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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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앙종은 중국 선종의 한 종파로, 위산영우와 앙산혜적 두 선승에 의해 창시되었다. 선종의 오가칠종 중 가장 먼저 성립되었으며, 위산영우가 위산에서, 앙산혜적이 앙산에서 독자적인 선을 펼친 데서 유래하여 두 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위앙종은 오대 십국 시대에 교세를 확장했으나, 송나라 시대에 임제종에 흡수되었다. 가풍은 온화하고 자상하며, 일원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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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앙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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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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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표기 | 潙仰宗 |
간체자 표기 | 沩仰宗 |
병음 | Guīyǎng Zōng |
한국어 | 위앙종 |
영어 | Guiyang school |
개요 | |
종파 | 선종 |
창시자 | 위산 영우 앙산 혜적 |
창립 시기 | 당나라 |
중심 사찰 | 위산 |
주요 경전 | 능가경 반야경 유마경 |
사상적 특징 | 선의 실천적 방법 강조, 오위설 |
역사 | |
창종 | 위산 영우와 앙산 혜적에 의해 창종 |
발전 | 당나라 시대에 번성 |
쇠퇴 | 송나라 시대 이후 쇠퇴 |
특징 | |
교학 특징 | 오위설을 통해 선의 단계를 설명 이론과 실천의 조화 |
수행 방법 | 좌선 참선 염불 |
문화적 영향 | 한국 불교의 선종에 영향 |
2. 역사
위앙종의 역사는 크게 성립, 발전과 쇠퇴, 현대로 이어진다.
시기 | 내용 |
---|---|
성립 | 남종선의 회양 계통 백장회해가 청규를 만들고, 임제의현의 임제종과 함께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을 시조로 하는 위앙종이 성립되었다. |
발전과 쇠퇴 | 오대 십국 시대에 형남과 남당에서 교세를 펼쳤으나, 송나라 때 임제종에 흡수되었다. |
현대 | 허운이 위앙종 부흥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
2. 1. 성립
남종선의 회양(677~744) 계통에서 백장회해(749~814[4])가 선원에서의 집단생활 규범인 청규(淸規)를 만들었는데, 후대에 《백장청규(百丈淸規)》라고 불렸다. 이 계통에서 임제의현(?~867[5])을 시조로 하는 임제종(臨濟宗)과 위산영우(771~853)와 앙산혜적(815~891) 두 선승을 시조로 하는 위앙종(潙仰宗)이 성립했다.[2]위앙종은 선종의 오가칠종 중 가장 먼저 설립된 종파였다.[2] 위산영우와 그의 제자 앙산혜적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위산영우는 백장 회해의 제자였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황벽 희운이 있었고, 황벽 희운은 다시 임제 의현을 가르쳤는데, 임제 의현은 임제종의 창시자였다.[3]
당 초기에 선종이 성립한 후, 신수 계통의 북종선과 혜능 계통의 남종선으로 분파되었다. 위앙종의 법계는 남종선을 이으며,
혜능 - 남악회양 - 마조도일 - 백장회해
와 같은 계통으로 이어진다. 백장회해의 법사(法嗣)가 된 위산령우가 원화 원년(806년)에 '''위산'''(호남성 장사시 영향시 위산향)에서 독자적인 선을 제창했다. 혜적이 '''앙산'''(강서성 의춘시 원주구)에 거주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확립했으므로, 두 사람이 거주한 산 이름을 따서 위앙종이라고 칭한다.
오대 십국 시대에는 형남과 남당에서 교세를 전개했다. 앙산혜적의 법사인 남탑광용(850년 - 938년)과 서탑광목, 광용을 이은 파초혜청, 광목의 문하생인 자복여보 등이 알려져 있다.
2. 2. 발전과 쇠퇴
남종선의 회양(懷讓: 677~744) 계통에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4])가 선원에서 집단생활 규범인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었다. 이 계통에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5])을 시조로 하는 임제종(臨濟宗)과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와 앙산혜적(仰山慧寂: 815~891)의 두 선승을 시조로 하는 위앙종(潙仰宗)이 성립했다.[2]위산영우의 제자인 앙산혜적이 위앙종을 만들었는데, 위앙종이라는 이름은 스승이 붙였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의 이름도 같이 넣은 것이다. 위앙종은 선종의 오가칠종 중 가장 먼저 설립된 종파였다. 구이산은 백장 회해의 제자였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황벽 희운이 있었고, 황벽 희운은 다시 임제 의현을 가르쳤는데, 임제 의현은 임제종의 창시자였다.[3] 귀양종을 창시한 후, 양산은 그의 종파를 현재의 장시성으로 옮겼다.
오대 십국 시대에는, 형남과 남당에서 교세를 전개했다. 혜적의 법사인 남탑광용(850년 - 938년)과, 서탑광목, 광용을 이은 파초혜청, 더욱이 광목의 문하생인 자복여보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대 십국의 말 무렵에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종풍은 "방원묵계"라고 칭하며, 『법안십규론』에서는 "계곡의 울림에 응하는 것과 같고, 관문의 부호를 맞추는 것과 같다. 규범을 차별한다 할지라도, 융회를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오가종지찬요』에서는 "위앙의 종풍은 부자 일가, 사자창화하며, (중략) 체용을 나타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그 종풍에는 묵조선이라고 칭해지는 조동종과 유사한 점도 보이지만,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종풍이 도리어 재앙이 되어, 같은 계열의 임제종이 융성함에 따라 쇠퇴해 갔으며, 송나라에 이르러 마침내 흡수 동화되어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송나라(960–1279) 시대 동안, 위앙종은 법안종 및 운문종과 함께 임제종에 흡수되었다.[2] 허운은 이렇게 흡수된 종파들을 부활시키려 시도했고, 위앙종의 경우 성공했다.
2. 3. 현대의 부흥
선종의 오가칠종 중 가장 먼저 설립된 종파는 귀양종이었다.[2] 귀양종은 구이산 링유(771–854) 선사와 그의 제자인 양산 후이지(813–890)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구이산은 백장 회해의 제자였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황벽 희운이 있었고, 황벽 희운은 다시 임제 의현을 가르쳤는데, 임제 의현은 임제종의 창시자였다.[3] 귀양종을 창시한 후, 양산은 그의 종파를 현재의 장시성으로 옮겼다.
귀양종은 종파의 공안과 기타 가르침에서 난해한 은유와 이미지를 사용하는 등 여러 면에서 다른 종파들과 구별된다.[2]
송나라(960–1279) 시대 동안, 위앙종은 법안종 및 운문종과 함께 임제종에 흡수되었다. 허운은 이렇게 흡수된 종파들을 부활시키려 시도했고, 위앙종의 경우 성공했다.
3. 가풍
임제종과 운문종이 날카롭고 절박한 면이 있다면, 조동종은 주도면밀하고, 법안종은 활달한 기질을 보인다. 반면 위앙종은 스승이 어린 제자를 가르치듯 온후하고 자상한 가풍을 지녔다.[6] 앙산은 위산에서 15년간 공부하고 인가를 받았는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부자(父子)처럼 친밀했다.
위앙종의 종풍은 "방원묵계"라고 불리며, 『법안십규론』에서는 "계곡의 울림에 응하는 것과 같고, 관문의 부호를 맞추는 것과 같다. 규범을 차별한다 할지라도, 융회를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오가종지찬요』에서는 "위앙의 종풍은 부자 일가, 사자창화하며, (중략) 체용을 나타낸다"라고 묘사한다.
위앙종의 종풍은 묵조선이라 불리는 조동종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풍은 오히려 약점이 되어, 같은 계열인 임제종이 융성하면서 쇠퇴하였고, 송나라에 이르러 결국 흡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4. 일원상
위앙종에서 일원상은 중요한 상징이다. 앙산스님은 학인들에게 설법할 때 원 모양을 그리거나 글자를 써서 가르침을 전했다.
전 세계 불교계에서 일원상을 도형으로 처음 그린 것은 육조혜능의 제자인 남양혜충 국사이다. 그는 원상 97개를 그려 제자 탐원에게 주었고, 탐원은 다시 앙산에게 전했다. 앙산은 이를 위앙종의 종지로 삼고, 일원상 안에 여러 글이나 상징물을 그려 넣기도 했다.[7]
참선 중 일원상을 보는 것은 혜해탈에 해당한다. 정혜쌍수에서 혜, 지관수행에서 관이 혜해탈이다. 혜해탈 후 누진통을 얻어 번뇌가 소멸하고 적멸락을 느끼는 심해탈을 경험하면 양분해탈을 얻은 것이다.[7] 일원상을 보는 것이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견해와 누진통을 얻어야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견해가 있다.
육조혜능은 "혜와 정은 다르지 않다"고 가르쳤다. 즉, 정을 먼저 닦아 혜를 내거나 혜를 먼저 닦아 정을 내는 것이 아니라, 혜와 정은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진통에 이르지 않아도 일원상을 보는 혜해탈이 곧 무상정등정각이며, 누진통을 얻었지만 일원상을 보지 못하는 심해탈도 무상정등정각이다. 둘을 모두 갖춘 양분해탈은 당연히 무상정등정각이다. 육조혜능은 "깨치면 곧 지혜를 이룬다"고 하며, 심해탈을 먼저 이루고 혜해탈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4. 1. 일원상의 기원
전세계 불교계에서 일원상이 처음으로 도형으로 그려서 전한 것은 육조혜능의 문하인 남양혜충 국사에 이르러서다. 원상 97개를 그려 그의 제자 탐원에게 주고, 탐원이 앙산에게, 앙산은 위앙종의 종지로 삼았다.[7] 앙산스님은 학인들에게 설법할 때 원상(圓狀) 하나를 그려보이거나 글자를 써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도 앙산은 일원상을 그려놓고 그 속에 여러 가지 글이나 상징물을 그려넣는 습관이 있었다.참선하는 도중에 일원상을 보게 되는 경지는 심해탈, 혜해탈, 양분해탈 중에서 혜해탈에 해당한다. 정혜쌍수에서 혜, 지관수행에서 관이 혜해탈이다. 일원상을 보아 혜해탈을 한 후에, 누진통을 얻어 번뇌가 모두 소멸하여 적멸락을 느끼는 심해탈을 경험하면, 두 해탈을 모두 얻었다고 하여 양분해탈을 얻었다고 한다.[7] 일원상을 보면 그것이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견해가 있고, 누진통을 얻어야만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견해가 있다.
육조혜능은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누진통에 이르지 않아도, 일원상을 보는 혜해탈이 곧바로 무상정등정각이다. 반면에 누진통에 이르렀지만 일원상을 보지 못하는 심해탈이 곧바로 무상정등정각이다. 물론 둘 다 갖춘 양분해탈은 당연히 무상정등정각이다. 육조혜능은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룬다"고 하여, 자신이 심해탈을 먼저 이루고 나서 혜해탈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4. 2. 일원상과 깨달음
앙산스님은 학인들에게 설법할 때 원상(圓狀) 하나를 그려 보이거나 글자를 써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전 세계 불교계에서 일원상이 처음으로 도형으로 그려서 전한 것은 육조혜능의 문하인 남양혜충 국사에 이르러서다. 원상 97개를 그려 그의 제자 탐원에게 주고, 탐원이 앙산에게, 앙산은 위앙종의 종지로 삼았다. 평소에도 앙산은 일원상을 그려놓고 그 속에 여러 가지 글이나 상징물을 그려 넣는 습관이 있었다.
참선하는 도중에 일원상을 보게 되는 경지는 심해탈, 혜해탈, 양분해탈 중에서 혜해탈에 해당한다. 정혜쌍수에서 혜, 지관수행에서 관이 혜해탈이다. 일원상을 보아 혜해탈을 한 후에, 누진통을 얻어 번뇌가 모두 소멸하여 적멸락을 느끼는 심해탈을 경험하면, 두 해탈을 모두 얻었다고 하여 양분해탈을 얻었다고 한다.[7] 일원상을 보면 그것이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견해가 있고, 누진통을 얻어야만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견해가 있다.
육조혜능은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누진통에 이르지 않아도, 일원상을 보는 혜해탈이 곧바로 무상정등정각이다. 반면에 누진통에 이르렀지만 일원상을 보지 못하는 심해탈이 곧바로 무상정등정각이다. 물론 둘 다 갖춘 양분해탈은 당연히 무상정등정각이다. 육조혜능은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룬다"고 하여, 자신이 심해탈을 먼저 이루고 나서 혜해탈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Infinite Compassion, Endless Wisdom: The Practice of the Bodhisattva Path
https://books.google[...]
Buddha's Light Publishing
2012-08-09
[2]
서적
Zen's Chinese Heritage: The Masters and Their Teachings
Wisdom Publications
[3]
간행물
Buddhism in the Modern World
Stanford University
2006-05-25
[4]
백과사전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선종의 발달 > 백장
[5]
백과사전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성전 > 임제록
[6]
뉴스
선사들의 선문답-위산영우와 앙산혜적선사
불교신문
1998-09-22
[7]
논문
초기불교의 해탈(解脫)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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