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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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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도파는 1930년대 일본 제국 육군 내 파벌로, 우가키 군축으로 인한 장교들의 불만과 국가 개조를 주장하는 청년 장교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중심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소련과의 전쟁을 통한 대외 팽창을 주장했다. 황도파는 통제파와 대립하며, 3.15사건, 10.26사건, 2.26 사건 등 무력 행동을 시도했으나, 2.26 사건 실패 이후 대규모 숙청을 당하며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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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파
개요
아라키 사다오
아라키 사다오 장군. 황도파의 지도자이자 주요 철학자로 여겨졌다.
히노마루
히노마루
로마자 표기Kōdōha
존속 기간1920년대 ~ 1936년 2월 29일
국가일본
맹세군사 정부 수립
이념국가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적대 세력통제파
상세 정보
창립1920년대
해산1936년 2월 29일
활동 지역일본
범죄 행위2.26 사건
관련 정보

2. 형성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 등이 황도파를 결성한 계기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에 의한 소위 우가키 군축이었다. 우가키가 군의 실권을 쥐고 있는 동안 아라키와 마사키 등은 우가키 인맥이 아니어서 소외되었다.[1] 아라키는 1918년 시베리아 출병 당시 시베리아 파견군 참모였는데, 이때 혁명 직후의 혼란하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노농적군이 “철의 규율”과 용감한 감투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크게 놀랐다. 그래서 반소련 사상을 굳히면서, 동시에 소련이 군사·경제 건설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시베리아 지역에서 소련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대소련 주전론자가 되었다.

1920년대에 영관급 장교들은 군 현대화와 국민총동원 체제를 추구하며 일석회라는 스터디 그룹 형태의 사조직을 만들었다. 이때 주요 인물이 나가타 테츠잔과 오바타 토시로였는데, 1932년 나가타와 오바타가 분열하면서 나가타 세력은 통제파로, 오바타 세력은 황도파로 흡수되었다.

2. 1. 우가키 군축과 그 영향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은 나가타 테츠잔을 육군성 동원과장에 임명하여 지상군 4개 사단 약 9만 명을 감축했다. 그리고 그 예산으로 항공기, 전차 부대를 신설하고 보병 부대에도 경기관총, 곡사포를 장비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이는 유럽 열강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1]

나가타는 제1차 세계 대전 관전무관 출신으로, 유럽 국가들의 총력전 체제를 목격하고 일본의 군비, 정치, 경제가 그에 비해 뒤떨어졌음을 통감했다. 우가키 군축은 군사 예산 축소를 요구하는 여론의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동시에 유럽 열강에게 뒤진 격차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우가키-나가타 흐름이 통제파가 되어 나중에 황도파와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우가키 군축으로 인해 장교들의 승진 적체가 발생하여 대우가 악화됨에 따라 불평불만이 격화되었다.[2]

2. 2. 청년 장교들의 불만과 국가개조운동

위관급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국가개조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 동기는 다음과 같았다.

  • 군 내부적으로는 소련이 1928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키면 일본군이 소련을 선제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므로 하루빨리 대소 공격 거점으로서 만주를 확보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다. 또한, 우가키 가즈시게 군축 때문에 장교들의 승진 적체가 발생해서 대우가 악화됨에 따라 불평불만이 격화되었다.
  • 군 외부적으로는 농촌의 위기와 경기침체가 큰 원인이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기에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사람이 증가했고, 장교들은 군기 동요에 대한 위기감을 가졌다. 또한 위관급 청년 장교들은 농촌 지도층(지주, 교사, 사가, 사족, 상가) 출신이 많았는데, 이웃으로서 함께 자란 부하 병사들의 친가가 망하고 그 자매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등 농촌의 비참한 실태를 가까이에서 보고 들어 그 고통을 이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벌과 재벌, 중신, 관료들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그들을 엎어버려야 한다는 키타 잇키 등 재야 지식인들의 사상이 청년 장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

2. 3. 아라키 사다오의 등장과 황도파의 세력 확장

1931년 12월, 10월 사건의 압력을 배경으로 이누카이 내각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으로 취임했다.[1] 아라키는 참모총장 카나야 한조를 군사참의관으로 보내고, 후임으로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을 임명했다. 1932년 1월에는 대만군 사령관으로 있던 마사키 진자부로를 참모차장으로 불러와 참모본부의 실권을 쥐게 했다.[1] 그리고 우가키 가즈시게의 측근인 스기야마 하지메, 니노미야 하루시게를 한직으로 보내고, 육군차관에 야나가와 헤이스케, 군무국장에 야마오카 시게아츠를 배치하는 등, 자파 세력확대에 힘썼다. 이 인맥은 인사국장 마츠우라 쥰로쿠로, 군사과장 야마시타 도모유키로 이어진다.

아라키는 관저에서 위관급 장교들과 매일 술을 같이 마시면서 무력에 의한 ‘유신’을 도모하는 청년장교들을 격려하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아라키와 마사키는 러일전쟁 시대를 이상화하여 일본을 그 상태로 복귀시킬 수 있는 군의 확대강화, 하루라도 빠른 대소전 결행을 추구했다. 여기에서 “임금 곁의 간신배(君側の奸)”를 치고, “국체를 명징(国体を明徴)”히 하고, “천황친정”을 실현할 것이라는 사상이 도출되었다. 이런 사상을 떠벌리는 아라키를 “무사성충의 인격(無私誠忠の人格)”자로 숭배하게 된 청년장교들이 아라키-마사키 인맥에 합류하게 되면서 황도파가 형성되었다.

3. 사상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 등이 황도파를 만든 계기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에 의한 우가키 군축이었다. 우가키는 나가타 테츠잔을 육군성 동원과장에 임명하여 지상군 4개 사단 약 9만 명을 군축하고, 그 예산으로 항공기, 전차 부대를 신설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아라키와 마사키는 우가키 인맥이 아니었기에 소외되었고, 시베리아 출병 당시 혁명 직후 러시아 노농적군의 규율과 정신력에 크게 놀랐던 아라키는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대소주전론자가 되었다.[9]

1920년대에 영관급 장교들이 군 현대화와 국민총동원 체제를 추구하며 일석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1932년 나가타와 오바타 토시로가 분열하면서 나가타 세력은 통제파로, 오바타 세력은 황도파로 들어갔다. 한편, 위관급 청년장교들 사이에서는 국가개조운동이 퍼지고 있었는데, 농촌의 위기와 경기침체, 만주를 확보하려는 조급함, 우가키 군축으로 인한 장교들의 승진 적체 등이 원인이었다. 이들은 군벌과 재벌, 중신, 관료들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여 키타 잇키의 『일본개조법안대강』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31년 10월 사건의 압력을 배경으로 이누카이 내각에 아라키가 육군대신으로 입각하고, 1932년 마사키를 참모차장으로 불러와 참모본부의 실권을 쥐게 했다. 이들은 우가키의 측근들을 한직으로 쫓아내고 자파 세력확대에 힘썼다. 아라키는 위관급 장교들과 매일 술을 같이 마시면서 무력에 의한 ‘유신’을 도모하는 청년장교들을 격려하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아라키와 마사키는 러일전쟁 시대를 이상화하여 일본을 그 상태로 복귀시키고 군을 확대 강화하며, 빠른 대소전 결행을 추구했다. 이들은 “임금 곁의 간신배(君側の奸)”를 치고, “국체를 명징(国体を明徴)”히 하고, “천황친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1936년 2월 26일 쿠데타 시도 당시 정의군이 사용한 깃발. 네 글자는 "천황을 존경하고 반역자를 토벌하라"(尊皇討奸)를 의미한다.


황도파는 부패한 관료, 기회주의적 정치인, 그리고 탐욕스러운 재벌 자본가들을 숙청한 서구화 이전의 순수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구상했다. 국가는 군부의 지원을 받는 "쇼와 유신"을 통해 히로히토 천황에 의해 직접 통치될 것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로 회귀하고, 대외적으로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은 불가피했다.[2]

황도파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결과를 돌아보지 않고 '돌격대'가 되려 한 사상적 특질을 보였다. 젊은 장교들은 '혁명'이나 '쿠데타'라는 개념조차 거부했고,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는 나가타 테츠잔 군무국장을 살해한 후 법정에서 "국가 혁신은 없다. 일본 국민에게 혁신은 없다. 천황의 뜻에 따라 그 일을 보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도파는 재벌이나 관료 사이에서 위험시되어 정권을 담당할 조건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3. 1.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 등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국가 통치를 주장했다. 이들은 '군측의 간신'을 제거하고, 천황친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었다.[2] 이러한 사상은 일본 제국 육군 내에서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이 추진한 우가키 군축에 대한 반발로 형성되었다. 나가타 테츠잔을 육군성 동원과장에 임명하여 지상군 4개 사단 약 9만 명을 군축하고, 그 예산으로 항공기, 전차 부대를 신설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아라키와 마사키는 우가키 인맥이 아니었기에 소외되었고, 시베리아 출병 당시 혁명 직후 러시아 노농적군의 규율과 정신력에 크게 놀랐던 아라키는 소련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대소주전론자가 되었다.[9]

1920년대에 영관급 장교들이 군 현대화와 국민총동원 체제를 추구하며 일석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1932년 나가타와 오바타 토시로가 분열하면서 나가타 세력은 통제파로, 오바타 세력은 황도파로 들어갔다. 한편, 위관급 청년장교들 사이에서는 국가개조운동이 퍼지고 있었는데, 농촌의 위기와 경기침체, 만주를 확보하려는 조급함, 우가키 군축으로 인한 장교들의 승진 적체 등이 원인이었다. 이들은 군벌과 재벌, 중신, 관료들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여 키타 잇키의 『일본개조법안대강』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31년 10월 사건의 압력을 배경으로 이누카이 내각에 아라키가 육군대신으로 입각하고, 1932년 마사키를 참모차장으로 불러와 참모본부의 실권을 쥐게 했다. 이들은 우가키의 측근들을 한직으로 쫓아내고 자파 세력확대에 힘썼다. 아라키는 위관급 장교들과 매일 술을 같이 마시면서 무력에 의한 ‘유신’을 도모하는 청년장교들을 격려하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아라키와 마사키는 러일전쟁 시대를 이상화하여 일본을 그 상태로 복귀시킬 수 있는 군의 확대 강화, 하루라도 빠른 대소전 결행을 추구했다. 여기에서 “임금 곁의 간신배(君側の奸)”를 치고, “국체를 명징(国体を明徴)”히 하고, “천황친정”을 실현할 것이라는 사상이 도출되었다.[2]

3. 2. 대외 팽창과 소련과의 대립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를 중심으로 한 황도파는 소련을 일본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소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2] 이들은 만주를 대소 공격의 거점으로 삼고, 시베리아 지역까지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라키는 1918년 시베리아 출병 당시 시베리아 파견군 참모였는데, 이때 혁명 직후 혼란스럽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노농적군이 “철의 규율”과 용감한 전투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크게 놀랐다. 그는 반소 사상을 굳히면서, 소련이 군사, 경제 건설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시베리아 지역에서 소련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대소 주전론자가 되었다.

황도파는 소련이 1928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키면 일본군이 소련을 선제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므로, 하루빨리 대소 공격 거점으로서 만주를 확보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가졌다.

이러한 황도파의 주장은 주변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이어졌다.

4. 행동

황도파는 군부 내에서 아라키, 마사키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 중견 장교들 사이에서는 고립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 혁신'을 위한 무력 행동은 무라나카 타카지, 이소베 아사이치 등 위관급 청년 장교들이 주도했다.[2]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 계획을 세웠지만,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와 달리 구체적인 정세 판단이나 정책은 부족했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천황의 뜻에 따르려 했을 뿐, 내각 구성 계획이나 지지 기반도 없었다. 특히 재벌과 관료들은 황도파를 위험하게 여겨 합법적인 정권 장악은 어려웠다.[2]

이러한 상황에서 황도파는 성과나 전망에 관계없이 위험한 시도를 하는 경향을 보였다. 3월 사건, 10월 사건 등으로 정당 정치인들이 두려움을 느껴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 대신에 취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2] 마사키 진자부로천황기관설 배척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5·15 사건과 아이자와 사건 공판에서 배외주의, 국수주의적 국민 의식을 이용하여 판결에 개입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정당 정치를 붕괴시키고 준전시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4. 1. 청년 장교들의 역할

무라나카 타카지, 이소베 아사이치 등 위관급 청년 장교들은 황도파의 무력 행동을 주도했다.[2] 이들은 쿠데타를 통해 국가를 개조하고, 천황 친정을 실현하려 했다.[2]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구체적인 계획이나 전략 없이 감정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2]

젊은 장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일으킨 후에는 "폐하 밑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만을 기대했다. (2·26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인 쿠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중위의 신문 조서에서)[2]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 중좌는 법정에서 검찰관의 질문에 "국가 혁신이라는 것은 절대 없다. 하물며 일본 국민에게 혁신은 없다. 덴노(天皇)의 뜻에 따라 그 일을 보좌하는 것이다."라고 답하며 '혁명', '쿠데타'라는 개념조차 거부했다.[2]

이들은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와 달리 구체적인 정세 판단과 정책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천황의 대어심에 기댈 뿐이었다.[2] 그들이 숭배한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 역시 자신들이 수반이 되는 내각을 만들 계획 같은 것도 없었고, 지지 기반도 없었다. 특히 재벌과 관료들이 황도파를 위험시했기에 그들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조건 자체가 누락되어 있었다.[2]

이러한 이유로, 성과와 전망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위험한 모험을 하는 특징이 나타났다. 황도파의 그런 특징은 군국주의적 지배를 추진하는 기관차 역할을 했다.[2]

4. 2. 쿠데타와 암살 시도

황도파는 여러 차례 쿠데타와 암살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황도파는 '국가혁신'을 명목으로 무력 사용을 계획했지만,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와는 달리 구체적인 정세 판단이나 정책은 부족했다.[2] 이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천황의 뜻에 따르려 했을 뿐, 자신들이 주도하는 내각 구성 계획이나 지지 기반도 없었다. 특히 재벌과 관료들은 황도파를 위험하게 여겨 합법적인 정권 장악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도파는 성과나 전망에 관계없이 위험한 시도를 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특징은 군국주의적 지배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3월 사건, 10월 사건 등으로 정당 정치인들이 두려움을 느껴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 대신에 취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황도파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5.15 사건: 해군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되었다.
  • 아이자와 사건: 1934년 11월, 황도파 장교들이 주요 정치인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행 전에 발각되었다. 보복으로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가 통제파 지도자 나가타 테츠잔 장군을 암살했다.[6]
  • 2.26 사건: 1936년 2월 26일,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했다.[7] 이 사건으로 황도파는 고위 군부 직책에서 거의 숙청되었고, 지도자 아라키 사다오는 사임했다.


2.26 사건 이후 황도파는 사실상 소멸되었고, 통제파는 존재 이유를 잃었다.[7] 그러나 황도파의 정신적 힘과 천황 신비주의에 대한 이상은 군대에 남아 있었고, 하급 장교의 불복종(下克上, 게코쿠조) 전통도 남아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8]

마사키 진자부로천황기관설 배척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5·15 사건과 아이자와 사건 공판에서 배외주의, 국수주의적 국민 의식을 이용하여 판결에 개입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정당 정치를 붕괴시키고 준전시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5. 통제파와의 대립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를 중심으로 한 황도파는 나가타 데쓰잔, 도조 히데키 등이 속한 통제파와 대립했다. 두 파벌은 모두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성향을 공유했지만, 방법론과 전략에서 차이를 보였다. 황도파는 급진적인 쿠데타를 통해 국가 개조를 추진하려 한 반면, 통제파는 합법적인 절차와 제도 개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나가타 데쓰잔에 따르면, 일본 제국 육군 내에는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를 수장으로 하는 황도파만이 존재했고, 통제파라는 파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누카이 내각 시기 육군 내 주도권을 장악한 황도파는 노골적인 파벌 인사를 단행하여, 좌천되거나 소외된 자들이 반황도파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은 중앙에서 배제되었지만, 황도파 우대 인사에 대한 반발로 많은 중견 참모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나가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황도파에 대항하는 통제파의 수장으로 만들어졌고, 이들 비황도파 중견 참모층은 나중에 나가타와 도조 히데키를 중심으로 통제파로 뭉쳐 육군 중추부에서 황도파를 배제해 나갔다.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 아래에서 우가키 군축이 실시된 시기에 황도파가 형성되었다. 우가키는 나가타 데쓰잔을 육군성 동원과장에 임명하고, 지상 병력에서 4개 사단 약 9만 명을 감축하고, 항공기, 전차 부대를 신설하고, 보병에 경기관총, 중기관총, 곡사포를 장비하는 등 군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나가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관전무관으로서 유럽 각국의 군사력 실태와 총력전 체제를 목격하고, 일본의 군비와 정치·경제 체제의 뒤처짐을 절감했다. 통제파는 이러한 흐름을 계승했다.

한편 우가키가 군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아라키와 마사키는 우가키 파벌 외 인물로서 냉대받았다. 아라키는 1918년 시베리아 출병 당시 시베리아 파병군 참모였는데, 이때 혁명 직후 러시아의 혼란과 후진성을 보는 한편, 적군의 "철의 규율"과 용감함에 놀랐다. 그 때문에 아라키는 반소·반공 사상을 굳혔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경제 건설이 진행되기 전에 이와 싸워 시베리아 주변에서 격퇴하고, 이곳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대소 주전론자가 되었다.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국가 개조' 운동이 확산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 소비에트가 1928년에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키면,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거나 대소 공격을 개시하는 것도 불가능해지므로, 대소 공격의 거점으로 만주를 확보하려는 조급함.
  • 군축 때문에 장교들의 승진이 늦어지고, 대우도 이전과 비교하여 악화되어 그에 대한 불평·불만이 격화된 것.
  • 농촌의 공황과 불황 때문에 농민 출신의 병사들 중에 공산주의에 공명하는 자가 증가하여, 군의 규율이 동요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을 장교들에게 준 것.
  • 농촌의 지도층(지주, 교사, 사가(사가)·사찰 가문·상가 등) 출신의 젊은 장교들 중에는, 어릴 적 친구나 부하의 병사의 친가·자매가 몰락하거나 "인신매매"되는 등, 농촌의 비참한 실태를 가까이서 보고 들은 자가 많았기 때문.


젊은 장교들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우가키 등 군벌을 시작으로 재벌, 중신, 관료 파벌이라고 생각했다.

1931년 12월, 10월 사건의 압력을 배경으로 이누카이 내각에서 아라키가 육상대신에 취임하자, 가네야 노리조 참모총장을 군사참의관으로 돌리고, 후임에 간인노미야를 앉혔다. 이어 1932년 1월 타이완군 사령관 마사키를 참모차장으로 불러들이고, 참모본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편 스기야마 하지메, 니노미야 하루시게 등 우가키의 측근을 중앙에서 멀리하고, 차관에 야나가와 헤이스케, 군무국장에 야마오카 시게아쓰를 배치하는 등, 자파의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인사국장 마쓰우라 준로쿠로, 군사과장 야마시타도 이 계보에 연결된다. 아라키는 위관급에게 관저에서 밤낮으로 술을 대접하는 등, 무력에 의한 "유신"을 꾀하는 젊은 장교들을 고무하고, 그 지지를 얻었다.

아라키와 마사키는 러일 전쟁 시대를 이상화하고, 일본을 그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 군의 확대 강화와 대소 전쟁을 빨리 개시할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군주 곁의 간신"을 토벌하고 "국체를 명징"하게 하며 "천황 친정"을 실현해야 한다는 사상이 나온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아라키 등에 대해 젊은 장교들은 "무사 성충의 인격"으로서 존경했다. 이것이 황도파이다.

이 파는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대표로 하여, 오바타 도시시로, 하타 신지, 스즈키 요리미치, 마쓰이 사키치 등이 핵심부를 이루었으나, 군부 중견 장교들로부터는 거의 고립된 존재였다. '국가 혁신'의 카드로 무력 발동 계획을 담당한 것은 무라나카 다카지, 이소베 아사이치 등 위관급 젊은 장교단이었다.

황도파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 계획에 열중한 것은, 그들이 일본 육군육군성본부 중앙에 가까운 통제파만큼 구체적인 정세 판단과 방침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결과를 돌아보지 않고 '돌격대'가 되려 한 사상적 특질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 장교들은 자신의 행동을 일으킨 후에는 "폐하 밑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만을 기대할 뿐이었다.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을 살해한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는 법정에서 검찰관의 질문에 답하여 "국가 혁신이라는 것은 절대 없다. 하물며 일본 국민에게 혁신은 없다. 덴노(天皇)의 뜻에 따라 그 일을 보좌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 '쿠데타'라는 개념조차 거부했다.

또 그들의 신뢰를 모은 아라키나 마사키도, 자신들이 수반이 되어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예상할 뿐 그 이후의 계획도 없었고, 각 분야의 강력한 지지자도 없었다. 특히 재벌이나 관료 사이에서는 황도파를 위험시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그들이 정권을 담당할 조건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의 가능성 유무를 묻지 않고 위험한 행동에 뛰어드는 특징이 표면적으로 나타났다. 그 특징이야말로 군부·관료·재벌의 파시즘적 지배를 진행하는 선봉 역할을 한 것이다. 원래 아라키가 육상군 대신에 취임한 것 자체가 3월 사건·10월 사건에서 정당 수뇌부가 공포를 느낀 결과였다.

마사키는 교육총감 시대, 천황기관설 배척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5·15 사건이나 아이자와 사건의 공판에서는 배외주의, 국수주의의 국민 의식을 이용하여 판결에 개입시켰고, 또 정당 정치는 사실상 이때 붕괴되었다. 이 직후에 일어난 2·26 사건은 더욱 준전시 체제로 향하는 길을 열게 된다.

아라키 사다오이누카이 내각, 그리고 사이토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했으나, 본래 군령·교육 분야에 오래 종사하여 정치력이 부족했고,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과의 육군 예산 협상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측근들 대부분도 군정 경험이 부족하여, 충분히 아라키를 보좌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신 말년에는 성내 중견들의 신망을 잃고, 청년 장교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등 궁지에 몰렸다.

참모본부에서도 실무를 처리하는 마사키 부장에게 간인노미야 총장이 불쾌감을 쌓아가고, 내부적으로도 오바타 도시시로 제3부장과 나가타 데쓰잔 제2부장이 대소·중국 전략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이는 후일 황도파와 통제파의 항쟁의 발단이 된다.

아라키 사다오1934년 1월, 과음으로 인해 감기에 걸려 폐렴에 걸려 육군대신직을 사임한다. 아라키는 후임 육군대신으로 마사키를 추천했지만, 마사키의 독단에 질려 있던 간인노미야의 반대로 하야시 센주로 교육총감가 육군대신이 되고, 마사키는 그 후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야나가와 헤이스케 이하 황도파 참모들도 잇따라 중앙에서 물러나고, 더욱이 같은 해 11월에는 청년 장교들에 의한 사관학교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계기로 통제파에 의한 마사키 제거 여론이 높아졌다. 1935년 7월, 하야시와 간인노미야는 삼장관 회의에서 강압적으로 마사키를 경질하고, 후임에 와타나베 조타로를 임명했다.

아라키의 사퇴와 마사키의 경질로 황도파는 중앙에서의 기반을 잃었고, 8월의 아이자와 사건을 거쳐 1936년에는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2·26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이듬해에 걸친 대규모 숙군 인사로 황도파는 거의 궤멸했다. 현역으로 남은 것은 야마시타, 스즈키 요리미치 등 소수에 불과했다.[7]

참고로 대전 말기 1944년, 쇼와 천황에게 기도 내대신을 통해 "전쟁 지도에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경제, 사회의 적화로 향하는 도조와 그 측근을 대신하여, 예비역 황도파 장관을 기용해야 한다"고 진언한 고노에 후미마로에 대해, 천황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첫째, 마사키는 참모부장 시절, 국내 개혁안 같은 것을 자랑스럽게 제시했다. 그 안에 국가사회주의가 아닐 수 없다는 문구가 있어, 수정을 요구한 적이 있다. 또 그의 교육총감 시절의 방침에 의해 양성된 자들이, 오늘날의 공산주의적이라는 중견 장교들이다. 둘째, 야나가와는 2·26 직전까지 제1사단장이었지만, 부하 장교들의 움직임을 끝내 억누를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좋은 참모가 있으면 일을 할 수 있지만, 능력은 면군 사령관급 인물이 아니다. 셋째, 오바타는 육군대학교장 시절, 마쓰이 사키치를 끌어들이지 못했다. 작전가로서 볼 만한 점이 있지만, 군 사령관 정도의 인물일 것이다. 이상 이러한 점에 대해, 고노에는 연구했는지 아닌지」(키도 고이치 일기).

5. 1. 노선의 차이

아라키 사다오 장군과 그의 제자인 마사키 진자부로를 중심으로 하는 황도파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북진론'을 지지했다.[2] 반면, 나가타 데쓰잔도조 히데키를 중심으로 결집한 통제파는 '남진론'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팽창을 추구했다.[4]

황도파는 천황 친정을 강조하며 급진적인 국가 개조를 주장한 반면,[2] 통제파는 군부, 관료, 재벌의 협력을 통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3]

5. 2. 권력 투쟁



만주사변 이후, 황도파와 통제파는 일본 육군 내 주도권을 놓고 대립했다.[5] 아라키 사다오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의 국방장관이 되면서 황도파가 우세해졌으나,[1] 1934년 아라키가 건강 문제로 사임하면서 황도파의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2] 아라키의 후임으로는 통제파에 동조하는 하야시 센주로가 임명되었다.[2]

1934년 11월, 황도파 장교들이 주요 정치인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통제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마사키 진자부로를 군사훈련감찰총감(일본군 서열 3위) 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3,000명이 넘는 장교들을 강등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가 통제파 지도자 나가타 데쓰잔 장군을 암살하는 아이자와 사건이 발생했다.[6] 아이자와의 군사재판은 황도파가 통제파를 비난하고 아이자와를 애국자로 묘사하는 수단이 되었다.[6]

아이자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도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제1사단에 만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고, 황도파는 2·26 사건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일으켜 제1사단을 지원했다.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했고, 황도파 구성원들은 군 고위직에서 거의 완전히 숙청되었으며, 지도자 아라키 사다오는 사임했다.

2·26 사건 이후 황도파는 사실상 소멸되었고, 통제파는 군부를 장악하게 되었다.[7] 그러나 황도파의 정신적 힘과 천황 신비주의에 대한 이상은 군대에 남아 있었고, 하급 장교의 불복종(下克上, 게코쿠조) 전통도 남아있어 1937년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8]

6. 몰락

1934년 아라키 사다오가 건강 문제로 육군대신에서 사임하면서 황도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935년 마사키 진자부로가 교육총감에서 경질되면서 황도파는 중앙에서 기반을 잃었다. 1936년 2.26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황도파는 대규모 숙청을 당하고 사실상 궤멸했다.[7]

대전 말기 1944년, 고노에 후미마로쇼와 천황에게 예비역 황도파 장관 기용을 진언했지만, 천황은 국가사회주의적 성향과 2·26 사건 연루 등을 이유로 반박했다.

6. 1. 아라키 사다오의 사임과 마사키 진자부로의 경질

아라키 사다오이누카이 쓰요시 내각과 사이토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했지만, 군령·교육 분야에 오래 종사하여 정치력이 부족했고,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과의 육군 예산 협상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측근들 대부분도 군정 경험이 부족하여 아라키를 충분히 보좌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대신 말년에는 성내 중견들의 신망을 잃고, 청년 장교들로부터 비판받는 등 궁지에 몰렸다.

참모본부에서는 실무를 처리하는 마사키 진자부로 부장에게 간인궁 총장이 불쾌감을 쌓아갔고, 내부적으로도 오바타 도시시로 제3부장과 나가타 데쓰잔 제2부장이 대소·중국 전략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이는 후일 황도파와 통제파의 항쟁의 발단이 된다.

1934년 1월, 아라키는 과음으로 인해 감기에 걸려 폐렴에 걸려 육군대신직을 사임한다.[2] 아라키는 후임 육군대신으로 마사키를 추천했지만, 마사키의 독단에 질려 있던 간인궁의 반대로 하야시 센주로 교육총감이 육군대신이 되고, 마사키는 그 후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야나가와 헤이스케 이하 황도파 참모들도 잇따라 중앙에서 물러나고, 같은 해 11월에는 청년 장교들에 의한 사관학교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계기로 통제파에 의한 마사키 제거 여론이 높아졌다. 1935년 7월, 하야시와 간인궁은 삼장관 회의에서 강압적으로 마사키를 경질하고, 후임에 와타나베 조타로를 임명했다.[6]

아라키의 사퇴와 마사키의 경질로 황도파는 중앙에서의 기반을 잃었고, 8월의 아이자와 사건을 거쳐 1936년에는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2·26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이듬해에 걸친 대규모 숙군 인사로 황도파는 거의 궤멸했다. 현역으로 남은 것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스즈키 이츠미치 등 소수에 불과했다.

6. 2. 2.26 사건과 그 결과

2·26 사건은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6] 이들은 주요 정부 요인들을 암살하고 군사 정권을 수립하려 했지만,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7] 쿠데타 진압 이후, 황도파는 대규모 숙청을 당하면서 사실상 궤멸되었다.[7]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일부 인물만이 현역으로 남았지만, 황도파는 더 이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7]

젊은 장교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는 "폐하 밑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만을 기대했다. 에나다 테츠잔 군무국장을 살해한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는 법정에서 "국가 혁신이라는 것은 절대 없다. 하물며 일본 국민에게 혁신은 없다. 덴노(天皇)의 뜻에 따라 그 일을 보좌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혁명'이나 '쿠데타'라는 개념조차 거부했다.

아라키 사다오마사키 진자부로도 자신들이 수반이 되어 내각을 구성하는 것만을 예상했을 뿐, 그 이후의 계획은 없었고 각 분야의 강력한 지지자도 없었다. 특히 재벌이나 관료 사이에서는 황도파를 위험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이들이 정권을 담당할 조건 자체가 부족했다.

1934년 1월, 아라키 사다오는 건강상의 이유로 육군대신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마사키 진자부로를 추천했지만, 간인궁의 반대로 하야시 센주로가 육군대신이 되었다. 1935년 7월, 하야시 센주로와 간인궁은 삼장관 회의에서 마사키 진자부로를 경질하고, 후임에 와타나베 조타로를 임명했다.

아라키 사다오의 사퇴와 마사키 진자부로의 경질로 황도파는 중앙에서의 기반을 잃었고, 1936년에는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2·26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이듬해에 걸친 대규모 숙군 인사로 황도파는 거의 궤멸했다. 현역으로 남은 것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스즈키 이츠미치 등 소수에 불과했다.[7]

7. 평가 및 비판

황도파의 사상과 행동은 현대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이들은 극단적인 국가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이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식민 지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도파는 천황, 국민, , 그리고 도덕을 하나로 뗄 수 없는 것으로 연결하고, 무사도 사상을 유럽의 파시즘과 결합한 이념을 내세웠다.[2] 이들은 부패한 관료, 정치인, 재벌을 숙청하고, 군부의 지원을 받는 "쇼와 유신"을 통해 히로히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국가를 구상했다.[2] 이는 민주주의자유주의 가치를 부정하고,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평가된다.

황도파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을 불가피하다고 여겼으며,[2] 만주사변 이후 군부 내에서 통제파와 대립했다. 이들은 아이자와 사건과 2·26 사건 등 과격한 폭력 사건을 일으키며 쇠퇴해 갔다.[6][7]

더불어민주당은 역사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으며, 황도파의 사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참조

[1] 서적 Japanese Political History Since the Meiji Renovation 1868–2000 Palgrave Macmillan
[2] 서적 The Causes of the Second World War Wiley-Blackwell
[3] 서적 Inventing Japan, 1854-1964 https://archive.org/[...] Modern Library
[4] 서적 Securing Japan: Tokyo's Grand Strategy and the Future of East Asia Cornell University Press
[5] 서적 Japan's War
[6] 서적 Modern Japan: A Historical Survey https://archive.org/[...] Westview Press
[7] 서적 Soldiers of the Sun: The Rise and Fall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Random House; Reprint edition
[8] 서적 War in the Modern World Since 1815 Routledge
[9] 서적 日本軍閥暗闘史 中央公論社
[10] 서적 教科書には載せられない 日本軍の秘密組織 彩図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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