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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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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워싱턴 회담은 1921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미·일 간 군함 건조 경쟁 심화에 따른 군비 제한 및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목표로 하였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열강들이 참여하여 해군 군비 제한에 관한 5개국 조약,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 태평양 방면 섬에 관한 4개국 조약 등을 체결하고, 영일 동맹을 해소하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한국 독립 문제 제기를 위해 노력했으나,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워싱턴 회담은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의 팽창을 완전히 억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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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회담
개요
이름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
다른 이름워싱턴 군축 회의
로마자 표기Wasingeoteon Haegun Gunchuk Hwoeui
기간1921년 11월 12일 ~ 1922년 2월 6일 (117일)
장소미국 워싱턴 D.C.
참가국미국
영국
일본 제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주요 의제해군 군축, 태평양 지역 문제
결과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체결
사국 조약 체결
구국 조약 체결
중국에 관한 조약 체결
배경
주요 원인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군 군비 경쟁 심화
미국의 우려일본 제국의 해군력 확장과 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 증대
주요 참가자
미국찰스 에번스 휴스 (국무장관)
영국아서 밸푸어 (외무장관)
일본 제국가토 도모사부로 (해군대신)
프랑스아리스티드 브리앙 (수상)
이탈리아카를로 스포르차 (외무장관)
주요 조약 및 합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주력함과 항공모함의 톤수 제한, 건조 제한
사국 조약태평양 지역의 현상 유지, 분쟁 시 협의
구국 조약중국의 주권 존중, 문호 개방
중국에 관한 조약중국의 관세 자율권 회복
영향
군비 경쟁 완화주요 해군 강국 간의 군비 경쟁 일시적 완화
태평양 지역 안정태평양 지역의 국제 관계 안정화 노력
일본 제국의 불만해군력 제한에 대한 일본의 불만 증대, 이후 태평양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
평가
긍정적 평가전후 세계 평화 유지 노력의 일환, 군비 경쟁 억제
부정적 평가일본의 불만 야기,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미흡
조약의 제한으로 인해 잠수함 등 다른 분야의 군비 경쟁 심화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와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변화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독일 제국은 패전국이 되었으며, 영국프랑스는 국력이 약화된 반면 미국이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로 부상했다. 일본은 전쟁 기간 중 중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으나, 중국 내 반일 여론 확산, 친일 군벌의 쇠퇴, 유럽 열강의 재진출 등으로 인해 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미국과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시작된 '군함건조 경쟁'으로 인해 재정 압박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1916년의 해군 법령에 따라 1919년 7월까지 156척의 군함을 건조하기로 했고, 이에 대항해 일본도 '88함대' 건설에 주력했다. 두 나라는 과다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비 제한을 위한 국제 회담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1년 8월, 미국의 대통령 워렌 하딩은 일본, 중국 및 동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에 '군비 제한을 위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워싱턴 회담에서 미국, 영국, 일본은 각기 다른 목표를 추구했다.

국가주요 목표
미국찰스 에반스 휴즈 국무장관을 수석 대표로 한 미국 대표단은 서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해군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또한, 영일 동맹 폐지로 미영 간 긴장을 완화하고, 일본이 중국에서의 문호 개방 정책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당시 미국은 총액 47억 달러에 달하는 대영 채권을 갖고 있어 발언권이 막강했다.
영국아서 벌푸어 외상을 수석 대표로 한 영국 대표단은 서태평양의 평화와 안정 달성, 미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 회피, 영국 영향권 지역에 대한 일본 진출 저지, 싱가포르, 홍콩 등 자유령의 안전 유지를 목표로 했다.
일본가토 도모사부로 해군 대신을 수석 대표로 한 일본 대표단은 영미와의 해군 군축 조약 체결, 만주몽골에서의 일본 권익에 대한 정식 승인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남양 제도, 시베리아, 칭다오의 권익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회의를 주도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대표단으로 보낸 암호 전보를 미국의 블랙 체임버가 해독하면서 회의는 미국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용인하는 가장 낮은 해군 비율을 파악하여 일본을 압박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열강이 쇠퇴하고 미국이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로 급부상했으며, 일본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제정 러시아는 혁명으로 붕괴되었다.[22]

미국과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함건조 경쟁으로 재정 압박을 받게 되자, 군비 제한을 위한 국제 회담의 필요성을 느꼈다. 1916년 미국의 해군 법령에 따라 1919년 7월까지 156척의 군함 건조에 대항해 일본도 '88함대' 건설에 주력했으나, 양국 모두 과도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 8월, 미국의 대통령 워렌 하딩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에게 군비 제한 회담을 제안했고,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이들 9개국이 참여한 워싱턴 회담이 개최되었다.[22]

영일 동맹러시아 제국독일 제국의 소멸로 영국에게 무용해졌고, 영미 관계에도 좋지 않아 해소되었다. 그 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에 의해 태평양에서의 각국 영토와 권익을 보장하고, 태평양 제도의 요새화를 금지하는 '''4개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회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주력함(전함) 건조를 10년간 중지하고, 주력함 보유 톤수 제한 및 국가별 비율을 제안했다.[23] 협의 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왕국 5개국은 주력함 보유율을 미국과 영국은 5, 일본은 3,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67로 하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했다.[22] 일본은 대중국 21개조 요구와 시베리아 출병 등으로 국제적, 국내적 평판이 좋지 않았고, 제1차 세계 대전 후 경기가 공황으로 바뀌면서 긴축 재정 속에서 군사비 삭감이 불가피해져 대미, 대영 6할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 참가국은 중화민국의 영토 보전, 문호 개방, 새로운 세력 범위 설정을 금지하는 '''9개국 조약'''을 체결했다.[22]

또한 이시이-랜싱 협정이 파기되고, 일본은 산둥 반환 조약으로 산둥성, 산둥 철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하고,[22] 산둥 반도와 한커우의 주둔 병력도 자발적으로 철수했다.[24]

2. 2. 군비 경쟁 심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 '군함건조 경쟁'이 시작되어 두 나라는 재정 압박을 받게 되었다. 미국1916년의 해군 법령에 따라 1919년 7월까지 156척의 군함을 건조하기로 했고, 이에 대항해 일본도 '88함대' 건설에 주력했다. 두 나라는 과다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비 제한을 위한 국제 회담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2. 3. 열강들의 이해관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 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독일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영국프랑스의 국력은 약화된 반면 미국이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로 부상했다. 일본은 전쟁 기간 중 중국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으나, 중국 내 반일 여론 확산, 친일 군벌의 쇠퇴, 유럽 열강의 재진출 등으로 인해 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22]

미국과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시작된 '군함건조 경쟁'으로 재정 압박을 받게 되었다. 미국은 1916년 해군 법령에 따라 1919년 7월까지 156척의 군함을 건조하기로 했고, 일본은 '88함대' 건설에 주력했다. 양국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비 제한을 위한 국제 회담의 필요성을 느꼈다.[23]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 8월, 미국의 대통령 워렌 하딩은 군비 제한 회담을 제안했고,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워싱턴 회담이 개최되었다.

워싱턴 회담에서 미국, 영국, 일본은 각기 다른 목표를 추구했다.

  • 미국: 찰스 에반스 휴즈 국무장관을 수석 대표로 한 미국 대표단은 서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해군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또한, 영일 동맹 폐지로 미영 간 긴장을 완화하고, 일본이 중국에서의 문호 개방 정책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총액 47억 달러에 달하는 대영 채권을 가진 미국의 발언권은 막강했다.
  • 영국: 아서 벌푸어 외상을 수석 대표로 한 영국 대표단은 서태평양의 평화와 안정 달성, 미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 회피, 영국 영향권 지역에 대한 일본 진출 저지, 싱가포르, 홍콩 등 자유령의 안전 유지를 목표로 했다.
  • 일본: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 대신을 수석 대표로 한 일본 대표단은 영미와의 해군 군축 조약 체결, 만주몽골에서의 일본 권익에 대한 정식 승인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남양 제도, 시베리아, 칭다오의 권익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회의를 주도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대표단으로 보낸 암호 전보를 미국의 블랙 체임버가 해독하면서 회의는 미국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용인하는 가장 낮은 해군 비율을 파악하여 일본을 압박했다.

3. 회담 목적

워싱턴 회담은 단순히 '군비 축소'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열강들 사이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도 주요 목표였다.[8] 일본은 협력 관계에 있던 제정 러시아가 사라지고 대외 무역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으므로 미국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영일 동맹의 표적으로 지목되던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점과 일본이 영일 동맹을 구실로 중국에서 침략 행위를 자행한다는 점 등을 들어 영일 동맹을 해소시키는 동시에, 일본에 지나치게 유리해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에 균형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영국은 회담에서 서태평양의 평화와 안정을 달성하고, 미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을 피하며, 일본이 자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을 침범하는 것을 막고, 싱가포르, 홍콩, 도미니언 국가의 안보를 보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요구 사항 목록보다는 합의 이후 서태평양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모호한 비전을 가지고 회담에 참여했다.

일본은 영국보다 구체적인 내용에 더 집중했으며, 영국 및 미국과 해군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몽골에서 일본의 특별 이익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얻는 것을 두 가지 주요 목표로 회담에 접근했다. 또한 야프, 시베리아, 칭다오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라는 강력한 요구와 태평양에서 미국 함대의 증가하는 존재에 대한 우려도 제기했다.

미국 대표단은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를 필두로 엘리후 루트, 헨리 캐벗 로지, 오스카 언더우드가 참여했으며,[2][3] 언더우드는 상원에서 민주당 소수 지도자였다. 회담의 주요 목표는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섬의 요새화와 관련하여 특히 서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해군 확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부차적인 목표는 일본의 확장에 대한 궁극적인 제한을 확보하고 영국과의 적대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영일 동맹을 폐지하여 영미 간의 긴장을 해소하고, 일본에 유리한 해군 비율에 동의하며, 일본이 중국의 문호 개방 정책을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은 워싱턴 해군 조약의 협상 및 비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9][10]

미국은 일본 정부 대표단에 대한 비밀 지시를 도청 및 해독하여 도쿄가 수용할 수 있는 최저 해군 비율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일본을 압박했다.[4]

3. 1. 군비 축소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여전히 가장 큰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형 선박들은 노후화되었고, 미국과 일본은 빠르게 신형 군함을 건조하고 있었다. 영국과 일본은 1922년에 만료될 예정인 조약에 따른 동맹 관계였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은 세계 평화에 대한 장기적인 위협으로 지적되었다. 영국은 아시아 식민지 이익을 고려하여 도쿄보다 워싱턴과 함께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주요 국가들은 불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잠재적으로 위험한 군비 경쟁을 막기 위해 일련의 해군 군축 협정에 서명했다.[8]

1920년대에는 평화와 군축에 대한 세계적인 열망이 컸다. 많은 국가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했으며, 여성들은 정치인들에게 군비 경쟁을 중단함으로써 돈을 절약하고 표를 얻으며 미래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일조했다.[5] 역사학자 마틴 퓨는 "그들은 1920년대에 서방 세계 전역에서 반전 운동에 대한 여성의 기여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기록했다.[6]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주요 개신교 교파와 눈에 띄는 개신교 대변인들이 국제 평화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들은 지역 교인들에게 평화와 군축의 필요성에 대해 교육하기 위해 협력했다.[7]

찰스 에반스 휴즈 국무장관을 수석 전권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에게 회담의 주요 목적은 서태평양 해역,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들의 방비에 관한 일본 해군의 확대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부수적인 목적에는 일본의 확대를 제한하고, 영국과의 대립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 대신을 수석 전권으로 하는 일본은 해군 군축 조약을 영미와 체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대표단으로의 암호 전보를 미국의 블랙 체임버가 해독하면서 회의는 미국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용인하는 가장 낮은 해군 비율을 알고, 일본을 압박했다.

3. 2. 동아시아 질서 재편

일본은 제정 러시아가 사라지고 대외무역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커져 미국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영일동맹의 표적이던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졌고, 일본이 영일동맹을 구실로 중국에서 침략행위를 한다는 점을 들어 영일동맹 해체를 통해 동아시아 세력 판도에 균형을 회복시키려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팽창에 성공한 대일본제국에 대한 미국의 반발로, 1921년 미국은 군비 제한과 태평양 극동 문제를 협의하는 워싱턴 회의를 개최했다.[22] 영일 동맹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게 러시아 제국독일 제국이 소멸했기 때문에 무용해졌고, 영미 관계에도 좋지 않아 해소되었다.[22] 그 결과, 미국·영국·프랑스·일본 간 4개국 조약이 체결되어 태평양에서의 각국 영토와 권익을 보장하고, 태평양 제도의 비요새화를 규정했다.

회의 시작에서 미국은 주력함(전함) 건조를 10년간 중지하고 주력함 보유 톤수와 국가별 비율을 제안했다.[23] 협의 결과, 미국·영국·프랑스·일본, 이탈리아 왕국주력함 보유율을 미영 5, 일본 3, 프랑스, 이탈리아 1.67로 하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되었다.[22] 일본은 대미영 6할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 참가국들은 9개국 조약을 체결하여 중화민국의 영토 보전, 문호 개방, 새로운 세력 범위 설정을 금지했다.[22] 이시이-랜싱 협정이 파기되고, 일본은 산둥 반환 조약으로 산둥성, 산둥 철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했다.[22] 또한, 산둥 반도와 한커우 주둔 병력도 자발적으로 철수했다.[24]

미국은 일본의 야프 섬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독일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야프 섬의 해저 케이블에 대한 미국의 사용권, 무선 통신국 및 전보국 운영권을 무제한으로 인정받았다.

4. 회담 진행과 내용

워싱턴 회담은 '해군 군비 제한 위원회'와 '태평양과 극동 문제 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여러 조약과 결의가 도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해군 군비 제한에 관한 5개국 조약: 주력함 척수 비율을 영국 5, 미국 5, 일본 3, 프랑스 1.75, 이탈리아 1.75로 정하고, 보조함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았다.
  • 잠수함과 독가스 사용 금지: 잠수함에 국제법을 적용하고 독가스 사용을 금지했다.
  •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 중국의 주권 존중, 안정된 정권 수립, 각국 상공업 기회 균등화, 특권 및 특별이익 배제를 명시했다.
  • 태평양 방면의 섬에 관한 4개국 조약: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간 분쟁 발생 시 상호 협력을 약속하고, 영일동맹을 종료했다.
  • 산둥반도시베리아 문제: 일본은 산둥반도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고, 시베리아에서 철군하기로 했다.


워싱턴 회담은 전 세계적인 평화와 군축 요구를 반영했다.[14] 미국, 영국, 일본 간 해군 군비 경쟁 가능성을 막고, 일본을 강대국으로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다.[15] 세계 평화 재단 등 평화 운동가들은 회담 결과를 지지했다.[13]

4. 1. 해군 군비 제한에 관한 5개국 조약

미국의 제안에 따라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은 주력함 척수의 비율을 영국 5, 미국 5, 일본 3, 프랑스 1.75, 이탈리아 1.75로 정하고, 이 비율을 초과하는 주력함은 기존의 것이든 건조 중인 것이든 모두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25] 일본은 처음에 미국의 70%에 해당하는 비율을 요구했으나, 동북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60% 정도의 주력함으로도 자국의 국익을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 비율을 수용하였다.[25] 이 합의는 주력함에만 적용되었고, 보조함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 영국, 일본은 태평양 섬에 요새나 해군기지를 새로 건설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하기로 합의하였다.[25]

워런 G. 하딩 미국 대통령은 이 합의를 모든 국가가 자국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합의라고 칭송했다.[11] 회담 참가자들은 군함의 품질에 대한 기술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톤수 배수량을 기준으로 한 표준을 채택했는데, 이는 선박의 크기를 나타내는 간단한 척도였다. 10년 기한의 이 협정은 전함의 비율을 미국 525,000톤, 영국 525,000톤, 일본 315,000톤으로, 즉 5:5:3으로 고정했다.[12] 당시 주력 무기였던 전함은 35,000톤을 넘을 수 없었다. 주요 강대국들은 새로 개발된 항공모함에 대해 135,000:135,000:81,000톤을 허용했다.[12]

해군 조약은 1922년 2월 6일에 체결되었다. 조약 비준서는 1923년 8월 17일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으며, 1924년 4월 16일 ''국제 연맹 조약집''에 등록되었다.[16]

일본 정부 대표단은 암호 전보를 미국의 블랙 체임버가 해독하여 회의가 미국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낮은 해군 비율을 파악하여 일본을 압박했다.

4. 2. 잠수함과 독가스 사용 금지

잠수함이 상선을 나포하거나 공격하는 행위에 관한 국제법을 잠수함에도 적용하고, 독가스의 사용을 금지한다.[25]

4. 3.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

미국 대표 엘리후 루트가 제안한 4개 원칙에 입각해 체결된 조약이다. '4개 원칙'이란 미국의 전통적인 대중국 정책을 반영한 다음 4가지다.[25]

# 중국의 주권, 독립, 영토적, 행정적 통합성을 존중하는 것

# 중국에 안정된 정권이 수립되게 하는 것

# 중국에서 각국별 상공업 기회를 균등화하는 것

# 미래에 특권이나 특별이익을 배제하는 것

4. 4. 태평양 방면의 섬에 관한 4개국 조약

이 조약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이 체결한 조약으로, 섬인 속지나 섬인 영지와 관련해 조약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거나 조약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의 위협이 있을 때 조약국이 서로 협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5] 이 조약의 발효와 함께 영일동맹은 종료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25]

영일 동맹러시아 제국독일 제국이 소멸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영미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해소되었다.[22] 그 대신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4개국이 태평양에서의 각국 영토의 권익을 보장하고, 태평양 제도의 비요새화 등을 규정한 4개국 조약이 새롭게 체결되었다.

4. 5. 산둥반도 및 시베리아 문제

워싱턴 회담에서 일본은 산둥반도에서 갖고 있던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고, 시베리아로부터 철군하기로 했다.[11] 중국은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산둥반도에서 차지했던 권익의 대부분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북부 사할린을 제외한 시베리아 전 지역에서 철군하겠다고 약속했다.[11] 1922년 2월 4일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일본은 산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했으며, 이 협정의 비준은 1922년 6월 2일 베이징에서 교환되었고, 1922년 7월 7일 ''국제 연맹 조약집''에 등록되었다.[17][18] 이시이-랜싱 협정은 파기되었고, 일본은 산둥 반환 조약을 통해 산둥성, 산둥 철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하고,[22] 산둥 반도와 한커우의 주둔 병력도 자발적으로 철수했다.[24]

5. 각국의 입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평화와 군축에 대한 국제적인 열망이 높아졌다. 특히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군비 경쟁 중단을 통해 예산을 절약하고 미래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국제 여성 협의회와 국제 여성 참정권 동맹과 같은 국제 여성 단체들은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6] 미국의 개신교 교파들 또한 국제 평화 노력을 지지하며, 평화와 군축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7]

당시 영국은 세계 최대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주력함들은 노후화된 상태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신형 군함을 건조하며 해군력을 빠르게 증강하고 있었다. 영국과 일본은 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 간의 경쟁은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영국은 아시아 식민지 이익을 고려하여 일본보다는 미국과의 협력을 선호했다.[8]

이러한 배경에서 주요 국가들은 군비 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해군 군축 협상을 시작했다.

5. 1. 미국

찰스 에반스 휴즈 국무장관을 수석 대표로, 엘리후 루트, 헨리 캐벗 로지, 오스카 언더우드가 미국 대표단을 구성했다.[2][3] 미국 대표단의 주요 목표는 서태평양에서 일본 해군의 확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부차적인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 영일 동맹 폐지를 통해 영국과 미국의 긴장 해소
  • 일본에 불리하지 않은 해군 비율 합의
  • 일본이 중국의 문호 개방 정책 지속을 공식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것


미국은 일본의 암호 전보를 해독하여[4] 일본이 수용 가능한 최저 해군 비율을 파악하고, 이를 협상에 유리하게 활용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초기 도청 및 암호 해독 노력이 거둔 최초의 성공 중 하나였다. 또한, 미국은 47억달러에 달하는 대영 채권을 보유하여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야프 섬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독일 제국으로부터 획득한 야프 섬의 해저 케이블에 대한 미국의 사용권, 무선 통신국 및 전보국의 운영권을 무제한으로 인정받았다.

5. 2. 영국

영국은 아서 벌푸어 외무장관을 수석 대표로 하여 회담에 참여했으며, 신중하고 절제된 접근 방식을 취했다.[8] 영국 대표단은 서태평양의 평화와 안정 달성, 미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 회피, 일본의 영향력 확대 저지, 싱가포르, 홍콩 등 영국 식민지의 안전 유지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8] 그러나 구체적인 요구 사항 목록보다는 합의 이후 서태평양의 모습에 대한 포괄적인 비전을 가지고 회담에 임했다.

5. 3. 일본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 대신을 수석 전권으로 하는 일본 대표단은 영국 및 미국과 해군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몽골에서 일본의 특별 이익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얻는 것을 두 가지 주요 목표로 회담에 접근했다. 일본 대표단은 또한 남양 제도, 시베리아, 칭다오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라는 강력한 요구와 태평양에서 미국 함대의 증가하는 존재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우려 등 다른 문제도 회담에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대표단으로 보낸 암호 전보를 미국의 블랙 체임버가 곁에서 듣고 해독하여, 회담은 미국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용인하는 가장 낮은 해군 비율을 알고, 이것을 이용하여 일본을 압박했다.[4]

또한, 미국은 일본의 야프 섬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독일 제국으로부터 획득한 야프 섬의 해저 케이블에 대해 미국의 사용권 및 무선 통신국・전보국의 운영권을 무제한으로 인정하게 했다.

6. 의의와 평가

워싱턴 회담과 그 결과로 체결된 조약들은 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 약 10년간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규정한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이 체제는 열강들의 제국주의 외교 파기와 팽창주의 포기, 다국간 협조체제 구축을 목표로 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8] 특히 미국에게 큰 성과를 가져다주었지만, 영국에게는 동아시아 현상 유지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워싱턴 해군 조약으로 새로운 전함 건조가 중단되고 기존 함선도 폐기되거나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주요 해군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중순양함 건조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19]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의 구호 기금을 군함 건조에 사용하기도 했다.[20]

대일본제국은 워싱턴 회의를 통해 군비 제한과 극동 문제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22] 영일 동맹이 해소되고 4개국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주력함 보유율이 제한되었다.[22] 일본은 산둥 반환 조약을 통해 산둥성과 산둥 철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했다.[22][24]

하지만, 워싱턴 체제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성립되었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8]

6. 1. 워싱턴 체제 성립

위와 같은 내용의 조약들로 이른바 '''워싱턴 체제'''가 성립되어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근 10년간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규정했다. 워싱턴 체제의 성립은 열강들이 동아시아에서 과거의 제국주의 외교를 파기하는 한편, 팽창주의를 포기하고 다국간 협조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나라별로 보면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성과였지만, 영국으로서는 '동아시아의 현상유지'를 다짐받는 것에 불과했다.

워싱턴 체제는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인 러시아를 배제하고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결함이 있었다. 러시아는 워싱턴 회담이 소집되기 전부터 이 회담 자체를 비난하면서 이 회담에서 채택될 어떠한 결정에도 구속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러시아는 중국의 여러 정치세력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에 진출했다.

6. 2. 긍정적 평가

워싱턴 체제는 열강들이 동아시아에서 과거의 제국주의 외교를 파기하고, 팽창주의를 포기하며, 다국간 협조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8] 이 체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 약 10년간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를 규정했다.

1920년대는 평화와 군축에 대한 국제적인 열망이 높았던 시기이다. 많은 국가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했고, 이들은 정치인들에게 군비 경쟁 중단을 통해 예산을 절약하고 미래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5] 국제 여성 협의회와 국제 여성 참정권 동맹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들은 전 세계적인 반전 운동에 기여했다.[6] 마틴 퓨 역사학자는 "1920년대 서방 세계 전역에서 여성들이 반전 운동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기록했다.[6] 미국의 주요 개신교 교파와 대변인들은 국제 평화 노력을 지지하며, 지역 교인들에게 평화와 군축의 필요성을 교육했다.[7]

6. 3. 한계

워싱턴 체제는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인 러시아를 배제하고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결함이 있었다.[8] 러시아는 워싱턴 회담이 소집되기 전부터 이 회담 자체를 비난하면서 이 회담에서 채택될 어떠한 결정에도 구속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러시아는 중국의 여러 정치세력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에 진출했다.[8]

또한, 대일본제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주력함 보유율을 미국과 영국 5, 일본 3으로 제한받아 대미영 6할을 수락해야 했다.[22] 이는 일본의 군사적 팽창을 억제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을 열어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7.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 회담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26] 그러나 이 회담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장이었고, 한국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러한 외교적 좌절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서구 열강에 대한 환멸을 안겨주었고,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30]

7.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노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 회담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했다.[26] 1921년 5월 20일, 이승만은 상해에서 미국으로 출발했다.[26] 임시정부는 대표단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외교 경비를 지원했다.[26] 조병옥, 허정 등 유학생들도 대표단을 도왔다.[26]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한인 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28][29]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워싱턴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하겠다고 밝혔다.[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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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단의 공식 참석을 위해 노력했다.[26]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기자 J. 제롬 윌리암스의 도움으로 기자 회견을 열어 한국의 독립 투쟁을 알렸다.[26] 그러나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26]

이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요청했고, 1921년 9월 29일 다음과 같은 신임장을 받았다.[26]

이승만은 이 신임장을 미 국무장관 허그스와 군축 회의 사무국에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의 정식 참석을 요청했으나, 회답을 얻지 못했다.[26] 한국 대표부는 옵서버로라도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6] 다만, 프레드 A.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 논설이 1921년 12월 1일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었다.[30]

1921년 초, 태평양 해군 군축 회담서 한국의 입장을 교섭하기 위해 워싱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 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7. 2. 외교적 노력의 좌절

1921년 초, 태평양 해군 군축 회담에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였다.[26] 1921년 5월 20일 이승만은 상해에서 출발하여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했다.[26] 임시정부는 대표단의 활동을 지원했고,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조병옥, 허정 등 유학생들이 도움을 주었다.[26]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한인 대표단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28][29] 이승만은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하며,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방해받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28][29]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단의 공식 참석을 위해 노력했다.[26]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기자 J. 제롬 윌리암스의 도움으로 기자 회견을 열어 한국의 투쟁사를 알리고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26] 그러나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26] 이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요청하여 1921년 9월 29일 신임장을 받았다.[26] 신임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5일, 정식으로 전 각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음을 이에 밝히는 바이다. 즉,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군비 축소회의에 전권을 가질 한국 대표단을 다음과 같이 선정 임명한다.

>

> '''전권대사 이승만, 전권부사 서재필, 비서관 정한경, 고문관 프레드 A. 돌프'''

>

> 전권 대사에게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며 대표 1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대표단의 전 인원은 5명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본 군축 회의에 한국 문제에 관한 주장을 제의할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군축 회의에서 제기되는 모든 협정, 의정서, 조약 일체에 대한 협정 및 체결을 권한을 부여하는 바이다.[26]

이승만은 이 신임장을 미 국무장관 허그스와 군축 회의 사무국에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의 정식 참석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회답을 얻지 못했다.[26]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라도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법률 고문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 논설이 1921년 12월 1일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 얻었다.[30] 제국주의 열강 간의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었기에 식민지독립 요구는 묵살되었다.[30]

이승만은 회의가 끝난 후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탈취할 수 있는대로 탈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통용될 때, 강대국은 이해가 상반되는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정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 결과가 전쟁을 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오직 이러한 현실에서 외면당한 약소 국민만이 그들의 정당한 주장조차 펴지 못하고 주권을 유린당하게 되는 것이다.[30]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게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고,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

7. 3.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1921년 워싱턴 회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회담에 대한 기대와 달리 한국의 독립 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는 독립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3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담 소식을 듣고 '대태평양회의 외교 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며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했다.[26] 이승만은 1921년 5월 20일, 상해에서 미국으로 출발하여[26] 1921년 8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기자회견을 통해 워싱턴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28][29]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한국 대표단의 공식 참석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26] 결국 한국 대표단은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하지 못했고, 법률 고문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 논설이 1921년 12월 1일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데 그쳤다.[30]

이승만은 회담 이후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며 약소국의 주권 유린 문제를 지적했다.[30]

워싱턴 회담의 결과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만들었다. 이후 독립운동은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운동 확산과 맞물려 좌익과 우익으로 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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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문서 그러나 열강이 이미 중국으로부터 얻은 기득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고, 또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 발생할 경우의 제재수단에 대한 규정도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이 조약에서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다만 이 조약의 성립으로 그동안 미국과 일본 사이에 해석상 의견차이가 있었던 랜싱-이시이 각서는 1923년 4월에 폐지되었다.
[26] 서적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27] 뉴스 파테 뉴스(Pathe News)와 주간 국제뉴스(International News Weekly)가 금문교 공원에서 촬영하였다.
[28] 서적 Log Book : 이승만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9] 뉴스 『Oakland Tribune』, 1921년 8월 17일자 기사 1921-08-17
[30] 서적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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