문서 알렉스 카브레라의 기록 경신
[212] 문서 100타수 이상 역대 1위 타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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