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료헤이 (정치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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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다 료헤이는 1874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 활동가로, 아시아주의를 신봉하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주장했다. 그는 흑룡회를 결성하여 러시아에 대한 강경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대한제국 병합 과정에서 일진회를 통해 합병을 위한 여론을 조성하는 등 제국주의 침략에 앞장섰다. 또한 쑨원 등 중국 혁명가들을 지원했지만, 이는 일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하다. 만년에는 극우적 행보를 보이며 대일본생산당을 결성하기도 했으며, 193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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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료헤이 (정치활동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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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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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우치다 료헤이 |
한자 표기 | 內田 良平 |
가나 표기 | うちだ りょうへい |
로마자 표기 | Uchida Ryōhei |
출생 | 1873년 2월 11일 |
사망 | 1937년 7월 26일 (향년 64세) |
출생지 |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
묘소 | 도쿄도 분쿄구 고히나타 덴료지 |
직업 | |
직업 | 국수주의자, 아시아주의자, 무술가 |
소속 | |
소속 단체 | 흑룡회 |
활동 | |
주요 활동 | 흑룡회 설립 대아시아주의 운동 국수주의 운동 무술 지도 |
사상과 신념 | |
주요 사상 | 국수주의 대아시아주의 존왕양이 무력 혁명론 대외 강경론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도야마 미쓰루 가와카미 소로쿠 손문 이승만 조소앙 |
기타 | |
영향 | 일본 극우, 아시아주의 운동 |
2. 생애
우치다 료헤이는 옛 후쿠오카 번사이자 무술가인 우치다 료고로의 셋째 아들로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났다.[2]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무술을 익혔으며, 청년 시절에는 도쿄로 상경하여 고도칸에서 유도를 배우고 동양어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숙부 히라오카 고타로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조선, 중국 등 아시아 대륙으로의 세력 확장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청년 시절 민족주의 단체 겐요샤에 가입하여 창립자 도야마 미쓰루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이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건너가기도 했다. 1898년에는 미야자키 도텐을 통해 쑨원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1901년에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강경책과 일본의 대륙 팽창을 주장하는 극우 단체 흑룡회를 결성했다. 1903년에는 대러동지회에 가입하여 러일 전쟁 개전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전쟁 후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폭력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 이후에는 대한제국 병합에 주력하여, 1906년 통감부 촉탁으로 부임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밑에서 활동하며 병합을 위한 공작을 벌였다. 1907년에는 친일 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결탁하여 한일 합방 운동을 추진하고 고문이 되었으며[4], 이들의 활동은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이어졌다. 우치다는 한일 병합 이후 일본 정부의 대한 정책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훗날 한반도 내정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쑨원의 중국 혁명 동맹회 결성을 지원하고, 필리핀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인도의 라쉬 비하리 보스 등 아시아 각지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을 지원하는 등 범아시아주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화민국 성립 후에는 만주와 몽골의 독립을 주장하며 일본의 이권 확대를 위한 공작 활동을 벌였고, 시베리아 출병에 찬성하는 등 점차 우익 색채를 강화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반대하며 요시노 사쿠조와 논쟁을 벌였고, 워싱턴 회의에서의 해군 군축안 반대 운동, 배일 이민법 반대 운동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5년 가토 다카아키 총리 암살 미수 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오모토교와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31년 대일본 생산당을 결성해 총재가 되었고, 1932년 혈맹단 사건, 1933년 신병대 사건 등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관동군을 지지하며 '일만몽 연방 건설', '일지 공존' 등을 주장했다. 1937년 7월 26일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옛 후쿠오카 번사이자 무술가인 우치다 료고로 内田良五郎일본어의 셋째 아들로, 현재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도진정 唐人町일본어에서 태어났다.[2] 어릴 적 이름은 료스케 良助일본어였고, 이후 기노에 甲일본어라고 불렸다. 1902년(메이지 34년)에 료헤이 良平일본어로 개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궁술, 검도, 유술, 씨름, 사격 등 다양한 무술을 배웠다. 아버지 료고로의 신도무소류 조술 神道夢想流杖術일본어 문하에는 '쇼와의 검성'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나카야마 하쿠도 中山博道일본어도 있었다.[3]1892년(메이지 25년), 18세 때 도야마 미쓰루가 이끄는 현양사 玄洋社일본어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숙부(아버지 료고로의 동생) 히라오카 고타로 平岡浩太郎일본어를 따라 도쿄로 상경하여 고도칸 講道館일본어에 입문해 유도를 배웠다. 이듬해인 1893년(메이지 26년)에는 동양어학교 東洋語学校일본어에 입학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1897년(메이지 30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시도했다. 숙부 히라오카 고타로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조선과 중국에 대한 세력 확장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청년 시절에는 민족주의 단체인 겐요샤에 가입하여 곧 창립자인 도야마 미쓰루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2. 2. 민족주의 활동 및 흑룡회 결성
우치다는 청년 시절 민족주의 단체인 겐요샤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곧 겐요샤의 창립자 도야마 미쓰루의 수제자가 되었다. 겐요샤는 자금을 모으고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더욱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주장하며 활동했다. 1892년 18세 때 숙부 히라오카 고타로를 따라 도쿄로 상경하여 고도칸에 입문해 유도를 배웠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동양어학교(東洋語学校, 이후 도호 협회 로시야어 학교)에 입학하여 러시아어를 배웠다.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우치다는 반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으로 건너갔다. 숙부 히라오카 고타로의 영향을 받아 일본이 조선과 중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1897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시도했으며, 1898년에는 미야자키 도텐을 통해 쑨원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중국 광저우로 건너가 쑨원과 이홍장의 제휴를 알선하는 한편, 혁명의용군(革命義勇軍)을 조직하여 쑨원의 혁명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01년 일본으로 돌아온 우치다는 흑룡회를 결성했다. 흑룡회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강경한 외교 정책과 한국 및 만주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을 주장하는 초국가주의 단체였다. 흑룡회는 러시아의 내부 사정을 소개하는 활동도 벌였다. 1903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정치 단체인 대러동지회에 가입하고 러일 전쟁 개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를 일본의 주요 위협으로 간주하여 많은 양의 반러시아 선전물을 저술하고 출판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아시아에서의 러시아 활동 정보를 수집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완충 지대로서 아무르강 유역까지 일본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에는 미야자키 도텐, 스에나가 세츠 등과 함께 쑨원과 황싱의 제휴를 통한 중국동맹회 설립에 관여했다. 또한 필리핀 혁명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라쉬 비하리 보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이 끝난 후, 우치다는 전쟁을 종결시킨 포츠머스 조약이 일본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도쿄에서 폭력적인 항의 시위를 선동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 3. 대한제국 병합 관여
러일 전쟁 이후, 우치다는 대한제국 병합을 추진하는 데 주력했다. 1906년(메이지 39년)에는 대한제국 통감부 촉탁(嘱託)으로 임명되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한국 내 불안을 조장하고 완전한 병합을 이루려 시도했다.1907년(메이지 40년), 우치다는 친일 단체 일진회의 회장 이용구와 접촉하여 한일 합방 운동을 함께 추진하기로 맹약하고, 일진회의 고문이자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이때 양측은 한일 병합 구상을 확인했다. 당시 일진회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를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했다.
1909년(메이지 42년) 12월, 우치다는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 회장 이용구 및 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한일합방건의서(韓日合邦建議書)를 작성하여 대한제국 황제 순종, 통감 소네 아라스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제출했다. 이 성명서에서 이용구는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한국이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외교권을 상실하는 등 어려움을 자초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며, 합방의 목적을 아시아 평화 유지와 한국 발전으로 포장했다.[4]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이용구는 훗날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우치다의 이러한 활동은 1910년 한일 병합이 이루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2. 4. 중국 혁명 지원 및 아시아주의
1898년 미야자키 도텐을 통해 쑨원과 교류를 시작했다.[2] 메이지 33년(1900년) 중국 광저우로 건너가 쑨원과 리훙장의 제휴를 알선하는 한편, 혁명의용군을 조직하여 쑨원의 혁명 운동을 지원했다.[2] 메이지 38년(1905년)에는 미야자키 도텐, 스에나가 세츠 등과 함께 쑨원과 황싱의 제휴를 통한 중국 혁명 동맹회 결성에 관여하였다.[2]또한, 필리핀 독립 운동 지도자인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인도 독립 운동 지도자인 라시 비하리 보스의 활동도 지원하며 아시아 국가들의 연대를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2]
2. 5. 만년의 활동과 사망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우치다는 만주와 몽골의 독립을 주장하며 川島浪速|가와시마 나니와일본어 등과 함께 화베이 지역에서의 공작 활동을 일본 정부에 건의했다.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등 우익적인 색채를 강화해 나갔다. 한편, 1921년 러시아 기근 당시에는 구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이후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결정된 해군 군축안에 반대하고, 1923년 미국 정부가 제정한 배일 이민법(排日移民法)에 반대하는 국민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요시노 사쿠조와 공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1925년에는 가토 다카아키 총리 암살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투옥되었으나 다음 해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모토교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오모토교와 관련된 世界红卍字会|세계 홍만자회중국어 일본 총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31년에는 대일본 생산당을 결성하여 총재가 되었다. 1932년 혈맹단 사건과 1933년 신병대 사건 등의 배후 인물로 거론되었으며, 관동군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일만몽 연방 건설'(日満蒙連邦建設), '일지 공존'(日支共存), '황모익찬 운동'(皇謨翼賛運動) 등을 구상했다. 1934년에는 오모토교 계열의 昭和神聖会|쇼와 신성회일본어 부통관(副統管)이 되었다.
1937년 7월 26일 사망했다.
3. 사상 및 평가
우치다 료헤이는 일본의 아시아 대륙 진출을 강력하게 주장한 아시아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였다. 그는 러시아를 일본의 주적으로 간주하여 1901년 흑룡회를 창설하고, 1903년에는 대러동지회를 결성하여 러일 전쟁 개전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인 반러시아 활동을 펼쳤다.[1] 그는 러시아의 아시아 활동 정보를 수집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완충 지대로서 아무르강 유역으로의 일본 세력 확장을 주장했다.[1]
러일 전쟁 이후 우치다는 대한제국 병합을 목표로 활동했다. 1906년 한국통감부 촉탁으로 부임하여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했으며, 이 지위를 이용하여 대한제국 내 불안을 조장하고 완전한 병합을 이루려 시도했다.[1] 1907년에는 친일 단체 일진회의 고문이 되어 회장 이용구와 한일 합방 운동을 맹약하고, 사실상 일진회를 조종하여 병합 여론을 조성했다.[1] 1909년 12월, 우치다는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 회장 이용구 및 백만 회원' 명의로 순종 황제, 통감 소네 아라스케, 총리 이완용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제출하도록 하여,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병합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당시 이용구는 성명서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희생으로 한국이 독립하고 보호받았음을 내세우며, 외교권 상실과 보호조약 등은 한국이 자초한 것이므로 일본과의 합방을 통해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이러한 우치다와 이용구의 합방론은 이후 일본 정부의 한일 병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고, 이로 인해 이용구는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우치다 자신은 한일 병합 이후 일본 정부의 대한 정책에 일부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병합 과정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한편, 우치다는 쑨원 등 중국 혁명가들을 지원하고 중국동맹회 결성에 관여했으며, 필리핀 혁명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라쉬 비하리 보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본질적으로 일본의 아시아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1년 중화민국 성립 후에는 '만몽 독립'(満蒙独立)을 외치며 화베이 지역에서의 공작 활동을 일본 정부에 제안했다. 1918년 시베리아 개입을 적극 지지했으며, 1922년 워싱턴 회담에서의 해군 군축안과 1923년 미국의 배일 이민법 제정에 반대하는 국민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극우적 행보를 강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요시노 사쿠조와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1925년에는 가토 다카아키 총리 암살 미수 사건의 용의자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1년에는 극우 정당인 대일본생산당(大日本生産党)을 결성해 총재가 되었고, 1932년 혈맹단 사건, 1933년 신병대 사건 등의 배후로 거론되기도 했다. 만년에는 관동군을 지지하며 '일만몽 연방 건설'(日満蒙連邦建設)을 구상하는 등, 사망할 때까지 일관된 극우 국가주의 및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Shindo Muso Ryu Jojutsu
International Hoplological Society
1993
[2]
웹사이트
大日本生産党
http://大日本生産党.com/fo[...]
[3]
서적
朝鮮人物事典
[4]
문서
統監府文書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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